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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냇가 새 바위에 푸른 숲속에
피 끓는 젊은 넋이 자라는 전당
이상은 하늘같이 높기도 하고
정성은 바다처럼 가득도 하다
경북대학교는 우리의 자랑
경북대학교는 세계의 자랑
1952년 5월 28일,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국민학교 학생합창단의 목소리가 기념식장(지금의 경북대학교 본관 터)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바로 경북대학교 개교의 노래다.
1952년 5월 28일 경북대학교 개교기념식 광경. 경북대는 대구농과대학과 대구사범대학, 대구의과대학을 통합하고 문리대학과 법정대학을 신설해 종합대학으로 개교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고운 물색의 한복을 입은 여선생님의 풍금 반주에 따라 곱고 어린 음색의 노래가 늦은 봄날의 기념식장을 은은하게 채웠다. 기념식장에는 경북대학교 교색인 자금색(紫金色) 빛깔의 천이 노래에 맞춰 춤을 추듯 펄럭이고 있었다.
주석단의 중심에는 당시 문교부장관이었던 백낙훈 박사와 대구의과대학(경북대 의과대학 전신) 학장으로 경북대학교 초대 총장에 선임된 고병간 박사가 그 권위를 상징하듯 박사학위 정복에 금빛 수실이 찬란한 학위모를 쓰고 앉아 있었다. 또한 경북도지사와 대구시장을 비롯한 많은 하객이 그 지위에 따라 순서대로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아버지 역시 경북대학교의 첫 신입생으로, 주석단 앞의 넓은 공간에 내놓은 강의실 학생용 의자에 동료 입학생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불과 서너 해 전, 우리 청소년들까지 목숨을 담보하고 겨레의 분단을 막기 위해 싸웠던 투쟁이 생각났어. 2.7 구국투쟁과 남조선 단독선거 반대투쟁, 그리고 소년 연락원으로 활동하던 그때가……. 그런데 개교식 자리에 앉아 있으니, 오늘의 내가 처절했던 그 당시의 내가 맞는지 믿기지 않더라. ‘나는 누구인가?’ 그런 의문이 내내 들었어.”
조국 반도의 허리를 남북으로 자른 전선에서는 이곳 봄날의 ‘개교 잔치’와는 상극되는 ‘살육의 전쟁판’으로 밤낮이 없었다. 축하받을 수만은 없는, 남의 잔치에 온 기분이었다.
‘무릉동의 간부 양성반 동무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박철환 지도원 동지는 살아계실까……. 6.25가 터지고 밀양 산내면의 산중에서 붙잡혀 갖은 악형을 당하다 돌아가신 밀양중학교 손기용 선생님……. 저놈들은 끝내 손 선생님의 목을 대창에 꽂아 남천강 밀양교 기둥에 매달아 놓았다지. 또 구정식 선생님의 생사는 어찌 됐을까……. 잊지 못할 동무 강성호는…….’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행사와는 상관없이, 기억의 단편이 여기에까지 이르자 아버지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눈이 아픈 양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몰래 눈물을 닦았다. 이제는 모두 만날 수 없는 스승과 동무들이었다.
1952년 5월 28일 경북대학교 개교기념식 광경. 경북대는 대구농과대학과 대구사범대학, 대구의과대학을 통합하고 문리대학과 법정대학을 신설해 종합대학으로 개교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경북대학교는 그 전신이 일제강점기 때 설립된 대구사범학교, 대구의학전문학교, 대구농림전문학교에 있다. 이들 학교는 8·15 이후 각각 대구사범대학과 대구의과대학, 대구농과대학으로 승격됐다. 이 세 대학을 합쳐 1951년 10월에 경북대학교로 개편한 것이다. 여기에 문리과대학과 법정대학을 신설해 1952년에 모두 5개의 단과대학을 둔 종합대학교로 정식 개교했다.
“학교 이름에 거창하게 도명을 붙인 경북대학교는 1951년 가을부터 도민들한테 설립 기금을 모금했어. 후대를 위한 교육이라는 취지에 다들 군말 없이 돈을 모아주었지. 이 돈으로 산격동 공동묘지 일대를 부지로 사들였고, 그 터전 위에 강의실과 도서관, 연구실을 건립했지.”
명색이 대학교라지만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미군 부대에서 쓰다 남은 허드레 각목과 판자, 아스팔트 루핑과 창문용 셀룰로스 철망 등을 사들여 후다닥 지은 판잣집이 교사(校舍)였다. 그렇게 강의실과 연구실도 대충 짜 맞추어 나갔다.
개교 기념식이 열린 당시만 해도 연고자들이 묘를 이장하고 난 직후라 교정 곳곳에 황토가 벌겋게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대충 불도저로 밀어놓은 대운동장도 공터나 마찬가지였다. 그 바닥에는 잡석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굴러다녔다.
대학은 개교 기념식이 열리기 전인 2월 20일부터 수강 신청을 받기 시작했다. 1학기 강의는 3월부터 바로 시작됐다. 교사가 마련되기 전이라 이때는 경북도청 옆 대구야간대학의 강의실을 주간에 빌려서 수업을 진행했다. 그러다 개교 직후인 6월부터 비로소 산격동 교정에서 수업을 시작한 것이다.
1954년 대학 3학년 당시의 아버지 모습. [사진 제공 – 안영민]
아버지는 사범대 수학과로 입학했다. 당시 문리대는 신설 단과대학이라 신입생이 첫 기수였다. 그래서 대구사범대학 시절부터 수학과를 개설한 사범대에 지원한 것이다. 졸업 후 수학 교사로 임용될 수 있다는 점도 참작했다.
개학하자마자 아버지는 미리 공개된 강의시간표에 맞춰 지정된 강의실로 찾아갔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교수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자 교실에 앉아 있던 2학년 선배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냥 나가는 거야. 그때쯤 온 다른 학생들도 복도에서 창문 너머로 강의실을 힐끗 들여다보고는 그냥 지나쳐 가고. 도대체 영문을 몰랐어.”
황당해하는 아버지의 표정을 보고 있던 한 선배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신입생입니까?”
“예, 선배님. 오늘 강의는 안 합니까?”
“보아하니 휴강인 것 같소. 대학이 원래 그렇소. 아마 이 교수는 다다음 주쯤 되어야 강의를 시작할 겁니다.”
빙그레 웃으며 말하던 선배가 먼저 통성명을 했다.
“나는 2학년이고, 신○○이라 합니다. 근데 어째 신입생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교사 경력을 가진 아버지에게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신참 냄새가 나지 않은 듯싶었다.
“아닙니다. 신입생 맞습니다. 저는 안재구라고 부릅니다.”
“이 강의를 하는 박 교수는 휴강하기로 유명합니다. 한 학기에 강의실에 세 번 오면 보통이고, 때로는 두 번만 강의하고 학기가 끝날 때도 있습니다.”
“아니 그러면 학점은 어떻게 줍니까?”
“학점이야 리포트라고 시험지 2, 3매를 적당히 써서 내면 됩니다. 물론 이 교수가 좀 심한 편이기는 하지만 대학 강의가 다 그렇다고 보면 됩니다.”
두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에도 학생 몇 명이 강의실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밀다가 가곤 했다. 그 가운데 아버지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착실히 받고 있었던 셈이다.
“선배님, 그런데 교수님이 강의는 잘하시는가요?”
“나야 뭐가 뭔지……. 잔뜩 영어에다가 독일어에다가 흑판에 열심히 써나가는데, 당최 구름 잡는 것만 같아서…….”
“수학에 무슨 영어고, 독일어는 뭐지요?”
“글쎄, 내가 압니까?”
“그러면 질문해서 뭣인지 설명을 좀 해달라고 하시지요?”
“그러다가 잘못 보이면 학점도 못 따고 졸업도 못 하려고?”
첫 수업부터 예고도 없이 휴강한 교수는 성이 박이었다. 서울대학교에 다니다가 ‘국대안 반대투쟁’이 거세지면서 학교를 중퇴하고 대구사범대학에 강사로 왔다고 한다. 국대안 반대투쟁의 여파로 실력 있는 교수들이 대거 북으로 가면서 남쪽에는 대학교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일본의 구제(舊制) 고등학교(대학 예과에 해당)를 졸업한 실력쯤 되면 교수로 환영받는 시절이었다. 대학 중퇴 학력의 박 교수도 그런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이 정도의 학습 능력을 갖춘 사람조차 구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1, 2주가 지나자 대부분 강의가 시작됐다. 국어, 문화사, 철학개론, 자연과학개론 등이 교양과목으로 개설되었다. 수학과에서도 미적분학과 일반기하학, 해석학 등이 개설되었다.
아버지는 잔뜩 기대를 안고 수업에 참여했다. 하지만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전공과목이든 교양과목이든 제대로 된 수업은 기대할 수 없었어. 교수들은 대부분 낡은 대학노트를 들고 교실에 들어왔지. 그 노트는 자신들이 일제강점기에 대학에 다닐 때 필기했던 노트였어. 때에 절어 너덜너덜해진 그 노트를 들고 흑판에 가득 써나갔어. 그것도 귀찮으면 노트에 적힌 내용을 읽어주는 게 수업의 전부였지.”
명색이 대학 수업임에도 질문과 토론이 없었다. 쥐 죽은 듯한 교실에서는 사각사각 펜대 움직이는 소리만 들렸다.
“사범대 수학과 전공수업도 별반 다를 게 없었어. 수학이란 학문이 지닌 논리 전개의 엄밀성은 온데간데 없고, 일제강점기 때 일본어로 출판된 책을 우리말로 번역해 적은 노트를 읽어주는 게 강의의 전부였지.”
하루하루 실망뿐이었다. 그렇다고 남들처럼 책상에 앉아 받아쓰기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중고등학교 공부도 다 독학했는데, 까짓거 대학 공부라고 못 하겠냐 싶었지. 일단 책부터 구하기로 했어. 수업 시간에 교수가 읽어주는 내용을 필기하는 대신에 교수가 들고 있는 책을 유심히 관찰했어. 제목과 저자가 확인되면 곧바로 헌책방을 찾아가 서고를 뒤졌지.”
1952년 무렵의 대구 중앙통 거리 풍경. 이 일대에 헌책방들이 많았고, 아버지는 이곳에 자주 들러 대학 공부에 필요한 책을 구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당시 대구역과 교동 일대에는 헌책방들이 많았다. 전쟁 통에 관공서나 도서관의 책들이 고물상으로 넘어왔다가 헌책방으로 모여들었다. 거기에서 책의 값어치에 따라 가격이 매겨졌다. 이렇게 흘러나온 헌책들이 많고, 찾는 사람도 많다 보니 당시 헌책방은 장사가 꽤 잘 됐다고 한다.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때라 책이 귀했어. 새책은 주로 일본에서 들어왔는데 구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였지. 그러니 대부분 헌책을 구하러 이리저리 쫓아다녔어.”
아버지는 헌책방을 뒤져 간신히 구한 책을 들고 혼자 공부해 나갔다. 수업이 없는 오후에는 산격동 교정에서 걸어서 헌책방으로 나오는 게 일과가 되었다. 이곳에서 수업과 관련된 책들을 뒤적이며 노트에 필기도 하고, 문학이나 인문과학, 사회과학 책을 읽다 보면 밤이 이슥해졌다. 지식과 학문에 목말랐던 아버지는 당시 대학 강의실에서는 얻을 수 없는 진짜 공부를 혼자서 착실히 해나갔다.
“한번은 교수가 강의 시간에 읽어주던 책을 헌책방에서 구해 혼자 공부하는데, 어떤 개념이 제대로 이해가 안 됐어. 그래서 수업 때 그에 관해 질문한 적이 있었어. 그런데 그 질문이 교수의 아픈 곳을 찌른 격이 되었나 봐. 교수는 화난 표정으로 나를 한참 동안 노려봤지.”
그날 이후 그 교수가 강의하는 모든 과목에서 아버지의 성적은 60점으로 고정되었다. 성적이야 교수의 고유권한이고 낙제를 주는 것도 아니고 해서 정식으로 항의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항의해도 받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1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되었다. 아버지는 첫 학기를 허망하게 보낸 느낌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공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특히 전공인 수학이 걱정되었다. 신입생 시절의 수학이야 다른 교양과목처럼 독학할 수 있겠지만, 학년이 올라가면서 본격적으로 공부해야 할 전공과목까지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버지의 고민은 다음 학기에 뜻밖의 한 사람을 만나면서 씻은 듯이 해결됐다. 아버지가 또 다른 큰 산처럼 의지했던 학문의 스승, 바로 몽석(夢石) 박정기(朴鼎基) 교수였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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