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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아호 작명 '붕촌' - 개명 내력 - 정은기 역술관장. 복사분 : 2매
-. 친구들과 산행 지금부터 약 20 여년 전, 모교 고려대학교 대전지부 교우회에서 만난 친구들과 주말이 되면 인근 산을 찾아 건강을 다졌다.
함께한 교우들은 高鉉錫, 金鍾大, 尹秀雄, 姜信福, 林憲泰, 朴弘一, 柳泰邦, 金鍾學, 盧鍾烈, 고 金俊基, 고 金相煥..., 그리고 후배 남여 교우들도 동행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시절 함께한 '61, 학번 교우들은 이름을 부르지 않고 아호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海松 = 김종대, 雲溪 = 윤수웅, 小井 = 강신복, 曉山 = 임헌태, 石泉 = 박홍일, 草亭 = 유태방, 德川 = 김종학, 空舟 = 노종열, 中樹 = 故 김준기, 信川 = 故 김상환... , 등등이다
-. 나는 한때 '한천(寒泉)' 이라고 별명을 부른적이 있었다.
고인이 된 초등학교 권희청(權熙淸) 친구는 초등학교를 졸업후 한수면 황강리 면사무소 뒤 한문공부방에서 한문스승에게 3~4년여 공부를 했다.
그는 20대 초반부터 약 19년간을 우리집에서 기거하였다.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생활하면서 그리운 고향을 잊지 않기 위해 나의 별명을
출생지가 제천군 한수면 한천리(堤川郡 寒水面 寒泉里 85番地) 태생이니 그냥 '한천(寒泉)' 이라고 몇해 동안 부른적이 잠시 있었다.
대학교 휴학중 고향 황학사에 있을 때 쓴 들에서는 나 스스로 '정욱(正煜)' 이라고 쓴적도 잠시 있었던 기억이 난다.
또한 일본제국주의 시대(1942 ~ 1945년)에는 나의 초명(初名)이 '길선(吉宣)' 이라고 불렀다.
-. 改名 '종명(鍾明)'에서 명종(明鍾)으로 광주이씨 대종회의 5극(五克 : 五兄弟) 중 다섯째 극균(克均 : 좌의정공파) 후손을 제외하고 나는 그 항렬(行列)로 이름 첫글자가 '鍾' 字이다.
그래서 우리들 형제의 이름은 종하(鍾夏), 종명(鍾明), 종태(鍾泰) 라고 했다.
6. 25. 한국전쟁 이후, 제천읍에서 한의원을 하시던 어머니 고모부께서 황강리 우리집에 오신적이 있다.
나는 그때 초등학교 4학년 겨울방학으로 기억한다. 아버지는 연세가 높고 漢學에 조예가 깊으신 어머니 고모부와 몇차례 상의를 하신 후, 우리 형제의 이름에 항렬인 '종'자를 끝자로 돌려 바꾸었다.
종하는 玩鍾으로, 종명은 明鍾으로, 종태는 錫鍾으로 개명을 하였다.
-. 나의 이름 개명 변천사는 吉宣 → 鍾明 → 明鍾 → 正煜 → 별명 寒泉 → 호 朋村 등으로 이어 부르게 되었다.
-. 아버지가 아들들의 이름을 바꾸니 함암리 순재(咸岩里 順載) 아저씨는 그 아들의 이름을 큰아들은 鍾明이로 하고, 다음의 아들은 寬鍾, 義鍾...등등으로 항렬 자를 끝으로 하였고,
중원군 문화리(문지리) 민재(敏載) 아저씨도 그 아들의 이름을 창종(昌鍾 : 현재 살미면장)이라고 작명을 하였다.
-.「정은기 역술관」 고교 재학중 동아리 모임 '淸浪會' 를 함께하였던 정은기(鄭隱基. 初名 鄭覺基) 친구가 있다.
그는 고교 재학중에 우리 동기중에는 드물게 이미 여러권이 되는 중국 소설 '삼국지(三國誌)' 를 여러차례 독서한 한바가 있다라고 소문이 나있었다.
※. 삼국지 : 동양인의 원초적 사고와 처세의 기본이 담겨있는 삼국지. 한나라 멸망 후 펼쳐지는 무수히 많은 영웅호걸들의 쟁투와 죽음, 전쟁, 음모와 지략을 들려주는 책.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부터 솥발처럼 셋으로 나누어진 촉, 오, 위 나라가 하나로 합쳐지기까지 조조, 손권, 제갈공명, 사마의, 조자룡 등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펼치는 흥미진진한 역사 소설.
그는 34년간의 공직(충북도청 근무)을 퇴임한 후 충북 진천군 문백면 소재지 초등학교 옆 아담하게 지은 양옥집에 「鄭隱基 易術館」이라고 간판을 걸었다.
정년퇴임 무렵인 1999~2000년 사이에 친구 李在聲, 孫明洙, 蔡洪憲, 朴東卨, 尹秀雄 ..., 등등 뿐만이 아니고 공직생활을 함께한 선후배들이 그를 찾아 손자 손녀의 작명, 신수에 관련된 한담을 했다.
나 역시 아호(雅號)를 받았다. 벗 '붕' 字에 마을 '촌' 字를 쓰는 '朋村' 이라고 했다. 나의 성품과 성명 그리고 사주에 맞게 작명했다. 라고 하였다.
아래 그 내용 복사분을 게재코자 한다.
위 복사분 2매 설명 : 고교 동창 청랑회원 정은기 친구가 작명해준 아호 '붕촌' 에 대한 설명입니다.
2014. 8. 6(수). 대전시 보문산 아래 청록실에서 붕촌 이명종
참고 : ※. 당호(堂號) · 아호(雅號) · 별호(別號)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당대(唐代)부터 시작해 송대(宋代)에 일반화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나타났다. 자신이 짖거나 남이 지어주기도 하는데 흔히 거처하는 곳, 이루고자 하는 뜻, 처한 환경이나 여건, 간직하고 있는 것 등을 근거로 짓는다.
글자수는 1∼10자까지도 있으나 2자가 보편적이다. 추사 김정희(金正喜)는 무려 503개에 이르는 호를 사용했다. 현대의 문인들이나 예술 가들 사이에서는 필명(筆名)이라고도 한다.
※. 자(字) : 주로 남자가 성인이 되었을 때에 붙이는 일종의 이름. 실제의 이름(實名, 本名)이 아닌 부명(副名)이라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중국이나 우리 나라에서는 웬만큼 글자를 아는 사람이면 성명 외에 자와 호(號)를 가졌고, 또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은 생전에 임금이 내린 봉호(封號)나 사후에 내린 시호(諡號)도 가지게 되었다. 임금의 시호는 묘호(廟號)라 일컬었고, 무덤에는 능호(陵號)가 따랐다.
이렇듯 한 사람이 여러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옛날의 한 습속에 말미암은 것이다. 두 가지 이상의 이름 가지기를 좋아한 풍속인 ‘복명속(復名俗)’이나,
실제의 이름 부르기를 꺼린 풍속인 ‘실명경피속(實名敬避俗)’이 중국이나 우리 나라에 있었던 까닭이다.
이러한 습속으로 하여 옛날에는 손윗사람의 실명을 부르면 본데없는 짓으로 알았다. 지금도 당자의 앞에서는 그 실명을 부르는 것을 피하고 있다.
말하는 측에서도 윗사람에 대해서는 자신의 실명을 말하지만, 같은 나이또래나 그 아래의 사람에게는 자를 썼다.
다른 사람을 부를 때에도 자를 사용하나 손아랫사람인 경우,
특히 어버이나 스승이 그 아들이나 제자를 부를 때에는 실명을 사용하였다.
손아랫사람인 경우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자는 물론 중국에서 비롯된 것이나, 어느 때부터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주(周)나라 초기의 설을 들어 말한다.주나라 초기 동기(銅器)에 ‘영이(令彛)’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에 한 사람의 이름이 두 가지로 나타나 있는 바, 그 중의 하나는 자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 이 습속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설총(薛聰)의 자가 ‘총지(聰智)’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만 하여도 자는 호만큼 보편화되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원효(元曉)의 자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예기 禮記≫에 의하면
“남자는 20세에 성년이 되어 관례(冠禮)를 마치고 성인이 되면 자가 붙는다. 여자는 15세로 결혼하게 되어 비녀를 꽂으면 또한 자가 붙는다. 여자의 자에는 흔히 자매의 차례를 나타내는 백(伯)·중(仲)·숙(叔)·계(季)를 붙인 데 지나지 않으나,
남자의 자에는 흔히 그 실명과 의미상의 관련이 있는 자가 붙고, 다시 그 위에 형제의 차례를 나타내는 백·중·숙·계의 글자나, 남자의 미칭인 자(子)를 붙이는 일이 많다. 또한, 흔히 형제간의 자에는 같은 한 글자를 넣어 지어서 그들이 같은 형제인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고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여자의 경우 거의 따로 자를 갖지 않았고,
남자의 자에도 형제간의 차례를 나타내거나 같은 글자를 넣어 짓는 일이 흔하였던 것은 아니다.
신사임당(申師任堂)이나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자를 따로 찾아볼 수 없고(난설헌의 景樊은 별호)
형제간인 허성(許筬)·허봉(許篈)·허균(許筠)의 字가각각 공언(功彦) · 미숙(美叔) · 단보(端甫)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실명보다도 자를 많이 사용한 것이 옛날의 습속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옛사람들을 자보다도 그 벼슬이름이나 호로 부르고 있다. 세종은 왕호요, 그 이름은 도(祹)이다.
자는 원정(元正), 봉호는 충녕대군(忠寧君 忠寧大君), 시호는 장헌(莊憲), 능호는 영릉(英陵)이다.
이순신(李舜臣)의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그러나 오늘날 세종의 자나 이순신의 자를 말하거나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이덕무(李德懋)의 ≪앙엽기 盎葉記≫에는 성명 · 자에 대한 한 호사가의 이야기가 전한다.
당대 어떤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라며, “중국 사람 중에 성이 성(姓)이고, 이름이 명(名)인데, 자 또한 자(字)라고 한 사람이 있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로도, 옛사람들은 이름 다음에 자를 생각하였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옛 문헌에는 실명 아닌 자로써 사람을 지칭한 것도 많다. 따라서, 옛 문헌을 읽자면 실명과 더불어 그 사람의 자도 알고 있어야 한다. -백과사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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