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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회 현충일에 한훤당 김굉필 선생님의 발자취를 따라 그분의 종택과 도동 서원을 갔다 오다>
<제66회 그린 웰니스 답사 기향문>
애초에는 현충일에 다산 정약용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강진을 갔다 올 계획을 세웠으나 참여 희망자가 저조하여 몇몇이서 대구 수목원-남평문씨 세거지-김굉필 선생 종택- 도동 서원을 계획하여 돌아 보고 왔다.
09시에 노포역에 모여서 7인승 차에 올랐다. 울산, 양산, 부산등에서 모여 5분이 함께 했다. 산림기사, 조경기사, 원예치료사 분들이었다.
차에서 스스로 준비한 김밥. 방울 토마토, 음료 등을 나누어 먹으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고속도에 집입 했다. 준비 해 오신 선생님께 감사 드리고 싶다.
5명에 7인승 차라 공간이 넓어서 무척 편안 했다. 차를 기꺼이 제공한 분은 작년에 대구 플라워쇼에도 함께하셨던 최선생님으로 구면이었다. 하루 종일 운전하시느라 무척 수고가 많으셨다. 깊이 감사드리고 싶다.
차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그 동안 공부가 되어있던, 김굉필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지루하지 않게 대구 수목원에 도착 했다. 출발 1:30분 정도 소요 되었다.
대구 수목원은 쓰레기 매립장을 이용하여 대구 지하철에서 파낸 흙을 복토하여 만든 공원으로 시민들의 나무를 1,000만 그루나 기증 받아서 조성한 모범적인 수목원이다.
여러번 방문 했지만 6월에는 처음 온 것 같다. 6월부터는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 되는 계절이라 숲 속이 아주 시원함을 느꼈다.
항상 돌아보는 코스로 입구에서 좌측을 돌아서 대형 유리온실(선인장) 쪽으로 향했다. 들리는 곳곳에 나무 및 풀꽃에 설명판들이 붙어 있어서 간간히 설명을 하면서 함께 걸었다. 온대 지방 참나무과에는 6종류가 있다.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이다, 함께 한분 중에 산림기사분이 있어서 특징들을 잘 설명하셨다. 나 역시 아주 오래 전에 숲에 관심이 많아서 공부했던 기억 들이 새록새록 생각이 떠 올랐다.
대형 선인장 온실 앞에서 컨테이너 박스에 여러 종류의 무궁화가 심겨져있었고, 역시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다. 설명판에 나이가 20년생 전후로 기록 되어 있었다. 무궁화에 대한 설명을 했다. 단심계(홍단심, 백단심, 청단심) 배달계, 아사달계(상아달, 좌 아사달, 우아사달) 등을 설명하니 단번에 이해했다. 설명판에 향 단심이란 표시가 있었는데, 특이한 품종이라고 생각 했다. 선인장 온실을 자세히 돌아보고 가끔식 식물에 대한 설명을 하고(부겐베리아, 금호 선인장, 선인장과 다육 식물의 차이점 등등) 뒤쪽 난대림 및 야생화 분경 온실을 돌아 봤다. 야생화 분경은 상당한 수준의 분경 작품이 진열 되어 있었다. 오래전부터 대구 지역은 야생화 전시회가 전통이 있었는데, 이곳 유리 온실에서도 유감없이 실력이 보여 졌다. 옆 온실은 난대림 온실이었다. 난대림은 주로 상록 활엽수가 사는 곳이라 녹나무 등 상록 활엽수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나누었다. 녹나무와 거북선의 당치기(박치기) 등등의 이야기도 함께 공감하면서 이순신 장군의 지혜를 깨우치기도 했다.
대형 유리 온실을 나서면서 왜 부산은 유리 온실다운 온실 하나 없는지의 안타까움도 토로해 보았다.
대구시민 천만그루의 기증 탑이 높다랗게 세워진 것을 보고 모두들 대구 시민들의 식물 문화 수준에 감탄하기도 했다.
제법 큰 규화목을 돌아보고, 산림 박물관 앞에서 돌아서 나왔다.
분수대 옆의 보리, 밀밭을 보고도 꾀나 깊은 생각을 해 보았다.
요즘 젊은 사람이나 어린이들은 보리나 밀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교육적으로 밀 보리를 심어 놓은 것에 대해서 수목원 관리자의 깊은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오늘 쪽으로 돌아 내려오면서 여러 테마별 수목원의 식물 디자인의 정성을 엿 볼 수 있었다.
몇 년전 대구 수목원을 방문 했을 때 가을에 국화 전시회가 아주 휼륭했는데, 가을에 다시 한번 들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입구의 웅장한 폭포 물 소리를 뒤로하고 대구 수목원을 나왔다.
<남평문씨 세거지>
문익점 선생의 18대손 문경호가 1840년에 터를 닦아 남평 문씨 일족이 모여 살던 곳이다. 원래 절이 있던 명당터를 구획하여 집터와 도로를 반듯하게 정리하고 집을 지었다고 한다.
현재 아홉 가구의 살림집과 수봉정사(수백당), 광거당, 인수문고
등이 한울속에 정연하게 자리잡고 있는데, 풍치 있는 토담으로 둘러싸인
부지 안에 총 70여 채의 전통 와가가 들어서 있다.
광거당은 문중의 자제들이 학문과 교양을 쌓던 수양장소이다. 또 인수문고는 문중의 서고로, 규장각 도서를 포함한 책 1만여 권을 소장하고 있다. 처음에는 작은 규모였으나 후에 크게 늘려지었고, 도서열람을 위한 건물도 따로 지어놓았다. 모두 문이 잠겨 있어서 들어 가지 못했다.
우리가 찾은 수백당은 손님을 맞고 문중의 대소사를 의논하던 곳으로 건물의 격조가 높고 품위가 있어 보였다. 1936년 수봉 문영박 선생을 기리기 위해 5형제가 함께 지었다고 한다. 당시 남씨 문중의 제력과 세도를 가름 할 수 있었다.
특히 마당 한가운데에 서 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와 우측 정원의 아름다운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고, 우물 또한 대리석으로 장식하여, 그 아름다움과 경제력을 짐작 할 수 있었다. 안 채 대문을 들어서면 대문 양 옆으로 심겨져 있는 능소화가 필 때쯤이면 이 또한 무척 아름다움을 나타낸다. 몇 년 전에 능소화가 필 때 찍은 멋있는 사진이 떠 올랐다. 옥잠화 모란 등등 옛 사대부 가옥의 식물들이 지금도 심겨져 있다.
갔다 와서 정리를 하다 보니 이 마을 골목 골목엔 능소화가 유독 많고 겹 찔레, 봄이면 홍매화를 비롯한 매화 꽃도 유명하다고 알려져 있다.
최근에 대구 시장을 지낸 문희갑 시장이 이곳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문 시장은 대구시가 다른 시 보다 여름에 덥다는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서 시에 나무를 많이 심은 시장이다. 분만 아니라 대구 수목원을 만드신 분이고 대구 수목원을 만들면서 시빈들로부터 600만그루의 나무를 기증 받아 꾸민 휼륭한 분이다.
연못(연흥원)가 첫 집이 그분이 살고 있는 집이다. 집 앞에 텃밭이 채소 밭이라기 보다는 완전 갖가지 꽃이 심겨져 있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가꾸고 있는 것을 갈 때 마다 항상 놀라워 했는데 나무를 사랑하는 분시장이 이마을에 직접 살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웠다. 몇 년전 크게 만든 연못(인흥원)과 목화밭, 목화 밭 앞의 문익점 선생의 좌상 등등도 문 시장님의 공적으로 보여졌다.
고택에서 보기 힘든 긴 흙담, 깨끗하게 정리 된 안길, 담 아래 간간히 심겨진 원추리, 맥문동 등등 마을 전체가 예사롭지 않은 정원 등등은 문시장님의 아이디어인 것을 생각 되어 진다.
옛날에는 개방 되었지만 지금은 개방 되어지지 않은 광거당 주변의 회화나무, 또한 여느 고택 마을에서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문중에 많은 자녀들의, 학자가 배출 되라는 염원에서 심은 학자수 일 것이다.
갔다 와서 정리하다가 알게 되었는데, 세거지에서 조금 떨어져 위로 올라가면 마비정이란 벽화 마을이 있다고 한다.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으로 알려져 있고, 노부부가 운영하는 식당의 고등어 정식과 직접 담가서 판매하는 농주 맛이 일품이라니 다음 갈 때는 이곳을 반드시 들러서 음식을 맛 보고 싶다.
마비정 마을은, 말(馬)의 슬픈 전설을 간직한 대구 달성군 화원읍 본리2리 마비정(馬飛亭) 마을이 최근 녹색 농촌체험마을사업을 통한 '벽화마을'로 탈바꿈해 대구는 물론 전국적인 관광명소로 부각되고 있다. 또한, SBS 인기 예능프로그램인 런닝맨 촬영장소로 알려져 있어 많은 내·외국인의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마을 전체가 60~70년대의 정겨운 농촌의 풍경을 토담과 벽담을 활용하여 벽화로 꾸며져 있으며, 국내 유일의 연리목+연리지 사랑나무와 국내 최고령 옻나무, 대나무 터널길, 이팝나무 터널길 등 자연과 호흡하며 벽화를 감상할 수 있다고한다.
이곳서 20Km 떨어진 현풍 할머니 곰탕집에서 점심을 해결하였다. 전국에 알려진 맛집으로 알고 있다. 올 때 마다 꼭 이집에서 점심을 먹곤 했다. 입구의 작은 연못과 식당 안의 스킨 답스가 항상 인상적이었다.
다음 코스는 김굉필 선생의 종택 이었다.
<한훤당 김굉필 종가의 내력>
서흥김씨는 김보(金寶)를 시조로 하고, 황해도 서흥(瑞興)을 관향
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김보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대안군 김은열(金殷說)의 5세손이다. 고려 명종 때 정용중랑장을
지냈다. 김보의 손자인 김천록(金天祿)은 서흥김씨의 득관조로 알
려져 있다. 삼별초의 난과 일본 정벌에 공을 세워 서흥군에 봉해
졌고, 황해도 서흥 지역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서흥김씨는 김천록의 현손인 김중건(金中乾)․김중곤(金中坤)․김중인
(金中寅) 3형제가 세거했던 지역을 중심으로 경기파․영남파․초계파
로 나뉜다. 김굉필의 증조부인 김중곤은 현풍곽씨와 결혼하여 처
가인 현풍으로 옮겨오면서 서흥김씨 영남파의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김굉필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성북구 전동에서 출생하여
19세에 순천박씨 박예손의 딸과 결혼하여 3명의 아들을 두었다.
서흥김씨 영남파는 김굉필의 3형제를 중심으로 다시 현풍 일대에
거주하는 영남장파, 창녕에 자리를 잡은 영남중파, 달성군 유가면
용동에 거주하는 영남계파 등으로 다시 분파하였다. 현재 한훤당
종택은 김굉필의 11대손인 김정제(金鼎濟)가 1778년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에 입향하면서 건립한 것이다. 당시 김정제의 마을
입향과 관련해서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한다.
김정제가 종택을 건립하려고 터를 닦고 있을 때의 일이다. 지나가던 지관이 지세를 살펴보고는 마을이 나비 형국이므로 나비가 날아가지 않게 물을 충분히 보충해줘야 후손이 번성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논 20마지기 정도의 땅을 파서 지동못을 조성했다. 지동못은 풍수지리적으로 수기(水氣)를 보충하는 역할 뿐만 아니라 인근의 논밭에 필요한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이후 한훤당 종가는 20대에 걸쳐 혈통을 이어오고 있다.
한국전쟁 때 소실된 한훤당 종택과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사당
서흥김씨 한훤당 종가는 한훤당 김굉필을 불천위(영원히 제사를 모신다는 뜻)로 모시고 있는 종가이다. 김굉필은 조선시대 전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소학 공부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라고 할 만큼 기본예절을 강조하고 유교 윤리를 실천하는 삶을 추구하였다.
종가는 본래 도동에 터전을 마련하였으나 김굉필의 11대손 김정제가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이후 서흥김씨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사당과 대문채만 남기고 전소되었다. 지금의 종택은 훗날 재건된 건물이다.
한훤당 종택 내 사당은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57호로 지정되었다. 사당은 1615년 현풍 현감 허길의 감독 아래 건립된 것으로 김정제가 종택을 이건할 때 함께 옮겨왔다. 사당 내 감실 배치는 불천위인 김굉필 내외 신주가 중앙에 위치하고, 오른쪽에는 고조위와 조위, 왼쪽에는 증조위와 부위를 안치하는 소목 배열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네이브 참고)
주차장엔 차가 무척 많았다. 입구의 큰 은행나무 앞에서 공자의 행단, 학자수로 지칭 된 은행나무의 유래를 생각하며 은행나무를 지독히 좋아했던 아버님 생각이 뭉클 했다.
이 종택은 종택 안에 찻집이 있는 특이한 곳이다. 전에 올 때는 찻집에 손님이 그리 많치 않았는데, 오늘은 앉을 자리가 없어서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겨우 자리를 잡고 멀리 떨어진 본채 까지가서 주문을 하고 찻를 가져 오는데 자그만치 40분이나 걸렸다.
찻 값 역시 만만찮아서 점심 값 만큼이나 된다고 했다. 오래 기다린 덕분에 별채의 좋은 자리를 차지하여 앞에는 노송 반송의 누거수가 멋지게 있는 곳이었다. 노송의 아랫 쪽이 뱀 한 쌍이 서로 휘감으면서 사랑을 나누는 모양이었다.
노송 사진을 카메라에 담고 이곳저곳을 둘러 보았다. 옥잠화가 예쁘게 자라고 있었다. 옛 집 안채에 반드시 심는 우리 꽃이다. 주로 여름에 피며, 피는 흰 꽃 모양이 여인들의 비녀 모양이라고 하여 구슬옥(玉)에 비녀 잠(簪)자로 이름이 붙여진 꽃이다.
고택이 상업적인 찻집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조금은 안타 까웠다.
문화재로 지정 되어 있을 것인데 어떻게 상업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의문도 들었다.
<도동 서원>
우리나라 5대 서원에 속한다 ,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번지, 현풍IC에서 나와 구도로로 구지면 사무소를 지나
4키로 즘 가면 된다.
원래는 1568년(선조1년)현풍 비슬산 쌍꼐동에 위치했으며 寒暄堂(한훤당) 金宏弼(김굉필)(1454-1504)의 도학과 덕행을 지표로 삼아 유생들이 수학 연찬하고 그를 제향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그 후 1573년(선조6년) 쌍계서원으로 사액되었으며 1597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자 1605년(선조38년)지금의 자리로 옮겨 포로동 서원으로 창건되었다. 그후 1607년에 도동으로 다시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1610년(광해군2년)위판을 봉안했고 동네 이름도 도동으로 바꾸었다.
김굉필은 어린 시절에는 호탕하고 놀기를 좋아했으나 성장해서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의 학통을 이어 받은 점필제 김종직의 문하에서 "소학"을 착실히 배웠다. 그 후 관직 생활을 하다가 1498년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일파로 지목되어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고, 유배지에서 정암 조광조를 가르쳤다. 후에 전라도 순천에 이배 되었다가 1504년 갑자사화 대 賜死(사사) 되었다. 1610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과 함께 동방 5현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이황은 김굉필을 두고 "東方道學(동방도학) 之宗(지종)"이라 칭송하였다.
사당엔, 1678년(숙종4) 김굉필의 외증손인 한강 정구도 함께 배향 되었다.
서원 앞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뒤로는 대니산이 솟아 있다. 서원 앞으 은행나무는 서원 준공 기념으로 한강 정구가 심었다고 전해진다. 수형이 아주 특이한 은행나무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김굉필 선생의 억울한 죽음의 원혼이 깃들어 있다고 보여지는 수형 같다.
도동 서원은 ,안향 선생을 모신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소수서원>,퇴계선생을 모신 <도산서원>, 유성룡 선생을 모신<병산서원>, 이언적 선생을 모신 <옥산서원>과 함께 우리나라 5대 서원에 속한다. 나의 개인적인 판단으론 전국 서원 중 가장 아름다움 서원으로 판단하고 싶다.
2019년에 세계문화유산에 9개의 서원이 등재 되었다. 경상도에 6개서원이다(소수서원( 영주,안향), 남계서원(함양 정여창), 도산서원(안동 퇴계), 옥산서원(경주 이언적), 병산서원(류성룡, 안동), 도동서원(현풍, 김굉필) 논산 도암 서원(김장생), 정읍 무성서원(최치원), 징성 필암서원(김인후), 경상도에 있는 6개 서원은 5번 이상씩은 갔다온 것 같다.
다시 기회 되면 소수서원을 필두로 경상도에 있는 서원이라도 다시 한번더 투어를 하고 싶다.
도동서원의 경내의 건물로는 사당, 중정당, 거인재, 거의재, 수월루, 환주문, 내삼문, 장판각, 고직사 등이 있다. 전통적으로 서원의 배치는 전학후묘로 되어 있다. 사당이 맨 뒤쪽이고 사당 앞이 강당이다.
중정당의 도동 서원 글씨는, 광해군이 내린 사액 현판으로 한석봉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처마 아래 도동서원 글씨는 퇴계의 글씨를 모각해서 붙여 놓았다.
중정당은 유생들이 글 공부하는 주 장소 이다.
도동서원은 중정당 양옆으로 두개의 방이 있다. 글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유숙하던 곳이다.
중정당 둥근 기둥의 흰띠ㄴ의 표시는 ᅟᅪᆫ훤당 김굉필 선생이 동방 5현중에서 수현(최고의 선비)이라는 표시 이다.
-강당의 기단은 지대석, 면석, 갑석으로 구성 되어 있는데 면석은 마치 성곽을 쌓듯 돌들이 서로 물리도록 다듬어 쌓았다.
기단의 면석의 돌 색이 각각 다른 것은 서원을 지을 때 전국 각지에서 학자들이 힘을 합하여 각 지방 돌을 가져와서 석축을 쌓았기 때문이다.
기단에는 네곳의 용 머리 형상이있다. 세곳은 가짜이고 한곳만 진짜이다. 한 때 도둑을 맞아서 겨우 찾았고 진짜는 안동서원 박물관에 보관 되어 있다. 계단 사이에 있는 것은 물고기를, 계단 바깥쪽은 여의 주를 물고 있다. 용이 물을 뜻하여, 화재를 예방하는 방편으로 붙여 넣었다.
중정당을 오르 내릴 때 표시로, 다람쥐를 양각하여 꼬리로 표시해 놓았다.
중정당 앞의 높이 70~80Cm 정도의 단석은 정료대이다. 밤에 간솔로 불을 놓아 밝혔던 곳이다.
중정당 우측으로 돌아가면 돌 단이 하나 있다. 생단이라고 하는 것으로 향사를 지낼 때 돼지 생고기를 잡아서 검사하던 돌판이다.
1963년 담이 보물제 350호로 지정 (담장이 보물로 지정 된곳은 이곳 밖에 없슴)
담장은 자연석을 정열시킨 지대석 위에 자연 막돌을 쌓고 그 위에 암기와장을 5단으로 줄 바르게 놓아 땅을 의미하고 그 사이에 진흙 층을 쌓아 올리고 1m 간격으로 <수막새 기와>를 엇 갈리게 끼워 넣어 하늘을 의미하게 하였다. 즉 음양의 조화를 표현하여 생명력을 불어 넣고 장식 효과를 최대한 살린 평가를 받고 있다.
환주문은 수월루를 지나면 제일 먼저 맞이하는 문이다.
환주문 꼭데기 절병통은 환주문의 미를 살리고 기와의 안정감을 주도록 하기 위함이다.
환주라는 뜻은 <내 심성의 主(주)가 되는 근본을 찾아 부른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서원의 출입문이 낮게 지어진 것은 들어 올 때 몸을 숙여서 겸손을 갖추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땅 바닥 한가운데는 제법 큰 돌이 박혀져 있는데 이는 발길에 차여 경계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수월루는 서원에서 제일 처음 맞이하는 건물이다. 서원의 정문이다. 삼문으로 되어 있고 동입서출을 지켰다. 들어 갈 때는 동족 문으로 나올 때는 서쪽 문으로, 한가운데 문은 가르치는 선생님이 출입하는 문이다. 정면 세칸 측면 2칸으로 지어 졌다.
유생들이 공부하다가 마음이 답답허거나 스트레스가 쌓이면 수월루에서 서로 담소하면서 스트레스를 풀던 곳이다.
1888년(고종 25년)에 화재로 소실 되었다가 1973년에 중건 되어 전체 건물 중에서 그 가치가 떨어진다
도동서원의 해설사에게 해설을 부탁하니 피곤하여 쉬었다가 하자기에 내가 대략 아는 데로 위와 같이 설명을 했다. 중정당에 편안하게 앉아서 내려다 보는 서원 전체 전경은 온화하고 편안 했다. 마침 날씨도 흐려서 대청마루 문을 열어 놓으니 시원한 바람과 마루의 송판 감각이 무척이나 편하게 느껴졌다.
420년 전 이 곳 중정당 마루에서 유생들은 과거 합격을 위해서 선생님의 가를침을 받는 모습이 주마등처럼 수 세월을 뛰어넘어 한편의 영화 필름처럼 스쳐 지나감을 느꼈다.
조선 500년 역사에서 최고의 선비로 추앙 받는 김굉필 선생님!!! 사약을 앞에 놓고도 부모에게 받은 수염은 사약에 담글 수 없다고 말하면서 신체발부수지부모[ 身體髮膚受之父母 ],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다'라는 뜻으로,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몸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말이다. 《효경(孝經)》에 실린 공자의 가르침을 죽음에 임하여서도 실천한 소학 동자의 올 곧은 선비의 참 모습이 눈에 선하게 반추되어 왔다.
목을 효수하여 시장에 걸어 두었다는 폭군 연산군의 얼굴과 오브랩 된다.
시간이 허락 되어서면 뒷산 묘를 참배하고 싶었지만, 돌아 갈 길이 멀어서 수월문을 나와 귀가 길에 올랐다.
돌아 오는 차 안에서도 다시 정리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산과 홍임이이와 홍임이 엄마, 퇴계와 두향이, 고산과 설씨 부인에 대한 달달한 이야기도 함께 나누며 오늘 답사를 마무리 했다.
두구동에 와서 저녁을 추어탕으로 해결하고 지하철에 올랐다. 하루의 생각을 정리하면서 집에 도착했다.
즐겁고 아름다운 웰니스 답사였다. 오랫 동안 공부해 두었던 내용들로 몇몇 사람들을 즐겁게 함께 했다는데 대해서 오늘 하루 삶의 의미를 되찾으며, 다시 나를 돌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함께한 모든 분들게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고맙게 생각하고 싶다.
2024년 현충일에 김굉필 발자취를 따라서 담사를 하고나서 여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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