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0일 오늘의 역사 2022년 영국 아파트 화재발생 1동 전소 2021년 미 대통령 '웜비어 인권문제' 첫 대북 제재 2014년 고등학생이 전북 익산시 신동성당에서 열린 신은미 토크 콘서트 도중 인화물질이 담긴 사제폭탄을 투척하는 테러 행위를 벌임 2012년 류현진 선수 메이저리그 진출, LA다저스와 6년간 3600만$(한화 390억원) 계약 체결 201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류샤오보(劉曉波), 75년만의 궐석(闕席) 시상식 2010년 12월10일 오후 1시(현지시각) 노르웨이 오슬로시청의 2010년 노벨평화상 시상식장. 중국의 반체제 작가 류샤오보(劉曉波·55)에 대한 시상식은 노르웨이 국왕 하랄드 5세 내외와 토르비에른 야글란 노벨위원장이 나란히 입장하면서 시작됐다. 이어 야글란 노벨위원장의 경과 보고가 있었다. “비폭력적이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중국의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해온 올해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류샤오보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도 중국 동북지방의 차디찬 감옥에 갇혀 있다. 그러나 그의 구금과 시상식 불참 자체가 그에게 이 상을 주는 것이 적절했음을 입증한다. 그는 기본 인권을 주장했을 뿐이며, 아무런 잘못도 없다. 그는 반드시 풀려나야 한다….” 그 순간 노르웨이 국왕 부부,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 의장, 50여명의 오슬로 주재 각국 대사와 국제기구 대표들, 홍콩과 미국·유럽에서 온 중국의 망명 반체제운동가 등 1000여명이 기립해 류샤오보의 빈자리와 벽에 걸린 대형 사진을 향해 1분 넘게 박수를 보냈다. 류샤오보의 톈안먼사건 참가와 민주화운동 등 약력을 소개하는 중간에도 박수는 서너 차례 이어졌다. 예년 같으면 그 직후 알프레드 노벨의 얼굴이 새겨진 금메달과 증서, 1000만 크로네(약 140만달러)의 상금을 수상자에게 전달했지만 이날은 생략됐다. 대신 경과 보고를 마친 야글란 위원장은 류샤오보가 앉았어야 할 빈 의자에 증서를 내려놓았다.
2010년 숙명여자대학교 100주년 기념관에서 제217학군단 여성 학생군사교육단 창설식 2010년 12월 10일 오전 11시 서울 용산구 청파동 숙명여대 삼성컨벤션홀에서 4대1의 경쟁을 뚫고 선발된 대한민국 첫 여성 학군사관후보생(ROTC) 30명이 '제217 학생군사교육단 창설식'에 참석했다. 국방부는 2010년 현재 장교의 4.3% 3111명, 부사관의 2.9% 3051명인 여군(女軍) 비율을 향후 10년간 각각 7.7%와 5.5%로 늘릴 계획 아래, 9월 15일 숙명여대를 최초의 여성 ROTC(학군사관 후보생) 시범대학으로 선정하고, 학군단이 있는 기존 대학 중 6개 대학(명지대, 전남대, 강원대, 충남대, 영남대, 고려대)이 2010년부터 여학생 후보생을 5명씩 선발할 수 있게 하였다. 10월 29일 숙명여대와 6개 대학의 여성 ROTC 지원 결과 평균 6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여성 학군사관후보생 선발기준과 교육훈련은 남성 후보생과 같으며, 대학 2학년 때 지원해 3~4학년 때 일정시간 군사교육을 받고 졸업과 함께 장교로 임관한다.
2008년 짐바브웨에 콜레라 창궐 남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창궐하는 콜레라로 인한 사망자가 급격히 늘어나 지금까지 1만6141명이 발병해 775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유엔이 2008년 12월 10일 밝혔다. 짐바브웨에서 콜레라는 보건의료 체제의 붕괴와 깨끗한 식수 부족으로 인해 급속히 퍼지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 최신 자료에 따르면 콜레라 사망자는 전날 보다 거의 200명이 늘어났다. 앞서 유엔은 짐바브웨에서 1만3960명의 환자가 발생했으며 이중 589명이 숨졌다고 보고했다. 짐바브웨 정부는 콜레라가 진정됐다고 주장하나 구호기관들은 앞으로 비가 오면 병과 굶주림에 시달려온 주민 사이에 콜레라가 더욱 확산될 것으로 경고했다. 짐바브웨의 콜레라 사태는 수백명의 콜레라 환자가 치료를 받기 위해 짐바브웨를 떠나면서 인접국인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보츠와나 등지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이다.
2008년 국내 항공우주공학 선구 위상규 서울대 명예교수 별세 국내 항공우주공학의 선구자인 위상규 서울대 공대 명예교수가 208년 12월 10일 밤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1926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난 위 박사는 서울대 공대를 거쳐, 1958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에서 항공우주공학 박사학위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받았다. 그는 한국전쟁 때는 전투기 조종사로 97회 출격해 화랑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위박사는 1956년부터 1992년까지 서울대 항공우주공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1967년 한국항공우주학회를 설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006년 칠레 독재자(16년 6개월) 아우구스트 피노체트 세상 떠남(91세) 2000년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12월 10일 한국·동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를 증진시킨 공로로, 노벨평화상 제정 100년째이자 뉴 밀레니엄 첫해인 200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대통령은 이날 오후 9시(한국시각) 노르웨이 오슬로 시청 메인홀에서 하랄드 5세 노르웨이 국왕과 각국 외교사절 등 1100여명이 참석한 시상식에서 군나르 베르게 노벨위원회 위원장으로부터 노벨평화상 인증서와 금메달, 900만 크로네(12억원 상당)의 상금을 받았다. 김 대통령은 수상 연설에서 “노벨평화상은 세계 인류에게 평화를 위해 헌신하도록 격려하는 숭고한 메시지이자 나에겐 영광인 동시에 무한책임의 시작”이라면서 “나머지 인생을 바쳐 한국과 세계의 인권과 평화, 그리고 우리 민족의 화해·협력을 위해 노력할 것을 맹세한다”고 밝혔다. 베르게 위원장은 수상자 선정 경위 발표를 통해 “김 대통령이 동아시아에서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기울인 평생의 노력, 특히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노력으로 이 상을 수상하게 됐다”면서 “이 상에는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머나먼 길에 더욱 진척이 있기를 격려하는 뜻이 담겨있다”고 밝혔다.
1999년 프란요 투즈만 크로아티아 대통령 사망 크로아티아 공화국 독립의 영웅으로 국민적 추앙을 받았던 프란요 투즈만 대통령이 1999년 12월 10일 7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반파시스트 게릴라, 유고군 장성, 역사학자, 야당지도자를 거치며 극단적 민족주의자로 변신해 온 투즈만은 지난 1990년 민선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 후 1991년 크로아티아가 구 유고연방에서 분리, 독립하는데 결정적 지도력을 발휘했다. 이후 그는 독립 공로를 내세워 왕정을 방불케 하는 절대권력을 휘둘렀으며 언론을 장악하고 야당을 탄압하는 등 독재자의 새로운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순결한 크로아티아’ 건설을 표방한 그는 세르비아계와 이슬람계를 탄압하고 1992년에는 영토확장 욕심에 보스니아 전쟁에도 끼어들었다. 투즈만은 왕정을 방불케 하는 절대권력을 휘둘렀고 부정부패, 정실인사의 대명사가 됐다.
1996년 공군사관학교 창군 이래 처음으로 여성 사관생도 20명 선발 1993년 넬슨 만델라 노벨평화상 수상 1993년 노벨평화상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정책을 철폐한 공로로 흑인 민권지도자 넬슨 만델라와 백인정부 대통령 프레데릭 데 클레르크가 공동 수상했다. 노벨상 5인위원회는 비록 인종차별을 철폐한 민주주의로 가는 과정이 폭력으로 얼룩지고 있으나 정치적 숙적인 만델라와 데 클레르크 대통령이 수세기에 걸친 백인통치를 끝내기 위해 노력한 점을 높이 평가한다고 밝혔다. 변호사에서 아마추어 권투선수, 게릴라, 정치범, 대통령에 이르는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넬슨 만델라는 남아프리카 흑인해방운동의 역사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만델라는 1918년 7월 케이프타운 동부 트란스케이지역에서 호사 부족 족장의 아들로 태어나 포트헤어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1944년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가입해 파업, 불매운동, 시민불복종운동 등 전통적인 흑인인권운동을 주도했으나 1960년 69명이 학살당한 샤프빌 사건을 계기로 평화적인 인권운동을 포기하고 무장투쟁에 가담, ANC 무장조직인 민족의 창을 결성하여 초대 사령관에 취임했다. 이로 인해 만델라는 1964년 국가전복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1990년 2월 석방될 때까지 27년간을 복역, 흑인 인권운동의 상징적인 존재로 부각됐다.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에는 다시 실용주의 노선으로 전환, 백인정부와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 철폐를 위한 협상을 벌여 흑백간의 유혈분쟁을 해소하는 길을 열었다. 1994년에는 대통령에 당선됐다. 남아공 출신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경우는 지난 1960년 당시 ANC 의장이었던 알베르트 루툴리, 1984년 요하네스버그의 데즈먼드 투투 영국성공회 주교에 이어 이번이 세번째다.
1991년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서울) 1990년 미국 석유왕 해머 사망 미국 재계의 거물이자 동서 데탕트의 가교를 놓은 평화의 중재자로서 명성을 얻었던 아먼드 해머 미 옥시덴털석유 회장이 1990년 12월 10일 밤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92세였다. 미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록펠러와 카네기처럼 거의 무일푼에서 출발, 수십억달러의 거부를 축적한 고 아먼드 해머 회장은 생전에 모은 돈을 대부분 미술관이나 사회단체 등에 기부, 자선사업가로도 명망이 높았다. 아버지가 미국 사회당을 창당한 공산주의자였음에도 불구, 그 자신은 철저한 자본주의자였던 해머 회장은 레닌 이후 소련의 역대 지도자들과 친밀한 개인관계를 유지, 이를 기반으로 동서 양진영에 걸쳐 사업을 벌이는 놀라운 수완을 보였으며, 미국 정부의 부탁으로 소련과의 비밀외교 협상을 벌이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원래 의과대학을 졸업했던 해머 회장은 부친이 운영하다 파산한 제약회사를 인수, 1년 만에 경영을 정상화시킨 것이 계기가 되어 장사에 뛰어들었으며, 1917년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난 뒤 소련으로부터 무역거래 독점권을 획득, 돈방석에 올라앉는 기회를 잡았다. 그는 당시 혁명 후 소련이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던 곡물을 공급해줌으로써 레닌의 신임을 얻은 뒤 레닌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소련에서 각종 소비재 판매사업을 벌여 간단히 수천달러의 돈을 벌었다. 그는 또 1957년 당시 별볼일 없었던 옥시덴털 석유회사를 단돈 10만달러에 인수한 뒤 의욕적인 유전개발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끔으로써 옥시덴털 석유를 미국 제7위의 석유회사로 키웠다.
1990년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노르웨이의 노벨평화상 위원회가 밝힌 수상자 선정 이유는 오늘날 국제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엄청난 변화와 평화운동에서 고르바초프가 선도적 역할을 담당해 왔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사실상 고르바초프는 전 공산권 세계를 상대로 무혈 민주혁명을 이끌면서 사상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었으며, 서방세계에는 ‘고르비(고르바초프 애칭) 마니아’를 형성한 지도자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지난 1985년 집권 이후 고르바초프는 소-미, 소-중, 소-일, 소-서유럽의 관계 개선에서 발휘된 그의 신사고 외교는 금세기 후반부의 국제질서에 새로운 판도 변화를 몰고 왔다. 고르바초프는 국내적으로도 소련 공산당의 1당독재에 종지부를 찍도록 유도함으로써 볼셰비키 혁명 70년 사상 최대의 정치변혁을 주도했으며, 글라스노스트(공개)의 확대실천으로 서방의 지원을 유인하면서 공산통제경제를 자유시장경제체제로 이행시키기 위한 돌파구를 열었다. 고르바초프는 모두 8차례에 걸쳐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진행하면서, 지난 87년 12월 양국간 중거리핵전력(inf) 폐기조약 체결, 소련군 50만 감군, 재래식무기 50% 감축협상 등 전례없는 군축무드에 앞장서 왔다. 1989년 아프가니스탄의 소련군 철수도 그가 내린 결정이었으며, 1990년 10월에 완수된 독일 통일도 그가 동유럽의 평화혁명과 바르샤바조약기구의 와해를 허용치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란 추정을 할 수도 있다. 동구가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파기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또 한국 및 사우디아라비아 등과 국교를 재개함으로써 소련에는 더이상 이데올로기의 벽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실증해 보였다. 고르바초프는 이라크에 대해 유엔에서 미국과 협조, 지역분쟁에 대한 강대국간의 협조유형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당초 고르바초프의 노벨평화상 수상에 대해 논란이나 반대의견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두 공화국의 민족 분규를 유혈진압한 점, 발트3국의 탈소 독립운동에 강경한 반대입장을 고수해온 점 등이 거론됐다. 또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대통령제를 도입하여 그 권좌에 오른 뒤 또다시 정치-경제적 비상대권을 장악함으로써 ‘신(新) 차르정치’를 펴려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초강대국 지도자로서는 미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 수상(1906년) 이후 처음, 그리고 공산권 지도자로서는 사상 첫 노벨평화상 수상자였다.
1988년 국민일보가 배달신문에서 국민일보사로 개명 창간 1987년 미국 바이올린 연주자 하이페츠 사망 1983년 아르헨티나 민간정부 출범(대통령 라울 알폰신) 1982년 소련, 우주인 211일의 우주체공기록 세우고 귀환 1981년 국회 내무위 통금해제건의안 가결 1979년 테레사 수녀 노벨 평화상 수상 ‘빈자들의 성자’ 마더 테레사 수녀가 1979년 12월 10일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테레사는 일체의 축하행사를 거부하며 상금 19만2천달러 전부를 나환자 구호소 건립기금으로 내놓았다. 상을 받을 때도 테레사의 이름이 아닌 ‘사랑받지 못하는, 버림받은 사람들’의 이름으로 받아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1910년 구 유고연방 스코페(현재의 마케도니아)에서 알바니아인을 부모로 태어난 테레사는 부유한 어린시절을 보냈으나 7세 되던 해 아버지의 죽음에 길거리에 나앉게 되면서 가톨릭에 귀의했다. 18세때 아일랜드의 로레타 수녀원, 이듬해 인도 다르질링 수녀원으로 들어가 아그네스 수녀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그녀는 1946년 9월 10일 캘커타의 한 열차 속에서 ‘가난한 자들 속으로 들어가라’는 신의 계시를 받고 수녀원을 떠났다. 이어 아그네스는 테레사로 개명하고 인도 시민권을 얻은 뒤 캘커타 빈민가로 들어갔다.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그녀의 활동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쳤고 신도들은 그녀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1950년 마침내 그녀의 ‘무한사랑’ 이 담겨있는 ‘사랑의 선교회’가 섰고, 그녀는 199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곳에서 가난한 자들에 헌신하며 일생을 보냈다.
1978년 베긴-사다트 노벨평화상 수상 1976년 제20차 남북적십자 실무회담(판문점) 1976년 한적(韓赤) 북적(北赤)에 성묘단교류 제의 1975년 소련의 반체제 물리학자 사하로프, 노벨평화상 수상 소련의 반체제 물리학자 사하로프 박사가 1975년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소련정부가 그의 출국을 허락하지 않아 시상식에는 그의 부인 엘레나 여사가 대신 수상했다. 1921년 5월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사하로프는 모스크바 국립대에서 26세 때 박사학위를 받을 만큼 비범했다. 1948년 핵무기를 다루는 연구팀에 가담, 수소폭탄개발의 핵심역할을 했다. 이 공로로 그는 젊은 나이였던 32세 때 소련과학아카데미 사상 최연소 정회원에 선출됐으며, 스탈린상을 비롯해 소련국민의 최고영예인 노동훈장을 3개씩이나 받기도 했다. 미국과의 핵무기 개발경쟁에서 뒤져 있던 소련이 1953년 수소폭탄을 개발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 그는 `소련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며 국가의 영웅적 존재로 부상했다. 그러나 핵무기의 윤리성에 회의를 느끼게 된 그는 소련이 핵무기 개발을 중지할 것을 주장하며 반체제운동에 가담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으로 불린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운동이 소련군에 의해 무력탄압되자 사하로프는 반체제발언의 강도를 더욱 높여 소련정부를 비판해왔다. 소련당국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인권운동을 전개한 그는 국제적 인권운동가로 알려져 이날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 후 1980년 모스크바에서 추방돼 외부와의 접촉이 단절된 채 고리키시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그가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온 것은 1986년 고르바초프의 배려에 의해서였다.
1973년 한국-인도, 국교수립 1973년 북한함정 서해 대청도 부근에 계속 출몰. 긴장상태 조성 1971년 광복 후 첫 민방공훈련 실시 해방후 첫 민방위 훈련이 1971년 12월 10일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서울, 춘천, 인천 등 3개도시 관공서와 직장의 6백43개 방공단 33만4천67명이 참가한 가운데 실시됐다. 다른 지역의 7천8백89개 방공단은 경보전달 요령만을 훈련받고 일반 시민들은 전달과 전파방법을 계몽 받았다. 훈련은 적기 4대가 공습, 퇴치 할때까지 경계-공습-화생방-해제경보 순으로 40분씩 실시, 경보전달-대피-소방-구호-긴급복구 등을 익혔다. 오전10시 정각 오산항공통제소(TACC)에서 유선부가 장치로 황색(경계)경보를 알리자 이장치에 연결된 13개 시의 사이렌이 동시에 울리고 각 주요건물에 황색깃발이 게양됐다. 서울시내에는 5초안에 파출소까지 경보가 전달됐으며 제주도는 2분, 충북이 3분으로 제일 늦었다.
1971년 빌리 브란트 서독 수상 노벨평화상 수상 1970년 소련 반체제 작가 솔제니친 노벨 문학상 수상 1970년 페루에 강진 사망 5만 명 1966년 강원도 영덕에서 버스 추락 사망 21명 부상 51명 1966년 패티김, 길옥윤 결혼 본명이 김혜자인 패티김은 중앙여고 시절에 이미 교내 행사를 주름잡을 정도로 노래에 재능이 있었다. 1959년 3월 미8군 무대에 데뷔했을 때의 예명은 린다김이었다. 린다김이 길옥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60년 미8군 가수 공연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갔을 때였다. 길옥윤은 평북 영변에서 태어나 평양고보를 거쳐 경성제대 치과의학전문학교(현 서울대 치대)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그는 음악에 대한 미련 때문에 치대를 중퇴하고 한동안 음악대학에 적을 두었으며 작곡가 박춘석 등과는 그룹 ‘핫팟’을 만들어 연주활동을 했다. 패티김은 일본에서 귀국한 후 “미국의 패티 페이지만큼 유명해져라”라는 미8군 쇼단 단장의 권유로 이름을 린다김에서 패티김으로 바꿨다. 1963년 4월 패티김은 한국 가수 최초로 꿈의 무대인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진출하고, 미국의 유명한 TV쇼인 ‘자니 카슨 투나잇 쇼’를 비롯 각종 TV쇼에 출연하며 얼굴을 알렸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1966년 2월, 3년 만에 귀국했다. 마침 길옥윤도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1개월 전 귀국해 있었다. 패티김과 길옥윤 두 사람이 1개월 사이로 귀국하자 방송들은 수시로 두 스타를 함께 묶는 특집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길옥윤은 당찬 모습의 패티김에게 호감을 느꼈다. 그러나 패티김은 1966년 4월이 지나면 다시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출국날이 다가오자 애가 탄 길옥윤은 사랑의 감정을 표현한 노래를 작곡했다. 그리고 4월 어느 날, 심야에 패티김에게 전화를 걸어 자작곡 ‘4월이 가면’을 불렀다. 사랑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길옥윤의 사랑 고백에 패티김은 출국을 포기하고 그의 사랑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1966년 12월 10일 워커힐 호텔에서 김종필 당시 공화당 의장의 주례로 3,000여 명의 하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대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1965년 미니스커트 등장 런던 최초의 의상실을 연 디자이너 메리 퀸트가 드레스 스타일 탈피한 미니스커트 만듦 ‘The Look’이란 이름으로 미국에서 열린 그녀의 패션쇼에 미니스커트 입은 모델들이 출연하자 몰려드는 사람들로 주변교통 마비
1963년 한국-바티칸시국(市國) 수교 1962년 황지선(黃池線) 개통 1961년 소련-알바니아 국교단절 발표 소련이 알바니아로부터 외교관들을 철수시켰다. 모스크바 주재 알바니아 대사관은 1961년 12월 10일 두나라의 관계가 수일전에 단교되었다고 발표했다. 유고슬라비아가 소련공산노선을 추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1948년에 코민포름에서 제명된 이래 이번 사건은 공산주의 세계 내에서 가장 큰 분열이었다. 그러나 흐루시초프 수상이 지난 10월의 소련공산당대회에서 알바니아 지도자들을 스탈린 주의자라고 비난했을 때부터 두나라의 결별은 예상되어온 일이었다. 이 두나라의 싸움은 1961년 1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공산당지도자회의에서 알바니아 공산당 두목 엔버 호자와 소련수상 흐루시초프의 설전 이후부터 시작됐다. 호자는 이 회담에서 자본주의와의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중국의 이론을 지지하고 흐루시초프를 공산주의교리에 대한 반역자라고 불렀다. 이에 흐루시초프와 다른 지도자들은 알바니아 지도층을 공격했다. 이 싸움은 양국에 모두 손해를 가져왔다. 소련은 지중해방면의 전략적 해군기지를 상실했고 가난한 알바니아는 소련과 모든 동구국가들의 경제원조를 받지 못하게 됐다. 중국의 모택동은 메시지를 통해 알바니아 지도자들을 찬양했는데 이것은 흐루시초프에 대한 도전을 의미했다. 즉 이번 소련과 알바니아의 반목은 공산권내의 내분을 드러낸 것이었다.
1961년 하마슐드 전 유엔사무총장에 노벨평화상 수여 1960년 박태선 장로교 신자 1,000여명 동아일보사 습격 1957년 시인 노천명 사망 1956년 독립운동가 정이형 사망 1954년 부산부두 화재 국보급 문화재 3,400여점 소실 1954년 유엔총회, 중국의 한국전 포로억류비난 결의안 채택 1952년 알베르트 슈바이처 노벨평화상 수상 1951년 유엔총회 군축위원회 설치안 채택 1950년 50만 북한동포 남하 피난 1950년 독립운동가 김규식 사망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와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내며 독립외교 활동을 벌였던 우사(尤史) 김규식 선생이 이날 평북 만포진 부근에서 69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1881년 부산 동래에서 태어난 선생은 YMCA학관, 배재학당에서 교육을 통한 민족계몽 운동을 펼치다가 1913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1919년 1월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승국 대표들 모임인 `파리강화회의`에 국민대표로 파견돼 독립 외교활동을 벌였으며, 같은 해 4월 구성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총장 겸 주 파리대표 위원으로 임명됐다. 그후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을 위한 외교선전 활동을 벌이다가 다시 상해로 돌아와 민족통일전선운동을 전개했으며, 중일전쟁후 민족혁명당 대표로 활동하다 1944년 임시정부 부주석에 선임됐다. 선생은 광복후 임정요인으로 귀국, 좌우합작 운동에 힘썼으며 민족분단을 막고자 김구 선생과 함께 남북협상에 나서는 등 심혈을 기울이다 6.25전쟁 중 납북돼 이날 사망했다. 정부는 1989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1948년 한미경제원조협정 체결 1948년 제3회 유엔총회서 세계인권선언 채택 1948년 12월 10일 제3차 유엔총회서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됐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전야의 인권 무시, 인권의 존중과 평화 확보 사이의 깊은 관계를 고려하여 기본적 인권 존중을 그 중요한 원칙으로 하는 국제연합헌장의 취지에 따라 보호해야 할 인권을 구체적으로 규정할 것을 목적으로 하여 채택됐다. 전문(前文)과 본문 30개조로 되어 있는데, 그 중 제21조까지는 시민적·정치적 성질의 자유, 즉 자유권적 기본권에 관한 규정이다. 그리고 경제적·사회적·문화적 성질의 자유, 즉 생존권적 기본권에 관해서도 상당한 배려가 되어 있으며,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22조), 노동권과 공정한 보수를 받을 권리 및 노동자의 단결권(23조) 등에 관해서도 상세한 규정이 마련되어 있다. 1950년 제5차 유엔총회에서 12월 10일을 세계인권선언일로 선포한 이래 유엔회원국들은 정부주관으로 이 날을 기념하고 있다.
1948년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사망 불꽃 같은 삶을 살았던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여성화가 나혜석(羅蕙錫)이 1949년 12월 10일 현재의 서울시립남부병원에서 행려병자로 쓸쓸히 숨졌다. 관보(官報)에 기재된 날짜라서, 실은 사망일자마저 확실치 않다. 무덤도 없다. 뛰어난 화가이자 재기넘치는 문필가였고, 우리 사회의 성차별과 이중성을 고발한 페미니스트였던 그의 52년 생애를 한마디 수식어에 가두기는 불가능하다. 5,000여 명의 관람객이 몰리는 대성공을 거둔 그의 첫 여성 개인전람회(1921년3월)는 한국 근대 미술사를 장식한 ‘사건’이었다. 그는 ‘경희’ 등 단편 소설을 여러 편 발표할 만큼 글재주도 뛰어났다. 그의 글은 가부장제 남성들의 이중적 행태를 고발할 때 더욱 빛이 났다. 3·1운동에 참가해 5개월간 옥살이도 했고, 남편 김우영을 따라 이주(1921년9월)한 만주에선 의열단으로 거명될 만큼 독립운동에도 투신했다. 1927년 6월부터 1년 반에 걸쳤던 구미여행은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분기점이 됐다. 파리에서 만난 최린과의 사랑, 이로 인한 남편과의 이혼(30년11월)으로 경제적 궁핍과 사회적 소외라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1934년 남성과 사회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한 ‘이혼고백서’로 또 한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는 결국 세상 사람들의 야유를 등지고 수덕여관, 청운양로원, 시립자제원을 전전하다 이날 52세로 생을 마쳤다
1946년 헤르만 헤세 노벨문학상 수상 1946년 `아가씨와 건달들`의 작가 러니언 사망 1945년 대한독립촉성총동맹 결성 1945년 네덜란드, 국제 연합 가입 1943년 영국, 태평양함대 창설 1937년 소련 외교관 레프 카라한 사망 1936년 근대 희곡의 혁신자 피란델로 사망 - 1934년 노벨문학상 수상 1936년 영국왕 에드워드8세 심슨부인과의 사랑 위해 퇴위 1936년 12월 10일 대영제국의 국왕 에드워드 8세가 퇴위했다. 월리스 위필드 스펜서 심슨이라는 미국 패션 디자이너와 결혼하기 위해서였다. 두 번 이혼한 미국 평민과, 불과 10개월 전 대관식을 치른 총각 왕의 사랑을 영국은 결코 용서되지 않았다. 왕실과 귀족들의 압력도 거셌다. 10일 오후 3시30분 볼드윈 총리가 하원 단상에서 국왕의 칙어를 읽었다. "오랫동안 심사숙고한 결과 짐은 왕위를 버리기로 결정했다." 다음날 밤 10시 왕은 국민에게 결별 라디오 방송을 했다. "사랑하는 여인의 내조와 뒷받침 없이는 국왕으로서의 중책과 의무를 다할 수 없다고 판단, 사랑의 품을 선택했다" 는 왕의 목소리가 나왔다. 그 순간 에드워드 8세는 윈저공으로 격하됐다. 이로써 그는 영국 역사상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난 최초의 왕이 됐다. 1936년 1월 20일 영국 국왕에 즉위한 에드워드 8세(42)는 자신의 연인인 심슨 부인이 이혼녀라는 이유로 성공회 성직자들이 왕위와 사랑 둘 중 하나를 택할 것을 요구하자 결국 사랑을 택하고 프랑스로 떠나 버린 것이다. 윈저공은 결국 자신의 반려자와 프랑스에서 결혼했고 죽을 때까지 조국을 등진 채 주로 파리에서 살았다. 전 국왕 조지 5세의 장남으로 독신이었던 에드워드 8세는 조부인 에드워드 7세를 빼닮아 성격이 활달한 편이어서 왕으로서 자질을 높이 인정받았었다. 사람들은 심슨과 윈저공의 일화를 ‘세기의 사랑’ 으로 기억한다. 심슨 부인은 타임지에 의해 1936년 ‘올해의 인물’ 로 선정됐다.
1935년 경성 부민관 낙성식 1935년 부민관 준공 1932년 일제, 조선소작조정령 공포 1928년 스코틀랜드릐 건축가, 디자이너 매킨토시 사망 1926년 유일한, 유한양행 설립 1922년 안창남 모국 방문 시범 비행 "조선의 비행기가 조선의 하늘에서 처음으로 나는 날이 왔다. 여의도 마당은 넓으나 만 여명의 학생과 수만의 군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 장쾌하고 의미있는 비행을 구경하기 위하여 혹은 열차로 혹은 기차로 혹은 도보로 넓은 벌판으로 향하였다...." 일본에서 비행술을 배워 일등비행사가 된 안창남의 한국 최초 시범비행을 동아일보는 12.11자에서 이렇게 보도했다. 안창남은 중국으로 건너가 비행교관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930년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1913년 호남창의대장 이석용 체포 1913년 타고르, 아시아 첫 노벨상 수상 1910년 프랑스 작가 장 쥬네 태어남 1903년 마리 퀴리, 제3회 노벨상 수상 1903년 12월 10일 마리 퀴리는 남편 피에르 퀴리, 과학자 앙트완느-앙리 베크렐과 공동으로 스웨덴 한림원에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어야 했다. 수상 업적은 새로운 방사성 원소 폴로늄과 라듐 발견이었다. 약소국가 폴란드의 천재 소녀가 프랑스에서 고학 끝에 여성 과학자로는 최초로 노벨상 수상의 영광을 누리는 자리였지만, 그에게 더 중한 것은 연구와 강의였기에 시상식에 참가하지 않았다. 당시 물리학계 최대 연구 테마는 `어떤 종류의 물질이 자발적으로 에너지와 원자구성 입자를 방출하는 현상을 규명하는 것`이었다. 그 현상에 ‘방사능’ 이란 이름을 처음 붙여준 이가 퀴리 부인이었다. 그녀의 방사능 연구는 20세기를 방사능의 시대로 만든 초석이 됐다. 그 위에서 방사능 치료법이 개발됐고, 핵분열 에너지 창출에 의한 전력 생산도 나왔다. 지질학-인류학-고고학자들은 방사성 원소에 의한 연대측정이란 과학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마리 퀴리는 1906년 인생과 학문의 동반자였던 남편이 교통사고로 급사하는 비극을 겪었다. 하지만 그는 시아버지와 두 딸을 돌보면서 여성 최초로 파리 대학 교수가 될 정도로 연구에 몰두했다. 1911년 금속 라듐 분리에도 성공, 노벨 화학상까지 받아 최초로 2회 수상자가 됐다. 1934년 7월 4일 숨을 거뒀는데, 연구를 위해 오랫동안 방사능에 노출되면서 얻은 백혈병이 사인이었다.
1902년 나일강 애스완댐 완공 아프리카 이집트 나일강 유역 애스완에서 사막을 경작하기 위한 관개용 댐인 애스완댐이 1902월 12월 10일 완공됐다. 총길이 약 7천Km, 유역면적 약 300만평방Km인 나일강 수량을 조절하기 위한 시도는 19세기 초부터 시작됐지만 20세기에 들어서야 영국의 기술지도에 의해 본격화됐다. 벤자민 베이커경이 댐설계를 맡아 1898년 2월 착공됐다. 이 공사로 계곡 위쪽 321Km에 걸쳐 인공호수가 조성됐으며 부분적으로는 필라에 섬에 있는 프톨레마이오스 신전의 일부가 호수에 잠겼다. 180개의 수문과 2Km길이의 댐 건설에는 300만 파운드가 소요됐다. 그후 애스완댐은 1934년까지 3회에 걸쳐 확장공사를 해 53억만평방Km의 저수능력을 갖게 됐다.
1901년 한-프랑스 우체조약 비준 1901년 제1회 노벨상 시상식 노벨상의 역사는 20세기 역사의 축소판이다. 수상자들의 면면을 보면 20세기 세계 정치와 과학과 문학에서 빠질 수 없는 이름들이 망라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벨상의 첫 걸음마는 지금처럼 화려하지도 명예롭지도 못했다. 제1회 노벨상 시상식은 20세기의 여명이 밝아오던 1901년 12월 10일 오후 4시30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렸다. 3150만 스웨덴 크로네(약 920만달러)라는, 당시로선 엄청난 거액을 종자돈으로 내놓은 알프레드 노벨의 5주기 날이다. 수상자는 5개 부문 6명. X선 발견으로 물리학상을 수상한 뢴트겐, 평화상을 공동수상한 ‘적십자의 아버지’ 뒤낭의 이름이 낯익다. 그러나 막상 시상식은 크고 작은 말썽으로 뒤숭숭했다. 국왕 오스카르 2세가 요즘 말로 ‘외화 낭비’가 아깝다는 이유로 시상식에 불참해 잔치 분위기에 찬 물을 끼얹었다. 시상식장에 하객이 없어서 종업원, 요리사까지 드레스를 입고 자리를 메워야 했다. 게다가 문학상에서는 노벨이 생전에 좋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장 유력한 후보 에밀 졸라가 제외되고, 다른 프랑스 작가 쉴리 프뤼돔이 뽑혀 공정성 논란마저 빚어졌다. 스웨덴 작가들은 또 “왜 톨스토이에게 상을 주지 않느냐”고 들고 일어났다. 메달도 제작자가 납품날짜를 못 맞추는 바람에 임시메달을 수여하는 촌극이 연출됐다
1898년 미국-스페인 평화조약 조인(괌-필리핀 등 미국에 이양 1896년 발명가 노벨(1833-1896) 세상 떠남 다이너마이트와 전관을 발명해 40대에 세계적 기업가가 됨, 타고난 약골이었던 그는 몽상을 즐겼고 문학을 동경해서 시 소설 희곡 등을 썼으나 그가 죽은 뒤 유족들이 “서툰 문학작품은 위대한 인물에게 흠이 된다”며 3권만 남기고 모두 불태워 버림,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의 유언에 따라 노벨상에 화학, 물리, 의학, 평화상 외에 문학상 추가 1848년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스 제2공화국 대통령으로 당선. 1801(조선 순조 1년) ‘황사영 백서’ 사건의 황사영 서소문에서 처형됨 1520년 종교개혁가 루터 교황의 파문장 불태워버림 1198년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의 주석을 남긴 이슬람 철학자 이븐 루슈드(72세) 세상 떠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