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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 축
의성김씨 개암종택은 문화재 관리 차원에서 새로 단장된 건물이다. 목재·기와·담장을 제외하고 모든 벽은 백회로 하얗게 새로 칠했다. 천정의 서까래 사이 부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담장은 미사처리를 하였으므로, 은은한 흙의 색감을 드러낸다. 건물의 외벽을 모두 백회 처리를 하여 집 전체에 통일적인 느낌을 주는 동시에 밝고 경쾌한 느낌을 주도록 했다.
* 개암정 (開巖亭)
김우굉의 아호를 쓴 정자 현판개암정은 사랑채 건물에 남면하여 붙어있는 현판이다. 파조인 김우굉의 호로부터 오는 이름이다.
* 문 중
의성김씨 개암공파 종계의 흐름을 처음 여는 개암 김우굉은 의성김씨 세계(世系)에서 20대에 속한다. 신라 경순왕의 4남 김석(金錫)이 시조이고, 중시조인 9대 김용비(金龍庇)의 3자 김영(金英) 계열에 속한다.
김우굉(1524~1590)은 해저의 의성김문인 개암공파(開巖公派)의 파조이다. 김우굉은 칠봉 김희삼의 2남인데, 자는 경부(敬夫), 호는 개암이다. 성주 사월리에서 출생하였다. 1552년(명종 7)에 장원 급제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여, 형조 참의·광주 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1562년(명종 17)에는 성주 동쪽, 낙동강 상의 개구암(開口巖)에 집을 짓고 주변 산수를 즐기며 노닌 적도 있었다. 퇴계 이황, 남명 조식 두 선생의 문하에 출입하여, 영남 학단의 흐름을 이었다. 1589년(선조 22) 전라도 광주 목사를 끝으로 귀향하였으며, 1590년(선조 21)에 67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배위는 정부인 남양홍씨이다.
* 개암 김우굉(金宇宏) 선생
- 1524년(중종 19)년 ~ 1590년(선조 23)년
- 문과(1566년)
- 내관직 :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주서(注書), 대교(待敎), 봉교(奉敎),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예조 좌랑(禮曹佐郞), 병조 좌랑(兵曹佐郞), 예조 정랑(禮曹正郞), 병조정랑(兵曹正郞), 지제교(知製敎),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 부수찬(副修撰), 사복시정(司僕寺正),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 병조 참의(兵曹參議), 형조 참의(刑曹參議),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 외관직 :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청송 부사(靑松府使), 광주 목사(光州牧使)
- 시대를 잘못 만나 자연을 노래하다
그와 그의 부친은 권신이 농단하는 세상, 사림이 동서로 갈려 서로 대립하던 시기를 살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지닌 능력을 제대로 펴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그의 부친인 김희삼은 당시의 권력자인 이기(李芑)의 미움을 받아 자원해서 삼척 부사로 7년간 재임하였다. 그때 김우굉은 주변의 명승지를 두루 유람하였다. 아울러 43세 때에는 동생인 사계(沙溪) 김우용(金宇容),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사암(徙庵) 노관(盧祼), 매촌(梅村) 정복현(鄭復顯), 송암(松庵) 강익(姜翼) 등과 함께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에서 학문을 강론하고, 아울러 함안(咸安)의 명승지를 유람하며 시를 지었는데, 탈속(脫俗)한 듯한 기품을 느낄 수 있었다.아울러 60세 이후에는 동서의 분쟁에서 벗어나기 위해 잇달아 외직을 구했고, 날마다 자연과 벗 삼아 기심(機心)을 잊으려는 삶의 태도를 견지했다.
- 불의에 과감히 맞서다
42세 때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보우를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리는 작업을 주도했다. 그는 경상도 내의 선비들에게 통문을 돌려 상소를 올리도록 주도하였고, 한 달 동안 22번 상소를 올렸다. 비록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이로 인해 곧은 명성을 세상에 떨쳐 사림들의 존중을 받았다. 형조 참의로 재직 중이던 60세 때 서얼인 곽사원과 사노가 교하에 있는 언답(堰畓)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소송이 붙었다. 곽사원은 권력자의 후원을 받았기 때문에 형조에서는 권력자의 눈치를 보느라고 오랫동안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는 곽사원이 제출한 증거가 위조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형조 정랑과 형조 판서는 권력에 빌붙어 곽사원을 두둔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에 형조 참의를 사직하였고,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자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하여, 일을 순리대로 처리하게끔 하였다.
* 학 문
- 스승 : 조식(曺植), 이황(李滉)
- 향사 : 상주 속수서원(涑水書院)
- 학파 : 퇴계 학파
- 조식, 이황의 학문을 전수받다
김우굉은 일찍부터 남명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대인군자의 덕목을 습득하였다. 그 스스로 퇴계 이황(李滉)보다는 조식의 학통에 가깝다고 인식하였다. 그렇지만 동생 김우옹과 함께 이황에게 예제(禮制)에 관한 서신을 교환하며 감화를 받았다. 1560년(명종 15) 그가 별시문과(別試文科) 초시(初試)에 합격할 때 출제관(出題官)으로서 그의 책문(策文)을 보고 감탄한 바가 있었던 이황은 그와 서신을 교환하는 가운데 “진정 그 명성이 헛됨이 없다.”라며 그의 박식함에 칭찬을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중간에 서로 만나지 못했어도 그의 풍의를 생각하여 잊지 않았다. 이제 편지를 받고 보니 이취(理趣)와 사채(詞彩)가 모두 뛰어나 사람을 감동시킨다고 했을 만큼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이를 보면 그의 사승관계는 일찍이 남명의 문하에 있다가 과거 급제 후 아우 동강과 함께 도산에 급문했다는 시간적인 전후관계로 파악할 수 있다.
- 류성룡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유하다
그는 교유 관계가 상당히 넓었다. 노관(盧祼)·정복현(鄭復顯)·강익(姜翼)·류성룡(柳成龍)·노수신(盧守愼)·강사상(姜士尙)·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 등 당대 경상도의 명사들과 친분을 쌓았다. 류성룡은 안동 하회에서 배를 타고 그가 살고 있던 낙동강변의 개암까지 와서 이틀을 묵으며, 학문하는 요체와 세상을 구제할 원대한 포부를 서로 토로하기도 하였다.
- 강직한 선비로서의 기품이 드러나는 『서행일기』
『서행일기(西行日記)』는 그의 강직한 선비로서의 기품을 느낄 수 있는 자료이다. 그는 당시 상소를 통해 사림들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상소문의 상주과정에 있어서 그 명분과 찬술, 및 사림의 의견 수렴, 조정 관리들과의 연계와 규합과정, 체류 경비 조달과정, 전체 일정 등을 비교적 소상하게 알려주고 있다. 이 일기 속에는 특히 서울에 있을 때 당시 좌랑이던 율곡 이이가 두 번이나 격려 차 그를 방문했다는 내용도 있다.
* 봉화읍 > 해저리
- 매봉산 남쪽 줄기에 자리잡은 큰 마을, 해저리
해저리는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에 속해 있다. 봉화읍의 서쪽, 봉화에서 영주 나가는 2차선 도로의 봉화 쪽 초입에 위치하고 있다. 해저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 분지는 동북 남서 방향으로 길게 찢어져 있다. 분지의 한 끝에는 봉화읍이 자리 잡고 있으며, 다른 한 끝에는 해저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해저마을에서 봉화읍은 동북 방향으로 물러나 있다.
해저마을 앞으로는 2차선 도로와 영주 태백 사이의 철길이 종으로 가로지르고 있고, 그 너머로 멀찍이 물러나서 고만고만한 산들이 횡으로 늘어서 있다. 해저마을의 북쪽은 해발 587m의 응방산(鷹坊山)이 버티고 서 있다. 그리 높은 산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해저 마을의 북방을 옹위하고 있는 주산인 셈이다. 그러나 해저마을에서는 응방산의 600여 m 남짓한 높이도 실감할 수 없다. 응방산은 해저마을에서 북쪽으로 멀리 물러나 있고, 응방산으로부터 뻗어 내린 산줄기들이 나지막이 한참을 흘러내려 해저마을을 품고 있는 산자락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응방산 정상은 해저마을에서는 볼 수 조차 없는 것이다. 해저마을 사람들은 응방산을 매봉산이라고 한다. 매는 응의 한자 의미로부터 온 것이고, 봉은 방의 음이 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해저마을은 그 응방산, 또는 매봉(방)산의 발치에서 흘러내린 나직한 산줄기의 그 끝에서 남면하고 있는 제법 큰 마을이다. 해저마을에 서서 보면 앞의 도로와 철로 넘어 펼쳐져 있는 벌은 호평들이다. 호평들의 서쪽으로는 학정봉이 막아선다. 영주 나가는 길은 그 발치를 휘돌아 숨은 듯이 뻗어나간다. 앞쪽 멀리 일선을 이루고 있는 산줄기 속에서 가장 높은 것은 조금 서쪽으로 치우진 지점을 장악하고 있는데, 호골산이라고 불린다. 서쪽은 넓게 열려 있어 봉화읍이 그 끝을 차지하고 있다.
봉화와 해저 사이의 북쪽 산줄기는 해저마을의 서쪽 부분에서 나뉘어 있다. 그 사이의 골짜기 안은 개터밭골 또는 개따밭골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한다. 해저는 바라미·바래미의 한자 이름이다. 바다 밑을 뜻하는 의미일 터인데, 아마 지대가 낮다는 점을 취해서 이름으로 삼은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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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요즘 봉화에 대해 많은 공부하게 되네...잘있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