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2월) 『묘신니부인답서(妙心尼御前御返事)』-병의 원인과 전중경수-(1)술작(述作)의 유래
본초는 1275년 8월 16일, 니치렌(日蓮) 대성인님 54세 때 쓰신 어서입니다. 진필은 현존하지 않지만 총본산 대석사에 제2조 닛코(日興) 상인의 사본(寫本)이 엄호(嚴護)되어 있습니다.
1274년 4월 8일, 사도(佐渡)에서 가마쿠라(鎌倉)로 돌아오신 대성인님은 헤이노사에몬노죠요리츠나(平左衛門尉頼綱)를 배알(拜謁)하고 세 번째 간효(諫曉)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막부(幕府)는 방법(謗法)을 엄계(嚴戒)해야 한다는 대성인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대성인님의 입을 막기 위해 회유(懷柔)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국은(國恩)을 갚기 위해 세 번까지는 간효(諫曉)하되 받아들이지 않으면 산림(山林)에 몸을 숨기려고 생각했노라.」(신편어서 p.1153)라는 말씀처럼 대성인님은 닛코(日興) 상인의 교화(敎化)로 단월(檀越)이 된 하키리사네나가(波木井実長)의 소령(所領)이었던 미노부산(身延山)으로 들어가시어 일생의 화도(化導)의 대성(大成)과 제자 육성에 심혈을 기울이셨던 것입니다.
입산(入山)하신 지 반년 후인 같은 해 10월 5일에는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에서 예증(例證)하셨던 몽고 내습(來襲)이 현실이 되어 국내 정세는 돌연 긴박감이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본초의 계년(系年)에 대해 예부터 1278년 설과 1275년 설, 두 가지 설이 있는데 본초에 「당시의 이키(壱岐) · 쓰시마(対馬)의 사람들은 병은 없었지만 모두가 몽고인에게 일시에 타살(他殺)당하였느니라.」라고 있기에, 본종(本宗)에서는 몽고 내습 다음 해, 즉 1275년이라 결정하고 있습니다.
대고중(對告衆)인 묘신니(妙心尼)에 대해서는, 후지군(富士郡) 니시야마(西山)〔현재의 시즈오카현(静岡県) 시바카와쵸(芝川町)〕의 오우치(大内)씨 부인, 혹은 카지마소우(賀島荘)〔현재의 후지시(富士市)〕의 다카하시(高橋)씨 부인이라 보는 설, 또는 지묘니(指妙尼), 혹은 쿠보니(窪尼)와 동일 인물이라 보는 설도 있는데, 선사(先師) 닛타쓰(日達) 상인은, 닛코(日興) 상인의 백모(伯母)이신 다카하시(高橋)씨 부인 · 지묘니(指妙尼)와 동일 인물이며 남편 서거(逝去) 후 후지군(富士郡) 니시야마(西山)의 쿠보(窪)로 이주했으므로 쿠보니(窪尼)라고도 칭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