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제자백가의 사상
諸子百家-思想 주(周)가 동으로 천도한 후부터는 종주권이 쇠약해짐에 따라 제후들이 방자하게 되어 약육강식이 잇달아 일어나자 중국 천하는 소란하게 되었다. 이 시기를 춘추전국시대 또는 선진시대(先秦時代)라 부르며, 중국사상의 개화결실의 시기였다. 이 시대의 사상가들을 제자(諸子)라 하며 그 학파들을 백가(百家)라 부른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제자백가를 음양가(陰陽家)·유가(儒家)·묵가(墨家)·명가(名家)·법가(法家)·도가(道家)의 6가로 분류하고, <한서(漢書)> <예문지>에 의하면 6가 이외에 종횡가(縱橫家)·잡가(雜家)·농가(農家)·시부가(詩賦家)·병가(兵家)·수술가(數術家)·방기가(方技家)의 8가를 추가하고 있다. 그런데 제자백가들은 모두 이 위기를 구출하려는 의도와 목적 아래서 일어난 것이며, 철학사상에 특히 기여한 것은 유가·도가·묵가·법가·명가 등이다.
유가는 유교, 유학, 공교(孔敎)라고도 불리며, 공자(孔子)를 시조로 중국의 전통적인 정교일치(政敎一致) 사상을 받들고, 인(仁)의 도덕을 최고 이념으로 하여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를 목적으로 하는 윤리학·정치학으로서, 동양 철학사상의 중추적 역할을 한 것이다. 공자의 '인'은 인간심정에 고유한 자애(慈愛)의 마음을 확충하는 것, 즉 극기복례(克己復禮)로 완전한 인격을 이룬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인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愛人)으로서 그 발단은 친자지간(親子之間)의 사랑(慈愛)으로부터 시작하며, 나아가서는 형제, 가정, 사회, 국가, 인류에게까지 미치는 사람의 길(人道)이며, 이것은 사람의 본성에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라 한다.
공자는 인도를 닦아서 천도(天道)에까지 이르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를 역설하였다. 공자의 인(仁)은 부처의 자비(慈悲)나 예수의 박애(博愛)와 비슷한 내용을 갖고 있는 개념이지만, 그 도(道)는 어디까지나 윤리로서의 인도(人道)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공자는 종교인과는 달리 현생(現生)의 삶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다. 공자와 자사(子思)를 이은 맹자(孟子)는 공자의 도를 조술(祖述)하고, 성선설(性善說)에 의한 4덕(四德)과 4단(四端)을 역설하였다. 즉, 사람의 마음속에는 인·의·예·지(仁義禮智)의 고유한 덕이 있다고 한다. 또 선천적 양지양능설(良知良能說)을 주장하고, 또 인의의 정치 즉 왕도(王道)로써 치국 평천하를 이룰 것을 강조하였다.
전국시대 말에는 순자(荀子)가 나와 역시 공자를 이었으며, 특히 예(禮)로써 혼란한 천하를 질서있게 바로잡으려 하여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했다. 맹자와 순자는 도덕뿐만 아니라 경세사상을 부르짖음으로써 왕도정치에 있어 인민의 경제적 생활기반을 마련해 줄 것을 주장하였다. 유가의 경전(經傳)으로 <대학(大學)>, <중용(中庸)>, <논어(論語)>, <맹자(孟子)>의 4서와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예기(禮記)>, <춘추(春秋)>의 5경이 있다. 도가는 일명 '황로학(黃老學)' '노장학(老莊學)'이라고도 한다. 도가의 시조(?) 노자(老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주장함으로써 유가의 예악(禮樂), 형정(刑政)의 형식주의를 반대하고 어린 아이의 천진성으로 복귀하여 무위자연의 사회를 이룰 것을 주장했다. 노자의 이른바 도덕(道德)은 보통 말하는 도덕(Virtue)이 아니고, 유가의 이른바 인의(仁義)라는 도덕의 상위개념으로서 도(道, Tao)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자의 도는 형이상학적 본체임과 동시에 인성론(人性論)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뒤이어 전국시대에 장자(莊子)가 나와 도가철학의 인식론적 이론을 전개함으로써 만물제관(萬物齊觀) 시비양행론(是非兩行論)을 고조하여 가치의 전환을 부르짖음으로써 평등·자유·무욕을 강조했다.
열자(列子)도 노자를 이어 형이상학적으로 기화(氣化)를 상론하고, 허무청정(虛無淸淨) 전성보전(全性保眞)을 주장함으로써 은둔주의로 기울어졌으며, 이 계통에 있는 양주(楊朱)는 위아설(爲我說)을 주장하여 이기쾌락주의(利己快樂主義)적인 독선에 빠졌다. 유가가 중국 고래의 전통적인 적극적 면을 계승하여 형성된 것과 반대로 도가는 그 소극적 면을 이어 무위자연의 사상체계를 이룬 것이다. 후세의 도교(道敎, Taoism)는 후한(後漢) 때 노자를 천존(天尊)으로 받들어 조직한 종교이지만, 도가 자체는 종교가 아니다. 묵가는 묵자(墨子)를 시조로 겸애(兼愛)를 주장하여 유가의 형식주의 계급제도를 타파하고, 천(天)이 만민을 겸애(博愛의 뜻)하는 것과 같이 사람들도 서로 겸애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사리사욕을 타파할 것을 역설하였으며, 절검(節儉)과 근로(勤勞)를 내세웠다.
묵가는 천귀(天鬼)사상을 중심으로 종교적 색채를 띠었으며, 또 3표(三表) 논리로써 경험을 중시하는 실증주의의 입장을 취한다. 이 경향은 후세 별묵(別墨)이라 불리우며, 논리학파의 사공파(事功派)로 분파되었고, 사공파는 다시 전도파(傳道派), 실행파(實行派) 및 기타로 나누어졌다. 실행파는 묵자의 역행주의(力行主義)를 이어 허행(許行)·진상(陳相) 등의 철저한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무위자연 사상으로 흘렀다. 법가는 관자(管子)를 시조로 신불해(申不害)와 상앙을 거쳐 한비자(韓非子)에 이르러 집대성되었다.
법가는 정치철학과 그 실천으로써 부국강병을 이루어 천하통일을 도모하려는 학파다. 관자는 공리(功利)와 법치(法治)를 겸한 사상가이며 또 실행가였다. 신불해는 패도(覇道)의 술(術)에 밝고, 상앙은 패도의 법(法)에 뛰어났으며, 이 술과 법은 한비자(韓非子)에 이르러 종합되어져 형명법술(刑名法術)의 학으로 완성되었다. 한비자의 학은 유·도·법(儒道法)의 종합으로써 이루어졌다. 명가는 논리학파로서 등석(鄧析), 혜시(惠施), 공손룡, 윤문(尹文) 및 별묵(別墨) 등이 있다. 명가는 개념 즉 명(名)과 대상 즉 실(實)의 불일치를 교정하려는 데 목적을 두었던 것이다.
등석은 양가의설(兩可之說) 즉 이율배반율(二律背反律)과 무궁의 사(無窮之辭)로써 유명하며, 혜시는 변설(辯說)로써 만물평등을 주장했으며, 공손룡은 백마비마론(白馬非馬論)으로 유명하다. 이 밖에 강병책(强兵策)으로 손무(孫武), 오기(吳起)가 걸출하였고, 손빈, 범려도 유명하였으며, 귀곡자(鬼谷子)에게서 배운 소진(蘇秦)과 장의(張儀)는 웅변술로써 합종연형(合縱連衡)을 주장했다. 그리고 자가독선(自家獨善)을 고집한 은자(隱者)들로서 신선도를 닦는 신선가(神仙家), 음양5행을 논하는 음양가(陰陽家), 방기(方技), 술수(術數) 등이 있었다. <裵 宗 鎬>
유가의 사상
儒家-思想 유가는 본래 춘추시대말부터 전국시대에 걸쳐서 배출된 제자백가(諸子百家) 중의 한 학파에 불과했으나 한왕조(漢王朝)의 권력 안정과 함께 그 통치를 정당화하는 이론으로서 중시되어 중국의 정치사상 중에서 정통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국에 왕조 정치 체제가 존속한 2천년 동안 유학은 국가의 질서를 뒷받침하는 교학(敎學=儒敎)으로서 정통사상의 지위를 계속 차지하였던 것이다. 그 오랜 기간 동안에 유학은 각 시대의 정치 상황이나 다른 사상과는 관계에 대응하여 그 내용을 변화·전개하고 있다. '유(儒)'라는 명칭의 기원에 대해서는 유약(柔弱)을 의미한다든가 '수(須=鬚, 턱수염)'와 통하여 노인(老人)을 의미한다든가의 말이 있어 일정하지 않으나, 대체로 묵가(墨家)나 법가(法家)와 같은 타학파의 사람들이 이하 서술하는 것 같은 성격의 학파를 가리켜서 붙인 명칭인 듯하다.
유가사상의 특질을 요약하면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學), 환언하면 '자기 자신의 수양에 힘쓰고 천하를 이상적으로 다스리는 것을 목표로 삼는' 학문이며 그것을 향한 실천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기(己)를 수(修)한다'함은 개개인에 있어서의 도덕성을 신뢰하여 그것을 정직하게 신장(伸長)하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은 그것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유가에서는 자기의 도덕성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사람을 군자라 하여 존중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소인이라 하여 배척했다. '덕(德)'의 양성을 위해서 유가는 '배우는'일과 '아는'일을 중시한다.
그 학습 대상은 궁정(宮廷)같은데 보존되어 있는 옛 예악의 관례나 고사(故事)를 전한 <시경(詩經)>, <서경(書經)> 등의 고전이다. 그것들의 전통을 배움으로써 그 형식에 포함된 고인(古人)의 정신을 회득하려 한다. 따라서 전통적 형식을 (保守)하면서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가해 나가려고 한다. 그 점은 '천(天)'이나 '귀신(鬼神)'(死後의 靈魂)에 대한 태도에도 일관(一貫)되어 있다. 인간의 도덕성을 중시하는 입장에서는 인력(人力)을 초월한 '천(天)의 위력'이나 '귀신(鬼神)'의 재앙 등은 무시해야 할 것이나 유가는 전대 이래의 그것들에 대한 신앙을 완전히 버리지 않는다.
'천(天)'은 역시 운명을 지배하는 것이요, 귀신은 공경하나 멀리 해야 하는 것으로 그친다. 그렇지만 유가의 이상은 이러한 '나(己)를 닦는다(修)'는 일만으로는 안 된다. <대학(大學)>에 있는 것과 같이 '몸을 닦는 일'로부터 시작하여 집을 가지런히 하고(齊家), 나라를 다스리고(治國), 천하를 평(平)하게 하는 데(平天下)' 도달해야 한다. 필경 '사람을 다스리는' 일이 학문의 궁극의 목표로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학은 어디까지나 '치자(治者)'를 위한 학(學)이다. '치자'라는 것을 위로는 황제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관료를 포함한다. 그러한 '치자'의 자격을 갖는 계층에 대하여 어떻게 백성을 다스릴 것인가, 어떻게 하면 백성이 다스려질까를 말하는 학문이 유학이다. 그 경우 중시된 것이 법률에 의하여 백성을 엄하게 통치하는 것보다는 교화에 의하여 저절로 백성을 치자의 의욕(意慾)하는 방향으로 인도한다고 하는 방식이었다.
그러한 교화의 측면을 구비한 학설을 자칭할 때 우리들은 대체로 '유학(儒學)' 이라는 말보다는 '유교(儒敎)' 라고 하는 말을 쓴다. 따라서 '교화(敎化)의 학(學)' 으로서의 유교는 결코 개인의 정신적 구제를 목적으로 삼는 종교와는 다르다. '사람을 다스리는' 일을 구극(究極)의 목표로 삼기 때문에 유가는 현실에 존재하는 국가권력을 처음부터 무시한다거나 그로부터 도피한다거나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치자' 계급의 일원이 되려고 한다. 그렇지만 그 때에도 정치가 유가류(儒家流)의 교화의 선(線)에 따라서 행하여지는 일을 기대한다. 그런 점에서 너무 무도한 정치에 대하여는 용감하게 비판을 가하는 일도 있으며 신구왕조의 교체를 '혁명(革命)' 이론에 의하여 정당화하는 역할도 과감히 한다.
이상과 같은 성격을 갖는 유가사상은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있어서는 당연히 타학파의 맹렬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예컨대 혈연관계를 중시하고 예악 등의 의례를 존중하는 학설은 겸애(兼愛)와 상현(尙賢)·비악(非樂)·절장(節葬) 등을 주장하는 묵가(墨家)에 의하여 비판되고 인간의 도덕성에 신뢰의 기초를 두는 학설은 군주권력의 일원적 강화(一元的 强化)를 지향하는 법가(法家)에 의하여 배격되었다. 또 '치자'의 일원이 되어 이상적 정치 실현에 광분하는 태도는 인위적인 노력의 한계나 허무함을 깨달은 도가로부터 조소를 받았다. 그러한 비판이나 조소 속에서 전통과 중용(中庸)을 지키려고 노력한 것이 유가였다고 할 수 있다.
유가사상은 또한 타학파의 비판·공격에 견디기 위하여 타학파의 학설의 장처(長處)를 섭취하는 일을 서슴치 않았다. 예컨대 전국말(戰國末)의 순자(荀子)는 법가나 도가의 이론을 교묘하게 유가의 체계 속에 받아들였으며, 한대(漢代)의 동중서(董仲舒)는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이나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을 대폭적으로 채택하여 시대의 요청에 순응하는 이론을 만들어냈다. 정정(政情)의 불안정이 계속된 위진남북조시대(魏晋南北朝時代)에는 유가사상은 불교나 노장사상(老莊思想)의 공격을 받았지만 후에 불(佛)·노(老)에 대한 유가의 '도통(道統)'의 자각이 당대(唐代)중기에 일어나 송대(宋代)에 이르러 불·노의 장점을 취하여 신유학(新儒學=성리학 性理學)을 성립시켰다. 청말(淸末)의 중국이 위기에 빠졌을 무렵 서양의 입헌군주제(入憲君主制) 등을 공양학(公羊學)의 체계에 포괄해 설명한 캉유웨이(康有爲)의 학설이 출현한 것도 이상과 같은 유가사상의 자기중심적인 전개의 한 양상이다.
춘추
春秋 중국 춘추시대의 노국(魯國)의 사관(史官)이 기록한 연대기를 공자가 비판·수정한 책으로 춘(春)과 추(秋)는 1년을 의미한다. 노나라 은공(隱公)의 즉위 원년(전 722)에서 시작하여 애공(哀公) 14년(전 481)에 이르는 12대 240여 년간을 취급한 것이 그 내용이다. 이 기간에 노나라를 중심으로 일어난 여러 가지 정치사건, 예컨대 각국(各國)간의 전쟁이나 회맹(會盟), 중요 인물의 내왕·사망은 물론 일식·홍수(洪水)·대설(大雪) 등의 기상이변 현상도 기록되어 있다. 춘추시대에는 노나라 이외의 진(晋)이나 초(楚)에도 자국(自國)의 사관의 기록이 있었던 것 같으나, 현재 전해지고 있는 것은 노(魯)의 <춘추>뿐이다. 그것은 바로 후세의 유학의 주석가(註釋家)들에 의하여 <춘추>가 역사에 대한 공자의 도덕적 비판이 담겨 있는 책으로서 존중되었으며 한대 이후에는 오경(五經)의 하나로 손꼽히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춘추>의 본문은 지극히 간결한 것이다. 예를 들면 모두(冒頭)에는 '은공 원년 춘왕정월(隱公元年春王正月)'이라는 일부(日附)만이 있을 뿐 사건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이에 대한 공양씨(公羊氏)의 해석을 모은 <공양전(公羊傳)>을 보면 '원년이란 무엇인가? 임금의 즉위의 처음해라는 것이다. 봄이란 무엇인가? 일년의 처음이다. 왕이라 함은 누구인가? 문왕(文王)을 가리킨다. 왜 왕의 정월이라고 하는가? 일통(一統)의 의의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라는 식의 문답체의 해설을 상세히 전개하고 있다. <춘추>의 간결한 기사 속에 들어 있는 공자(孔子)의 진의를 해명하는 것이 <공양전>의 의도다. <춘추>에는 이 외에 <곡량전(穀梁傳)> <좌씨전(左氏傳)>이 현재에 전해지고 있어 <공양전>과 아울러 <춘추3전(春秋三傳)>이라고 칭한다.
<춘추> 경문도 이들 3전 속에서 각기 전해져 왔다. <곡량전>은 대체로 <공양전>과 비슷하여 <춘추>의 서법을 논리적으로 해설하는 것을 의도하고 있으나 <좌씨전>만은 성질을 조금 달리한다. <좌씨전>(약하여 <左傳>이라고도 한다)에도 경문의 서법(書法)의 해설이 있으나 그의 특색은 풍부한 춘추시대의 사화(史話)에 있다. 동시대의 사화를 각국별로 편집한 <국어(國語)>라고 하는 서책에 대하여 <좌씨전>은 그러한 사화(史話)를 연대순으로 배열하여 <춘추>경문의 '전(傳)'의 형식으로 정비하고 있다. 그 작자는 공자와 동시대의 좌구명(左丘明)이라는 설이 있으나 믿어지지 않는다. 전국시대 중기경에 위(魏)의 사관 좌씨(左氏)인 그 누구에 의하여 <좌시전>의 원형이 만들어졌다고 하는 말이 타당할 것이다. 다만 현재의 <좌씨전>에는 전한말(前漢末)의 유흠(劉歆)등이 추가 정리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춘추>경문만으로는 모를 사건의 배경이 <좌씨전>의 서술로써 파악되는 예를 하나 들어보기로 한다. 선공(宣公) 2년(전 607)의 조(條)에 '추구월 을축(秋九月乙丑)진(晋)의 조돈이 그의 임금 이고(夷皐=靈公)를 죽였다(殺)'라는 경의 기사가 있다. <좌씨전>에 의하면 "진의 영공의 무도함을 간쟁(諫爭)한 조돈이 영공에게 살해되게 된 것을 피하여 국도(國都)에서 망명하였을 때 일족인 조천(趙穿)이 영공을 암살한 사건이었다. 그런데도 진의 사관은 조돈이 그 임금을 시(弑)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조돈이 그것에 이의를 진술하자 사관은 "재상이라는 책임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이 국군(國君)을 시(弑)한 일족(一族)의 조천(趙穿)을 주살하지 않는 것은 그와 일미(一味)임을 의미한다"고 대답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중국 고대의 사관에는 사실 그것의 서술보다도 도의적 책임의 소재를 분명하게 하는 책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공자가 노국 사관의 기록인 <춘추>에 손을 대어 이른바 '필주(筆誅)'를 가하여 세상의 난신적자(亂臣賊子)를 두렵게 하였다고 이르는 것도 이와 같은 사관의 전통에 기여한 것이라고 하겠다. <공양전>의 내용은 전한시대(前漢時代)에는 동중서(董仲舒), 후한시대에는 하휴(何休)에 의하여 확대해석과 동시에 추가 정리되어 '공양학(公羊學)'으로서 성립하였다. 단지 '공양학'은 그 후의 중국 학술사상으로는 떨치지 못하였고 청조(淸朝) 말년 중국의 위기에 즈음하여 그의 혁명설 등이 주목되어 부활하였다. 한편 <좌씨전>은 진의 두예(杜預)에 의해 주(註)가 집성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국어(國語)>, <사기(史記)>, <한서(漢書)> 등과 아울러 한문학(漢文學)의 고전(古典)으로 고래로부터 애독되어 오고 있다.
공자
孔子 (기원전 551/552∼전479) 중국 춘추시대 말기의 사상가, 유교의 조사(祖師). 성은 공(孔),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이다. 공자(孔子) 혹은 공부자(孔夫子)는 그에 대한 존칭이다. 공자의 인물상은 전(前) 2세기의 한대 이후 유교를 정치의 원리로 앞세운 왕조 정치가 2천년에 걸쳐 중국에서 계속되는 동안에 현저하게 왜곡되어 왔다. 우리들은 그와 같이 공자를 성인(聖人)화한 유학자들의 부가물(附加物)을 제거해야만 비로소 공자의 본래의 인물과 생애를 바로 알 수 있다. 공자의 전기로서 가장 오래 되고 또한 종합되어 있는 것은 <사기(史記)>의 '공자세가(孔子世家)'이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이 살고 있던 때는 아직 유교가 정치의 구석구석에까지 완전히 행해지지 못한 시대였지만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묘사된 공자상은 일종의 성인과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제사의 흉내를 내면서 놀았다든지 젊었는데도 고사(故事)에 통하였다든지 주(周)에 가서 노자와 회견하였다고 하는 등 신변에서부터 이미 공자를 특이한 인물로 꾸며서 치켜 세우려는 점이 농후하다. 50세경이 되어 노국의 대사구(大司寇)가 되어 권력자 소정묘(少正卯)를 주살하였다든지 노국의 정공(定公)과 제(齊)의 경공(景公)과의 사이에 열린 협곡(夾谷) 회의에서는 제측(齊側)이 내놓은 내이(萊夷)의 악인(樂人)을 물리쳤다고 하는 사적 등은 <순자(荀子)>가 묘사한 성인공자상(聖人孔子像)과 공통통하고 있다.
특히 사마천의 경우에는 공자가 노를 떠나서 14년간이나 제국을 유랑한 시절에 진(陳)·채(蔡)나 광(匡)의 지방에서 재난에 봉착한 것을 중시하고 있다. 불우한 속에서 자기의 사명감을 잃지 않은 공자에게 느낀 사마천의 공감이 거기에 담겨져 있다. 사실 그와 같은 공자 성인화의 경향은 이미 전국(戰國) 중기의 맹자에서 시작되고 있다. 맹자는 자기 자신이 주의 문왕(文王)으로부터 공자에게 전해진 도를 계승하는 자라고 자임하고, 공자가 <춘추(春秋)>를 지었기 때문에 세상의 난신(亂臣)·적자(賊子)가 두려워하였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맹자가 그와 같이 공자를 현창(顯彰)한 것은 그만큼 공자(또는 유가)의 평가가 아직 확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묵가는 유가의 가족 혈연주의(家族血緣主義)·예악 중시설(禮樂重視說) 등을 부정하고 공자를 공모(孔某)라고 멸칭하여 그의 비행을 폭로하고 있다. 또 세상의 질서를 예악에 의하여 회복하려고 하는 공자 일문(孔子一門)의 움직임을 헛된 노력이라 하여 냉소하는 기풍도 장자 계통의 도가에서는 일반적이었다. 그와 같은 풍조속에서 맹자는 홀로 안간힘을 다해 공자의 선양에 노력한 것이다. 그런 것에 비교하면 공자 일문의 어록집(語錄集)인 <논어(論語)>에는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성인화되지 않은 공자의 생생한 인격을 짐작케 하는 기록이 많다.
공자는 자기의 생애를 돌이키면서 자기의 정신적인 성장의 자취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 15세에 학문에 뜻을 세웠고, 30에 섰고 40에 혹(惑)되지 않고 50에 천명(天命)알 알고 60에 이순(耳順)하고 70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쫓아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 이와 같이 공자는 나면서 곧 성인이었던 것은 아니요, 그를 둘러싼 국가나 가정의 환경 속에서 의혹하고 번뇌하면서 점차로 자기 신념을 만들어 쌓아 갔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자가 35세 때 노의 도읍인 곡부(曲阜)에서 대사건이 일어났다. 군주인 소공(昭公)이 권력자인 귀족 계평자(季平子)를 타도할 군사를 일으켰으나 소공측이 패하여 소공은 이웃나라인 제(齊)에 망명하게 되었다.
계평자와 소공의 대립 상태는 소공이 망명지에서 사망할 때까지 8년간 계속되었지만, 춘추시대의 각국에서 빈발한 이러한 국군(國君)과 유력한 귀족과의 분쟁사건에 대하여 과연 공자는 어느 쪽이 정당하다고 판단하였던 것일까. 공자(孔子)는 아마도 명분상으로는 국군인 소공을 지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겠지만, 실제로는 이와 같은 정권의 분열상태 가운데 곤혹(困惑)하고 있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이러한 정치적 격동과 긴장을 체험하는 가운데 공자에게는 독자적 신념이 형성되어 갔다. 그것은 효(孝)·제(悌)라고 하는 육친간의 감정을 인간관계 일반의 기본에 놓고 예양의 정신을 정치의 원리에까지 높이면 목전의 정치나 사회의 혼란한 질서가 회복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이상(理想)의 정치를 공자는 주(周) 초기의 주공의 정치속에서 발견했다. 공자는 이와 같은 자기의 신념을 노에 돌아온 만년에 자기의 주위에 모인 제자들에게 설명하였다. 제자들의 다수는 전고(典故)에 능통한 노인으로부터 제도나 예의에 관한 지식을 얻은 후 그의 추천에 의하여 유력한 정치가의 주변에서 벼슬을 하려는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에 대한 공자의 가르침은 지식 그것보다도 정치에 대한 견식이었고 난세에 처(處)하는 태도였다. 그는 의(義)를 높이 보아 이상적인 군주를 구하는 군자(君子)를 이(利)로 인해 움직여지는 '소인(小人)'과 엄격하게 분별한다. 따라서 군자와 소인과의 사이에는 도의적 차이가 있을 뿐으로 출신 계층이나 지식의 다소의 차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공자의 교설의 특징은 이와 같이 제자들 개개인의 도덕적 자각을 요청한 점에 있다. 춘추시대 중기경까지의 씨족제에 있어서는 사람들의 행동 규범은 족(族)이라고 하는 혈연의 틀에 묶여 있었다. 그러한 혈연적인 주박(呪縛)으로부터 효·제를 중심으로 한 인(仁)의 개인적 도덕적 분리한 곳에 공자의 교설의 의의가 있다. 물론 그 '인도(人道)'는 은(殷)·주시대 이래의 '천(天)'·'명(命)'·'귀신(鬼神)' (사후의 영혼)에 대한 신앙을 근본부터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소위 천도의 밑에 일정한 '인도'의 영역을 설정하고 있었다. 공자의 교설의 대상은 치자의 일원이 될 가능성을 가진 선비 계층이었다. 당시의 선비는 본래의 귀족에서 몰락한 자, 서민에서 대두한 사람 등 각층의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치자가 될 가능성을 갖는 점에서 피치자인 백성과는 구별된다. <논어(論語)>중에 '백성은 말미암게 할 뿐이요 알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한 것도 이 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것이다. 백성은 결코 정치의 주체가 아니고 객체에 불과하였다.
논어
論語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언행을 전한 어록집(語錄集) 20편이다. <논어>의 명칭에 대해 '공자와 제자와의 대화'(=論)와 '공자의 말(=語)'로 된 것을 표현한 것이라든가 어(語)를 논(論)되었을 때에는 별다른 명칭이 없었으나 후한 시대 이후에 '논어'라 하여 경서에 준한 취급을 받았고, 더욱이 송대 이후는 사서(四書)의 하나로서 중시되어 우리나라나 일본에도 지대한 사상적 영향을 주었다. 17세기 이후는 예수회 선교사를 통하여 유럽에도 소개되었다. 다만 유교의 성전으로서 뿐만 아니라 인생의 지혜를 뜻깊게 말한 고전으로서 널리 애독되고 있는 책이 <논어>이다.
<논어>에서 가장 많은 것은 '자왈(子曰)'을 앞세운 공자의 말이다. 예컨대 개권(開卷) 첫째에 "공자 가라사대 배우고 때로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먼 데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참으로 군자가 아니겠는가?"라는 대목이 있다. 학문의 목적은 입신출세(立身出世)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의 충실을 얻는 데 있다는 공자 일문의 학문 정신을 간결하게 말해주고 있다. 그밖에 "공자 가라사대 아침에 도를 얻어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가하다"라든가, "공자 가라사대 군자는 대의(大義)를 밝히고 소인은 이(利)를 밝힌다"는 따위의 깊은 인생관찰이 뒷받침된 명언(名言)들도 많이 나온다 다음으로 제과들과의 문답형식의 글들도 있다. "한마디의 말로써 종신토록 행할 것이 있겠습니까?"라는 자공(子貢)의 물음에 "곧 서(恕)인저, 자기가 바라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말지니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말하는 서(恕)라고 하는 것은 자기에 대한 충실을 의미하는 동시에 공자 일문에서 중시한 "타인을 생각해 준다"는 의미이다. 또 공자의 대답은 같은 질문, 예컨대 '효(孝)란 무엇인가' '인(仁)이란 무엇인가' '정치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묻는 인물과 상황에 따라 표현을 달리해서 대답해 주었다. 질문자는 이른바 제자들에 한정되지 않고 노(魯)의 군주(君主) 애공(哀公)이나, 실권자이자 귀족인 계강자(季康子) 등도 등장한다. 그 중에는 그러한 문답 형식을 더욱 정교하고 충실하게 묘사한 300자를 넘는 장편(長編)도 있다. <논어(論語)>에는 또 '공자는 괴력난신(怪力亂臣)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와 같이 공자가 죽음 등에 대하여는 언급하려 하지 않은 태도를 간결하게 서술한 장(章)이 있다.
특히 공자의 구체적인 동작이나 생활습관이 종합 서술되어 있는 것이 <향당편(鄕黨篇)>이다. 공자의 말하는 방법, 보행하는 방법, 입는 방법, 먹는 방법 등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유자(有子), 증자(曾子)와 같은 제자들의 말도 기록되어 있다. "나는 하루에 나의 몸을 세 번 살핀다. 남을 위하여 괴함을 불충(不忠)하지 않았는가, 붕우(朋友)와 사귐에 신실치 못하지 않았는가, 충분히 익히지 않은 것을 남에게 가르친 일은 없었는가" 라고 한 유명한 말도 증자의 말이다. 또 자공(子貢), 자장(子張), 자하(子夏) 등의 말도 <자장편(子張篇)>에 기록되어 있다.
<논어>의 각 편(篇)들은 무질서하게 편집·배열되었다고 하는 극단적인 주장들도 있으나, 체계적인 것은 아니라 하여도 20편의 각편에는 어느 정도의 주제가 인정될 경우가 있으므로 역시 처음에는 편(篇)마다 묶여졌고 그것이 차츰 집적(集積)되어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팔일편(八佾篇)> 에는 예에 대한 말이 많고 <이인편(里人篇)>에는 인(仁)에 대한 말이 많고 <공야장편(公冶長篇)> <옹야편(雍也篇)>은 제자의 인물평, <향당편(鄕黨篇)>은 공자의 동작을 주제로 한 것이 많다. 다만 편(篇)의 이름은 각편의 모두(冒頭)의 두 글자 내지 세 글자를 기계적으로 취한 것뿐이어서 편명과 내용과는 관계가 없다. 각편의 형식과 내용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각편의 성립한 연대에 전후의 차가 있음을 상정(想定)하는 연구도 더러 있다.
어떻든 전한(前漢)의 초기경에는 현재의 모양으로 종합된 '논어'가 존재하지 않았음은 확실하며, 후한의 장우(張禹)나 정현(鄭玄)의 교정을 거쳐 현재의 20편본이 성립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논어>의 주(註)에는 고주(古註)·신주(新註)의 두 가지가 있다. 위(魏)의 하안(何晏)의 <논어집해(論語集解)> 10권이 있고, 양(梁)의 황간(皇侃)이 거기에 <의소(義疏)>를 더하였다. 한편 신주(新註)는 송(宋)의 주자(朱子)가 쓴 의 <논어집주(論語集註)>가 대표적인 것으로 단순한 문자의 해석이 아니고 공자의 정신의 해명을 시도하고 있다. 명대(明代) 이후 주자학(朱子學)이 과거시험의 정규 시험과목이 되면서 주자의 주(註)를 다시 해설한 주석본이 많이 출현했다. 고·신 양주를 포괄한 것으로서는 유보남(劉寶楠)의 <논어정의(論語正義)>가 있다.
공문의 2유파
孔門-二流派 공자의 문인은 많아 이름이 알려져 있는 사람만도 70명을 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제자로는 자로(子路), 염유, 유약(有若), 안회(顔回), 중궁(仲弓), 자공(子貢), 자하(子夏), 자유(子遊), 증자(曾子) 등이 손꼽힌다. 공자의 제자들은 스승의 사후에 분파된 것 같다. <한비자(韓非子)>의 <현학편>에 의하면, 유가에는 자장(子張), 자사(子思), 안씨(顔氏), 맹씨(孟氏), 칠조(漆雕), 중량씨(仲良氏), 손씨(孫氏), 악정씨(樂正氏) 등의 8파(八派)가 있었다. 또 <맹자>에 의하면 공자 몰후(沒後)에 자하, 자장, 자유의 3인이 상의하여 유약을 스승의 후계자로 하려고 하였을 때 증자가 강력하게 반대한 일이 기록되어 있어, 이 8파는 다시 2파 즉 증자의 파와 자유, 자하의 파로 나누어진 것 같다.
증자는 공자 사후의 유력한 지도자로서 공자 사상의 유심주의적 측면을 발전시켜 씨족제하(氏族制下)에서의 도덕규범으로서의 효를 중시하였다. 그의 생각을 이어받은 사람이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이다. 자사는 '천(天)'이라는 종교적 관념을 바탕으로 인간의 존재와 도덕을 규제하였다. 그것을 '성(誠)'이라고 이름 지어 철학의 중심에 두고 만물의 근본인 '도(道)'와 일치한다고 했다. 자사의 학통을 계승한 것이 맹자(孟子)이다. 맹자는 인(仁)·의(義) 라는 것을 주장하지만 그 기초가 되는 것은 자사와 한 가지로 종교적 천(天)과 밀접하게 서로 관련되어 있는 인간성의 이해, 즉 성선설(性善說)의 제출이다.
그의 정치론의 목적은 당시 붕괴되어 가던 봉건적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데에 있었다. 후에 송대가 되어 선진 유가(先秦儒家)의 도통(道通=유학 전도의 계통)이 강조됨으로써 공자(<논어(論語)>), 증자(<대학(大學)>), 자사(<중용(中庸)>), 맹자(<맹자(孟子)>)라고 하는 계보가 중시되어 4서의 성립을 보았다. 한편 자유, 자하의 파는 분명하지는 않으나 대체로 예(禮)라고 하는 외적 규범을 중시한 일, 그리고 그 양자에도 차이가 있음을 순자도 지적하고 있다. 유가의 자사, 맹자(孟子)를 통렬히 비판한 사람이 순자인데, 그는 자궁(子弓-子遊라고 하는 말도 있다-의 학통을 이은 것 같고, 또 인간성의 이해에 있어서 종교적 천(天)의 속박에서 탈각하여 성악설을 제출하였으며 예를 강조하였다. 순자의 사상은 송 이래 이단적인 학이라 하여 부당하게 취급되어 왔으나 근년에 이르러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여 선진 유가의 두 줄기의 흐름은 후대에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다.
증자
曾子 (기원 전505∼전436)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이며 유가(儒家)에 속한다. 이름은 삼(參), 자는 자여(子輿), 증자(曾子)는 그에 대한 존칭이다. 남무성(南武城) 출신. 공자의 만년의 제자로서 공자보다도 46세 연하이다. 공자 사후 유가의 유력한 일파를 형성하여 공자사상의 유심주의적 측면을 발전시켰다. 그의 언행은 <논어>에 몇 조목이 보이며, 또<대대례기(大戴禮記)>의 증자10편 및 <효경(孝經)>은 그의 저작이라고 인정된다. 그는 당시 진행 중에 있던 봉건제의 붕괴를 제지시키기 위하여 '효(孝)'라고 하는 씨족제로부터 생긴 도덕을 강조하였다. "하루에 세 번 내 몸을 살펴본다"고 하여 공자 사상의 근본을 충서(忠恕)라고 하는 말로 표현하여 공자 사상의 계승자로서의 그의 입장을 보이고 있다. 증자의 학통은 자사, 맹자에로 발전하여 유가의 도통을 전하는 데에 큰 역할을 다하였다.
대학
大學 원래 <예기(禮記)>의 1편이었으나 송대가 되어 유교의 기본 자료의 하나로서 주목되었다. 특히 주희(朱憙)는 <논어> <중용(中庸)> <맹자>와 이 <대학>을 4서(四書)라 하여 공자 <논어(論語)>-증자 <대학(大學)>-자사 <중용(中庸)>-맹자<맹자(孟子)>라고 하는 선진 유가의 도통을 구성하였다. 주희(朱憙)는 <대학장구(大學章句)>를 지어 내용을 경(經) 1장, 전(傳) 10장으로 나누어 경은 공자의 말이고 전은 증자가 그것을 해석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대학>을 증자의 저작이라고 하는 데 별달리 논증된 바 없으며 현재는 부정되고 있다. <대학>의 작자를 맹자의 학통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와 순자의 학통에 소속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서로 엇갈려 정설은 없지만 그 내용으로 보아 맹자의 학통에 소속하는 사람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어떻든 이 대학은 전국시대(戰國時代) 중기부터 한대 초기 사이에 지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그 내용은 학문의 목적과 순서에 대하여 서술한 것이다. 목적으로는 '명덕(明德)을 밝게(明)한다, 백성과 친한다(親民), 지선(至善)에 머무른다(止)'는 3덕을 든다. 그에 이르는 순서로서 '앎에 이름(致知)은 사물을 구명함(格物)에 있고, 사물이 구명된 뒤에 앎에 이르고 (知至), 앎에 이른 뒤에 뜻이 진실되고(意誠), 뜻이 진실된 뒤에 마음이 바르게 되고 (心正), 마음이 바르게 된 뒤에 몸이 닦이고(身修), 몸이 닦인 뒤에 집안이 가지런해지고 (家齊), 집안이 가지런해진 뒤에 나라가 다스려지고(國治), 나라가 다스려진 뒤에 천하가 태평케 된다(天下平)' 고 하여, 인식론(격물치지)으로부터 도덕론(성의·정심·수신=誠意·正心·修身)으로, 다시 정치론(제가·치국·평천하=齊家·治國·平天下)으로 나아가는 체계를 구성하였다. 이 여덟 항목에 대하여 <시경(詩 )>이나 <서경(書 )> 등의 고전(古典)을 가지고 해설하고 있으나, 요컨대 이 책의 목적은 인식론(認識論)과 도덕론과 정치론과의 체계화를 지향하는 것이다.
자사
子思 (기원 전 492∼전 431)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며 유가에 속한다. 공자의 손자, 아버지는 백어(伯魚). 이름은 급(伋), 자사(子思)는 자이다. 공자의 고제(高弟)인 증자의 유심주의 철학(唯心主義哲學)을 이어받았고, 그것이 맹자에게 이어져서 선진 유가(先秦儒家)의 유력한 한학파를 형성하였다. <중용(中庸)>은 그 자신 혹은 그의 학파의 저작으로 인정된다. 그 밖에 <자사자(子思子)> 23편이 그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으나 산실(散失)되어 현재는 그것이 어떠한 책인지 분명하지 않다. <중용>에 의하면 그는 '천(天)'이라는 주대 이래의 종교적 관념을 이어 발전시켰다. 특히 '성(誠)'이라는 생각을 도입해 그 체계의 중심을 두고 유심주의 철학을 구성하여 유가사상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중용
中庸 원래 <예기(禮記)> 중의 1편이었으나 남북조(南北朝) 이후 불교가 성해지는 데 따라서 유가측에서도 철학적 체계를 필요로 하므로 이때부터 유학자들이 이 책에 주목하게 되었다. 더욱이 송대에 들어와서는 주희(朱憙)가 자사(子思)의 저작으로 보아 <논어(論語)>, <대학(大學)>, <맹자(孟子)>와 함께 4서(四書)의 하나로 하는 동시에 <중용장구(中庸章句)>를 지어 선진(先秦)유가의 도통(道通)을 알 수 있는 기본 자료로 간주한 이래로 중요시되었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자사(子思)가 송에서 재난을 만났을 때 중용(中庸)을 지었다"고 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 책이 자사 혹은 그 학통에 속하는 사람에 의하여 저작된 것이라는 견해가 현재 거의 정론으로 되어 있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자사의 저작으로서 <자사자(子思子)> 23편이 있고 이 <중용>은 현재 <예기>에 수록되어 있는 '표기(表記)' '치의(緇衣)' '방기(坊記)' 등과 그 <자사자(子思子)>의 일부분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주희(朱憙)는 <중용>을 33장으로 나누어 전체를 일관된 저작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주로 중용이라는 것에 대하여 말한 제2장으로부터 제20장 처음까지가 <중용>의 본문이고, '성(誠)'이라는 것을 말한 제1장 및 20장 이하는 본문을 해설한 것이라고 한다. 제2장의 "군자는 중용하고 소인은 중용에 반(反)한다. 군자의 중용은 군자로서 때에 알맞게 하고, 소인의 반중용은 소인으로 기탄(忌憚)이 없는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이 중용이라는 도덕이 군자(지배계급)의 것임을 보이고 있어 그 계급적인 입장을 알 수 있다.
중용이란 한편으로 기울어지지 않는 도덕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천(天)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이르고, 성에 좇는 것을 도(道)라고 이르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고 이른다'(1章) 라고 한 것과 같이 인간성에 대한 이해를 주대(周代) 이래의 종교적 관념인 천(天)과 밀접하게 관계지어 설명하고 있다. 다시 "성(誠)은 하늘의 도(道)요, 성(誠)하려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20章) '성(誠)' 은 물(物)의 종시(終始)이니, 성(誠)하지 않으면 물(物)이 없다. 이런 까닭으로 군자는 성함을 존귀하게 여긴다'(25章)라고 하여 성을 그 체계의 중심에 놓았다. 성(誠)이라 함은 인간의 심중에 있어서 희로애락으로서 작용을 나타내기 이전의 완전한 도덕이다. 그것이 인간은 물론 우주에 존재하는 만물에 갖추어졌다고 본다. '성(誠)'이 "물건을 이룬다" 고 하는 것은 분명히 객체적 사상을 그 아래에 두려고 하는 것이다. 도 "성(誠)은 면(勉)치 아니하여도 맞고, 사(思)치 아니하여도 얻어 조용히 도(道)에 맞으니(그러한 사람이) 성인(聖人)이라"고 하여 성(誠)이 도(道)와 일치함을 말하고 '중용'과 '성'을 관련시켰다. 요컨대 인간성의 이해에 있어서, 천(天)의 관념에 기본하여 성(誠)이라고 규정하고 그것이 만물의 근본인 도(道)와 일치하고 있음을 말하였다.
맹자
孟子 (기원 전 390∼전305)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로 유가에 속한다. 이름은 가(軻), 자는 자거(子車) 혹은 자여(子輿)이다. 맹자의 전기에 대하여는 분명치 않은 점이 많다. 생몰(生歿)에 대하여도 이설(전 389∼전 305,전 372∼전 289)이 있다. 공자의 출신지인 노(魯)에 가까운 추국(鄒國) 출신이라 한다. 맹모삼천(孟母三遷)의 고사(故事)에 의하면 어릴 때에 부친을 잃고 어머니의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모친에 대한 일화가 여러 가지 알려져 있으나 그대로 믿을 만하지는 않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문인(門人)에게 배웠다고 했고, 또 자사에게 직접 배웠다고 하는 말도 있으나 자사의 문인설이 정론으로 되어 있다. 어느 것으로 보든 맹자의 학문 형성에 증자, 자사의 사상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은 인정될 것이다.
맹자는 처음에 추(鄒)의 임금에게 벼슬하고 있었으나, 뒤에 그의 사상을 실천에 옮기려고 제(齊)의 선왕(宣王), 등의 문공(文公), 양(梁)의 혜왕(惠王) 등의 제후 사이를 유세(遊說)하였다. 또 당시의 학문의 중심지, 제(齊)의 직하(稷下=城下)에서 머물며 그곳 유학자들과 논쟁한 것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사상 중에 어느것도 채용되지 않았고 만년은 문하인 만장(萬章) 등과 함께 제자의 교육에 전념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저술로서 <孟子> 7편이 있고 그 밖에 <맹자외서(孟子外書)> 4편이 있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맹자는 묵자(墨子)의 학설이나 도가의 일파인 양주(楊朱)의 학설이 환영을 받았던 시기를 맞아, 공자의 학문을 발양(發揚)하고 양주, 묵자의 주장을 비판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인간성의 이해에 있어 증자, 자사의 생각을 계승하고 종교적 천(天)의 관념과 불가분한 관계에 있어서 소위 성선설을 제창하였다. 그 때문에 사람에게 선천적으로 구비되어 있는 능력을 중시, '양지양능(良知良能)' 이라는 것을 말하였다. 양지양능 이라는 것은 사람에게는 나면서 타고난 능(能)과 지(知)가 갖추어져 있어서 일상 행동에서 육친(肉親)에게 친하고 손위 어른을 존경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仁)·의(義) 라는 것으로, 이에 의하여 인·의 가 사람에게 고유(固有)한 것이라는 것을 그는 입증한다. 또 사람은 누구든지 남의 불행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악을 미워하는 마음, 사람을 공경하는 마음, 시비(是非)의 마음을 갖고 있다 하면서 이것을 '인(仁)·의(義)·예(禮)·지(智)'라고 하는 네 가지 도덕의 드러남(四端)으로 보고, 그는 이것을 인간의 본성(本性)이라 했다.
인간이 이 사단(四端)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마치 사람에게 사지(四肢)가 갖추어져 있는 것처럼 타고난 것이라고 한다. 사람이 이것을 확충하려고 하는 의지만 있다면 누구든지 덕성을 높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또 이것이 가능한 것은 사람의 본성이 선한 까닭이지만 아무리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고 하여도 악이 생기는 것은 귀나 눈이 외부의 유혹을 받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사람에게 수양이 요구된다. 구체적으로는 '방심(放心)을 구(求)한다'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른다'는 것이다. '방심(放心)을 구(求)한다'는 것은 사람이 외물에 유혹되지 않게 욕심을 적게 하는 일이요, '호연지기'라는 것은 선행을 할 수 있는 행동력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인간의 본성이 선(善)하다는 것이 선천적인 것이라고 하는 규정이다.
이것은 맹자가 천(天)의 이해에 있어서 종교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 바로 그것 때문에 인간이 천(天)에서 독립한 존재로는 있을 없다고 하는 생각을 결지했다. 그는 성선설(性善說)에 바탕을 둔 덕치주의(德治主義)의 정치, 즉 사람에게 차마 하지 못할 일을 하지 않는 정치(仁政)를 행하는 것이 왕도(王道)라고 했다. 구체적으로는 그 인정(仁政)은 경계로부터 시작된다. 경계가 바르지 않으면 정전(井田)이 같지 않고 곡록(穀祿)이 평(平)하지 못하다. 그런 까닭으로 "폭군오리(暴君汚吏)는 반드시 그 경계를 어지럽게 한다"라고 하여 농지의 경계를 정확하게 하도록 했다. 이것은 당시 중앙집권화를 꾀하는 군주가 무력에 의하여 토지의 집중화를 밀고 나와 입회지(入會地)마저 군주 개인의 재산으로 삼고 있는 상황에 반대한 것이다. 또 위정자가 사람들의 의식(衣食)을 충분하게 하고 노인·유아를 보호하는 일도 인정(仁政)이므로 그것을 완수해야 비로소 왕자(王者)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왕자가 되어 왕도를 수행하는 자는 인(仁)을 갖춘 사람이 아니면 안되나, 그러나 인을 갖추지 않은 사람도 존재한다. 여기서 생기는 것이 사회의 분업(分業)이라는 생각이다.
마음으로 수고를 하는 자와 힘으로 수고를 하는 자를 나누어, 마음으로 수고를 하는 자는 사람을 다스리고 힘으로 수고를 하는 자는 사람에게 다스려진다는 것은 맹자의 주장이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맹자의 이른바 '민본(民本)'의 주장인 "백성이 귀하고 사직이 이에 다음 가고 임금을 가볍게 여긴다"는 것도 사회분공론(社會分功論)에서 진술한 "힘을 쓰는 자는 사람에게 다스려지고 남을 공양한다"라고 하는 백성이 갖는 역할을 중요시한 입장에서의 발언일 뿐, 결코 민권을 신장하려고 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맹자
孟子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사상가인 맹자와 그 제자들의 언론을 기록하고 있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맹자는 제자인 만장(萬章) 등과 공자의 학설을 밝히기 위하여 <맹자> 7편을 지었다 한다. <맹자>에 최초로 주해를 붙인 조기(趙岐, 後漢 사람)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의심한 사람은 한유(韓愈)이다. 그는 맹자의 사후 제자인 만장(萬章), 공손축(公孫丑) 등이 스승의 말을 모아 편집한 것일거라고 하였다. 청대의 역사가 최술(崔述)은 맹자의 사후까지 생존하고 있었던 제후를 시호(諡號)로 부르고 있는 점, 편중(篇中) 만장, 공손축의 2인의 제자는 존칭인 '자'를 이름 뒤에 붙이지 않은 점 등으로 해서 이 두 사람에 의하여 편집된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 요컨대 맹자의 사후 그 학파에 속하는 사람이 편집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 책의 편수(篇數)에 대하여 <사기>에는 7편이라고 하였고,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 에는 11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기(趙岐)는 <맹자제사(孟子題辭)>에서 7편이라고 하였고, 다시 "외서 4편(外書四篇)·성선변(性善辯)·문설(文說)·효경·위정(爲政)이 있으나 내용이 얕고 내편(內篇)과는 관계없는 것 같아 후세의 사람이 맹자의 이름으로 지은 것이라"고 한 것으로 보면, <한서> <예문지>의 11편이라는 것은 <맹자> 7편에 <외서>의 4편을 더한 수일 것이다. 다만 이 <외서>의 4편은 현재 산실되어 볼 수는 없다.
7편이라는 것은 양혜왕편 제1 (梁惠王篇第一)·공손축편 제2 (公孫丑篇 第二)·등문공편 제3(藤文公篇 第三)·이루편 제4(離婁篇 第四)·만장편 제5(萬章篇 第五)·고자편 제6(告子篇 第六)·진심편 제7(盡心篇 第七)인데 각편 각기 상하로 나뉘어 있기 때문에 전부 14편이 된다. 편명은 <논어>와 같이 편수(篇首)의 말을 그대로 취한 것으로 내용을 표시한 것은 아니다. 제1편 양혜왕편은 양의 혜왕과 회견한 때의 문답에서 시작하여 양(梁)의 양왕(襄王), 제(齊)의 선왕(宣王), 추(鄒)의 목공(穆公), 등(藤)의 문공(文公), 노(魯)의 평공(平公) 등과의 회견이 기록되어, 맹자가 유세하며 순회한 나라와 제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거기에는 이 편의 지어진 목적과 특히 이 편이 최초에 놓이게 된 이유도 있는 것 같다.
그 중에서 이(利)를 버리고 인의(仁義)를 중시하는 일이라든지, 왕자로서 인정(仁政), 왕도(王道)를 행해야 한다는 것이 설파되었다. 인정(仁政)이란 성선설(性善說)에 기초를 둔 남을 생각해 주는 정치를 행하는 것이다. 공손축편은 제자인 공손축과의 대화로서 제(齊)의 일이 기록되었고, 등문공편에서는 등(藤)에서의 일이 기록되었는데, 거기서의 주제는 양혜왕편(梁惠王篇)과 대략 같아 군주의 행할 왕도(王道)에 대한 문답이 기록되어 있다. 다음의 이루(離婁)·만장편(萬章篇)은 제자와의 대화를 통하여 '인의(仁義)의 도(道)'에 대하여 설명하고, 특히 만장편은 상고시대의 성왕인 요(堯)나 순(舜)에 대한 설화가 많다. 고자편(告子篇)에서는 타학파의 사상가들과의 논쟁을 통하여 성선설이 심화되었다.
최후의 진심편(盡心篇)에서는 선성(善性)과 천명과의 관계를 언급했다. 특히 최후의 장에서 500년마다 성인(聖人)이 출생하는 일이라든가, 그동안 끊임없이 계속된 도통(유학 전도의 계통)을 승계하는 일은 공자로부터 100년 후에 출생한 자기에게 부과된 임무라고 자기의 결의를 표명했다. <맹자>의 최후에 이 장을 두는 것은 전체를 맺는 것으로는 서로 잘 조화되는 것인 만큼 편집자가 의식적으로 배열한 것이라는 점이 분명하다. <맹자>의 문장은 <논어>에 비하면 긴 문답체가 많고, 그 중에서도 제후 제자 타학파와의 의론은 그 서술에 박력이 있으며, 문장은 부드럽고 설득력이 있어 논설을 진행하는 방법의 교묘함이 대단하다. <맹자>가 한대(漢代)에는 <순자(荀子)> 등과 함께 유가의 한 책에 불과했었으나 당대에 한유(韓愈)가 이 <맹자>에 주목한 다음 특히 남송(南宋)의 주희(朱憙)가 <맹자>를 공자 ― 증자 ― 자사의 유가의 도통을 잇는 것이라 하여 <논어> 및 <대학(大學)>, <중용>과 더불어 4서(四書)의 하나로 주석을 붙임으로써 유가사상사에 있어서 부동의 위치를 확보하였다. 그리고 맹자까지도 성인인 공자에 이어지는 인물(亞聖)로서 존중케 되었다.
고자
告子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사상가로 이름은 부해(不害)이다. 고자의 사적에 대해서는 잘 모르나 인간성 이해에 대한 맹자와의 논쟁이 <맹자>속에 인용되고 있어 그의 사상을 약간이나마 알 수 있다. 고자는 생(生)을 성(性)이라 한다든가 식(食)과 색(色)은 성(性)이라고 하여 타고난 기질 그대로의 식욕과 성욕이라고 하는 동물과 같은 생리적인 욕구의 현상을 성(性)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결론으로서 그는 성은 선(善)도 악(惡)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맹자는 인간에게는 동물과 다른 무엇이 있을 것이며 그것이 인간의 타고난 도덕성, 즉 인의(仁義)라 하여 동물과 구별하려고 하였다.
다시 고자에 의하면 본성(本性)은 비유컨대 재료의 나무이며, 인의(仁義)는 만들어진 바구니 같은 그릇이다. 인간이 인의를 행하는 것은 나무의 재료로 굽혀서 만들어진 기구와 같은 것이라 했고, 또 본성을 구비치는 물에 비유하여 동쪽으로 흐르게 하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흐르게 하면 서쪽으로 흐르는 것과 같이 본성은 처음부터 선이라고도 악이라고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자기의 아우는 사랑하지만 타인의 아우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는 따위의 차이가 있는 그것은 그것이 내적 감성을 주로 하기 때문이며, 연장자를 존경할 경우 타인이라도 존경하는 것은 그것이 외적 사실을 주로 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인(仁) 은 선천적으로 갖추어진 것을 인정하지만 의는 어디까지나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주장들은 맹자가 관념적 입장에 선 종교적 천(天)의 위치에서 인간성을 이해하고 있는 것과 날카롭게 대립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두 사람의 의론이 끝까지 평행선을 이루었던 것도 당연하다고 하겠다.
순자
荀子 중국 전국시대 말기의 사상가며 유가에 속한다. 이름은 황(況), 순경(荀卿) 당시 사람들의 존칭이다. 조(趙)의 출신, 50세 때 제(齊)에 가서 당시 할술계의 중심지였던 직하(稷下)의 지도자로서 세 번 제주(祭酒=學政을 맡은 장관)라는 지위에 취임했다. 이런 일은 일시 침체하여 있던 제(齊)의 사상계에 활기를 불어 넣는 일이 되었다. 후에 초(楚)로 가서 대신인 춘신군(春申君)의 추천에 의하여 난릉(蘭陵)이라는 지방의 장관이 되어서 선정을 베풀었으나 춘신군이 암살되어(전238) 관직을 그만두었다. 진(秦)이 천하를 통일했을 때(전 221)에도 아직 살아 있었다고 한다.
그는 공자와 자궁(子弓) 혹은 자유(子遊)로부터 배웠으며 동시에 타학파의 이론도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순자(荀子)의 문하에는 유가로서 한초(漢初)에 <시경>을 전한 부구백(浮邱伯), 법가(法家)의 한비(韓非), 진(秦)의 재상이 된 이사(李斯)가 있다. 순자의 사상에서 제일 주목되는 것은 천(天)의 이해일 것이다. 그것은 종래의 유가의 종교적 천(天)의 이해에서 탈각하여 자연현상으로서 파악한 것이다. 그 결과 순자는 인간성 이해에 있어서 내재적 요인이었던 천(天)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될 수가 있었다.
맹자의 인간성 이해가 끝까지 종교적 천(天)의 제약하에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근본적 차이를 인정할 수 있다. 그의 이른바 성악설은 이 천(天)의 이해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성악설로 예의도덕의 선천성(先天性)을 부정하고 성(性)과 위(僞)로 나누어 성을 타고 나면서 갖추어진 것으로 보고 위를 후천적 노력으로 보았다. 여기서부터 인간성의 평등(平等)을 인정하려고 하는 생각을 간취할 수가 있을 것이다. 성악설에 기본하여 위(僞)와 예(禮)가 강조되었다. 이 예(禮)라는 것은 사람의 일상의 규율은 물론, 나라의 제도·법령까지도 포함한다.
그래서 예의 습득을 최종 목적으로 하는 학문이 설파되었다. 또 예가 시대에 의하여 변화되어야 함을 인정하여 선왕(先王)보다도 후왕(後王)을 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점이 순자를 유가와 법가의 교량 역할을 한 인물로 보는 이유이다. 그는 한나라에서는 유가의 정통적 인물로 보았 으나, 송대(宋代)에 도통론(道通論)이 창도되어 성악설이 비난받으면서부터 유가의 이단자로 간주되어 오랫동안 부당하게 평가되어 왔다. 정당한 지위를 획득하는 데는 청말(淸末)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순자
筍子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의 사상가 순자(荀子)의 언론을 모은 것이다. <순경신서(荀卿新書)>, <손경자(孫卿子)>라고도 불린다. 전부 32편이다. 본래는 322편이었던 것을 한대에 유향(劉向)이 중복되는 290편을 제거하여 32편으로 정착시켰다. <순자(荀子)>에 처음으로 주석을 한 것은 당(唐)의 양량(楊凉)인데 32편을 20권으로 나누었고 순서도 조금 변경하였다. 양량·이후 송학(宋學)의 발흥과 함께 4서의 도통이 중시되어 <순자>는 이단의 서적으로서 오랫 동안 배척되었다. 내용은 철학·심리·도덕·논리·교육·정치·경제·전략·사상가 비판 등에 미쳤고, 운문(韻文)·설화에 대해서도 기재돼 있고, 내용은 각부분에 걸쳐 문체도 상당한 차이가 있어 동일인의 저술이라고 볼 수는 없다.
최초의 '권학(勸學)', '수신(修身)' 편은 개인의 수양을 논하였는데, 좋은 환경 속에서 양사(良師)를 따라서 유가의 경전을 배우고 예를 지키는 일에 의하여 인격이 완성된다고 한다. '성악' 편에서는 맹자의 성선설에 반대하여 인간은 악을 좋아하고 이(利)를 좇기 쉬우므로 예를 배워서 '위(僞) → 인위(人爲)'로 변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구체적인 방법에 관해서는 앞서 말한 '권학' 편에 기술하고 있다. '천론(天論)', '비상(非相)', '정론(正論)'편은 전통적 사고, 미신, 숙명론의 타파를 기도해 본 것이다.
특히 천론은 천(天)에 대한 종교적 이해에서 벗어나 천(天)을 인간생활과는 무관계한 자연 존재라고 인정하였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인간성의 참된 이해가 가능토록 한 점에서 유가사상사에 있어서 특필해야 할 의의를 갖는다. '정명(正名)' 편은 논리와 인식의 문제에 대하여, '해폐(解蔽)'편은 방법론의 문제에 대하여, '악론(樂論)'편은 음악 이론에 대하여, '왕제(王制)' '부국(富國)'편은 사회에 있어서의 정치적 원칙을, '의병'편은 군사 이론에 대하여 각각 기술하고 있다. '비12자(非十二子)' 편은 공자, 자궁에 대해 존경하는 태도를 보인 외에 자사, 맹자 등을 포함한 12명의 사상가를 비판한 것인데 선진 제자(先秦諸子)의 사상을 알게 하는 점에서 귀중한 기록이다. '성상(成相)'편은 민가의 체재를 취하여 순자의 정치사상을 서술한 것이며, '부(賦)'는 그의 문학작품이다. 그러나 양량(楊凉)이 19권과 20권에 수록한 각편('大略'에서 '堯問'까지의 6편)은 순자의 후학의 기록으로 여겨진다.요컨대 이 책은 순자의 사상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선진 유가(先秦儒家) 사상의 총괄서로서 큰 의의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