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한옥마을→ 대흥 봉수산 순교성지 →홍주 순교성지 →해미 순교성지→배나드리 성지
49.2Km 19.6Km 26.6Km 26.2Km
밤새 세차게 내리는 빗물소리를 들으며 걱정을 했는데
새벽에는 약하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일기예보는 오전에 비가 그치고 기온이 뚝 떨어진다고 한다.
어제 사 놓은 구운 공주알밤 2봉지를 먹고 출발했다.
1시간 가까이 걸려 대흥면 봉수산 성지 근처 주유소에서 주유하면서
아침식사 할 곳과 성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곳이 교과서에도 실렸던 그 유명한 '의좋은 형제' 마을이란다.
한 마을에 따로 농사를 지으며 사는 형제가 있었다.
형제는 가을이 되자 추수를 하고 각자 논에 볏가리를 쌓아 놓았다.
형이 생각하기를, 동생은 결혼해 새로 살림이 났기에
쌀이 더 필요할 거라고 생각하고는 밤중에 몰래 논으로 나가
자기 볏가리를 덜어 동생 볏가리에 쌓아 놓았다.
그날 밤 동생이 생각하기에 형은 식솔도 많으니
쌀이 더 필요할 거라 여겨 밤중에 나가
자기 볏가리를 덜어 형의 볏가리에 쌓아 놓았다.
이튿날 논에 나가 본 형제는 깜짝 놀랐다.
분명히 지난밤에 볏가리를 옮겨 놓았는데
전혀 볏가리가 줄어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튿날 밤에도 형제는 같은 행동을 했고,
셋째 날에 드디어 형제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서로 밤중에 볏가리를 옮겼던 것이다.
10. 대흥 봉수산 순교성지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이 마을은 예로부터 ‘의좋은 형제’로 유명한 마을이다.
밤에 몰래 서로의 논에 볏단을 건네줬다는
우애 깊은 이성만·이순 형제의 이야기가 담긴
‘의좋은형제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또 다른 의좋은 형제를 만날 수 있는 성지가 나온다.
바로 하느님을 향한 신앙을 나누던 의좋은 순교자, 복자 김정득(베드로)과
복자 김광옥(안드레아) 형제를 현양하는 대전교구 대흥봉수산순교성지
(전담 윤인규 신부, 충남 예산군 대흥면 의좋은형제길 25–14)다.
■ 순교자가 머물던 감옥
성지에 들어서니 전통방식으로 지어진 목조건물이 인상적이다.
기와지붕에 나무와 흙벽으로 이뤄진 익숙한 건물이지만,
가까이 가면 일반적인 가옥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문마다 창호 없는 창이 뚫려있고,
지붕 바로 아래 달린 작은 창에는 창살이 쳐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 건물의 독특한 형태가 이해가 간다.
나무로 된 창살에 자그마한 방, 바로 옥사(獄舍)였기 때문이다.
대흥 형옥원(刑獄圓)에 재현된 대흥관아의 옥사 모습이다.
형옥원은 죄인들을 가두는 옥,
고신(拷訊)과 형벌을 가하는 환토(圜土)를 가리키는 말이다.
본래 대흥관아의 옥은 상중리 296번지 일원 옥담거리에 있었다.
또 사형을 집행하던 처형장은 예당호 내천변에 있었고,
조리돌림 등의 고신이 행해지던 저잣거리는 동서리 173번지 인근에 있었다.
김정신(스테파노·단국대 건축학과) 교수가 설계한 형옥원은
이들을 재현·기념하는 공간이다.
십자형태의 거리의 모습으로 조성된 형옥원의 마당에는
조리돌림, 팔주리 등의 고신과 주리틀기와 큰칼 등의 형구,
그리고 사형에 이르는 과정들이 묘사된 그림과 설명문들이 있었다.
형벌을 집행하던 의자와 곤장대도 놓여 있었다.
바로 순교자들이 당했던 고초들이다.
옥사에 들어가니 3개의 방이 있었다.
사각형의 방에는 죄인들이 목에 차는 칼과
곤장을 칠 때 사용했을 형구들이 놓여있었다.
순교자들이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수개월동안 모진 형벌과
고통을 참아내던 공간이 이런 작은 공간이었다.
이 대흥관아의 옥사 대흥옥(大興獄)을 재현한 건물에
김정득 복자의 성화가 걸려있었다.
대흥옥은 순교자들이 갇힌 수많은 감옥 중에서도
복자 김정득이 처형을 기다리던 곳이다.
■ 우애 좋은 형제 순교자
대흥옥에는 김정득과 함께
그 사촌형제인 복자 김광옥의 성화도 함께 걸려있었다.
사실 김광옥은 이 지역과는 크게 연고가 없는 순교자다.
인근 고을인 예산에서 면장을 맡던 김광옥은
예산과 청주에서 문초와 형벌을 당하고
한양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예산의 처형장에서 순교했다.
그러나 이 둘의 관계를 생각했을 때 김정득의 순교를 기리는 이곳에서
김광옥을 함께 현양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대춘’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김정득은
복자 김광옥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두 형제는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공주 무성산으로 들어갔다.
두 형제가 피신하면서 가져간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교회 서적과 성물이었다.
두 형제는 오로지 교리를 실천하기 위해 숨었다.
그러나 두 형제의 피신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름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어 더 빨리 발각됐던 것이다.
김정득은 홍주로, 김광옥은 예산으로 끌려가 문초를 받고,
이후 함께 청주에 수감돼 형벌을 받았다.
“국가의 금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사는 폐지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산속에 숨어 살면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이고 유혹하였으며,
형벌과 문초를 가하여도 아주 모질어서 굴복하지 않았다.
그 죄상을 생각해 보니,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다.”
김정득이 어떤 신앙생활을 이어왔는지는 상세하게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8월 21일 한양에서 내려진 김정득의 사형선고는
김정득의 삶과 신앙의 모습을 대변해준다.
선고문을 보면 김정득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용기 있게 신앙을 증언했을 뿐 아니라
이웃들에게 담대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고,
어떤 형벌과 문초에도 신앙을 반대하는 말이나
다른 신자들의 거처를 밝히는 말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성지에 조성된 형옥원의 중앙에 성모상이 세워져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성모상을 받치고 있는 돌 앞에
참수대(斬首臺)라는 팻말이 붙어있었다.
사형을 집행하던 참수대를 형상화한 것이었다.
성모 마리아는 순교자들이 죽는 그 순간까지 전구해준 순교의 동반자였다.
김광옥은 들것에 실려 형장에 가면서도 큰 소리로 묵주기도를 바쳤다고 한다.
처형장에 이르러서도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무릎을 꿇은 채 큰 소리로 끝까지 기도를 바친 후에야
참수대에 스스로 머리를 뉘었다고 한다.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
한양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돌아오던 길,
각자의 처형지인 대흥과 예산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에서
두 형제는 손을 맞잡고 이렇게 인사했다고 한다.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운 상태였지만,
두 형제의 얼굴은 더없이 즐거운 얼굴이었다고 전해진다.
마침내 의좋은 순교자, 김정득과 김광옥 형제는
1801년 8월 25일 각각 대흥과 예산의 처형지에서
한 날 한 시에 참수로 순교했다.
11. 홍주 순교성지
충청남도 서북부의 중심지에 위치해 내포 지역 정치, 행정, 문화, 교통, 체신의 중추이자
군사적으로도 서해안 방위의 핵심 역할을 담당해 온 홍성은
그 관할 범위가 넓었던 만큼 순교자들도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에 홍주부를 두어 관찰사가 주재했던 홍성은 관할 구역만 해도
북으로는 평택 이남, 동으로는 경부선 서부 지역, 남으로는 금강 이북의 22개 군에 이르렀다.
홍성읍의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는 홍주성은 전체가 순교 현장이다.
읍성 안 관아시설은 특히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형벌이 집행되었던 곳으로
구체적인 순교터로는 목사나 진영장의 동헌 앞, 옛 저자거리,
홍주 옥(현재의 검찰청 및 법원 자리) 등을 들 수 있다.
그 외에도 북문 밖, 생매장 터로 사용되었을 곳으로 추정되는
홍성천과 월계천의 합수머리 부근도 있다.
이렇듯 구석구석이 처형지로 사용됐던 홍주성은 아직도 무심하게 남아 있는 고목들과 함께
당시 교우들이 받았던 엄청난 핍박을 그대로 전해 준다.
홍성읍 시가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조양문인데
홍주성을 드나들던 동서남북 4개 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동문이 바로 조양문이다.
당시 홍주군이 관할하던 넓은 지역에서 붙잡혀 온 교우들은 이 문을 통해
홍주성 안으로 들어갔고, 멀쩡하게 걸어 들어갔던 그들은
시체가 되어 성벽 밖으로 던져졌던 것이다.
조양문의 왼편으로 골목을 조금 돌아가면 군청이 나오는데
그 입구에 서 있는 것이 홍주아문이다.
순교1터 - 증거터 목사 동헌
동헌으로 가려면 특이하게 생긴 홍주아문을 거쳐 홍성군청으로 들어가야 한다.
군청 건물을 돌아 뒤로가면 안회당이라는 고색창연한 건물이 있는데
이곳이 옛 동헌으로 쓰였던 것이다.
이곳 동헌은 천주교 신자가 제일 많은 내포지역을 관장했던
홍주목사가 머물던 곳이다
홍주의 순교자들이 잡혀와 처음으로 신앙을 증거하던 장소로서
갖은 고문과 배교를 강요 당하지만
순교자들은 끝까지 신앙을 지켜 옥에 갇히게 된다.
순교2터 - 순교터 홍주옥
군청 앞으로 다시 나오면 홍주읍성의 남문인 홍화문이 높다란 성곽 위에 보이고
홍주역사박물관과 넓은 주차장이 있는 곳에 감옥터가 있다.
해미읍성에서 보았던 감옥터와 흡사하게 지어놨다.
충청도의 첫 순교ㅓ이며 113명의 순교자가 탄생한 곳이다.
첫 순교자 원시장 베드로는 이곳에서 동사로 순교하였다.
굶주림과 목마름, 교수형, 장살형, 질병등
다양한 형태로 죽어간 곳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첫선교사인 성 모방신부, 성 샤스텡신부가
홍주관아에 자수하여 잠시 갇혀있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성 다블뤼 주교와 성 오메트로 신부, 성 위앵 신부,
성 황석두 루가 6분의 성인들이 잠시 머물렀던 거룩한 곳이기도 하다.
감옥터 옆에는 우물터가 있는데 충청도 최초의 순교자인
복자 원시장 베드로는 3개월에 걸친 매질에도 죽지 않자
이곳 우물물을 이용해 얼려 죽이는 형벌을 받았다.
순교3터 - 증거터 홍주 진영
감옥터에서 성지 성당 앞을 지나 조양문 앞으로 가면 KT 건물이 나오는데
그 건물 한쪽 벽 화단에 진영터가 마치 게시판처럼 세워져 있다.
진영터는 홍주읍성을 지키던 군인이며 죄인들까지 다스렸던
진영장이 머물던 곳으로 4대문 중 가장 중심인 조양문 바로 앞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 가장 많은 고문과 박해가 있었으며
가장 많은 피를 흘린 순교터이다.
순교4터 - 증거터 저잣거리
저잣거리는 장이 서던 곳으로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장터에서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조리돌림을 했던 곳이다.
순교자들도 관아로 끌려갈 때나 처형되기 전에 이곳에서
조리돌림, 침 뱉음, 돌팔매질 등 조롱을 당하였다.
제5터 - 순교자 참수터
신유박해 때 황일관(시몬)과 병인박해 때 유(마르타)가 참수형을 받은 자리다.
일반적인 형장의 조건인 개천과 백사장,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장소 등을 갖추고 있었던 곳으로
북문교 건너(우측방향) 월계천변에 있다.
순교6터 - 순교자 생매장터
천주교 4대 박해 중 최대 박해인 병인박해 때
너무 많은 내포의 천주교인들을 수용할 감옥이 부족하자
그 대응책으로 일부 천주교 신자들을 생매장한 곳이다.
이곳은 월계천과 홍성천이 만나는 가장 넓은 모랫가장이 있어서
죄인들을 생매장하거나 시신을 이곳에 버리기 적합한 장소였다.
교회 순교록에 따르면 홍성의 초기 박해(1791-1801년) 순교자는 8명으로
이 중 원시장 베드로, 방 프란치스코, 박취득 라우렌시오, 황일광 시몬 등 4명이
시복시성이 추진 중인 하느님의 종이다.
중기 박해(1812-1839년)에는 이여삼 바오로 등 4명이 순교했으며,
이후 1866년부터 1870년대 초까지 계속된 병인박해 때 가장 많은 200명이 순교해
교회 순교록과 관변기록 등 기록상 확인된 홍성 순교자는 모두 212명에 달한다.
그러나 순교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무명 순교자를 감안하면
실제 순교자는 700여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순교록에 의하면 홍성 순교자는 참수형보다는 교수형이 많고 생매장된 순교자도 있다.
많은 순교자들이 성 안에서 처형된 후 그 시체는 성 밖으로 내던져졌다.
군청을 나와 왼편으로 약간의 언덕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리 높지 않은 성벽이 나온다.
바로 이 성벽 위에서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오직 천주를 배반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차디찬 시체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홍주순교자 기념성당 (홍성성당)
해미순교성지
어느 순교지나 선조들의 위대한 정신과 숨결이 느껴져 후손을 자랑스럽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폐부를 찌르는 깊은 신음과 함께 서려 있기도 하다.
해미 성지는 다른 어떤 순교지보다도
당시 참혹했던 핍박의 흔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백 년의 박해 기간 동안 단 한 차례도 그 서슬이 무뎌지지 않았던 해미는
수천 명의 이름 모를 순교자들이 웅덩이와 구덩이로 내몰린 채
생매장당한 기막힌 사연을 갖고 있다.
속칭 '해뫼'라 일컬어지는 해미 고을은
역사적으로 조선 초기에 병마절도사의 처소를 둔 곳으로서,
조선 중기에는 현으로 축소 개편된 진영에 1,5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무반 영장이 현감을 겸해 지역을 통치하던 곳이다.
내포 일원의 해안 수비를 명목으로 진영장은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해미읍성
1790년에서 1890년에 이르는 100여 년의 기간 동안
해미 진영은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처형했다.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조정이 천주교 탄압을 공식화할 때뿐만 아니라
해미 진영은 끊임없이 내포 지방의 교우들을 잡아들여 죽였다.
이 박해 기간 동안 해미 진영에 있었던 두 채의 큰 감옥은
잡혀 온 교우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매일 서문 밖으로 끌려 나와
교수형, 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 등으로 죽어 갔다.
또 더욱 잔인하게 돌다리 위에서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돌에 메어치는
자리개질이 고안되기도 했고,
여러 명을 눕혀 두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했다.
혹시라도 숨이 끊어지지 않아 꿈틀거리는 몸뚱이를 발견하면
횃불로 눈을 지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해미 진영의 서문 밖은 항상
천주학쟁이들의 시체로 산을 이루고 그 피로 내를 이루었다 한다.
한 명씩 처형하는 데 지친 관헌은,
특히 1866년 병인년에서 1868년 무진년에 이르는 대박해 시에는
시체 처리를 간편하게 하기 위해 생매장을 하기도 했다.
해미 진영의 서녘 들판에 수십 명씩 끌고 가
아무 데나 땅을 파고 구덩이에 산 채로 집어넣고 흙과 자갈로 덮어 버리는
참혹한 행위가 수없이 되풀이 됐다.
이렇게 스러져 간 순교자들은 그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누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수천 명으로 추정되는 순교자들 중 70여 명만이
이름과 출신지를 남기고 있으나 그나마도 불확실하고
나머지는 이름 석 자 하나 남기지 못한 무명 순교자들이다.
이들이 숨져 간 유적지는 현재 깨끗하게 단장돼 있다.
'예수 마리아'를 부르는 교우들의 기도 소리를
'여수머리'라 알아듣던 주민들의 입을 통해
'여숫골'이라는 이름으로 전해 오는 생매장 터인 진둠벙 주위로
십자가의 길 14처와 노천 성당이 조성되었다.
순교자들을 고문하고 처형했던 해미 읍성(사적 제116호)에는
동헌과 교우들이 갇혔던 옥사가 복원되었고,
그 앞에는 고문대로 쓰였던 호야나무(충청남도 기념물 제172호)가 무심히 남아 있다.
이 나무 위에 머리채를 묶인 순교자들이 매달려 모진 고문을 당했던 것이다.
서문 밖 순교지에는 1956년에 서산 성당으로 이전 · 보존되던
자리개 돌다리가 1986년에 원위치를 찾아 복원되었다가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 개설로 인해 2009년 1월 8일
해미 생매장 순교성지 내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서문 밖 순교지에는 현재 자리개 돌다리 모조품과
1989년에 건립한 순교현양비가 우뚝 서 있다.
1935년에는 서산 본당 범 베드로 신부에 의해
순교자들의 유해와 유품들이 발굴되어
30리 밖 상홍리 공소에 임시 안장되었다가
1995년 원래 순교 터인 생매장 순교지의 해미 순교탑 앞으로 이장되었다.
해미 성지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성지는 한티 고개이다.
이 고개는 당시 죽음의 길로 악명 높던 순교자들의 압송로로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도 그 기록이 나온다.
외길이지만 압송로 표지 리본이 눈에 잘 띄게 달려 있어
별 어려움 없이 순례할 수 있다.
해미 성지는 3000여 명의 무명 순교자들의 숭고한 희생과 신심을 기리기 위해
2003년 6월 새성당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소성당과 대성당은 무명 순교자들의 생매장 구덩이를 상징하는 원형구조로 건립되었고,
실내 장식과 외부 건물 또한 죽음을 통해 영원한 안식에 이른 순교자들을 기념하여
쉼터의 이미지를 갖도록 했다.
성당 뒤편에는 묘지 형태의 유해참배실을 건립하였다.
유해참배실은 2009년 '해미순교성지 기념관'으로 새롭게 단장해 축복식을 가졌다.
2008년 충청남도 문화재로 지정 고시된 해미 성지는
2015년까지 지자체와 함께 역사를 간직한 순례지로 개발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우선 순교자들이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장으로 끌려가
순교한 뒤 매장되는 과정을 복원한 십자가의 길 14처를 읍성 곳곳에 세웠다.
이어서 성지 인근의 사유지를 매입해 순례자의 숲, 연못, 청소년 수련관 등을 세우고
성지 주변 해미천도 순차적으로 정비할 계획이다.
해미 성지는 교통이 사통팔달(四通八達)로 시원스레 뚫려 있어
다소 거리는 멀지만 당일이나 1박 2일로 순례하기는 안성맞춤이다.
인근에는 수덕사로 유명한 덕산 도립공원과 가야산, 덕산 온천, 태안 해안 국립공원
그리고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을 볼 수 있는 안면도 등이 자리하고 있어
주말 가족 순례 코스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첫댓글 아름다운 성지마을 세세한 설명까지
감사히 다녀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