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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고맙습니다 해야지.
누군가 나를 보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머니가 다시 말
했다.
―어서, 아버지 해봐….
나는 할 수 없었다. 왜 저 사람이 아버지인가, 봉순이 언니처럼 우리집
에 살았던 것도 아니고, 어머니처럼 밥을 해주는 사람도 아닌데…. 난데
없이 나타나서 아버지라면 그러면 아버지인가 말이다. 그래도 어른들이
어서 인사를 하라고 윽박지르자 나는 마치 누군가가 나를 납치라도 해 가
려는 위기를 느낀 것처럼 악착같이 봉순이 언니의 목덜미에 매달리며 울
었다.
―우리 아버지 데려와! 짱아 아버지 말이야…. 언니하고 오빠 아버지
말구!….
어른들이 폭소를 터뜨렸고, 나는 끝내 아버지에게 한번의 손길도 허락
하지 않았다. 나는 그날 저녁, 왠지 모를 배신감에 사로잡혀서 봉순이 언
니의 등 이외에는 어떤 자리도 거부했다. 어머니가 안계시는 날이면 언니
와 오빠는 봉순이 언니와 나를 두고 심술을 부리곤 했었다. 오빠는 내가
자기의 공책에 낙서를 해놓았다고―나는 분명히 글씨 연습을 했는데도 불
구하고―나를 때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우리 언니 또한 자신의 종이인형
목을 내가 못쓰게 만들었다고 나에게 다시는 인형을 보여주지 않았다. 봉
순이 언니가 그건 짱아의 짓이 아니라고 변명을 했지만 언니는 봉순이 언
니를 향해 눈을 파르스름하게 뜨고는 말했다.
―식모 주제에 웬 참견이야?
봉순이 언니는, 우리 언니릿� 힘도 세고 키도 컸던 봉순이 언니는 아
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봉순이 언니를 따라 부엌에 들어가자 언니는
얇은 시멘트를 바른 부뚜막 한쪽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식모주제야 언니는….
봉순이 언니가 우리 언니의 그 말 한마디에 풀이 죽는 모습이 사실은
재미가 있어서 나도 우리 언니의 말을 따라 봉순이 언니에게 야멸차게 내
뱉어 본 것이었다. 부뚜막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언니는 잠시 망연
한 표정을 짓다가 그만 웃기 시작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언니는, 봉순
이 언니는 오래오래 울고만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버지가 돌아온 그날, 언니는 결국 서서 밥을 먹었다. 하지만 서서 밥
을 먹으면서도 언니는 손을 뒤로 돌려서 내 입에 녹두전이며 물에 씻은
김치에 싼 조그만 제육을 넣어주었다. 나는 물론 날름날름 그것을 받아먹
고 언니의 등에서 잠들었다. 나를 놀리기만 하는 언니와 오빠를 대신해서
이제 아버지가 나의 편이 돼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무너져버렸고, 내
게 남은 것은 봉순이 언니뿐이었다. 그녀만이 우는 나를 달래주었고, 그
녀만이 내 잠자리의 베개를 고쳐 놓아주었다. 그녀는 나와 마주친 최초의
세계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오고 봉순이 언니가 가져다 놓은 새까만 벌레들이
우리집 낡은 문틈으로 사라졌어도 우리집은 부자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
를 받아줄 취직자리는 없었다.
아버지는 아침이면 말쑥한 양복을 차려입고 낡은 가죽가방에 미국에서
받은 학위증을 소중하게 챙겨갖고는 밖으로 나갔다가 저녁이면 고주망태
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나면 으레 어머니와 한판 싸움이 벌어
지곤 했다.
―답답하다구! 답답해서 그래!
아버지는 어머니와 수군거리다가 드디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소리는
안방의 누런 문창호지를 넘어 우리 형제들과 봉순이 언니가 쓰는 방까지
날아왔다.
―누군 안 답답한 줄 알아? 그러니 술좀 작작 먹으라구. 유학까지 갔다
왔으면 취직을 해야 할 거 아냐!
―자리가 없는 걸 난들 어떻게 해! 주야간 뛰고 쌀 한말도 안되는 월급
받는 그 교수자리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거야? 당신은. 내가 그러려고 쌔
빠지게 미국까지 갔다온 거야?
―미국유학 갔다왔으면 다야? 새끼들하고 당장 먹고 살 생각을 해야지.
난들 시장에 나가고 싶어서 나갔었나, 나도 일제시대때 바나나 먹고 큰
사람이야, 왜 못해? 앉아서 굶어죽는 것보다 낫잖아? 당신은 삼년 동안
미국에서 호사스럽게 살았는데, 난 이게 뭐야?
―호사라니? 내가 뭐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미국에서 파티하고 왔는 줄
알아? 당신 보내주는 돈 아껴쓰려고 창문도 없는 지하방에서 매트리스
하나 깔고 살았어!
어머니는 지난 가난의 분풀이라도 하는 듯 소리를 질렀고, 아버지는 아
버지대로 자리끼 물그릇을 들어 방 바깥으로 내팽개쳐 버렸다. � 놋으로
만든 대접이 툇마루 앞 흙바닥에 나뒹굴어지면 그쯤에서야 소동이 끝나
곤 했다.
―괜찮아 짱아, 괜찮아….
잠에서 깨어나 떨고 있는 나를 안으며 봉순이 언니가 말했다. 그래도
내가 울음을 그치지 않았으므로 봉순이 언니는 천장이 낮은 그 방에서 나
를 업고 서성거렸다.
―옛날에 말이다. 망태 할아부지가 살았댜. 망태 할아부지는 키는 저기
한길에 서 있는 전봇대만치 컸는데, 밤만 되므는 국사발만큼 큰 눈을 뜨
구설라므는, 누가 아직 안자구 있어, 누가 밤에 안자구 울구 있어! 해믄
서 집집마다 창을 기웃거린댜, 그러다가 안자구 있는 애가 있으므는 커다
란 집게로 아이의 목을 터억, 하니 잡아서는 등에 지구다니는 집채만한
망태에다 아이를 휘익 던져 넣는다는겨, 그렁께 울지 말어어….
평소같으면 두려웠겠지만, 건넌방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싸
움소리보다는 망태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덜 무서웠다. 부모가 싸우고 있
는 소리를 듣는 어린 날은 인생이 얼마나 비관적이었던지, 이 세상에 믿
을 사람은 왜 그렇게 하나도 없어보였던지. 언니는 내 궁둥이를 두들기며
말하곤 했다.
―괜찮아, 우린 꼭 부자가 될 테니께. 그러믄 우리는 주인집에서 살게
될 거구 아줌니가 나두 핵교에 보내준다구 했어. 정식핵교는 아니드락두
글씨두 가르쳐주구, 옷 맹그는 것두 가르쳐주는 그런 핵교 말이여.
그때 건넌방 문이 거칠게 열리고 아버지가 신을 신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발자국 소리, 그러고 나면 어머니가 흐느껴 우는 소리가 길게 이
어졌다.엄마가 운다는 것은 얼마나 큰 불안이었는지, 봉순이 언니의 뜨뜻한 등
에서 까무룩 잠이 들려던 나는 화들짝 놀란 듯 깨어났고 다시 울었다.
―야가 오늘따라 왜 이리 안자고 그랴, 그랴길.
언니는 몇번 더 망태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다가, 하는 수 없다고 생각
했는지 나를 업고 살며시 집을 빠져나왔다. 화강암으로 이어진 축대가 긴
골목길, 드문드문 달려서 골목길을 비추고 있는 외등에 의지해 걷다가
언니는 사람들이 한길이라고 부르는 만리동쪽 큰 길로 나를 데리고 나왔
다. 길은 환했다. 커다랗고 투명한 유리상자에 가지가지 색깔의 눈깔사탕
을 담아 팔던 가겟집은 아직도 문을 열고 있었고, 굴속같이 생긴 목포집
에서는 남자들이 두런거리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빨래처럼 흰 국수를 널
어둔 국수집에서는 아직도 다 마르지 않은 흰 국수들이 부드러운 저녁바
람에 가늘게 떨며 마르고 있는, 봄밤이었다.
―봉순이 아니야?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리어카를 개조해서 만든 의자도 없는 포장마차에
서 선 채로 막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포장마차 좌판 위에는 포크대신 옷
핀으로 꿰어진 해삼과 멍게들이 카바이드 불빛 아래서 이상하게 윤을 내
며 반짝이고 있었다.
―아자씨, 또 술 드세유?
―그래. 왜 안자구 나왔냐?
아버지는 언니의 등에 업힌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얼른 고개를 봉순이
언니의 등에 묻었다. 아버지가 옷핀에 꿰인 작은 해삼조각을 내게 내밀었다.
―우리 짱이가 이거 먹을 줄 아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무안스레 손을 봉순이 언니에게 내밀었다.
―봉순이, 이거 하나 먹어 볼테냐?
봉순이 언니는 한손으로 내 엉덩이를 받친 채 다른 한손으로 아버지가
내민 그 까맣고 윤기 나는 해삼을 받아 날름 먹어치웠다.
―더 먹어라. 너도 한참 클 나인데….
언니는 아버지의 말에 얼굴을 약간 붉히면서도 아버지가 내미는 해삼이
며 멍게를 날름날름 먹어치웠고 아버지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카
바이드 불빛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의 마르고 단정한 실루엣이
카바이드 불빛에 비치자 나는 아버지가 신성일보다 잘 생겼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고, 그런 아버지에게 내가 너무 야멸차게 대한 것이 좀 후회
도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아버지의 나이 삼십대 초반, 벌써 세 아
이의 아버지였고 한 여자의 남편이며 봉순이 언니까지 거느린 가장, 은행
보증을 잘못 서서 몰락한 할아버지의 아들이며, 지금은 남대문에 큰 점포
를 가지고 있는 처가 덕에 유학까지 마치고 돌아온, 그러나 오기와 자존
심을 가진 유교 집안의 장자, 그러나 또 한편 현실 속에서는 한없이 무력
한 후진국의 젊은 지식인이었다.
아버지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은 내가 떨어뜨려 놓고 갔던 자식이
벌써 이렇게 똘망똘망해졌구나, 하는 대견함, 또 한편 이렇게
콩나물처럼 쑥쑥 크는 아이들을 내가 정말 다 책임질 수 있을 것인가
그 눈빛 때문이었을까, 나는 예전처럼 아버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고 주발을 마당으로 던지는 일은 이 젊고 잘 생긴
사내의 짓이 아닌 것만 같이 느껴졌고 그래서 대견함과 당혹스러움이 우
수처럼 어리고 있는 잘생긴 아버지를 향해 삐죽 웃었다. 아버지는 내 웃
음에 좀 마음이 풀어진 것 같았고 무슨 생각이 났는지, 포장마차에서 일
어나면서 봉순이 언니의 등 뒤에 있는 내게 다가와 물었다.
―짱이야, 오늘 기분인데 아빠하구 드라이브할까?
봉순이 언니의 얼굴이 환해졌고 내가 드라이브라는 난생 처음 듣는 그
말이 무슨 뜻인가 생각하고 있는 동안 아버지는 좁은 길을 이리저리 헤치
며 달려오는 택시를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보기만 했지 타보지는 못했
던 자동차가 내 앞에 섰고 아버지는 봉순이 언니 등에서 냉큼 나를 안아
올려 차에 올랐다. 차 안에서는 쿰쿰한 석유냄새가 났지만 이상하게 기분
은 나쁘지 않았다. 나를 내려놓은 봉순이 언니가 머뭇머뭇 차에 오르는
아버지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래, 봉순이 너도 타자. 아저씨가 오늘은 기분이다.
그때만 해도 좋은 시절이었던 것일까, 아니, 좋다기보다 한가한 시절이
라고나 해야 할까, 아버지는 운전사에게 드라이브 좀 합시다, 하고 말했
고, 운전사는 알았다는 듯 충정로 쪽으로 난 길로 빠져나와 서소문을 거
쳐 남산으로 달렸다.
―아저씨 이 차가 그 새나라입니까?
아버지는 나를 안은 채로 여기가 서소문이다, 여기가 남산이다, 말하다
가 운전사에게 물었다. 봉순이 언니는 거의 창에 달라붙은 자세로 홀린
듯 창밖만 보고 있었다.
―예, 새나라예요.
―이게 그 김종필이가 일본에서 들여온 거죠?
―그럼요. 일본애들 차 참 잘 만들죠. 전에 몰던 시발택시하고는 비교가 안돼요.
―운전하시믄 애들하고 먹고 사실만 한가요?
아버지의 질문에 운전사는 백미러로 아버지를 힐끗 바라보다 말했다.
―왜요? 운전 해보시게요?
―글쎄요… 저도 올봄까지 미국에서 자동차를 운전했더랬죠.
아버지는 묻지도 않은 말을 시작했다. 운전사는 핸들 아래에 달린 볼펜
같은 기어를 바꾸어 넣으며 묵묵했다.
―포드 60년형이었는데 말이지요, 제일 싼 차였는데도 엄청 컸어요. 튼
튼했구, 오년된 중고차였는데 고장 한번 안났다니까요. 유학 끝내고 돌아
오면서 차를 파는데 자동차를 정지시키고 키를 뽑는 순간, 차마 그 키를
뽑지를 못하겠습디다. 내가 언제 이런 자동차를 다시 몰아볼까… 그런 생
각이 들어서….
―미국까지 다녀오셨군요. 거기 사람들 잘 살지요?
―잘 살죠. 이만한 고기를 아침 저녁으로 먹어요. 집집마다 차 있고,
무엇보다 거기 사람들, 악다구니 쓰고 살지 않아요. 매사가 합리적이죠.
일하려는 사람들은 누구나 일할 수 있어요. 솔직히 삼년만에 돌아와 보니
까, 5·16혁명이 나구 나서 사람들이 더 악다구니가 된 것 같구, 비참합
아버지는 많이 취한 것 같았다. 술에 그랬고, 뜻대로 되어주지 않는 현
실에 그랬고, 아버지 말대로 지하방에서 고생하며 산 시절이었지만 짧은
유학동안 맛본 선진국의 경험에 취해서 눈에 보이는 이 현실, 산꼭대기
동네에 방 두칸을 얻어 사는 이 현실, 의자도 없는 포장마차에 서서 옷핀
으로 꿴 해삼에 막소주를 먹는 현실이 정말 비참한 표정이었다.
운전사는 계속 대꾸가 없었다. 아버지는 그 취한 얼굴을 내 뺨에 가져다 댔다.
깎지 않고 자란 아버지의 수염이 내 뺨에 아프게 닿았다. 나는 빠져나가려
고 버둥거렸다. 봉순이 언니가 그런 나를 받아 안았다. 차는 남산 길을
오르고 있었다. 흰 벚꽃이 만발해서 연분홍 등불을 밝혀 놓은 것만 같았
고, 그 나무들 밑에 마치, 저도 꽃이라는 듯 솜사탕이 하얗게 피어나고
있었다. 꽃구경을 나온 사람들의 환한 치마저고리 빛깔이 몽환처럼 그 주
위를 천천히 오갔다. 벚꽃을 보아도 봉순이 언니는 이제는 겁먹지 않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담배를 한대 꺼내 물더니 창문을 열고 연기를 내뿜
다가 말했다.
―봉순이 넌 나 없는 동안 아주머니 말씀 잘 들었니?
―야.
봉순이 언니는 수줍은 듯 엷은 곰보자국이 있는 얼굴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래, 우리집에서 곱게 있으면 아저씨가 좋은 데 시집 보내주마.
봉순이 언니는 빨간 잇몸을 드러내고 히히, 웃었다. 아버지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 짱이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아비로서만 생각한다면 네가
이 다음에 그저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가면 그뿐이다 하는 마음도 있지만
, 세상은 변할 거다. 남자들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하는 훌륭한 여자들이
많이 나올 거야. 넌 꼭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서양여자들처럼 남자들
하고 대등하게 토론도 하고 대학 강단에도 서고 그런 여자말이다. 이 아
빠가 말이야, 아직은 힘이 없지만, 꼭 짱이를 그렇게 키울거야. 알겠니
우리 짱이.
아버지는 여전히 봉순이 언니의 품에 안겨 있는 내 졸린 궁둥이를 두드
리며 말했다.
언니의 벌레가 효과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버지가 드디어 취직이 된
것이었다. 외국인 회사라고 했다. 월급도 많이 주고 자동차도 주고, 토요
일과 일요일에는 이틀씩이나 공휴일인 회사. 전 세계에 지사를 두고 있는
회사인데 유망한 나라를 찾다가 남아프리카공화국과 겨룬 끝에 한국에
지부를 설치한다고 했다. 아버지에게는 기사가 딸린 자동차가 나왔지만
우리집 앞까지 차가 들어올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그 차를 계단이 많은
집 앞에서는 탈 수가 없어 십분쯤 계단을 걸어 내려가 아현초등학교 건너
편 큰 길에 대기해 있는 자동차에 올라타고 회사로 떠나곤 했다.
그리고 어느날 리어카가 집 앞에 두어대 오고 우리는 그보다 좀 아랫동
네로 이사를 했다. 담이 높은 큰 집들이 한쪽으로 줄지어 있고 서너 발짝
건너편에는 다닥다닥 붙은 지붕 낮은 집들이 늘어서 있는 묘한 동네였다
아현동쪽에서 만리동쪽으로 올려다보자면 오른쪽 줄이 한옥줄이었고 왼
쪽이 토끼장처럼 지붕이 낮은 집들이었다.
그 동네의 중간쯤에 위치한 제법 큰 한옥이 우리집이었다. 우리가 이사
했을 때, 그 집에는 이미 다른 식구들이 세 가구나 살고 있었다. 아버지
는 아침부터 회사로 나가시고 어머니도 가게를 처분하고 집에 계셨다.
봉순이 언니는 끼니 때마다 밥을 두 그릇씩이나 먹고 눌은 밥까지 먹어
댔기 때문에 살이 통통히 올라 있었다.
하지만 봉순이 언니는 아직 학교에 가지 못했다. 정식학교는 아니지만
글씨도 배워주고 옷 만드는 법도 배워주는 그런 학교.
우리가 아랫동네로 이사온 후, 봉순이 언니는 우리 언니가 새하얀 줄이
선명한 세일러복을 입고, 중학교 입시를 잘한다는 미동국민학교로 갈 때
마다 멍해졌지만, 신앙촌 아주머니가 집에 들러 가지가지 옷과 맨드라미
처럼 붉은 내복과 구리무를 내놓고, 불룩한 몸뻬를 입은 미제 아주머니
배에서는 우리가 생전 보지못했던 초콜릿과 커피가 쏟아져 나왔지만 봉순
이 언니는 집에만 있었다.
봉순이 언니에게 생전 잔소리를 하지 않던 어머니가 신경질을 내기 시
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손님이 왔는데 벗긴 사과에 껍질이 남도록 엉망으로 깎아낸다거나, 토
스트를 너무 바싹 태웠다거나 하는 잔소리였다.
어머니는 낮이면 밖에 나갔다가 새로 들여온 이상한 솥에 밀가루를 쪄
서는 그걸 빵이라고 우?涌“� 먹으라고 했다. 하지만 봉순이 언니는 밀
가루는 절대로 먹지 않았다.
―저는 그냥 찬밥 먹을래요… 쌀이 없으믄 모를까, 그 좋은 밥 놔두구
웬 밀가루래유….
어머니는 봉순이 언니가 어머니가 요리학원에서 배워온 빵을 먹지 않는
것이 짜증스러운 듯했다.
―빵이 밥보다 얼마나 영양가가 높은데 그러니? 지금 나라에서도 분식
하라고 난린데. 우리보다 잘사는 서양 사람들은 그 좋은 밥 안먹구 이 빵
만 먹는다더라. 게다가 너만 밥을 먹겠다면 그럼 너 땜에 아침에도 밥을
해야 되잖니.
하지만 밥에 대해서만은 봉순이 언니는 완강했다. 밥을 먹고 간식으로
빵이나 국수를 먹으라면 또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어림도 없었다.
봉순이 언니는 저녁밥을 많이 지어 그것을 남겨 놓았다가 아침이면, 우
리 가족이 상에 둘러앉아 토스트와 우유를 먹는 동안 주황색 플라스틱 바
가지에 찬밥을 담아서 부엌으로 나갔다. 바가지에 담긴 찬밥을 국에 말아
부뚜막에 걸터앉아서는 후루룩 혼자 먹는 것이었다.
어쨌든 어머니와 아버지는 갑자기 서구식 생활을 결심한 듯했고, 이른
아침이면 우리집까지 따뜻한 서울우유가 두 병이나 배달이 되었고, 마가
린에 굽는 토스트 냄새가 번졌다. 또 가끔씩은 신식으로 새로나온 라면을
끓여 아침을 먹기도 했다.
어머니는 다우다 한복이나 융으로 만든 몸뻬를 벗고 길다란 월남치마를
입고 굽이 높은 슬리퍼를 신고 다녔다. 어머니의 머리가 잘려져나가고
구불구불해졌으며, 가발장사 아주머니가 오자 어머니는 봉순이 언니의 머
리도 짧게 잘라 버렸다.
어머니는 갑자기 동창들을 만나러 다니기 시작했고, 어머니가 늘 손에
들고 있었던 책의 제목은 몇달이 지나도록 바뀌지 않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그 이후 내 어린 시절의 기억속에서 어머니는 언제나 부재중이
우리집 작은방에는 각기 세식구가 살고 있었다. 맨 아랫방에는 가발공
장에 다니는 처녀 둘 그리고 그 옆방에는 그때 여섯살, 세살 정도의 아이
들이 둘씩 있었다. 제 어머니와 아버지가 아침에 일을 나가고 나면 아이
들은 하루종일 저희들끼리 놀았다.
점심 끼니때가 되면 어머니는 봉순이 언니를 시켜 찬밥 남은 것이나 새
로 끓인 수제비를 가져다 주게 했고 아이들은 익숙한 듯 그 찬밥이나 수
제비에 저희들끼리 우거지로 만든 김치를 얹어서는 양푼에 머리를 박고
그것을 먹었다. 여름내내 옷이라고는 팬티와 러닝셔츠 밖에 없는 아이들,
그날 아마도 흐린 초여름의 오후였을 것이다.
무슨 이유였을까, 혼자서 아버지가 사다준 소꿉을 살고 있던 나의 살림
살이를 부수고 한 아이가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내가 아마도 제가 잡은
사마귀인가, 방아깨비인가를 놓치게 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나는 그저
소꿉을 살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아이는 그 사마귄가 방아깨빈가가 나의
소꿉속으로 튀어나가 사라져버렸다고 우겨댔다.
―이 씹팔년이, 니가 게서 풀을 빻고 지랄을 하고 있으니까 방아깨비가
그리로 튀지! 이 망할년아!
아이는 나를 때리고 나서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빈주먹을 내 얼굴 가
까이 휘두르며 말했다. 나는 처음 당해보는 이런 종류의 폭력에 멍해져서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주먹으로 맞은 뺨도 뺨이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욕때문에 나는 얼어붙었던 것이다. 그것이 욕이다, 라는
것도 몰랐지만, 무언가 아주 더러운 것을 이미 삼켜버리고 만 그런 느낌
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봉순이 언니의 부재를 처음 깨닫기 시작했다. 봉순이 언
니는, 아랫집으로 이사온 후 멍해졌던 언니는 요즘 부쩍 내 곁에서 사라
지는 일이 잦아졌던 것이다. 언니가 없이 나는 처음으로 부당한 세상과
대면했다.
그 아이가 소리를 치는 동안 우리집의 다른 방에 사는 아이들이 모여들
었다. 두렵고 슬프기보다 당황스러웠다. 드디어 언니가 이웃집의 식모언
니와 우리집에 들어섰을 때 나는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봉순이 언니
가 놀라서 달려오자 러닝과 팬티를 온 여름내내 입고 있던 그 아이는 나
를 째려보더니 내 얼굴에 침을 퉤 뱉었다.
―재수없는 주인집 딸년! 에이 우라질!
그 아이가 뱉은 침이 내 얼굴로 튀었고 내가 그것을 다 닦을 사이도 없이
―재수없는 주인집 딸년! 우라질!
그 뒤에 서 있던 아이들도 일제히 욕을 하고는 침을 뱉었다. 봉순이 언
니가 쫓아가서 그중 한 아이의 뒷덜미를 잡아 엉덩이를 패주었지만 아이
들은 우우 몰려 저희들끼리 도망을 쳐버렸다. 봉순이 언니는 나를 끌고
수돗가로 다가갔다.
―저 호래비자식놈들 같으니라구, 뭐 저런 옘병할 놈들이 있어. 아줌니
아시면 큰일날라구…. 찡그리지 말구 가만 있어. 침 묻은 거 놔두므는
버짐 피니께.
언니는 내뺨을 열심히 닦아주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이 내게 던졌던 말
은 마음에 걸려 닦아지지 않았다. 나는 무언가 해석할 수 없는 혼돈의 도
가니 속으로 던져진 느낌이었다. 억울했고 분했고, 그리고 모욕스러웠다.
내 또래의 그 아이들이 나의 존재를 아주 무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나는 어떻게든 그들 편에 속하고 싶어서 내가 가지고
있던 케이크를 다 내밀었다. 꽤 많은 양의 케이크였는데 아이들은 눈 깜
짝할 사이에 그걸 다 먹어치웠다. 그중의 나이가 많은 남자아이가 내게
말했다.
―이거 너희집에 더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 머릿속으로 불안
이 지나갔다. 케이크가 집안에 더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건 학교에
서 돌아올 언니와 오빠의 몫이었다. 하지만 심심했으므로, 나는 그저 그
아이들과 놀고 싶었고 더 망설이지도 않고 냉큼 집안으로 들어가 그 케이
크를 다 가지고 나왔다. 아이들은 케이크 위에 붙어있던 사탕으로 만든
장미송이와 이파리, 게다가 상자 바닥에 붙은 크림까지 다 핥아 먹고도
내게 같이 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아이들이 빈 케이크 상자
를 내버려두고 우르르 다시 몰려갔을 때 나는 그 아이들을 따라 나섰다.
아이들은 힐끔 나를 바라보았을 뿐 언젠가처럼 욕을 하거나 침을 뱉지는
않았다. 이제 드디어 나는 그들에게 끼여들게 된 것이었다. 나는 너무 기
쁜 나머지, 곧 어머니에게 언니 오빠의 케이크까지 들고 나가버린 것이
들통이 날 것도 잊어버렸다. 내게도 드디어 함께 놀 친구들이 생긴 것이
었다. 나는 아이들이 기다란 막대기로 자치기를 하는 것이나, 빳빳하게
접은 딱지를 팽소리가 나게 치며 하는 놀이를 구경했다. 가끔 그중의 하
나가, 넌 아직도 집에 안갔니,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나는 나도 너
희들과 같은 친구라니까, 하는 표정이 잘 전달되도록 애쓰면서 히히 웃었
다. 그러자 그중의 하나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는 말했다.
―치기장난할 사람 여기 붙어라. 여기붙어라.
골목에 흩어져 놀던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새로 모여든 아이들이 나를
힐끔거리며 바라보았지만, 나는 약간은 머쓱한 기분으로 그러나 아무렇지
도 않으려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는 그 아이들이 가위바위보를 할
때, 나도 끼어들었다. 그 아이들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힐끔 바라보았
을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곧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엔 내가 게임의 법칙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았고, 그래서 제일
먼저 술래가 된 것이려니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침 무렵부터 긴 여름 해
가 저물도록 나는 내내 술래였다. 돌 올라서기 놀이에서 내가 미처 돌에
올라서지 못한 아이를 잡아내도, 치기 장난에서 내가 아무리 다른 아이들
을 따라 잡아 그 아이의 옷을 쳐도 그건 반칙이라고 아이들은 우겼다. 분
명히 쳤다고 넌 나한테 잡혔었다고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아무도 내편이
되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이건 내 착각이겠거니 했고, 다시 술래가
되었을 때 나는 악착같이 달려가 이번에는 나보다 어린 꼬마의 목덜미를
잡고 놓지 않았다.
―자 이번엔 됐지?
내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어린 꼬마의 목덜미를 꽉 잡고 있었으므로
아이들은 일이 난처하게 되었다는 표정이었다. 그러자 그중의 한 아이
가 나서서 말했다. 우리 집에 살다가 나를 때리고 이사한 그 아이였다.
―웃기고 있네, 걘 깍두기야!
침묵하던 아이들이 한꺼번에, 풍선을 터뜨리는 것처럼 와와 웃었다.
―자 다시 시작!
아이들이 흩어졌다. 나는 다시 술래가 되어 그중의 한 아이를 잡아야
했다. 하지만 팔과 다리에서 조금씩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마에서
비직비직 진땀도 배어나왔다. 아이들은 그들을 잡으려는 나를 피해 요리
조리 몸을 돌렸다. 나는 고양이들을 잡아보겠다고 나선 쥐꼴이었다. 우스
워 죽겠다는 듯, 속 시원해 죽겠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이,
초롱초롱, 얼굴만큼 새카만 그들의 눈빛이 왜 내게는 그토록 두려웠을까.
나는 그제서야 아이들이 서로 짜고 이 레이스 달린 옷을 입은 주인집 계
집아이를 놀려먹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참아내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끼인 놀이에서 한번도 술래를 벗어날 수 없는 그 외로
움, 룰을 정확히 지켜 놀이에 끼여도 아이들에게 파울의 판정을 받는 외
로움, 그도 아니면 아이들이 모두 골목으로 숨어버리는 동안 낙서가 가득
한 벽에 두 눈을 가리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우며 어둠 속에서
견뎌야 하는 외로움, 하지만 혼자인 것보다는 술래인 채로 그들과 노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었다. 심심한 것은 싫었다.
봉순이 언니가 저녁을 먹으라고 나를 부르러 왔다. 왈칵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여기서 마치 어른들의 뜻이니 난 어쩔 수 없어 하는 표정으로
그 자리를 빠져 버리면 나는 처음부터 부당한 이 게임의 법칙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왠지 그건 아이들의 표현대로 ‘반칙’
인 것 같았고, 그래서 망설이고 있는 내게 한 아이가 말했다.
―썅, 그런 법이 어딨어? 술래니까 다음 술래를 만들어 놓고 가야 할
거 아냐! 어쩌나 보려고 끼워줬더니 옘병, 육시랄!
그의 말은 옳았다. 술래가 빠져 버리면 게임은 엉망이 되는 것이다. 게
다가 아이들은 다시는 나를 끼워주지 않을 것이고, 이대로 집에 들어가보
았자 케이크가 없어진 일을 어머니에게 추궁당하게 될 터였다. 나는 언니
의 손길을 뿌리쳤다.
세탁소 총각과 눈이 맞아, 정신이 쏙 나가버린 듯한
언니보다 새로 생긴 아이들이 소중했다. 이제껏 봉순이 언니가 그랬던
것처럼 이 아이들이 나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었다. 나의 고집에 못이겨
언니가 돌아간 다음에도 밤이 늦도록, 시장에서 돌아오는 그네의 부모들
이 늦은 저녁을 준비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영석아, 봉철아 부를 때
까지 나는 술래였다. 몇 번이나 눈물이 터져버릴 것 같은 순간도 있었지
만 울어봤자 더 바보가 될 뿐이라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그래도 아직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곯려먹고 나면 이제 그치겠지,
그러니 그들에게 이런 통과의례를 내가 잘 견디는 것을 보여주고 그
들의 흡족한 승인아래 술래 자리를 정정당당히 다음 아이에게 물려주고
이 자리를 빠져 나가고 싶었던 것이다. 나도 한번쯤 무리 속에 서서 나처
럼 술래가 되는 아이를 곯려주고 싶었다.
저들이 끼워만 준다면 한번만이라도 나를 술래를 면하게 해준다면, 절
대로 잡히지 않고, 싱싱하게 술래를 노려볼 수 있을 것이었다. 그 아이가
게임의 법칙을 위반한 다른 아이를 발견해도, 다른 아이들이 아니라고
하면 나도 아니라고, 다수의 편에서 우기고 싶었다. 그건 적어도 정당하
지 않지만, 그건 힘이고, 그건 아주 달콤하고 안전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끝내 내게 기회를 주지 않았고 이젠 봉순이 언니도 더는 나를 부
르러 오지 않았다. 그러자 나는 그들에게 가련한 희생자가 된 모습으로
뒷모습을 보이는 것이 싫어졌고 그래, 버틸 때까지 버텨보자는 오기도 솟
았다.
내가 얼마나 당황스럽고 막막하고 슬픈 줄도 모르고 세탁소 총각과 후
미진 골목에서 시시덕거리는 봉순이 언니, 봉순이 언니는 밤마다 라디오
앞에 앉아서 이미자의 노래들을 삐뚜른 연필글씨로 받아 적고는 그것을
연신 불러보고 불러보고 했다.
나는 이제 봉순이 언니와 나 사이에도 어떤 거리가, 마치 내가 더 이상 언니의
등 위에 업히기에는 너무 커버렸듯이 어떤 거리가 생긴 것을 알았고,
이제 봉순이 언니없이 이 악의에 찬눈동자들을 향해 이 세상의 첫걸음마를
혼자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어슴푸레 깨달았다.
나는 입술을 물고 어둠속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열심히 외웠다.
아무리 끼여들고 싶었지만 나는 혼자다, 나는 혼자다, 여기서 울면,
여기서 울면, 영원히 바보가 되는 거다, 나는 아마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를 그런 주문으로 외웠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뒤돌아보았을 때 골목길 가파른
계단에는 아무도 없었다. 노르스름한 방범등에 전신주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짱구네 가게 앞에 선 수양버들의 이파리가 산발한 머리카락처럼 섬뜩했다.
고요. 검고 긴 고요. 그래도 내 발소리만 크게 울리는 골목길을 나는
두리번거렸다. 공동수도 앞 탱크 뒤나 버드나무 뒤편. 그리고 한참후, 나
는 알았다. 아이들이 꼭꼭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지붕이 낮은 그들
의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 시장에서 돌아온 제
엄마들과 밥을 먹고 있을 거라는 걸. 그들중 누구도 내가 아직도 술래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무서움을 참아내며 그들을 찾고 있다는 것을 신경쓰
지 않을 거라는 것을. 설사 어떤 아이가 있어, 밥을 먹다 말고 문득 아
참 짱이가 있었지, 생각하겠지만 아마도 그도 나를 곧 잊어버릴 것이라는
것을, 내게는 양과자도 있고 레이스 달린 원피스도 있으니 언제나 술래
로 세워놓아도 괜찮을 거라고 그들은 생각한다는 것을.그때 깨달았어야 했다.
인간이 가진 무수하고 수많은 마음 갈래 중에서끝내 내게 적의만을 드러내려고
하는 인간들에 대해서, 설마, 설마, 희망을 가지지 말았어야 했다.
그가 그럴 것이라는 걸 처음부터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래도, 혹시나, 하는
그 희망의 독. 아무리 룰을 지켜도 끝내파울 판정을 받을 수도 있다는 악착스러운
진리를 내가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삼십년이나 지난 후였다.
하지만 그 삼십년이 지난 지금 나는 아직
도 궁금한 것이 있다. 이런 경험을 그 이후에도 무수히 반복하면서도 나
는 왜 인간이 끝내는 선할 것이라는 것을, 그토록 집요하게 믿고 있었을
까. 이런 일이 그 장소의 특수한 사건이라고, 그러니 그때 나는 운이 나
빴을 뿐이라고 그토록 굳세게 믿고 있었을까? 그건 혹시 현실에 대한 눈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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