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산악회 후배의 전시회에서 만난 옛 산 동료들과 나눈
좌담회 이야기들을 두서없이.,년도별로 정리하지않고
올렸습니다
몇 번의 수정을 해야 정리가 될 듯
ㅡ60년도 말 쯤인지 김지련 씨,춘길형과 백운대 후면 지나
숨은벽을 지나는 중 요들송 '스위스아가씨' 를 부르고 있는사람을 만났는데
,춘길형이 박 영래씨라 소개해줘서 첫 대면했지
mrs에서 한참 숨은벽 을 개척하고 있었는데 백경호씨를 비롯해서
쟁쟁한 바위꾼들의 모여 . 원모형이 회장이었고 내 또래로 김형삼.
나보다 어린친구 중에 민상기가 기억나네
상기는 길원이 나이 정도
춘길형은 mrs 멤버는 아니였을거야
언젠가 영래형과 만났을때 거기서도 춘길형은 바위 잘하는 친구로
알려져 있었다고,
영래형 요들송 역사는 술 먹은뒤 에피소드보다 길지요
ㅡ하산하면서 일렬 종대로 내려올때
선두가 영래형 이면,스위스아가씨,
영후가 앞에서면 i've been ,working on the rail road,,
같은노래를,부르면서 우이동으로 행진했지
노래수준이 높았어요
아득가,저 높은산,또 '하루의 산행을시작하세'로 시작하는,
기영이 취하면 잘 부르는, 긴 노래의 선생님이 모두 영래형
ㅡ민태가 다녀온 월악산도 많은 추억과 등반기록을 가졌던 산,
정찰등반을 다녀온 선배들이 전하는 코스개척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지요
표고900 m 까지는 별 특징이 없다가 정상 까지100m이상이
커다란 함지막 위의 막대기를 꽂아 놓은 형상의 바위덩어리,
서울근교에서 볼수없는 석회암으로 모든 홀드와 스탠스가
불안정해서 잡거니 당기는 기술로는 통하지않 는 새로운 경험이었지요,
아주 미세한 충격도 피해야, 낙석에 안전할 수 있었는데, ,,
당시 공격대원으로 영후,길원, 현국.영래형.상익,,나 정도,
사진을 찍어 공격루트를 정하고 필요 장비를 뽑고
등반가능 루트를 4개정도 추정한 뒤 그해 가을 등반을 할수 있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배낭 무게를 줄이기 위해 텐트 대신 비닐을 시용,
아침이면.입김과 체온으로 비닐에 수분이 생겨
닭털 침낭이 젖어 산행 후 말렸야 했던 기억도,
적당한 홀드를 찾지 못해 큰 키의 영후인지 김선생님인지
어깨 위를 춘길형이 올라가기도.
이 산은 달빛속에서 보는100미터의 암괴가 정말 환상 ,
가슴을 설레게,
여배우 황신혜 20대 때..명동칼국수집에서 그녀 어머니와
온 걸 봤을때 처럼 ,나는 이럴때 왜 오줌이 마립지 ㅎㅎ
그 감동으로 몇 년간 년말 연휴때 월악산 등정 후 수안보로
내려와 온천 물에 담그는 호사를 누렸는데,
그때 입탕비가 50원 ,신년초에 생일인 대원2명이나 있어
덩다라 생일턱을 같이 했는데 누구더라?
화강암에서 쓰던 앵글이나 하켄 대신
러프라는 얇는 하켄을 처음 봤지요.
ㅡ초등시 그 팀 에게주는 완등코스 명을 정할수 특권이 있어요
선인의 박쥐길,표범길, 인수 의 대길,쥐너드ab처럼
월악산 개척시 이때 는 코스 이름을 생각하지 못 한듯,
'달밤의 두 그림자' 같은 낭만적인? 이름도 있건만,
영래형이 술을 안 마셨나?ㅋㅋ
만경대 여러 코스 초등하고 "영광의 벽"이라 불렀지만
나는 영후의 영과 광식이의 광을 따서 라고 혼자 생각했지요
ㅎㅎ 이제 얘기지만
ㅡ엠포르는 묘한 인연으로 인수봉보다는 노적봉을 ,
백운보다는 북한산장을 선호했지요,
인수봉의 그 수많은 코스개척 할때 영구형의 도움없이는
꿈도 못꾸었을꺼야.
언제 추석때 경진이가 백운산장 그린 수채화를
영구형이 갖고싶어 해서 기증했다는얘기를 듣은 게
그분 근황의 마지 막.
산장 철거문제로 도울 길을 재근이와 성훈이가 찾고
표지판도 받았는데.
내가 67년여름 윤의영씨 따라 백운대를 갔을때
영구형을 산장에서 처음 만났는데 움막같은 곳 에서
국문학자 이숭녕 교수와 얘기하고 있었지요
산장 지기가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5년전 이나 10년전이나
하나 나아지는게 없는 모습에 웬지 실망해서
사실 그후 산장을 지나면서도 아는 체를 않했지요
사람은 세월따라 바뀌는데 대접 받지 못하고 그대로
살아가는 선배 모습이 싫어서겠지만.
기영이는 꼭 인시하고 나오는데. 나는 그렇하지 못했어요
그건 없어진 북한산장에서도 마찬가지
조금 슬퍼지네
ㅡ자주 만나게 되어 친해진 후.영구형한테 직접들은 얘긴데
결혼식을 백운대 꼭 대기에서 했을때 이교수가 주례를 섰다고
산에서 결혼을 한다는것도 특이 했고 그게 신문기사로
사회면 보도가 되고,
대입시험보면서 이희승 문법은 알아도이숭녕은 잘 몰랐는데.
그날 백운대를 지나는 젊은 등산객들이 모두 이교수한테
군인 경례를 해서 물어보니 대학 산악회장을 맡고 있을 때라,
반바지를 입고 흰머리의 키가 작은 분이 느릿느릿 말투로
인사를 받는게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 는 생각이
ㅡ궂은 일을 하는게 산장 지기겠지만.북한산장 김준호씨도 생각난다
우리 산장옆 샘터에서 좌판 깔고 과자류를 팔던 분인데,
동준형과 김지련씨가 북한 산장 세로 들어설 때 그곳에 안주할 수 있도록
서울 시청에 많은 노력을 해주었지요
그래서 그런지 아저씨란 호칭을 계속했는데
언젠 가부터 서로 불편해서 .
우리가 야영대신 산장에 자리 잡으면 숙박비는 안 받았다고 들었지
ㅡ경찰에 구조대가 생기면서 영구형도 산악사고시 일손에서
벗어날수 있었겠지
덩치가 나보다 작은 분이 사고나면 조난자 등에 업고
우이동으로 실어나르곤 했 지요
덩치크다고 무거운 조난자 구하는건 아닌 모양 ㅎㅎ
ㅡ
-웃기는 인생 김씨..
내가 꼭 한번 하고싶던 얘긴데 명호가 마침 말 꺼내서..ㅎ
엠포르에서 만들어 놓은 등산객용 세멘트식탁에
소주 라면 몇개 올려놓고 팔다가,장사 좀 되니 사정하여
주말에 우리산장 옆 칸방을 빌려 숙박해가며 물건 쟁여놓고
밥 얻어 먹어가며 장사하다가..운좋게 북한산장 관리인이 되어
우리가 만들어 놓은 샘터물을 길어 놓고 돈 받았지
ㅡ팔다가 졸지에 등산객들 아첨으로 김씨가 김선생이 되어
간이 배밖으로 나왔던 사람..
이력이 붙더니 그사람이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던
김지련씨에 대한 호칭이 선생님에서 김씨가 되어버린
기막혔던 인생역전(?)..
에휴~ 웃어야할지..
ㅡ김선생님한테 그럴수가,?
내가 알았으면 뒤엎어 버려도 속이 안 풀리겠네,
동준형괴 김선생님이 하던 얘기를 들어서 아는데
그때 두분 아니면 시청내정자로 교체되야하는 수순,
고마운걸 모르는 사람같으니
ㅡ김씨가 돈을 벌어서 간이 밖으로 나을 정도면,
영구형은 재벌은 안돼도 준재벌은 됐겠다ㅋㅋ.
괜히 내가 내멋대로 판단 했구만
ㅡ우리가 산장 지으며 거의 매주 주말 야영할 때
그양반 처음에 거지처럼 나타나서 정말 라면 몇개
소주 몇개 놓고 팔았는데..
다 팔리면 그돈으로 다시 물건하러 우이동 내려가며
내게 부탁해서 내가 대신 팔아주기도 하고
1박2일 있는동안 세 끼니도 우리가 멕여주고..
그래서 북한산장 지기 하면서 지 과거 아는 우리 오는걸
오히려 꺼려하기도 한 거 같고..
산장에 들리는 등산객들이 편의 좀 얻고자 선생 호칭 하니까
지가 진짜 김씨에서 김선생된 줄 착각하여
내게도 배내밀려 하기에 괘씸해서 돈받고 팔려고 길어놓은 물
펑펑 쓰고 온 적이 있는데..
ㅡ젊었을 때 순수한 마음에서 맘 상했던거라 그때 기억은
깊이 남았지만,실상 나이 먹어가면서 더한 꼴도 본거는
오히려 별로 충격으로 안남으니 감정이 꽤 무뎌지긴 한 모양..ㅎ
ㅡ들을수록 괘씸하네
나는 아까하던 얘기로
이숭녕교수가 있던 문리대 산악부가 많은 산행을 했다고 알려졌는데,
영래형은 공대산악부가 더 활동을 했고 바위꾼들도 많아서
그들에게서 본격 적인 암벽 기술을 배웠고
그 밑바탕으로 지금의 박영래가 있다고
이것도 처음 듣는 얘기,
그럼 춘길형은 누구에게서 암벽기술을 배웠을까?
(계우 한양대를 거쳐 취너드초청으로 )미국간 선우중옥씨?
모르겠네,가끔 영래형과 중옥씨 얘기를 했지만
ㅡ68년 산장 짓고난 후 암벽을 시작했는데
춘길형은 어디서 배워왔는지 그때부터 유일한 톱,..
숨은벽 개척 멤버로 참여했다가 거기서 실력 인정 받고왔다고
자랑도 하면서..ㅎ
ㅡ균호야 나도 마찬가지야,
공백기간이 70년대 말 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지방(울산)근무하면서 엠포르와는 담을쌓고 살아야했지요
그때 후배들이 다리를 놔줘 결혼해서 가장이 되었고
어쩌다 서울오면 친구들 만나느라
산에 갈 생각은 꿈에 나,
그때 불암산에서 만난 석주.경진이와 종석같은 젊은 후배들이
산악회를 끌고나간 덕분에 지금의 명맥을 유지했지요
아직 다리가 견딜만 해서 산을 찾고 있을 뿐.
산 얘기하면, 쾌쾌 묵어 현실감 없는 얘기인 줄 알면서도
기억을 더듬어 간추려 보는데,연도, 이름같은 것이 틀리곤 해 ㅋㅋ
ㅡ그랬구나,영후는 60년도 후반기 얘기를 잘하지 않는 편
,왜냐면.그런 얘기 관심/묻는 사람이 없지 ㅎㅎ
그때 용암샘 정비하고, 산장짓느라 우이동 안성상회부터
무거운 시멘트와 스레트 지붕 지어 나른 주역들이 4명,
그때(지금 뉴욕에 살고있을) 똥차형도 있었을꺼야,
춘길 형은 숨은벽 코스개척 하면서 등반실력, 기술이 한층
업 그래이드 된 것 같고
공격대원들이 유명산악회 에서 착출한 산꾼들이니 ,
,숨은벽이 끝내고 형이 불암산 동남벽을 바로 시작했던 거 아닌지?
동남벽에서 흥원이도 만나곤 했는데.
동생인 길원이가 적극적으로 산행참가 하면서 안 보이고
똥차란 3~5인용 코헬에 밥을 하면 산장 지으면서
그걸 혼자 먹어서 똥차라 불렀 다며?
작은똥차도 여러명 있었고,
그때가 라면 나오기 전 같은데?
균호와 희경은 등치나 좋지
영후는 와르바시 같았는데 ㅋㅋ ,
똥차형 친구 연찬형도 열심히 모임에 나왔고
그땐 진유명씨 합류하기 전인데도 여자회원이 많았지요
ㅡ대표/정기는 영후군대 가기전 영래형을 통해
(동준형 회장때) 산잡지에 회원 모집을 해서 합류 했으니
70년도 넘어서 같아,
산장지을때 동준형은 서울에 없었지?
지방 근무했을꺼야
ㅡ산장 지을때는 산악회 회장을 지말용씨가 맡고 있을때
아닌지,?
ㅡ내가 윤의영씨로 떨어져 엠포르 합류했을 때는
김선생님이 회장.몇년을 하시다 동준형으로
또 몇년후 동준형 구미 간뒤로 원모형이 산악회를 이끌었지
ㅡ불암산 얘기도 안할 수가,
몇년도인지 겨울 인수봉 사고이후 산악회 전체에
안전에 대한 경각심이 제고되어 사고방지를 위한 암벽훈련
할수있는 연습장(게렌데) 를 찾아 용도에 맞는코스를
개척 하면서 우리도 적소로 불암산을 정하고
그곳에서 훈련집중하다 천보암쪽에서 암벽하던 산꾼을
맞났는데 여상이와 응보가 그들,
이쯤 산악회 중심이었던 춘길 형이 사업에 몰두하면서,
소원해질때 석주 히수,경진이가 근동.종석이들과
찌그러진 그릇을 펴 여기까지 왔지요
영화는 대표와 같이 입회한 것 같고 여기부터는 다 아는 얘기
ㅡ원모형이 불광동에서 역촌동으로 이사할때
나 길원,현국이가 있었는데 그때쯤 dg라이선스lp 판들이
막 국내 소개될 때라 형 듣던 레코드 10장을 받아 가져왔지
원모형과는 그후 음악회 에서 가끔 만나곤 했고
ㅡ지말용씨를 춘길형은 지 아저씨라 불렀지요,
영후는기억할꺼야,
긍대 김선생이 영구형보다 연배시겠지?
ㅡ지말용씨는 동준형처럼 고려대를 졸업하고 ,경복 동기
ㅡ.그러니 초기 염포르에는 원모형을 중심으로 하는 서울법대 계열과
지말용씨,동준형를 축으로하는 고려상대
그리고 ,김지련씨,김종성,원하욱씨를 묶는 직장인의
세그룹이 있었지요
ㅡ1968년에 산장 짖기 시작했죠
6월말~7월초부터로 기억 되네요
그때 나는 고2였는데 중간고사 시헙기간중에
시멘트 1포(42.5 Kg) 메고 용암문까지 갔던 기억을 하고
그떄 엠포르를 알게 되었지요
그해 8월15일은 한국산악회 주최 전국 명산 순례 종착점 종료를
우리 산장에서 행사를 했던 것으로 생각나네요
이떄 도산 이 은상 시인께서 한국산악회장였어요
ㅡ원모형은 1980년쯤에 은벽산악회에서 회장직을 맡아
안나푸르나 갔다가 성공하지 못했어요
그리고는 자주 뵙지 못햇어요
포철에 근무하던 윤종형님이 있었고
진흥기업에도 종철형님이 , 구연찬선배님 구영창선배 심만섭선배,
정 관선배님은 지말용선배님의 조카 였어요
ㅡ진유명씨는 1972년 말쯤에 엠포르와 인연이 되여
1974년도 국토종주 2차 이후부터 같이 활동 했던것으로
이것은 윤상익씨가 잘 알것 같아요
ㅡ 산장앞 샘은 있던 샘을 정비한거요 아니면 샘을 파서 만들었나요?
ㅡ경복고 출신(주로 서울법대이고 정윤종 심만섭등. 동준형은 연대)과
군대동창(김지련,원하욱,김정성)팀이 산행중 우연히 만나 의기 투합하여
원모형 주축으로 만들어진 산악회가 엠포르 팀.
EMPOR작명도 독일어에 능통한 원모형 작품.
거기에 한국산악회에 속했던 지말용 초대회장의 이런저런 안면으로
한국산악회 회원이 몇명 가입하고
기존회원 소개로 계속 새끼쳐서 한명 한명 늘어남 .
오퍼상 하던 구연찬.도서외판원 정용섭(군용휘발유버너와
반합,코펠에 노랑뺑끼 칠하고 다녀 별명이 똥차)
박동준씨건설공제조합 친구 장세민,체신부 이준도(균호를 델구옴),
고려피혁 이흥원.한국산악회 양이사 딸,이양,김양,
김지련씨가 델구온 이재명,민광식,내가 델구 온 유용주,박창규.
속리산에서 만나 가입시킨 윤영실 강순희 춘길형 처 문모양,
미쓰김이 많아 ABCD 까지 있었고..
너무 길어 다 못 ㅆ겠군..ㅎ
ㅡ처음에는 샘이 있는줄 몰랐다가 우연히 발견되었던 걸
우선 사용하기에 꾸미고 이듬해 1969년에 춘길형 균호형과 희경형등
이 작업
나는 고3때 해서 산장 확장작업 하면서 샘을 용암샘이라
명칭을 붙이고 재정비해서 많은 등산객들 좋은 물 유용한 물이 되면서
샘 주변이 유명한 캠프장이 되었어요
ㅡ산장샘은 68년도 까지도 정릉샘터로 불리우던 물 흐르는 웅덩이..
늘 물받느라고 줄이 길었는데 산장 지으며 물 저장 세멘탱크를 만들었지.
ㅡ아끼 내가 얘기한 것중에 정기 ㅡ정대로,
겨울 인수 봉사고는 71년도로 정정
-길원이,석주가 얘기하는 은벽의 안나푸르나 원정대건은
당시 원모형이 어떻게 involve됐는지 모르겠는데
은벽은 83년9월에 한번, 84년12월동계에 또한번 등정을 시도했으 나
모두 성공을 못합니다
두 원정대의 대장을 맡았던 안창렬 얘기는
83년은 눈사태로 대원과 장비를 잃고 철수,
84년은 여성대원과 셀파가 정상등정했으나
하산 중 기록을 담은 카메라를 분실하여( 셀파가 엄청난 바람에 실종)
기록으로 인정 받지 못하는 비극으로 종료,
이때,같은 산에 있던 프랑스대가 동계 초등을 의식하여
이의를 제기 했는데도 응답을 못해 기록을 빼앗겨야 했다고 들었어,
원전대에 참가하지도 않았는데 실패의 멍에를 책임 져야한다면
원모형 꽤나 답답했을꺼야
ㅡ
-나,영후 울산 내려가 산업전사로 빡빡기고 있 을때,
상익이 이천에서 축산업에 몰두하고 있을 때,
기영이 지방에서 이틀고치고 있을때
종석이가 산악회를 맡기전까지는깜깜해요
누가 얘기좀 해주세요
현국이는 전혀 활동이 없었나?
이번 4월무당골 에서 오랫만에 본 인걸/민태는 그 시기에
활동 했겠네?
ㅡ70년대초만해도 연맹보다 한국산악회가 훨씬 활동적이고
해외원정도, 인적자원도 우세했어요
국립공원제도가 자리잡고,국가예산을 쓰고.산악활동의 인허가를
연맹에서 주관하다보니 역전된 듯
대학산악연맹에서 매년 기존 암장보수관리하여 안전사고
방지하는 것도그 일환이라는 재근얘기 수긍이 갑니다
ㅡ산행지,취사,야영하는데 아무런 제약 없었던 시절 ,
주말이면 야영 참 많이 했습니다
큰 키스링 지고 무게 때문에 일어서지 못하면 옆에서 부축하고
에구 ,야영끝나 캠프 사이트 떠날때까지 늘 배낭 챙기는데
늦는 대원이 한 명 있었지요, ㅎㅎ. 누굴 까요?
내일 그 친구 생각하며 산 다녀 오겠습니다
우스게 소리 하나 더,
현대조선소발령받고 울산내려와 근무부서를 배정받는
면접을 하는데 조선설계실 전기부장이.내 인사기록카드의
취미란에 등산이라 쓴 걸 보고, 한산배지를 보여 주며
what's it? 묻기에 한산이라 대답했더니
'당신 나와 일해야겠어 '해서 10년 이상을 같이 한 인면이,
한전근무할때 개인적으로 회원된 서 윤석 부장 인데.
우리산악회에선 한산가입한 대원을 내후론 못봤어요
한산에 kcc란 기술위원회가 있었는데
뛰어난 등반 기술과 대형산악 사고시 구조대 역할까지 하여 ,
각 산악회 의 유명한 산꾼들이 이름값을 톡톡히 ,
원모형의 mrs도 이 위원회를 따른게 아니였을까 하는 혼자생각 ㅋㅋ
ㅡ 원모형 얘기에 한가지 더 ,
히말라야같은 고산 등반하기전 정찰등반( site survey)을하는데
원모형이 길원 얘기대로 80년 정찰등반때 안나 푸르나를
대원들과 다녀 왔답니다
그후 두세번 더 정찰을 하고 3년후 본대가 출정
ㅡ그리고 은벽에서 2번째 원정에서 써미트하고 하산중에
셀파가 죽고 카메라 분실해서 인정을 못받았다는사건도
금시 초문인데요.
누가 알려 줬나요?
ㅡ년도,이름 들이 부정확 해도 60년후반부터 70년 중반까지
엠포르 부침을 거슬러 보았는데 기억엔 한계가 있음을,
한편 70년 중반부터는 악우회 독주가 시작되요,
인원 장비,예산 모든면 에서 대학산악부와
여러 일반산악회를 합친 것 보다 .많은 수확과 기록를 남기는데
이들이 짧은 활동기간에 비해 엄청난 성과를 거둘수 있던데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요?
ㅡ그때 악우회 활동하던 사람들도 세월은 어쩔수 없겠지
우리가 아는 윤대표,유한규,임덕정,허욱,이훈태.백승기,
김광근들을 볼때,이미 현역을 한참 지난 나이들.
대표가 상익과 같은 나이로 추정되네
현재 등반활동 한다면, 전성기 지나고 몇 십년 후배 들이겠지
ㅡ영래형에게 들은얘기 ㅡ
악우회 설악산 동계훈련에 참가대원이 50명 정도.
이 인원이면 에코,요델 어센트,하켄을 합쳐도 안되는숫자
알다시피 대포가 여유가 있는 집안이 아니잖아,
병벽장비가 싸기나하냐구?,개인이 감당하기엔 벅차지요.
어떤 재원으로? 이 식구 먹이고,장비갖추고
해외원정 비용을 감당했을까?
ㅡ 대학산악부들은 매년 학교에서 지원해주는 일정금액과
선배들의 찬조금,본인 부담비는 3분의1 정도
ㅡ누가 삼악산 춘클릿지를 가자는데.
삼악산에 춘길형과 개척했던 의암5봉 말고 어디쪽에
길을 냈을까?
코스명도 춘클(춘천 클라이밍 크럽)이 무슨소리인지?
ㅡ어제 술을 조금 해서 up 됐었어,
고령산악회 정훈이 얘기를 창호와 했고
성남에서 치과했었는데 구강암으로 하늘나라간지 오래됐다는군
설악가 만든게 이 친구라
ㅡ어느 해 인지,삼악산 의암 댐쪽으로 접근해서 작은 암자(흥국사?)
위에 캠프를 정하고 앞에 있는 작은 5봉무리에 코스개척 했을 때
ㅡ나는 주말마다 합류하고 영후.,현국은 주중에도
봉우리 1개씩을 춘길형과 두들이고 있으면
강 건너편 버스 내린 곳에 커다란 직벽( face)이 보여
코스 가치로 볼때 5봉보다 앞벽이 근사하게 보여 얘기했다
일축 당했었는데
그때 볼트 쓰느걸 되게 싫어하는 풍조가 있어,
인수봉 에코길 알기를 우습게 알고,ㅋㅋ.
현국이가 지 나이또래 남녀학생 둘이 우리텐트 옆에서 야영할때
형 제네 들 텐트속에서 뭘하죠? 하고 묻곤했지요
우린 거의 한 달만에 5봉우리 마무리 했던것 같은데
김지련씨가 회원들과 마지막 주에 왕창 와서 축하등반했고,
석주가 설명해준 춘클릿지가 그 직벽인 것 같아
그쪽바위도 영 깨끗하지 않아 애먹었지,월악처럼
영후가 잘 기억할꺼야
ㅡ울산에서 올라와 어느 해 ,직장 동료들과 야유회로 베이스 캠프 를
찾았더니 흔적도 없고 ,절은 더 커지고 들머리 조금 올라 오니
산장도 새로 생겨 웨스턴 음악과 커피를 마시고 ,
우리가 올랐던 코스는 완존 잡목 전성 시대
ㅡ영후야,그때 어떤 동기로 이곳을 코스개척 타겟팅 했지?
인적없고,접근하기 쉽고,서울서 가깝고
한참 설악에 몰려갈때 설악안가도 같은 강뭔도 라? ㅎㅎ
ㅡ춘천행 버스를 마장동에서 타고 의암호 다리 건너 내리면
오른쪽에 큰벽이 보이지요
우리는 터덜터덜 다리를 걸어서 들머리로 왔고ㆍ
ㅡ삼악산 기억이라면 70년인지 71년인지 여름철,
나는 입대대기중 백수시절에 춘길형,현국이,나 셋이서
흥국사 밑에서 한 보름쯤 야영한 기억.
그 동기란게 우습게도 삼악산 등반하고 하산중에
암벽모양이 괜찮아 보여 '누가 우리 저거 개척합시다~'에서 시작된것..ㅎ
ㅡ이것도 초등(?)에 해당된다 하여 등산'산'지에 기고하려
원고를 내가 작성했으나 서술방식이 암벽 초등기록으로는
전문적인 표현이 떨어지는 낭만적인(?)문장이라
고위층에 비토되어 사장된 씁쓸한 기억..ㅋ
ㅡ악우회 활동얘기를 더 들었으면 했는데 그들은 산악회 가입비와
월회비 를 바탕으로 여유있는 회원들의 찬조금을 더해
역량 있는 공격대원의 열의와 미래를 보는 리더 의 지휘아래
국내산악회 중 유래없는 발전을 이룬 듯 ,
기존 산악회와 지향하는바가 많이 차이가 있음을
ㅡ영후야,불암산 동남벽 개척 얘기 좀 해줘,
산장이 마무리하고 다음사업이 동남벽이었나?
윤의영씨 일행에 속해있던 나는 불암사를 거쳐
중간에 무슨절 하나가 있어 거기서부터 동남벽 출발점까지
윤의영씨가 엠퍼 엠퍼 부르며 찾아서 갔던 기억도
아마 개척대원들은 야영하고 미리 와 있었고.
엠퍼가 아니고 엠포르라 정정해주는 사람도 있었고 ,
누구였더라?
내 생각에 어떻게 부사를 명사화해서 산악회 이름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하는의아심 ㅋㅋ
ㅡ재미 있는건 몇년 뒤 산 잡지에 난 회원모집 광고를
보고온 기영를 처음 만난 곳도 이산이고
ㅡ불암산 동남 벽, 70년 5,6월경에 시작한거 같은데..
암벽밑 바위굴에서 야영하던 거,볼트 처음 사용해본 거,
균호가 많이 보였던거..그외 별 뚜렷한 기억이 없네..ㅎ
엠포르는 영어로 highly 뜻일텐데
독일 산악잡지 이름을 원모형이 차용해온거고..
ㅡ그 때 영래형 없었지.. 춘길이형,균호,나 정도?
길원이 본거같고..
초등이길래(코스가 짧아서 뭐..)기념 페난트도 만들고 했겠지..
ㅡ ㅋㅋ동남벽 첫 피치에서 스랩 오른뒤 확보용으로 하겐을 박는데
손의 방향 이 나와는 반대방향 이라 휘경이가 왼손을 쓰는줄 알았지요
ㅡ60년대에 인왕산에서 암벽을 하던 선배들을 누상동파로
불렀는데,
그 우두머리가 이인정, 김경배씨 등등이야,
이인정씨는 하켄,kcc, 동국대산억부에 활약 했고,
김경배씨는피톤크럽 원년 멤버인 줄 오늘 알았네
세영 얘기처럼 두사람 다 입담세기로 꽤나 알려졌지,
특히 이인정씨는 lg그룹 사위로 사업가로도 역량을 발휘해서 그휘하에 직업없는 산꾼들을 고용해서 사회생활 과 산을
병행할수 있게 하는 선행을 많이 베풀 었어
에코는 권금성의 털보 유창서씨 그라고 인수에코길과
설악산/적벽 개척자인 유기수씨가 내가 아는 전부야,
세 산악회가 이름 날릴 때,나는 산을 모를때,
대학입학하고도 2,3년 지나서 입문을 했으니
자네에 비하면 3년 이상 늦은 셈이지
ㅡ홍대 생활 미술학과를 나와 일찍 히말라야로
눈을 돌린 이 은구라는 피톤 친구도 기억한다 고
지인이 알려주네
부부가 네팔에 정착했다는데 세영보다.나이는적지만
70전후일껄?
휘문출신들이 피톤에 입회를 많이했나봐?,
양정출신들이고령으로,중앙출신들이계우로,
보성출신들이 보우 에서 산행을 계속했지
물론 학부입학후 대학 산악회에서 활동도 했지만 ,
김경배씨 이후 피톤인맥을 후배들한테 문의해보다가
인적자원의 풍성함에 놀라고 ㅎㅎ
ㅡ우이동가려면 미아리 에서 하루에 몇 번 운행하는
조그만 합승버스 로 가야하던 시절,
암벽 등반에 눈이 뜬 산악인들이 시내에서 접근하기
편한 인왕산 치마바위에서 마닐라 삼으로 꼰 로프 를 사용하던 때, 인왕산에는피톤.키,알파인탑 클럽의 3개산악회
회원들이 의욕과 함성으로 얼굴 을 비벼댔다고 하니
그들이 지금 한국 산악계를 이끄는 노장들
도봉산,인수,설악을거쳐 히말라야 원정대의 공격대원도
모두 이들,
해외원정 사고로 이승을 먼저 떠난 희생자들도
이들의 동료들,,
자네는 인왕산 연습 바위를 해봤겠지만 나는 인수봉세대,
김신조사태이후 인왕산 출입이 자유롭지 않았고
코스의 길이가 짧아서 ㅎㅎ
ㅡ지난 세월을 정리하고 싶었서였어
영후와 길원이 도움 없이 마무리가 언되고
빠진 기록도 있겠지만 그만 했으면 해
추억이 노인네들 기억보따리 일뿐..현실에서 너무 거리가 있어요
ㅎㅎ.공감세대가 몇명 안남았다는 얘기
ㅡ올해 추석연휴에는 먼저 간 선배/친구들을 위해,
4박5일동안 부처님 사리모신 5개 사찰을 한바퀴 돌아올 생각
첫댓글 좌담회에서 거명된 이름 반 이상이 이미 우리 곁을
떠났고,우리 대화와 추억속에서만 회자됩니다
인수에서 설악에서,그리고 히말라야에서 자연으로
돌아갔지요,
한참 들썩였던 해외 등정 열풍에 휩쓸리지 않아서
이나마 살아있는 지도 ㅎㅎ
설악산 봉정암,오대산 상원사,함백산 정암사
영월 법흥사 ,양산 통도사의 5대 적멸보궁
법당에 불상은 없고 창문밖으로 부처님사리를 모셔놓은
탑이 보이는 곳
설 연휴들 잘 보내셨나?
안부묻는 전화들 주셔서
나는 안 먹어도 배부른 풍족감에 마냥 행복하고,
2/3월 모임을 아래와 같이
고지합니다
시일 ;2024년3월1일 (금)오후 5시
장소 ;한정식 향가
(02-747-3368)
지하철3호선 안국역3출구 에서 모여 이동(4;50)
근처에 구 휘문학교 터,현대건설 사옥이 있고
석조건물
주의)
한식아 식당 예약해주시고
용훈이는그날 점심굶고,
몇달만에 현영얼굴 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