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육산악회-12월 송년산행-후기
일시:
장소: 관악산
참석: 박정천(회장), 김경흠(총무),
특기사항:
1. 송년과 신년 산행 때 눈이 내리는 때가 많았다. 이번에도 산을 오를 때 흰 쌀가루를 뿌리듯 하여 바위들이 소금 돌처럼 반짝거리며 보이더니만 하산할 즈음에는 비록 함박눈은 아니었어도 온 하늘에서 하얗게 뿌리는 눈으로 산록(山麓)을 하얗게 덮었고 우리가 도란도란 이야기 하는 소리마저 흡수하듯 잠시 온 천지가 정적(靜寂)에 잠겼다.
오늘 산행코스는 이미 박회장이 어제 신입 사원들을 이끌고 한 바퀴 돌아본 코스라고 하였는데 사당동에서 능선을 타고 연주대를 우회(迂廻)하여 연주암 밑 절터에서 휴식을 취한 후 과천으로 내려가는 조금 평이한 코스였다.
2. 이래저래 수고가 많은 박회장에게 일육회 회원 일동이 감사패와 상품권을 준비하여 전달했다. 하나의 모임을 이끌어 그것도 10년 동안을 한결같이 정성을 쏟았으니 감사패로는 부족하겠지만 함께 산을 즐기는 것 밖에는 달리 고마움을 표시할 길이 없다. (그래서
3. 오늘은 송년산행이라 박회장이 올해 참가를 많이 한 순으로 선물을 준비하여 시상했다. 수상자(受賞者)는 김경흠,
4. 성동고가 자율형 공립고가 되었고 또 장학재단도 설립이 되었다 하여 그 동안 일육회 회원들이 분기마다 장학기금을 모았던 것을 금년으로 마감하기로 하였다.
5. 10년간의 통계자료를 보니 역시 청계산 22, 도봉산(+사패산) 14, 북한산이 12회로 가장 많았다. 부부가 정답게 함께 산행 온 횟수로는
陽川閑談
이발소 그리고 내 사랑의 품
#1—1961년이거나 1962년 봄
중학생 때의 일이다. 어느 일요일 집 근처 이발관에서 이발을 했다.
이발사 아저씨가 “너 어떻게 깎아주련?”하고 물었다. 에구, 물으나 마나 중대가리처럼 빡빡 깎는 것을 뻔히 알면서 누굴 놀리나 싶었다. ‘아저씨가 별걸 다 묻네’ 생각하며 그냥 “잘 깎아주세요” 라고 했는가 보다.
월요일 두발(頭髮) 검사를 하는데 K 담임선생이 다가와 흘겨보더니 나무막대기로 내 대갈통을 땅하고 치더니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더니, 요놈의 자식이 머리를 돌려 깎아?”라고 고함을 쳤다.
‘아니, 이게 웬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냐?’ 영문도 모른 채 몇 차례 더 맞고 나서 나는 그저 억울하기만 했다. ‘그래 내가 공부를 못해 꼴찌 그룹에 속해서 사람을 깔아뭉개는 것인지는 몰라도 허나 그게 머리하고 무슨 관계가 있냐? 야구한다고 꺼떡거린다고 보여서 그런가?’ 내가 생각하기로는 전혀, 네버 임에도 도대체 내가 왜 맞아야 하는가를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더군.
뒷날 생각해보니 아마 그때 윗머리를 다 깎지 않고 요즘 해병들 머리처럼 그렇게 깎았던 것인지 모르겠다. 이발사 아저씨가 그 나이 애들의 최신유행이라고 그리 깎아주었을까? 하여간 나는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되 불량학생들과 같은 취급을 받은 셈이었다.
그날은 수업도 빼먹고 학교 뒷동산에 올라 풀밭에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며 진실, 사실, 오해, 거짓 이런 것들이 과연 무엇인가 정의해보려고 했고 학교도서관에서 읽고 있었던 열국지(그것이 열국지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춘추시대의 역사소설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에서 간신들의 모함으로 죽어가는 충신들의 심정이 이런 것이겠구나 하고 막연히 생각했었던 기억이 불쑥 떠오른다.
#2-- 1964년 혹은 1965년 여름
고등학교 시절의 이발관은 어릴 때의 기억과는 달리 꽤 화려해지고 서비스도 달라졌다. 이발사가 이발도 해주고 면도도 해주고 머리도 감겨주었는데 언제부터인가는 모르겠으나 이발도 공정별(工程別)로 분화되기 시작했다. 면도사(面刀師)는 아가씨들이 맡기 시작하였고 이발 후에 머리 감겨주는 것은 갓 들어온 새내기 이발사가 맡기도 하고 아예 머리감기는 일만 하기도 하였다.
나는 수염도 그리 많이 나지 않아 언제부터 면도를 하기 시작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것은 아마도 아가씨 면도사가 어른들만 면도해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느 여름 한적한 일요일 날이었지 아마? 그날은 이상하게도 손님이 별로 없고 이발사와 여자 면도사 두 사람만 있었던 아주 나른한 오후였었다. 이발을 하고 나서 머리를 감는데 어째 왼쪽 어깨가 뭉클하며 아주 기분이 이상야릇했다. 내가 보아 오기로는 이 이발소 역사상 아가씨가 머리를 감겨주는 일은 없었는데 어쩌냐 그날은 태극기 날리는 땡잡은 날이 된 것이다.
내 머리통이 부드럽고 탱탱한 면도사 아가씨의 젖가슴에 닿을 때 머리에 쏟아지는 물만큼이나 내 온몸에서 열기(熱氣)와 희열(喜悅)과 전율(戰慄)이 함께 폭발하듯 터져 나왔음에도 보물 숨기듯이 가슴속에 파묻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어느 순간 말초신경(末梢神經)을 자극하는 성적(性的)인 느낌은 없어지고 평온하고 평화로운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이럴 때 자주 쓰이는 말이 “어머니의 품과 같다”고들 하지만 실상 어머니의 품은 갓난애일 때의 기억이니 사실 정확한 것은 아니고 그냥 그런 기분이 든다는 것이거나 잠재의식 속에 잠겨있는 느낌일 것이다. 오히려 “누나의 품과 같다”고 하면 맞아 떨어지지 않을까 싶으나 나에게는 그런 누이가 없었으니 ‘그런 느낌’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일로서 그저 ‘평화롭고 안온했다’라는 말로 밖에 표현이 되지 않는다.
어쩌면 어느 일요일 혼자 집을 지키고 있는데 햇살은 따갑게 내려 쬐고 이날 따라 온갖 잡소리도 들리지 않고 조용한 가운데 이따금 고물장수의 가위 소리만 울리는 무료(無聊)하면서도 평화로운 정적에 묻혀 있는 그런 느낌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면도사 아가씨가 머리를 감겨주던 그 시간은 짧았을 지는 몰라도 ‘이대로 영원히 끝이 없었으면’ 하는 그런 바램이 있는 시간이었다. 물론 그 이후로는 그런 느낌을 갖는 소박한 시간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3-- 1980년 또는 1981년 가을
회사에 다닐 때 담당업무는 무역(貿易)이었는데 업무상 자주 부산으로 출장가 하역(荷役)이나 통관(通關) 수속을 하는 때도 있었다. 이 시대는 제법 산업근대화의 덕택으로 사회전체가 조금씩 퇴폐(頹廢)의 분위기도 생겨났다. 주머니가 두둑해지면 그 주머니를 빼먹으려는 갖가지 수단과 방법이 생기는 것이 당연지사로 그런 것 중의 하나가 퇴폐이발소의 등장이었다.
처음에는 피곤도 풀고 잠시 쉬고 갈 수 있게 마사지도 해주는 휴게소의 역할이었는데 에헤야 얼럴럴 상사디야, 컴컴한 그 곳을 그냥 두면 매우 섭섭하지 않겠는가? 물론 다는 아니었지만 이래저래 만지고 흔들고 하더니 드디어는 방앗간까지 겸업(兼業)하게 되는 곳도 생겼다. 나쁜 풍속의 폐단은 이단(異端)보다도 나쁜 것으로서 대제국 로마도 지나친 퇴폐와 환락으로 멸망했다지?
일이 대체로 잘 끝나서 거래선(去來先)과 한잔 진하게 걸치고 나서는 애매 몽롱한 기분에 취해 어디서 편안하게 쉬어볼까 하다 ‘그래 사람이 되어서 경험할 수 있는 일은 다 경험해보아야 하지 않겠나’ 하며 나도 한번 퇴폐의 늪에 빠져보리라 다짐을 하며 어느 지하 이발관으로 들어갔다.
고요(?)한 그 곳에서 대충 머리를 싹싹 깎고 나니 예쁜, 아니 예쁜지 안 예쁜지는 어두침침하여 알 듯 모를 듯하나 어쨌든 아가씨가 척 들어와 칸막이 커튼을 좌르르 둘러치고 면도하고 세발하고 나서 마사지 서비스 순서로 진입하여 이리저리 제 마음대로 주무르게 되었다.
그런데 아이고 어느 순간인가, 으악, 바지가 반쯤 훌렁 벗겨지는데, 그때 나는 “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라고 했을까? 아니면 “아니, 고얀 X, 함부로 나의 귀중한 철저(鐵杵)를 끌어내어 네 마음대로 옥문(玉門)을 두드리느냐” 라고 했을까? 흐흠, 이 대목부터는 아주 말끔하게 잊어서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는데 어쩌나?
아마도 분연히 자리를 떨치고 황야의 무법자처럼 표연(飄然)히 떠나갔겠지 뭐, 휘파람 소리를 배경으로—으하하하.
#4-- 2007년 아니면 2008년 겨울 이후
처음 이발소에 갈 때처럼 집사람의 손에 이끌려 미장원에 가서 커트도 하고 퍼머도 하다 보니 딸 같은 아가씨들이 야살스럽게 손질해주는 것에 이제는 꽤 익숙해졌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미장원에도 남자미용사가 점점 늘어나고 있으니 수십 년 전의 이발소와는 흐름이 거꾸로 되고 있나 봐. 그래서 세월 따라 유행도 변한다지?
그런데 그 동안 이용해왔던 블루클럽이라는 이발소 체인은 2번만 더 가면 한번은 공짜로 이발을 할 수 있는데 그냥 놀려두고 있구나.
#마무리
나는 가끔 하늘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누구는 수업을 빼먹어도, 교통위반을 해도, 새치기를 해도, 슬쩍 공금을 빼먹어도 별탈이 생기지 않았다. “야, 요령이 끝내주네” 라고 오히려 찬사 아닌 찬사를 받기도 하고 본인도 으쓱대며 ‘세상은 말이야, 이렇게 눈치가 있어야 잘 사는 거야’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꼭 내가 그렇게 하면 누가 딱 들여다보고 핀셋으로 꼬집어내듯이 잡히고 마는 것이 아닌가? 나 스스로는 남들이 보듯 그렇게 범생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나이 들어 많은 책을 읽다 보니 나 같은 범인(凡人)뿐 아니라 고금(古今)의 재주가 뛰어난 많은 재자가인(才子佳人)들도 그런 생각을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청성
같은 사안(事案)이라고 해도 다 생각하기 나름인 것이 요령과 눈치가 없다는 것을 다시 좋게 해석하면 작은 일에 낭패를 보고 조심하게 되면 더 큰 재앙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조그만 잘못을 해도 잡히지 않으면 그보다 더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되고 그것마저도 요행히 벗어나면 더욱 큰 잘못을 범해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에 동아건설 경리과장이 수백억의 돈을 횡령하여 결국 잡혀 들어간 것이 바늘도둑이 소도둑으로 전락한 하나의 예가 아닌가 한다.
그래, 담임선생도, 퇴폐이발소의 아가씨도 어쩌면 나를 계도(啓導)하게한 또 다른 면에서의 스승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꼭 되돌아가보고, 꼭 다시 갖고 싶은 시간이 있다면 내 머리를 감겨주던 면도사 아가씨의 품에 있던 시간이지만 그때의 안온(安穩)함이 과연 어떠했는지는 이제 와서는 그저 문득 스치는 느낌일 뿐이고 지금 집사람의 가슴을 헤집어 젖가슴에 머리를 묻을 때에야 비로소 그때의 안온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새들이 서로 자기의 노래를 울어대며
둘러싼 도시의 소음을 덮어버린다
나뭇가지 밑의 잔디는 푸르기만 하고
떨리는 양들의 메-에 소리로 가득하다.
(Birds here make song, each bird has his,
Across the girdling city’s hum
How green under the boughs it is!
How thick the tremulous sheep-cries come!)
그렇다. 그것은 바로 M.아놀드가 읊고 있는 ‘켄싱턴공원’ 중의 한 귀절과 같은 “평화로움” 바로 그것일 것이다.
(陽川書窓에서
첫댓글 이발소의 변천사를 적나라게 묘사한 글이지만 글의 내용이 의미심장하고 심오한 뜻이 풍기는것 같구먼...
양천서창의 글 솜씨로 보아 한 두해 쓴글이 아님을 짐작하며 훌률한 글 솜씨로 일육산악회 동정을 잘 알
려주기 라네...
금년도 마지막 산행에 불참하여 미안하며 산행 모임이 주일 아침이라 매번 참석하는 것이 어려울것 같읍니다.
그간 같이 산행했던 친구들 고마웠고 일육산악회가 동창 동호회 모임의 초석이 된만큼 앞으로 박회장,
김총무를 중심으로 무궁한 발전을 바랍니다.
사춘기때의 생활, 사회생활등, 지난날의 마음 설레고 즐거웠던 시절이 생각나게하는군~~~ 양천서창의 무궁무진한 소재를 가진 글로서 일육산악회를 항상 빛내주어 감사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