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에 관한 시모음 22)
벚꽃길 /김지우
사랑하는 이여
내가 그립거들랑
벚꽃이 피어있는 그 길에서
한 걸음씩만
내게로 다가오소서
꽃잎이 흩날릴 때마다
지난사랑에 대한
미움도 아픔도
사라지나니
애증을 두른 세월
걷어버리고
비워지거든
내 마음속으로 다시 오소서
수줍은 벚꽃이 만개해 있으니.
시월에 핀 벚꽃 /김희경
상강 지난 이기대 산자락에
벚꽃 피었다
절기의 경계진 나의 눈에
섣부름 꽃 피었다
이미 몸을 던진 낙엽과
아직 견디는 단풍잎 사이
시공의 바지랑대 넘겨뜨리고
한 생을 꿋꿋이 그곳에 세웠다
그의 눈엔 보편과 고정관념은 없었다
나이도 계절도 없었다
절망 앞에 더 열망하였을 것이다
몰입하여 내미는 저 당당함
간절함일 것이다
유난히 많았던 가을 태풍도
해풍의 모진 바람도
흉흉한 온난화란 난제도
그의 뜰을 꺾지 못했다
비워낸 자리였다
인내한 자리였다
동면을 시작하는 깊어지는 가을
가눈 슬픔에 뿌리내려 승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 선
희미해진 내 눈을 바라본 것이다
섣부름이란 추를 들고
나는 누구를 지금 저울질하는가
그는 의연히 피었을 뿐
꽃 피는 일이 시절이 있던가
희망을 놓지 않고
절망 뒤에 숨지 않고
척박을 탓하지 않고
볕 한 줌의 감사를 살며
묵묵한 인내로 피워낸 생
어떤 염두 없이 무량이 핀 꽃이다
언제 나는 저처럼 간절해 보았는가
언제 나는 나를 피우려 열망하였던가
아...
퇴색의 눈에 가득한
무수한 저울을 던지지 않는 한
나는 아직 멀었다
벚꽃 /권복례
쌍용역에서 서울 가는 지하철 2호선을 탔다
노량진역에서 내려
9호선으로 환승하고
국회의사당역에서 내렸다
윤중로로 가는 길에는
봄햇살이 내리고 있다
풀잎들은 나폴거리고
꽃잎들은 사람들을 마중하고 있다
국회의사당을 지나
윤중로길 벚꽃을 지나 한강시민공원에 앉아
한강 그 너머 서강대교를 바라보다가
되돌아가는 길에는
벚꽃이 지고 있다
세월이 흘러가고 있다
눈꽃송이 벚꽃 2 /김지숙
해님과 데이트 할 때에는
핑크빛 원피스요
달님과 윙크를 할 때에는
금빛가루의 저고리요
콘크리트 꽃잎은
명주실크 이불을 만들어
님 추우실까 봐
살포시 덮어주고 싶습니다
강물 위에 꽃잎은
작은 목선을 띄우며
님과 나란히
생의 긴 행로
노를 젖고 싶습니다
벚꽃 /서은진
수두룩한 새월을 보내몬서
여짜까지 다가온 봄의 알림이
차운 겨울
낭구 덩거리버터 차게 차게 피어 냇서이
이럼하여 벚꽃
마침 암향가치 여어저어서 새리 품어내니
어디다 매음을 둘끼고
내사 마 모리갯다
지나가는 바람 속이거나
봄비 한 줄기에
잎사구 덜은 천지로 뜰어지니
온 질가에 눈온거 맨꼬로
꽃 구름 하니아도 그만 주저 안잣다
벚 꽃 /김일선
꽃샘을 하면
봄은 이미 반쯤 지나 버린다
꽃샘 속에서
웅크리고 참으며 꽃망울을 여물다
겨울의 길고 가는 꼬리가
멋 적게 사라질 무렵이면
모든 꽃봉오리가 활짝 웃는다
피자마자 떨어지기 바쁜 목련의
피고 지는 처량한 자태를 보면서
이레 동안 한꺼번에
아주 많은 꽃을 피우고
오래 되지 않아 떨어질 때면
후드득 꽃비를 내리는 그 장관은
오히려 비장하기 까지 한다
꽃이 지고 잎이 자라면
벌써 7월의 버찌를 꿈꾸리라.
벚꽃, 아프다 /이규리
봄이라는 조산원
애비가 누군지도 모른 채
느닺없이 임신하고 곧이어 분만했네
조산인가 봐
병원 복도 같은 군산 가도
간호사들이 뛰어가고 달려오고
종일 구급차가 지나가네
들어선 애도 떨어지겠네
숨은 애비들은 다 누구야
특수 조명 탓인가
마주치는 얼굴들은 다 흰죽 같아
흐드러진 꽃아래 이곳저곳 맘 솔기가 툭툭 터지네
옆사람
손을 잡고 풀쩍풀쩍 뛰었는데
끌어안고 어디 물컹 닿았는데
나중에 보니 모르는 사람이네
살아 반짝하는 날 며칠이냐고
내일은 내일 걱정하자고
간덩이까지 훤해지는 날
추억은 이렇게 남기는거야
손바닥만한 디카속으로
카메라폰 속으로
꽃인 듯 사람인 듯 쭉쭉 빨아들이며
돌아갈 일 걱정도 않고
조산아들 종일 햇볕에 뉘어놓으며.
벚꽃 나뭇잎 /주선옥
화려했던 시절의 꿈을
한 때라 접어 두기에는
가슴 저리는 미련이기에
심중에 깊이 품어 진주알처럼
방울방울 고이 맺어 두었나보다
세상 한 바퀴 돌아온 바람에
그저 뚝 떼어내기에는
서글픈 사랑이었나
색색이 고운 잎 땅으로 흩뿌려
스며드는 아름다운 눈물인 것을
벚꽃이 감기 들겠네 /김영월
비가 그친 저녁
더 어두워지는 하늘가
이 쌀쌀한 바람에
여린 꽃망울들이 어쩌지 못하고
그만 감기 들겠네
그 겨울 지나, 겨우 꽃눈이 트이고
가슴 설레는데
아무도 보는 이 없고
꽃샘추위만 달려드네
우리가 꿈꾸던 세상은
이게 아니었네
좀더 따스하고 다정하길 바랬네
윤중로 벚꽃 잎은 바람에 휘날려
여의도 샛강으로 떨어지고
공공근로자 아주머니의
좁은 어깨 위에 몸을 눕히네
벚나무야 /하영순
봄날 꽃도 예쁘게 피더니
빨갛게 물든 단풍이
참 곱구나
겨울 오고 눈 내리면
고운 옷 벗어 놓고
하얀 눈꽃으로 다시 피겠지
여름철 오가는 이
태양을 가려 주던 너
많은 이에게 사랑받는 벚나무
한 잎 한 잎 떨어지는
낙엽을 밟으며
나도 너 고운 마음 닮고 싶구나
벚나무야
벚꽃놀이 /권대웅
저 발칙한 것들
삼삼오오 짝을 지어
놀러 나온 여중생들이 공중에
불쑥 검지 손가락을 내보이고 있다
봄바람에 개 다리를 떨며
슬쩍 걷어올린 다리 치마 속으로
언뜻 보이는 분홍 팬티
그거 보러 그까짓 거 보러
어둑어둑한 공원길
연애 나온 아줌마 아저씨
달빛 아래 화장하고 나와 히히덕 거리는
저 딸년들 분 냄새에
가슴 뭉클 달아오르네
벚꽃이 함부로 지는 것도 /박동진
지난주, 겨울잠에서 막 깨어난 곰이
검불 묻은 등 마구 비벼대자
벚나무 울퉁불퉁한 등걸에서 손끝에 앵길 것 같은
작은 이슬이 돋아 웅성웅성 소란스럽더니
허, 참 허망하게 막 터트려 삽시간에 온 천지 다 적시었네
온갖 아양 앙탈로 벌이든 사람이든 다 녹여내고
저 또한 허망하게 녹아내리네
피어남을 톡톡 튀기는 수줍은 물방울로 시작하더니
돌연히 동네 유부남 좋아해 실성한 처녀애처럼
마구 풀어 헤치던 것이, 정신 사납던 것이
애 끓는 애미 마음 헤아린 듯 분홍 연정 다 떨치고
배꽃을 닮네, 이놈 저놈 다 붙어먹던 암캐처럼
태생부터 오만 추파 던지던 벚꽃이
일주일 쌈빡하게 간통하다가
뱃속에 소중한 씨 배더니
하얀 면사포 쓴 신부처럼 다소곳 감추고 있네
그래도 저 환장할 어지러운 춤에 나도
한때 핑크빛 설렘 담갔었네
진남교 벚꽃 /송찬호
경북 문경시 진남교반에는
문을 연 지 백 년이 넘는다는
아주 오래된 벚꽃 은행이 있는데요
해마다 사월이면 나도 그 벚꽃 은행을 찾는데요
갈 때마다 꽃 사태 사람 사태
천지간 온통 희부옇게
벚꽃 예금 인출 사태가 벌어지는데요
그렇게 꽃을 퍼내다 그 늙다리 나무
은행 파산하는 거 아닌지 몰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올해는 벚꽃철 맨 끄트머리에 찾아갔는데요
늦은 오후, 풀풀 날리는 꽃그늘 아래
한 평짜리 평상 휴게실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빗자루 경비가 들려주는 말,
오늘은 내 앞으로 딱 두 사람
고모산 흰 사슴과
서울 사는 비단 구두 장수가 다녀갔다는데요
하얀 포말의 벚꽃이여 /이혜진
작은 꽃들이
머~언 들에서 부르는 듯
손 시린 나목끝에 그 색채따라
꽃이 핀다
봄을 풀어놓고
바람이 사랑을 잉태한 것인가
하얀 포말의 봄
벚꽃이여!
그대는 봄의 눈송이 처럼
내 삶의 쉼표가 되는구나
흙의 향기가 되어
그리움에 울음 삼키며
그리워 한다고 말 하지 않겠네
다만 사랑 했노라고
어두운 융단을
초록으로 물들이는,
가을 날, 덜 익은 풋 사과처럼
떫은 나 이던가
벚꽃이 흩날릴 무렵 /김해정
꽃들이 잠들었어요
비가 오면 눈을 뜰까
꽃망울에 비밀스러운 설렘
가만히 던져 보아요
삶이 힘들어서일까요
꽃눈이 트이고 봄날은 곁에 있는데
지나가는 인적 소리조차
흐린 하늘처럼 보이질 않아요
잠깐의 눈빛에
잠깐의 행복에
쉼표를 찍는 꽃잎 사이로
백옥 같은 기쁨 피어납니다
홀연히 나풀거릴 듯
떠날 봄날의 꿈인 줄 알지만
바람 따라 흩날리는 그리움
길 따라 향기 찾는 방랑자가 되렵니다.
벚꽃 길 /김인숙
해가 저물고 길가에 벚꽃들이
한창 발그레 미소 지으면
나는 그대의 따스한 손을 잡고
끝도 없이 걷고 싶어라
이렇게 보드라운 봄바람이
볼을 쓰다듬어 주는 날
꽃잎이 방글방글 정겨운 날
바람이 되어 꽃잎이 되어
그대와 함께 벚꽃 길을
하염없이 걷고 싶어라
오래오래 행복해지고 싶어라.
벚꽃이여 /원미경
환장하리만치 이쁘고
아름다운 눈꽃처럼 하얗게 피었다가
지나가는 뭇사람들 발길을 붙잡아
눈을 황홀하게 만드는
짧은 생애인가,
꽃 물결의 행렬이 이어지고
두런두런 삼삼오오 짝지어
이야기 꽃 피우는 술렁거림도 잠시
자연의 신비스러운 풍경 속에서
바람 불고 봄비 내리면
끝내 지고 마는 여린 꽃이여
그대 이름은
팝콘 톡톡 터지듯 벙그는
아리따운 미소야,
여인의 환한 웃음을 온몸에 두르고
뽀얀 속살까지 내어 보이는
여인의 미모랄까
나비같이 날아다니는 춤사위
승무를 추면 이와 같을까
멈춘 듯 하다가도 봄바람에 흩날리는
꽃춤 보는 맛이랄까
봄의 왈츠 리듬에 맞춰 추다가
여인의 화폭에 내려앉듯이 담기는
내 가슴 속에 한 송이 꽃
그대 담고 살아가듯
꽃잎이 지고 나면 연둣빛 잎새가
얼굴을 내밀겠지만,
세월은 가고 오는 것이라
계절 앞에서 잔인한 사월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환하게 피어나라
벚꽃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