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표로 본 오늘의 역사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고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 피천득의 수필 <오월>에서
1) 1993 - 스리랑카 대통령 프레마다사(Premadasa, Ranasinghe, 1924~1993) 폭탄테러로 사망
라나싱게 프레마다사 스리랑카 대통령이 1993년 5월 1일 수도 콜롬보에서 발생한 폭단 테러로 사망했다. 프레마다사
대통령은 이날 집권 통일국민당(UNP)을 이끌고 노동절 퍼레이드에 참여해 행진하던 중 폭탄공격을 받아 사망했다.
이날 발생한 테러로 대통령의 개인경호원 등 30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60여명이 부상했다. 목격자들과 경찰은 폭탄을
몸에 부착한 자살 테러범이 대통령 일행에 접근하는 순간 폭발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대통령 피살사건으로 스리랑카 전역에 무기한 통금령이 선포됐고, 수도 콜롬보 일대에 군이 배치됐다. 68세인 프레마다사 대통령은 10년 간 총리를 역임한 뒤 1988년 12월 대통령에 당선, 1989년 대통령 취임 이후 끝없이 정치적 위협에
시달려왔다. 프레마다사 대통령은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데다 지칠 줄 모르는 추진력과 천성적으로 예리한 판단력의
소유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지난 1956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좌익계의 거물 인사와 싸워 패한 뒤 1977년 주니우스
자예와르데네 대통령 집권당시 실권이 없는 총리직을 맡아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대대로 가난에 찌든 지방주민들을 위한 1백만 가구의 주택 건설과 빈민들을 위한 구호정책의 실시로 주로 지방과 하류층을 중심으로 지지 기반을 쌓아왔다. 그는 대통령이 된 뒤 장관들에게 엄격한 규율을 적용,
자신의 사전허락 없이는 해외 여행까지 함부로 할 수 없도록 했으며 장관의 임명을 임의대로 행하는 등
다소 독선적인 통치로 많은 정적들을 만들어왔다.
2) 1960 - 미국 정찰기 U-2, 소련 상공에서 피격
소련 상공을 침범한 미국 정찰기 `U-2기`가 1960년 5월1일 오전 7시30분경, 소련 우랄산맥 상공 2만m에서 격추됐다.
소련 수상 흐루시초프가 오전5시에 U-2기의 영공침입을 보고받고 격추를 지시한 뒤였다. 소련은 그동안 U-2기의
영공침범에 대해 수차례 항의했지만 미국은 1956년 7월 이후 줄곧 소련 전역을 정찰하고서도 이 사실을 부인해 왔다.
소련은 내심 분통을 터뜨렸지만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데다 아직 요격기나 요격 미사일을 개발하지 못해
속으로만 끙끙앓고 있었다.
U-2기는 최대상승고도 2만7400m에 속도는 마하 0.7의 제원을 갖고 있는, 록히드사가 극비리에 개발한 첨단 첩보기다. 목표지 상공에서는 제트엔진을 정지시켜 소리를 내지않고도 정찰비행이 가능하고, 광선 반사를 막기 위해
기체 전체를 검은색으로 뒤덮어 `검은 스파이기`라고도 불렸다.
이날 격추된 U-2기는 파키스탄의 페샤와르를 발진해 아프가니스탄 국경을 넘어 소련 영토를 가로지른 후 노르웨이에
기착할 예정이었다. 조종사 게리 파워스는 기체가 피격되면 기체를 파괴해야 하는 원칙을 지키지 않고 낙하산으로
탈출했다. 자살용 독약도 사용하지 않고 체포돼 결국 미 CIA의 정찰기라는 사실을 자백하고 말았다. 미국은 이
사실도 모른 채 기상관측기가 실종됐다고 둘러대다가 흐루시초프가 증거를 들이대자 그제서야 재발방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5월17일 예정된 동서 4개국 정상회담이 연기되는 바람에 1년 전 흐루시초프가 방미때 제창한 `평화공존` 무드도 일거에 물거품이 됐다. 10년형을 선고받은 조종사는 1962년 2월 소련 스파이
루돌프 아벨과 독일 그리니케 다리에서 교환됐다.
3) 1961 - 카스트로, 쿠바 사회주의 공화국 선포
카스트로(Castro, Fidel, 1926/27~ )는 1959년 2월 바티스타정권을 무너뜨리고 공산독재정권을 세워 총리가 되었다.
총리에 취임한 후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한편,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자본을 접수하는 등 사회개혁을 진행하였으며,
그 해 9월 제1차 아바나선언을 발표하여 라틴아메리카 해방을 제창하였다.
1961년 4월 미국 정부의 지원하에 히론해안을 침공한 반혁명군을 격퇴하였으며,
5월 쿠바혁명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선언하고, 7월 쿠바사회주의혁명통일당을 결성, 제1서기에 취임하였다.
1) 2004 - ‘수퍼 EU’ 출범, 유럽통합으로 '피의 세기'는 끝나다
유럽연합(European Union, EU) 회원국이 25개국으로 확대되고 냉전의 잔재가 유럽 대륙에서 사라진 1일, 유럽 전역에서는
축제 분위기가 한껏 고조됐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EU 가입에 반대하는 시위도 잇따랐다.
이날 유럽 각국 지도자들은 EU 확대라는 역사적 순간을 기념하는 축사를 쏟아냈다. EU 순번제 의장국인 아일랜드의
버티 아헌 총리는 1일 “유럽은 이제 전쟁에서 평화로, 분열에서 통합으로, 독재와 억압에서 민주주의로 옮겨갔다”면서 “오늘은 우리에게 희망과 기회의 날”이라고 말했다. 로마노 프로디 EU 집행위원장은 “마침내 냉전으로 인한 분열이
종식되고, 우리는 완전히 통합된 유럽 속에 살게 됐다”고 축하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레흐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은 “나는 공산주의 치하에서 잃었던 모든 것을 되찾기 위해
조국 폴란드를 위해 투쟁해왔다”면서 “이제 나의 투쟁은 끝났고, 내 배는 항구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유럽 통일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로 꼽히는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는 국경지대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연설했다. 콜 전 총리는 “EU의 확대 통합만이 유럽에서 피의 세기를 마감하는 유일한 길”이라며 “이제 우리는
서로에게 전쟁을 거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축하했다.
25개국 정상들이 모여 공식 행사를 가진 아일랜드 더블린은 물론, 새로 가입한 10개 회원국에서는 다양한
축제가 벌어졌다.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는 지난 달 30일 밤 10만명의 시민이 모인 가운데 대규모 불꽃놀이를
벌이며 전야제 행사를 펼쳤고, 1일에도 수십만명의 주민들이 다뉴브강가에 모여 축제를 이어갔다.
리투아니아 방송국에서는 2004년 5월 1일 태어난 ‘수퍼 EU 베이비’들을 카메라에 담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반면 일부 국가에서는 반(反)EU 시위도 벌어졌다. 7년간 자유로운 인력 이동을 제한하는 등의 현 EU 정책에 반대하거나, EU 통합으로 인해 개별 국가의 주체성이 훼손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들이다.
공식 행사가 열린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는 2000여명의 시위대가 시위를 벌였다. 이날 밤늦게 시위대 중 수백명이
과격 시위를 벌이자, 경찰은 물대포를 쏘며 시위대를 진압하고 28명을 연행했다.
라트비아에서는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수만명의 시민들이 오는 9월부터 시행될 라트비아어 사용령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폴란드에서도 수천명의 바르샤바 시민들이 ‘EU 가입 반대’ ‘자유 폴란드 만세’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한 시위대원은 “EU 가입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줄 듯하지만, 실제 얻는 것은 높은 물가와
세금뿐”이라고 비판했다.
2) 1924 - 르완다의 초대 대통령 카이반다(Kayibanda, Grégoire) 출생
카이반다 [Kayibanda, Grégoire, 1924.5.1~1976.12.15]
르완다 정치가, 초대 대통령. 후투족 출신. 교원생활을 한 뒤 정계에 입문, 벨기에의 식민지주의와 투치족의 봉건적
지배로부터 후투족의 해방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1957년 <후투족선언>을 기초하고, 1959년에는 후투인민해방당을
창설, 1960년 선거에서 압승하여 임시정부의 총리가 되었고, 1962년 독립과 동시에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나
1973년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잃었다.
3) 1918 - 미국 뉴욕-워싱턴간 우편비행 시험운항 시작
미국의 우편 비행시대
유럽 여러나라에서 상업항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정부보조금까지 지원되고 있을 무렵, 오늘날 항공대국이 된
미국의 상황은 어떠했나? 라이트형제의 성공적인 비행기록이나 세계 최초의 정기편 항공사인 STA사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미국은 우편물 수송의 민항공 이용이라는 역사를 이룩한 나라이기도 하다.
미국 체신부는 이미 1916년경부터 우편물의 항공수송을 구상하고 있었다. 1918년 5월 1일부터는 육군항공대의
협조를 받아 연간 10만달러 규모의 예산으로 뉴욕-워싱턴 사이의 시험운항을 시작, 항공사(航空史)의 꽃으로까지
불리운 '우편 대비행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시험운항 노선을 단계적으로 늘려가던 체신부는 2년후인 1920년 9월 뉴욕을 출발하여 시카고 경유, 샌프란시스코 구간을 잇는 대륙횡단항공로를 개척했다. 당초에는 낮에만 비행하여 이 노선 운항에 3일이나 걸리는 형편이었지만
유럽 여러나라들과는 달리 우편수송의 기반을 닦는 일에 우선했다는 점에서 하나의 성과로 기록할 수 있다.
이무렵 특이한 여객편이 생겼는데, 1919년 7월부터 시행된 금주법(禁酒法)의 결과이다.
대도시간의 수송도 아니고 플로디다와 바하마의 내소, 쿠바의 수도 아바나 사이를 연결하는 노선이 개설된 것은,
미국의 플로리다와 인접한 영국령 바하마제도나 쿠바가 애주가들의 천국으로 각광을 받았기 때문이다. 기민한 상술을
발휘, '아에로'라는 회사에서 재빨리 커티스HS-2비행정을 듸웠는데, 선박보다 시간이 5분의 1정도 밖에
소요되지 않아 당일로 돌아올 수 있게 돼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끄는 등 히트를 쳤다.
'하이블 익스프레스'라는 별명까지 붙은 이 카리브해의 노선은 "한잔 하는데" 눈이 어두워진 애주가들로부터 편도운임을 75달러씩이나 받았다. 여기에 눈독을 들인 몇몇 경쟁사가 등장, 미국 동부의 여러 도시에서도 여객수송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때 이 시기의 미국상업항공은 영국,독일, 프랑스에 비해서 상당히 뒤떨어져 있었다.
그나마 비행기의 장래에 가장 먼저 관심을 갖고 있던 체신당국에 의해 북미대륙횡단의 우편비행이 30시간으로까지
단축되었다. 무선은 커녕 항공용 등대 하나도 없었던 시절에, 비행장과 이착륙 코스에 횃불을 비쳐 표지로 삼는 등의
원시적이지만 저돌적인 방식의 운항 덕분이었다. 우편비행에 사용된 비행기는 1-2인승의 단발복엽기로, 조종사들은
가죽 비행복에 고글처럼 생긴 안경을 쓴 멋쟁이 차림으로 조종석에 앉았고 비행기도
어깨 윗부분은 열려 있는 개방식 좌석이었다.
이때의 조종사들은, 물론 승객을 싣지 않아서였겠지만, 곡예비행에 가까운 무리한 비행을 해내고 자랑을 늘어놓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게다가 체신당국에서는 비행조건이나 기상에 대한 지식도 없이 무리한 운항을 종용하기도 했다. 조종사들과 알력도 심해, 1919년 7월에는 짙은 안개를 무릅쓰고 출발을 강요받은 조종사가 이를 거부하다가 해고를
당했는가 하면, 이에 항의하여 다른 조종사들이 파업을 하기도 했다.
이 파업은 또한 조종사 최초의 집단 파업으로 알려져 있다. 국영 우편비행은 약 9년동안 계속되었는데,
총비행거리 2천5백만킬로미터에 수송한 우편물도 3억통에 이르는 눈부신 실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무리한 운항 탓으로 이 기간중 2백회 정도의 추락사고가 있었고 8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
[상업항공의 발자취][printed '월간 항공' 1991. 1. ~ 12. 연재분 요약]
인터넷신문 온타임즈 1991년12월31일 21시10분
http://www.ontimes.kr/detail.php?number=896&thread=14r04
1) 1949 - 첫 전국 인구조사 실시 (남한인구 2,018만명)
제1회 전국인구조사가 1949년 5월 1일 전국적으로 실시됐다. 조사결과 총인구는 2천18만명이었다. 남자는 1천20만명, 여자는 9백98만명으로 성비는 102 대 100명이었다. 경북과 경남이 각각 320만, 313만명으로 가장 많았고 제주와
충북이 각각 25만명, 114만명으로 가장 적었다. 서울 인구는 144만명이었다. 그해 7월 유엔 세계경제보고에 의하면
세계인구는 23억 2천이었다. 인구조사에 즈음해 조선일보에는 `당당한 우리한국 정확한 인구로 자랑하자!`는
독려 포스터가 실려 눈길을 끌었다.
2) 1909 - 미국의 가수 스미스(Smith, Kate) 출생
스미스 [Smith, Kate, 1909.5.1~1986.6.17]
본명은 Kathryn Elizabeth Smith. 미국의 가수.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활동했으며 오랫동안 '라디오의 퍼스트 레이디'로 유명했다. 〈케이트 스미스의 노래 Kate Smith Sings〉(CBS, 1931~47)라는 프로그램의 스타였으며, 그녀의 주제가인 〈산 위로 달이 뜨면 When the Moon Comes over the Mountain〉(셰넌도어 산에 대한 찬가)은 여러 사람들에게 친숙했다(그녀는 이 곡의 가사를 쓰는 일도 도왔음). 아울러 1938년 휴전기념일에 어빙 벌린의 노래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 God Bless America〉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후 작곡가는 한동안 그녀에게 방송에서 그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독점적인 권리를 부여했다.
어린시절부터 노래를 불렀으며, 워싱턴 D. C.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부모는 그녀가 간호사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간호사 교육을 받아야 했다. 얼마 후 간호사가 되는 것을 포기했으며 17세 때 다시 음악으로 방향을 바꿔
뉴욕 시로 갔다. 1926년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출연자들이 잠깐 휴식을 하는 동안 관객들을 웃기는 뚱뚱한 여자 역할로
무대에 섰다. 1930년 아나운서 테드 콜린스의 파트너가 되었다. 그는 그녀의 라디오 쇼 〈케이트 스미스의 노래〉가
인기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며, 그결과 이 프로그램은 1930~1940년대초에 가장 인기 있는 쇼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다. 1938년에는 콜린스를 매니저로 삼아 정오 뉴스와 가십 프로그램 〈케이트 스미스의 뉴스 Kate Smith Speaks〉를 만들기도 했다. 1950~54년 자신의 텔리비전 쇼 〈케이트 스미스의 시간〉의 진행을 맡았으며,
〈케이트 스미스의 저녁시간〉(NBC, 1951~52)과 〈케이트 스미스 쇼〉CBS, 1960)에 출연했다. 이후 여러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초대손님으로 출연했다. 1982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으로부터 미국 자유훈장을 받았다.
3) 1999 - 유전성 유방암 발병 메커니즘 밝혀져
유전성 유방암은 두 유전자가 차례로 연쇄적인 변이를 일으키면서 발병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미국 국립보건연구원(NIH)의 수 샤오링 박사는 유전학 전문지 네이처 지네틱스 최신호에 발표한 연구보고서에서
유전성 유방암 유발 유전자로 알려진 BRCA-1이 변이되면 뒤이어 P53유전자 마저 변이를 일으키면서 종양의 성장이
가속화되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수 박사는 BRCA-1이 변이되면 P53 유전자가 변이를 일으킬 환경이 조성되며 이어 두 유전자가 모두 변이되면서
유방암이 시작되는 것으로 쥐 실험 결과 확인되었다고 밝혔다.
수 박사와 함께 연구에 참여한 로타르 헤니히하우젠 박사는 "P53은 문지기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P53이 무너지면 종양이 자라기 시작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 새로운 발견이 유전성 유방암에 관한 연구와 치료법 개발을 가속화시킬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그는 BRCA-1과 연관된 종양 형성에 P53유전자가 개입한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나타났지만 이외에 종양유전자의
활동을 촉발시키는 또 다른 변이유전자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전성 유방암과 난소암 환자의 90%에서 BRCA-1 변이유전자가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NIH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매년 약17만 5천명의 유방암 환자가 발생하고 4만 3천명이 사망하고 있다.
1999-05-01 www.medcity.com/blog/kisul
1) 2009 - 코레일, 전철에 '1회용 교통카드' 도입
다음달부터 수도권 전철에 종이승차권 대신 1회용 교통카드가 사용된다.
코레일은 5월 1일부터 서울.경기.인천 등 수도권 전철 전 노선에 재사용이 가능한 1회용 교통카드 승차권을
도입할 계획이라고 21일 밝혔다.
1회용 교통카드는 기존 종이승차권을 대체하는 새로운 승차권으로, 최대 10만번까지 재사용이 가능해 반영구적이다.
1회용 카드가 도입돼도 현재 승객의 80% 정도가 사용중인 기존 교통카드는 그대로 쓸수 있다.
1회용 교통카드 승차권은 500원 보증금제와 함께 운영된다. 1회용 카드는 전철역에 있는 ‘1회용 발매.교통카드
충전기’에서 목적지를 선택한 뒤 운임과 보증금 500원을 더 넣으면 구입할 수 있다.
목적지에서 내린 다음 ‘보증금 환급기’에 이용한 1회용 교통카드를 넣으면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
경로.장애인.국가유공자 등 무임승차 고객들은 1회용 발매.교통카드 충전기에 신분증을 올려놓아 신분을 확인한 뒤
목적지 선택없이 보증금 500원만 넣으면 우대용 1회용 교통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
보증금 환급기에 카드를 넣으면 마찬가지로 보증금을 돌려받게 된다.
서울시 등 지방자치단체에서 발급하는 우대용 교통카드를 이용하면 매번 1회용 교통카드를 발급받는 불편없이
무임승차가 가능하다.1회용 카드를 잃어버렸거나 부주의로 훼손한 경우에는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없다.
보증금은 재사용이 가능한 1회용 교통카드가 회수되지 않거나 훼손된 경우 제작 비용 등 자원낭비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라고 코레일은 설명했다.
코레일 관계자는 “1회용 교통카드 승차권이 도입되면 연간 5억장씩 발급되던 종이승차권 제작비용
35억원(장당 6.8원)을 절감할 수 있고 매표 무인화도 가능해 질 것으로 보여 여유 인력을 안내서비스와
부정승차 방지, 보안 등의 업무에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조선닷컴 2009.04.21 15:00
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4/21/2009042101153.html
(인천지하철 등 수도권 전철에서는 6월 12일부터
1회용 교통카드를 도입했습니다. ^.@)
2) 2007 - 아웅산 수지 여사의 석방운동
2007년 5월 3일, (DVB) 아웅산 수지 여사 석방운동은 NLD가 5월 1일부터 개시한 이래 버마 내의 유명한
민주인사들 다수의 지지를 얻고 있다.
88세대 학생그룹, 인권운동가 수수 느웨이 여사와 전국의 야당 정치가들을 포함하여 다양한 정치가 인권운동가들이
버마 내의 민주적 변화를 촉진시키는 일련의 평화적 프로그램들을 통하여 최근 진행된 석방운동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NLD 뉴 다곤 읍 지부 서기 코 아에 나잉 씨는 화요일 DVB에 이 정당의 당원들과 지지자들은 매주 월요일
전국 사원에서 아웅산 수지 여사의 석방을 위한 기도회를 가질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이 기도회는 그 악명 높은 2003년의 데패인 사건이 일어난 4주년이 되고 아웅산 수지 여사가 가장 최근 연금된 지
4년째가 되는 5월 30일 까지 한 달 간 계속될 것이다.
인권운동가이자 NLD 당원인 수 수 느웨이 씨도 이 기도회에 동참키로 결심하였다.
저는 아웅산 수지 아줌마 상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사원에서 기도할 것이며 ...다른 읍들의 (NLD) 당원들을
방문할 것입니다. 라고 수 수 느웨이 씨는 말했다.그러나 이 운동은 벌써부터 반대에 부딪혀 있다.
한 무리의 스님들이 운동가들을 마하 무니 사원에서 떠날 것을 명령하였다.
목격자들은 4인의 스님들이 기도회를 여는 자들에게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기 때문에 이 성스로운 장소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 것을 들었다고 밝혔다.
우리는 결코 문제를 일으키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평화롭게 기도를 드리려고 한 것뿐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매주 기도를 드리고 공덕을 나누는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라고 익명을 요구하는 만달레이의
한 활동가는 말했다. 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 http://www.jpic.org/%20-Google%20-Google%20-Google%20-Google%20-Google%20-Google%20-Google%20-Google -Google -Google
3) 2005 - 위성 DMB 상용서비스 개시
2005년 5월 1일, 한국은 일본의 뒤를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위성 DMB 서비스를 개시하였다.
지상파 DMB는 2005년 12월 1일 본방송을 개시하여, 현재 KBS, MBC, SBS, YTN, 한국 DMB, 유원미디어 등
6개 사업자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http://www.nia.or.kr/open_content/01_open/open05_it/it03_cont.jsp
1978 - 소련의 작곡가 하차투리안(Khachaturian, Aram) 사망
하차투리안(하탸투랸) [Khachaturian, Aram Ilich, 1903.6.6~1978.5.1]
소련의 작곡가.
피아노 협주곡(1936)과 충격적인 리듬의 〈칼춤 Sabre Dance〉이 들어 있는 발레 곡 〈가야네 Gayane〉(1942)가
대표작이다. 모스크바의 그네시니 음악사범학교와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951년 이후 이 두 학교의 교수로 재직했다. 젊은시절 당대의 서양음악, 특히 모리스 라벨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교향곡 1번(1935)과 이어지는 작품들에서는 이러한 영향에서 벗어나 민족음악적 유산에 눈을 돌려 아르메니아 민속음악, 러시아의 그루지야 민요, 터키·아제르바이잔 등의 민속음악 전통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교향곡 2번(1943)은 볼셰비키
혁명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작곡되었다. 다른 작품들로는 교향 모음곡 〈가면 무도회 Masquerade〉(1944, 미하일
레르몬토프의 희곡에 대한 부수음악), 발레 곡 〈행복 Happiness〉(1939), 〈스파르타쿠스 Spartak〉(1953),
교향곡 3번, 바이올린 협주곡(1940), 첼로 협주곡(1946)을 비롯해 많은 소품이 있다. 2차례 레닌상을 받았고, 아르메니아 공화국 국가도 작곡했고 영화음악과 극 부수음악도 작곡했다. 1948년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와
함께 부르주아지적 경향을 띤 음악을 작곡했다는 이유로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의해 기소되었고 공직에서 물러났다.
1953년 스탈린이 죽자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기소에 이의를 제기했다. 1954년 소련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으며,
1959년에 레닌상을 받았다. 그의 가족은 소련의 문화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아내 니나 마카로바와 조카 카렌 하차투리안도 작곡가이다.
1904 - 체코의 작곡가 드보르자크(Dvořák, Antonín) 사망
드보르자크 [Dvořák, Antonin (Leopold), 1841.9.8~1904.5.1]
체코의 작곡가.
프라하 교외 넬라호제베스 출생. 17세 때 프라하의 오르간학교에 들어가 2년간 공부하고 졸업 후 레스토랑·호텔 등에서 비올라를 켜오다가 1862년 프라하에 가설극장(假設劇場:훗날의 국민극장)이 신설되자 그곳 비올라 연주자가 되었다.
1866년 그곳 지휘자로 취임한 B.스메타나의 영향을 받아, 당시 고조된 민족운동의 와중에서 음악가로서 체코의
민족문화를 일으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게 되었다. 1872년 애국적인 시 《백산(白山)의 후계자들》에 의한
합창 찬가가 호평을 받음으로써 인정을 받고, 1874년에는 성아달베르트교회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이해부터 오스트리아 정부의 장학금을 얻기 위해 매년 작품을 제출하던 중 1877년 심사원이던 J.브람스에게 인정되어
베를린의 출판사에서 작품이 출판되면서 유명해졌다.
이때부터 여러 연주자가 그의 실내악이나 관현악곡을 베를린·런던에서도 연주하게 되어, 그의 명성은 국내외로 퍼졌으며 1878년부터 지휘를 시작하여 1884년 이후 영국을 9회나 방문하여 자작곡을 지휘, 대환영을 받았다.
1891년 프라하음악원 교수가 되고, 같은 해 영국의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892년에는 뉴욕의 내셔널음악원 원장으로 초빙되어 도미했고, 다음해 미국에서의 신선한 인상을 소재로 교향곡 9번 《신세계 From the New World》를 작곡했다. 1895년 4월 프라하로 돌아온 후로는 음악원의 작곡 교수직과 창작에
전념하여, 1901년 프라하음악원 원장이 되고, 오스트리아 상원의원에 임명되는 등 음악가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으나, 1904년 신장병으로 사망하였다.드보르자크는 2년간 오르간학교에서 공부한 이외에는 거의 독학으로 베토벤, 슈베르트를 연구하였다. 한때 그는 바그너, 리스트에도 열중하였으나 자연스레 물이 흐르는 듯한 음악 속에 체코민족의 애환을 담은 독자적인 작풍(作風)을 이루었다. 표제음악 전성기에 절대음악(絶對音樂)을 많이 작곡한 그는 브람스의 영향을 받았으나, 미국에서 귀국한 다음에는 교향시와 오페라 이외의 것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미국 체류중에는 니그로나 아메리칸 인디언 음악에 흥미를 느껴 그 요소를 곁들인 작품을 썼으며, 이런 작품이
그의 대표작처럼 되었으나, 미국 체류시대 이외의 것도 재인식되었다. 주요작품으로 오페라 《루살카》 외 6, 교향곡 9, 교향시 5, 교향서곡 5, 바이올린협주곡 ·첼로협주곡 각 1, 현악4중주곡 8, 피아노3중주곡 3편 등이 있다.
1948 - 미소라 히바리 가수 데뷔
일본 가요계의 여왕으로 불려지던 엔카 가수 미소라 히바리(美空 ひばり, 1937∼1989)는 1937년 5월 29일 요코하마시(橫濱市) 에서 출생하여 9세의 어린 나이에 연예활동을 시작, 11세부터 배우로 본격 활동을 하게 된다.
본명은 카토 카즈에(加藤和枝), 학력은 세이카가가쿠잉고교(精華學園高校) 출신이라는데 확실치 않다고 하는가 하면,
아버지 카토 소키치(加藤增吉)가 한국인이라는 유력한 설이 있다. 가요는 12세 때에 부른 <가빠 부기우기(河童ブギウギ)>가 최초이며, 대표곡으로는 <야와라(柔)>, <미다레가미(みだれ髮)> 등이 있다. 이 외에도 그녀가 27세 되던 해부터 TBS-TV가 그녀의 이름을 딴 <미소라 히바리 극장>이란 프로도 만들었으며, NHK 홍백가요제전에 16년 계속 출연한
기록도 갖고 있다.1987년(50세) 4월 양다리 대퇴골 골절 및 만성 간염으로 입원, 8월에 퇴원, 10월에 연예계 복귀,
1988년 4월 도쿄돔에서 성공적인 재기콘서트를 가졌다. 이 때의 관람객이 5만명이었다고 한다.
1989년 6월 29일 간질성 폐렴으로 죽기 3개월 전까지도 연예활동을 한 그녀는 죽은 후(7월)에 레코드대상,
특별영예가수상과 , 여성 최초로 '국민영예상'을 수상하는 52년 생애에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미소라 히바리, 그녀의 죽음을 일본의 모든 방송국은 임시뉴스로 전국 방방곡곡에 알렸고, 마치 국장(國葬)을 지내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일본이 존속하는 한 영원히 일본인들의 마음 속에 살아있는 그런 존재로 남아있다.
1946 -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설립
1945년 12월 5일 장교 양성을 위하여 서울 서대문에 군사영어학교를 설치(46년 2월 27일 현재의 육군사관학교
자리로 이전)하고 1946년 4월 30일 최초로 110명이 장교로 배출되었다. 이때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형근(李亨根)
채병덕(蔡秉德), 정일권(丁一權), 최경록(崔慶祿) 등이 졸업하였다. 같은 해 5월 1일에는 태릉에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를 설립하고 제1기 사관후보생 50명을 입교시켜 장교 양성에 착수하였다.
1941 - 오선 웰스의 영화 <시민 케인> 개봉
[어제의 오늘]1941년 오선 웰스의 영화 <시민 케인> 개봉ㆍ영화사에 획을 그은 작품
역사상 최고의 영화는 무엇일까.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권위 있는 리스트들 중 상당수가 오선 웰스가 주연·감독한 1941년작 <시민 케인>을 1위에 놓는다.
<시민 케인>은 한 기자의 시점에서 언론 재벌 찰스 포스터 케인의 삶을 재구성하는 형식으로 구성됐다. 케인은 ‘로즈버드’라는 말을 남긴 채 숨을 거둔다. 가난하지만 순진무구한 아이였던 케인은 예기치 못한 유산을 상속받는다.
야심만만한 청년으로 자라난 케인은 신문사업에 발을 들여놓은 뒤 성공을 거두지만 결혼생활에는 실패한다. 정계에도
입문했으나 빛을 보지 못한 케인은 자신의 대저택에 틀어박혀 쓸쓸히 말년을 보내다 세상을 뜬다.
기자는 ‘로즈버드’의 의미를 끝내 알아내지 못하지만, 관객은 어린 시절 케인이 즐겨 타던
썰매 이름이 로즈버드란 사실을 마지막 장면에서 본다.
영화는 당대의 언론 재벌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삶에 기반을 둔 것으로 알려졌다. 허스트는 <시민 케인>의 개봉을
막기 위해 압력을 가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결국 자신이 소유한 수십개 언론사에서 이 영화를 언급조차 하지
못하게 했다. 이 때문인지 <시민 케인>은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고, 오선 웰스는 이후 다시는 <시민 케인>같이
많은 예산을 들인 영화를 만들 수 없었다.
<시민 케인>은 여러 가지 점에서 영화사에 혁신적인 작품이다. 이전까지 영화는 화면의 특정 부분에만 초점을 맞췄지만, <시민 케인>은 화면의 전경, 중경, 후경을 모두 명확히 보여주는 ‘딥 포커스’를 실현했다. 딥 포커스 덕에 영화는
다층적인 의미를 지니는 ‘텍스트’가 됐다. 또한 <시민 케인>은 영화에서 시간의 흐름을 표현하는 방식,
음악·음향 사용 등의 면에서 모두 과거의 영화와 단절하는 창의성을 보여줬다.
오선 웰스가 데뷔작 <시민 케인>을 내놓았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25세였다. 이 조숙한 천재는 <시민 케인>
이전에도 ‘사고’를 친 적이 있다. 한때 라디오 드라마 연출가로 일했던 오선 웰스는 HG 웰스의 <우주 전쟁>을 연출했다. 라디오 버전 <우주 전쟁>이 워낙 실감나게 꾸며진 나머지, 청취자들은 실제 화성인이
지구를 침공한 줄 알고 놀라 거리로 뛰쳐나오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백승찬기자 - 경향신문 2009-04-30 17:46:3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0904301746365&code=100100&s_code=ap005
1932 - 작곡가, 테너색소폰 연주자 이봉조(李鳳祚, 1932∼1987) 출생
경상남도 진주(晉州) 출생. 한양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였다. 1963년 《밤안개》로 가요계에 데뷔한 이후
《맨발의 청춘》 《떠날 때는 말없이》 등으로 인기를 얻었다. 1971년 도쿄[東京(동경)]세계가요제에서 《안개》로
입상했고, 그 뒤 여러 세계가요제에서 《너》 《무인도》 《꽃밭에서》 등이 입상, 국내 작곡가 중 가장
많은 국제가요제 입상경력을 쌓았다. 트롯이 주류이던 1960년대 가요계에서 재즈풍 노래를 개척한
작곡가로 평가받는다. 1972년 대한민국 예술상을 받았다.
1923 - 소파 방정환 '어린이날' 제정
'어린이날'은 3·1운동 이후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 1899~1931)을 중심으로 어린이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고자
하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해 1923년 5월 1일, 색동회를 중심으로 방정환 외 8명이 어린이날을 공포하고
기념행사를 치름으로써 비로소 어린이날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927년부터 5월 첫째 일요일로 날짜를 바꾸어 계속 행사를 치르다가 1939년 일제의 억압으로 중단된 뒤
1946년 다시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였다. 1957년 대한민국 어린이헌장을 선포하고, 1970년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5037호)에 따라 공휴일로 정해진 이래 오늘에 이른다.
1903 - 한국의 민속학자 임석재(任晳宰) 출생
1900 - 일본 도쿄에 전차 운전 개시
1890 - 제1회 국제메이데이 행진 (제1회 세계 노동절)
1886 - 미국 시카코 노동자들의 8시간 노동 쟁취 투쟁
1881 - 프랑스의 가톨릭 신학자, 철학자 테야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 Pierre) 출생
1873 - 영국의 선교사, 남아프리카 탐험가 리빙스턴(Livingstone, David) 사망
1852 - 에스파냐의 신경해부조직 학자 라몬 이 카할(Ramón y Cajal, Santiago) 출생
1851 - 세계 최초의 런던대박람회 개최
1844 - 미국의 모스, 볼티모어-워싱턴간 전신 타전 성공
1839 - 프랑스의 화학자, 실업가 샤르도네(Chardonnet, Hilaire Bernigaud) 출생
1830 - 플랑드르의 사제, 시인 헤젤레(Guido Gezelle) 출생
1829 - 브라질의 언론인, 소설가, 극작가 알렌카르(Alencar, Jose de) 출생
1769 - 영국의 군인, 정치가 웰링턴(Wellington, Arthur Wellesley) 출생
1764 - 영국 태생의 건축가 러트로브(Latrobe, Benjamin) 출생
1733 - 일본 에도시대의 화가 마루야마 오코[圓山應擧] 출생
1592 - 독일의 예수회 선교사, 천문학자 샬 폰 벨(Schall von Bell, Adam) 출생
첫댓글 감사드려요 .
잘 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