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14일 목요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제1독서 : 민수 21,4ㄴ-9
복 음 : 요한 3,13-17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국민이 가장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나라로 손꼽히는
일본, 싱가포르, 한국, 독일, 영국도 마찬가지로 행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콜롬비아 등을 비롯해서 국제적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
어려움을 겪는 나라들이 의외로 행복 지수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관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강력한 가족 유대감이나 지역 사회의 연대감 등
서로 지지하고 연결하는 관계가 사회 분위기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통해 행복감을 얻게 되었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예를 들어, 덴마크인 중 93%는 사교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친구들과 교류하고, 다른 사람을 지지하고,
그들 자신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지지받을 수 있는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계를 유지하면서 행복 지수를 높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3년 동안 열심히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실 개인주의가 훨씬 더 커졌고, 동시에 행복도는 크게 내려갔습니다.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우리 인간입니다. 그래서 계속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합니다.
관계를 끊는 데에만 노력을 쏟는다면 우리의 행복은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문제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주님과의 관계만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채워주시는 주님,
어렵고 힘든 것을 모두 치워주는 주님,
꼴 보기 싫을 정도로 미운 사람을 가뿐하게 치워주는 주님 등
나의 이기심과 욕심을 채워줄 주님과의 관계만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관계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속죄하시려고 몸소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고 경배하는 날입니다.
이 십자가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편안함과 쉬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부와 명예를 보여주는 것도 아닙니다.
고통과 시련의 상징이고, 또 죽음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들과 정반대의 것입니다.
그 안에는 무한한 사랑과 평화가 있었으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강한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금 순간의 만족과 안락함만을 추구하면서
십자가의 주님과 관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결국 구원의 길에 들어설 수 없게 됩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깊은 묵상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십자가 안에서만 구원이 있다는 것,
그러나 그 십자가는 세상의 가치가 아닌 하느님의 가치가 들어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의 명언:
고난과 역경에 처할지라도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고 미소 짓는 삶의 자세야말로
운명을 역전시키는 기적의 비밀이다(헤르만 헤세).
사랑의 십자가
반영억 라파엘 신부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민수 21,8-9).
쳐다본 사람과 ‘봐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보지 않은 사람과의 운명은 분명히 다릅니다.
믿음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함으로써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는 방법을 알려 주었으면 단순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16,24).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10,38).고 하셨습니다.
사실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는 것보다 차라리 짊어지는 것이 가볍습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러니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들이 살았듯이 영원한 생명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십자가가 아니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십자가라고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곳곳에서 십자가를 볼 수 있고 또 몸에도 지니고 다닙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 담긴 주님의 사랑을 일깨우고 십자가를 지겠다는 고백을 못 한다면
그 십자가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십자가가 점점 더 화려해지고 상품화되는 현실에서
나를 정화 시키고 성숙시키는 은총의 십자가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의 승리를 이루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에 앞서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십자가는 내 눈과 가슴에만 있을 뿐만 아니라
내 안에서 생생하게 생활하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만일 생활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된다면
그분은 분명히 나를 부활시켜줄 것입니다”(성녀 벨라뎃다).
힘겹고 고달픈 십자가의 길이지만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미리 깨닫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많은 경우 ‘왜 나만 십자가를 져야 하느냐? 고 하소연합니다.
왜 나는 이런 무거운 십자가를 져야 하느냐고 투덜댑니다.
그러나 그 투덜거림 속에서 십자가는 더 무거워집니다.
“십자가의 길에서는 언제나 첫발이 중요합니다.
십자가를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더 큰 십자가가 됩니다.
첫발을 예수님께 맡기십시오”(성 요한 비안네).
사람마다 져야 하는 십자가는 다르지만, 모두가 자기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가난이 십자가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큰 부가 십자가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자녀, 남편, 아내, 동료가, 공동체의 일원, 장상이 장애물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격, 언어의 습관, 주변의 환경이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통해서
나를 다듬고, 겸손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마침내 내가 취할 길을 발견하게 하고,
가야 할 길에 용기를 얻게 해주십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피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질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 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사랑을 보십시오.
십자가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함으로써 십자가를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가 어디서 오는지 아예 생각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당신에게 증거하는 방법으로 주시는 것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십자가는 우리 모두의 교과서입니다.
십자가는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구원의 도구임이 틀림없습니다.
십자가 현양 축일에 사랑의 십자가를 제대로 바라보길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기쁨과 희망을 안겨줍니다.
특별히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에는
우리를 무조건 살리고 싶어 하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구리뱀을 바라보기만 하면 무조건 살았듯이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면 무조건 살 수 있게 해주고 싶어 하시는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에 감사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십자가!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행 중에 교우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면서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어떻게 운명처럼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저는 모태 신앙이기에 어려서부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학문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것은 신학교에서 신학과 성서를 배울 때였습니다.
신앙 안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은 사제가 된 후 몇 번의 좌절과 시련을 겪은 다음입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기도할 때, 길을 걸으며 묵주를 돌리면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먹구름 뒤에는 밝은 태양이 있듯이 시련과 좌절이 지나가면
주님께서 그 시간에 함께 하셨음을 알았습니다.
배우자와 결혼하면서 예수님을 만났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무교였지만 배우자의 신앙을 따라서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는 배우자를 보내 주셨고,
배우자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예수님을 만났으니 감사하다고 하였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한 자매는 홀로 외국에서 생활하면서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편하고, 어려움이 없을 때는 습관적으로 교회에 다녔는데
가족과 떨어져서 혼자 있게 되면서 예수님을 더욱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생각하니 혼자 있는 것도 외롭지 않고,
낯선 타국에서의 생활도 두렵지 않다고 합니다.
문병란 시인은 ‘희망가’라는 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는 헤엄을 치고
눈보라 속에서도 매화는 꽃망울을 튼다.
절망 속에서도 삶의 끈기는 희망을 찾고
사막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오아시스의 그늘을 찾는다.
눈 덮인 겨울의 밭고랑에서도 보리는 뿌리를 뻗고
마늘은 빙점에서도 그 매운맛 향기를 지닌다.
절망은 희망의 어머니 고통은 행복의 스승
시련 없이 성취는 오지 않고 단련 없이 명검은 날이 서지 않는다.
한고비 지나면 구름 위 태양은 다시 뜨고
꿈꾸는 자여,
어둠 속에서 멀리 반짝이는 별빛을 따라 긴 고행 길 멈추지 말라.
인생 항로 파도는 높고 폭풍우 몰아쳐 배는 흔들려도
고요한 뱃길 순항의 내일이 꼭 찾아온다.”
시련과 좌절의 표상인 십자가는
신앙인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위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첨탑에는 십자가가 있고,
성당의 제단 뒤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시면서 하느님께 이렇게 청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괴로웠지만 행복했던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셔야 할 일을 잘 아셨고,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전에는 치욕과 모욕의 상징이었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지고가심으로써 속죄와 구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해야 할 일을 외부에서 찾은 적이 많습니다.
‘성공, 명예, 업적, 능력’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얻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정말 해야 할 일은 나의 깊은 내면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눔, 헌신, 십자가, 사랑’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이 세상에서 이미 시작하는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을 알았고, 최선을 다했던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은
예배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렸습니다.
첨탑이 저리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했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드러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그렇습니다.
이 큰일을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셨습니다.
사실 ‘십자가의 형벌’은 손과 발이 못박인 채 철저히 무력해진
참으로 무력하기 짝이 없는 비참함의 끝이요,
노예 죄수에게나 행해지는 참으로 냉혹하기 짝이 없는 철저하게 버림받음이요,
그야말로 완전한 패배요,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누구나 저주받을 자다’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저주받은 자가 되셔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갈라 3,13)
그래서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요,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었습니다(1코린 1,23 참조).
그러나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오늘은 ‘십자가’에서 세 가지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십자가는 ‘죄인임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곳’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이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할 때라야 십자가는 지게 됩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을 때
우리는 십자가를 피하고 도피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용서해야 할 존재’이기에 앞서, ‘용서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달아야 할 일입니다.
동시에, 나아가서는 죄인이라서가 아니라 ‘죄 없음에도 죄를 뒤집어쓸 줄을 아는 일’입니다.
이해받지 못하고 오해받고 곡해 받고 누명쓰는 일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둘째는 십자가는 ‘죽는 곳’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장소입니다.
곧 죽이는 일이 아니라 죽음 당하는 일이요,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는 일이요,
앞서는 일이 아니라 물러나는 일입니다.
승리하는 일이 아니라 패배당하는 일이요,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변두리로 밀려나는 일입니다.
동시에, 나아가는 틀려서가 아니라 옳으면서도 지는 일이요, 힘 있으면서도 눌리는 일입니다.
셋째는 ‘타인을 위하여 건네주는 곳’입니다.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가 잘되기를 바라며 하는 것이요,
그가 구원되기를 희망하여 자신을 건네주는 일이요, 사랑으로 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승리요, 구원이 됩니다.
곧 십자가는 죽음이지만, 동시에 죽음을 죽이고 진정으로 참 생명으로 살아납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무력함이지만, 구원을 이루는 전능함이 됩니다.
낮아짐으로써 진정 높아지며, 패배이지만 사랑의 승리가 됩니다.
지면서도 쳐부수며, 승리의 깃발이 되고, 영광의 월계관이 됩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십자가는 우리 삶의 의미가 되었고, 역사의 역전이며 혁명이요,
하느님 사랑의 표상이며, 완전한 승리의 표상이요, 현양이며 영광이 되었습니다.
이 십자가가 바로 우리의 자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베푸신 하느님 사랑이 바로 우리의 자랑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고백합니다.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갈라 6,14)
오늘 십자가를 드높여 이 고귀한 그리스도의 구원과 하느님의 사랑을 찬미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요한 3,16)
주님!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손에 못이 박히고 가슴이 창에 찔리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시면서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당신 사랑의 멍에를 지고 거부되고 배척받을지라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게 하소서!
이해받지 못하고 부당한 처사를 받을지라도
사랑으로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눈감을 줄을 알고,
죄 없으면서도 뒤집어쓸 줄을 알며,
약해져 꺾일 줄 알고,
낮아져 밟힐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조욱현 토마스 신부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며 경배하는 날이다.
이 축일의 기원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의 노력으로 발견되었다.
황제는 이를 기념하여 335년 무렵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 옆에 성전을 지어 봉헌하였다.
그 뒤로 십자가를 경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9월 14일에 지내는 것은 이날 십자가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 때문에 하느님과 모세에게 반항한다.
하느님은 불 뱀으로 그들을 벌하시고, 백성들이 회개하자
모세에게 구리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놓고 그것을 쳐다본 사람은 죽지 않게 하신다.
이 구리 뱀의 모습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었다.
민수 21,4-9의 구리 뱀은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리게 하는 표지였다.
이것이 후에는 우상이 되어 히즈키야 때 다 없애 버렸다.
오늘 복음의 “들린다.”라는 말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뜻이며(요한 8,28; 12,32),
하늘의 영광으로 올려졌다는 뜻(사도 2,33; 5,31; 필립 2,9)으로 이중적인 영광의 의미이다.
우리에게도 이 십자가가 없으면 아무런 면류관이 없다.
예수께서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셨고,
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우리 모든 인간이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셨다.
십자가를 통한 세상의 구원업적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의 업적이다.
그러므로 이 사랑의 업적은 인간이 그 아들을 믿고 따름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우리 자신이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고 예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음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으면서 그분의 말씀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그분만이 하느님 아버지께 이르는 길이다. 이제 그분을 믿는 자만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을 우리의 생명, 영혼, 운명 전체를 맡기고
그 가르침을 따라 실천하게 되면 구원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분은 구원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다면,
그분 안에 가지고 오신 구원의 은총까지도 거절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구원을 거절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것이고
그것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결과, 멸망을 초래하고 말 것이다.
이것은 매 순간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하였다가도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회개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과 같이 이제 우리도 언제나 나약한 의지 때문에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수 있으나, 항상 높이 들리신,
즉 십자가와 영광으로 들려지신 주님께로 되돌아가는, 회개하는 삶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가 지고 가는 우리의 십자가를 통하여
진정 부활을 체험하며 나 자신이 새로이 태어나는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셨듯이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이라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나 자신의 완성
즉 구원과 그리스도를 닮도록 하여야 한다.
그분을 닮는 것이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닮음을 이루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삶을 우리도 늘 살면서 십자가의 신비를 더 깊이 체험하며
구원의 은총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용감히 전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십자가가 다가올 때마다 즉시 십자가상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십자가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십자가라는 것, 생각할수록 묘하고 신비스런 그 무엇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존재 자체가 무거운 십자가의 연속인 분들이 있습니다.
하루하루 주어진 삶 자체가 힘겨운 십자가인 분들도 계십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제각각입니다.
어떤 사람은 마치 성냥개비 두 개를 교차시켜 만든 듯한 가벼운 십자가,
잠자리 날개처럼 초경량급 십자가가 살짝 주어졌음에도,
세상 끝난 것처럼 난리를 치고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은 감당하기 벅찬 천근만근 무게의 십자가를
매일 지고 가면서도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기쁘게 살아갑니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아마도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이
십자가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가? 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산고를 겪고 있는 엄마는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 하늘을 찌르는 것처럼 극심하지만,
잠시 후 태어날 새 생명을 생각하며 기꺼이 견뎌냅니다.
선두에서 단독 질주 중인 마라톤 대회 우승 후보자는
40킬로 미터 지점쯤에서 느끼는 육체적인 고통이 엄청납니다.
그러나 잠시 후 결승선에서 누리게 될 영예와 성취감을 생각하며 기쁘게 달려갑니다.
우리 모두 불완전한 인간 존재로서 불완전한 이 세상 안에 살아가다보면,
어쩔 수 없이 이런저런 다양한 무게의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십자가 하나를 잘 극복했다 생각하면, 어느새 또 다른 십자가가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의 어깨 위에는 별의별 유형의 십자가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얹혀 있어서 제대로 걸어갈 수 없을 정도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주어지는 평생의 과제는 숙명과도 같은 십자가를 평생 친구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겁다, 괴롭다, 여기며 도피하지 말고, 이왕 지고 갈 십자가 큰마음으로 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일 한 가지!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는 십자가를 인간적인 눈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영적인 눈으로,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입니다.
결국 매일의 십자가에 대한 지속적인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일입니다.
부단히 십자가의 신비를 묵상하는 일입니다.
세상 울적하고 괴로운 얼굴이 아니라 기쁘고 행복한 얼굴로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우리 가톨릭에서는 십자가를 절대로 나쁘게 보지 않습니다.
성당에 오면 십자가를 말끔히 없애준다고 외치지도 않습니다.
대신 십자가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라고 강조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있는 우리에게 더 큰 십자가를 지고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바로 그 십자가에서 위로받게 하고 힘을 얻게 합니다.
오늘 우리의 작은 십자가들에 반드시 의미가 있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십자가가 다가올 때마다 즉시 예수님을 바라봐야겠습니다.
십자가를 잘 지고 갈 때, 십자가 그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부활의 영광을 끝까지 희망하며 그렇게 살아가야겠습니다.
오늘은 ‘큰’ 십자 성호를 긋자.
박상대 마르코 신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상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단연 십자가와 십자고상이다.
그래서 오늘은 전 세계의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와 성공회가
세상과 인간을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시고 해방시키신
그리스도께서 매달려 돌아가신 십자가를 우러러 경축하는 날이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4세기경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다.
정확히는 335년 9월 13일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예수님의 무덤 위에 성당을 지어 봉헌하고,
그다음 날인 14일에 그의 모친 헬레나 성녀가 발견한 것으로 전해지는 ‘성 십자가’를
무덤 성당 안에 걸어 현양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경배하도록 한 데서 오늘 축일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무덤성당은 곧 부활성당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무덤 안에 계시지 않고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셨기 때문이다.
나중에 페르시아의 침입으로 성 십자가는 약탈당하게 되는데,
628년 동로마제국의 황제 헤라클리우스가 이를 다시 찾아와
본래의 자리에 안치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도 추가되었다.
교황 세르지우스 1세(687-701)에 이르러
이 축일은 전체 교회가 기념하는 축일로 자리 잡게 된다.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걸맞게
전례복음은 요한사가의 ‘십자가 신학’을 잘 보여준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요한 3,1-21) 중에서 발췌된 내용이다.
니고데모의 호감에서 출발한 예수님과의 대회는
어느새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自己啓示的 가르침으로 반전되었다.
이는 곧 요한 복음사가의 편집 의도이기도 하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 담겨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니고데모와 행한 대화의 연속으로 보기는 어렵다.
즉 예수의 역사적 發說이라기보다는 요한 복음사가의 독자적 성찰의 결과로
후에 편집된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일이 없으니(13절),
여기서 사람의 아들이란 그 누구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至高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와 사람이 되셨고,
영광 중에 다시 높이 들려, 올려진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그분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심으로써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을 보여주신 까닭에
세상은 물과 영으로 다시금 태어나, 멸망을 피하고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 받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느님께 불순종의 대가로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모세가 기둥에 달아 놓은 구리뱀을 본 사람은 치유를 받았다.(민수 21장)
여기서 구리뱀은 신약의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에 비유된다.
그러나 불뱀에게 물린 사람들을 실제로 치유한 것은 뱀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이다.
바로 그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이제 십자가에 높이 달려있는 것이다.
십자가 자체가 세상에 구원과 생명을 주기보다는
십자가에 높이 달려 못 박혀 돌아가신 사람의 아들,
즉 하느님 스스로가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16절)
이 말씀은 모든 복음서 말씀의 요약이며, 결론이다.
요한은 자신의 서간에서 이 점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1요한 4,9-16)
세상의 구원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게 되는 動機는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구원의 방법으로 하느님은 ‘외아들을 보내주시고’, 외아들을 세상에 보낸 目的은
곧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자기 외아들까지 보내어 세상을 구원하려는 動機(motivation)이다.
그 동기가 바로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심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성 십자가’ 위에서 성취된 것이다.
한때는 노예나 흉악범을 처단하던 형틀 십자가!
십자가는 이제 우리 구원의 상징이 되었다.
오늘은 왼손을 가슴에 얹고, 오른손으로 이마에서 가슴으로,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어깨로,
큰 십자성호를 그으며 십자가에 묻혀있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자. 아멘.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박 마리 안젤로 수녀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3,17)
완전한 선으로, 공정과 정의로, 심판을 내리실 수 있는 하느님의 아들은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고 우리를 안심시키신다.
우리를 구원하려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쉽게 판단하고 내 나름의 심판을 내린다.
그렇게 나 자신과 내 주변 사람들을 단죄한다.
그리고 쉽게 용서하지 못한다.
용서가 어려울 때, 그때는,
심판은 하느님께 유보하고, 구원받는 데 힘써야 할 시간이다.
[출처] 요한 3,13-17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