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나이/김재진-
별똥별 하나 떨어진다 해서
우주가 가벼워지는 건 아니다
내가 네게로부터 멀어진다 해서
내 마음이 가벼워지는 건 아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별을 산 위로 데려오고
너는 네 안에 있던 기쁨 몇 개 내게로 데려왔지만
기쁨이 있다 해서 슬픔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기쁨을 더한 만큼 세상은 아주 조금 풍요로워졌을 뿐
달라진 건 없다
꽃은 그 자리서 향기를 내뿜고 있고
둥근 나이테 새기며 나무는 조금 더
허공을 향해 두 팔을 뻗을 뿐이니
누구도 내가 초대한 이별을
귀 기울여 듣는 이 없고
사라져 간 별똥별의 길게 드린 꼬리 위로
휘황한 아픔을 새겨넣는 이도 없다
그렇게 우리는 흔적 없이 지워질 것이다
네가 내 영혼에 새겨넣고
내가 네 영혼에 조그맣게 파놓은
우물이나 그리움 같은 것들도
자국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저 투명한 슬픔 위에/채호기-
저 투명한 슬픔 위에 무엇이 비치는가?
연못에는 수련만 피어 있는 것이 아니다.
흰 구름꽃과 거울 같은 파란 하늘 전체가 피어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응시하는 시선이
수면에 반사되는 빛처럼
반짝이는 보석으로 피어 있다.
수련꽃이여
수련꽃이여
흰 손이여,붉은 입술이여
파란 비단 천 위에 네가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옥빛 보석들이여
저 수련은 꽃 피는 식물이 아니라 물의 반죽이다.
-헛된 슬픔/박순호-
비닐봉지 안에 담긴 두부 한 모
물기 흥건한 두부 한 모가 달랑달랑 흔들린다
종종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가는 계집아이
수수꽃다리 담장 집 여섯 살 딸아이
오른손에 들린 부드런 두부처럼
새순을 닮은 아이가 대문을 통과한다
한 사내의 여자가 되고
친정집을 그리워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는 동안 셀 수 없이
입 속으로 들어가는 따뜻한 두부 조각들
정 가진 사람의 슬픔 한 모
-나의 슬픔에게/이태수-
나의 슬픔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싶다.
불을 켜서 오래 꺼지지 않도록
유리벽 안에 아슬하게 매달아 주고 싶다.
나의 슬픔은 언제나
늪에서 허우적이는 한 마리 벌레이기 때문에,
캄캄한 밤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이거나
아득하게 흔들리는 희망이기 때문에.
빈 가슴으로 떠돌며
부질없이 주먹도 쥐어 보지만
손끝에 흐트러지는 바람소리,
바람소리로 흐르는 오늘도
돌아서서 오는 길엔 그토록
섭섭하던 달빛, 별빛.
띄엄띄엄 밤하늘 아래 고개 조아리는
나의 슬픔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싶다. 불을 켜서
희미한 기억 속의 창을 열며
하나의 촛불로 타오르고 싶다.
제 몸마저 남김없이 태우는
그 불빛으로
나는 나의 슬픔에게
환한 꿈을 끼얹어 주고 싶다.
-슬픔의 바깥/신철규-
보라색 보자기를 든 여인이 사거리에 서 있다 꼼꼼히 싸맨 보자기 안에는 쟁반에 담긴 커피포
트와 찻잔 두 개가 있을 것이다 보자기 위 매듭이 토끼 귀처럼 쫑긋 솟아 있다 그녀는 고개를 살
짝 숙이고 있다 정면을 바라보는 것도 아니고 바닥을 바라보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을 생각하는
것인지 자신을 힐끔거리며 지나치는 행인들을 생각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흘러내리
는 귀밑머리를 가만히 쓸어 올려 귀 뒤로 넘긴다 오래 전 소중한 사람을 배웅하고 난 뒤 한참을
돌아서지 못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쪽 뺨이 패인 낮달이 허공에 떠 있다 그녀
앞 횡단보도가 한없이 펼쳐진 계단처럼 누워 있다 멀리서 불법 유턴을 하고 쏜살같이 달려온 배
달차가 멈춘다 그녀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차에 올라탄다 그녀가 떠나고 다방 안 낡은 어항 속
의 금붕어는 숨이 가쁜지 수면 밖으로 입을 내밀고 있다 흐린 유리창에 붙은, 다방 이름과 전화
번호가 적힌 셀로판지의 좌우가 뒤집어져 있다 반쯤 남은 커피는 식었고 가라앉아 있던 프림이
떠올라 달무리가 진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최금진-
장미를 라면 속에 넣고 끓여 먹은 적이 있다네
한 바구니 붉은 꽃잎들이 숨이 죽고 팔팔 끓을 때
너에 대한 혐오, 너에 대한 집착, 사랑의 양가성
설사를 하고, 설사에 향기가 없을 때
나는 문득 우리가 헤어지고 만 것을 알았다네
편의점에 앉아 컵라면을 먹고 있을 때, 다시 유월이었고
허기가 컵라면의 본질이란 사실을 후루룩 마시며
사랑이 정욕이었다는 기억마저 식었을 때
헐떡이는 개처럼, 물을 너무 많이 마신 돼지처럼
갑자기 사는 게 몽롱해졌다네
너무 많은 허무가 코끝으로 소용돌이치며 몰려들 때
나는 스무 살이었고, 너도 스무 살이었던 것
편의점 맞은편 담장 아래서
너의 음부에 꽂아두고 오래 보고 싶었던 그 장미들이
빗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네
다 가버렸네, 믿었던 것, 믿고 싶었던 것, 믿어야 할 것
아주 약간의 희망은 하나도 없는 것과 같으니
온몸으로 장맛비를 붕대처럼 감고
자신의 붉은 색에는 끝내 도달하지 못한 채
장미는 지고 있었네 빗줄기 속에서
너를, 너였던 것을, 너 아닌 것을 후루룩 마시고 있네
사람들은 우산을 쓴 채 멈추었다 가고, 멈추었다 가고
누가 이 절망의 스승인지
사랑은 가고, 사랑이라 여겼던 무지와 치욕마저 가고
나는 살아 있네, 살아서 이렇게 라면을 먹고 있네
-오래된 슬픔/이면우-
천사를 믿고 싶은 저녁이오
일찍 나온 별들이 버터 발라 구운 빵마냥 노랗게 반짝이는 저녁이오
네 발로 철푸덕 엎어져 땅의 비명을 엿듣는 당신의 저녁이오
고개 쳐들어 그분을, 보낸 분을 간절히 불러보는 당신의 저녁이오
그래, 편히 쉴 곳은 있느냐고
먼 데 종소리가 자꾸 물으며 따라붙는 오래된 저녁이오
-슬픔의 근친/장만호-
오늘 저녁
슬픔의 주인은 누구인가
돼지고기 한 근을 앞에 두고
부엌에 서서, 오래도록 생각하고 있는 어머니인가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아들인가
이상하다, 생각이 나질 않는구나
고추장 불고기를 해먹어야겠는데, 생각이
30년 동안 식당 주인이었는데도,
갑자기 요리법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어머니의 저녁인가
제가 할게요
제가 하지요
고추장 불고기 맛있게 만드는 법
‘고추장 두 큰 술, 고춧가루 두 큰 술, 후춧가루 약간…’
고기는 목살, 기름기 없는
쓸쓸한 한 근
주물러 재워두고, 담배를 피고 들어오는 아들의 저녁인가
그 사이에 잠시 잠든 어머니의 시간인가
오늘 저녁 슬픔은 어떤 맛이 나는가
고추장 두 큰 술, 고춧가루 두 큰 술…
아들과 어미가 저녁을 먹는다
마흔 넷 개띠와 여든 살 개띠가 저녁을 먹는다
고추장 불고기
으르렁 소리도 없이 양보하며 싸 먹는다
마지막 남은 슬픔 한 장을 서로에게 권해주면서
-건달의 슬픔/고 영-
술꼭지가 돌아 들어온 날 아침
그녀가 식탁에 앉아 햇양파를 까며 운다
아침 햇살이 맵다
그녀의 눈빛이 너무 맵다
저렇듯 눈빛이 매운 날은
시원한 냉수 한 잔도 간밤의 소주처럼 쓰고 맵다
경험에 의하면 그녀는 지금
까딱 잘못 건그리면 터지고 마는 프로판 가스통처럼
몹시 위험한 상태다
연민으로 지은 잡곡밥, 눈물로 무친 시금치 나물, 한숨을 넣은 장조림,
원망으로 끊인 북어국, 독약이 발라졌을지도 모를 꽁치구이…
그런데 꽁치 대가리는 어디로 갔나
어두육미,
어두육미를 읊조리며
마치 수라상을 받은 것처럼
최대한 황홀하게, 최대한 맛있게 밥공기를 비우는데
눈치 없는 젓가락이 자꾸 미끄러진다
젠장, 기어이 올 것이 왔는가
맵고 뜨거운 눈빛만 남기고 한 무리의 가방이 현관을 나선다
자기야, 가니? 정말 가는 거니?
젓가락을 놓고 잡으려는데
우드득 돌이 씹힌다
-달팽이의 슬픔/고 영-
눈물에 기대 잠드는 날들이 많아졌다.
지구의 중심을 짊어지고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
슬펐다. 낙엽 더미 속에 깃들면
잠시나마 따뜻해질까.
도마뱀이 되고 싶었지만
나를 위해 기꺼이 희생해줄 꼬리가 없었고,
내 몸은 너무 무거웠다.
등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는 일조차
내겐 고역이었다.
거추장스러운 껍질을 벗어버리기 위해
몸속에 불씨를 품고 살아야 했다.
그 불씨가 꺼지면,
뼈 한 점 남기지 않고
깡그리 녹아내릴
완전한 연소체가 되고 싶었다.
형체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평생 그림자를 지우며 살아야 했다. 그것이
슬펐다.
-슬픔의 무게/박승류-
영혼의 무게는 21g이라 한다.
70kg의 몸, 고작 70,000g의 0.03%라니
영혼이 가진
슬픔의 무게는 더 보잘 것 없다
칠정(七情) 중에서 차지하게 되는 몫
공평하게 나누어도
보잘것없는 무게에 짓눌려
몸을 가누지 못한 눈물을 기억한다
보이지도 않는
먼지 같은 무게에 가위눌리듯
조정 당하는 몸통으로
밥 먹고 똥 누고 섹스 하고
먹을 것이 없다고
바꾸어 가질 몸이 떠나버렸다고
바꾸었던 몸통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3g의 무게를 가누지 못하면서
-갈대 울음-슬픔에 대해/이만섭-
바람은 혼자 울고 싶을 때
공활한 허공을 마다하고 강가에 와서 울었다
나직한 강물 곁에서
역마살로 살아온 모진 드난살이의 생을
처음 일으켰던 달빛도 환한 그 자리에
시집간 딸이 친정어머니 품에 와서 울듯이
가슴 터놓고 울고 싶었던 것이다
세상에는 아무리 작은 슬픔이라 해도
그가 울고 싶은 자리가 있다
바람도 그런 슬픔을 자기의 슬픔처럼 껴안고
꺼이꺼이 울어줄 곳을 찾아왔던 것이다
어떤 외로움에도 끄떡없는 갈대가
유독 바람의 작은 슬픔에도 흉금을 나누는 것은
서로를 속이지 않는 데 있다는 것을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슬픔에 대하여/이성복-
슬픔에게 감사할 일이 어디 한두 가지인가
내 나이도 그에게서 얻었고 내 분노도 그가
준 것이니 도무지 그가 없다면 난 무슨 수로
기쁨을 얻을 것인가? 그러니 슬픔에게도 점심
대접을 하고 간혹 옷을 살 때면 슬픔의 옷도
한 벌 따로 사 주자 슬픔은 늘 입맛이 없고
언제나 내가 입던 옷을 얻어 입는다 슬픔이
시무룩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도 슬픔은
나보다 젊다 그에겐 멋진 젊은 애인이 있다
하지만 난 슬픔이 부럽지 않다 그는 몸이 없어
하지도 못 한다 죽기 전에 슬픔 대신 한 번
더 해야지 슬픔을 약 올리려면 뭔 짓을 못 할까
-비록에서 비롯된 슬픔/김은자-
비록이라는 말 참, 슬픈 기운이 떠돌지?
비록 어떠할지도 이러이러 하리라…
결핍을 딛고 눈물을 피워낸 비록秘錄
그것은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기록
사랑의 역사라지?
그 비밀스런 기록이 시작되었을 때
우리는 가난했지만 배고프지 않았다
새벽이 오면 헤어질 줄 알면서도 비록 비록
야생조 울음소리로 밤 귀퉁이에 불을 지피며
서로의 등에 귀를 가져다 댈 때
네 등 뒤에서 들려오던
비록이라는 말 휘바람 소리를 닮아있었지
짧게 스쳤지만 뜨거웠던 입술
시골 기차역에서 네 손을 내어주며
잎새처럼 떨었지만
네가 떠난 뒤에도 꽃은 핀다
비록이라는 말 참, 고독하지?
-바다는 모두 슬픔이다/양채영-
슬픈 날
바닷가에 서면 바다는 모두 슬픔이다
밀물이든 썰물이든
저 허허한 빈 곳에
푸른 이름으로 잠기고 쓸려나가는 저 먼 먼 곳에
살구꽃 달맞이꽃이 피고
꿈인 듯 떠 있는 배
갈매기 한 마리
슬픔처럼 날아오른다.
[돌샘 이길옥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