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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태권도근현대사 13편 - YMCA 권법부 윤병인 5부
역사를 바라볼 때 한가지 사건에 대해 다양한 해석의 평화로운 공존이 있어야 한다. 필자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이 컬럼 “역사속의 태권도역사”는 펙트를 중심으로 서술했지만 참고문헌마다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 태권도역사를 격동의 한국근현대사 속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현재 태권도가 가고자 하는 올바른 길을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기 위함이다. 간혹 이 컬럼이 다른 이들의 생각과 다를 수 있음은 인정하며 날카로운 비판과 대안도 나오길 기대한다. [필자 주]
중앙기독교 청년회 권법부(YMCA 권법부)의 분파
윤병인이 납북된 후 중앙기독교 청년회(YMCA)권법부 재건을 위해 1953년 10월5일 초대 사범이었던 이남석을 창무관 관장으로 추대되었다. 체신청 전화설계를 맡으며 출장때마다 지관을 넓혀 세력을 확장 시키며 관원들을 모았으나 이남석과 김순배등이 본인들의 세력을 만든다고 생각한 박철희와 홍정표는 대의원총회 소집해 대결했지만 이남석이 유임하게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홍정표와 박철희등과 심하게 갈등하다 결국 창무관과 강덕원 무도회(강덕원)로 분파되게 된다.(이호성 2007)
역사로 알수 있는 분파의 과정!
조선후기 영조(1724~1776)때 사색당쟁으로 인한 당파로 노론과 소론이 격돌하였고 소론파였던 사도세자가 아버지인 영조에게 죽음을 당했으며 마오쩌둥의 사회주의 공산당과 장제스(장계석)의 민주주의 국민당이 격돌하여 부패한 장세스의 국민당이 패함으로 중국은 마우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으로 중화인민공화국(1949)을 건국한다.
일제강점기때 친일파와 독립운동가가 격돌하여 아직도 친일파의 청산이 되지 않았다. 1945년 해방과 함께 대한민국은 남과 북이 격돌하였고 이승만의 정읍발언인 남한 단독정부수립론과 이를 반대한 김구등이 격돌을 보더라도 모두 이념의 문제이고 체제의 대립이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이념의 문제는 오늘날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대립과 갈등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이를 통해 우리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지난 날의 역사는 오늘날의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한국전쟁이후 재건의 꿈꾸고 있던 YMCA 권법부 1대 제자들은 재건에는 동의했지만 그를 둘러싼 많은 의견의 격돌을 예상할 수 있다.
한국전쟁 이후 정통무도인으로 각 관원의 특성에 맞게 퍼스널트래이닝으로 지도한 윤병인의 1대 제자들은 그를 매우 존경했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윤병인의 북송(北送)으로 YMCA 권법부관장의 부재로 이어졌으며 이는 관의 존립자체가 위험해 지고 있는 상황을 윤병인의 제자들은 보고만 있지 않았을 것이다.
왜! 중앙기독교 청년회 권법부(YMCA 이하 YMCA 권법부)는 분파되었을까?
이남석, 김순배를 위주로 한 창무관과 홍정표와 박철희를 위주로한 강덕원도 이 격돌의 역사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갈등한다.
당시 박철희의 주장에 의하면 이남석과 김순배는 YMCA권법부를 재건할 생각은 하지 않고 도장을 본인들의 세력화 만들기 위해 만들어낸 일종의 꼼수라고 보고 홍정표와 박철희는 이남석에 불만을 가진 관원들과 독립하여 강덕원을 개설한다.(허인욱 2008 최점현 2008)
무도계는 실로 다양한 인적 네트웍크와 대립이 존재한다. 역사가 그러했듯이 오늘날에도 이 일은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1990년 최초의 태권도동호회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 태권도동호회들은 다양한 활동과 사건을 거치며 분파되는 것을 볼수 있다.
1990년대 태권도 고수회라는 품새를 사랑하는 동호회가 결성되는데 태권도의 내노라하는 고수들이 모여 하나의 동호회를 만들어냈다. 그 동호회 이름이 태권도고수회다.
1994년 11월26∼28일 태권도 한마당 대회를 출전해 발격파 강신철, 최인수, 전기복, 김경찬등을 주축으로 11월27일 태권도 고수회 발기인 모임을 열고 제1대 회장으로 강신철이 취임 하였다.
태권도 고수외 마크
이 당시 강신철회장을 위주로해서 전기복, 최인수, 전청운, 김하일, 김호진등 내로라하는 태권도계의 사범들이 포진했다. 이후 최종원, 박종범, 강익필, 김윤상, 이송학, 등이 있었고 경기도 수원에서 수련을 이어 나갔다. 처음에는 품새와 격파를 주로 수련하는 동호회로 일반 수련생이 아니라 태권도지도자들이 가입하는 동호회였다.
하지만, 지난날의 역사에서 그러했듯이 고수회의 동호인들은 각자의 개성과 수련에 잡음이 생겨나고 뜻이 맞지 않는 사범들이 분파를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서로 슬기로운 갈등으로 인해 청지회, 무사회, 무인회, 등으로 갈라져 여러 분파로 독립하였다. 그리고 2020년 현재 수많은 분파로 또 나뉘어 태권도 동호회의 춘추전국새대를 방불케 할 만큼 많은 둥호회가 활동중이다.
역사를 알아야 하는 것은 지난날의 역사를 통해 오늘의 현상을 설명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미래의 후손들에게 올바른 지식을 쌓도록 해주고 온전히 전해주는 학문의 재생산을 통해 태권도역사의 올바른 지평을 만들어가야 한다.
UN대표 해리슨 중장과 북한대표 “남일로”가 휴전에 조인하게 되어 실질적으로 한국전쟁은 끝을 맺는다. 우리 남측 대표는 휴전에 반대하여 조인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때가 1953년 7월 27일의 일이다.
창무관은 이남석과 김순배는 당시 체신부 유지들과 간부의 도움으로 1953년 10월5일 현재 종합청사 자리에 창무관 중앙도장을 개설하였으며 이남석을 관장으로 김순배를 부관장이 되었다.
창무관의 '창'자는 영상고등학교의 창과 무도인의 무자를 합해 만든 것으로 두마리 용을 상징물로 삼았고 충효, 성실, 인내를 관훈으로 내세웠다.(허인욱 2008, 서성원 2007)
태권타임즈 2010년 5월26일자에 보면 서울 체신청(현 세종로 정부종합청사)자리에서 창무관을 재건했고 당시만 해도 교통이 불편해서 기본도장 외에는 없었다. 하지만 개관 2주년을 맞은 1956년 유단자수가 50명에 이르게 되었고 수련생의 숫자도 1,000명에 달해 당시 성장세가 매우 빨랐음을 보여준다.(태권도타임즈 http://www.timestkd.com)
출처:파사권법(1958)
YMCA 권법부에서 분관한 창무관은 서울을 중심으로 파생되어 부산에 지관을 개설하였고, 경남, 마산, 충북, 경기, 제주, 등으로 관세를 확장하였다.(정경원 2012)
1956년 6월10일 제주무선전산국 송신소 통신사로 부임한 문봉준(본명 문대식)에게 이남석은 제주지관을 개관할 것을 부탁해 제주에 지관을 낸다. 1955년 7월 10일은 조선대학의 초청으로 광주극장에서 이남석의 지휘아래 시범연무를 보였다.(허인욱, 강원식, 이경명 1999)
1986년 이남석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김순배가 3대 창무관장을 역임했다.
창무관 출신으로 현대태권도 기본기술의 변화를 주도하고 품새에 획일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자유품새라는 장르를 창출해 내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전 국기원 연수교육부 처장 이종관, 이규현 전 대한태권도협회 기심회 품새본부장, 전 중고태권도연맹 김충열 회장, 김중영 서울스포츠대학원대학교 총장 등이 그 이름을 알리고 있다.
강덕원은 1956년 윤병인의 제자인 홍정표와 박철희가 창설한 YMCA 권법부 분파관이다. 종로구 신설동에 무도원태권도 권법도장으로 시작했으며 관장은 홍정표가 맡았다. 하지만 개인사정으로 홍정표가 박철희에게 인계해 주며 강덕원 무도회로 명칭을 변경하게 된다.(허인욱 2008)
당시 종로구 신설동에 둥지를 틀었다. 베풀 강(講)에 클덕(德)을 따서 덜을 가르치는 도장이란 뜻을 담고 있으며 관이라는 표현보다 원을 사용했다. 이는 일본의 색채를 지우기 위한 것에서 창안된 것이다.(최점현 2008, 허인욱 2008)
이남석과 김순배의 도장 견해차이가 상당했던 시기에 가르치는 방법 또한 서로 부딛 친것으로 보인다.
박철희의 무카스 인텨뷰내용!
박철희의 직업은 군인이었다. 1956년 육군사관학교를 재대를 했다. 홍노사(홍정표)는 성문고등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서울대학교에서 재직하다가 정년이되어 그런지 그만두신다고 했습니다. 하루는 도장에 운동(박철희)을 제자와 갔는데 홍정표선생이 운동을 해야겠다고 한다. 그래서 제가(박찰희) 도장을 해드릴께요 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운동만하다가 집근처에 빈건물이 있길래 그럼 여기서 하세요. 그럼 내가 도와들릴께요 했어! 이름을 뭘로하라까요? 물었더니 뭐로 할까 물어 강덕원과 무도원을 두개를 들였는데 무도원으로 하겠다고 해서 무도원으롤 하고 뺏지도 만들고 했지! 그래서 한거지 떨어져나가서 한게 아니야!
강덕원 어떻게.....................
운동도 안하고 집에 있는데 몇달 되었는데 오셔서 못하겠어 하셨습니다. 이유는 모르고 그만두신다고 해서 내가 했지. 그때 명칭을 내가좋아하는 강덕원으로 바꾸었지!
(무카스 인터뷰내용)
박철희는 파사권법이라는 저서를 탈고한다. 그는 군을 재대 한후 해인사에 들어가 책을 쓸때 집중적인 연구를 통해 만들어졌다.
이 파사권법은 우리나라 근대 무술 서적중 3번째으로 그 의미가 남다르다. 하지만 내용는 가라테의 내용이 대부분 들어가 있고 중국권법도 일부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사권법 앞면(박철희)
YMCA 권법부의 발전과정은 윤병인의 많은 에피소드를 갖고 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우리가 기존의 알고 있던 일본의 가라테가 사실 일본의 지배 아래 식민화된 오끼나와에서 기원한 사실이 이제 일반화 되길 기원한다.[필자 주]
다음편 송무관(松武館)편 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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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엄재영 사범 = 대망태권도장 관장 & 전 북경체대 교수 ㅣ kaikan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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