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 정애가 시인이며 수필가에다 소설가라며
언니에게 계속 자랑했다.
“방 안에 들어와 봐.”
정애가 영애를 방 안으로 이끌었다. 뒷벽에 선반을 지른 위에 당선증과 트로피를
진열해 놓은 걸 일일이 손을 짚어가며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이것이 해동 신춘문예에 시 당선 트로피그만. 이것은 남동신문에 소설 당선 트로피고…….”
당선증과 트로피들을 일일이 손을 짚어가며 언니에게 자랑스럽게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나 영애 눈을 자극하는 건 따로 있었다.
사모관대를 쓰고 용상에 앉아 있는 옆에 족두리하고 연지곤지를 얼굴에 찍고 정애가
서 있는 액자에 자꾸만 시선이 갔지만 ‘정애야 너희가 결혼식을 했구나!’라고 물어보지는 못했다.
“앉은뱅이책상에다 다리를 길게 해 높게 만들었구나.”
“앉은뱅이책상은 방바닥에 앙저서 글을 써야 하지 않는가? 그래서 저이가 생각해
낸 것이 선 책상을 만든 것이었어. 그러믄 재활에도 도움이 된다니까.”
책상 위 책꽂이 위에는 수필과 소설을 쓴 원고지가 한 뼘 높이만큼 쌓여 있었다.
춘원 이광수, 남석 안수길 소설가 작품집과 김소월 시집이 영애의 눈에 띄었다.
“정애야 너는 대단한 사람허고 산다야!”
“언니야, 그런다고 해서 살림에 도움이 되는 건 하나도 없어 벌써 10년도 넘었다니까.
그런디 원고지 값 들어가지, 잉크값도 솔찬이 들어간다니까.”
“정애야 그런 소리 하지 말아라. 요사이 최고 존경받는 사람은 문학 허는 사람이다고
안 그래쌌더냐? 운이 좋아서 책 한 권 내 가꼬 대박이 터질까 어찌 아냐 말이다.”
“에계계, 언제? 내 친구들이 뭐라고 헌 줄 알아? 소설을 써 가꼬 신춘문예 당선되면
큰돈이 나온 줄 안다니까, 나도 가끔썩 아그들 즈그 아부지가 10년이 넘게 글을 쓰고
있어도 달라지지 않으니까 밥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고, 짜증을 내고 싶더란 말이시.”
시를 쓰고 소설을 쓰는 문학 개념을 정애는 돈과 연관시켰다.
신춘문예에 당선돼도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하며 밖으로 나오는 정애를 따라
영애도 밖으로 나왔다. 방문 옆, 벽을 기대어 허명도가 마루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남희 아부지는 참말로 대단하구먼요, 학교 다닐 때부터 문학도였나요?”
“아니고마라. 학교 다닐 때는 데모에 빠져 뿌렀그마라.”
“데모라니요?”
“우리는 나주 통학생들이 시작헝 거보단 여그 정명 여학교랑 목포상고에서 더 일찍
항일 학생운동을 시작했고마라.”
“학생운동을 어찌케 했는디요?”
“나는 국민학교 다님서부턴 우리나라 친구들허고는 싸우지 않았지만, 일본 놈 학생만 보면
왜 그러케 미웠는지 모른다니까요. 어렸을 때는 일본 학생들을 두들겨 패도 크게 문제는
안 되등만 중학교 올라감서는 일본 놈 학생을 뚜드레 패니깐 문제가 복잡해지더라니까요.”
“호호호 공부에는 취미가 없는 문제 학생이었나 바요.”
“학교 다닐 때는 쌈은 내가 1등이었어요, 손은 안으로 굽는다고 안 허등가요? 친구가
일본 놈허고 싸우다가 밑으로 깔리면 말기는 척험서 밑에 깔린 친구를 위로 올라오게 하고 그랬고만요.”
명도에게 선천적으로 장애가 있는 게 아님을 알게 되었다.
말주변도 좋았고 체격도 좋았으며 얼굴도 영애가 보기에도 남자답게 생긴 미남이었다.
“일본어 시간에 나는 공부를 아예 하지를 않아 뿌렀그마라.”
영애 자신도 남편 김영규와 학생운동 하다 퇴학당했던 터라, 반일 정신이 작용해 학창
시절에 공부를 등한히 했다는 얘기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때 학생들이 거리에 뿌리는 전단 글을 많이 썼고마라. 여객선터미널이랑 목포역이랑
수산시장 겉은 디를 다니면서 우리 학교 친구들이 학생 아닌 것처럼 변장해 가꼬 전단을
뿌리기도 하고 사람들한테 많이 나눠 주었다니까요.”
“전단을 일일이 손으로 썼나요?”
“내가 쓴 전단 글을 친구들 한 명당 100장썩, 200장썩, 맡아 쓰다 보니 그거이 여간
심이 드는 것이 아니더라니까요.”
“전단에 내용은 뭐라고 어찌케 썼는가요?”
“첫머리를 아주 멋지게 그럴듯하게 썼다니까요. ‘친애하는 애국애족 목포시민 여러분
우리가 일본 놈들에게 나라를 뺏기고 주권을 잃은 지가 어언 20년이 되었습니다.’ 이러케
서두를 잡았고만요. 나주역에서 광주로 통학하는 조선학생과 일본 학생허고 패싸움으로
일어난 학생운동도 신문들이 왜곡 보도를 한 걸 우리가 전단을 뿌려서 시민들한테 바로 알렸다니까요.”
그때 학생운동 했던 영웅담을 신나게 얘기하던 허명도 시인이 벽을 짚어가며 힘들게
일어나려 하는 걸 본 정애가 물었다.
“남희 아부지 머덜라고 일어나려고 허요?”
“그때 내가 썼던 전단단지들을 모아 논 거 좀 가져올까?”
책상 위에 책꽂이에 꽂혀 있는 노란 문건철은 정애도 보았던 것이라 손쉽게 빼 들고 와
남편에게 내밀었다.
당시 자신이 썼던 전단들이라면서 허명도는 의기양양하게 한 장을 빼내 영애에게 건넸다.
“요것이 나주에서 시작된 광주학생운동의 진실을 목포시민들한테 바르게 알렸던 전단이고마라.”
영애가 받아든 전단은 1929년 11월 3일 음력으로는 10월 3일 개천절 날 횃불이 타올랐던
광주학생운동을 왜곡해 보도한 신문들을 비판하며 진실을 알리는 전단이었다.
손으로 쓴 것이 아니라 등사기로 복사를 한 것이었다. 영애가 작은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서두 중략……. 박기옥 학우에게 댕기 머리를 잡아당기며 성희롱 수작을 부리는 것에
분개한 조선 통학생 박춘재가 이를 말리자 왜놈, 광주 중학생 놈들이 몰려들어 조선인이라
비하하며 그들이 먼저 싸움을 걸어왔던 것이었습니다……. 중략, 광주 시내에서 광주 고등
보통학생에게 먼저 시비를 걸고 목에 칼로 상처를 입힌 것도 광주중학교 학생이
저지른 것이며 양 학교가 패싸움으로 번졌던 것이 진실입니다.
그러나 광주일보는 완전히 거꾸로 왜곡 보도하고 동아일보도 마찬가지로 조선 학생들이
잘못한 것이라고 편파 보도한 것이 원인이 되어 광주와 이곳 목포의 정명 여학교와 목포
상고를 비롯한 모든 학교의 학생들이 나섰고 애국시민들이 나섰던 항일
학생 독립운동이었습니다. 중략.’
“참말로 훌륭한 일을 했고 마라. 그런디 전단이 손으로 쓴 것이 아니고 등사기에 등사했고만요.”
“그때 우리 학교 공지문은 다 소사 아저씨가 소사관사에서 등사했거든요. 아저씨들이
퇴근해 뿔고 나면 밤에 했다니까요. 참말로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용감했다니까요.
시방 같으믄 겁나서 못했을 것이 그만이라. 그런디 꼬리가 길면 잡히더라니까요.”
“등사하다가 들켰나 보그만요?”
“그거이 아니고 마라. 목포역에 전단을 뿌리러 갔던 두 친구가 경찰에 잡혀 뿌럿당게요.”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허명도 시인이 했던 말은 그동안 전단을 용감하게 뿌려대고
잠복해 무사했던 친구들이 경찰에 잡혀버렸다는 말이다.
경찰에 끌려간 학생들이 모진 고문을 가하자 전단 뿌리는 조와 전단 만들고 등사하는
조와 그리고 문건을 작성한 허명도 시인까지 모조리 경찰에 잡히고 말았다고 말했다.
“매에는 장사 없다고 안 합디까? 그 말이 맞더라니까요. 첨에 우리가 약속헐 때는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다른 친구 이름은 불지 말자고 철통겉이 약속했었는데,
목포역에서 잡힌 두 친구가 싹쓸이로 다 불어 뿡게 나까지 잡혀간 거 아니요. 그래서
그 친구들을 엄청나게 원망했다니까요. 막상 내가 친일 경찰한테 고문당해 보고 나서
그 친구들 심정을 알았다니까요. 고문 경찰이 왜놈이 아니고 우리 조선 사람이등마요,
그러케롬 모질고 인정사정없어 뿝디다. 뼈다귀 관절이란 관절은 모조리 결딴이 난 줄
알았다니까요.
나 보고 윗선이 누구냐고 묻는 거여요. 그런디 나 위에는 누가 있겠어요? 아무도
없는 게 맞는데 말이요. 만약에 우에 일을 시킨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을 불었으면
내가 병신이 되도록 고문도 많이 받지 않고, 이러케 앉은뱅이가 안 되었을까 모른다니까요.
누구라고 불 사람이 있으면 불어 뿔믄 고문을 안 당할 것인디, 참말로 미치고
환장할 것만 같습디다. 그래서 나는 그때 고문 땀세 일본 놈보다는 이러케 병신이 돼 뿔게
만든 친일했던 경찰이 철천지원수가 돼 뿌럿담 말입니다.”
영산댁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14연대 좌익 군에게 부역했다는 혐의로 모진 고문을 일주일 동안 받으면서 초주검이 되었다가
지금은 순천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는 남편 영규가 생각났다.
여자가 우는 모습을 보면 남자는 맘이 약해진다고 했다.
처형의 예쁜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자 울컥해진 나머지 허명도 시인이 얘기를 잊지 못했다.
울컥한다거나 스트레스를 받는다든지 슬플 때, 그리고 분위기를 변환하고 싶을 때나 무슨 일이
맘대로 잘 풀리지 않을 때 남자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무는 습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