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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6일 오늘의 역사
2022년 멕시코 교도소에 괴한 80명 침입 소장 및 교도관 무장해제 후 수감자 1명 데리고 도주
2021년 삼성전자, 수출 첫 1100억달러 돌파
2021년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한국인 집단폭행 사건 발생
2018년 손흥민(토트넘) 유럽 프로축구 1부 리그 100호골 기록, 차범근(121골) 이어 두 번째
2016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박숙이 할머니 세상 떠남(94세)
2011년 일제 때 일본으로 강제 반출된 『조선왕실의궤』(81종 167책) 돌아옴
조선왕실에서는 세자와 왕비의 책봉행사부터 세자와 왕의 결혼식, 왕과 왕비의 장례, 왕후의 존호 및 선대 왕과 왕후의 시호를 올리는 행사 등이 있을 때면 그 행사를 주관하는 임시 관청으로서 도감을 설치했고, 행사를 마치면 도감을 해체하고 의궤청을 설치해 행사를 치른 과정 일체를 날짜순으로 기록한 등록을 만들었다가 의궤의 편찬을 맡아보게 했다.
일제 강점기에 반출 되었던 것이 이날 반환 되었다
2008년 그리스에 전국적인 폭동 발생
2008년 12월 6일 그리스에서 경찰관이 15세 소년을 사살한 데 항의해 전국적인 폭동이 발생했다. 숨진 소년은 다른 청년들과 함께 돌과 막대기로 경찰차를 공격하다가 경찰관의 위협사격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이후 총소리와 희미한 사건현장 장면이 담긴 동영상이 인터넷 등을 통해 전국에 유포되면서 폭동 사태로 비화됐다.
시위가 계속된 지 5일째인 10일 그리스 아테네의 의회 의사당 앞에서 1만명 이상의 시위대가 총리 퇴진을 요구하며 행진했다. 시위대 중 일부 청년들은 폭동진압경찰에게 화염병과 돌을 던졌고, 이에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맞서면서 의사당 앞은 시가전을 방불케 했다.
또 10일 그리스의 양대 노조가 하루 동안 정부의 연금 개혁 및 경제 정책에 항의하는 24시간 총파업을 벌이면서 그리스의 공항과 학교, 병원, 대중교통 등이 거의 마비됐다.
이번 사태가 전국으로 확산된 배경에는 정부의 개혁조치 실패와 부패, 경찰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 경제난에 따른 청년 실업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2004년 집권한 중도우파의 신(新)민주당 정권이 10월 정부 소유의 아테네 올림픽 선수촌 아파트와 수도원의 값싼 땅을 맞바꾸고 뒷돈을 챙긴 것이 드러나, 이에 야당과 시민단체의 '내각 총사퇴' 요구가 빗발치는 상황에서, 경찰의 소년 살해 사건이 발생했다. 또한 높은 청년 실업률과 빈부 격차, 정부의 연금 개혁에 대한 불만 등이 사태를 악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 미국의 공격 두 달 만에 항복
2000년 팔만대장경 CD롬 봉정식
한문으로 된 불교 경전 1514종을 8만여장의 경판에 담은 고려대장경이 700년 만에 정보화 시대에 걸맞는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고려대장경연구소는 1993년 시작한 고려대장경 전산화 작업을 완료, 2000년 12월 6일 서울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에서 ‘고려대장경 전산화본 봉정식’을 가졌다.
연구소는 지난 7년간 해인사 보관 중인 팔만대장경의 내용을 디지털화, 15장의 CD롬에 담는 작업을 해왔으며 이날 봉정식은 CD롬을 부처님께 바치는 의식이었다. 고려대장경 CD롬의 가장 큰 특징은 약 3만2000종에 이르는 이체자(異體字)를 모두 원형대로 담은 점이다. 목판본인 고려대장경에는 ‘뚫을착’의 자형이 65종에 이르는 등 이체자가 수없이 발견된다. 연구소는 고려대장경을 원형대로 되살린다는 취지에서 이를 모두 그대로 수록했다. 또 정자(正字)와 이체자를 대비한 ‘고려대장경이체자전’을 만들어 이용자들이 편리하도록 했다.
또 다른 특징은 한자 하나마다 그 글자가 포함된 부분을 모두 찾아 볼 수 있는 ‘일자색인(一字索引)’이다. 사용자들은 한자의 음이나 부수-획수를 이용하여 관심있는 글자가 들어있는 구절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998년 베네수엘라 대통령선거, 우고 차베스 당선
1992년 유혈 쿠데타에 실패해 2년간 옥살이를 했던 예비역 중령 우고 차베스가 1998년 12월 6일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집권당 후보 엔리케 살라스 로메르를 압도적 표차로 이기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공수부대 출신으로 붉은 베레모를 즐겨 쓰는 그는 유세기간 중에도 베레모를 벗지 않았다.
차베스는 1954년 7월 28일 농촌마을 사바네타에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승진가도를 달렸지만 1989년 반정부시위대에 대한 군 발포로 300여명이 사망하는 사건을 지켜본 후 그는 정권전복을 꿈꾸기 시작했다. 1992년 2월 1만5천여명의 병력으로 쿠데타를 감행했으나 강력한 군부의 저항에 밀려 수감됐었다.
1998년 프랑스 조각가 세자르 사망
프랑스 조각가 세자르 발다치니가 1998년 12월 6일 프랑스 파리에서 오랜 지병 끝에 77살을 일기로 숨졌다. 1921년 마르세유에서 가난한 이탈리아계 포도주통 제조공의 아들로 태어난 세자르는 50년대에 고철용접 작업으로 주목받기 시작, 1954년 첫 전시회 이후 고철과 산업쓰레기 등을 소재로 인체의 특정 부위를 크게 확대하는 작업을 계속해 왔다.
1960년대에 낡은 자동차 수십대를 압축해 쌓아놓은 작품을 발표하면서 당시 유럽을 휩쓴 누보 레알리즘(신사실주의)계열의 대표작가로 두각을 나타냈다.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는 폐차를 압축한 `520t`으로 눈길을 끌기도 했다. 국내에 있는 그의 작품으로는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조각공원에 있는 6m 높이의 `엄지손가락`이 유명하다.
1998년 제13회 방콕아시안게임 개막
제13회 방콕아시안게임이 1998년 12월 6일 개막해 열전에 돌입했다. IMF 한파로 개막일을 3개월 이상 늦추는 등 많은 우여곡절 끝에 열린 이번 아시안게임은 방콕 후아막스타디움에서 화려한 개막행사로 시작됐다. 41개국을 대표하는 9,000여 선수들은 36개 종목 377개의 금메달을 놓고 본격적인 메달 레이스에 들어갔다.
개막식은 남방불교의 본산인 태국 불교문화가 흠뻑 풍기는 식전행사를 시작으로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과 세이크 파드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회장, 피차이 라타쿤 대회조직위원회 위원장, 푸미폰 아둔야뎃라마9세 국왕 등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다. 또 개막식이 끝나고 바로 축포와 레이저쇼가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는 식후행사가 뒤따랐다.
1997년 국어의 표준발음에 대한 연구업적을 남긴 국어학자 남광우 별세
12월6일 오전 11시40분, 삼성 서울병원에서 별세한 원로 국어학자 난정 남광우(77 ·수원대 대우교수) 박사. 그는 유고가 되어버린 ‘국한혼용을 통한 국어교육 정상화를 촉구하는 글’을 5일 오후 고건 총리 앞으로 보낸지 19시간만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서울대 문리대를 나와 중앙대 인하대 수원대 교단에 섰던 남박사는 정부가 한글전용을 결정한 70년 이후 ‘국한혼용론’의 선봉에 서서 한글 전용론자들과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계속했다.
한글전용법 폐기를 위해 장관실을 뻔질나게 드나들었고,국회에 청원서를 낸것만도 10여번이 넘는다. 이같은 그의 노력에 힘입어 90년대 들어 조선일보를 비롯한 일간지들이 한자 칼럼을 신설하고, 기업체 입사 및 승진시험에 한자과목이 추가되는 등 한자교육붐이 일었다.
그는 “마지막 과제는 한중일 3국의 상용한자를 통일시켜 명실상부한 한자문화권을 만드는 일”이라며 지난달 말 중국 소주에서 열린 ‘국제한자학술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원고를 준비했으나 결국 참석지 못했다.
남박사는 ‘한국어 표준 발음사전’ ‘고금한한자전’ 등 20여 저서를 남겼으며,‘학술원상’ ‘5·16민족상’ ‘서울시 문화상’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받았다.
1995년 불국사,석굴암,팔만대장경,종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불국사와 석굴암, 해인사와 팔만대장경 경판, 종묘 등 3점의 우리나라 문화재가 1995년 12월 6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제19차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정식 등록됐다.
한국의 문화유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기는 지난 1975년 이 제도가 발효된 이래 처음으로 이들 유산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휘장(엠블렘) 사용권을 갖게 되며 유네스코로부터 유산보존에 필요한 기술-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이번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는 한국의 문화유산 3점을 포함한 15개국 21개 유산이 새로 세계유산으로 등록됨에 따라 1995년 12월까지 등록된 자연-문화유산은 4백61건으로 늘어났다.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을 포함해 1995년 12월까지 세계유산을 가장 많이 가진 나라는 스페인으로 알타미라동굴을 비롯, 코르도바유적, 알함브라궁전 등 모두 23개소나 된다. 22개소의 세계유산이 있는 프랑스도 파리, 아미앵, 코르시카 등 전국에 세계유산이 분포돼 있다. 아시아에서는 인도(21개) 중국(16개) 일본(8개) 등의 순으로 세계유산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1995년 12월 19일 석굴암-불국사, 해인사와 대장경판-판고, 종묘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3건의 문화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을 경축하는 음악회와 리셉션이 예술의 전당 음악당에서 열렸다.
1995년 자민당, `신한국당`으로 당명 변경
1995년 저명한 칼럼니스트 레스턴 타계
미국 ‘뉴욕타임스’의 저명한 칼럼니스트였던 제임스 레스턴이 암 투병 끝에 1995년 12월 6일 워싱턴 자택에서 86살을 일기로 타계했다.
스코틀랜드 클라이드 뱅크에서 1909년에 태어난 레스턴은 11살때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왔다. 오하이오 공립학교와 일리노이대를 졸업했으며 대학시절 학비를 벌기 위해 캐디생활을 했다. 오하이오 스프링필드의 데일리 뉴스에서 일하다 25세 때인 1934년 AP통신으로 옮겨 1939년까지 체육담당 기자로 일했다. 그 후 뉴욕타임스의 런던특파원으로 부임했으며 1941년부터 미국무부 취재를 맡았고, 워싱턴 지국장(1953년)과 취재담당 부사장(1969년)을 거쳐 1974년에 일선 기자생활을 마감한 후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1989년 80세 생일에 고별회견을 갖고 뉴욕타임스를 은퇴했다.
뉴욕타임스 런던특파원으로 2차대전을 취재하며 경험을 쌓은 레스턴은 1944년 유엔창설 등이 논의된 ‘덤바턴 오크스’ 회담 합의내용을 특종보도 해 첫 퓰리처상을 받았고, 1957년에는 대선시리즈 기사로 두번째 영예를 안았다.
1994년 북한 대표단, 사상 처음으로 북-미 연락사무소 개설을 위해 워싱턴 방문
1990년 프랑스 ‘로피시엘 옴므’지 정명훈을 1990년의 영웅 16인으로 뽑음
1989년 필리핀 비상사태 선포
1987년 박종팔 WBA 슈퍼미들급 세계챔피언 획득
1987년 12월 6일 부산 사직체육관. 그는 WBA 슈퍼미들급 챔피언인 멕시코의 강타자 헤수스 갈라르도와 맞서 2회 KO승으로 타이틀을 획득했다.
그러나 영광의 시간을 짧았다. 이듬해인 1988년 8월 수안보호텔 특설링에서 열린 2차 방어전에서 베네수엘라의 오벨메이아스에게 타이틀을 내주고 말았다. 같은 해에 벌어진 백인철 선수와의 라이벌전에서도 패한 후 글로브를 벗었다.
박종팔 선수는 1958년생으로 전남 무안이 고향이다. 가난이 싫어 시작한 권투를 그는 늘 자랑스럽게 이야기 한다. 복싱이 그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게 해주었다고. 프로통산 전적 46승2무5패. 46승중 39번이 KO승일 정도로 그는 철권이었다.
1986년 전북 김제 금산사 본당 대적광전(보물476호) 불탐(피해 1억4,000만원)
1983년 코스타리카 북한과 단교
1983년 버마 아웅산 테러범 기소
1982년 정부 공직자윤리법 시행령 마련
1979년 통일주체국민회의, 제10대 대통령에 최규하 선출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실시하는 제10대 대통령선거가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다. 이날 회의에서는 전국의 대의원 2천5백60명 중 2천5백49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의원 8백27명의 추천을 받은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헌법 제48조 규정에 따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한 그는 단독으로 입후보해 찬성 2천4백 65표, 무효 84표로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해 12월 21일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최대통령의 임기는 당선 즉시 개시되어 박정희 대통령의 잔여 임기인 1984년 12월 26일까지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1979년 11월 10일 특별 담화를 통해 잔여 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헌법을 개정하여 제11대 대통령 및 국회의원 총선을 실시,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향후 정치 일정을 밝힌 바 있어 임기는 채우지 못했다. 더구나 정치적 기반도 없이 전직 대통령의 갑작스런 유고로 대통령직에 오른데다 신군부측의 한계 설정 위에서 집권한 탓에 그는 당시의 혼란한 시국을 수습할 능력도 없었다. 결국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 운동이 발생하고 이와 관련해 군부의 무력 진압에 대한 책임을 지고 취임 9개월 만인 1980년 8월 16일 하야하고 말았다.
이후 광주 민주화 운동과 제5공화국 출범 과정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1987년 국회 청문회에서 증언하라는 야당과 국민의 압력을 받았으나 끝까지 거부했다. 이후 5.18특별법에 의해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 재판 과정에 증인으로 출석했으나 여전히 굳게 입을 다물어 국민의 의혹을 해소시키지 못했다.
1971년 국가비상사태 선언
박정희 대통령이 1971년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중국의 유엔가입을 계기로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남침준비에 광분하는 북한의 행동을 주시한 결과, 한국의 안보가 위태로운 시점에 처했다는 것이 선포의 이유였다.
이날 오전 9시 30분 청와대에서 긴급국무회의와 국가안전보장회의 연석회의를 주재, 정부의 시책은 국가안보를 최우선으로 하고, 안보상 취약점이 될 일체의 사회불안을 용납하지 않으며, 언론은 무책임한 안보논의를 삼가며, 모든 국민은 안보상 실무수행에 자진 실시해야 하며, 안보위주의 새 가치관을 확립해야 한다고 했다. 최악의 경우 국민이 향유하고 있는 자유의 일부도 유보할 결의를 가져야한다고 했다.
이에 따라 공화당은 비상사태 선언에 법적 근거를 부여하기 위해 12월 21일 긴급 당무회의와 의원총회를 개최, 비상사태하에서 대통령에게 광범위한 비상권한을 부여하는 전문 12조와 부칙으로 된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안`을 마련해 12월 27일 국회에 제출, 가결했다.
1969년 문공부장관, 사이비언론정비 언명
1962년 소련 폭격기, 쿠바 철수 완료
1962년 미국, 위성 마리너2호 금성통과
1961년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의 작가 프란츠 파농 사망
프란츠 파농(1925~1961)은 20세기 중엽 제3세계에 몰아친 격랑의 해방운동에 온몸을 던진 사상가였고 혁명가였다. 의사이기도 했던 그가 36년이라는 짧은 생을 통해 벗겨내려 한 것은 자신의 ‘검은 피부’에 쓰인 ‘하얀 가면’이었다.
파농은 중남미 카리브해의 프랑스령 작은 섬 마르티니크에서 태어났다. 조상은 아프리카에서 강제 이주한 노예들이었으나 파농의 윗세대 조상들이 식민 세력에 동화된 ‘흑인 부르주아’로 출세한 덕분에 파농의 8형제 모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
2차대전의 발발로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했을 때 조국 프랑스의 해방을 위해 레지스탕스로 자원해 전선으로 나갔다. 그때까지 파농은 자신도 ‘하얀 피부’를 갖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부상을 입고 훈장까지 받은 파농은 종전 후 1946년 프랑스의 리옹의과대에 입학했다. 백인 프랑스 여성과도 결혼함으로써 완벽한 프랑스인으로 탈바꿈했다고 생각했다.
파농은 의대 졸업 후, 프랑스 노르망디의 한 정신병원에서 자리를 잡았고 그러다가 1953년 11월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로 건너가 정신병원에서 근무했다. 1954년 11월 알제리 전쟁이 터졌을 때는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에 깊숙이 개입했다. 1956년 병원을 떠나 민족해방전선의 전업 전사로 나섰다가 튀니지로 추방되었다.
결국 1961년 12월 미국의 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생전의 소원대로 유해는 알제리에 묻혔고, 이듬해 알제리는 130년 만에 독립했다.
1960년 모스크바에서 8개국 공산당 대표자 회담. 평화공존정책 재확인
1957년 일-소 통상조약에 조인
1956년 멜버른올림픽 복싱 밴텀급 결승전, 송순천 베렌트에 3-2 판정승
1956년 멜버른올림픽 복싱 밴텀급 결승전, 송순천 베렌트에 3-2 판정승
1955년 미-영-불-소, 오스트리아연방공화국 승인
1949년 한국, 만국우편조약 가입
1949년 첫 징병검사 실시
1948년 유엔총회, 정치위원회 한국대표초청안을 가결
1945년 군정청, 일본인의 공-사유재산을 접수
1945년 윤치호 사망
조선시대 말부터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에 걸쳐 활동한 사상가, 교육자. 젊은 시절에 신사유람단을 수행하여 일본에 체류하면서 영어를 배우고 서구 근대 문명을 체험했고, 스무살 때 상하이로 망명하여 체계적인 근대 교육을 받고 기독교에 입교했다. 이후 미국에서 대학 교육을 받으면서 계몽활동의 필요성을 깨닫고 귀국하여 독립협회에서 활동했다. 을사늑약 후에는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우고, 청년운동을 이끌었으며, 일제강점기 동안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지내는 등 교육자로 활동했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일제 징병에 협력을 권유하는 등 친일 활동을 벌였다. 1941년에는 황국신민으로서의 충성과 협력에 대한 결의문을 낭독하고, 친일세력을 총망라한 조선임전보국단의 고문으로 일제의 징병에 협력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1945년 일본 제국의회의 칙선 귀족원의원에 선임되었다. 해방이후 그는 친일반민족위원회에 체포되었다. 풀려난 뒤에도 그의 친일 행각에 대한 규탄과 비난에 괴로워하다가 1945년 12월 9일 개성에 있던 자택에서 뇌일혈로 숨졌다
1941년 맨해튼 프로젝트 승인
1938년 독일-프랑스 불가침조약 체결
1938년 스위스 화학자 뮐러 DDT 발명
1926년 안광천 등 조선공산당 재조직(ML당)
1926년 미국, 유성영화 제작에 성공
1926년 프랑스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 세상 떠남
1925년 경성부 청사 상량식
1922년 아일랜드 자유국 선포
1922년 12월 6일 ‘영국·아일랜드 조약’이 조인됨으로써 ‘아일랜드 자유국’이 수립됐다. 영국은 남아일랜드 26주에 영국 자치령과 동등한 지위를 보장하고, 아일랜드는 영국 왕실에 충성한다는 내용의 조약이다. 하지만 아일랜드로서는 반쪽의 승리였다.
1920년 12월 23일 영국 의회가 통과시킨 ‘아일랜드 자치법’에 의해 남(南)아일랜드만 이날 자유국으로 홀로 서고, 북(北)아일랜드 9개주(州) 중 신교도가 다수인 6개주는 여전히 영국잔류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아일랜드는 1949년 4월 18일 영연방으로부터도 이탈해 완전 독립국이 됐지만, 북아일랜드의 앞날은 일부 진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투명하다.
1917년 핀란드, 러시아로부터 독립
1917년 몽블랑호, 캐나다 핼리팩스항에서 노르웨이 화물선과 충돌, 폭발
1917년 12월 6일 캐나다 노바스코샤주 핼리팩스에서 전시에 이용할 화약을 가득 실은 프랑스 화물선 몽블랑호가 베드포드만과 핼리팩스 항구 상부를 잇는 해협에서 노르웨이 화믈선 SS 이모(Imo)와 충돌, 폭발했다.
충돌 약 20분 후, 프랑스 화물선 갑판에 화재가 발생하고 이 화재가 폭발성 화물에 번져 점화되어 폭발해 리치몬드 도시가 거의 폐허로 되었다. 약 2,000명의 사람이 건물 파편, 붕괴, 화재 등으로 인해 사망하고 9,0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이 폭발은 핵무기가 개발되기 전까지 가장 큰 규모의 인공폭발이었으며, 폭발의 세기는 트라이나이트로톨루엔(TNT) 약 2.9킬로톤 정도의 화력으로 히로시마에 투하한 리틀 보이의 10분의 1 정도 화력이었다.
캐나다 왕립 학회 회의에서는 댈하우지 대학교의 교수 하워드 L. 브로슨이 이 대폭발은 고성능 폭약 일부인 2,400톤이 폭발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화물선 몽블랑은 프랑스 정부의 명령으로 해외에서 프랑스 보르도까지 가는 폭발성 화물을 운반하고 있었다. 대략 오전 8시 45분, 몽블랑은 뉴욕으로 구호 물자를 선적할려던 벨기에 구호위원회 소속의 아무것도 싣지 않은 전세선인 이모(Imo)와 1.6km/h에서 2.4km/h의 속도 정도의 느린 속도로 충돌했다. 그 결과 프랑스 선박 갑판에 화재가 일어나면서 급속도로 통제력을 잃기 시작했다. 적절하고 접근 가능한 소방 장비가 없어서 배의 선장, 승무원, 장병들은 사고 몇 분 만에 배를 포기해야만 했다. 약 20분 후인 오전 9시 4분 35초, 몽블랑은 엄청난 힘으로 폭발했다.
리치몬드 지역 전체를 포함한 반경 800m의 모든 구조물이 파괴되었다. 공기중의 P파로 인해 나무가 부러지고, 철도 레일이 구부러졌으며, 건물이 붕괴되고 선박이 지상 위로 올리왔으며 몽블랑 함선의 조각들은 수 킬로미터까지 날아갔다. 도시의 거의 모든 창이 강한 진동으로 인해 파손되었다. 항구 맞은 편에 위치한 다트머스에도 광범위한 피해가 발생했다.
충격파로 발생한 쓰나미로 인해 터프코브 지역에 살았던 미크마크인 1세대 공동체는 거의 전멸하였다. 쓰나미가 네빈코브에 도달하면서 5명의 아이들이 익사하는 등 베드포드만 전역에서 사상자가 발생했다.
1917년 캐나다 할리팩스에 대화재 850여명 사망
1912년 을지로에 전차운행 개시
전차는 독일 지멘스 회사가 1881년 개발하여 미국의 콜브란.보스트 위크사가 고종에게 소개하여 1898년 9월15일 경희궁 앞에서 기공식을 하였으며 1899년 5월4일 동대문에서 개통식을 하였다 이후 시험운행을 통하고 5월20일부터 정상운행을 하였다
최초에는 8대의 전차를 운행하였다
전차 객석은 상등칸과 하등칸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며 요금은 상등칸이 3전5푼, 하등칸은 1전5푼으로, 당시 쌀 1kg 가격이 4~5전인 점으로 미뤄 꽤 비싼편이었다. 그래도 워낙 신기한 터라 비싼 요금보다는 타 보았다는 우쭐함에 객석은 늘 빈자리가 없었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상등칸만 전차 중간에 6석 정도 칸을 막아 창문을 내어 비바람을 피할 수 있게했고 하등칸은 그냥 뻥 뚫려 있어 비 오는날 하등칸 사람들은 도롱이나 삿갓, 기름종이 우산을 써야했다.
정류소는 따로 정해진 곳이 없고 아무데서나 승객이 손을 들면 태워줬다. 게다가 철로가 단선이어서 마주오는 전차가 있으면 살짝 중간 대피소로 빠졌다가 다시 운행을 하곤 했다
최초에는 서대문에서 청량리간 운행하였으나 이어 을지로 남대문 태평로로 확장되었다
이후 1968년 까지 운행하였다가 자동차와 시내버스가 생기는 바람에 운행을 중지하였다
1908년 의병 6600여명 양주에 집결, 13도 의병장에 이인영
1907년 13도 창의군 결성
1892년 독일 전기공학자 베르너 폰 지멘스 사망
1884년 갑신정변 실패… 김옥균 등 일본으로 망명
풍운아(風雲兒) 김옥균(金玉均)이 1884년 12월 6일 33세의 젊은 나이로 망명길에 오른다. 이틀 전인 12월 4일 우정국 개국 축하연 때 거사한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등 9명의 동지들도 함께했다. 일본행은 4번째. 오랫동안 꿈꿔온 자주 독립과 근대 국가 실현이 거사 3일 만에 좌절된 것을 두고 사람들은 ‘3일 천하(天下)’라 부른다.
김옥균과 개화파는 청군과 명성황후 정권의 견제와 탄압을 피해 무장정변을 모색하던 중 청군 1500명이 안남전선으로 파병돼 1500명밖에 국내에 남지 않았고, 그나마 청군이 프랑스군에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거사를 단행한다. 일본군 150명도 가담했다. 초기엔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돼 고종과 명성황후를 경우궁으로 옮기고, 한규직, 윤태준, 민태호, 민영목 등 수구파들을 처단할 수 있었다.
12월 5일 신정부를 수립하고 밤새 혁신정강(革新政綱)을 제정, 이튿날 공포하지만, 정세를 살피던 청군이 무력개입을 시작하면서 개화파와 일본군은 속수무책으로 패하고 만다. 일본 정부의 냉대 속에 오가사와라, 홋카이도 등지를 전전하던 김옥균은 일본생활 10년째 되던 1894년 상하이로 다시 망명길에 오른다. 그리고 3월 28일, 상하이 내 미국 조계에 있는 일본여관 ‘동화양행’ 1호실에서 수구파 자객 홍종우가 쏜 총탄 3발을 맞고 숨을 거둔다. 10년의 세월이 다시 물거품이 됐다.
1866년 대원군, 경복궁 중건위해 당백전 주조
1779년 프랑스 화가 샤르댕 사망
1775년 영국 작가 오스틴 탄생
1866년 대원군, 경복궁 중건위해 당백전 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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