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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 김연아 스크랩 [평론] 피겨로 쓰는 김연아 선수의 나라
무한의주인공 추천 10 조회 2,430 13.11.30 05:0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평소 김연아 선수에 대해 제가 올리던 글보다 세 배쯤 긴 사회평론입니다. 대중문화와 나라살림에 파고든 흰소리들의 실체를 정신문화의 밑거름인 글쓰기를 통해 모든 예술과 삶 자체의 바탕인 개발과 표현으로 뜯어본 욕심입니다. 200자 원고지로 158장 길이이니, 긴 글을 꺼리는 분들은 피하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벌어졌던 분탕질 중 큰 덩어리들과 역사 속 사실을 일일이 옮겨서 그 흐름이 같음을, 생활에 물린 상식임을 들추느라 퇴고를 하며 저부터 지루할 만큼 갖가지 생각 자체를 추스른 글입니다. 스케이터에게 정치를 들먹인다고 꼬집는 분들이 없지 않으실 겁니다. 탓할 깜냥이라곤 전혀 없습니다. 마음껏 욕을 하시되, 글을 읽고 상대성을 갖춘 문제접근을 해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정치든, 경제든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이고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국민이 살아가는 삶을 덮어쓴 정치를 멀리 둘수록 그 사회는 닫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사회정의가 바르게 들어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글쓰기는 자신을 돌아보는 마음공부다. 한 권의 책도 아는 만큼 들여다보이기 마련이라 자기 울을 하나하나 헤아릴 수밖에 없다. 머리로만 아는 지식은 꺼풀에 그치기 십상이다. 생활로부터 깎고 다듬어졌을 때 비로소 세상살이를 두루 꿰어낼 관점이 뚜렷해지며, 이는 인간의 지식은 자기 경험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하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박사의 가르침에 맞물린다. 누구나 알 듯 글은 마음이지만, 뼈대는 절대 아니다. 지식이 그렇듯 마음만으론 좋은 글을 쓰지 못하며, 정서가 치우치기 쉬운 법이라 가슴으로 느껴 머리로 쓰고, 머리로 읽어서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하는 오랜 다그침이 누누이 전해진다. 중용(中庸)의 이치다. 지식이든, 마음이든 자기과시(自己誇示)와 자기절제(自己節制) 사이에서 중심이 곧아야 미끄럽고 단단한 얼음을 지치는 피겨처럼 정서를 바르게 타며 보다 깊은 에지를 쓸 수 있다. 그만큼 중심이동의 폭이 넓어진다. 몸짓을 보다 크게 쓰듯 문장도 적절한 과시와 절제로 강조며 과장법을 써서 감성을 울리고, 꼭 들어갈 이야기만 알맞게 옮길 때 안무를 풀어낼 음악처럼 이미지가 담긴다. 곧 독자 스스로 머릿속에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때문에 예술철학에서는 활자도 보고 심상(心象)을 그리는 시각예술로 가리는데, 묘사(描寫)가 없는 사실보도라 한들 연상효과(聯想效果)를 받아 이미지를 떠올리곤 한다. 사설(社說)과 칼럼(column)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방송언론과 피겨 해설자들의 글말이나 입말은 따분할 만큼 사실만 읊는 서술(敍述) 위주로 정서를 적시는 맛깔스런 묘사와 그 표현이 없다. 동서양의 문화 차이도 적지 않다. 대중문화의 기둥인 영화나 방송연예는 이미 서구를 바짝 뒤쫓는 마당에 우리네 문학과 언론기사며 사설 등 활자예술은 아직 제 울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정신문화의 밑거름으로 가장 굼뜬 탓이다. 소비욕구충족에 내둘리는 상업주의 대중문화에서 중심을 지키는 반면, 역사조차 바로서지 못한 사회의 악순환부터 버거운 짐이고, 세대문화를 미처 추스르지 못한 채 기초학문인 인문사회과학을 담아낸 활자예술은 항상 뒤처져 있다. 공상과학(SF)과 판타지며 추리소설은 변변한 지면(紙面)조차 얻기 힘들다.

어느 나라든 대중문화는 학생들이 이끌며, 10대 중반부터 20대들이 소비생활의 축인 자녀 중심의 가정환경인 동양일수록, 우리나라처럼 땅덩이가 작을수록 부쩍 빠르게 변한다. 정작 잦은 변화를 걸러서 사회의 나이테로 층층이 깔지는 못한다. 기초부실 속에서 그때그때 돈벌이만 급급해 사회 각 분야가 물고 물려 거듭 생각하는 힘을 깨울 철학이 너무나 흐릿하다. 개발하고 표현해서 다시 개발하는 유기적(有機的)인 관계로 돌아가질 못한다. 활자예술이야말로 그 짐이 무겁다. 중계가 흔한 축구가, 그보단 야구가 해설자들의 말재주가 별쭝스레 돋보이는 까닭은 그만한 경험에 지식과 정보가 얹어져 시청률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공을 들이기 때문이다. 저마다 통계나 경험담, 또는 경기를 읽는 감각을 한껏 살린다. 시틋한 활자예술 위에 방송영상에 치우친 구조는 세계 최강인 초고속인터넷이 반대로 규제가 가장 심하듯 경제를 앞세운 전체주의 생리를 드러낸다. 그 자체로 이중성에 갇힌다. 상대성을 갖춘 생각이 굵직한들 사실에 개인관점을 얹지 못할 허물이 방송언론에는 가득하다. 앉은 자리가 표현의 자유인 권위의식을 불리는 만큼 누구나 하늘로부터 타고난 인권(人權)이 뜯기곤 한다. 피해의식과 불신불만이 켜켜이 쌓일 수밖에 없다. 중세 이후 철학이 발달한 나라들은 자연스레 정치만이 아니라 문화선진국으로 올라서서 오늘날 세계를 끌어간다. 미국이야 유럽문명이 옮겨간 나라다. 더구나 로비(lobby)로 돌아가며 의료보험과 국방 등에 걸쳐 복지를 해치는 정치도 허점투성이다. 그 자본 일방주의에 맞춰 돈으로 어르고 달래는 데 지나지 않다. 표현의 자유는 1,2백년씩 사회사를 앞서서 내다보는 창의력으로 자연과학을 넘어 인문사회학 등 기초학문을 거듭 끌어준다. 그 갖가지 관심과 목소리가 사회를 오밀조밀 돌볼 바탕을 이룬다. 그룹 비틀즈(The Beatles)’는 물론, 멤버 개개인에 얽혀 음악사와 문화사만이 아니라 철학과 사회학에서 수많은 학술논문을 비롯해 대중음악서적이며 수필 등 꾸준한 글쓰기가 세계를 아울러 우리나라에서도 쏟아진다. 심지어 장발머리로 누빈 영국의 리버풀(Liverpool) 골목 곳곳을 관광지로 다룬 책조차 있다. 대중문화 자체에 획을 그었던 그들에게 견줄 순 없지만, 피겨에서 역사와 흐름을 저 홀로 뒤바꾼 김연아 선수에 대한 글쓰기가 전혀 낯간지러울 까닭이 없다. 사랑이란 당연히 오글거리기 마련이다.

 

 

우리가 1년에 기껏 다섯 편을 넘지 못하는 퇴계(退溪) 선생의 논문이 근대화사상을 풀어냈던 일본에선 50편이 넘게 나오는 해가 흔하듯 본보기로부터 바르게 배우기 위한 표현은 새로운 개발을 낳도록 더욱더 늘어야 한다. 인구가 많다 한들 백범일지(白凡日誌)조차 중국이 더 많이 찍어낸다. 글쓴이의 글에 대한 책임감만큼 대중은 고정관념과 선입견에서 벗어나 살을 발라 뼈를 추릴 상대성을 떠안는다. 쓰건, 읽건 삶의 공감대로 더덜이 하는 자기철학이다. 이야기를 보다 맛깔스레 살릴 얼개를 짜고, 그 사이사이에 자잘한 사연을 들여앉히는 밑그림부터 감성 어린 욕심을 덜어내 버리고 취하는 자신과의 싸움이 벌어진다. 그 취사(取捨)의 선택이 매끄러울수록 글이 막히지 않는다. 음악을 쫓기에 급급한 스케이터들처럼 손과 머리가 따로 놀기 쉬운 탓이다. 몸짓을 스케이터에게 맞추느라 틀에 갇힌 표현에서 헤어나질 못해 음악에 이미지를 불어넣는 제2의 창작자다운 안무가부터 무척 드물다. 선수는 더더욱 귀하다. 카타리나 비트(Katarina Witt)는 무대장악력인 카리스마가, 미셸 콴(Michelle Kwan)은 우아함이 돋보였지만, 기술은 이리나 슬루츠카야(Irina Slutskaya)에게 미치지 못한 채 자신들만의 분위기를 만들었던 반면, 그 장점들을 넘어 스피드까지 속속들이 갖춘 김연아 선수는 음악마다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다. 말하자면 마음대로 글을 주무르는 것이다. 오정희(吳貞姬)와 김승옥(金承鈺) 같은 좋은 작가의 단편을 소설가지망생들에게 두세 번씩 필사(筆寫)하도록 권하는 이유도 2백자 원고지에 칸칸마다 손으로 눌러쓰면 인식력(認識力)이 다져져 각 구성요소의 쓰임새가 자연스레 일깨워지는 기초 다지기다. 반드시 해야 하거나 꼭 옳은 방법은 아니다. 띄어쓰기며 맞춤법 같은 밑바닥 기초가 쳐질수록 감을 익힐 손쉬운 받아쓰기다. 피겨의 필사도 몸짓은 겉핥기일 뿐 김연아 선수의 기술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론과 창작은 피겨가 기술 위에 솎아내는 표현력만큼 맞물리는 한편, 머리와 손이 겉돌 듯 전혀 동떨어지기도 한다. 쉽게 말해서 분석(分析)과 쓰기 위한 이론은 제각각이다. 글쓰기를 위해 꼭 문학을 전공할 까닭도 없다. 전기(電氣)와 전자(電子) 등 이공계열은 나날이 생활 깊숙이 파고드는 일명 쌍방향방송과 무선인터넷 따위에 길드는 인간의 심리며 사건사고를 그 직업 종사자나 컴퓨터 등 기기(機器)를 소재로 다룰 전문 지식이 갖춰진다. 어떤 공부든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대학교에 굳이 문예창작학과가 들어앉아 있는 속내는 바르게 읽고 쓰는 기본조차 챙기지 못하는 12입시폭풍작전인 공교육의 허점이다. 전체의 하나인 점프에 갇혀 피겨를 망친 일본과 같다. 방송국마다 거느린 아카데미는 학연에 인맥을 얹은 실기 위주의 기능주의로, 대학교 사회교육원 역시 평생교육이 아닌 값비싼 사교육으로 설쳐댄다. 결국 교육부터 중심인 철학이 허접하다. 대학졸업장이 있어야 원고청탁과 지면을 얻는 학벌사회가 줄을 세워 점수를 퍼주는 국제연맹과 심판들이 버려야 할 꼬질꼬질한 관행이기도 하다. 대학교부터 값비싼 직업학교나 다름없다. 정작 글을 잘 쓰기 위해 세상을 엿볼 철학과 심리학 같은 인문사회학은 지망생 개인의 몫으로 지원자가 줄어서 아예 학과를 들어내는 학교만 늘어간다. 빗나간 정신문화의 현주소다. 언어의 소통(疏通)이 정신의 교감(交感)으로 사회제도에 이르는 모든 산물(産物)이 문화인만큼 상업주의 한류가 아무리 뜨겁다 한들 기초학문과 문학은 바닥을 해맨 채 아이스하키용 링크로 내몰린 피겨여왕이다.

 

 

흥밋거리로는 결코 문화를 이끌지 못한다. 유행을 따라 날개가 돋칠 상품만이 아니라 사상이든, 학문이든 정신세계를 뿌리내려야 두고두고 문화를 끌어안는 법이다. 돈벌이에 급급해 전문지식은커녕 한낱 상식에도 훤히 드러나는 허물을 얼버무리며 김연아 선수를 들들 볶아대는 방송언론이야말로 찌든 이중성을, 그 도덕불감증을 고스란히 내비친다. 펜은 진정 총칼보다 무섭다. 한 자루 연필만으로도 정신문화를 살찌우는, 억매이지 않는 자유가 우람한 까닭이다. 물론 지금은 배를 주리며 글을 쓸 시대는 아니다. 해마다 국민이 책을 평균 반 권조차 읽지 않는 우리 처지에서 스스로 입에 풀칠은 해야 헝그리(hungry) 정신 역시 들어선다. 말 그대로 현실을 살아야 한다. 1980년대까지 소설의 인기가 영화로 이어졌지만, 요즘은 영상에서 다뤄져야 책에 관심이 쏠리는 문화생활의 저울추부터 다르다. 그마저 시틋하기 그지없다. 종합예술인 연극과 방송이며 영화는 비딱한 우리 사회구조가 옮아간 양극화와 획일화에 그대로 내몰려 있다. 예나 지금이나 연극은 망할 각오로 올린다. 뮤지컬로 치우친 기업의 뒷받침은 판돈이 큰 방송과 영화일수록 골이 더 깊다. 스태프(staff)들은 아르바이트가 당연한 생계수단으로 유명 방송작가가 연출가까지 갈아대는 극본은 그 곁가지가 아니면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파벌이 드세다. 부들부들한 살 속에 뼈는 골다공증(骨多孔症)인 한류다. 손에 꼽는 서넛 감독에게 끌려 간간이 우리 영화를 배우러 오는 외국인 옵서버(observer)들이 번번이 도리질을 쳐댔던 어이없는 뼈대다. 어릴 적부터 김연아 선수가 받았던 시샘이 일명 피겨맘들의 이기심 탓만은 아니다. 틀어진 사회구조가 부풀렸음을 곱씹을수록 후배들을 뒷바라지하고 대회운영만이 아니라 헐벗은 이웃들을 살피는 스케이터와 달리 온 국민이 금 모으기에 나섰던 구제금융 시절에는 유명 배우들마다 몸값을 낮추며 몸을 사리더니, 이젠 작품마다 올려대며 어려운 제 식구들에게 나누거나 어긋난 살림을 바로잡을 깜냥이라곤 모른다. 스크린쿼터(Screen Quota)제를 지켜달라며 내내 삭발시위를 벌였던 1990년대를 까맣게 잊은 그들이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대다수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외주(外注)업체와 방송사의 관계가 대기업에 매인 중소기업처럼 덤핑(dumping)하청인 채 영화에 이르기까지 스태프 지망생들이 넘쳐나니 그들을 거저 부려먹는 것이다. 제작비 중 고작 6,70퍼센트만 울며 겨자 먹기로 건진다. 아예 값비싼 대형 드라마일수록 싸게 부르는 독립프로덕션에 넘어가서 간접광고로 그 손해를 메우느라 허덕이지만, 배우들조차 출연료가 밀리기 일쑤다. 청소년 아르바이트와 노년 일자리도 매한가지다. 나라가 살아남을 경쟁력을 둘러대며 최저임금에 야박한 고용자들이 정작 저희들 겉과 속은 물론, 뒷주머니만 불리며 거머쥔 유통구조를 통해 의식주(衣食住)와 대중문화는 물론, 여가생활 등 온갖 소비시장에서 다시 돈을 긁어모은다. 대학운영자금 역시 딱 그 꼴이다. 전체 운영자금 중 재단인 기업이 47퍼센트의 세금감면을 누리며 들이는 몫이라곤 기껏 10퍼센트 남짓인 채 60퍼센트를 차지하는 등록금만 올려댄다. 공기업까지 갖은 핑계로 연봉만 올리길 일삼는다. 철가방인 공무원과 교수 사회마저 모두 부끄러운 금배지들의 판박이에 지나지 않을 만큼 정경유착(政經癒着)의 늪은 끝을 모른다. 분단국가이기에 더더욱 깨끗해야 할 군대라고 다르지 않다. 별들이 주렁주렁 들어차서 진급이 느린 통에 바로 밑인 영관급(領官級)들의 불신불만이 줄서기를 부추겨 아직도 군사독재의 망령인 정치군인들을 줄줄이 길러낸다. 육군본부와 국방부(國防部)엔 야전경험이라곤 일개 사병만도 못한 껍데기 간부들이 득시글거린다. 일본군 병기창에서 잔뼈가 굵어 원균(元均)처럼 큰소리만 떵떵거리며 육해공군 참모총장에 오른 채병덕(蔡秉德)이 한국전쟁 때 보여줬던 어리석은 설레발은 1970년대에 나온 ‘F-15SE’를 차세대전투기로 둔갑시키는 지금도 여전하다. 대선공약(大選公約)을 쫓느라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6,7월에 예산을 늘려 달라는 방위산업청장의 수차례 요청을 대꾸조차 않다가 여론이 들끓고, 역대 공군참모총장들이 나서자 그제야 돌려세웠던 덜떨어진 정부다.

 

 

시장자유경쟁인 자본주의의 바탕이 나라 안에서 죄다 새는 바가지다. 당연한 상식이 통하지 않으니, 환경평가서를 속인 녹조라떼’ 4대강을, 이른바 영부인 사업이랍시고 1000억 원이 넘는 국민세금을 홀라당 날려버린 한식세계화사업을 여전히 밀어붙이는 밑 빠진 나라살림이다. 물줄기며 산줄기만큼이나 문화도 면면한 줄기를 이어야 한다. 사람이 빚되 자연의 숨결인 구들에 열을 품고 묵어서 맛을 내는 가지가지 발효음식을 거쳐 컴퓨터 음성인식 기호로 풀어쓰는 한글을 세상에 내놓은 조상의 얼이 오늘을 살아갈 가르침이다. 남들이 부러움에 치를 떠는 전통을 지니고도 바르게 보듬질 못한다. 가뜩이나 김연아 선수는 살아 있는 깨우침이다. 대기업들이 글로벌(globa) 경영을 통해 갖가지 상품들로 대한민국에 대한 의식(意識)을 바꾸며 한류와 손발을 맞추고 있지만, 전성기보다 못하다 한들 소치올림픽을 맞은 러시아는 2년 전부터 푸틴(Vladimir Putin) 대통령이 유망주 육성을 밀어줄 뿐 아니라 그해 미국 스포츠 인기투표에서 6위에 오를 만큼 피겨는 나라의 자존심을 세우는 자릿값이 오롯하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서 깎여버린 이미지를 지피기 위해 미셀 콴을 국무부 외교특사로 들여앉혔던 이유이기도 하다. 카타리나 비트조차 마찬가지다. 24시간 감시 속에서 훈련만 했다며 옛 동독 시절에 눈물을 떨궜던 그녀가 1994년 릴레함메르올림픽 때 서른의 나이를 잊은 채 독일대표로 나선 까닭 역시 통일을 축하하는 봉사였을 만큼 피겨가 지닌 자릿값은 사뭇 남다르다. 국제체조연맹 다음인 120년의 전통성부터 묵직하다. 반대로 현대에 이른 사회제도 속 모든 장르가 그렇듯 때론 실험정신을 통해 나잇값이 두룬 두터운 허물을 걷어내야 한다. 활자예술도 쓸수록 딸리는 소재빈곤이 갈고 닦을 자기개발로 돌아온다. 발레를 비롯한 무용에서 동작을 빌려갔을 뿐 피겨가 그 자체로 예술성이 짙은 스포츠이듯 글쓰기 역시 저만의 장르이긴 하지만, 여느 공연예술과 날로 커지는 영상미디어에서 온갖 이야기를 생생히 다루며 상투성(常套性)을 떠안기 때문이다.

대중 개개인도 누구나 책을 낼만한 이야기는 품고 있다. 교감을 나눌 올곧은 표현 방법을 몰라서 쓰질 못하지, 이야깃거리가 없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닳고 닳은 흔한 소재(素材)나 주제(主題)일수록 색다른 관점과 구성을 드리울 생각하는 힘이 받쳐줘야 한다. 어차피 피겨는 무대인 얼음이 스케이팅으로 동작을 한정(限定)한다. 선곡(選曲)부터 팬들의 기대치를 높여야 흥()을 한껏 북돋으며, 좋은 선수들이 빼곡하게 들어찰수록 새바람을 이끈 피겨여왕의 드레진 이름은 크나큰 너울로 자리매김하기 마련이다. 관행에 기댄 일본선수들의 얌체 짓으론 감히 넘볼 수 없는 역사다. 돋보일 곡과 의상을 가늠해내는 김연아 선수의 예술성만큼 알맞은 제목도 분명한 글재주다. 그 주제와 형식이 하나로 어우러져야 하는데, 대중의 호기심을 잡아끌 유인성(誘引性)과 내용을 뭉뚱그린 함축성(含蓄性)은 물론, 시간이 흐른 뒤에도 기억을 되살릴 환기성(喚起性)을 지닌다. 책의 겉장과 피겨의상의 디자인 역시 이 가늠보기로 짚어낸다. 때론 출판사가 제목을 손보는 경우도 있다. 글쓴이와 말을 맞추긴 하는데, () 최인호(崔仁浩) 작가의 별들의 고향은 고향이 원래 무덤이다. 박범신(朴範信)의 장편소설 은교는 제자와 자신을 죽음으로 밀어 넣는 늙은 시인을 상징한 살인 당나귀가 정작 내용과 겉돈 채 무거웠고, 기자 출신의 역사소설가 김훈(金薰)이 인간 충무공(忠武公)의 면면을 다뤘던 칼의 노래광화문 그 사내라서 무게감이 턱없이 떨어진다. 모두 제목을 잘 바꾼 경우다. 여주인공의 이름에서 따온 은교를 끝끝내 박범신 작가는 떨떠름해 하지만, 대중의 호기심을 달굴 장삿속이야말로 출판사의 밥벌이다. 관점부터 엇갈릴 수밖에 없다. 작가는 그 작품이나 주인공을 통해, 출판사는 받아들일 다양한 대중심리를 통해 세상을 엿본다.

 

 

다양성은 곧 표현의 자유다. 자기만족을 쫓는 대중의 권리도 상대성이 드세니, 사명감이나 시대정신만으로 작가를 재고 가르면 먼저 독자들부터 짓찢어야 한다. 자유로운 글쓰기인 산문정신(散文精神)이 숫제 붙박일 수 없다. 자기과시에 치우쳐 생각을 나눌 소통이 아니라 미욱스레 닫히기 마련이다. 작가정신의 바탕은 인생의 진정성(眞正性)에서 불거진다. 크든, 작든 감동을 주는 줄거리를 통해 현실에 대한 묘사와 서술 자체가 예술성을 지닌다. 그 위에 시대건, 역사건 들어서는 것이다. 1985년 대학가요제를 통해 큰 인기를 누린 대중가요 바위섬은 돌산인 무등산이 들어앉은 광주가 1980년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게 둘러싸여 섬 같은 처지였음을 잊지 않고 사랑하노라 하는 뜻임을 12년 뒤에 김원중 본인이 밝히기 전까지 누구 하나 알 수 없었던 가사다. 한때 일본으로 내쫓겨야 했던 소설가 한수산(韓水山)도 있다. 1981년에 중앙일보 연재(連載)소설 욕망의 거리에서 월남전 중인 70년대를 배경으로 군인에게 제복 운운하며 비꼬았다는 꼬투리를 잡혀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던 대중소설가다. 군사정권의 자격지심(自激之心)이 시대정신을 덮어씌웠던 생트집이다. 시대를 비출 책임감만큼 대중이 알권리를 통해 스스로 가려내는 상대성이 보다 각양각색의 자유로운 작가정신으로 시대를 달굴 수 있다. 정치에서 툭하면 둘러대는 더불어 사는 상생(相生)이다. 한쪽으로 치우칠수록 상대성을 잃어 모난 극()과 극이 부딪히는 흑백논리로 불신불만과 갈등만 쏟아낸다. 우리 평론문학이 곧이곧대로 베끼는 허점이기도 하다. 빠른 성장주의를 유목민의 이동속도에 맞물린 유교전통의 리더십으로 내두르지만, 넓고 커진 국민의 몸짓에 비추어 아름드리 중심이라곤 없이 바깥 에지인 경제만 쓴다. 눈속임 전시행정과 말을 바꾸는 비비기 정책이 판칠 수밖에 없다. 세계 피겨의 흐름이 김연아 선수를 따르듯 스포츠와 모든 문화예술은 본보기를 쫓아 신세대가 구세대를 뛰어넘는 역사의 반전(反轉)이 발 빠르게 일어난다. 사회로 이어지는 그 원동력은 대중의 너른 공감대가 일으키는 귀환효과(歸還效果, feedback)에 있다. 김연아 선수의 2014년 새 작품들을 애끓게 기다리는 세계 피겨팬들과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마음이 그렇듯 베스트셀러작가나 흥행감독일수록 뒤따를 작품을 기다리며 미리 호기심에 설레곤 한다. 모든 예술은 그 반응을 앞서 내다보고 틀을 잡는다. 스포츠도 상대의 장단점과 작전을 읽어서 경기를 운영하고 선수를 교체해 맞수를 놓듯 상대성은 사회의 다양함을 풀어가는 길라잡이다.

자연히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갈 길이 까마득하다. 정치로부터 경제와 역사며 종교 등 각 분야를 연구하는 기관은 끼리끼리 한솥밥을 먹는 두어 단체에 머문 채 다름을 살피는 연구가 아니라 반대는 무작정 사이비나 유사(類似)로 몰아붙인다. 그대로 두터운 권위주의와 정경유착의 살집이다. 심지어 생을 송두리째 받쳐 홀로 친일파 연구를 일궈냈던 임종국(林鍾國) 선생과 그 민족문제연구소를 좌익으로 내모는 보수단체들이 수두룩하다. 그들의 뿌리부터 구리기 때문이다. 한국자유총연맹은 의열단(義烈團)에 위장 가입해 250여 명의 독립운동가를 직접 살해하거나 잡아 넘긴 관동군 밀정으로 눈치 빠르게 나는 빨갱이를 잡는 데 앞장선 애국지사다하고 악을 쓴 개아들 이종형(李鍾滎)이 제헌국회 때 일으켰던 반공연맹의 바뀐 이름이다. 반민특위(反民特委)를 습격해 무너뜨린 친일경찰의 똘마니였던 단체다. 이승만과 한민당(韓國民主黨)이 공공연히 밀어주며, 어용신문(御用新聞)인 대한일보를 앞세워 반민특위를 공산당으로 둘러씌웠던 짓거리를 지금도 방송언론은 고스란히 잇고 있다. 김무성(金武星)과 홍준표(洪準杓)며 서청원(徐淸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기득권층의 56퍼센트가 친일파의 후손과 그 하수인들이다. 일그러진 사관(史觀)을 조를 수밖에 없다. 임종국 선생이 그렇듯 스스로 친일파의 후손임을 꾸짖고 자신을 다스리는 당당한 삶을 살아가진 못할망정 일본의 입피겨가 그렇듯 입정치로 국민을 우롱한다. 또 다른 일제강점기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오죽하면 광우병에 휩싸였던 미국산 소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도 좌익으로 둘러치며 앵무새처럼 미래만 옹알거린다. 정작 미래를 위한 도리라곤 모르쇠인 요란한 빈 수레일 뿐이다. 종교인의 탈을 쓴 범죄 역시 지나치게 흔하다. 믿음을 받드는 기독교철학(Christian philosophy)은 있어도 그 신앙을 학문으로 파헤치면 불교나 천주교와 달리 매장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동양철학에서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로 우러르는 이황 선생을 품고 있은들 죽은 자식 고추 만지기일 따름이다. ()를 내세운 보신주의(補身主義)가 당파싸움만 쫓더니, 세계사의 흐름에 겉돈 세도정치로, 친일을 거쳐 민족분단조차 제 앞가림에 둘러댄 반민자(反民者)들로 오늘을 낳았고, 가문과 지역을 잇는 뿌리 깊은 파벌만 첩첩산중이다. 사회 모든 분야의 양심이자 머리인 철학이 학문으로 아시아에서도 한참 뒤쳐질 수밖에 없다. 나라 안에선 과거에 매이지 말자며 제 발이 저린 일본에게만 지난날을 반성하라면 비웃음만 돌아올 뿐이다. 안팎으로 잣대가 달라질 수는 없다. 제대로 뛰는 점프라곤 없으니, 눈속임만 부풀리며 해마다 도전 운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물 속 안방공주가 딱 그 꼬락서니다. 갖은 자료와 경기영상으로 훤히 나타나는 인터넷이나 방송영상에 비해 활자는 개개인의 정서가 글을 앞지르며 부풀리기도 한다. 글이 엇나가지 않았다면 이면효과(裏面效果, subtext)를 받아들이는 차이다. 영상 역시 대사 속이나 그 사이사이에 눙쳐놓은 생각과 느낌이 이야기가 미리 드러나지 않게 등장인물의 성격을 만들고, 사건을 잇는 복선(伏線)이나 설정(設定) 또는 암시(暗示)로 쓰인다. 안무 역시 매한가지다. 스토리텔링(storytelling)에 맞추든, 그냥 춤곡이든 각 구성요소가 설정과 암시로 리듬을 탈수록 음악성과 작품의 질이 돋보인다. 문장과 문단도 앞뒤로 물리며 중언부언(重言復言)을 피해 꼭 필요한 낱말만 들여앉혀야 군더더기가 줄어든다. 대사가 전혀 없는 설명문이라 한들 서술과 묘사에 글쓴이의 입김이 서리고, 시점(視點)을 통해 저만의 관점이 얹어진다. 기울은 감정이나 정서로 읽을수록 그 속뜻과 겉돌기 마련이다. 오히려 전문가들이 뱀파이어의 키스를 전통 피겨의 틀에 매여 흔하지 않았던 음악대로 읽어내질 못했듯 삶과 세상사에서 옮겨온 예술의 표현은 그 장르만이 아닌 전체에 비쳐 들여다봐야 한다.

우리나라는 활자예술부터 허물 벽이 높다. 중앙 일간지의 신춘문예와 몇몇 문예지의 공모전조차 수도권으로 쏠려 지방지 출신은 아예 인정을 받지 못하는 등단제도일 뿐만 아니라 새로움을 담아낼 다양성도 자라질 못한다. 그 사이 인터넷에서 인기를 얻은 글들을 엮어내는 자유출판은 세계가 근대기부터 앞서 끌어온 제도다. 창작자의 턱을 돈벌이로 낮추면 우리 정신문화를 끈끈이 지켜온 활자예술을 흔들며 기성작가와 학계 평론가들이 또 다른 벽만 쌓아올려 좁다란 독서시장을 스스로 갉아먹는다. 그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어야 생산과 소비를 넓힐 시틋한 숨통이나마 트인다. 친일문학가들이 자신을 덮어줄 제자들을 줄줄이 길러왔던 문단(文壇)도 글쟁이들에 의해 갈려야 자연스레 제 길을 찾는다. 무엇보다 제2의 창작인 비평과 평론이 바로서야 한다. 대중이 맞춤하게 가리지 못한 작품도 그만의 생명력을 불어넣는 시대문화의 파수꾼으로 정치와 경제며 교육을 비롯한 사회 구석구석 뼈저린 생채기가 드러내듯 우리 활자예술에서 가장 무딘 펜촉이다. 오죽하면 평론가랍시고 우쭐거리는 흐리멍덩한 글쟁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하재근도 그 중 하나다. 시사부터 대중문화에 영화까지 그때그때 내두르는 넓은 오지랖 역시 우리 사회의 허물이다. 갈수록 긴 글을 읽지 않고, 인터넷에선 더더욱 피하는 대중의 입맛을 꿰어낸 짧은 인상비평(印象批評, Impressionist criticism)은 자신의 주관에 매인다. 그 관점을 받칠 객관성이 맞물려야 평론다워진다. 학생들이 과제물을 베끼듯 손쉽게 감상을 얻어가며 파워블로거로 끌어올렸고, 시청률에 목을 매는 방송에서 띄워줬던 인물이다.

 

 

하재근이 블로그에 올려놓은 글들은 문장력부터 눈엣가시다. 책을 다섯 권이나 내놓은 평론가라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입말을 서술문장에 그대로 들여앉히고, 문장부호도 바르게 쓰지 않으며, 시점조차 종종 틀어져서 기본기라곤 잡혀 있지 않다. 자신의 글조차 다잡지 못한 평론가는 똥 묻은 개에 지나지 않다. 2002년 월드컵에서 붉은색 콤플렉스를 떨쳐낸 새로운 세대문화를 타고 고() 노무현 대통령 때 방방곳곳으로 번진 촛불 속에서 시사(時事)와 대중문화는 물론, 스포츠를 다루는 평론가들이 우후죽순(雨後竹筍) 늘어났던 시기가 2007년 전후다. 그 중에서 대중문화 쪽은 기존의 학계 평론가들과 거리가 멀다. 1989년에 가수 이동원과 함께 국민가요인 향수를 불렀다가 클래식을 모독했다는 성악계의 뭇매를 맞고 단장으로 오를 국립오페라단을 나와야 했던 당시 서울대학교 박인수 교수가 그렇듯 학계에서 대중문화를 논할 전문 평론가는 워낙 드물다. 대개 신문방송학과와 사회학이 아니면 곁가지인 연극영화나 어문계열이다. 예전에는 스포츠와 더불어 기자들이 다뤘던 장르다. 다양함에선 무척이나 바람직한데, 정작 하재근은 그 주관조차 미심쩍다. 자칫 사람의 가슴을 찌르는 칼질이기 쉬운 장르가 비평과 평론이다. 비꼬기로 이름이 쟁쟁한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의 국제스포츠 담당기자인 필립 허시(Philip Hersh)도 맞물릴 두터운 사회문화에서 나온다. 그 칼이 녹슬거나 무디지도 않다. 오늘날 남자들이 방송 드라마를 많이 보는 이유를 여성화되어 문화 친화적으로 바뀌며 영화관을 찾는 50대 아저씨도 늘어간다하고 깐죽거렸던 잣대야 저만의 주관일 수 있다. 반면에 50대 남성들은 아직 가부장문화가 깐깐한 세대다. 인과성(因果性)조차 겉돌도록 세상을 살피니, 본인이 스스로 여성화되어 가고 있음을 느끼거나 남성미에 우세를 떠는 눈길만 의심스럽다. 빤한 일반상식에 힘을 빼지 말아야 함은 글쓰기의 기본자세다. 누구나 큰 덩어리는 알기 때문이다. 웃자란 여성의 경제활동만큼 가정과 문화생활의 중심이 여자와 자녀들에게 옮겨간 한편, 명퇴나 조기 퇴직 따위로 밀려난 가장들이 창업 등을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휴지기가 그 50대다, 하는 글에 가파른 우리 사회의 변화가 다 담긴다. ()의 본질이 변하는 게 아니다. 여성화란 뒤바뀐 생활문화로 인해 물러지는 그 성격인데, 결과를 앞세워 원인을 덮어씌운 어이없는 글짓기이다.

그리곤 불량상품인 리듬체조선수에게만 전통 비평을 들이댄다. “기사가 자꾸 눈에 띄는 건 매체가 수시로 기사를 쓰고, 그것을 포털이 잘 보이게 걸어주기 때문이다. 이례적인 인기는 상당 부분 외모에서 비롯됐다. 매체는 인기 미소녀를 절대적으로 애호한다. 그러므로 언론의 호들갑 때문에 부풀려진 내용으로 자주 나올 수밖에 없다. 구조에 의한 분노를 개인에 대한 분풀이로 푸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 열심히 노력하는 운동선수일 뿐, ‘언플마녀가 아니란 점을 유념하면 좋겠다.” 하재근 본인의 표현을 빌리면 참 건강하지 못한 글이다. 그의 블로그에 대학신문사 기자와 학생들이 남긴 취재며 강연요청이 걱정스럽도록 이 평론가에 대해 유념하면 좋겠다하는 대거리만 앞선다. 유사비평(類似批評)이랄 만큼 평론에 빌붙은 감언이설(甘言利說)이다. 정작 자신이 몸담은 학교는 건너뛴 채 특례입학으로 김연아 선수에게 인신공격을 서슴지 않았던 황상민이 그렇듯 개인과 소속사는 흘려버리곤 불량품을 과대과장해대는 병든 사회의 방송언론과 기업의 정신건강을 대중에게 떠넘긴다. 반대를 위한 반대에 끼워 맞춘 인과성이란 본래 자기변명이다. 2년째 시합을 마치자마자 피둥피둥 오르는 살집이 힘에 부친 살빼기가 부른 요요현상(yo-yo effect)으로 진정성이라곤 느낄 수 없는 선수다. 어느새 나이는 리듬체조에서 막바지인 국가대표 맏언니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도 하는데, 사회만 탓하면 미디어에게 휘둘리도록 제 앞가림조차 못하는 철부지임을 꼬집지 않을 수 없다. 지나친 변명이 긁어 부스럼만 냈던 꼴이다. 그 의도와 환경의 영향 등 속뜻을 풀어보는 근대 이후의 전통 비평으로 외모지상주의며 인터넷사이트의 상술까지 팔아서 사회구조를 탓하고 있으니, 분명히 들어앉힐 같잖은 인기에 대한 부연설명이 일부러 빠져 있다. 언론이 호들갑을 떤다는 그 생김새도 뒷받침이 전혀 없다. 널리 알려진 이미지가 연상효과를 일으키지만, 글쓴이 개인의 눈높이라 한들 대중이 도저히 공감하지 못할 저만의 생뚱맞은 서술은 당연히 부연설명이 붙어야 하는, 글쓰기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혼자만 아는 이야기이다. 이래저래 바른 글짓기부터 배워야 할 야바위꾼에 지나지 않다. 저만의 감상을 으스대며 전문 평론가로 방송언론과 대학교에 불려 다니길 어느새 6년째인데, 뼈를 바르기는커녕 살만 씹어대니, 자기 보신주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기회주의일 따름이다.

 

 

겉핥기에 그치기 쉬운 인상비평은 일반사실을 그르칠수록 배배 꼬인다. 누구나 알 듯 먼저 숲을 보고 나무를 살펴야 한다. 한낱 나뭇가지나 잎에 매달려 남과 다른 관점 자체가 성큼 앞선 지식인 양 뻗대면 가없는 자가당착(自家撞着)만 깊디깊다. 결국 타인 이전에 자신을 쑤시는 날카로운 칼이 글이다. 윤리의식을 건강으로 들먹이면서 노력하는 운동선수를 갔다 붙여 굳건히 지켜야 할 모국어와 정신문화를 함부로 팔아댄 작위성(作爲性)만 추접하다. 때문에 글쓰기는 벌거벗은 자신을 내비치듯 부끄러운 자기개발이다. 서당 개 3년에 풍월을 읊는 법인데, 겉만 번드레하게 어물전 망신을 시키는 꼴뚜기에 지나지 않다. 아무리 비아냥거린들 그 자체로 문장의 성격인 문체(文體)는 아니다. 글쓴이의 개성이 우러나려면 스케이트로 걸음마를 디뎌 주니어 때까지 고난도 기술을 익히는 세월만큼 올바른 습작부터 얼추 10년은 걸려야 자잘한 가닥이 잡힌다. 역시 기술과 표현력의 관계다. 사회 어느 분야나 그 주기로 큰 흐름이 갈리며 어떤 정책이든, 사람이든 자리를 잡아 되비치는 데 걸리는 이른바 안정화(安定化) 과정이다. 어느 분야든 쉽고 작은 싹을 틔워야 뿌리가 튼실해진다. 글쓰기는 짧은 장르부터 단문(單文)으로 이야기를 끌어갈 힘을 길러야지, 처음부터 장편(長篇)과 장문(長文)을 다듬어내기는 몹시 어렵다. 신고식이 장편이더라도 습작 시절엔 콩트(conte)나 단편(短篇)으로 기초를 다져 차차 길게 넘어온 작가들이 대다수다. 나라살림 역시 다르지 않다. 백년을 내다보는 정책일수록 올곧은 오늘 위에 들어서지, 물어뜯기 바쁜 아귀다툼으론 트집 잡기만 끝을 모른다. 정권이 갈릴 때마다 기득권싸움이 물고 물려서 강대국에게 기댄 사대주의가 나라를 좀먹음을 조선시대 600년이 새록새록 오늘의 그늘로 드리워 있다. 한류로 풍악(風樂)을 울리며 백성만 쥐어짜는 양반 사회나 다름없다.

정부는 이른바 4대 중독인 도박, , 마약, 게임을 내몰고 경제민주화를 꾀한다며 내국인도 드나들 선상(船上) 카지노사업을, 농가를 일으킬 창조경제랍시고 승마용 말 사육을 밀어붙인다. 가계 부채부터 자그마치 1000조를 바라보는 처지다. 경륜과 경마며 일명 바다이야기에 카지노공원인 강원랜드가 몰고 온 한탕주의 몸살을 되풀이하기엔 당장 서민을 난도질하는 전세난도 힘겹다. 자칫 그 도박자금을 돌려대느라 아예 수렁으로 밀어 넣을 수 있는 반면, 사회안전망은 여전히 얄팍하다. 그조차 기초노령연금이 그렇듯 대개 16대 참여정부가 당시 한나라당의 거센 반대 속에 올려놓았던 그물이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살 만한 나라꼴이 절대 아니다. 말 사육 역시 5공화국 말미부터 두고두고 꺼내들었던 케케묵은 구닥다리인데, 망아지라 한들 한 마리당 400만원에 매월 관리비와 시시콜콜한 경비로 평균 30만원씩은 잡아야 하는 데다, 무척 예민한 동물답게 널찍한 마구간과 승마운동을 시킬 초지까지 들어가니, 이만한 뒷감당은 이미 부농(富農)이다. 아니면 특별영농자금대출로 농가를 또 돈놀이에 밀어 넣는다. 구제금융 시절에 묻혀버렸던 수많은 농민들의 죽음이 14대 문민정부가 이른바 세계화사업이라며 마구잡이로 들이민 42조의 농가부채에서 불거졌고, 지난 17삽질인생이 둘러친 녹색성장도 그 새끼치기였는데, 미국산 곡물이 농가를 거덜 내는 사이 아프리카 등 제3세계를 통해 소작(小作)을 준 농산물을 싸게 들여오는 해외식량기지개발만 우겨내 신()식민주의 토지수탈이라는 꼬리표만 따갑다. 인천시 송도에 들어설 녹색기후기금(GCF, Green Climate Fund) 사무국이 죄스러울 지경이다. 가장 보잘것없이 이들 곁에서 아이처럼 행복해했던 고() 이태석(李泰錫) 신부 덕분에 표를 몰아준 아프리카 회원국들이 1순위였던 독일을 따돌려줬고, 기후변화에서 개발도상국의 피해를 줄이고 끌어주는 그 국제기구의 성격과 나라가 해대는 짓이 따로따로다.

 

 

처음부터 ·아프리카경제협력(KOAFEC)’ 4차 장관급회의에서 연주를 시킬 목적으로 톤즈(Tonj) 브라스밴드를 불러들였던 한국수출입은행이다. 표를 얻어내려는 욕심이 앞섰던 게 틀림없다. 2011년에 남수단으로 독립한 뒤에도 금광을 둘러싸고 부족끼리, 또 정부와 싸움이 끊이질 않듯 행여 섣부른 돈벌이는 뿌리의식이 강한 지역주민들과 뒤엉키기 쉬우니, 국가가 나설 협력사업 외엔 민간단체의 멀리 보는 봉사활동으로 돌아가야 한다. 정부가 그 아이들만 챙길 순 없다. 퍼주기는 손만 벌리는 지역이기주의를 물들여 김연아 선수에게 하듯 단물만 빨아대기 십상이다. 이태석 신부의 사랑이, 그 맑은 아이들이 상처를 받을까 살레지오수도회가 걱정했을 만하다. 영남대와 경상북도가 몰아가는 새마을운동세계화 역시 정권을 낳으려던 전시행정이라는 구설수에 눈치를 볼 만큼 관계기관끼리 말조차 맞추지 못해 사업이 겹치고 엉키길 꼬박 3년째다. 살인자 전두환 시절부터 개도국을 돕는답시고 건너가곤 갑자기 세계화 타령이다. 그 동생 전경환이 새마을운동으로 878000만원을 해먹었던 ‘5공 비리 상사병이 꿈틀거릴까 가위눌림만 사납다. 도무지 기본이라곤 지킬 줄 모르는 마키아벨리스트(Machiavellist)들이 쥐떼처럼 나라 곳간을 들어먹는다. 목적달성으로 수단을 정당화시키는 잔머리들이다. 남북정상회담대화록에 얽힌 서해 북방한계선(NNL), 국정원과 군()사이버사령부의 댓글개입도 그 수렁에서 헤어나질 못한다. 식량자급률이라곤 겨우 45.3퍼센트 남짓으로 이젠 중국산도 모자라 베트남을 비롯해 값싼 동남아 농수산물이며 축산물이 쏟아질 판인데, 농지와 경작인구를 줄이는 말 사육은 나라를 뒤집는 또 다른 4대강이다. 앞장선 지역부터 경상북도다. 2011년에 말산업 육성법을 게워내자마자 경상북도 민선단체장들이 앞다퉈 승마장에 30억 원이 넘게 질러댔지만, 수요보다 공급이 많아 적자로 휘청거리며 발을 빼려는 지자체만 늘고 있다. 공공승마장 다섯 곳이 연간 21억 원이나 혈세를 날름 빼먹는다. 민생이 바짝 졸아들어 국민들은 승마를 즐길 여가시간과 돈부터 없으니, 그 말들을 사람이 업고 다니는 꼬락서니다. 과거의 길고 질긴 그림자이기도 하다. 1970년대 지역별로 특성화시키지도 않은 채 밀어붙였던 깨와 고추며 밤이 잇달아 생산이 넘쳐나 가격파동만 일으켜놓곤 여전히 그 물에서 노니는 새마을운동의 미꾸라지들이 징글맞기 그지없다.

강을 파헤쳐 줄어든 경작지로도 성을 못 채운 전시행정은 지역이기주의와 세대 갈등으로 일찌감치 표심(票心)을 짓조를 검은 술수다. 국민의 공감대를 얻는 마음가짐만 부쩍 아쉽다. 눈앞의 부조리와 환경파괴를 200년을 앞서 내다본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업적으로 떠넘기는 4대강 떼쟁이들 역시 혼자만 아는 소리다. 장마 한 번에 여기저기 쓸려 내려간 자전거도로다. 금이 가고 물밑에서 헐어가는 보()200년을 버틸 리 없으니, 죗값만 피하려는 기생충들이다. 한반도의 이상기후는 중국의 환경오염이 더 골칫거리다. 이른 봄부터 한반도 위쪽에 넓게 퍼져 이상고온을 몰고 오는 고기압이 전혀 움직이질 않고, 그 더위가 뿌리치거나 말려버렸던 태풍이 추석 이후에 연달아 올라올 만큼 지구온난화까지 적도를 뜨겁게 달군다. 결국 올해 같은 한여름 가뭄을 끼고 살아야 한다. 교학사 역사교과서 사태마저 그 억지소리다. 역사도 관점은 다를 수 있다. 그만큼 상대성을 세워 교과서다운 중심이 오롯해야 하는데, 골통보수로 첫손에 꼽는 역사학회까지 좌익이라고 내칠 만큼 저만의 사관(史觀)을 떵떵거리니, 생각의 차이는커녕 교재(敎材)를 쓸 그릇이 절대 아니다. 개인의 논문이 아닌 미래를 이끌 교과서가 아닌가. 학회에서 오랜 연구로 논증(論證)을 끝내야 학설이나 그 정의로 삼아짐을 학자랍시고 모를 리 없으니, 기회주의의 구린내만 코를 찌른다. 교학사와 공동 집필자들은 물론, 공주대학교도 뒤늦은 핑계만 급급하다. 예전부터 이단아였던 밥벌레를 거르지 못한 책임은 출판사가 결코 피할 수 없으며, 이름을 함께 올린 집필자들의 속내 역시 시커먼 데다, 비록 근현대사를 맡지 않는다 한들 고대든, 중세기든 그 삐딱한 사관을 곁들일 수 있고 학교에 몸담지 않은 채 교과서를 맡진 못하니, 밥상을 차려준 죄마저 가볍지 않다. 5,6공화국 시절에도 학생운동에 끝끝내 등을 돌렸던 공주대학교다. 지금은 한국교통대학교로 묶인 철도대학교와 2001년에 없어진 세무대학과 더불어 교원대학교 역시 현실에서 차디차게 등을 돌렸던 국립대학들이다. 학생과 교수들을 끌어온 운영방침이 한마디로 보신주의다. 어느 나라든 보편타당성 속에서 설핏 팔이 안으로 굽는 역사가 우리는 오히려 바깥으로 꺾이는 기형을 내지르니, 어느 집단을 위한 이념일 수밖에 없다. 왜곡을 탓하면 좌익이라는 경제에 이은 양극화(兩極化)만 날뛴다. 그들의 잣대론 자본 일방주의를 피해 사회민주주의를 일궈온 베네룩스 3국과 핀란드를 비롯해 노르웨이며 스웨덴은 영락없이 그림의 떡이다.

 

 

사회주의 정당이 버텨선 유로의 각 나라들이 분단국가가 아닌 까닭은 절대 아니다. 1155년 이래 스웨덴과 러시아에게 줄곧 짓밟히다 볼셰비키혁명을 틈타서 독립을 얻자마자 19181월부터 5월까지 수만 명이 핏물을 덮어쓴 이념전쟁을 연립정부가 사민당(社會民主黨)을 온전히 끌어안으며 끝을 맺었던 핀란드다. 사상의 피울음보다 역사 속에서 초강대국과 국경을 맞댄 처지를 먼저 살폈던 상대성이다. 2차 세계대전 후 쉽고 빠른 미국의 유럽부흥계획(ERP, European Recovery Program)’을 뿌리친 채 1948년에 옛 소련과 우호협력 상호원조조약(FCMA, The Treaty of Friendship, Cooperation and Mutual Assistance)’을 맺어 동유럽 전체가 그들의 위성국가로 넘어간 냉전시대를 중립으로 헤치며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바람막이가 되어줬던 슬기가 남부럽다. 유럽대륙 자체가 사회전체주의인 나치(nazi)와 독재 파시즘(fascism)에 짓밟혔던 피해국들이다. 연합국이 강제로 갈라놓았다가 45년만인 1990103일에 통일을 이뤘던 독일까지 일일이 들추지 않아도 우리나라는 상대성이라곤 없는 일방주의가 분단만큼 이중성만 부풀린다. 한국전쟁 속 피울음부터 한스럽지만, 치르지 못했던 역사청산이야말로 뿌리 깊은 골병이다. 1882년에 맺은 ·미수호통상조약을 팽개친 채 1900년부터 공화당 부통령 후보였던 제26대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가 계속 대한제국의 주권을 저희 멋대로 들이밀다 1905729일에 아예 떠넘기는 카스라·테프트 밀약을 맺었던 미국이다. 그 식민지배가 낳은 분단에서 은혜를 베풀었던 혈맹으로 지금껏 변변한 사과조차 모른다. 받아낼 깜냥이라곤 없는 나라꼴이 108년 전만큼이나 한심스럽도록 을사오적(乙巳五賊) 같은 간신배들만 들끓고 있다.

역사 이래 면면한 민족을 바르게 추스르지 못한 이념이란 소 잃은 외양간조차 무너뜨린다. 물론 민족은 대안(代案)이 아니다. 안팎으로 에지를 쓰듯 우리를 바르게 드러낼 중심이다. 살아가는 생활은 저마다 달라도 김연아 선수를 아끼는 대중의 공감대는 크게 다르지 않고, 세계무대에서 더 깍듯이 섬기듯 마땅한 도리가 바로서야 다문화가정과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을 넉넉히 받아들일 이치도 촘촘히 이를 맞춘다. 헐어빠진 잇몸에 치료조차 없이 이를 박아 넣을 순 없다. 번역체인 타동사 되어와 그 자체론 아무 뜻도 없이 앞말을 받아주는 허사(虛辭)()’를 지나치게 함부로 쓰는 버릇 역시 같은 허물로 봄 직하다. 일상에서 번역서적을 통해 입에 밴 생활어가 표준어를 앞지르기 일쑤다. 언론사 기자들부터 틀어진 습관에 길들어 있다. 훈련을 거르기 힘든 피겨선수만큼 글쓰기는 생활 속에서 습관을 붙인 감각이 스스로 글을 다듬어준다. 자연스레 인과적인 사고가 재차 꼼꼼해진다. 글을 쉬운 입말로 옮길수록 문장력과 어휘력은 여물지 못한다. 앞뒤로 체언을 받아주는 관형격(속격)조사 까지 섣불리 우겨 넣지만, 일상에서 자동차의 타이어라고 말하지 않는 데다, 일본이 남긴 찌꺼기이다. 일본어 ()’와 같은 쓰임새다. 소유격(所有格)부터 동격(同格)을 비롯해 장소와 시간이며 상태(狀態) 및 재료(材料)를 잇는 격조사로 쓰여서 서울의() 대학교라고 적으면 서울 안에 있는 모든 대학교를 가리킨다. 분명히 알고 가려 써야 한다. 심지어 부산 사투리로 알려진 뎃기리(てっきり), 앗사리(あっさり)’는 각각 (인 줄 알았다)’담백하다를 뜻하는 일본어다. 꼬치꼬치 캐내면 끝이 없다. 도를 넘긴 외국어 사용과 문장만 다뤄도 두툼한 책이 두세 권은 나온다.

 

 

순수예술과 대중문화를 이루는 수많은 장르들이 서구에서 들어왔으니, 그들의 언어를 빌려 쓸 수밖에 없거나 우리말처럼 굳어진 귀화어(歸化語)는 또 다르다. 이미 서구의 생활문화를 살아가며 외국어를 마냥 뿌리치긴 힘들다. 자신보다 피겨를 더 사랑해 달랬던, 언제나 팬과 함께 하겠다던 김연아 선수의 드레진 마음 중심이 그렇듯 모국어를 아끼는 마음가짐이 곧아야 한다. 한글을 배우는 외국인들이 날로 늘어 가고 있다. 영어교육조차 오래 전에 듣기와 말하기로 옮겨졌는데, 제 생각도 맞춤하게 써내지 못하는 대학생들이 넘쳐난다. 작가들이 많이 읽고 많이 써라하고 다그치는 잔소리가 맞는 말이다. 스스로 감을 잡으면 그만그만한 솜씨는 글만이 아니라 피겨를 비롯한 모든 개인종목에서 경기운영능력이 굳어질수록 자연스레 딸려온다. 원칙이 바로서지 않은 임기웅변은 돌연변이만 낳는다. 주니어 때 표현력을 수북이 채워본들 시니어에서 꼭 그대로 우러나지도 않는다. 조금이나마 속도를 더 붙이고 체력훈련으로 거듭 곧추세운 운동능력이 체형변화기를 위한 기초대사(基礎代謝, basal metabolism), 즉 에너지 소비량을 늘리도록 멀리 내다봐야 한다. 웬만큼 운동량을 늘린다 한들 15세 이후 크게 느는 호르몬은 곧장 체지방으로 퍼진다. 이조차 버리고 취하는 취사의 선택인 셈이다. 선수의 문체인 몸짓 역시 안무가들이 지나치게 자기 물에서 놀기보다 데이비드 윌슨(David Wilson)이 그렇듯 다양한 음악을 통해 그 자신을 거듭 개발해야 한다. 이름값만 팔아댈수록 피겨 판만 밋밋해진다. 고인 물로 머물면 사람이든, 단체든 새로움이 자라지 못해 피겨정치가 아니라 정치피겨로 썩어버린다. 무엇이 앞에 오는 가에 따라 다르다. 스포츠도 저만의 국제사회로 그 정치와 외교를 떼어놓은 채 진정성만 바라면 법 없는 사회를 바랄 수밖에 없다. 정성을 가꾸고 지킬 스포츠정치가 곧아야 한다. 정치선진국일수록 경제에서 생산자와 소비자를 잇대어 중간 유통과정을 줄이듯 사회단체를 통한 국민의 정치참여가 투명성 높은 열린사회를 이끈다.

그에 반해 대한민국은 영락없이 나라 전체가 4대강이다. 허튼 기초 위에 정치가 벼슬자리로 굳어져 국회의원들부터 연봉만 15000여만 원씩 뜯어간다. 매년 꼬박꼬박 올려대니 다음 19대 때는 기어이 2억 원에 달할 참인데, 1인당국민총소득(GNI)은 겨우 2559만원으로 금배지들부터 양극화를 들볶고 있다. 정부와 기업에게 돌아가는 몫을 빼면 더 바짝 줄어든다. 일명 개인총처분가능소득(PGDI)은 고작 1482만원에 그친다. 언제 어디서나 정치를 잘근잘근 씹어대면서 종내 어쩔 수 없다하며 자포자기로 돌리기 일쑤이듯 투표율도 턱없이 떨어진다. 흐릿한 국민의식을 꾀어내는 거짓 공약들이 설칠 수밖에 없다. 투명성이라곤 암실 같은 대한민국에서 소중한 주권을 팽개친 만큼 사회를 통해 자신의 생활을 돌볼 줄 모르는 개인주의는 제 발등만 찍는다. 자포자기든, 무관심이든 자기애에 기운 그 역시 이중성의 하나다. 누구를 뽑아놓든 보수답게, 진보답게 믿고 맡길 정치선진국이 전혀 아니다. 당장 피겨링크를 지어줄 보살핌이라곤 모르쇠다. 올림픽을 받아낼 홍보대사로 떠밀곤 사회를 널리 살필 나라살림은 대한민국을 세계무대에서 드높이는 스케이터에게 유일한 약점인 국적(國籍)에 지나지 않다. 전용링크를 위한 정치가 따로 있지도 않다. 진흙탕 사회정의에 넌더리가 나지만, 두고두고 갖은 행사치레마다 국제사회에서 누리는 피겨여왕의 이름값을 계속 우려먹을 더러운 모리배(謀利輩)들이 우글거린다. 올림픽 포상금조차 멋대로 뜯긴 박태환 선수를 통해 훤히 드러난다. 우리나라 스포츠 행정은 체육행정가들이 피둥피둥 배를 불렸던 전두환 군사독재의 전체주의에 내내 향수병을 앓고 있다. 저 홀로 한국수영에 올림픽메달을 안겨온 선수다. 에스케이(SK)와 계약이 끝난 뒤 후원기업이 나서지 않아 자비훈련까지 마다하지 않았는데, 예전 전담팀이 훈련일정부터 대회참가까지 일일이 수영협회와 머리를 맞댔고, 그만한 물개라곤 씨가 마른 처지에 뒤를 받칠 기업을 개인의 몫으로 강 건너 불구경만 해댔던 그들의 핑계는 인과성과 통일성이라곤 없다.

 

 

수영협회가 기업들을 들들 볶아대도 모자랐을 판이다. 박태환 선수를 바라보며 꿈을 키울 떡잎이 한 명이나마 아쉬운 만큼 우리 수영을 스스로 걷어찼던 권위주의. 올댓 스포츠가 직접 짓겠다고 해도 개인이 거느릴 수 없는 국제경기장만 졸라대는 지자체 역시 그 울이다. 누가 짓든 국제경기장은 어차피 피겨전용이 아니다. 링크 부족에 시달리는 아이스하키와 쇼트트랙이 먼산바라기만 할 리 없고, 얼리고 녹이느라 곱으로 들어가는 관리비용을 자칫 올댓 스포츠가 뒤집어쓰거나 그 시간조차 아끼기 위해 여느 빙상장과 다를 바 없이 돌아가기 쉽다. 올댓 아이스쇼로 떡고물을 받아먹으려는 장삿속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남녀싱글은 물론, 아이스댄싱과 페어 외에 안무가를 키우는 전문성을 갖출 피겨문화의 요람으로 전용링크가 제격이다. 이제는 경제의 요람을 쥐고 흔드는 재벌과 전체주의에서 서서히 발을 빼야 할 때다. 수출만으론 시장변화 때마다 흔들리기 일쑤이고, 전 세계가 움츠린 침체기야말로 사회를 점점이 잇는 점조직에 간추릴 적절한 시기이기도 하다. 위기를 기회로 돌릴 안살림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약속까지 저버린 채 철도민영화를 꾀하며 돈을 짜대는 정부가 걸림돌을 걷어내 주겠다고 해도 10대 재벌들이 두 달째 1000조를 훌쩍 넘긴 주머니를 풀지 않고 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상장사(上場社) 유보율(留保率)1400퍼센트에 달하도록 차곡차곡 쌓아둔 돈이다. 영업활동에서 나온 이익잉여금과 자본 따위 특수거래가 낳은 자본잉여금을 합한 금액을 회사를 굴리는 데 들어간 납입자본금으로 나눈 비율은 기업의 자금을 재는 눈금이자 부채비율과 함께 안전성을 나타내는 바로보기다. 재벌들은 더 긴 불황과 위기를 내다보고 있음을 뜻한다.

미국식 자본주의가 언젠가 무너지리란 지청구는 1940년대부터 세계 석학들이 줄곧 이어온 옛이야기다. 자본 일방주의 자체가 지나치게 뾰족한 피라미드로 90퍼센트에 이르는 전체 자본이 국민 1,2퍼센트에게 치우쳐 다단계처럼 시간이 갈수록 중간 밑은 깡통만 차기 마련이다. 꼭짓점이 높아질수록 무너질 바벨탑에 지나지 않다. 눈을 벌겋게 뜨고도 미국 꽁무니만 졸졸 따를 뿐 세상을 이롭게 호흡을 맞추는 김연아 선수에 견주어 국민과 더불어 숨을 고르는 생활정치가 아닌 저희들만의 직업 정치생활이다. 문장 역시 들숨 날숨은 숨어 있다. 호흡이 고른 짧은 문장을 기막히게 다뤘던 황순원(黃順元)과 서정인(徐廷仁) 작가의 솜씨는 결코 쉽지 않다. 대개는 단문·중문·단문으로 잇는 문장이 편하다. 쓸수록 굽이굽이 돌아가는 멋스러운 장문과 복문(複文)을 적절히 들여앉혀 읽는 숨결에 길고 짧은 리듬을 붙인다. 문장을 살찌우려면 당연히 어휘력이 받쳐줘야 한다. 꼭 들어가야 할 한자어가 아니면 우리말로 풀어쓰고, 따로 단어장을 만들어 적어두는 습관만으로도 크게 늘어난다. 부정접속사인 그러나하지만은 문장 안에 부정문으로 녹여 넣을수록 앞 문장에서 훌쩍 건너뛰지 않은 채 그 사이에 들어 있는 심리나 정서를 찬찬히 디디며 어휘력도 키워진다. 컴퓨터자판으로 글자를 찍는 타이핑(typing)은 편한 만큼 잃는 것도 많다. 중국인들이 컴퓨터로 흔히 찍던 한자어조차 손으로 쓰려면 가물가물해 하듯 인지사고(認知思考)능력이 크게 떨어진다. 우리라고 다르지 않다. 손가락을 놀리자마자 원하는 글씨체로 모니터 화면에 뜨다보니, 글을 되새기질 않고 생각을 빠르게 내지르며, 인지과정이 옅어진 단선적(單線的)인 사고(思考)를 길들인다. 스포츠와 방송연예 기자들에게 흔한 글짓기다. 아래한글 프로그램에 저장하며 써도 종이에 인쇄하면 다를 때가 많다. 눈으로 읽어 인지하는 장르인 만큼 이미지에 따른 차이가 퍽 크다.

 

 

운동선수에게 군소리 없는 홍보자료가 경기이듯 벌어먹는 글쓰기에서 자기개발이 허술한 기자는 스스로 진정성을 해친다. 언론사 취업시험에서 논술은 어떻게 치러냈는지 의뭉스러움만 앞선다. 국정감사에서 드러난 대우조선의 35억 원짜리 비리를 다루며 직접 광고하는 목걸이도 아닌데, 김연아 선수의 이름을 내걸었던 기사는 그 내용을 함축하거나 상징하고 서술 또는 동사형으로 주제를 드러내야 할 제목조차 비틀어 팬들까지 싸잡아 헐뜯는 낚시질이다. 누구도 나서지 않는 우리나라 평론문학의 현실은 더 끔찍하다. 바로 앞서서 전용링크라곤 토씨조차 건들지 않은 채 한국피겨의 현실을 모르는 국민들이 무거운 짐을 김연아 선수에게 씌우고 있다는 기사 역시 팬들을 건드려 그 인기를 은근히 깎아내렸던 분탕질이다. 올해 초부터 갈수록 초점이 대중을 향하고 있다. 결코 흔들리지 않는 피겨여왕을 휘돌아 본보기를 우러르는 그 의식을 쪼아댄다. 아귀가 하나하나 들어맞는다. 반일(反日) 감정 탓에 물밑에서 움직여온 일본의 거대 광고대행사인 덴츠(Dentsu)’가 그 상어 지느러미를 슬슬 드러낼 만큼 나라 곳곳이 빼도 박도 못할 그들의 자금으로 돌아간다. 삼성과 엘지(LG)며 에스케이(SK)에 현대가 그 주인공들이다. 우리나라 경제를 자그마치 70퍼센트나 떠맡은 이들만이 아니라 재벌들마다 그 관계사일수록 전체 주식의 67퍼센트를 넘는 자본을 외국이 쥐고 있다. 삼성전자는 무려 80퍼센트가 일본자본이다. 1997년 외환위기 속에서 들어왔던 대부업체는 처음부터 그들 돈으로 저축은행을 집어삼킬 참이고, 시중 은행들조차 일본 돈이 60퍼센트를 넘긴지 오래다. 그뿐이 아니다. 방송연예계가 아무리 아니라고 숨긴들 걸그룹 카라의 해체설이 일본에서 먼저 앞섰듯 한류를 띄우는 자본도 대개 섬나라의 뭉칫돈이다. 결국 우리 국민은 경제식민주의에 뼈가 빠진다.

안방은 친일에 목청을 높이는 군사독재의 간신배들로 채우곤 동북아를 얼러댈 일본의 자위권에는 벙어리 흉내인 나라꼴이다. 당연히 보름이나 지난 침묵은 동의일 수밖에 없다. 이미 6자회담의 주도권을 따낸 중국에게 얼굴도장을 찍어뒀으니, 미국만 믿다가 뒤통수를 맞았던 뇌진탕 후유증도 아니다그 선대로부터 사대주의로 당파싸움만 벌이다 친일에 나섰던 을사오적만 얼비친다. 제 땅인 조어도(釣魚島)를 놓고 손가락만 빨던 대만이 결국 중국에게 기대기라도 하듯 남북이 정치는 다르다 한들 역사조차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분단의 갈등은 그들만 거들어줄 뿐이다. 역사왜곡을 넘어 욱일승천기를 독도 앞에 들이댈 날이 머지않은 미래다. 이미 차세대전투기를 ‘F-35’로 정해뒀으니, 갑판길이만 248미터인 헬기호위함을 언제든 손보면 경량급 항공모함전투단이 차려진다. 중국도 랴오닝(瓦良格)호 외에 2015년까지 여섯 척이나 더 들일 참이다.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우리나라가 집안싸움으로 진을 뺄수록 군사대국화에 나선 중국을 빌미로 경제에 허덕이는 미국을 구슬린 일본만 밀어준다. 어느 나라든 보수와 진보는 있다. 우리나라는 그 과정으로 틈을 메우며 중심을 잡아야 했던 중도(中道)가 없다.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다. 진정한 보수라면 북한을 어르고 달랠 국방력을 키우는 데 저희들부터 군대에 가야 하는데, 19대 국회는 아들들 중 면제자가 18.6퍼센트로 일반인보다 10퍼센트 가까이 많다. 사회생활에선 아주 멀쩡한 병치레들이다. 고위공직자 아들들은 네 명 중 한 명이, 재벌들은 셋 중에 하나 꼴로 면제를 받고, 그나마 군대를 가는 쥐꼬리도 단기사병을 비롯한 보충역이 22퍼센트를 웃돈 채 현역은 60퍼센트에 불과하다. 그 연세대학교 꼴뚜기인 황상민도 일명 육개장 출신이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아들들이 혜택을 보자마자 1992년 말에 없어졌던 6개월짜리 석사장교다.

 

 

글쓰기를 통해 들여다볼수록 김연아 선수는 삶을 깨우는 작가정신이 두드러진다. 세기의 천재를 홀대하며 창조경제에 입방아를 찧은들 나라를 가르는 콧방귀만큼이나 90년대를 주름잡았던 첨단 기술과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키우는 중소기업’, 즉 벤처기업(venture business)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우리나라의 족쇄다. 사회 각 분야를 통해 생산과 유통에 판매며 서비스 등 그 모든 과정에서 창의력으로 새로운 일자리를 만드는 창조경제는 재벌이 전체 유통구조를 꽁꽁 틀어쥔 만큼 체질개선을 팽개친 경제민주화나 다름없는 헛짓거리다. 뒤에 마사회가 웅크린 말 사육처럼 관권(官權)경제로 돌아가기 쉽다. 결코 경제만 봉건주의가 아니다.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할 홍익인간(弘益人間)이 교육이념인 나라가 개천에서 나온 용을 바라지 않는 양반들로 바글거린다. 태어난 울을 이겨낸 빼어난 인물은 자신의 본분만 행할 지라도 국민정서에 반전을 위한 반향(反響)을 일으킨다. 시대가 어렵고 불행할수록 영웅을 기다리는 이치다. 일찍이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열린사회와 닫힌사회로 다름을 인정하기는커녕 과거를 헛돌며 버려야 할 구습과 제 식구 감싸기만 내두를수록 인류애 위에 개개인이 추스른 종교와 도덕은 물론, 천재(영웅)의 외침에서 겉돌 뿐임을 짚어줬던 바 있다. 배우고자 하면 누구에게든 가르침은 찾아진다. 17세 때 자신은 집안이 어려운 줄도 몰랐다, 그저 피겨가 운명인가 보다 했다며 털털하게 웃어넘긴 여고생이 힘든 기억이 더 많다고 속내를 털어놨던 때가 3년 뒤 올림픽에서 꿈을 이룬 이후다. 말을 애써 아꼈던 것이다. 쪼들리는 훈련비에 미운 정 고운 정이 넘실대는 꿈을 자칫 접을 뻔했던 선수 본인이 이유를 몰랐을 턱이 없다. 그 짓무른 속을 우리가 다 알 순 없지만, ‘안 괜찮아도 괜찮았던 데지나지 않다. 아무리 털털하다 한들 몰랐다, 운명인가 보다하고 마물렀던 마음가짐은 꿈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끊고 맺은 자기절제였음을 그 말들이 가슴 시리게 되새겨준다.

대중이 스포츠 스타를 반기는 이유엔 각본 없는 드라마가 차지하는 몫이 자못 큼직하다. 어느 장르든 무대연기가 생활인 연예인들에 비해 경기를 통해 꾸밈없이 다가가는 삶의 공감대부터 남다르고, 성실한 이미지가 더해지면 생김새는 곁가지일 수 있다. 연예인들이 예능프로그램에 나가 망가지는 모습까지 보여주는 이유다. 영화나 드라마 홍보며 휴지기에서 돌아온 발돋움을 위한 연기라 해도 놀이와 웃음은 고정관념을 깨트린다. 삶 역시 자신의 머리와 가슴이 교감해서 사회에 드리우는 소통이다. 머리만 앞세우면 국민의 가슴은 결코 열지 못한다. 정치 역시 혼자나 어느 세대 위주가 아니라 사회를 뭉뚱그린 듯 생각이 다르다 한들 만사(萬事)를 다룰 전문가들을 골고루 들여앉혀 분야마다 상식에서 어긋나지 않는 합리주의(合理主義)를 따를 때 궂은 과거를 딛고 미래를 열어젖힐 길을 열어준다. 문장조차 비슷한 어순(語順)으로 쓰면 쉽게 질리는 법이다. 주어의 순서를 바꾸고, 도치법과 복합문을 적절히 넣어주면 읽는 맛이 드다른 데다, 허사와 속격조사를 덜어준다. 내시(內侍) 노릇이나 해대며 5공화국 시절로 돌아간 방송언론은 시제불일치다. 요즘 생활문화에서 현재진행은 인터넷인 까닭이다. 역사가 돌고 돈다는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의 반복성은 발생해서 성장한 뒤 해체에 이르는 유기체(有機體)로 문명을 들춰봤던 자연스러운 흐름이지, 아직 한창 뻗어나갈 생활문화를 거슬러 재주껏 끼워 맞춘 짜깁기가 아니다. 그만큼 본분(本分)이라곤 지키지 않는다. 한류는 숫제 나라가 나서서 재외공관(在外公館)마다 모임과 축제를 꾸려주고, 나라살림조차 제대로 다루질 않는 방송언론이 뻥튀기를 해대면서 대한민국에 대해 좋은 것만 떠올리게 하는 김연아 선수에겐 생떼를 일삼는다. 단물만 빨아대는 자기과시에 국민만 발을 동동 구를 따름이다. 어떤 자리에 머물든 자신을 방짜 유기처럼 두들길수록 좁은 문이나마 차츰 사회가 열린다. 나라살림은 천심으로 살필 후손들의 오늘이다. 자신의 본분을 꿋꿋이 지키는 피겨여왕에게조차 서글픈 오늘이 후손들의 미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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