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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문화재답사 스크랩 선각대사비의 중언 궁예는 폭군인가?
청목/金永柱 추천 0 조회 171 13.05.28 13:4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역사스페셜]

선각대사비의 중언 궁예는 폭군인가?

 

 

"입정에 들겠노라, 곧 관심법을 시행하겠노라."

"옴마니반메움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

 

스스로 미륵불을 자청하고 처자식을 살해한 패륜(悖倫)의 군왕, 궁예. 그는 진짜 미치광이 폭군이었을까? 최근 새롭게 해석된 선각대사비는 놀라운 사실을 증언한다. 912년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내려가 나주 공략을 지휘하고 후삼국 통일의 기틀을 다진 정복군주. 그 이름은 다름 아닌 궁예였다.

 

“혁명가로 봐야죠. 싹 바꿨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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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께선 궁예라는 이름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미륵불을 자처하며 이른바 관심법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한 왕. 혹은 처자식을 죽인 미치광이. 그래서 결국 왕건에게 쫓겨난 폭군. 삼국사기와 같은 사서에선 궁예를 흉악한 자, 포악하고 방자한 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내용이 대부분이고 그나마 기록된 분량도 많질 않습니다. 헌데 최근 들어서 이런 궁예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기록이 발견됐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기록에 따르면 그간 우리가 궁예에 대해서 갖고 있었던 부정적인 선입관들을 바꿔야 합니다.

 

 

분단의 상흔이 남아 있는 강원도 철원. 궁예가 세운 태봉국의 수도였다. 태봉국의 흔적을 보려면 민간인 통제구역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철원은 교통의 요충지로 경성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이 지나던 곳이었다. 태봉국의 도성은 비무장지대 한 가운데 있다. 군사분계선이 성을 반으로 가른다. 왕궁성과 내성은 북한쪽 비무장지대에 있다.

 

이재 / 국방문화재연구원장

“현재로는 들어갈 수가 없죠. 공교롭게도 군사분계선이 반을 가르고 있어서 성 자체도 반으로 이렇게 쪼개져 있죠. 언젠가 남북이 합해서 조사해야 할 귀중한 우리 잊혀진 왕국이죠.”

 

 

비무장지대에 있는 유적을 20년 째 조사하고 있는 이재 원장과 함께 평화전망대를 찾았다. 태봉 도성 터는 홍천원이라는 넓은 평야에 자리한다. 풀과 나무가 자라 육안으로 성터를 식별하기 어렵다. 김일성 고지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1951년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제작한 항공사진을 토대로 태봉국 도성의 위치와 모습을 확인했다. 항공사진에 드러난 성의 윤곽을 따라 선을 긋자, 외성과 내성이 드러났다. 외성의 길이가 12km가 넘는다.

 

이재

"항공사진으로 식별 가능한 성벽이 있는 큰 규모의 도성이다."

 

 

성벽 일부가 붕괴되기는 했지만 남은 부분을 확인할 수가 있다. 성벽을 따라 나무가 자라고 있다. 성은 토성이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자료에 따르면 석등과 석등하대석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됐다. 왕궁성 부근에서 발견된 석등은 일제 때 국보로 지정됐다. 그렇다면 태봉국 도성은 실제 어떤 모습이었을까?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제작한 모형을 보면 태봉국 도성은 직사각형 모양의 거대한 평지성으로 내성 안에 왕궁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로선 보기 드문 규모의 도성임을 알 수 있다.

 

이재

“서울 도성은 이렇게 평야에다 한 것은 아니고 서울 주변의 산을 따라서 쭉 했는데 약 18km입니다. 그리고 삼국시대 경주라든가 백제라든가 이런 곳에서는 몇 킬로 안 됩니다. 이성은 평지에만 12.5km을 쌓았습니다. 이런 성의 규모는 사실상 상당히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중국의 큰 나라이니까 중국을 의식하고 그보다 더 멋있게 크게 쌓아야겠다, 그래서 발해에 있는 수도의 성이나 그 다음에 당나라의 성, 그것 못지않게 평지에다가 크게 쌓은 성이라고 볼 수 있죠.”

 

 

신라 왕족의 후예로 태어났던 궁예는 892년 원주에서 일어난 반란군에 가담하면서 독자적 세력을 확보한다. 궁예는 불과 4년 만에 강릉에서 개성에 이르는 한반도 중부 지역을 장악하고 새로운 국가건설의 토대를 마련한다. 그것이 태봉이다.

 

최연식 교수 / 목포대학교 사학과

“궁예는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군사적인 능력이 굉장히 뛰어났습니다. 소수의 무리들을 데리고 주변지역들을 장악해서 처음 경기도 북부 또는 충청도 북부지역에서 출발해서 주변지역들을 쭉 장악해 나가면서 강원도 해안지역 그리고 경기도 북부지역까지 확대해서 세력을 펼쳐 나갔고 마침내는 후고구려를 건국하는데 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과정에서 궁예의 군사적인 성과는 대단히 놀랍고...”

 

궁예는 기존의 제도를 뒤엎는 혁명적인 시도를 통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 갔다. 자신이 신라의 왕족 출신이었지만 과감히 신라의 골품제를 폐지한 것이다. 산성인 아닌 평지에 거대한 성을 건설한 것은 새 국가 건설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궁예의 태봉 도성은 계획된 신도시였다. 도성의 핵심부인 내성 안엔 왕궁 포정전을 비롯한 국가의 핵심 시설이 자리하고 내성과 외성 사이에는 일반 백성들을 위한 민가와 절터 훈련장 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외성은 길이가 12.5km 높이는 10m인 거대한 성이었다. 당시 태봉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진 국가였는가를 알 수 있다.

 

 

태봉 도성 인근에 위치한 산선을 찾았다. 덩굴을 거둬내자 숨겨진 성벽이 보인다. 동주산성은 궁예가 처음 철원으로 입성할 때 점령했던 곳이다. 높고 가파른 산새를 이용해 건설한 성의 둘레는 800m 정도. 태봉 도성의 외곽에서 전략적 거점 역할을 해온 동주산성은 지금도 군대 진지로 사용되는 군사적 요충지다.

 

박종용 / 철원군 관광문화과

“그 철원평야를 정벌하기 위해서는 지금 이곳 동주산성에서 밑에가 다 보이듯이 전략적으로나 지형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산성이 되겠습니다.”

 

 

한해의 풍년이 들면 7년을 먹고 산다는 철원. 지금도 강원도 쌀의 28%가 철원평야에서 생산된다. 철원은 예나 지금이나 궁예의 땅이다. 어딜 가나 궁예의 흔적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변희문 태봉청과 사장

“여기가 궁예 왕이 세운 태봉국 도읍지여서 가게 이름을 태봉이라고 지었는데 요즘 매스컴에서도 자주 나와서 태봉청과라고 이름을 지으면 장사가 잘될 것 같아서 이름을 지었어요.”

 

 

전라남도 강진의 고찰 무위사에서 궁예와 관련된 놀라운 사실이 드러난다. 무위사 경내에 있는 선각대사비. 후삼국 시대의 고승 선각대사 형미를 기리기 위해 고려 태조 왕건의 지시로 세워진 비석이다. 비문에는 당시 선각대사와 대왕과의 만남. 대왕의 업적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 비문에 등장하는 대왕은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최연식 교수

“지금까지 대왕은 왕건을 가리킬 것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왜냐하면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비이기 때문에 고려의 국왕인 왕건으로 생각했습니다만 이 비의 내용을 보게 되면 대왕은 궁예를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석에 따르면 912년 궁예는 군대를 이끌고 나주를 점령했다. 지금까지는 왕건이 나주를 점령했고 이를 바탕으로 고려를 창건했다는 것이 기존의 해석이었다. 그러나 당시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주를 공격한 사람이 왕건이 아닌 대왕 궁예였음을 선각대사비는 증언하고 있다.

 

최연식 교수

“삼국사기나 고려사의 기록을 보게 되면 궁예나 왕이 된 이후에 궁예가 직접 전쟁에 참여한 모습이 거의 자료에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실제 자료에서 인멸 되었을 가능성도 적지 않게 생각합니다. 즉 후대에 궁예의 업적을 깎아내리기 위해서 궁예가 직접 지휘했던 전투라든지 이런 것들이 자료에 제대로 기록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자료는 비록 한 건의 사료이기는 하지만 궁예가 왕이 된 후에도 직접 전쟁을 이끌고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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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각대사비에 대왕을 왕건이 아닌 궁예로 재해석한 결과 기존의 기록과 첨예하게 충돌하는 사건이 한 가지 발생합니다. 그것은 912년 궁예가 직접 나주 정벌을 지휘했다는 사실인데요. 사실 궁예는 철원 땅에 거대한 태봉 도성을 지을 만큼 강력한 왕권을 자랑하던 군주였습니다. 하지만 왕건의 그늘에 가려져서 온전한 역사의 평가를 받지 못했죠. 후대의 사서엔 왕건의 업적으로 뒤바꿔 기록된 912년 나주 정벌. 자 과연 이들에게 나주가 그토록 중요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전라남도의 젖줄 영산강. 그 끝자락에 나주가 자리하고 있다. 나주시 영산포. 홍어거리로 유명한 이곳은 흑산도에서 잡힌 홍어가 영산강 뱃길을 따라 수성되어 팔리던 선창이었다. 열흘간에 이르는 해상운송 과정에서 숙성된 홍어는 전국으로 유통이 된다.

 

양치권 / 홍어판매업

“흑산도에서 싱싱한 홍어가 영산포로 실려 오면서 자연스럽게 숙성됐고 숙성홍어를 영산포에 와야 먹을 수 있고, 숙성 홍어가 소문이 나서 광주, 목포까지 전파됐고요. 그래서 홍어는 영산강을 따라서 생성된 음식문화가 됐습니다.”

 

 

영산강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내륙등대가 남아 있다. 1915년 설치된 영산포 등대는 강으로 가는 선박의 뱃길을 안내하고 영산강의 수위를 측정하는 일도 담당했다.

 

윤지향 나주시 학예연구사

“이런 뱃길을 통해서 서남해안지역에 있었던 모든 물류들이 이 뱃길을 들어왔고요. 그리고 이곳에 큰 도시가 형성된 것이고 또 조선시대에는 조운선이 다니던 뱃길로도 활용이 됐습니다.”

 

 

흑산도와 전라남도 서남해지역에 섬에서 나오는 특산물이 나주에 모여 내륙으로 공급됐다. 나주는 서남해지역 경제의 중심지였다.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면. 이 일대에서 60여개에 달하는 대규모 청자가마터가 확인됐다. 가마터 잔해로 보이는 붉은 흙덩이가 곳곳에서 보인다.

 

“가마벽입니다. 불에 의해서 붉게 지금 이 돌같이...”

 

그렇다면 이곳에 대규모 청자 생산지가 들어선 이유는 무엇일까?

 

변남주 HK 연구교수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이 청자 가마는 우리나라의 청자기술이 제일 처음에 들어와서 집단으로 만들어진 유일한 가마터입니다.”

 

 

이곳에서 생산된 청자는 무늬가 없는 초기 형태의 것으로 당시 동아시아 교역에 주요한 상품이었다.

 

“청자는 통일신라시대 가중 중요한 무역품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청자를 직접 생산해서 판매하면 더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청자를 대량생산하고 팔기위해서는 강력한 해상세력과 경제력이 밑받침 돼야 한다. 영산강 수로는 흑산도 항로를 통해 남중국과 연결되는 가장 가까운 지역으로 한중일 해상무역의 중심지였다.

 

강봉룡 교수 / 목포대학교 사학과

“당시 최고 고부가 상품인 청자생산의 대규모 단지가 조성되었고 소금생산지였다라는 것이죠. 그리고 또 하나는 국내외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볼 수 있죠. 군사적으로는 서해와 남해를 연결하는 요충지였습니다. 여기를 장악하면 군사작전에 굉장히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는 것입니다.”

 

 

후삼국 시대의 한반도를 통일하기 위해서는 서남해 지역의 해상 네트워크의 중심도시 나주를 장악해야만 했다. 903년 왕건은 수군을 이끌고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가 나주를 공격한다. 궁예의 수군 장교로 참전한 왕건은 나주 공략에 박차를 가했다. 왕건이 앞장서 나주를 공격했다는 기록이 이후 사서에 자주 나타난다. 당시 태봉의 가장 큰 경쟁자는 후백제. 나주를 점령하면 후백제를 공격할 수 있는 이점도 있다. 왕건이 이곳을 점령하고 금성을 나주로 바꾼다.

 

최연식 교수

“이 지역이 전략적인 요충지였기 때문에 후백제도 나주 지역을 재장악하려고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차례 서로 그런 공격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기록에는 903년도에 장악했다. 다시 909년과 910년 걸쳐서 장악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서남해 지역에 재해권 장악의 경쟁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견훤이었다.

 

 

전라남도 광양의 마로산성. 당시 견훤의 세력권 아래 있던 성으로 후삼국시대 해상교류를 통제하는 중요한 거점성 역할을 해왔다. 마로산성에서는 후삼국시대에 해양교역 상황을 증명하는 유물들이 출토됐다. 이것이 중국과 일본 사이에 중계 무역지 임을 암시하는 유물들이다. 신라 장인이 만든 청동거울은 일본에 수출하던 제품이었다.

 

강봉룡 교수

“원래 견훤의 해상적 기반이 약했지만 순천의 박영규, 김총 세력을 접수하면서 해양적 기반 이 형성됐습니다. 그래서 해양활동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합니다.”

 

 

서남해로 남진하는 궁예와 북진하는 견훤은 영산강과 나주에서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909년 왕권의 수군은 지금의 전남 무안 앞바다에서 중국으로 가는 견훤의 사신선을 나포한다.1) 이 사건은 후백제가 중국과 교섭하는 것을 차단한 것으로 영산강 유역 해상권 장악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강봉룡 교수

“염해연에서 견훤의 사신선을 나포 합니다. 궁예의 태봉 정권에 있어서도 중국의 해양활동을 굉장히 활발하게 하는 오월국과의 관계가 굉장히 필요했던 것이죠.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견훤이 오월과의 관계 맺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한 군사작전으로 아 사신선을 나포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912년 마침내 서남해 재해권의 판도를 결정하는 전투가 벌어진다. 궁예는 철원에서 내려와 이 전투에 직접 참전했다.

 

최규식 교수

“그 이전부터 왕권이 중심이 돼서 이 지역의 일정한 교두보는 마련하고 있었지만 보다 더 전면적인 전쟁을 일으켜서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려고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로 후백제의 배후지이기 때문에 이 지역을 장악하는 것은 후백제하고의 대립을 최종적으로 승리를 이끌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한 그런 전쟁, 그런 점에서 국왕이 직접 전쟁에 참여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견훤과 궁예가 직접 참여하여 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한 싸움. 그것이 912년 전투다. 승자는 후삼국 시대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는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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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2년 나주 정벌은 고려 창건이란 대업의 초석이 된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선각대사비에는 궁예가 직접 나주를 정벌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니 구체적으로 어디서, 어떻게 싸웠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습니다. 자, 과연 그렇다면 912년 궁예는 구체적으로 어디서 어떻게 싸웠던 것일까요.

 

 

912년 궁예와 견훤 양측의 총공세가 이곳 영산강에서 펼쳐졌다. 사서에는 전투가 덕진포에서 벌어졌다고 기록한다. 영산강 중류에 자리한 덕진포.

 

“이곳이 바로 912년 덕진포 해전을 했던 곳으로 추정되는데요.”

 

고려사에는 왕권이 전투를 지휘한 것으로 되어 있다.2) 고려사보다 더 먼저 기록된 선각대사비에서는 궁예가 나주를 정벌한 것으로 기록된다. 궁예가 부하인 왕권을 데리고 전투에 참전한 것이다.

 

변남주 교수

“위쪽에는 견훤의 군대가 왕건의 군대에 대항해서 육지와 바다에 수륙종횡으로 군사들이 맞서고 있고요. 그리고 아래쪽에서는 궁예의 부하로서 왕건이 남쪽으로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당시 견훤 군대의 규모는 엄청났다. 전함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섰고 군사들이 바다와 육지에 배치되어 그 세력이 엄청났다. 그런데 영산강의 규모를 보면 대규모 함대가 들어서기에는 너무 작다. 과연 이 정도 강폭과 수심에서 대규모 해전이 가능했을까? 지난 2006년 영산강 유역에서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목선조각이 발굴됐다. 'ㄴ'자형 구조의 거대한 나무 판재.

 

선박의 밑바닥을 바치는 저판재다. 통나무를 파서 배 밑바닥을 만들었다. 저판재의 한 개의 길이가 9m가 넘는 큰 배다.

 

윤지향 학예연구사

“최소한의 배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 5개 정도의 부재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판재 하나가 발견된 규모가 9m 10cm 정도로 추정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걸 5개 정도 붙이면 한 45m 정도 되는 배로 추정을 합니다. 톤급으로 따지면 200톤급, 쌀을 싣는다면 1000가마를 싣는 초대형 선박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45m가 넘는 200톤 규모의 선박. 이렇게 큰 배가 충분히 영산강 수역을 넘나들었다는 것을 이 저판재의 발견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배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 수종이 느티나무고요. 수령은 1000년 이상 되는 나무인데 어디에서 자라고 있었을까를 추정을 해봤을 때 북쪽에서 자라는 나무었을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점들을 볼 때 그러면 우리나라 북쪽에서 제작이 돼서 북쪽의 해양세력이 이 거대한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또 올라가는 이런 소통이 되고 있었다라는 것을 입증하는 셈입니다. 아마도 왕건이 타고 왔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렇게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영산강변에 자리한 나주는 지금은 평야가 넓은 농촌도시지만 원래는 항구도시이자, 거대한 국제 포구였다.

 

변남주 교수

“나말 여초, 왕건과 견훤이 활동했을 때는 영산강 수심이 지금보다 5미터 정도 깊었고 그런데 1000여 년 동안 토사가 퇴적되고 목포하굿둑이 막히고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게 되면서 수위가 낮아진 거죠.”

 

 

고대 영산강 수역은 현재보다 6배 이상 넓고 깊었다. 바다처럼 넓은 영산강은 한반도 최대 규모의 내륙수로 일종의 지중해였다. 912년 서남해 재해권을 둘러싼 절체절명의 전투가 시작된다. 궁예와 견훤.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선 왕과 왕의 대결. 수세에 몰리던 궁예의 부대는 바람을 이용한 화공책으로 견훤의 후백제를 제압한다.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는 자가 태반이었다. 궁예의 완벽한 승리였다.

 

강복룡 교수

“견훤의 군대는 왕건의 화공책에 의해서 모든 배가 전소당하는 그런 대패를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5백여 명이 목이 베임을 당하고 그 다음에 견훤은 혼자 조그마한 배에 의지해 탈출했다고 전합니다.”

 

 

삼한 통일은 노리는 왕과 왕의 싸움. 덕진포에서 승리한 궁예는 나주를 완전히 점령한다. 삼한의 절반을 차지하는 대업을 이룬 것이다.

 

이재범 교수

“한반도의 서부와 그리고 한반도의 전라남도 쪽에 해안지대에서의 상당한 부분, 이 일대까지를 장악하는 후삼국에 최대의 판도를 장악했던 나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현의 말처럼 삼한의 삼분의 이를 궁예가 장악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이후 후삼국의 판도는 재편됐다. 전라도 서남해 지역을 장악한 궁예는 이제 후삼국 통일에 선두주자로 나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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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각대사비에선 궁예를 시종일관 대왕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고려 초까지는 분명히 궁예를 국왕이라고 인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요. 하지만 고려후기로 접어들면서 궁예는 차츰 포악하고 무자비한 왕으로 묘사되며 결국 신하들에게 버림받는 군주로까지 평가받게 됩니다. 왜 이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궁예의 대한 평이 달라졌던 걸까요. 그리고 궁예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후 대체 어떤 일들이 생겼던 걸까요.

 

"내가 분명히 말하였노라. 참 미륵이라는 것을..."

"입정에 들겠노라. 곧 관심법을 시행하겠노라."

"옴마니반메움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

 

 

국호를 태봉으로 바꾸던 911년을 전후한 시기. 궁예는 스스로 미륵을 자처하기 시작한다. 후대의 역사서는 궁예는 흉악한 자로 악독함을 견디지 못할 정도라고 혹평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기억하는 역사는 다르다. 안성의 한 사찰에는 궁예와 관련된 석불이 전해진다. 궁예 미륵. 궁예는 이 지역에서 민간신앙의 대상이었다.

 

김태원 향토사학자

“궁예 미륵을 아주 많은 분들이 신봉하고 여기 와서 자기 염원도 빌고, 입시철에는 입시에 대한 염원도 비는 주위에서 많은 불자들이 찾아오는 미륵입니다.”

 

궁예는 912년 나주정벌 당시 이곳 무위사에서 명승 높은 고승 선각대사 형미를 만난다. 궁예는 선각대사를 불러 예를 표하고 태봉의 수도로 같이 갈 것을 요청했다.3) 결국 궁예와 선각대사는 같이 철원으로 돌아간다.

 

최규식 교수

“일부러 자신이 모시고 수도로 갔다라는 기록이 나와 있기 때문에 궁예의 불교 정책에 대해서도 단순히 관심법이나 미륵불 자처만이 아니라 당시 사회에 대두되고 있던 선종을 존중하고 선승들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포용정책을 펼쳤던 것을 보여주는 즉 궁예를 재인식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태봉의 수도 철원. 궁예는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거대한 평지성인 도성을 건설했다. 중국의 연호가 아닌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며 태봉이 천자의 나라임을 알린다. 궁예는 철원에 천 가구의 청주주민을 이주 시킨다.4) 도성 건설은 새로운 국가 건설 프로젝트였다.

 

이재범 교수

“철원경은 천자가 사는 곳을 의미합니다. 수덕만세와 같은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은 천자로서의 지역과 상징을 모두 취한 당당한 행동이었다고 판단합니다.”

 

 

궁예는 세속군주인 자신의 통치행위를 부처의 행위로 승화시키며 신라의 골품제를 폐지하는 등 과감한 개혁을 실시한다. 그러나 단기간에 거대한 성을 쌓는 공사는 백성들과 호족세력들의 불만을 쌓이게 한다.

 

“도성 건설에 따른 세금 부담, 일반인들의 노동력 부과가 큼. 그에 따라서 막대한 경비를 제공하려면 호족들의 노동력을 징발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농민들의 불만과 함께 호족들의 불만을 일으켰을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철원이 궁예의 땅이라면 나주는 왕건의 땅이다. 나주 완사천엔 왕건과 관련된 유명한 전설이 전해진다. 왕건은 이 샘가에서 한 처녀를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는다. 나주 호족 오다련을 딸로 왕건의 두 번째 비가 된 장화왕후다. 왕건이 나주해상세력의 지지를 얻는 중요한 사건이다.

 

강봉룡 교수

“오다련은 중요한 영산강과 그 바다가 만나는 지역에서 일어났던 중요한 호족이면서 해상세력의 기반을 가지고 있는 그런 세력이죠. 그런데 왕건이 오다련의 딸과 결혼하면서 오다련을 자기 세력화 한 것이죠.”

 

고려사에는 왕건이 나주를 정벌한 것으로 기록됐다. 선각대사비에 궁예가 나주를 정벌한 것으로 기록된 것과는 다르다. 왕건이 호족세력과 결합해서 나주를 장악하게 되고 이것이 고려사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궁예의 기록은 그 과정에서 지워진 것으로 보인다.

 

강봉룡 교수

“왕건이 나주를 공략하면서 큰 공을 세운 것이 왕건의 성장 배경이 됐습니다. 다시 말하면 궁예에게는 양날의 칼이 됐던 것이라고 볼 수 있죠.”

 

 

왕건은 궁예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궁예와 선각대사 사이에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진다. 궁예가 갑자기 선각대사 형미를 처형한 것이다. 궁예는 왜 선각대사를 죽여야만 했을까? 궁예는 선각대사가 누군가의 편을 들었다고 의심했다.

 

최연식 교수

“궁예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보다 왕건을 따르는 것에 대한 어떤 두려움, 위기감 이런 것들을 느끼고 있었고 따라서 아마도 왕건과 가깝게 지냈다고 생각하는 형미를 의심해서 그를 죽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궁예가 선각대사를 처형한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왕건 세력과의 결탁에 대한 배신감. 즉 역모를 우려하는 정치적인 이유였다. 궁예는 자신의 부인마저 관심법으로 살해하는 광기를 내보였다.

 

 

철원 월하리 월하분교터. 조선시대 향교가 있던 이 분교 자리에서 왕건과 관련된 중요 유적이 발굴됐다. 조선후기 영조 때 간행된 여지도서에는 이곳이 태봉국 시절 왕건의 집터였다고 기록돼 있다. 지난 2005년 발굴 당시 정권의 실력자가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출토됐다. 특히 직경 1m가 넘는 대형석등하대석은 이곳에 제법 큰 규모의 사찰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군사적 목적으로 활용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갑옷 조각도 나왔다.

 

유재춘 교수 / 강원대학교 사학과

“궁예가 사원세력이었고 이곳이 사찰터였다면 아마 궁예가 사원세력과 함께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고 왕이 된 다음에 그 터를 왕건이 받아 자신의 거처로 사용했던 것이 아닌가 추정합니다.”

 

왕건의 사택지로 쓰이기 전 궁예의 세력의 거점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월하리 유적. 후대의 역사는 궁예의 이름을 지우고 기억하지 않았다.

 

김영규 / 철원역사문화연구소장

“바로 요 아래가 왕건의 사택지입니다. 여기서 모의를 해서 저 지평선 끝에 보이는 태봉국 도성까지 진출해서 뜻을 이루지 않았을까 추정합니다.”

 

 

918년 왕건의 집에 모인 부하들은 모반을 시작한다. 누추한 차림으로 산속 깊이 도망친 궁예는 백성에게 붙잡혀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으로 추정된다.5) 그러나 왕건의 명령으로 세워진 선각대사비는 지금까지의 궁예에 대한 평가를 뒤집었다. 궁예를 일컫는 대왕전주(大王前主)는 왕건을 표현하는 금상과 동급의 존칭으로 사용된다. 비록 몰락했지만 고려 초까지 궁예는 왕건도 얕보지 못하는 대왕이었던 것이다.

 

최연식 교수

“후대의 자료들 즉 고려시대의 자료들을 보면 궁예에 대해서는 그냥 궁예라고하는 약간은 낮춰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비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궁예에 대해서 꼬박꼬박 대왕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게 되면 적어도 고려 초까지는 궁예에 대해서 쉽게 낮춰 부르지 못하고 대왕이라고 존칭하는 표현을 썼다고 생각합니다.”

 

통일 신라를 무너뜨리고 후삼국 시대를 주도했던 궁예의 정치적 유산은 왕건에게 계승됐다. 궁예는 후삼국 통일의 토대를 닦고 한국 중세사를 새롭게 연 혁명가였다.

 

이재범 교수

“우리나라에서는 결국 국가의 창시자라고 한다면 10명이 채 안 되는 그러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궁예는 자기가 그 어려운 배경에서 국가를 만들고 연호를 채택하고 광대한 평지성을 건설한 왕, 그리고 철원 경이라는 명칭을 붙였던 한국사에서 가장 담대한 군주로 평가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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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새롭게 재해석 된 선각대사 형미의 비문을 통해서 궁예가 미치광이 폭군이 아닌 뛰어난 정복군주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후삼국 시대를 마감하고 고려 창건에 실질적인 토대를 세운 인물이 바로 궁예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궁예와 태봉국의 역사는 대부분 지워진 채 왜곡돼 왔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선각대사비는 한반도의 중부를 통일하고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꿈꾸었던 혁명가 궁예를 다시 해석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 글의 내용과 이미지 저작권은 KBS 역사스페셜에 있음을 밝힙니다. 상업적인 용도는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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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909년 염해현에서 오월국으로 가는 견훤의 배를 포획” - 고려사, 태조세가 中

  2) “912년 궁예가 북쪽지방을 평정하고 남쪽을 정벌하려하다.” - 선각대사비 中

  3) “선각대사 형미에게 철원으로 같이 갈 것을 청하다.” - 선각대사비문 中

  4) “청주 가구 1,000호를 철원으로 이주시키다.” - 三國史記 궁예전 中

  5) “보리이삭을 훔쳐먹다 부양 백성에게 살해되다.” - 高麗史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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