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문수/조정인-
허리께에 닿는 낮은 대문, 집둘레는 빨강 노랑 자잘한 꽃들로 가꾸어져 있다 떠오르다 가라앉곤 하는 섬 하나, 심하게
다리 저는 남자가 그리로 가더니 한참을 구겨앉는다 고개를 꺾고 꽃을 들여다보는 어깨 위로 투명한 얼룩 같은 햇살이 어
룽진다 나는 남자가 일어서 멀어질 때까지 먼발치에 기다린다 그 자리로 가 앉아볼 요량인데 망설이다 그만둔다 그의 슬
픔은 문수(文數)가 커서 내게는 아무래도 헐렁할 것 같다 한 꽃나무가 한 꽃나무를 위해 그러는 것처럼* 나는 참 이상하
게 절뚝이며 길을 재촉해갔다
*이상 「꽃나무」에서.
-슬픔의 횡포/정숙자-
순환선의 하역
여러 번 봤다
그럼에도 익숙지 않다
(시계만이 싱싱하군)
실시간 밖에 잠복했던 생각들이
내 좌초를 구경한다
생각들을 밀어내지 못하는 생각이 바닥으로 -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다. 본인의 상황임에도 큭! 결코 흥미롭지 않다. 젖는다 젖었다 완전히
완전히완전히 갇혀버렸다. 이제 날개는 고사하고 지느러미나마 구걸해
야 될 판이다. 방향을 가리던 촉수는 창공에서 해체 중.
생각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만이 지속된다. 빛이 개입하려다 이내 사
라진다.
광고지에서 괜찮은 그림을 오려낸다. 그림과 이면지를 덧붙이거나 자
르거나 반듯반듯 손질한다. 벌써 96매 째. (사이즈 25cm×9.5cm) 100매
가 쌓이면 스프링을 꿰어 공책으로 탄생시킬 것이다. 이 치밀, 이 근검,
이 부질없음의 배경은
발길 무너지는 언덕
침묵 살아나는 소요
실핏줄 뜯기는 적막
지느러미 싹틔우려면…
물굽이 거스르려면…
여명에 닿으려면…
다시 구석기시대를 건너야겠지. 돌칼을 만들고, 구름 너머로 화살촉
을 먹이고 21세기 말까지 헤엄쳐 올라야겠지. 신생의 눈과 어깨가 열리
기까지 재생노트 몇 권이 더 만들어지겠지. 내가 거꾸러지는 현장은 내
가 구슬려야 할 전설의 척추….
주검마저 놓치는 마지막까지 매순간순간 반전을 구매, 외상은 없는
직거래.
-뜨거운 슬픔/최서진-
목덜미까지 추위가 치밀어 오른 저녁이야. 이런 날에는 뜨거운 기억이 문처럼 열
려. 아망구를 귀밑까지 끌어내린 아버지가 대문 앞에 들어서면 우리는 맨발로 뛰어
나가지. 아버지의 손에는 물잠뱅이 한 마리 흔들리고 있어. 그때부터 난 흔들리는
것이 좋아,
엄마는 묵은 김치를 듬성듬성 잘라 넣고 냄비 속에 물잠뱅이를 안치지. 그리고 곤
로의 검은 심지에 성냥불을 긋지. 물잠뱅이의 풀린 눈 속에서 배고픈 새끼들을 줄
줄이 달고 팽팽한 낚시 줄에 하루 종일 매달렸을 아버지의 눈을 엿보지. 비린내마
저 풀어버린 물고기, 뜨거운 것들을 담고 있는 삶은 명치끝이 아파,
김이 모락모락 나는 냄비를 둥근 밥상의 가운데 차려놓고 신전에 둘러앉은 무녀
들처럼 우리는 경건하게 물잠뱅이 국을 퍼먹지. 수저들이 얽키고 설켜도 국물 한 방
울 흘리지도 않고 자기 안에 뜨거운 것을 꾸역꾸역 삼키지.
뜨거운 것은 흔들려, 이렇게 추운 날에는 더 흔들려. 흔들리며 가다보면 뜨거운 아
버지를 만날 수 있겠지, 내 눈물이 삼킨 아버지,
-슬픔에 관한 짧은 리뷰/이채민-
피가 그을리고 쪼그라진 심장에 물집이 생겼다 혈관을 뛰어다니던 피들도 조용히 제자리걸음이다 수많은 전쟁에도 끄
떡없던 내 안의 교회와 성당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누구의 뼈가 부러졌는지 바람도 나도 많이 흔들거렸다
생의 중심에 고여 있던
너를 비워내는 일이
나무와
돌과
새들이
우는 일과 같다는 것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으므로
-슬픔을 사육하다/고성만-
눈코입 오목조목한 여자를 얻어
재우고 입히고 먹이고 학교 보내고 싶어
그 여자 결혼하여
그 여자 닮은 딸 낳으면
저녁 문간에 걸어둔
가녀린 등불 하나
왜 가끔 심청 생각이 나나 몰라
젖동냥 길러주신 아비께 눈물 밥 지어 올리고
상머리에 앉아 이것은 밥이요
이것은 반찬이요 떠 넣어드리는,
제 몸 팔아 아비 개안시키는 자식 되었다가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입 안 가득 하모니카를 불다가
어느 추운 겨울날 부모 살릴 생명수 구하러
홑껍데기 누더기 걸치고 고꾸라졌다
일어서서 서천서역국 찾아가는
바리데기의 울음소리를 흉내내면서
지긋이 물 속에 잠겨
초점 없는 눈동자 위로 툭
떨어지는 꽃송이들
황금색 몰약 같은 꿈 다시 꾸고 싶어
-슬픔의 작은 섬/진은영-
슬픔의 섬
그런 사건의 작은 돌멩이들로만 이루어진.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에서 나던 사과 반쪽의 냄새
나는 기억한다, 그날 널 향해 내린 건 세상의 첫 가을비
아무래도 우리는 천 년을 함께 살아온 것 같아.
흔들리는 양귀비꽃의 바람에 머리를 말리며
향기에 불룩해진 돛으로
강 가운데로 밀려가는 자줏빛 조각배처럼
어리둥절하게 인생이 갈 거야
너의 옷소매는 몇 년에 걸쳐 나무식탁에서 닳아버리는지?
화를 내며 걸을 때면 회색 린넨바지가 내던 거친 소리를
서로가 잘라준 날카로운 동물의 손톱이 마루의 몇 번째 틈새를 메우고 있는지?
네 노란 공단양산은 어떤 모양으로 기울어지며
나의 어깨 뒤의 사막에 부드러운 그늘을 만들었는가?
시인은 연인에 대한 미묘하고 병적인 묘사로 신문에 날 것이다.
그래도 좋으리.
사소한 슬픔은 흔들리는 거울 위로 흘러내리고
문득, 유리창으로 내다보면
달콤한 솜털 덮인 그녀의 등고선을
팬지와 토끼풀의 혀로 핥으며 봄은 올 테지만.
연인들을 모르는 척
사연 없는 세계의 고요한 아름다움에 대해
산과 강물이 서로를 쳐다볼 것이다.
그것도 잠시, 슬픔은 여름의 저지대로 흘러가고
폭풍처럼 살인이 일어날 테지, 연인의 배신에
핏방울과 빗방울이 쏟아질 것이다.
시인은 애인의 흐르는 홍수에 몸을 담그고
분노의 조가비를 따서
사랑의 신, 그 애송이의 부드러운 목에 진주를 걸어줄 것이다
그들이 처음으로 입 맞추던 강가의 풀밭이
낡은 녹색 침대 메트리스마냥 얼마나 소란스러웠는지 그제서야 기억날 거다
`우리가 처음 서로의 팔에 안겼을 때 벌들은
거대한 꽃송이의 알지 못할 꿀 속에 익사했다
그날 임신 중이던 운명은 수년의 진통 끝에 사랑과 죽음을 쌍둥이로 낳았다'는
그런 종류의 슬픔,
그런 종류의 슬픔으로 만들어진 작은 섬은......
없다. 없을 거야.
마지막으로 깨지는 네 개의 거울의 강
포클레인 옆에 서서
콘크리트 죽을 다 핥아 먹기 전엔
만국의 연인들이여
영원히 슬퍼합시다.
슬픔의 슈라라펜란트, 그 섬에 가기 전에
드넓게 세워진 죽음의 건축학적 강둑 위에 서 계신 여러분......
-아껴 먹는 슬픔/유종인-
재래식 화장실 갈 때마다
짧게 뜯어가던 두루마리 화장지들
내 밑바닥 죄를 닦던 낡은 성경책이 아닐까
떠올린 적이 있다
말씀이 지워진 부드럽고 하얀 성경책 화장지!
외경의 문밖에서 누군가 나를
노크할 때마다 나는
아직 죄를 배설 중입니다 다시
문을 두드려주곤 하였다
바닥난 화장지, 어느 날 변기에 앉아
내 죄가 바닥나버린 허탈에 설사라도 나는
기분에 울먹인 적이 있다
그러나, 천천히 울어야지
저 문밖의 가을, 깃동잠자리 날개 무늬를 살필 수 있게
천천히 아주 천천히……
머리에 토란잎을 쓰고 가는 아이처럼
슬픔에 비 맞아 가는 것도
다 구경인 세상이듯이
때론 맨발에 질퍽이는 하늘을 적시며
-슬픔의 오렌지/김상미-
빛 속의 오렌지
그늘 속의 오렌지
파란 하늘 아래 오렌지
초록빛 풀밭 위의 오렌지
노란 레몬 옆의 오렌지
검은 색 문 앞의 오렌지
그녀를 닮은 오렌지
그의 심장 같은 오렌지
그 안에 꿈꾸듯 누워있는 오렌지
내가 먹은 나이만큼 하염없이 구르다
돌이킬 수 없는 진실에 눈물이 되어버린 오렌지
무모하게 갖고 놀다 뼈아프게 놓쳐버린 오렌지
내가 내 눈에서 꺼내 먹구름 속에 던져버린 오렌지
-슬픔이라는 흰 종이/이기철-
맑은 것은 슬프다
슬픔은 숨겨 둔 눈부심 같아서
찬란을 색칠하려 해도 색깔이 묻지 않는다
이슬은 깨어질지언정 더러워지지 않는다
누구의 발자국도 찍힌 적 없는
깨끗하고 흰 종이인 슬픔
내 오래 사숙해 온 스승이여
너에 엎드려 구걸한 내 미분(微分)의 시간은 아직 어리다
동풍으로 다가와 삭풍이 되는
파리하고 차가운 손
때로는 상한 사과 냄새를 풍기고
때로는 줄 끊어진 악기 소리를 내는 너는
이름할 수 없는 애인
어떤 글자로도 쓸 수 없는
무문(無文)의 흰 글씨
내 오늘 다시 너를 맞아 이 글을 베끼노니
애절 비탄 비애보다 깨끗한 몸이여
슬픔이라는 창백한 종이여
너 아니면 내 무엇으로 삶의 깊이를 재느냐
-참을 수 없는 슬픔/박남준-
눈물처럼 등꽃이 매달려 있다
모든 생애를 통하여 온몸을 비틀어 죄고
칭칭 휘어 감어 오르지 않으면
몸부림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슬픔의 무게로
다만, 등나무는 등꽃을 내다는 게다
그것이 절망이다 그렇다
-슬픔이 해준 것들/김경미-
소의 어금니와 여물이 되게 해주었다
쏟아지는 빗방울 하나마다 일일이 작고 둥근 접시에 담아주었다
너무 낮은 자세를 원하던 그 감색의 문 앞
상추잎처럼 얕게 묻어놓은 손잡이
잡자마자 뿌리째 뽑혀 함께 뒹굴 때 안에서 들리던 웃음소리
똑같은 흉기가 되지 않게 해주었다
촛불과 손가락을 기울여 벽에 갖가지 사슴을 데려와 주었다
옷을 염색할 땐 펄펄 끓는 물과 염료에다 굵은 소금 한 줌을 넣어야 한다
버림받을 때 쓰라고 가방에 초록색 가발과 설탕을
넉넉히 넣어주었다
나무에 마냥 기대지 말라고 나뭇잎들을 몇 달씩 어디론가 데려갔다
〈낡은 전축에서 불려나온 스무 살 추억이 아직도 상처받을 때
—미제레레 라크리모사 레퀴엠 같은 발성법에 대해〉
가르치라고 해주었다
슬로바키아 일요일 오후의 깃털 같은 광장에서 내가 울었던 이유를
당신만 알기를 부디
그러하기를 약속해주었다
-잠글 수 없는 슬픔/유용선-
저 혼자 여닫을 수 있는 슬픔이면
하마 슬픔이랄 것도 없네
정작 큰 슬픔은
자물쇠를 남기지 않네
당신 가버렸을 때
내 손 닿지 못할 곳으로 가버렸을 때
그제야 알게 될 둔중한 슬픔
나로 인해 당신 슬퍼하는 줄을
내 설령 아둔한 머리로 헤아린다 한들
이대로 당신 가버린다면
내 손 닿지 못할 곳으로 가버린다면
이 또한 잠글 수 없는 큰 슬픔
가슴을 찢긴 당신
자물쇠를 든 늙은 여자
-슬픔의 논리/이응준-
주색잡기를 멀리하던 스승은
방금 괴로워 흥얼거렸던 내 노래처럼
허공에도
마음에도
없다.
죽음이란 그런 것.
탕아인 제자 걱정으로 잠 못 이루던 그의 책들
세상 속에서 여전히 초라하고
도무지 호전될 기색이 없고
내가 물려받은 철학이란 고작
산책을 자주 하라는 것.
후회와 경멸 대신에
차와 과자를 즐겨하던 그 손끝은
왜 아직도 가끔 나를 찾아와
실연 같은 겸손을 권하나.
선생니임-.
선생니임-.
허공으로도
마음으로도
그러지 마라.
그간 아무 일 없었던 거야.
정말 아무렇지 않게
벌써 다시 시작된 거야.
산책이란 그런 것.
-삶의 시간을 길게하는 슬픔/황인숙-
나이는 서른 다섯 살.
가을도 저물어 시린 바람이 안팎으로 몰아친다.
이제는 더 이상 청춘도 없다. 사랑도.
밤은 막막, 낮은 휑휑.
그렇지만,
죽음보다는 따뜻하다.
앙다문 이빨.
눈꺼풀 저 구석에 지그시 눌러둔
쓰라린 눈알.
억울해? 억울하지.
억울함을 딛고 비참을 딛고
생이 몰아치는 공포를 딛고
딛고, 딛고!
오, 추락하는 꿈으로도
오, 따분한 꿈으로도
오, 처량한 꿈으로도
비비틀리는, 푸드덕거리는
몸은 작열한다!
죽은 몸에는
눈먼 꿈도 깃들이지 않는다네.
당신을 저버린 연인이 무섭게 차갑다고?
죽음보다는 따뜻하다.
-슬픔이 나를 깨운다/황인숙-
슬픔이 나를 깨운다.
벌써!
매일 새벽 나를 깨우러 오는 슬픔은
그 시간이 점점 빨라진다.
슬픔은 분명 과로하고 있다.
소리 없이 나를 흔들고, 깨어나는 나를 지켜보는 슬픔은
공손히 읍하고 온종일 나를 떠나지 않는다.
슬픔은 잠시 나를 그대로 누워 있게 하고
어제와 그제, 그끄제, 그 전날의 일들을 노래해준다.
슬픔의 나직하고 쉰 목소리에 나는 울음을 터뜨린다
슬픔은 가볍게 한숨지며 노래를 그친다.
그리고, 오늘은 무엇을 할 것인지 묻는다.
모르겠어...... 나는 중얼거린다.
슬픔은 나를 일으키고
창문을 열고 담요를 정리한다.
슬픔은 책을 펼쳐주고, 전화를 받아주고, 세숫물을 데워준다.
그리고 조심스레
식사를 하시지 않겠느냐고 권한다.
나는 슬픔이 해주는 밥을 먹고 싶지 않다.
내가 외출을 할 때도 따라나서는 슬픔이
어느 결엔가 눈에 띄지 않기도 하지만
내 방을 향하여 한발 한발 돌아갈 때
나는 그곳에서 슬픔이
방 안 가득히 웅크리고 곱다랗게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그 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함민복-
아래층에서 물 틀면 단수가 되는
좁은 계단을 올라야 하는 전세방에서
만학을 하는 나의 등록금을 위해
삭월세방으로 이사를 떠나는 형님네
달그락거리던 밥그릇들
베니어판으로 된 농짝을 리어커로 나르고
집안 형편을 적나라하게 까보이던 이삿짐
가슴이 한참 덜컹거리고 이사가 끝났다
형은 시장 골목에서 짜장면을 시켜주고
쉽게 정리될 살림살이를 정리하러 갔다
나는 전날 친구들과 깡소주를 마신 대가로
냉수 한대접으로 조갈증을 풀면서
짜장면을 앞에 놓고
이상한 중국집 젊은 부부를 보았다
바쁜 점심시간 맞춰 잠 자주는 아기를 고마워하며
젊은 부부는 밀가루, 그 연약한 반죽으로
튼튼한 미래를 꿈꾸듯 명랑하게 전화를 받고
서둘러 배달을 나아갔다
나는 그 모습이 눈물처럼 아름다워
물배가 부른데도 짜장면을 남기기 미안하여
마지막 면발까지 다 먹고나니
더부룩하게 배가 불렀다, 살아간다는 게
그날 나는 분명 슬픔도 배불렀다
-슬픔의 무게/전순영-
콩밭 들깨 밭 사이사이 노란 호박꽃
키다리 집과 뚱보 집
정원의 소나무 황토로 갑옷 입고
허리엔 링거 주렁주렁 매달고 거인같이 서 있네
미끄러운 차들이 미끄러져 와 줄을 서는
길모퉁이엔 허리 굽은 집 한 체 오그리고 앉아있네
기우는 처마 끝에 구멍이 숭숭한 담
뒤틀린 창문에 비닐 조각 펄럭이고
옥수수는 빈대만 서 있네
슬레이트 굴뚝 부러진 허리에서
하얀 연기 피어오를 때면
더벅머리 중년남자
두 개의 목발에 기대어 바람에 나부끼며 노을지던
슬픔의 무게
이제 내려놓은 빈터에는
블로크 조각 비집고
노랑 병아리 같은 민들레 얼굴 내어 밀고있네
-슬픔이 오는 쪽/여성민-
프랑크푸르트로 간다 밤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오고 프랑크푸르트의 밤은 푸르다
밤은 오므린 손을 펴듯 온다 너는 슬픔이 오는 쪽으로 눕는다고 말한다 나는 베이징으로 간
다 베이징을 지나 장마전선이 북상중이라는 말을 들었다
아침이 오기 전에 새들은 떠났다 쫓겨 가는 것은 무엇이나 아름답다 나는 벌써 찬란하다 너
의 첫 논문은 재의 도시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룩셈부르크로 간다
하나의 심장이 멈출 때 하나의 별은 태어나지 돌은 하나의 속도 바람은 어제에 속한다
나는 폼페이로 간다 타인들의 타락을 사랑했던 도시 고린도로 간다 등에서는 열 개의 별이
타오르고 허리에선 두 개의 바람이 흩어지지 나는 시카고로 간다
별들은 장외로 날아가 돌아오지 않는다 스타디움 뒤에서 실밥이 선명한 별을 주우며 출루 없
는 하루를 견딜 때 석양보다 생선의 죽은 빛이 먼저 오는 오사카에서 여자를 안을 때
어쩌면 권태로운 방향 같기도 하다 심장은 여태도 자전하고 있는지 별과 별 사이를 건너 본
일이 있는지 너는 묻는다 밤은 거의 숲을 빠져나왔다
나는 베를린으로 간다 너를 지나 밤의 숲이 오는 쪽, 나는 더블린으로 간다
[돌샘 이길옥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