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용오름☆]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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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오름]
김학철 시집 / 문학아카데미시선 268 / 문학아카데미(2014.10.20) / 값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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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오름
김학철
눈 덮인 산은 묵언 수행 중,
잘생긴 능선
겨울 나무들의 입김이 가득한 골짜기
산이 토해내는 영혼의 울림
그 울림,
맴돌아
아득하게
눈으로 내린다
문득 바라이 용오름처럼 일어난다
구름 사이를 뚫고 올라가는
저, 눈 덮인 산의 눈부신 설레임.
독거獨居
김학철
해 질 녘,
뜰 안에 가만히 쌓이는 고요
나뭇잎 하나 흔들리지 않는다
이장里長네 집 낮은 굴뚝을 빠져나온 연기
수직으로 하얗게 오르고
마을 앞길은 벌써 인적이 드물다
아랫집 독거獨居 노인의 희미한 기침 소리와
풀잎 사이로 옮겨다니는 벌레들의 움직임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다
이 집요한 정적,
가까스로 걸려 있는 저녁놀과
마지막 햇빛의 조용한 사라짐.
3월, 나무들의 귀
김학철
초봄의 새들은 나무들 사이에서 만나고
나무들 사이에서 헤어진다
부딪치고 엇갈리는 끊임없는 의식으로
가지마다 남아 서성이는 깃털들의 추워하는 떨림이
하얗게 성에처럼 남아 있다
비어 있는 하늘로
새들이 일시에 몸을 일으켜 떠나고
그 미약한 마지막 찬바람이 지나가는 길목
나무들의 귀는
먼 계곡의 물소리로 가득하다.
유월, 자화상
김학철
바람 한 점
늦게 떨어지는 산그늘 속
늙은 새 한 마리
졸면서, 졸면서 앉아 있다
초여름 한나절,
떠나지 못한 시간과
나뭇잎들의 정밀한 흔들림
숨죽이던 고요
숲의 싱그러움이
슬그머니 흩어진다
머물렀던 것들이
보일 듯, 보일 듯 지나가는
유월.
삶에 관하여
김학철
빛나 오름이여,
내 질긴 혼백의 빛나오름이여
눈부신 슬픔으로 떠나감이여
쏟아지는 한 여름 장대비 속으로
번쩍이는 천둥 번개 속으로.
이 어두운 밤
김학철
달이 숨는다
꽃들도 눈을 감는다
숲을 돌아 나온 바람이
창유리에 부딪쳐 부서진다
풀잎들은 한 방향으로 머리를 풀어 내린다
침침하던 눈이 밝아오진다
이 어두운 밤, 홀로 떠나는 내가 보인다
어둠이 뿜어내는 빛깔 때문에 세상은 더욱 창백하다
푸른 빛으로 넘치는 어둠 속
얼굴을 감춘 내 말들이 몸살을 앓는다.
새에 대한 명상
김학철
숲 속에 숨어 있는
새 울음소리 따라 왔다가
엉겅퀴 우거진 덤불 속의 새를 찾다가
그 언저리에 남아 잇는 아름다움을 찾아가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휘파람처럼 울던 새는 어딘가로 날아가 버리고
나만 남았습니다
나만 혼자 남았습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은 아직도 가슴에 남아
두근거리는 울림이 되는데
작은 새 한 마리 앉아 울던 잡목의 곁가지에
신열身熱같이 남아 있는 희미한 전율이
가지를 잡은 손끝으로 옮겨와
아직도 가늘게 떨리는 것은
떠나간 새들의 온기溫氣가
천천히 바람으로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초록의 냄새
김학철
여행을 떠난다
그리운 곳을 찾아간다
창 밖에 빗소리 멀어져 가고
놀란 나무들이 화들짝 거리는 숲길로
바람이 녹색의 빗줄기를 몰고 간다
잠에서 깨어난 나무들도 차가운 손을 내민다
멧새 한 마리 비를 맞으며 초록 잎새에 엎드려 운다
어둠이 가만히 다가와
가슴을 열고 따뜻하게 안아 준다
창 밖에 빗소리 멀어진다
그 무한의 공터에 머무는 빗줄기들 눈부시다
윤곽이
뚜렷하게 모양을 드러낼 때까지
나는 안타까운 미열로 목이 마르다
저기 저 빈 자리에 그려 넣은 그림,
창 밖으로 멀어지는 빗소리
내 안에 잠든 초록의 냄새 숲에 가득하다.
달빛 관능
김학철
느티나무 어린 가지들을 흔드는 손길이 눈부시다
빛이 닿았다가 일시에 흩어지며 뿌리는
빛의 춤, 빛의 파장이
산사山寺의 맑은 종을 흔들어
사계의 신을 깨운다
나무들의 섬세한 그림자가 웃는다
그렇게 다가왔던 아름다움도 멀어져 갈 것이다
가슴으로 듣는 풀잎의 소근거림,
저 청청한 숲,
달빛에게 손을 내민다
푸른 정맥 속 남겨 놓은 말들이 은밀하게 들어온다
달빛은 내 혈관 속을 흘러 다니며
환히 불을 밝힌다.
키가 크는 나무
김학철
너를 보고 있으면
내 맥박은 숨 가쁘게 저려 온다
몸으로 말하는 갈망이다
꿈길을 열어가는 아름다움이다
이파리 사이로 흐르는
바람의 유입이 아무리 미약해도
은밀하게 숨 고르다 흔들리고 자지러지는
잔가지의 비밀스러운 떨림과
멈추지 못하는 욕망,
너는 빛을 향해 제 몸을 틀어 올린다
삼동에 가두어 두었던 네 소리는
천천히 울림으로 맴돌다 지친다
풀린 음색으로 남는다
저 혼자 눈 감고 인내한다.
귀를 세우고 듣는 네 몸 속의 화음,
끝없는 변신을 위해 움트는 태동이다
벌거벗은 오감을 일으키는 기쁨이다
그 경이로움에 나는 키가 크는 나무다.
산은 내 안에 있고
김학철
산은 내 안에 있고, 내 앞에도 있다
나는 산 속에 누워 나를 둘러싼 능선들의
부드러운 흐름을 따스하게 받으며
그 안에 잠겨간다
내 안에 살고 있는 깊은 산의 말씀을
늘 파헤치고 잡다한 주석을 달고
마음대로 해설해도
산은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다
산은 답하지 않지만 나는 기다린다
그 닫힌 눈이 열릴 때까지
그 말씀이
부드러운 산울림으로 돌아와 내 안에 잠길 때까지
나는 다만 가다릴 뿐이다.
오래된 유물
김학철
우물 속에는 오래된 나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해묵은 이끼 냄새가 난다
별들이 몸을 적셔 정갈하게 하늘로 뜨는 곳,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직도 신선하게 남아 있는 곳,
어둠 속에 숨어서 보는 빛은
깊고 푸른 문양으로 물 위에 일렁인다
우물 속에서 잊혀진 이야기들이 줄줄이 엮여 올라온다
참을 수 없는 기쁨이 되기도 하고 지친 목숨을 달래기도 한다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우물속 울림이언만
내 귀는 이국의 낯선 방언을 듣듯이 먹먹해진다
숲을 지나온 바람이
우물 속의 별빛을 하나, 둘 , 거두어 간다.
오래된 벽시계
김학철
오래된 벽시계를 본다
누가 새의 말을 들었을까
바위 틈에 뿌리를 내린 늙은 소나무 사이로
뜸들이다가
벽 속의 숲으로 숨어버린 그 새
누가 꿈결에라도 듣기는 했을까
시간의 문은 굳게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낡은 몸통에서 뛰쳐나온 시간들이
녹슬고 마른 기침소리를 내며 나를 깨워놓는다
나는 박제가 된 양 벽에 기대고 앉아
시간의 숨소리를 듣고 있다
지나간 기다림은 다 어디에 있을까
오래된 벽시계,
그 사라진 말을 생각한다.
깊은 잠 1
김학철
오늘 하루
해 뜨기 전에 나는
벌레처럼 일어났다가
벌레처럼 누워 버렸다
누구와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날이 저물었다
때묻은 옷 벗어 들고 습관처럼 버려 둔
나의 고치를 열고 들어가
잠이 들었다
깊고 깊은 잠.
지독한 슬픔 1
김학철
내가 지닌 슬픔은
가끔 무지개로 뜨기도 하고
눈이 부시게 휘황한 노래로도 퍼진다
아무도 찾는 이 없는 깊은 산골,
정갈하게 물이 솟는 옹달샘에 마물기도 하고
산안개 짙게 깔린
세상의 푸른 잎사귀 뒤에 숨어
제 본래의 모습을 감추기도 한다
오래 몸에 지니고 온 빛을
다른 빛깔로 바꾸기도 한다.
전언傳言
김학철
푸른 새벽의 솔기에 부리를 닦는 새들
떠나기 위해 기다렸던 몸짓
밤새 앉았던 자리에 남아 있는 미세한 떨림을
천천히 감지感知한다
이름 모르는 풀씨들 날아와 강인하게 싹을 틔우는
저토록 척박한 땅에,
그래도 남겨 놓을 이름 있다면
얼마나, 얼마나 좋을까마는
걷잡을 수 없는 회한만 주머니마다 가득하다
마지막 남은 새들도 날아간다
밤을 지새운 별들이 다 스러지기 전에
새들이 떠나가며 남긴 말들과
아직 풀지 못한 목숨의 실타래가 엉키지 않도록
눈을 맑게 뜨고 곧게 다스리며 사는 날,
나무들이 비켜서며 박수를 보낸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
김학철
프루스트여, 나는 시간을 찾아 떠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난다
천지의 끝없는 고요 속으로
미묘한 신비의 미궁 안으로 들어서면
깊은 잠 속의 말들이 먼저 일어난다
먼저 깨어난 씨알들이 허공에 매달려
시간의 닫힌 문을 먼저 열려고 다툰다
사방에 새로운 냄새만 가득하다
문 밖에는 낯선 바람개비가 혼자 신명나게 돌아가고
나보다 먼저 떠난 시간들이 저 앞에 보인다
새로운 이정표를 자꾸 세우며 간다
도열해 선 솟대들을 보며
나는 혼란스럽다
귀를 열어도 들리지 않는다
시간을 여는 자들도 시간을 닫는 자들도
잃어버린 시간을 말하지 않는다.
길을 묻는다
김학철
길 위에 있으면서
길을 묻는다
보이지 않는 길을 찾고 찾아서
드디어
저무는 길 끝에 다다르지만
그대 마음은 닫혀 있고
끝내 열 수가 없다
짧은 햇살마저 스러진 들판에
가을 하루 가득 차오르고
마음은 아득히 비어간다
저무는 길을 버리고
나는 다시 어디로 가야 하나
떠나고 돌아옴의
끝없는 순환이 아프게 저려온다.
얼굴
김학철
내가 다시 너를 그리는 것은
달빛 창백하게 이울어지던 날
네 그림자가
억새 사이에 숨어버린
가을바람 같아서
생각을 해도, 생각을 헤도
그 얼굴이 떠오르지 많기 때문이다.
내가 다시 너를 볼 수 없는 것은
희미한 그림자로
갈잎 사이에 숨어버린 소슬바람 같아서
생각을 해도, 생각을 해도
그 얼굴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살구꽃 남은 달빛에 창백하게 이루는 길,
가물가물 멀어져 간
그날, 그 얼굴, 그 숨소리 하나도
간절히 잡아두질 못했기 때문이다.
떠돌이의 꿈
김학철
보고 싶은 것은 늘 산 너머에 있어요
그렇게 그리우면
입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차자 기록할 수 없었던 슬픔
아픈 바람으로 되돌라 오더라도
아직 내게 남은 기억이 꿈길 같더라도
비에 젖은 산 그림자
더 또렷이 물 위에 남아 있는 어스름,
아픈 다리를 절룩이며
보고 싶은 것 찾아가는 들판 좁은 길이
점점 더 어두워 오네요
손에 잡고 있어도 아쉽게도 멀어지는 것
나는 도무지 이승의 비인 하늘을
몇 번이나 떠돌다가 그대에게로 가는지
알 수가 없네요.
고희古稀
김학철
백구 한 마리 날아간 서천西天
그렇게 기다리던 봉황은 보이지 않는다
새털구름만 하늘 가득 깔려 있다.
빈 궁창穹蒼
내 삶의 굴곡들
눈을 감으면
울보에 빡빡 깎은 머리
얼굴 가득 허연 버짐이 퍼져 있던
쬐그만 아이
눈을 뜨면
백발의 늙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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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詩人의 말
늘 채우지 못하고 비워 둔 곳이 많음을 지나간 후에야 알게 된다.
넘치게 담을 수 있는 그릇을 닦아 두고도
다른 곳만 바라보고 있었으니 할 말이 없다.
내 귀를 스치고 가버린 바람 소리 때문일까.
내가 지니고 온 시간 다 거느리고 바람이 먼저 와서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지만
나는 천천히 숨고르기를 해야겠다.
내게 주어진 길,
도무지 어디까지 왔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아직도 두리번거리고 있는지, 또 한 번의 우문을 적어 놓는다.
나이 들수록 점점 더 어려워진다.
2014. 연산골에서
김 학 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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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철 詩集 [※용오름※]
[ 김학철 시인의 시세계 ] -
생활 속의 서정적 미학
박 제 천
1.
김학철 시인의 네 번째 신작시집『용오름』의 해설을 쓰자니 그와의 60여 년 인연이 갖가지 소회를 불러일으킨다. 생각해 보니 자서전의 한 토막이 되더라도 차제에 시인과의 인연을 기록해 두는 것도 좋을 듯 싶다.
김학철 시인은 한마디로 말해 과묵, 과작의 시인인데다 칩거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사람들과 내왕이 거의 없는 시인이다. 어느 정도인가. 언젠가 시인에 대해 신용선 시인이 쓴 글부터 읽어 보자. “내가 아는 김학철 형은 한 가지 표정밖에 갖지 못한 사람이다. 그는 좀체 화를 내거나 긴장하지 않는다. 사교적인 것과도 거리가 먼, 그저 허허 웃는 모습 하나로 외부와 교통한다. 세상의 오만 풍상을 포용해야 얻어질 것 같은 이 웃음은, 누구도 아직 말하지 않은 적막이 머물러 있는 그의 시, 무겁지 않으면서도 깊고 현란하지 않으면서 사람을 끌어당기는 그의 언어의 배경인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더도덜도 없이 김학철 시인의 인품과 시를 묘파한 글이다.
시인과는 까까머리 10대에 만났으니 어언 60여 성상을 바라보지만, 예나 이제나 한결같은 품성이다. 우리는 1959년에 입학해 1962년에 졸업한 성동고등학교 11회 동기동창이다. 서울 토박이다. 방산동에 살던 내가 별 생각 없이 입학한 공업계 중학교에 넌더리가 나서 작심하고 찾아간 인문계 상급학교가 성동고등학교였다. 집에서 세 정거장 거리인 왕십리라 걸어서 통학을 했다. 동대문시장에 즐비한 헌책방을 거쳐 운동장 뒤의 한갓진 골목으로 이어지는 그 통학로가 마음에 들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헌책방에서 책을 뒤적이며 지내는 그 시간이 나날의 기쁨이었다.
1학년 때는 동일계 진학자인 성동중학교 출신이 대부분이어서 급우들과는 서먹서먹한 사이였지만 학교 분위기는 그런대로 괜찮아 헌책방 독서로 마음을 달래었다. 그런데 2학년에 진급하자 사정이 달라졌다. 당시의 고등학교는 2학년부터 문과 이과로 나뉘었는데 6개반 중 문과는 2개 반뿐이라 급우들에게 어떤 동질감이 생기게 되었다. 어느날 뒷자리의 유세준이 내 습작노트를 보더니 문예반에 알려야겠다며 반색을 하였다. 뒤에 문화부차관을 지낸 유세준은 비록 글을 쓰지는 않았지만 활달한 성격이라서 그의 주선으로 문예반에 연결돼 그때 이후 문학의 밤이며 교지에 작품을 발표하게 되었다. 2학년 중 문예반은 훗날 정치학자로 변신한 오진용과 김학철이었다. 오진용이 문예반장이고 김학철이 학예부장이지만 둘 다 2반 소속이었고 나는 1반이었다. 이들과는 3학년에 진급하면서 자별하게 지내게 되었다. 같은 학교 출신의 홍신선 시인은 공교롭게도 이과반이어서 교지에 실은 소설로 이름만 알다가 동국대 입학 후에나 만나게 되었다.
그 무렵의 우리는 겉보기엔 음전했지만 내심으로는 지적모험에 불타는, 오만방자한 10대였다. 우리들 취미는 책읽기였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상대가 읽어보지 못한 책을 들먹여야 했고, 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일화나 작품을 발굴하는 게 재미였다. 알베레스며 코린 윌슨 등에 침잠해 보들레르며 랭보와 같은 프랑스 시인들이 동무였고, 이백이나 두보보다는 이하나 왕유와 같은 시인들을 이웃으로 삼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는 주로 노장류의 한적과 일어판 전집류에 홀려 있었다.
우리가 쓰는 작품들 역시 전문시인의 작품을 뛰어넘는다는 자부심이 철철 넘쳤다. 그러니 아이들 가는 백일장이나 문학소년들의 신춘문예가 하잘것없을 수밖에. 나이 들면서 천둥벌거숭이들의 지적 모험기라 할 수도 있는 그 시절의 오만불손이 가끔씩 거북하기도 했는데, 조금 더 나이든 이제는 오히려 그리운 추억이 되었으니 인생이란 참으로 새옹지마처럼 누구도 예단할 수 없는 부침이리라. 그 뿐인가. 이제는 저세상 사람인 오진용과 프랑스의 『회색수첩』과 같은 지식인잡지를 우리나라에서도 창간하자는 꿈에 부풀어 한동안 부산하게 사람들을 만나던 추억도 새롭기 그지없다.
고교 졸업 후 한 해 늦게 동국대에 입학한 나는 왠지 어정쩡했다. 고교 졸업 동기생들은 이미 2학년인데 한 해 후배들과 교실에 앉아 있기가 멋쩍었다. 틈만 나면 경희대로 진학한 김학철을 자주 만나러 다녔다. 김학철이랑 그 동기인 조태일과 함께 새로운 술친구들을 사귀는 게 좋았다. 우리끼리 <대학시회>를 만들며 전라도 토종 문학소년인 조태일에게 발레리를 들먹이며 우쭐대던 기억도 난다. 그러던 사이에 하나 둘 등단을 하고 학생시인이 되기가 무섭게 입대영장이 나왔다. 우리들은 저마다 군대에 입대하면서 소식이 끊어졌다. 친구들보다 늦게 입대한 내가 1969년에 제대를 하고, 월간『주부생활』에 입사하면서 다시 연결고리가 이어질 수 있었다.
그동안 김학철 시인은 경희대 국문학과를 졸업, ROTC장교로 군복무를 끝낸 다음에는 대학 선배 전상국 소설가의 추천으로 춘천에서 교사롤 재직 중이었다. 서울 출신인지라 객지에서 새 삶을 뿌리내리기에 버거울 수도 있었건만 그는 전이나 다름없이 별다른 내색 없이 1970년 내가 주관하던『시법』동인이 되어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조태일은 경향신문에 당선돼 어느새 시전문지인『시인』지를 내고 있었다. 김지하, 정원모, 김준태 등이『시인』지 배출시인이다. 그러나『시법』이 4호인가를 내고 중단되자 우리는 또다시 연락이 끊어졌다. 나 역시 출판사 잡지사를 스무개사 남짓 전전하면서 고단한 삶의 파도를 타고 넘기가 바빠 먼 데 친구까지 떠올릴 틈이 없었다. 이 무렵의 김학철 시인에 대해서는 이영춘 시인의 기술을 참조해 보자.
내가 그를 알게 된 것은 이곳 춘천에서다. 1970년대부터이니 족히 30년은 넘는다. 대학의 같은 과 선배로서, 교직의 선배로서 남다른 애정을 느끼면서도 단 둘이 앉아 그에게 따끈한 커피 한 잔 나눈 적은 없다. 그러면서도 끈끈하게 느끼는 정, 말하지 않고도 무언가 통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같은 믿음이 가슴 밑바닥에서 작용하고 있다고 고백할 수 있다. 그가 처음 춘천에 내려왔을 때 나는 이미 그의 재능을 여러 경로를 통해서 알고 있었다. 1966년 ‘경희문화상 공모’에서 당시 이미 등단한 기성시인이었던 조태일과 겨루어 그를 제치고 당당히 ‘경희문화상’ 수상자로 뽑혔다. 그 당시 심사위원장은『성북동 비둘기』로도 유명하지만 깐깐하기로 이름난 이산 김광섭 선생님이 선하셨다고 한다. 이만하면 김학철 시인의 재능을 알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춘천에 내려와서 한 번도 ‘자기’를 내세워본 적이 없다. 늘 조용하기만 하다. 오히려 춘천이란 지방에 내려와 문학을 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했다. 그의 속내를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비춰졌다. 그의 아내 김명숙 화가는 지나가는 듯한 말로 ‘선배님, 좀 불러내 주세요!’라는 말까지 할 정도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는 조용하기만 하다. 그 조용함 속에서 내공을 튼튼히 쌓고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늘 자기 갈 길만을 올곧게 가고 있다. 그렇다고 세속을 멀리하는 성격이란 뜻이 아니다. 사람 됨됨이가, 그의 성격이, 그의인품이 그러하다는 뜻이다. 나는 이 글의 청탁을 받고 얼핏 ‘중용中庸’이란 말을 떠올렸다. ‘중용’에 그의 인품과 걸맞는 어떤 말이 들어 있을 것 같았다. 그는 30여 년을 이곳에 살면서 한 번도 그 어느 누구와 공적이든 사적이든 시비를 하거나 화[怒]를 내는 걸 본 적이 없다. 사람 사는 동네에는 반드시 한 사람에 대한 ‘좋은 이야기’보다 ‘나쁜 이야기’가 뒤따라다니기 마련인데 김학철 시인에 대해서는 한 번도 그런 흠 있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영춘「중용의 도, 시와 인간미」부분
이영춘 시인의 말마따나 김학철 시인은 세상과는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렇게 연락이 끊어졌다가 1980년대의 어느 날 그가 불쑥 서울로 나를 찾아왔다. 그제서야 다시 시를 발표해야겠다는 것이다. 술자리에서 시인은 지나가는 소리처럼 서울 친구들 몇과 춘천에 놀러오라는 부탁도 곁들였다. 이유인즉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는 그가 딱해보인 시인의 아내가 “당신, 간첩같아요. 서울사람이라면서 친구들 얼굴 한번 구경할 수 없어요”하더란 것이다. 그 때문에 나는 역시 이제는 저세상 사람인 선원빈의 회사차를 빌려 홍신선이랑 몇이서 춘천을 찾아가 시인의 아내인 김명숙 화백에게 시인의 틀림없는 서울 토박이라는 걸 보증해야 했다. 그 이후 시인은 오랜 침묵에서 벗어났지만 1997년이 되어서나 가까스로 첫 시집『사향주머니』를 발간하겠다고 알려왔다.『사향주머니』해설을 쓴 홍신선 시인의 글을 인용해 본다.
삼십여 년 만에 시집을 낸다고 해설을 부탁해 왔을 때, ‘허 이 친구, 시 그동안 놓지 않고 썼구나’ 나는 그렇게 감탄을 했다. 김학철은 그런 시인이다. 결과적으로 남다른 완벽주의 내지 결벽증이 그를 침묵하게 하고 직절 명료한 시세계를 이룩하게 만든 것이다.-중략- 서정시의 수사학은 흔히 압축과 생략으로 요약된다. 자연물과 그 세부를 찬찬히 탐색하고 있는 서정시인 김학철의 작품들도 압축과 생략의 수사에 충실할 때 빛난다. 그것은 결벽에 가까운 그의 완벽주의가 비로소 정체를 얻는 대목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중략- 서정의 세계를 보여주면서도 김학철의 시들은 극히 섬세하거나 작은 미시의 세계들을 보여준다. 그 섬세함 내지 작은 세계란 그러면 무엇인가. 사회학적인 상상력이 주축을 이루던 거대담론이 무너진 자리의 소소한 일상도 아닌, 그의 작은 세계는, 수필로 비유하자면, 과거 피천득이나 이양하의 정신에 더 가까운 것들이다. 그의 정신 주소는, 바꿔 말하자면, 역사나 현실같은 곳이 아니라 안개와 산실, 물소리, 바위같은 자연 친화적인 미시의 공간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홍신선「민들레, 한 언어주의자의 성채」부분
2004년에는 두 번째 시집『햇빛과원에서』를 출간했다. 이탄 시인의 해설 한 토막을 인용해 본다.
서정시라고 하면 사물의 정서를 아름답게 담아내는 것으로만 알기 쉽다. 그렇지 않은 시들도 있다. 시들 가운데 ‘향기’가 자주 나오는 것을 보아 이 시집도 평범한 전자의 시집으로만 생각했는데, 읽어갈수록 시가 변화되어 감을 알 수 있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러하다. 처음에 화자는 꽃으로 피어나 바람과 별빛을 보기도 하고 풀밭에 누워서 명상의 시간을 가진다. 그리고 다음에는 이미지들이 움직임과 자연으로 변화된다. 어떠한 자연이냐 하면 몸과 색이 하나가 되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게 되는 자연이다. 명상을 하면서 갈매기처럼 날아가고 싶어한다. 마지막 단계는 바람이 되어보고, 장자의 나비가 되어보고, 꿈이 되어보고, 신의 옷자락을 스쳐도 보고 하다가 마침내 투명한 순백색의 「다비」가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향기→자연→다비’가 바로 지은이의 작품세계임을 알 수 있다. -중략=-서정시가 이처럼 사물의 정서를 아름답게 담아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묘한 인간의 세상에서 넓고 깊은 시의 세계가 펼쳐진다는 일에 큰 감동을 받았다. ‘생명의 뿌리’를 위해 애쓰는 시인에게 계속해서 좋은 시를 보여 달라는 말을 하고 싶다.
- 이탄「김학철, 향기 자연 다비의 세계」부분
2007년에는 한국문학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한 세 번째 시집『감정리에 별을 심다』를 상재했다. 한번 세상과 길을 트기 시작한 시인은 춘천에서 <수향시> 동인에 가담하기도 하고, 교직생활 역시 순조로워 춘천성수여자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임했지만, 퇴직 후에 곧바로 춘천 외곽의 감정리로 이사해 다시 자연을 만끽하며 쓴 작품들이다. 고명수 시인의 해설을 참조해 보자.
그의 시에는 김학철 특유의 감각적 이미지와 물아일체의 자연 친화, 그리고 자연에서 은총을 발견하는 종교적 감성이 있다. “스치는 풀잎의 여린 음계마다/달빛이 보석처럼 묻어난다”와 같은 표현은 김학철의 시에서 이미 노련한 경지에 이른 이미지스트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달빛이 화자의 실핏줄이나 푸른 정맥 안으로 들어와 흐르는” 물아일체의 유장한 감성은 급기야 “풀숲에 엎드려 숨죽이던 반딧불이”들을 깨어나게 하여 ‘오도悟道’에의 기원으로 이어져 종교적 감성으로 회귀한다. 시인은 이처럼 깊은 밤 잠 못 들고 뒤척이며 참된 진리의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 그것은 어쩌면 살아있음의 이유이자, 시인됨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살아있음의 이유이자, 시인됨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맑은 밤의 정화와 사색과 명상은, 언제나 삼라만상에 감사하고 자연의 끈질긴 생명력에 찬탄하는 생명 찬미의 노래를 향하여 나아간다.
-고명수「생명의 길항과 삶의 예지」부분
김학철 시인의 작품과 인품을 가까이 봐온 이영춘 시인의 리뷰를 다시 인용해 본다.
김학철의 세 번째 시집『감정리에 별을 심다』를 읽으면서 적잖이 놀라웠다. 필자가 평소에 보아온 그의 성정과 시가 참으로 조화롭게 용해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연과의 동화, 친화, 그것도 그것이려니와 그 자연물이란 대상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세계를 도(道)를 닦는 자세로 들여다보는 것이다. 때로는 경이롭게, 때로는 외롭게 때로는 슬프게 자연의 ‘생성과 소멸’을 ‘만물의 이치’를 비장하게 그려내고 있다. 특히 필자의 교감을 뚫고 들어온 것은 인간의 ‘생성과 소멸’의 세계를 넘나드는 교감의 정서가 아주 깊게 그의 시 곳곳에 깔려 있음에 눈길이 집중되었다. 털어냄의 무게, 가벼워짐의 무게, 다시 말해 ‘무소유’의 털어냄의 무게 같은 시행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인간의 삶이 자칫 허망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인품으로 시를 들여다본다면 옛 선비들의 삶처럼 ‘청빈’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종교적으로 말한다면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세계일 수도 있다. 철학적으로 말한다면 ‘무소유’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우리가 사는 삶을 아니, 내 삶을 다시 들여다보게 하기도 한다. 사물에 대한, 혹은 인생에 대한 관조의 자세가 가을 햇살처럼 투명하다. 그 투명함이 깊은 웅덩이에 고여 슬픔과 허망을 자아내게도 한다.
-이영춘「중용의 도, 시와 인간미」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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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제, 2014년 김학철 시인은 네 번째 시집 『용오름』을 펴낸다. 시집은 모두 4부로 편제되었다. 제1부 <용오름> 제2부 <초록의 냄새> 제3부 <오래된 벽시계> 제4부 <빛을 위한 사유>이다. 아울러 이번 시집에 수록된 「길을 묻는다」는 2010년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을 수상했기에 심사위원을 대표해 집필한 강우식 시인의 평문부터 소개한다. 강우식 시인의 글은 수상작 뿐이 아니라 그 연장선상에서 네 번째 시집 수록 작품들의 특장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길 위에 있으면서 길을 묻는다
보이지 않는 길을 찾고 찾아서
드디어 저무는 길 끝에 다다르지만
그대 마음은 닫혀 있고 끝내 열 수가 없다
짧은 햇살마저 스러진 들판에
가을 하루 가득 차 오르고
마음은 아득히 비어간다
저무는 길을 버리고 나는 다시 어디로 가야 하나
떠나고 돌아옴의
끝없는 순환이 아프게 저려온다
- 김학철「길을 묻는다」전문
김학철 시인의 작품「길을 묻는다」외 4편은 자유시 중에서도 되도록 짧은 형식으로 되어 있다. 말을 아끼고 압축하는 시인으로서의 자세가 한눈에 띈다. 그러면서도 이 시인의 노래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생생히 살아 있다. 시「길을 묻는다」에서 시인은 우리들 인생이 다름 아니라 길에서 길을 묻는 것임을 이야기하면서 그 길이 “떠나고 돌아옴의/끝없는 순환이 아프게 돌아온다”라고 읊고 있다. 이처럼 김학철 시인의 수상작들은 순환의 미학을 띠고 있다. 시「가을 속으로」에서는 모든 소멸해 가는 것들이 다 아름답지 않음을 노래하면서 계절의 순환성을 나타낸다. 특히 “별이 지는 하늘에서/누군가의 영혼이 깊은 숨을 토해 내듯이/산안개 천천히 내려옵니다”와 같은 서정은 자연 속에 산 깊은 연륜이 우러나온 좋은 구절로 기억될 만하다. 시「얼굴」은 망각되어져가는 그리운 사람의 얼굴을 찾으려는 기억의 순환성을 그리고 있으며 이런 순환에의 시학이 단순히 순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순환여행」에서는 “달빛 사이로 찔레꽃 향기” 같은 것으로 인식되어 진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향기나 냄새들은 사물에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김학철 시인의 순환의 미학은 삶의 본질까지도 추구하는 단계에 와 있음이 분명하다. 가령 시「눈뜨는 나무(시집에는「바람과 나무, 새의 2」로 개작 수록」)에서 삶과 죽음의 순환을 노래하면서 “빛을 향해 눈을 여는” 생의 아름다움도 보는 한편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잠자는 나무”의 죽음의 아름다움도 순환의 과정을 통해 보는 견자로서의 모습은 일품이라 할 만하다.
김학철 시인의 이번 시집은 잘 삭혀 진국이 된 장맛처럼 정갈하면서도 은은한 광택이 서린 투명한 영혼의 시편들이다. 소리 내어 읽으면 하나같이 마음이 그윽해지고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작품들 중에서「빛을 위한 사유」「지독한 슬픔1」「우중독음」그리고 표제작인「용오름」을 골라 내 나름의 음미를 달아둔다.
때가 되면 기도하게 하소서
사라지는 것들의 아름다움과 쓸쓸함으로
조금씩 여위는 것들의 아쉬움을 위해
산그늘 천천히 뜨락을 덮어가는 귀퉁이에
추워하는 햇빛이 한 뼘쯤 남아
몸을 웅크리는 때를 위해
겸손히 머리 숙여 기도하게 하소서
우리들 살아가는 일이 흐르는 물과 같아서
때로는 소리를 내기도 하고
때로는 소리를 감추나
우리가 알 수 없고 느끼지도 못했던 섭리를
다가오는 빛으로 담게 하소서
비어 있는 가슴을 은총으로 가득 차게 하시고
떠나고 돌아옴의 끝없는 순환이
함께 나누고 웃으며
따뜻하게 바라보는 지순함으로 샘솟게 하소서
우리들 삶이 비록 힘들고 어렵더라도
이렇게 살아서 손잡을 수 있는 감사함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빛을 위한 사유思惟」전문
“주여. 때가 왔습니다/지난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로 시작하는 라이네 마리아 릴케의 시를 방불케 하는 기도의 시는 춘천시 감정리에 한거 중인 시인의 시와 종교적인 신앙의 힘을 한마디로 보여주는 시인의 육성이라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제2연의 “우리들 살아가는 일이 흐르는 물과 같아서/때로는 소리를 내기도 하고/때로는 소리를 감추나/우리가 알 수 없고 느끼지도 못했던 섭리를/다가오는 빛으로 담게 하소서”는 시인이 물의 자연과 나누는 교감이자 신앙의 힘이 메아리쳐 오는 빛과의 만남이라 할 수 있다. 시를 덮고서도 시의 울림이 깊고 그윽하게 가슴에 메아리지는 여운이 일품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과의 물아일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슬픔이나 고독은 물론 끊임없는 자기수행이 필요할 터, 시인이 시인으로 살아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지닌 슬픔은
가끔 무지개로 뜨기도 하고
눈이 부시게 휘황한 노래로도 퍼진다
아무도 찾는 이 없는 깊은 산골
정갈하게 물이 솟는 옹달샘에 머물기도 한고
산안개 짙게 깔린
세상의 푸른 잎사귀 뒤에 숨어
제 본래의 모습을 감추기도 한다
오래 몸에 지니고 온 빛을
다른 색깔로 바꾸기도 한다
-「지독한 슬픔1」전문
슬픔도 시인에게는 매직이다. 상상력의 힘이 매직이기 때문이다. 직정적인 슬픔은 몸을 상하게 만들지만, 슬픔도 몸에서 마음으로 넘겨 아끼고 어루만지면 보석처럼 빛을 발한다. 공자가 애이불상을 말하는 것 역시 몸으로 겪는 슬픔을 말하는 것이다. 몸과 달리 마음이 느끼는 것은 오래간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목놓아 통곡하고 발버둥치는 게 몸의 슬픔이라면 그 무덤을 가슴에 옮겨놓은 채 두고두고 새기는 것을 마음의 슬픔이라 할 것이다.
사람의 성정은 흔히 오욕칠정으로 귀납된다. 희喜 노怒 애哀 락樂 애愛 오惡 욕慾이 이른바 칠정이다. 그 중에 욕은 다시 식욕, 물욕, 수면욕, 색욕, 명예욕으로 갈라져 오욕이라 불리우니, 사람살이란 결국 오욕칠정의 사슬에 매여 사는 것이다. 나아가 그런 오욕칠정을 몸으로 겪는 일은 순간적이지만 마음에 깊이 새기는 것은 삶의 동력이다. 그 중에서도 사랑과 슬픔은 오래 두고 익힐수록 진국이 우러난다. 기쁨[喜]과 즐거움[樂]이나, 노여움[怒]과 싫어함[惡]은 순간적이고 상대적이어서 몸으로 발산하지 않고 마음속에 갈무리하다보면 절로 삭거나 사라지고 만다.
작품 속의 시인은 “내가 지닌 슬픔은/가끔 무지개로 뜨기도 하고/눈이 부시게 휘황한 노래로도 퍼진다”고 말한다. 시인의 슬픔은 사랑과 같아서 삶의 원천이 되었다. 도대체 어떤 슬픔이길래 무지개가 되고 노래가 되는 것일까. 마치 보석처럼 한순간도 몸에서 떼어놓지 않은 채 틈만 나면 닦고, 비벼서 광을 낸다. 보석세공법과 같은 것이다. 예컨대 내가 쓴 시 중에는 사랑을 보석세공법에 비겨 표현한 게 있다. “보석세공법은 쉽게 말해/두드리고 닦고 문지르고 비벼서/반질반질 광을 내는 것이다/참기름 두른 듯이 광이 나고 환해져야 한다/백일기도 드리듯이 치성드리듯이/정성껏 쓰다듬고 어루만져 부드럽게 윤이 나되/아른아른 얼굴이 되비치는 거울처럼/속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유리창처럼/맑아져/그 속에서 그 빛나는 알몸을 보여주며/반짝이는 눈과 눈을 맞추고/두근거리는 심장의 숨소리를 껴안아야만/비로소 내것이 되는 것이다”가 보여주듯 내 사랑이나 시인의 슬픔은 동질적인 것이다. 내가 마음의 사랑에 열중해 보석을 찾아내듯 시인은 마음의 슬픔에 열중해 무지개와 노래를 찾아내는 것이다.
“아무도 찾는 이 없는 깊은 산골/정갈하게 물이 솟는 옹달샘에 머물기도 하고/산안개 짙게 깔린/세상의 푸른 잎사귀 뒤에 숨어/제 본래의 모습을 감추기도”하는 시인의 슬픔은 요정처럼 자유자재로 시인을 옹달샘으로 바꾸거나 본래의 모습을 감추기도 한다. 변신의 마법이다. 슬픔뿐만이 아니라 시인 또한 변신술을 터득하게 만든다. 그러나 시인의 변신은 희랍신화식의 변신이 아니다. 그보다는 불교식으로 말해 자성불自性佛을 되찾는 것이다. “본래의 모습을 감춘”다는 시인의 말은 본래 면목을 되찾는 말에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혜능의 말처럼 본지풍광本地風光의 천연을 찾아낸 시인의 그윽한 본분이 곧 시인의 ‘지독한 슬픔’이다.
늙은 밤나무 잎들이 바람에 진다
지상으로 떨어지는 시간이 길어 보인다
몸을 던지던 빗소리 흩어지며 멀어진다
숨죽이던 산 빛이 깨어진다
아주 작게 웅크리고 추워진다
줄지어 선 나무들도 이제 가려나 보다
생명에서 멀어지려나 보다
슬며시 젖은 옷깃을 잡는 나무들의 손
따스함이 아직도 남은 것인가
산허리 천천히 흐려오고
그립던 생각도 점점 멀어진다
-「우중독음雨中獨吟」전문
시인의 작품을 읽다보면 중국 당나라때의 시인 왕유가 떠오른다. 왕유는 시도 유명하지만 그림에도 일가를 이루어 이른바 남종문인화의 창시자로 불리운다. 소동파는 왕유에 대해 시 속에 그림이 있고[詩中有畵], 그림 속에 시가 있다[畵中有詩]고 찬탄한다. 남종화는 직업적인 화가와 달리 왕유를 비롯해 시인 학자들이 그린 그림이다. 그래서 문인화란 말이 덧붙는다. 자연 산수에 지은이의 뜻을 싣는 식이니, 흉중구학胸中丘壑, 즉 마음 가운데 자리잡은 산수를 그리는 것이다.
시인의「우중독음」은 “늙은 밤나무 잎들이 바람에 진다”는 담담한 풍경 묘사로 작품을 시작한다. 여기서 그나마 의미를 유추할 수 있는 시어는 “늙은”이라는 시간형용사이다. 1행 그 자체로는 더 이상의 의미가 없어보이는 단순한 수식어로 보이지만 이어서 “지상으로 떨어지는 시간이 길어 보인다”는 제2행의 “길어”와 연결될 때 심정적인 독특한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왜 시인은 그 잎이 땅에 떨어지는 시간을 “길”게 보는 걸까. 이 작품의 매 행에 사용된 수사들은 다음 행의 수사와 연결될 때 또 다른 정회를 불러 일키는 점층적인 기법을 통해 마치 한권의 명상록을 읽어나가듯 시인의 삶과 죽음에 대한 명상이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시가 곧 그림이듯 문자와 문자 사이에 산수화 한 폭을 슬며시 끼워놓고 있다.
종결어를 사용하면서 툭 끊어지는 듯한 짧은 구문도 인상적이다. 종결어로 마감된 문장과 문장 사이에 시인이 문자로 서술하지 않은 수많은 의미가 내장돼 있기 때문이다. 시론에서 말하는 행간의 보폭이 넓어서 여운과 명상이 메아리처럼 되돌아오는 증폭 효과를 거두고 있다. 예컨대 전문 11행의 짧은 작품이지만 제1행에서 제7행에 이르기까지의 종결어만 한자리에 모아보자. ‘진다(제1행) 길어보인다(제2행) 멀어진다(제3행) 깨어진다(제4행) 추워진다(제5행) 가려나 보다(제6행) 멀어지려나보다(제7행)’의 종결어들이 집합적으로 보여주는 심정적인 독특한 정감은 마치 왕유의 시가 그러하듯 시로 보여주는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묘의는 7행에 이르러 연속적인 종결어 사용이 멎으며 제8행에서 제10행에 이르는 전환부를 통해 화자가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장면이다. 시인은 “슬며시 젖은 옷깃을 잡는 나무들의 손//따스함이 아직도 남은 것인가”를 통해 시인과 나무의 교감을 극대화시킨다. 비에 젖은 나무가 비에 젖은 시인의 옷깃을 “잡”고, 시인은 그 나무의 “따스함”을 되새기는 장면이야말로 물아일체의 전범이 아닐 수 없다. 적막강산에 시간마저 길게 늘인 비가 오고, 숨죽이던 산빛도 깨어지니, 모든 것들이 아주 작게 웅크리고 추워진다. 줄지어선 나무들도 죽음을 맞아 떠날 길을 준비한 것처럼 보이는 중에 생명의 따스함을 겨우 느끼지만 산허리 천천히 흐려오듯 이 세상 그리움마저 시인과 산을 떠나는 듯한 적막함이야말로 시인이 남종문인화처럼 시로 그리고 싶었던 은산철벽의 적막일 것이다.
눈 덮인 산은 묵언 수행 중
잘생긴 능선
겨울 나무들의 입김이 가득한 골짜기
산이 토해내는 영혼의 울림
그 울림
맴돌아
아득하게
눈으로
내린다
문득 바람이 용오름처럼 일어난다
구름 사이를 뚫고 올라가는
저, 눈 덮인 산의 눈부신 설레임
-「용오름」전문
「용오름」은「우중독음」처럼 시 안에 그림을 액자화처럼 장치하는 기법을 채용했다. 「우중독음」이 이른바 해거름에 만나는 인생과 자연의 경계, 삶과 죽음의 경계에 방점을 찍는 작품이라면, 「용오름」은 왕유의 남종문인화가 보여주는 선취처럼 독자를 단숨에 시와 선이 한자리에서 만나는 자연의 화엄세계로 끌어들여 황홀한 정신의 설레임에 젖어들게 하는 솜씨가 일품이다.
한마디로 말해 “내가 손가락을 누르면 해인海印이 빛을 발하지만 그대가 마음을 움직이면 번뇌가 먼저 일어난다”는 능엄경의 부처님 말씀이 생각나는 작품이다. 작품 속 용오름으로 일어나는 바람이 곧 번뇌이지만, 대승불교의 관점처럼 번뇌가 그대로 깨달음[煩惱卽若提]이며, 생사의 세계가 그 자체로서 열반[生死卽涅槃]이라고 본다면 번뇌와 해인 또한 이음동의어일 것이다. 미혹에 얽매인 중생에게는 미망의 근원인 번뇌와, 열반에 이르는 깨달음이 상대적이지만, 깨달은 눈으로 보면 번뇌와 깨달음이 그대로 하나이어서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번뇌에 대한 불교적 해석을 빌려오면 부파불교部派佛敎와 유식학파唯識學派를 거치면서 체계화되었으며 그 작용의 형태에 따라 수면隨眠 전纏 개蓋 결結 박縛 루漏 취取 계繫 사使 구垢 폭류暴流 객진客塵 등의 여러 가지 이름이 있는 바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는 번뇌를 곧 수면이라고 한다. 또한 번뇌의 잠재적인 상태를 수면이라 하고, 표면에서 활동하는 상태을 전纏이라고 한다. 수면의 종류에는 98가지가 있다고 보고 여기에 10가지의 전을 합한 것이 108번뇌라고 한다.
이 작품의 도입부는 “눈 덮인 산이 묵언 수행중”이라는 담대한 설정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산은 수행중이지만 눈은 계속해서 내린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아니라 산이 토해내는 영혼의 울림이 맴돌아 만드는 눈이다. “잘 생긴 능선/겨울나무들의 입김”이다. 그 울림이 아득하게 눈으로 내리는데 문득 바람이 용오름처럼 일어난다. 구름 사이를 뚫고 올라가는 그 바람 역시 자연의 바람이 아니라 “눈덮인 산의 눈부신 설레임”이다. “눈”과 “바람”을 통해 의인화한 자연(산)의 108번뇌가 일시에 용오름을 타면서 설레임으로 마무리되는 재해석만으로도 탁월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돌보적인 기법이다. 그야말로 50년여의 시업이 빚어낸 내공이자 적공이다. 서정의 울림과 견자의 미학이 빛나는 작품이다.
60년을 바라보는 우정으로 인해 내가 쓰는 글이 오히려 김학철 시인의 시집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운 서정의 깊이와 울림의 미학에 조그만 흠이라도 남길까봐 시인에 대한 여러 시인의 글과 개인적인 추억을 늘어놓다보니 어느새 글이 길어지고 말았다. 시인의 작품은 앞으로도 찬찬히 읽어볼 기회가 많으리라 생각해 그 중 몇 편만 골라 음미하다본즉, 이 또한 글이 길어진다. 아쉽더라도 이쯤에서 마무리를 하고 다음 기회를 기다려보자.
친구여, 그대의 새 시집『용오름』의 상재를 축하한다. 더불어 시와 함께 살아온 삶, 좋은 시를 오래도록 즐기는 은총이 우리에게 있기를 기도하자. 요즘 유행하는 노랫말처럼 “시쓰기에 딱 좋은 우리 나이” 70대가 아니더냐.(시인, 문학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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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마음속 山水와 영혼의 시편
서정의 울림과 바이앙의 미학
김학철 시인의 이번 시집은 잘 삭혀 진국이 된 장맛처럼 정갈하면서도 은은한 광택이 서린 투명한 영혼의 시편들이다. 소리 내어 읽으면 하나같이 마음이 그윽해지고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작품들이다.
시인의 작품을 읽다보면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왕유가 떠오른다. 왕유는 시도 유명하지만 그림에도 일가를 이루어 이른바 남종문인화의 창시자로 불리운다. 소동파는 왕유에 대해 시 속에 그림이 있고詩中有畵, 그림 속에 시가 있다畵中有詩고 찬탄한다. 남종화는 직업적인 화가와 달리 왕유를 비롯해 시인 학자들이 그린 그림이다. 그래서 문인화란 말이 덧붙는다. 자연 산수에 지은이의 뜻을 싣는 식이니, 흉중구학胸中丘壑, 즉 마음 가운데 자리 잡은 산수를 그리는 것이다.
60년을 바라보는 우정으로 인해 내가 쓰는 글이 오히려 김학철 시인의 시집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운 서정의 깊이와 울림의 미학에 조그만 흠이라도 남길까봐 시인에 대한 여러 시인의 글과 개인적인 추억을 늘어놓다보니 어느새 글이 길어지고 말았다.
친구여, 그대의 새 시집『용오름』의 상재를 축하한다. 더불어 시와 함께 살아온 삶, 좋은 시를 오래도록 즐기는 은총이 우리에게 있기를 기도하자. 요즘 유행하는 노랫말처럼 “시쓰기에 딱 좋은 우리 나이” 70대가 아니더냐.
― 박제천(시인, 문학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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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학철金學哲 시인∥
∙ 경희대학교 국문과 졸업
∙ 1970년『시법』에 작품발표 후 본격 활동
∙ 시집:『사향주머니』『햇빛 과원에서』『감정리에 별을 심다』『용오름』등
∙ 수상: 경희대학교 문화상, 한국문학비평가 협회상,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 강원도문화상 등.
∙ 춘천 성수여자고등학교장 역임
∙ <수향시>, <삼악시> 동인
∙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강원도문인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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