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06,09,01]은 방랑삼천리[放浪三千里] 3일차[三日次]로서 덥다고 하는 8월[八月]도 다 지나가고 9월[九月]이 시작[始作]되는 첫날이다.
한국[韓國] 정신문화[精神文化]의 수도[首都]인 안동[安東]의 수정궁[水晶宮]모텔에서 하루밤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고 아침을 맞이하여 어제저녁에 우박사[禹博士]로 부터 든든하게 대접[對接]받은 등심 덕분[德分]에 아침 생각이 전[全]혀 없다.
마나님도 하루밤 잘 자고 피로[疲勞]를 완전[完全]이 회복[回復]했다고 하면서 생기[生氣]가 도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차수[車首]를 남[南]으로 돌리니 안동[安東] 대구간[大邱間] 4차선[四車線] 국도[國道]가 여느 고속도로[高速道路] 못지 않는 시설[施設]로서 그 놈의 감시[監視]키메라가 미운 안개가 아니라 미운 애물 [碍物]단지로 원성[怨聲]의 대상[對相]임을 알게 한다.
의성[義城]을 지나고는 4차선[四次線]의 5번[五番] 국도[國道]는 버리고 2차선[二車線]의 고부랑 길인 28번[番] 국도[國道]길로 접[接]어 든다.
경북내륙[慶北內陸]의 명산[名山]의 하나인 멀리서 바라 보면 여자[女子]가 산발[散髮]을 하고 하늘을 보고 반듯이 누워있는 모습과 흡사[恰似]하다는 금성산[金城山]을 바라보며 지명[地名]도 의성군[義城郡] 금성면[金城面]의 소재지[所在地]인 탑리[塔里]를 지나게 되었다.
이곳은 손위 동서[同壻]하나가 70이 넘은 고령[高齡]으로 아직도 젊은이 못지 않는 정력[精力]으로 과수원[果樹園] 농사[農事]에 벼 농사[農事]를 짓는 처형댁[妻兄宅]이 있으므로 자주 드나들었던 지방[地方]으로 낯설지 않은 고장이다.
지금[至今]은 한창 바쁜 농사[農事]철로서 방문[訪問]하면 일손을 뺏을 우려[憂慮]가 있으므로 애초[碍初]에 들리지 않기로 하였으나 집을 빤이 비라보고 그냥 간다는 것은 나나 마누라나 끌리는 정[情]에는 어쩔 수 없이 가는 날이 장[場]날이라 오늘이 바로 탑리[塔里] 장[場]날로서 혹시[或時] 장[場]에 오지 않았나 하고 장[場]터를 한바퀴 돌아 보는 것으로 마무리 하고는 가야 할 길을 갈려고 하였으니
마나님은 생각이 달라졌는지 잠간[暫間]만 들리는 조건[條件]으로 처형댁[妻兄宅]을 방문[訪問]하기로 하였다.
장[場]터에서 만났으면 사정[事情]이 조금 달라 졌을런지 모르겠으나 일단[一但]은 지척[咫尺]에 있는 과수원[果樹園]으로 찾아 드니 여식[女息]들은 다 출가[出嫁]시키고 아들 하나 있으나 직장생활[職場生活]로 객지[客地]에서 살림을 하는 탓에 두 부부[夫婦]만이 오늘도 쉬지 못하고 사과[沙果]의 마지막 결실[結實]에 상품가치[商品價値]를 높이고 병충해[病蟲害] 방제[防除]를 위[爲]한
농약살포[農藥撒布]를 준비[準備]하고 있으며 처형[妻兄]은 빨갛게 익은 고추를 따느라고 여념[餘念]이 없는 모습을 보고는 마나님은 고추를 따는데 거들고 나는 농약살포[農藥撒布]를 거들려고 하였으나 자가용[自家用] 차량[車輛]과 맞먹는 살포차량[撒布車輛]으로 나무사이를 누비며 농약[農藥]을 뿌리는 데는 가까이 오지 말라는 부탁[附託]으로 내가 도을 수 있는 일은 이무 것도 없다.
만여평[萬餘坪]이 넘는 과수원[果樹園]에 농약[農藥]도 한나절이면 끝낼 수 있는 모습을 보고는 이제는 농기계[農機械]없이는 아무 농사[農事]도 지을 수 없음을 알 수 있고 지금[至今] 한창 익어 가는 사과[沙果]를 보노라니 강[强]한 햇볕으로 올해는 사과[沙果]의 품질[品質]도 좋고 가격[價格]고 괜찮다고 하면서 농사[農事]의 보람을 찾을 수 있다고 하는 데는 고생[苦生]한 보람이 있다고 생각된다.
동서[同壻]는 학사농부[學士農夫]로 젊을때는 대구[大邱]의 명문[名門] 영남대학[嶺南大學]의 전신[前身]인 청구대학[靑邱大學] 법학과[法學科] 출신[出身]으로 동기[同期]들이 법조계[法朝界]에서 두각[頭角]을 나타내고 한 때는 우리나라의 사법계[司法界]에서 알아 주는 인맥[人脈]으로 아는 사람도 많았으니 이제는 고령[高齡]으로 모두가 현역[現役]에서 물러나 자연[自然]을 벗삼고 초야[草野]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한다는 소리를 들으며 찾아오는 세월[歲月]앞에는 장사[將士]없고 이제는 힘드는 농사[農事]일도 그만 둬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게 우리니라의 농촌[農村]의 현실[現實]임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친정[親庭]에라도 온 듯한 착각[錯覺]으로 마나님은 좀처럼 발길을 돌릴 생각을 하지 않고 처형[妻兄]과 나들이를 하면서 금방[今放]들려서 안부[安否]나 알고 가기로 하였으나 여자[女子]가 간다간다 하면서 얘를 셋이나 낳은 후[後]에 간다는 속담[俗談]처럼 도무지 길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기사 경주[慶州]에서는 누가 오라고 기다리는 데도 없고 갈 데도 마땅치 않다.
딸년은 도둑년이라는 말을 친정[親庭]에 오면 이것저것 챙기는 모습을 두고 한 말로서 친정[親庭]이라도 되는양 마나님은 이것저것 챙기기 시작[始作]한다.
할 일 없는 나는 시원한 나무 그늘을 오가며 조생종[早生種]인 사과[沙果]맛을 보는데 한 두 개[個]를 먹고 나니 사과[沙果]를 거들떠 보기도 싫다.
이집 사과[沙果]는 내가 투병[鬪病]으로 고생[苦生]할 무렵에는 계속[繼續]먹을 수 있도록 보내준 걸 고맙게 생각하고 입구[入口]에 고맙다는 문구[文句]의 입간판[立看板]이라도 하나 세원준다는 말에 모두가 한 번[番]씩 웃을 수 있었다.
제일[第一] 가까운 곳에 가장 많이 달린 큰 사과[沙果]나무 두 그루를 내 나무라고 엿장사 마음대로 정[定] 하고는 가을철에 사과추수[沙果秋收]를 하러 온다는 나의 말에 모두가 또 한 번[番]씩 웃을 수 있었다.
좀처럼 갈 기미[氣味]를 보이지 않는 마나님의 눈치를 보려니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갈 심산[心算]으로 무슨놈의 변덕[變德]이 죽[粥] 끓듯 한다는 나의 핀잔에는 아랑곳 없이 꼼짝하지 않는 데는 그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
지는 것이 이긴다는 말을 이런걸 두고 한 말이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하는데로 내버려 두기로 하였다.
여자[女子]들이 친정[親庭]가면 하던 멀미도 하지 않고 시댁[媤宅]을 가게 되면 안 하던 멀미도 한다는 말이 생각나며 경주[慶州]에는 이제 아버님 대[代]의 마지막 남은 고모[姑母] 한 분[分]이 계시는데 오늘 들린다는 말을 듣고는 시간[時間]을 끌기 작전[作戰]으로 처형[妻兄]과 나들이를 하면서 어느듯 저녁을 맞이하게 되었다.
고모댁[姑母宅]의 연락처[連絡處]를 적어 놓은 메모지를 깜빡 잊고 챙기지 못한 과오[過誤]로 서울의 김서방[金書房]집을 찾는 식[式]의 집을 찾아야 하는 번[繁]거로움으로 다음으로 미루고 고모댁[姑母宅] 방문[訪問]은 취소[取消]하기로 하고 오늘은 신라천년[新羅千年]의 경주[慶州]가 아니고 부족국가[部族國家]의 하나인 금성산[金城山] 자락에 자리잡은 조문국[召文國]의 경덕왕릉[景德王陵]도 지
난 번[番]에 살펴 보고 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저녁을 먹을려고 하니 눈치도 보이고 밥맛이 별[別]로다.
나는 별[別]로 어렵게 생각하지 않으나 처형[妻兄]은 나를 무헉 어렵게 대[對]하는 데는 자주 오고 싶어도 처형[妻兄]의 눈치가 보인다.
멀리 바라다 보이는게 대구[大邱]의 진산[鎭山]인 팔공산[八公山] 자락으로 이제부터는 팔공산[八公山]을 중심[中心]으로 어디를 가도 높이 솟은 팔공산[八公山]은 망망대해[茫茫大海]의 이정표[里程標]인 등대[燈臺]처럼 영남내륙[嶺南內陸]의 마음의 고향[故鄕]으로 생각된다.
경상도[慶尙道] 하면 산[山]하나 없는 넓은 평야[平野]로 연상[聯想]하지만 실[實]은 그렇지 못함은 태백산[太白山]과 소백산[小白山]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白頭大幹]을 위시[位示]하여 내륙지방[內陸地方]에는 영양[英陽]의 일월산[日月山]은 동해[東海]에서 뜨는 해와 달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다 하여 일월산[日月山]으로 아름이 붙었고,봉화[奉化]의 진산[鎭山]인 문수산[文殊山]의 정기[精氣]로
영남[嶺南]에서 고관대작[高官大爵]을 많이 배출[配出]하였고,청량사[淸凉寺] 유리보전[琉離寶殿]을 품고 있는 청량산[淸凉山],해방이후[解放以後] 공비[共匪]들이 진[陣]을 치고 아지트로 활용[活用]되었던 풍낙산[豊樂山],안동[安東]의 학가산[鶴駕山]은 가마처럼 [生]겼다는 전설[傳說]이 있고 부석사[浮石寺]와 맞먹는 오래죈 목조건물[木造建物]인 봉정사[鳳正寺] 대웅전[大雄殿]을 안고 있다.
영주[榮州]의 봉황산[鳳凰山]은 해동화엄종찰[海東華嚴宗刹]인 부석사[浮石寺]를 품고,청송[靑松]의 주왕산[周王山]은 천년고찰[千年古刹] 대전사[大典寺]와 주왕[周王]의 전설[傳說]을 안고 있고,포항[浦項]의 내연산[內延山]은 보경사[寶境寺]와 청정계곡[淸淨溪谷]으로 유명[有名]하고,대구[大邱]의 팔공산[八公山]은 동화사[桐華寺]와 은해사[銀海寺]를 비롯한 많은 가람[伽籃]과 영험[靈驗]한
기도처[祈禱處]로 유명[有名]한 갓바위를 거느리고 있으며,청도[淸道]의 운문산[雲門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規模]가 큰 비구니[毘丘尼]들의 수핼도량[修行道場]인 운문사[雲門寺]를 안고 있으며,김천[金泉]의 황악산[黃岳山]은 조계종[曹溪宗]의 교구[敎區] 본사[本寺]의 하나인 직지사[直指寺]를 한자락에 품고있다.
의성[義城]의 승운산[勝雲山]은 고운사[孤雲寺]를 안고 있으며 금성산[金城山]은 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불가사의[不可思疑]한 빙계계곡[氷溪溪谷]으로 유명[有名]하다.
선산[善山] 구미[龜尾]의 금오산[金鰲山]은 금오탁시[金烏啄屍]의 명혈[名穴]의 정기[精氣]로 박대통령[朴大統領]을 배출하였으며,경주[慶州]의 토함산[吐含山]은 너무나도 유명[有名]한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石窟庵]을 품고 있고,이외[以外]에도 알려지지 않은 크고 작은 산[山]들은 저마다 특징[特徵]을 갖고 있으며 산세[山勢]도 만만한게 아니고 강원도[江原道] 산[山] 못지 않는 험[險]한 모습
을 하고 있으며 명산[名山]의 정기[精氣]로 대통령[大統領]도 두 분[分]이나 배출[配出]하였으니 금오산[金鰲山]의 정기[精氣]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大統領]이 탄생[誕生]하였고 대구[大邱]의 팔공산[八公山] 정기[精氣]로 노태우[盧泰愚] 대통령[大統領]을 배출[配出]하였으니 경북[慶北]사람들의 자존심[自存心]도 무시[無視]할 수 없으며 대단[大端]하다고 생각된다.
한 때는 우리나라 야당[野黨]의 정치일번지[政治一番地]로 알려진 대구민심[大邱民心]이 곧 대힌민국[大韓民國]의 민심[民心]으로 여당[與黨]도 언제나 만만이 볼 수 없었던 대구[大邱]의 자존심[自存心]이 지금[至今]은 간곳 없고 우리나라의 제3도시[第三都市]의 시세[市勢]마져 인천[仁川]에 넘겨주고 와신상담[臥薪嘗膽] 잃은 명예[名譽]를 회복[回復]하기 위[爲]하여 절치부심[切齒負心]으로 민관군[民官軍]이 일체[一體]가 되어 노력[努力]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경주[慶州]로 가려던 차수[車首]를 대구[大邱]로 우회전[右回轉] 하는 데는 이제부터 나의 통제[統制]는 먹히지 않고 오늘 저녁에 마나님의 초등학교[初等學校] 코흘리게 동창[同窓]들의 모임이 대구[大邱]에서 약속[約束]되어 있다고 하면서 참석[參席]하기 위[爲]한 작당[作黨]이 벌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으니 헨드폰이 불이 나기 시작[始作]한다.
무슨놈의 동창회[同窓會]를 덥고 복잡[複雜]한 시내[市內]에서 하는냐고 내가 한마디 거들었더니 남의 제사[祭祀]에 밤도 좋고 대추도 좋으니 제발 간섭[看涉]은 하지 말라는 한마디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동창회[同窓會]는 저녁 늦은 여섯시에 계획[計劃]되어 있으니 그 동안 5~6시간[時間]은 어디서 뭘 하냐고 하였더니 걱정하지 말란다.
선산[善山] 해평[海平]에 있는 도리사[桃李寺]를 들려서 사하촌[寺下村]에 있는 한 식당[食堂]에서 백숙[白熟]으로 점심[點心]을 대접[對接]받고 팔공산[八公山] 자락의 시원한 계곡[溪谷]에서 4천만[四千萬]의 오락[娛樂]인 칼라테레비를 두 어 시간[時間] 보는 동안 약속시간[約束時間]이 후딱 닥아온다.
오늘은 입을 꼭 다물기로 하고 마나님이 하는 데로 내버려 두었다.
나를 어느집 아파트에 내려 놓더니 집을 잘 보라는 말과 함께 저녁에도 찾지 말라는 엄명[嚴名]으로 일당[一黨]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는 팔자[八字]에 없는 집을 봐야 하는 세퍼드 신세[身勢]가 되고 말았으니 에라 모르겠다 하고 프로야구 생중계[生中繼] 시청[視聽]으로 빈집을 지켜야 했다.
자다 보다 보다 자다를 반복[反復]하며 무료[無料]한 하루 저녁을 보내야 하니 개 보름 세듯 한다는 말이 이럴때 써 먹으라는 말로 떠 오른다.
꼼짝없이 하루저녁을 세퍼드 신세[身勢]로 집을 보는데 밤이 이슥해서야 한떼의 여자[女子]들이 돌아오는데 아직도 못다한 이야기가 있는지 쉴새 없이 수다를 떠는 데는 귀를 막아야 했다.
그들은 수다로 밤을 새우고 나는 외로운 밤을 보내야 했으니 오늘 하루만은 아무소리 하지 않기로 하고 그들이 하는데로 내버려 두고 하루 밤을 독숙공방[獨宿空房]으로 보내야만 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