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한 아난>
붓다께서는 자신의 열반을 예고하셨습니다. 예고란 분명히 죽음을 인식하셨다는 뜻으로 예언과는 다릅니다. 대장장이 춘다Cunda의 버섯 공양을 받으신 후 식중독을 일으켰는데, 아마 연로한 몸으로 심하게 탈진하여 완치가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돌발적 상황이 발생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설사로 인한 탈진으로 기운이 쇠잔해졌음에도 유행遊行을 멈추지 않으셨고, 더욱 제자들을 소집하라는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붓다의 사촌인 아난Ananda 존자가 혼자서 병들어 지친 붓다를 힘들게 시봉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붓다는 자신의 몸이 회복 불능에 이르자, 사라쌍수(사라수가 둘 있는 나무) 아래에서 열반을 준비하게 됩 니다.
이때까지도 역시 아난 한 분만이 붓다의 곁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난은 크게 당황하고 크게 황망한 생각이 들어 몇 가지를 붓다께 여쭙니다. 이것이 사실상 붓다의 마지막 유훈이 되어 버렸습니다.
열반 후 장례법에 대해서는 전륜성왕의 예에 준하라는 답을 듣고, 이제 교단은 무엇을 의지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법을 의지하고 자신을 의지하라(법등명 자등명), 계는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소소한 계는 버리라는 유훈을 듣습니다.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한 교단을 이을 후계자 문제를, 아난으로서는 차마 여쭐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난이 붓다의 수행비서격인 시봉 역할을 맡게 된 일은 붓다의 세수世壽 50이고, 아난도 거의 40대 중반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교단회의에서 젊은 제자는 믿을 수 없으니, 사촌동생인 아난이 적임자라고 결정을 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여려 차마 거절하지 못한 아난은 경전에서는 늘 붓다께 야단만 맞는 총명하지 못한 제자로 묘사되곤 합니다. 아마도 아난존자는 성격이 좋고 매사에 신중해, 붓다께서 친근함의 표시로 더 꾸중을 하셨으리라 여겨집니다. 아난이 아둔하였다면 어떻게 1차 결집에서 “나는 이렇게 들었노라…”라고 붓다의 말씀을 암송해 낼 수 있었겠습니까?
붓다의 열반 후 제자들은 교단회의 때마다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면, 아난에게 “붓다께 이 문제는 왜 여쭈어보지 않았느냐?”고 비난의 소리만 해댑니다. 역사적 인물 중에 아난만큼 과소평가되고, 또한 비통한 심정을 느낀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게다가 난데없이 가섭존자가 교단을 장악하니 만감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붓다께서는 사리불과 목건련을 가장 자랑스러워했지만, 그들은 붓다보다 먼저 열반에 들었습니다. 붓다께서는 두 제자의 죽음에 직면하여 마치 친자식의 죽음을 맞이한 것 같은 큰 슬픔에 빠지셨다고 경전에서는 그 안타까움을 전하고 있습니다. 두 제자 중 사리불이 살아 있었다면 단연 그가 교단을 이어받았을 것입니다.
역사에 가정이란 의미가 없지만, 거의 3천년 전 세수 80세로 장수하신 붓다가 아난 없이도 장수長壽를 하셨을까 가정해 봅니다. 붓다께서 식중독에 걸려 설사로 인한 탈진 속에서도 열반지인 쿠시나가라Kusinagara로 향하며, 간간히 나무 그늘에 누워 쉬시며 아난에게 목이 몹시 마르니 마실 물을 달라고 몇 번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아난은 마차가 지나가 웅덩이 물이 흙탕물이 돼서 붓다께 한 모금의 물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붓다의 열반까지 며칠 동안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혼자 감당해야 했던 아난 존자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