20220717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절 후 제6주)
우리 안에 있는 비밀
암8:11~12; 골1:15~28; 눅10:38~42
여러분, 무더운 여름을 지나고 있는데, 지난 한 주간 어떻게 지내셨나요? 빠듯한 스케줄에 따라 틀에 박힌 시간을 보냈다고 하실 분들도 있고, 짜여진 스케줄은 없지만, 식구들 식사나 아이 양육처럼,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로 녹초가 되었다고 하실 분들도 있고, 갑작스런 일을 당해 정신없이 보냈을 분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시간은 있었지만, 이런 저런 염려와 걱정으로 시간을 축내고 있다고 느낀 분들도 있고, 자신의 시간과 스케줄을 “관리 감독하느라”, 혹은 삶을 “관리 감독하느라” 매사에 긴장하며 지낸 분들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어쨌든 우리는 이런 저런 모양으로 각자의 삶을 살아내느라 애를 쓰고 있습니다.
영국과 미국에서 관상기도 피정을 지도하는 마틴 레어드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관상기도를 소개하는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 보았습니다. 자기는 산책을 좋아해서 들판을 향해 난 길을 걷곤 했다는 거예요. 그때 사냥개 네 마리와 함께 산책하는 남자를 자주 만났답니다. 그 사냥개들이 얼마나 멋졌는지, 펄쩍펄쩍 뛸 정도로 활력이 넘치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발달된 근육이 보일 정도로 들판을 내달리는 것을 보기만 해도 힘이 솟을 정도였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마리가 문제였습니다. 이 놈은 다른 세 마리와는 달리, 주인 근처에서 빙빙 돌기만 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그 개는 왜 다른 개들처럼 달리지 않고 빙빙 돌기만 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 개가 입양되기 전에 개집에 갇혀 살며 그 안에서 그렇게 돌기만 했기 때문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갇혀 있던 그 개에게, 달린다는 것은 빙빙 도는 것을 의미할 뿐이어서, 다른 개들은 들판을 힘차게 달릴 때에도 원을 그리며 돌기만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마틴 레어드는 그 개가 빙빙 돌던 모습이 인간의 조건을 암시하는 강렬한 이미지로 자기에게 남았다고 말했습니다. 시편124편이 “새가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남 같이 우리는 풀려났다” 노래하듯이,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인데, 올무의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어, 은혜와 자유의 넓은 들판에 있으면서도 좁고 작은 원을 그리며 빙빙 돌고만 있는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거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교 전례와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은 소위 예수믿고 천당가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이나 저나 다 공감합니다. 우리의 참된 구원과 은총은 죽어서 저 먼 하늘나라에 가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새가 사냥꾼의 그물에서 벗어남같이 우리는 목숨을 건졌다. 그물은 찢어지고, 우리는 풀려났다”(시124:7) 소리칠 수 있는 그런 경지입니다. 그런 하나님 나라, 즉 “그물은 찢어지고 우리는 풀려난” 그 경지를 어떻게 우리가 우리 삶 가운데서 누리고 살 것인지, 그리고 우리 삶에서 확장하여 온 세상으로 넓혀 갈 것인지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그리스도인의 권리이자 책임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되기 위해서 예수 믿고 세례를 받은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무엇을 깨닫고 알아차려야 할까요?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어떻게 사는(존재하는) 존재여야 할까요?
그것은 우리 안에 심오한 “내적 고요”,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침범할 수 없고 어떤 무엇도 해할 수 없는 “내적 지성소”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미 허락하여 주셨다는 것을 깨닫는 데서부터, 아니 발견하고 그것을 사는 데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깨닫고, 그것이 오늘 복음서에서 마리아가 차지한 “좋은 몫”이고, “꼭 필요한 한 가지”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면, 우리에게는 엄청난 생의 전환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사셨던 삶이고, 우리에게 같이 살자고 초대하신 세계입니다.
그렇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이런 저런 모양으로 각자의 삶을 살아내느라 애쓰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책에서, 마틴 레어드는 자기기 만난 무용수 얘기를 이렇게 해줍니다.
그 여자는 무대 위를 비단결처럼 부드럽게 움직이면서 다른 무용수들과 함께 폭풍 같은 군무를 추고 있었습니다. 세계 정상급의 이 발레리나를 보고 있노라면 인간 형태로 나타난 빛과 은총을 보는 것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과 영감의 원천에 대한 물음에, 불신으로 상처 받은 공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곤 했을 뿐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내적 상태를, 쉬지 않고 돌아가는 마음의 비디오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상태라고 묘사했습니다.
그 여자의 머릿속에서 계속 돌아간다는 비디오란, 발레뿐 아니라 삶의 모든 면에서 평균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열등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열등감은 수많은 비디오들이 돌아가게 했으며, 그럴 때마다 여자는 분노에 휩싸였습니다. 몸도 분노의 영향을 받아 그녀는 자주 어금니를 꽉 다문 채 경직된 표정을 지었으며 깡마른 몸매에 집착했습니다. 사실 분노보다 더 깊은 것은 두려움이었는데, 어느날 잠에서 깼을 때 남편이 떠났을지도 모른다는 무려움, 그렇게 외톨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고통과 관련된 비디오도 수없이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녀를 가장 무기력하게 만든 고통은 여렸을 때 입은 상처였습니다. 어느 날 방에 들어온 어머니가 거울을 보고 있던 어린 그녀에게 다짜고짜 했던 말입니다. “넌 네가 예쁘다고 착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실제로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고, 소녀 때도 젊었을 때도 어른이 되어서도 아름다웠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아름다움을 우습게 생각했고 자기가 못생겼다고 믿었습니다. 십 대 시절, 아무나 받지 못하는 발레 장학금을 받았을 때도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처럼 춤을 못추는 애한데 왜 그런 걸 줬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온 세상이 갈채를 보낼 만큼 춤을 잘 추었음에도 그녀 머릿속에서는 자기가 형편없다는 비디오가 계속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비디오를 보지 않으려, 반복 재생 스위치를 누르지 않으려 해도, 그녀의 마음속에서 비디오는 쉬지 않고 돌아갔습니다. 비디오는 그녀를 좁은 원 안에서 빙빙 돌게 하는 감옥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익히 아는 이야기 아닙니까?, 사실 너무 흔한 비디오이지요. 요즘 심리학이 이런 사람들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마틴 레어드가 여기서 얘기하려는 것은 좀 더 심오한 이야기입니다. 이 무용수는 어느 날 요크셔 황무지를 산책하다가 갑자기 어떤 성스러운 현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 경험은 단 한번 있었는데, 이 경험이 생의 전환점이 되어 그녀를 관상기도의 여정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녀는 자신 안에 고통과 불안보다 심오한 무언가가 있으며, 마음의 혼란이 고요해지고 나면 고통스러운 감정은 성스러운 현존감으로 바뀐다는 것을 경험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 안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고요한 지점, “거룩한 지성소”가 있다는 것을 경험한 것이지요. 우리도 발견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배의 부름과 공동기도에서,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우리는 하나님과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은 저 밖에 있는 대상처럼 우리에게 있고 없고 하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존재의 바탕이며, 모든 만물의 근원이며 하나님은 모든 것 안에 현존하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아마도 살림교회에 다닌 분들은 많이 들어왔을 것이고, 오늘도 또 그 소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실상을, 이 실재를, 이 reality를 진정 알고 있을까요?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과의 친밀감은커녕, 하나님과 어떻게 만나는지도 모릅니다. 그저 가끔 기도시간이나 예배 시간이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 경험은 진짜 보잘 것이 없습니다. 지속할 이유가 없지요! 대신 평소 우리는 수많은 세상의 일들과 염려와 계획들로 머리는 꽉 차 있습니다. 이런 삶을 가지고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과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느니, 하나님은 우리 존재의 바탕이며 모든 만물의 근원이라고, 모든 것 안에 하나님이 현존하신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더구나 우리 안에 “내적 고요”나 “거룩한 지성소”는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정말 마음에 새기고 갈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현존 안에 거한다는 것은 진정 우리 존재의 필수적인 조건이고, 하나님은 나의 존재의 근원이시며, 내가 살아 생존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내 존재의 근저, 바탕(Ground)이라는 의미를 새기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마치 우리 인간과 같은 대상처럼 여기는 무의식적 경향이 있습니다. 어릴 때 상상하던 슈퍼맨 같은 하나님을 여전히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처럼 같이 있다가 헤어지고, 또 다시 어디서 만나고 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오늘 오후에 친구 집에 가서 차를 마셔야지” 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별도의 시간과 장소를 내서 만나야 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우리는 하나님과 떨어질 없으며,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는” 바탕이시라는 겁니다.
저는 앞에서 우리 안에 있는 “내적 고요”와 “거룩한 지성소”를 말씀드렸는데, 내적 고요와 거룩한 지성소는 우리의 바탕이며 원천이신 그분을 발견하는 우리 내면의 환경 혹은 분위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내적 고요와 거룩한 지성소인 침묵의 심연으로 들어가 우리의 바탕이며 원천이신 그분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아차린다”는 말은 그저 사전적으로 깨닫고 자각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머리로 아는 것이나 감각으로 지각하는 것을 넘어서,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원인도 갖지 않고 변하지도 않는”, 충만한 심연, 바닥모를 깊음, 바닥없는 바탕으로서의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강에 떠다니는 배들을 아는 것이 아니라, 강 자체를 인식하는 것이요, 스크린 위에 띄어진 영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 자체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머리에 떠다니는 생각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을 떠 있게 하는 여러분의 의식 자체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감각과 기억과 상상 너머에 계시는 분이면서, 우리를 있게 한 그 바탕이 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그분의 성스러운 현존 속에 살고 있다는 믿음은, 우리의 모든 삶은 그분 안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알고, 우리가 하나님의 신성한 현존임을 알 때, 우리는 그분을 어떻게 찬양하고 어떻게 예배하며, 우리의 삶은 어떻게 살아질까, 우리는 그것을 알게 됩니다.
토마스 머튼은 돌아가시기 딱 1년 전에 어떤 관상수녀들의 모임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는 내주하시는 분을 향해 기도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객체가 아니십니다....하나님은 주체이시며, 보다 깊은 ‘나’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주체성의 근저(바탕)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당신 자신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머튼이 보기에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과 가깝습니까?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대로 우리 자신보다 더 가깝지 않습니까? 이렇게 깊은 수준에서 하나님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행동하는 수준이 아니라(뭔가를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존재하는 수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시간보다(행동하는 수준) 하나님을 “알아차리는”(존재하는) 시간에 더 마음을 써야 합니다.
오늘 누가복음에 나오는 본문은 마르다와 마리아 두 자매가 예수님을 집에 모셔 놓고 예수님을 대접하는 두 가지 다른 태도를 보여주는 본문이지요. 언니인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한다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동생인 마리아는 예수님 곁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우리 관상수련이나 영성수련에서 자주 인용되는 본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마르다는 예수님을 모셔놓고 아주 분주합니다. 오늘 본문에 “마르다는 여러 가지 접대하는 일로 분주하였다”(40절)고 했습니다. 그 결과는 우리가 너무나 잘 하는 것입니다. 곧바로 불평이 나오지요.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마르다는 예수님 일행을 순수하게 잘 대접하고 싶었겠지요. 뭔가 특별한 요리를 하고 싶었고, 좀 더 정성을 들이고 싶었고, 특별한 환대를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녀의 마음은 많은 일로 조급해지고, 복잡해지고, 염려가 생기고, 들떠 있게 되었습니다. 딱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많은 일로 염려하며 분산되어 있다”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염려하며 분산되어 있다”는 말은 얼마나 우리를 잘 묘사한 말인가요? 염려의 두드러진 특징이 우리 삶을 조각조작 분산시킨다는 겁니다. 수없는 염려와 불안, 그로 인해 마음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오롯이 있지 않고, 수없이 분산되어,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지금 여기에 현존해 있지 못하고, 정주해 있지 못하고, 중심을 잡고 있지 못합니다. 염려는 우리를 모든 곳에 다 가게 하지만, 진정 있어야 할 곳, 나의 집, 나의 중심에는 가지 못하게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분주하게 살지 말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염려 투성이의 생활방식에 대해서 세상 일로 그렇게 바빠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 바쁘고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살되, 그 모든 것의 바탕이신 하나님께로 알아차림을 옮기는 삶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너희 안에 내적 고요와 거룩한 지성소를 먼저 발견하라고 하십니다.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그러면서 마리의 “좋은 몫”을 말합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 마리아를 보며 예수님은 좋은 몫을 택하였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말로 하면, 세상의 모든 만물의 바탕을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와 분리되지 않는, 모든 것의 바탕이신 하나님을 알아차리기 위해, 그러라고 우리 안에 이미 이루어 놓으신 그 내적 고요와 거룩한 지성소로 중심을 모았던 것입니다.
수많은 일들로 인해 염려하며 들떠 있는 우리는 모든 만물 속에서 이 영적인 깊이를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러니 자꾸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별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 의존해 있음을 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한 것은 바로, “우리의 복잡한 삶 속에서 한 곳으로 초점을 모으겠습니다. 아버지가 우리의 중심임을 압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심임을 압니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오늘 저는 관상적 삶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안의 내적 고요와 거룩한 지성소를 발견하기까지 우리는 많은 시간을 지나야 할 것이고, 우리는 많은 걸음을 옮겨야 할 것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드린 마틴 레어드는 그의 책을 첫 마디를 이렇게 썼더군요. “우리는 관상을 위해 태어났다.”
오늘 마리아처럼 주님 발 곁에서 주님의 말씀, 즉 우리 존재의 바탕에, 그것을 알아차리게 하는 우리의 거룩한 지성소, 내적 고요를 말없이 바라보고 그 안에 머물러 봅시다. 오늘 테오리아에 올린 글처럼, “내가 너를 창조한 너의 하나님이 아니냐?”라는 고요한 물음이 우리 속에서 울릴 때, “네 그렇습니다” 대답하는 나의 대답에 머물러 봅시다. 이때 내 안의 질문과 내 대답은 말로 듣고 말하는 질문과 대답은 아니고, 우리가 존재하는 것 자체로 대답하고 말하는 예리한 알아차림이 됩니다.
여러분, 이번 한 주간 내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알아차려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의 기운이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으며 그 사랑의 바다 위에 여러분이 살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실수와 결점과 잘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여러분의 모습과는 상관없이 여러분은 하나님의 현존 안에 거하고 있음을 상상하십시오. 심지어 토마스 머튼처럼, “하나님은 주체이시며, 보다 깊은 ‘나’이십니다.” 고백하고, “하나님을 또 다른 나 자신, 더 진짜이고 더 깊은 나 자신으로 사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이제 본격적으로 무더운 여름을 지내야 합니다.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 봅시다.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얼마나 분주하게 움직이고, 지치고 불평하고 비난하는지도 비교하는지 살펴봅시다. 우리의 마음을 한번 가만히 들여다봅시다. 얼마나 멍키 마인드처럼 어수선한지 살펴봅시다. 그리고 더운 여름에 우리 안에 있는 내적 고요와 거룩한 지성소를 향하여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가 봅시다. 그리고 그 내적 고요와 거룩한 지성소에서 우리의 삶을 다시 바라봅시다. 그래서 사도바울처럼, “우리에게 나타난 비밀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십니다” 고백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