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최고로 손꼽는 곳이 바로 강진, 해남지역이다. 일명 '남도 답사1번지' 그러나 내게 있어 이 여정은 오래 전부터 꿈꾸어 왔지만, 실현되기까지는 여러 어려움이 많았다. 우선 거리와 시간 그리고 경제적 문제등이 가로 막았다. 그러나 지금가지 않으면 영영 보지 못한다는 우려감 때문에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역시 2박 3일의 여정은 내게 생각 이상의 감동을 내게 전해주었고, 남도의 멋진 산하와 바다 그리고 남도인의 푸짐한 인심 또한 선물 받고 왔다..
원래 그윽한 산사와 유적지 위주로 답사하고자 했지만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아내와 동행하는 바람에 채석강의 일몰이나 보길도방문도 일정에 넣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잘 되었는지 모른다. 자연보다 다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단지 내소사의 화려한 창살과 전나무 숲길을 보지 못했고, 선운사의 풍경소리를 듣지 못했고 강진 다산초당에서 정약용을 숨결소리를 느끼지 못해 아쉬움을 가졌지만 나중에 또 답사할 명분을 찾았으니 오히려 다행이다.
내게 있어서 이번 여정의 최고로 꼽는다면 환상의 섬 '보길도'를 추천하겠다. '우리 나라에도 이런 아름다운 풍광이 있구나' 하는 탄성을 내지른 곳이다. . 괌, 사이판, 제주보다 더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않으리라.
두 번째로 '운주사'를 추천한다. 어떻게 절이 세워졌는지 그 유래마저 베일에 가려져 있으며, 천 개의 부처상과, 천 개의 기묘한 탑이 불규칙적으로 군무를 이루고 있으니 가히 장관이며, 더우기 기묘한 도형이 탑에 새겨져 있고, 커다란 와불이 하늘을 향해 누어있는 것을 보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장길산의 마지막장면 '이 와불이 세워지면 극락세계가 이루어진다.' 라는 소설이 눈앞에 펼져지니 말이다. 이는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와 견줄만하다고 한다.
막 출발할려니 일주일전에 빌려온 비디오테이프가 보인다. 빌려놓고 보지도 않았는데....
오늘까지 반납하지 않으면 추가 연체비를 물어야 한다고 해서 부리나케 전달하고 돌아 와보니 아내가 얼굴 다듬는다고 꾸물거린다. 확 짜증을 내었더니 입이 튀어나오고..한마디 .내 밷는다.
"내가 여행가는 이유는 당신 여행 잡치게 할려고 간다." 아주 발악을 한다.
어쨌든 속으로 웃었다. 그나마 내가 짜증을 냈으니 지금 출발하지.. "15분은 절약했다."
어쨌든 12시 20분 집을 나설 수 있었다. 가스 가득 충전하고 중부고속도로에 접어 가속기를 밟았다. 겨울햇살에 반사된 들녘이 따사롭게 느껴진다.
태인 I.C를 벗어났다. 아내는 이곳이 외가댁이라고 한다. 바로 장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거기왼쪽으로 돌면 xx면이 나올꺼야. 자네 5촌당숙한테 꼭 가.."
장모님의 흥분된 목소리를 접했다. 원래 장모님과 동행할려고 했는데. .장인어른이 괜히 반대를 해서.... 얼마나 이곳에 오시고 싶었을까.
4살박에 정수에게 " 이곳이 외할머니 고향이란다." 했더니
정수가 "나도 고양이 사줘."
할 말이 없었음.
1. 김제평야
끝없는 평야가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당진평야와 함께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이다. 6년전 만주벌판을 보았을 때 '황량함'과는 다르다. 농민들의 땀방울이 어려 포근하게 느껴진다. 사방이 확 트인 지평선에 겨울새들이 무리를 이룬다. 장관이다. 아이는 너무나 신기한지 눈을 떼지 못한다.
저런 넓은 들판에서 과연 자기 논을 찾을 수 있을까? 만약 사람이 죽으면 어디다 묻어야 할지? 산도 없는데 논에다 묻나...쓸데없는 걱정을 한다.
부안 시내에 접어드니 오늘날 가장 촌스런 색깔을 가지고 있는 시내버스가 보인다. 노란색과 빨간색이 혼합되었는데 촌스럽다기보다는 오히려 예전 전형적인 시골버스의 옷을 입고 있다. 장터에 팔 씨암탉이 튀어나올 것 같은 포근함을 지니고 있다.
2. 새만금간척지
안내판에 쓰여져 있는 글이다. 새만금 종합개발사업은 해안매립공사와는 달리 심해의 간석지에 방조제를 축조하여 담수호 및 토지를 새롭게 창출하는 간척사업이다. 최근 도시·산업화의 결과로 연·근해 어장의 오염 및 퇴적 등으로 효용가치가 상실·저하된 간석지를 효율적으로 이용하여 급증하는 토지수요에 적극 대처함은 물론, 주곡인 쌀의 자급유지와 식량의 안정적 공급을 위한 우량농경지를 확보하는데 이 사업의 의의가 있다고 하며 , 세계 최장, 최대 규모라고 자랑을 한다.
20년공사다. 부안에서 군산을 잇는 세계최대의 간척사업.. 지금도 진행중이다. 저 멀리 바다끝까지 방파제가 이어진다. 그 안의 망망대해를 전부 땅으로 메꾼다고....세계 최대의 실수를 하는 것이 아닌지...
자연을 거스르는 우매한 행위가 아닌가 생각된다. 변산이나 격포해변의 모래사장의 폭이 갈수록 줄어들고 뻘이 줄어드는 대가를 벌써 치르고 있다. 시화호의 환경문제를 우리는 또 풀어야한다. 단순하게 살자. "let it be" 내버려둬.. ...
3. 변산해수욕장
해수욕장은 적막하다 못해 을씨년스럽다. 그러나 우린 모래해변을 뛰었고, 모래에 그림도 그렸다. (이 나이에 말이다.)
바닷가에 조개껍질을 보고 신기해하고, 고함지르고 파도를 피해 도망가는 정수의 모습을 보고 아이에게 더 자주 자연을 보여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수가 매일 잘 때 동화책을 읽어달라는데 난 전혀 읽어주지 못했다. 읽어주기도 귀찮지만 엄마처럼 재미있게 목소리까지 바꾸어 읽지 못하겠다. 단지 정수가 아빠를 좋아하는 것은 매주 정수를 데리고 산과 들로 유적지를 찾아가기 때문이다.
토요일이나 일요일 눈을 떠서 아빠 얼굴이 보이면 정수는 항상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빠 오늘 어디가?"
다시 해변길이 우릴 인도한다 변산반도를 휘감아 도는 도로는 가히 환상의 드라이브코스라 말할 수 있다.. 몇 분 후 채석강에 도착했다.
4. 채석강의 일몰과 격포 해수욕장
5시에 채석강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주차비 4천원, 입장료 1인당 천3백원을 받는다. 무려 6천원을 넘게 지불했다. 아무리 국립공원이라 하지만 너무했다. 6시 문닫는데 말이다. 그런데 다른 차들은 이곳에 주차하지 않고 바깥에 그냥 세운다....
어쨌든 조금 산길을 오르니 채석강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다. 이제 해가 막 지려고 준비하고 잇다.
'황혼에 그을린 수평선이 붉은 해를 집어 삼겼다.' 장관이다.
일출은 추암 촛대바위를 최고로 치고 일몰은 이곳 채석강을 최고로 아름답다고 육당 최남선은 말하지 않았던가?. 아내의 얼굴도 감동에 겨운 표정을 하고 있다.
솔직한 정수가" 햇님이 숨었네"
채석강은 수만권의 책을 쌓은 것 같은 수성암의 단층이 볼 만하다. 일몰시점이 아니더라도 적벽강의 해안선은 그 자체로 매우 아름답다. 아쉽다면 격포해수욕장 모래해변까지 튀어나온 횟집이 눈살을 찌프리게 하고, 그 소굴에서 흘러나오는 뽕짝조의 전자음 소리가 귀를 피곤하게 한다..
어둑어둑한 해변을 따라가 보니 저 멀리 전망대가 눈에 들어온다. 그 곳에서 바라본 바다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다. 아내는 감동에 겨워 한참을 떨어져서 바다를 응시한다.
'남편 잘 만나 이런 구경하는구나'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내가 물었다.
" 무슨 생각해.."
"옛 애인 생각"
그 앞에 인어상이 있는데 몸매가 영 아니올시다. 돌로 새겨서인지 얼굴은 크고, 좀 둔탁해 보였다.
솔직한 정수에게 "저 얼굴 누구야? 언니, 아줌마, 할머니"
분명 인어면 '언니'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 최소한 '아줌마'
정수 왈 "할머니"
다시 차를 타고 해안도로를 따라 달렸다. 내소사 가는 길이 보인다. 전나무 숲길과 꽃 창살로 유명한 부안 최고의 사찰이다.
시간이 허락치 않는다. 아니 채석강의 일출과 바꾸었다. 후회는 없다.
5 . 곰소항
얼마 후 곰소항에 들렀다. 호남최대의 젓갈집산지이다. 겉보기엔 조그만 마을이지만 시장에 들어가니 의외로 컸다. 석화 한 무더기에 5천원에 팔고, 싱싱한 횟감이 저렴한 가격에 팔린다. 새우와 젓갈이 매우 싸서 김장 담글려고 샀다. 나중에 김장에 쓸려고 꺼냈더니 품질이 좋다고 어머님이 말씀하신다. 호남의 맛은 이 곰소항 젓갈에서 나온다고 하니 금년 김치는 기대해 봄직하다..
그러나 이 곰소항은 일제때 김제평야의 막대한 쌀이 일본으로 실려나가는 공출항인 것이다. 조정래 소설 '아리랑'과 문순태의 '타오르는 강" 의 수탈 당한 민초들의 숨결이 느껴진다.
6. 전남화순
정읍 가는 길에 풍천이란 곳이 보이며, 장어집이 즐비하다. 아. 그 유명한 '풍천장어'구나....
고창 선운사 표말이 보인다. 때마침 가져간 송창식 CD에서 '선운사'의 노래가 울린다. 동백꽃이 뚝뚝 떨어지는 그 곳... 정말 가고 싶다.
정읍 IC에서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달려간다. 장성을 거쳐 광주를 지나치고 어느덧 남해고속도로에 접어든다. 옥과 IC를 빠져나와 화순온천으로 향했다. 온천은 화순읍의 동북쪽에 있으며 오히려 광주에서 더 가깝다. 옥과에서 화순온천으로 가는 길은 적막했다. 거의 차가 다니지 않았다. 이걸 잘못 길을 접어든 것이 아니가 생각된다. 암만 평일이라도 반대편 차선에 차가 지나쳐야 되는데 거의 없다. 고개를 넘는데 등골이 오싹하다. 전부 어디 간거야. 서울로 벼슬하러 갔나. 이 지역에서 아기를 낳으면 지원금 10만원을 준다는 정책을 이해 할 것 같다. 제발 정철이나 송순같은 풍류객이 탄생 하길 바란다. 국회의원 한영애 아줌마같은 '무댓뽀'가 태어나지 않길 바란다.
30분을 가보니 들녘에 우뚝 솟은 금호콘도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화순 금호콘도'. 거래 관계에 따라 우리 회사는 이곳 콘도를 많이 구입한 것으로 안다. 생각 외로 규모가 크다. 아마 광주근처에 이런 콘도 시설은 이곳이 유일한 것 같다.
원래 27평을 빌렸는데 프론트에서 "17평 어때요?" 한다. 숙박비도 절약할 겸 승낙하고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같이 탄 아가씨들.... 늘씬한 몸매에 긴 머리... '이런 시골에서 저런 미인을 만나다니...'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찰나 한 아가씨가
"왔-다. 겁-나게 추워부러-"
왠지 모른다. 아내와 나는 웃음을 참느라고..... 호남의 첫인상은 이렇게 시작했다.
아내와 정수가 뜨거운 물로 목욕하는 사이 컵라면 하나 끓여 먹었다. 아내는 밥을 많이 했는데 라면 먹었다고 얼마나 구박하던지... 아마 아침 일에 복수할려고 작정한 것 같다.
"밥 다 먹으면 되잖아..." 라면도 먹고 밥도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에필로그 ...덕분에 밤새도록 화장실 들락거렸음.
새벽 5시에 일어났다. 오늘 일정에 대해 연구하고 짐을 쌌다. 물론 나 혼자서... 아내와 정수는 새벽잠이 많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자라 절에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 혼자 새벽공기를 마시며 주차장에 갔다.
차유리에 서리와 얼음이 껴서 그걸 긁어내는데 한참 걸렸다. 동트는 화순의 농촌 풍경은 너무 나 평온했다. 옅은 안개가 농촌을 덮는 모습은 가히 환상적이다.
터널을 지나니 안개가 온 산을 덮어 표지판이 보이질 않는다. 오로지 앞차 꽁무니만 쫒아간다. 방향을 잃고 반대방향으로 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출근하는 사람에게 물었다.
"송광사가는 길이 어디예요?"
"돌아 들어 왔소-. 이곳은 화순탄광이여." 걸쭉한 사투리가 남도 육자배기처럼 들린다.
지금은 폐광이 되었지만 예전엔 호남의 연탄은 전부 이곳에서 생산되었다고 한다. 한참을 달리다보니 희미한 안개 사이에 독립문이 보인다. 내가 잘못 본 건가? 아니 서대문에 있어야 할 독립문이 이곳에... 바로 '서재필 기념관'이란 표지판이 보인다.. 너무 일러서 열지 않았고 멀리서 바라만 보았다. 다시 한참을 가보니 '고인돌공원'이 나왔다. 일정에도 없는 고인돌 공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2. 고인돌공원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고인돌이 많은 나라라고 한다. 특히 나주, 순천, 화순에 집중 되어 있으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불과 며칠 전에 지정되었다. 세계문화유산은 비원, 창덕궁, 경주, 팔만대장경등이 지정되었다. 이는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는다.
고인돌공원은 주암댐건설(1984-1991)로 인해 수몰지역에 있던 선사 유적을 한곳으로 옮겨 복원해 놓은 것이다. 수몰지역으로는 섬진강 지류인 보성강 유역 승주, 보성, 화순 3개군내 인접 9개면 49개리로 광활한 지역이다. 이 지역에 산재해 있는 많은 문화유적들을 계속 보전, 전승하기 위해 조사를 실시한 결과 구석기 유적 4개소, 집단 취락지 4개소(200기), 고인돌 23개소 348기, 백자 도요지 1개소, 선돌 4기 등을 발굴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고인돌군을 이전,복원 전시하고자 이곳 17,000여평의 부지 위에 공원을 조성하게 되었다. 이곳에는 고인돌군은 9개소 140여기와 선사시대 움집 6동, 남북 방식 모형이 전시된 야외전시장과 유물전시관, 묘제전시관으로 구성 되어 있다 등이 발굴되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고인돌군 9개소 140여기와 선사시대 움집 6동, 남/북방식 모형이 전시된 야외 전시장과 유물전시관, 묘제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사시대 문화유적인 고인돌군을 비롯하여 구석기 집터, 신석기 및 청동기 움집 6동과 선돌 등을 주암호수변 17,000평 부지에 야외 전시장, 유물전시관, 묘제전시관 등에 전시하여 전국최초로 조성된 고인돌 공원이며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 154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인돌은 선사시대부터 만들어진 묘의 일종으로 전국 각지에 산재하나, 전남지역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어 선사문화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역사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8시 30분에 이곳에 도착했다. 원래 9시에 개관이지만 나 때문에 박물관을 일찍 열고 VTR도 돌린다. 혼자서 한적하게 둘러보았다.
아이들이 고인돌을 옮기는 과정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장소도 눈길을 끈다.
등교하는 아이들이 있어 태워주겠다고 했더니 정색을 한다. 아마 부모에게서 교육을 철저히 받았나 보다.
3. 松廣寺
송광사는 신라말 혜린선사가 창건하고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중창한 이래 16국사와 수많은 고승이 배출된 유서깊은 승보 종찰이다. 지금도 국제선원과 승가대학이 열리고 수도 제일도량으로 선원의 기능이 큰 종찰이다.
이런 내력과 함께 불교의 삼보사찰(三寶寺刹)중 하나이다.
法寶사찰인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이 있고, 석가의 정골사리와 금란가사가 봉안되고 있는 佛寶사찰인 통도사, 그리고 16국사를 배출한 僧寶사찰이 바로 이 송광사이 인 것이다.
대한조계종이란 말이 바로 송광사를 두르고 있는 조계산을 의미하는 것임을 처음 알았다. 조계산과 절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 절은 물론 경관마저 빛나고 있다.
주차장 입구에 주차비가 1천원이라 적혀 있는데 1천 5백원이란다. " 1천원 아니예요?"
"봉고차는 1천5백원입니다." 카렌스를 봉고차로 보는 것은 처음이며, 더구나 혼자 왔는데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절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었고, 절에 관계된 차량은 자동문이 열어준다. 너무 세상과 친해 버린 것이 아닌지.. 혹시 이런 '부'때문에 조계사에서 스님간에 피 터지게 싸웠는지 모른다. 이런 것들이 서글프게 한다.
속세의 번뇌를 佛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어주는 청량각이 나를 맞이한다.
청량각을 지나 산길로 500미터 오르니 여느 사찰에도 볼 수 잇는 일주문이 앞에 닿는다. 다포로 형성된 일주문의 단청이 퇴색되어 더욱 그윽함을 느끼게 하며 일주문의 편액은 특이하게 쓰여져 있다. 중앙에 "大乘禪宗" 우측에 '曹溪宗' 좌측에 '松廣寺'라고 쓰여 있어 대승선을 찬양하는 조계종풍을 그 기치로 삼은 것이다.
사천왕상이 있는 천왕문이 보이고 종고, 법고, 목어가 있는 '종고루에서는 아침저녁 예불전을 울린다고 한다. 절간에 들어서니 대웅보전이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고 왼쪽에 승보전, 오른쪽엔 지장전이 차지하고 있다. 대웅보전은 다포식으로 우리나라 목조건물이 가질 수 있었던 온갖 장점을 결합하였고 파생될 수 있는 결함을 배제하여 만든 건물이다.
수선사는 조계총림의 방장인 보조국사의 거실이었으며, 지금은 둥근 거울만 하나 있고 절내의 명실상부한 수도처이다. 약 25명의 선객이 상주하고 있으며, 외인출입이 일체 금지된 곳이다.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절간을 한바퀴 돌고 약수한 잔 마시고 서산대사의 선시도 음미하고, 유명한 해우소(화장실)도 둘러 보았다. 통풍이 잘 되고 시원한 느낌이 든다.
'성보박물관'이라고 쓰인 곳이 있어 신발을 벗고 들어 가려는데 철로 된 문이 스스로 열린다. 아마도 자동센서가 부착 되었나보다. 하긴 소림사영화에도 문이 자동문이던데....
들어가 보았더니 진귀한 보물들이 가득 찼다. 국보인 고려 고종제서등 여러 보물이 있었는데 국보인 '목조삼존불감'이 보이지 않아 스님에게 물었더니 지금 다른 곳에서 전시되어 있어 죄송 하다는 말을 들었다.
스님은 속으로 '목조삼존불감을 찾으니 불교에 해박한 사람이구나' 했으리라.
그러나 다음 질문에 나의 무식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스님 16國師가 배출된 큰 사찰이라면 지금 계시는 국사는 몇 번째 입니까?"
스님이 답하시길 "국사는 고려시대만 있습니다."
조용히 박물관을 나왔다.
절간을 나와 돌아갈려는데 아쉬움이 남아 절 돌담을 따라 걸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본 절이 너무나 아름답다. 조금 벗어나니 소나무숲과 향나무 숲이 가득 펼쳐져 있다. 이제서야 절 이름이 '松廣寺라 불리운 이유를 알겠다. 광릉 수목원에서 본 이후 이렇게 울창한 숲은 본적이 없다.
산사의 기를 마시며 천천히 명상에 잠겨 나만의 시간을 갖는데 난데없이 핸드폰 벨이 울린다.
"자기야 나 정수하고 지금 일어났는데 빨리 와...심심해 죽겠어.."
이런 속세의 물결...억겁 속으로 사라져라..
콘도로 돌아가 마지막 있는 밥 다 먹고, 온천물로 한번 더 씻고 콘도를 나섰다.
4. 호남 사림의 풍류
산 좋고 물 맑은 계곡의 풍치는 자연스럽게 학문을 도야하고 풍류를 즐기게 한다. 이에 16세기 조선사회를 휩쓸었던 정치적 소용돌이가 합세했다. 사림파의 종장인 정암 조광조가 이곳 화순에 유배온 지 한 달만에 사약을 받게된 것이다. 그를 따르던 사람은 서둘러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거나 은둔의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어둡고 답답했던 인고의 세월속에서 사림파는 정자와 누정을 짓고 그곳에 모여 학문을 논하고 시작을 주고 받게 된 것이다.
주로 무등산 계곡을 중심으로 한 정자문화가 이곳에 펼쳐진다. 소쇄원, 식영정, 환벽당, 취가정, 풍압정, 독수정, 송강정, 면앙정등 무수히 많은 정자가 이곳에 펼쳐진다.
하서 김인후, 송강 정철, 면앙정 송순, 석천 임억령, 서하당 김성원, 고봉 기대승등 호남사림을 대표하는 거장들이다.
5. 소쇄원
호남사림의 혼을 빛내고 풍류를 일으킨 첫번째 정자가 바로 소쇄원이다. 쟁쟁했던 은둔지사가 제월당에서 교류했던 흔적이 여지껏 남아 있다. 소쇄원을 조영한 사람은 '양산보'란 사람이다.. 사화로 낙향한 그는 사랑채와 서재가 붙은 집을 '霽月堂,' 계곡 가까이 세운 누정을 '光風閣'이라 명명하고, 자손들에게 절대로 팔지 말 것과 돌 하나 계곡 한구석도 상함이 없게 할 것을 당부 했다고 한다.
소쇄원을 처음 찾으면 그 어귀에 있는 대나무 숲에 감동 받게 된다. 하늘을 찌르는 청죽의 물결이 한낮이라고 어둠 속의 신선함을 체험하게 된다. 예전 011 핸드폰 광고때 한석규하고 스님하고 거닐면서 "소중한 시간에는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멘트가 나온 곳이기도 하다.
소쇄원 원림의 핵심은 계곡과 여울물의 청량한 소리에 있다. 사철 변화무쌍한 계류의 소리는 정적인 공간을 더 없이 넓고 동적인 공간으로 승화시켜주며 이를 통해 자연의 이치를 터득하고자 했던 것이다. 산기슭의 경사를 계단상으로 처리하여 정자를 배치하였고, 외부와의 공간은 흙돌담으로 차단하여 아늑하고 온화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축대나 다리 그리고 담장, 정자등이 한 몸이 되어 유기적으로 상호역할을 한다.
'우리 정원문화의 최고봉'. '원림 건축의 백미' 라는 찬사는 당연한 것이리라. 난 광풍각에 걸터 앉아 풍광를 보며 물소리를 들었다. 이곳에 사는 5살박이 여자아이가 찾아와 정수와 뛰어 논다. 나무다리를 건너고, 대숲을 활보하고, 개울가에서 물장난 치며 논다. 천진난만한 모습이었다. 다 포기하고 낙향해.....
개집에 문패가 있어 읽어보니 '나진순'이라 쓰여 있어 신기해서 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현상해보니
나:나는
진:진도개
순:순종이다. 라는 설명이 희미하게 보였다.
6. 식영정(息影亭)
'그림자도 쉬어간다.' 멋진 이름의 이 정자는 서하당 '김성원'이 장인 임억령에게 쉬도록 지어 올린 집이다. 계단을 오르면 무등산 산자락과 넘실대는 광주호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옛 지명으로는 '별뫼(星山)'라 부르며, 송산 정철의 유명한 가사 '성산별곡'을 지은 곳 이기도하다. 이곳에 역시 당시 내노라하는 호남의 인재들이 모여 시와 사상을 논했다고한다.
원주인인 김성원, 임억령등 스승의 자취보다는 제자 송강의 터로 더 유명해졌다. 김성원의 가계가 몰락한 후 송강의 후손들이 정자를 사들여 관리한 탓에 정자 마당엔 '송강 문학비'가 들어 섰고, 입구에 '송강가사의 터' 라는 기념탑이 서있다.
옆에는 커다란 건물 '가사기념관'이 자리잡고 있으나 규모에 놀라서인지 들어가기가 싫다.
정자의 현판의 글씨가 너무나 멋이 있다. 이 곳에서 바라본 풍광과 더불어 운치를 느끼게한다. 툇마루에 앉아 묵객인양 시를 외어 보았다. 아내의 '뽕'가는 얼굴. 원래 이 곳엔 멋진 소나무가 있었는데 천둥 맞고 죽었다고 한다.
7. 환벽당
창계천 여울을 건너면 바로 '환벽당'이 나온다. 이곳엔 유난히 '결혼야외촬영'하는 사람들이 많다.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은 선남선녀들이 환벽당 언덕으로 오르는데 눈부신 하얀드레스가 확 눈에 들어온다. 고풍스런 정자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이곳에서 바라본 풍경은 일품이기에 신혼부부들이 많이 찾아든다.
나의 야외 촬영때는 후배가 사진에 취미가 있어 우릴 모델로 세우고 3일을 찍은 기억이 난다.(모델도 아닌데...) 거기서 자신감을 갖고 직업으로 나선 것이다. 역시 창경궁 같은 고궁에서는 때깔 고운 한복이 훨씬 잘 어울린다.
정수가 웨딩드레스 사달라고 얼마나 조르던지... 그 조그만 눈에도 드레스가 예쁜 옷으로 보였나보다. 너무 어려서 웨딩드레스는 안된다고 했더니...막무가내다... 서울서 당장 식 준비 해야겠다.
환벽당은 임진왜란때 이곳 출신 의병장이었던 김덕령장군의 넋을 기려 만든 정자이다. 확 트인 들녘을 바라 볼 수 있는 좋은 자리다.
그 밖에 취가정, 독수정, 물염정등이 이 근교에 산재되어 있지만 정자가 워낙 많아 아내가 지겨움을 느낄까봐 그리고 시간이 허락치 않아 '운주사'로 향했다.
8. 광주시
광주호를 가로질러 무등산 자락을 넘는다. 산세가 우람하다. 서석대등 멋진 풍광이 자리잡고 있다는데... 높은 고개를 넘으니 광주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생각보다 훨씬 커 보인다. 이곳에서 화순 쪽으로 빠져나가야 하는데 토요일 오후여서 교통체증이 심하다. 더우기 지하철공사까지 한다. 길게 늘어선 차량행렬에 난데없이 잡상인이 파인애플을 판다.
"드셔보이소. 한 입 먹으면 안 사고는 못 배길 깁니더..." 먹었더니 너무나 달다.
하나 사면서 물었다. "먹은 것하고 산 것 틀린 것 아니예요?"
그 사람 왈 "지는예- 거제도에서 농장하는데요. 겡상도 사람이 전라도에서 사기치모 칼맞아 죽심더-"
화순행 이정표보다 더 반가운 것은 가스충전소다. 차에 가득 가스충전하고 넓게 뚫린 4차선 도로를 달린다.
9. 운주사가는 길
운주사 가는 길은 매우 험했다. 굽이굽이 첩첩산중을 넘어 간다. 전라도에 이런 산골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깊이 숨어 있다. 이번 여정에서 내가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이 바로 운주사다.
이 절은 화려한 단청이나 육중한 현판도 없다. 가슴 철렁이는 사천왕의 험상궃음도 없다. 그러나 어느 절에도 찾아 볼 수 없는 독창적인 가람배치가 신비로움을 더해 준다. 누구든지 자신의 길로 찾아 드나들 수 있는 넉넉함이 가득한 절이다.
몇 년 전 만해도 탑과 불상 골짜기에 논밭으로 경작되어 있어 봄이면 쟁기소리며, 가을이면 누런 벼이삭이 물결치는 경이로운 세상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역시 골짜기 길을 따라가면 탄성을 지르게 된다.
골짜기와 산등성이에 우뚝우뚝 탑이 솟아 있고 불상들은 바위절벽 아래에 가족처럼 무리 지어 있으니 , 마치 신세계를 노래하는 심포니와 같은 느낌을 받는다. 불상은 못나고 투박하지만 우리네 할머니 할아버지 부모형제의 정겨운 얼굴을 지니고 있다. 가장 민중적인 불상의 모습이랄까?
운주사는 10여년전까지는 거의 알려진 절이 아니다. 단지 황석영의 '장길산'에 소개되고 부터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문학의 힘이 크다.
이곳 천불산 골짜기에 천불 천탑을 세우고 마지막으로 와불을 일으켜 세우면 민중해방의 용화세계가 열린다는 운주사 설화를 삽입하여 대미를 장식하였다. 운주사의 창건에 대한 여러 설이 있다.
10. 운주사의 창건신화
첫째가 이곳 운주사 땅이 여자의 음부형국으로 장차 임금이 나올 군왕지여서 그 혈을 끊어 놓기 위해 명당을 누르는 탑을 세우고 도술을 부려 근처 30리 안밖의 돌을 불러모아 하루밤사이에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둘째가 우리나라 지형이 배 모양인데 동서가 편편하지 못하고 또 태백산맥이 있어 동쪽으로 기울어져 국토의 정기가 일본으로 새어 나가기 때문에, 나라가 망할 위험이 있어 국운이 빠져나감을 막기 위해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세째가 도선이 천불천탑을 하루밤 사이에 세울 때 맨 마지막으로 와불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는데 공사에 싫증이 난 동자승이 거짓으로 닭이 울었다고 하여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11. 북두칠성과 일곱 개의 바윗돌
운주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칠성신앙의 뿌리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토착화된 민중 신앙이며 인간의 기본적 욕망인 수명연장, 구복, 득남을 비는 신앙인 것이다.
와불이 누워있는 산마루에서 절 입구쪽으로 향하여 산길을 내려가면 듬성듬성한 소나무 숲에 일곱개의 바윗돌이 놓여 있는데 이를 '칠성바위'라한다. 칠성이란 북극성을 축으로 하여 그 주위를 하루에 한번씩 회전하는 북두칠성 별자리를 말하는데 우리 선조들은 자연 숭배사상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으며 운주사 칠성바위는 하늘의 별자리가 산허리에 반사되어 있는 형상으로 수놓아져있으며 별자리의 밝기에 따라 바윗돌의 크기까지 다르게 한 상상력에 탄성을 지르게 한다.
12. 가장 민중적인 탑과 불상들
운주사가 보여주는 아름다움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것은 집단적 미의식이다. 개체가 보여주는 뛰어난 아름다움보다는 똑같은 형상들이 동어 반복적으로 펼치는 세계는 강렬하고 역동적인 에너지를 느끼게 한다.
또한 파격적인 아름다움의 절정을 보여준다. 탑들은 그 형상이 특이하다. 자연석을 그대로 쌓아올린 모습, 호떡을 얹어놓은 모양, 용머리와 감실에 모셔진 부처님 탑, 7층.9층 형식에 억메이지 않는 파격적인 모습이 괴이하거나 부담감을 주지 않고 친근한 조형미를 전해준다. 불상의 모습도 자유롭고, 기발하게 처리되어 귀족의 채취를 느끼지 못하고 민중의 냄새를 맡게 한다.
공사바위에 오르면 운주사 골짜기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공사감독을 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실제 바위엔 홈이 움푹 파여 엉덩이를 집어 넣고 신비로운 경치를 볼 수 있다.
반대편 산길을 오르면 그 유명한 와불을 보게 된다. 밤하늘 북두칠성를 바라보며 돌부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13.부처할머니
절에 들어 갈 때 입구에서 행상할머니가 홍시감을 팔았다.. 너무나 싸다. 큼직한 것이 4개 2천원인데, 한 개는 먹고 나머지는 나올 때 주세요. 하고 일주문을 지나 신비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운주사에 워낙 진한 감동을 받았기에 시간을 지체하고 늦게 나왔더니 다른 행상할머니는 다 집에 가고 그 할머니만 혼자 지키고 있었다.
그 할머니가 "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감을 전해 주어야 했기에 집에도 못 가고..."
그러면서 정수에게 덤으로 하나 더 주고 광주리를 이고 집으로 간다.
조금 전에 산에서 보았던 미륵불이다.
그런데 짐 정리 하다가 그만 홍시감을 운전석에 깔고 앉았다. 그게 어떤 감인데...
14. 나주
운주사를 벗어나 나주로 향했다. 도중에 길을 잘못 들어 마을 촌로에게 물었다.
"나주가는 길이 어딥니까?"
"저-쪼그로 빤드시 가시쇼-"
여행을 하면서 터득한 일인데 모르는 지역에서 밥을 먹을 땐 절대 터미널이나 역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시청이나 군청근처에서 식당을 찾으면 푸짐한 음식을 기대할 수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식당주인이 감히 공무원을 사기 칠라고?'
나주시청 근처에 가서 삽겹살과 산채꽁보리 비빕밥을 시켜 먹었다. 두툼한 생삼겹에 보리밥을 접하니 천하일미다. 상추대신에 배추를 주는 것이 특이하며 젓갈은 꼭 나온다.
나주에서 영암을 거쳤다. 저 멀리 월출산의 표지판이 보인다. 도갑사나 무위사가 있는 신비의 명산 너무 어두워서 볼 수 없어 너무나 아쉬었다. 내일 봐야지...
15. 해남
나주에서 강진까지는 4차선 도로다. 고속도로처럼 확 트여 있어 100키로 이상 달렸다. 정말 길이 잘 닦여 있었다. 해남에 도착하여 슈퍼에 들러 맥주 1병사고, 정수 간식 장만하고, 땅끝으로 향했다. 대만민국 최남단. 땅끝마을... 해남에서도 한 시간이나 걸린다. 분명 해안 도로일텐데.... 너무나 깜깜해서.,,
드디어 토말 땅끝마을에 도착.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16. 땅끝마을
인터넷에서 보았던 '피카소'란 민박집이 맘에 들어 하루밤 묵기로 했다. 하루에 3만원. 화장실과 샤워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TV도 있다. 바다라서 바람이 세차다. 하늘엔 별이 가득하다.
가게방에 가서 내일 '보길도'가는 첫 배 시간을 알아두었다. '아침 7시10분.'
대한민국 최남단 돌담집
이 추억 오래 간직하자..
오늘도 힘든 일정이었다. 눕자마자 뻗었다.
변함없이 새벽에 일어나 지도 펼쳐보고 하루 일정을 짠다. 강제로 아내와 정수를 깨우고 씻긴다. 7시10분 첫 배를 타야 일정에 차질이 없기 때문이다.
부리나케 갈두리 선착장에 달려갔다. 7시5분. 그런데 웬일이니....
배가 이미 떠났다
'7시 배란다.' 쓰-발 가게방 아저씨의 잘못된 정보가 하루 일정을 망쳐 놓는구나.. 얼마나 원망스러운지... 다음 배는 8시 20분배다.
선착장 근처에서 일출을 보고, 가져간 칼국수를 끓였다. 호-호 식히면서 먹는 칼국수는 일품이다. 바닷가라서 인지 멸치국물 맛이 더욱 진하게 느껴진다.
뱃속에 따끈한 국물이 들어갔으니 추위가 가신다.
보길도까지는 50분거리며 차를 배에 실었다. 두사람분 차량운임 포함하여 왕복 5만원에 이른다. 처음엔 너무나 부담이 되어 가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는데 보길도에 도착하여 본 환상의 세계는 10만원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정도의 비경이다.
배엔 50여명이 탑승했고, 차량은 15대 정도가 배에 실렸다. 놀러가는 자동차는 5대정도고, 나머지 화물차는 근처 양식장에서 김을 실러 가는 자동차다.
2. 선 상
아침 햇살에 반사된 다도해의 모습은 감히 글로 표현할 수 없다. 섬들이 솟아 올라 있고, 청정해역엔 양식어장이 성행한다.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김양식에 쓰이는 하얀 것들로 가득찼다. 논사이를 가르는 신작로처럼 배도 역시 흰 양식장 사이를 가로 지른다. 약간 쌀쌀하지만 선창 내에 있을 수 없다. 화려한 바깥풍경이 나를 이끌기 때문이다. 상쾌한 아침바람을 맞으며 다도해의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한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이런 좋은 풍경을 무시한 채 많은사람들이 선내에서 고스톱 치는 것이다. 현지 사람들은 매일 접하기 때문에 바다가 아름다운지 모르는 것일까?
서울서 온 아주머니를 만났는데 관광차를 타고 밤 10시에 출발하여 이 곳에 새벽 4시에 도착했다고 한다. 경비는 4만원이란다. 이런 방법으로 와도 좋으리라 생각된다.
배는 조그만 섬 '넙도'에 들렀다. 이곳에서 트럭이 많이 내린다. '노화초등교 넙도분교'란 표지판이 보인다. 전교생이 10여명 되나...
넙도 옆엔 그림에나 나옴직한 '송도'란 섬이 있다. 소나무에 걸린 태양의 모습은 그림 그 자체다. 저 멀리 '노화도'가 보인다. 보길도만큼 넓다. 섬 전체가 평지이기에 사는 사람은 보길도보다 많다. 멀리 '완도대우병원'이 보인다. 무슨 기업광고에 나온 것 같다.
노화도에서 보길도는 5분도 채 안 걸린다. 마포에서 여의도 건너는 거리쯤 되나. 그 옆엔 소안도가 보이는데 이 3섬을 서로 다리로 연결하고 개발하여 제주도만큼 유명한 관광지를 만든다고 하는데.....
제발 let it be...
3. 보길도 청별선착장
땅끝을 출발한지 1시간만에 그 이름도 예쁘장한 '청별선착장' 에 도착했다. 주차장에는 가득 멸치를 말리고 있는데 너무나 신기하여 냄새도 맡아보고 먹어도 보고 사진도 찍었다. 그러나 보길도 도로가에는 거의 이런 멸치를 볼 수 있다.. 파란 바다와 어우러진 은색 멸치는 더욱 그 빛을 내품는다..
4. 통리 해수욕장
선착장에서 나와 제일 먼저 우릴 반긴 곳이 통리해수욕장이다. 평균수심이 1.5M 밖에 되지 않아 청소년수련장으로 유명하며, 모래가 곱고 주변에 바다 낚시터가 많다. 맑은 날씨에는 제주도 한라산이 어슴프레 보인다고 한다. 내 눈엔 않보임. 근처에 경운기가 있어 정수를 태웠다.
5. 중리 해수욕장
통리를 지나 언덕을 넘으면 중리해수욕장이 나온다. 활처럼 휘어진 이 곳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곳이다. 괌, 사이판, 호주 등을 가보았지만 그 보다 절대 뒤지지 않는다. 한국에도 이런 아름다운 풍광이 있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솔숲과 어우러진 천연백사장이 드넓게 펼쳐진다. 물가에 200-300미터까지 가도 사람 키를 넘지 않는 다고한다. 앞에 둥둥 떠 있는 섬들은 한폭의 그림이다. 작은 배들이 무리를 이루며 떠 있다. 나라도 이 장면을 보면 자연스럽게 시와 노래가 나오리라. 윤선도의 어부사시가가 나올만하다.
앞강에 안개 걷고 뒷산에 해 비친다.
배 띄어라, 배 띄어.
썰물은 물러가고 밀물이 밀려온다.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강촌의 온갖 꽃의 먼 빛이 더욱 좋다.
(윤선도의 어부사시가 봄편)
아내와 정수는 밀가루처럼 고운 백사장에서 뛰어 논다. '서울가지 말자. 이곳에서 죽자.'
저 멀리 소나무숲 사이로 초등학교 건물이 보인다. 우리나라 최고 좋은 초등학교라고 생각된다.
섬의 제일 동쪽엔 송시열선생의 '글썬바위'가 잇다. 숙종때 왕세자의 상소를 올린 것이 화근이 되어 제주도로 귀향가던중 풍랑을 만나 잠낀 이 섬에 피신하여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 시를 바위에 새겨 놓았다고 한다. 이 바위를 볼려고 근처까지 갔는데 이후 1.5킬로는 비포장 산길이다. 차에 가스도 여유치 않고 도저히 산길을 오를 엄두가 나지 않아 포기하고 보길도 최고라는 예송해수욕장으로 향했다.
6. 예송리 해수욕장
통리에서 예송리로 넘어가는 고개는 조심해야 할 것이다. 멋진 경관에 한 눈 팔다간 용궁으로...
잠시 후 고개를 넘게 되는데 커다란 돌 위에 예송리라고 쓰여 있는 그 곳에서 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풍경을 접하게 된다. 활시위처럼 휘여진 해변에 점점이 떠있는 배, 그리고 섬들 그 아늑하고 정적이 흐르는 고요한 바다 그곳이 바로 예송리 몽돌해수욕장이다.
예송리 바닷가는 백사장이 자갈(몽돌)로 되어 있다. 모래사장도 좋지만 파도가 밀려왔다 나가면서 자갈 틈으로 물이 빠질 때 나는 소리는 말 그대로 일품이다.
까만 돌멩이가 너무나 예뻐 자갈이 많이 없어 진다고한다. 안내문엔 '조카가 가져간 돌멩이를 삼촌이 죄송하다는 편지와 함께 자갈을 소포로 보내 왔다." 라는 편지의 내용을 게시했다.
"자갈 반출금지" 라고 쓴 것보다 얼마나 설득력 있고 정감이 있는가?.
중리와 마찬가지로 해변엔 초등학교가 았어 들어가 보았더니 이승복 어린이와 안셀센 동화책을 읽는 동상이 서 있다. 옛 생각 나네.. 정수를 이 곳 학교에 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혹시 여름 휴가를 받으면 난 보길도로 온다, 예송과 중리해수욕장에서 며칠 푹 쉬고 돌아가리라. 경치 좋은 민박집도 찜했다.
다시 고개를 넘는데 꼬마가 혼자 터벅터벅 걷기에 태워줄려고 했더니 극구 거절한다. 친구네 집에 놀러간단다. 30분은 걸릴텐데....
고개 정상 전망대에서 다시금 예송리 바닷가를 본다. 오래 간직하자... 아내는 이곳에서 '머루' 같은 산열매를 발견하고 주섬주섬 그것들을 땄다. 달콤했다.
정수에게 염소를 만지게 할려고 길가에 차를 세웠다. 하얀 염소가 우릴 보고 놀래서 도망친다. 간신히 잡았는데 또 놓쳤다. 정수가 너무나 좋아한다.
7. 윤선도의 생애
고산은 원래 서울에서 출생했지만 여덟살때 아들이 없는 큰아버지에게 양자들어 해남으로 내려와 녹우당에서 살았다. 이 때 큰아버지의 막대한 재산을 물려 받는다. 고산은 18세에 진사, 20세에 승보시. 향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으로 입관하였다. 면학 중에 이이첨등을 공박하는 상소를 올려 함경도에 유배되었다. 1년이 지나자 다시 경상도로 유배된 후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풀려나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나 곧 사직하고 해남 집으로 낙향한다.
인조 6년에 다시 과거를 봐 별시 문과 초시에 장원을 뽑혔고, 봉림,인평대군의 사부가 되었다. 그후 고속 승진하다가 좌천, 파직되어 해남에 은둔하는 중에 병자호란이 나고, 임금이 수치를 당하자 부끄럽게 여겨 제주도로 가서 세상을 등지고 살 생각을 하고 제주도로 가는 중에 보길도에 들렀는데 그곳의 아름다운 형국에 매료되어 제주행을 포기하고 보길도에 주저 앉는다.
8. 부용동 원림
원림은 거주환경 속에서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이상세계를 현실화하여 그 곳을 인격도야의 수련장으로 삼으려는 기능을 갖고 있다 .중국의 신선사상을 배경으로 한 정원이나 원림문화가 계속 발전하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한국적인 양식으로 정착하였는데 그 절정기가 16세기다.
경복궁과 창덕궁의 궁궐정원은 말 할 것도 없고, 향리에 근거를 둔 사람파들이 중심이 되어 전국 각처에 수많은 원림이 조성되었는데 남원의 광한루와 무등산의 소쇄원 그리고 이 곳 보길도 '부용동'이 대표적인 예다.
파란 많은 정치사의 굴곡 속에서 유배와 은둔을 번갈아 가며 살았던 고산이 자신의 이상향으로 꾸민 별세계다. 이 골짜기에는 무려 25개의 정자를 짓 고 연못을 가꾸며 누구고 부럽지 않은 풍류객의 삷을 누렸다. 그에게 있어 이곳은 도피처이자 지상의 낙원이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사림의 모습과 대토지를 소유한 부호의 호화스런 풍류를 즐기던 전형적인 지배계급의 모습도 함께 가지고 있다.
9. 세연정
우리나라 조경 유적중 가장 특이한 곳으로 자연스러움에 인공을 가미한 정원이다. 일본의 정원 문화가 너무 인공적이서 부담을 느끼지만 이곳은 그 반대다. 자연과의 혼연한 조화속에서 이상 세계를 추구하려 했던 것이다. 절제와 규제 속에 자연을 개조하고 그 속에서 조화로운 인공을 가한 과학정신은 오늘날 건축문화에 가르치는 바가 많다.
개울의 보(판석보)를 막아 논에 물을 대는 원리며, 크고 작은 바윗돌을 음양의 조화에 의해 계획적으로 배치하여 공간을 연출한 점이나. 회수담으로 들어오는 물길의 파동을 잠재우기 위해 거북바위를 배치한 점등 기발한 착상과 선인들의 슬기에 그저 놀랄 뿐이다.
특히 세연지에 물을 가둔 돌로 된 보는 양편에 판석을 세우고 그 안을 회로 채운뒤 뚜껑돌을 덮었다. 마치 목가구를 만들듯 홈을 파고 돌못을 쳐 마무리한 착상이 재미있다.
12월 초순인데 벌써 동백꽃이 빨간 자태를 드러낸다. 동백숲을 따라 세연정 둘레를 산책하는 것도 좋다. 동백숲을 거니는 아내가 신이 나서 뛴다. 호젓하게 거닐면서 양반 흉내 한번 내본다.
세연정을 벗어나니 '윤선도 체험공원'이 있다. '어부사시가' 시가로 조성된 공원이다. 잠깐 들렀다가 부용동 깊숙한 곳으로 들어간다.
10. 낙서재
고산 윤선도다 살았던 집터이다. 초가로 집을 지었다가 나라에서 송금령으로 소나무를 못 베게 하자 잡목을 베어 세간집을 지었다. 지금은 그 집터만 남았는데 상당히 규모가 크다. 동백과 갈대만이 쓸쓸히 집터를 지키고 잇다.
풍수지라상 보길도에서 가장 손꼽히는 양택지다. 좌청룡 우백호가 호위하는 연꽃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여기에 낙서재와 무민당 ,곡수당이 자리잡고 있다. 격자봉을 주산으로하고 우백호인 공대봉능선, 좌청룡인 망월봉의 모습이 보인다. 계곡을 따라 내수가 흐른다. 마치 연꽃 형상이다. 연꽃처럼 중앙에 子房이 있어야 제격인데 풍수지리의 대가인 고산선생이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인력으로 산을 모았다. 造山을 만들어 완벽한 양택의 모습을 갖춘 것이다.
11. 동천석실(洞天石室)
하늘로 통한다는 방. 고산이 부용동 제일의 절승이라 칭송했던 곳이다. 낙서재 건너편 안산의 산허리에 경관 좋은 암반에 집을 짓고 설실 이라 명한 것 이다. 이곳에 갈려면 산길로 20분은 올라야한다. 겨울답지 않게 초목이 푸르다. 남도의 각가지의 수목들이 세월을 망각한 채 짙은 생명력을 내 품는다.
이 산길을 정수 혼자 올라간다. 힘이 겨워서 업어달라고 보챈다.
아내보고 " 시간이 없으니 업고 가자" 했더니
아내 왈 " 다음 일정을 포기하더라도 정수를 걷게 해야 돼. 인내심을 가르치고 싶어"
내가 외쳤다. "니교내참"
니교내참이란 '니가 말한 것은 교육이고, 내가 말한 것은 참견이다' 란 뜻으로 아내와 나만 통하는 말이다.
정수와 아내를 팽개치고 먼저 오른다.
신선이 사는 세계.. 고산이 이곳에서 신선임을 자처하며 선경을 누리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사방이 확 트인다. 이곳에서 낙서재의 풍수의 모습한눈에 볼수있다..
다암에 걸터앉아
하늘을 본다,
산을 본다.
꽃을 본다.
부용동을
10분후 정수가 올라왔다. 땀을 뻘뻘 흘리지만 확 트인 선경을 본 정수의 환한 얼굴은 '아기선녀' 그 자체다. 남도의 숲 내음을 맡아보고 이름 모를 수목을 잡으며 선경에서 벗어났다.
12. 환상적인 해안도로
뾰족산까지 15킬로의 해안도로는 환상적인 드리아브 코스다. 육지에서 본 바다색깔과는 확연히 다르다. 새파란 바다다. 이곳에서 김이며. 미역이며. 톳등이 자란다. 너무나 경치가 아름다와 몇 번을 차에서 내렸는지 모른다. 둥둥 떠있는 섬들 .김 따러 가는 작은배와 어우러져 최고의 그림을 만든다. 바람에 이는 갈대의 모습도 잊을 수는 없으리라
도로가 끝나는 곳에 세모난 산이 우뚝 솟아 올랐다. 돌산이지만 소나무가 비집고 살아가고 있다. 날씨가 맑으면 추자도와 제주도가 보인다는데... 이곳에서 본 일몰은 장관이란다.
13. 떠나가는 배
선착장에서 미역과 톳을 구입하고 2시20분 배에 몸을 실었다. 예정보다 2시간을 더 섬에서 보낸 것이다.
바다에서 본 섬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다. 장사도와 모래섬, 미역섬, 저멀리 뾰족산도 보인다.
아침에 보았던 바다의 모습과 달랐다. 바람이 세차기 때문에 차에 있었다. 정수는 이미 골아 떨어졌다. CD에서 정태춘 노래가 흘러나온다.
저기 떠나가는 배 거친 바다 외로이
겨울비에 젖은 돛에 가득 찬바람을 안고서
언제 다시 오마는 허튼 맹세도 없이
봄날 꿈같이 따사로운 저 평화의 땅을 찾아
가는 배여 가는 배여 그곳이 어느메뇨
강남길로 해남길로 바람에 돛을 맡겨
물결 너머로 어둠 속으로 저기 멀리 떠나가는 배
너를 두고 간다는 아픈 다짐도 없이
남기고 가져갈 것 없는 저 무욕의 땅을 찾아
가는 배여 가는 배여 언제 우리 다시 만날까
꾸밈 없이 꾸밈 없이 홀로 떠나가는 배
바람소리 파도소리 어둠에 젖어서 밀려올 뿐
해남으로 향하고 있다. 해남길로 말이다. 혹시 정태춘이 땅끝을 보고 노래를 만든 것이 아닌지.... 무슨 큰 발견을 한 사람처럼 아내를 깨웠다.
"그냥 자-. 별것도 아닌데"
넙도에서 할머니를 업은 젊은이가 배에서 내려 뛰어가는 것이 보인다. 인근 노화도 대우병원에서 치료 받고 가는 모양이다. 이 아름다운 모습이 오랫동안 각인된다.
14. 땅끝 전망대
땅끝. 삼천리 강산을 달려온 민족의 대동맥이 비로소 가쁜 숨을 다하고 우뚝 멈춰서 바다에 가슴을 던져 버린곳. 우리 국토 정신의 끝이다.
땅끝에 도착하여 전망대에 올랐다. 아까 CD헤서 흘러나왔던 '떠나가는 배' 그 가사 그 자체다. 금빛을 띠고 있는 바다. 어디가 섬인지 배인지 모르 겠다.
어느새 핏빛 낙조가 된다. 그 피빛으로 일렁이는 망망대해의 섬들은 땅끝의 역사를 다시 노래하게 한다. 들뜨고 소란스런 감회에서 벗어나 선조의 싸움터였음을 알게된다. 청해진의 장보고, 삼별초의 넋, 그리고 충무공와 호남의병들이 왜적을 수장시켰던 그날의 함성을 기억하게 한다.
더는 갈수도 없는 땅끝에 서서
더는 물러설 수도 없는 땅끝에 서서
국토의 마지막 남아 있는
순결한 육체를 노래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땅끝을 찾는가 보다.
밑에 내려가면 토말비가 있다는데 시간이 없어 통과. 조그만 '송호해수욕장'에서 사진 한 방 박고 출발,
15. 중리 허준 촬영지
난 집에서 거의 TV를 보지 않는다. 그러나 '허준'만은 예외다. 처음부터 끝까지 보았으며 피치 못해 보지 못했을 경우에는 VTR로 녹화도 했던 기억이 난다.
난 소설 '동의보감' 을 학창시절에 정말 감명 깊게 읽었다. 그러나 소설가 이은성님이 집필도중 죽는 바람에 임진왜란 이후 줄거리는 요약으로만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부족한 부분을 '허준'이란 드라마를 통해 다시금 허전한 부분을 메꾸게 되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허준이 귀양가서 환자를 보지 말아야 하는데 의사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환자를 돌보는 장면이 떠오른다. 그리고 마지막 바다를 보고 쓰러지는 허준의 마지막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바로 여기다. 생각난다. 세트인 초가집이 5-6채 정도 있다. 초가보다도 더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은 바로 바다의 모습이다. . 외딴섬 2개도 기억이 난다.
다시 해남을 향해 달린다. 달마산의 절경이 보인다. 이곳엔 명찰 미황사가 자리잡고 있는데. 역시 통과..
16. 녹우당과 유물전시관
해남 가기 전 '윤선도 고택' 이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여기서 들어가면 연동마을이 나오고 그 위에 해남윤씨 종가집이 자리잡고 있다. 주차장에 차를 댄 시간은 5시 3분. 매표소에 가보니 5시까지 문을 연다도 한다.
"서울에서 왔읍니다. 이번에 보지 못하면 영영 고산선생님을 뵐 수가 없습니다."
그 분이 전화를 한다. 그리고 빨리 보고 나오라고 한다.
박물관 셔터를 다시 올리고 불을 환하게 밝힌다. 국보 240호인 공재 윤두서 자화상, 일본으로 반출되어 다시 찾았던 미인도 , 그리고 동국여지도가 보인다. '산중신곡' 첩중에 '오우가'도 보인다.
내 벗이 몇 인고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그이 더욱 반갑고야...
거의 뛰다시피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왔다. 나옴과 동시에 불이 꺼지고 셔터가 내려진다. 고마운 사람들...
건너편 녹우당에 갔다. 이는 고산이 30년 유배 끝에 환갑이 넘어 다시 관직에 들어갔을 때 효종이 사부인 고산에게 수원에 사랑채를 지어 하사해 준 집을 훗날 여기로 옳긴 것이다 이곳엔 현판이 멋있다. 사랑채의 문을 여니 사람이 산다. TV도 있다. 윤씨 종가집이 아직까지 살고 있는 곳이다.
마당에는 아이들이 장대를 가지고 감을 떨어뜨린다 신년연하장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랄까
녹우당 뒷편엔 비자나무숲이 있으며 천연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17. 천일식당
전국에 내노라 하는 미식가들이 최고로 친다는 '천일식당'을 찾았다. 물어물어 XX시장 개천가 근처에 있는 허름한 집이다. 아내는 지저분하다고 들어가기를 주저하는데 미식가인 내가 어찌 그냥 지나치겠는가?
들어가보니 옛날 여인숙 건물처럼 툇마루와 수십 개의 방이 놓여 잇다. 조그만 골방에 들어갔더니 상은 없고, 구석에 통성냥과 조그만 주전자가 놓여있다 '요새도 이런 성냥이 있나?" 방바닥이 따뜻하여 찜질하고 잇는데. 두 사람이 큰 상을 들고 들어 온다.
대략 30여가지의 반찬이 나오는데 떡갈비며, 해산물, 이름모를 젓갈 등이 내 입맛을 돋군다. 반찬 한가지만 돌았느데 밥 한공기 뚝딱.. 아줌마 밥 한 공기 추가요. 반찬이 입에 딱 붙는다.
전라도 음식의 진수를 맛 보았다. 1인분에 불고기 정식은 1만원, 떡갈비는 1만5천원
18. 서울행
일요일 오후 6시 20분 차에 시동을 거는데 까마득하다. 땅끝에서 서울까지 갈려니 엄두가 나지않는다. 더구나 배도 부르고...졸립고..피곤이 몰아친다.너무 어두워 월출산의 신비로운 자태도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구나...
영암을 거쳐 나주, 광주를 거쳐 고속도로를 탔다. 다행스러운 것은 올라 가면서 교통체증이 풀린다는 것이다. 늦게 출발하길 잘했다.
호남고속도로엔 가스층전소가 정읍휴게소가 유일하다. 그것도 충천기 하나 가지고 수 십대를 충전하니 얼마나 한심스러운지... 지난 추석 때 난리가 났다는데 그 이유를 알겠다. 다행스럽게도 요새 여산휴게소에도 충전소가 생겼다고 한다.. '계룡 휴게소'에서 20분정도 눈 붙이고 다시 달렸다. 호남에서 경부, 그리고 중부를 거쳐 중부3터널에 오니까 조금 정체가 있다.
밤 12시 40분 집에 도착했다. 2박 3일 여정이지만 5일은 다녀 온 것 같다.
집에 들어온 후 꼭 하는말 ."그래도 내 집이 제일 좋아.'
이렇게 얘기하면서도 토요일이 되면 나가고 싶어 안달이다. 나의 방랑벽을 누가 막으리..
라. 결론
남도답사여행은 내 꿈이다. 비록 피상적으로 둘러 보았지만 만족한다.. 솔직히 남도인들은 혜택받는 사람들이다. 어디를 가도 그렇게 멋있는 산천과 바다를 가지고 있는 곳이 드물기 때문이다.
아빠로서 남편으로써 좋은 선물을 한 것이라고 자부한다.
다음 여행지로 소백산 자락에 있는 부석사와 봉정사 그리고 안동 하회마을을 돌아 볼 예정이다.
* 여행 중 가지고 다닌 참고서적
나의 문화유산답사기1편,3편(유홍준)
문화유산을 찾아서(이형권)
우리문화우리역사답사기(신영훈)
베스트 드라이브 코스 101선(김순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