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사람과 그때 그 여인
ㅡ심심해서 웃자고 쓴 글입니다^^ㅡ
MBN과 티비 조선의 트롯 열풍이 대단하다.
이름하여 '불타는 트롯맨'과 '미스터 트롯2'.
사실 나는 그다지 즐겨보지 않는데, 마눌님이 채널을 고정해서 선택의 여지없이 보게 된다.
우리 나라 사람이 노래를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도 많은가 보다.
하나같이 정말 잘한다.
그런데 내 눈엔 어느순간부터 참가자들보다 MBN의 심사위원으로 나온 심수봉이 가장 강렬하게 와 닿았다.
아하,
심수봉도 세월을 피해가지 못했구나.
이젠 '늙어버린' 그녀를 보면서 그 시대에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자라던 세대도 저렇게 늙어가겠구나, 애잔함이 이는건 너무 감상적이었을까?
그녀, 심수봉.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겪은 여인.
박정희 김재규로 각인된 한 시대가 종말을 고하던 그 마지막 술자리.
그곳에서 타의에 의해 노래를 불러야했던 그녀.
당시의 권력이 부른 무도한 횡포였다.
그 횡포에 저항할수 없는 시대적 비극.
그녀는 그로인해 오랫동안 평범한 삶을 영위할 수 없었다, 라고 들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은 너무나 강렬해서, 심수봉이 나오면 어쩔 수 없이 당시의 상황이 소환되었다.
그래서였을까.
새로 들어선 군부 정권은 그녀에게 제재를 가했다,고 들었다.
오랫동안 그녀의 소식은 바람결에 고통을 수반해 들려왔다.
그 사건이 있던해 가을 나는 겨우 열일곱살이었으나, 아하 저 막강한 대통령이 최측근의 총을 맞고 죽을수도 있구나, 생각했던거 같다(이렇게 같다, 라고 쓰는건 기억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각설 .
그 사건이 나고 여러해 지나 나는 한 여인을 알게 되었다.
스물 댓살 부근일 것이다.
불루 칼라로 남쪽 지방 도시에서 직장에 다니던 나는 이 때 '그때 그 사람'을 애잔하게 잘 부르는 한 여인을 알게 됐다.
스물댓살의 젊은 청춘은 그 때 이미 술을 즐겼다.
한동안은 퇴근하면 사십년대 오십년대 출생의 선배들과 돼지 두루치기 집에 앉아 막소주를 마시고 나중에는 다같이 취해 젓가락으로 상다리를 두드리며 뽕짝을 불러댔다.
지금은 트롯이라 하지만, 저때는 뽕짝이라고 불렀던 노래의 가사를 몰라 서점에 가 노래책을 사서 공부하듯 가사를 외워야했다.
고백하자면 지금 나도 모르게 나오는 옛날 트롯은 저 때 강제로 외웠던 것들이다.
참 오래 내안에 머물러 한잔 술에 젖으면 홀로 나즉히 부르곤 한다.
그리곤 그 시절을 회상하곤 한다.
나이를 먹는 일은 거창한거 같아도, 실은 이렇게 과거를 회상하는 일처럼 소박한 것이다.
기억속의 일들이 어제처럼 선명한데 돌아보니 아득해진 세월.
그게 나이 먹는 일이 아닐까?
그 세월 속에 참 많은 사람들이 머물렀고 떠나갔다.
(문득 그 머물다 간 사람들과의 인연을 글로 쓰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무렵 그중 한 명인, 심수봉의 '그때 그사람'을 심수봉처럼 애잔하게 불렀던 여인.
내 나이 또래의 여인이었다.
앞서 얘기했지만 뽕짝 시절이 오래되자 나는 언제부턴가 그런 자리가 시들해졌다.
좀 더 고상한(?) 술자리가 그리워졌다.
그시절 간간히 읽었던 앞선 시대의 예술인들처럼, 뭔가 낭만이, 혹은 애수와 이루지 못해 애잔함이 전설처럼 전해지던 술자리들.
이를테면 박인환 시인의,
6.25 전쟁이 끝나고 시대의 아픔속에서도 예술가적 삶을 추구하며 독주를 마시던 서울 명동의 핍진한 술집의 풍광이라던가
조병화 시인의 멋과 낭만이 돋보이는 모던한 술자리라던가....
아무튼 뭐, 그랬던것이다.
그렇게해서 발견한, 그래, 발견한 것인, 술집이 지금으로 치면 까페 같은 양주 잔 술을 팔기도 하고 칵테일을 팔기도 하는 당시 그 지방도시에선 꽤나 모던한 '칵테일 바' 술집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런집을 찾아 다녔다.
돼지 두루치기와 막소주에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
'선창' 류의 노래를 불러대는 집이 시장통이었다면 이곳은 뭔가 프라이빗해서 조곤조곤 얘기를 나눌수 있어서 나로선 신천지였고 딱 내 스타일었다.
그곳엔 대부분 길게 자리한 빠 테이블 안에 이쁜 여인이 칵테일을 만들어주고 당시로선 이름도 낯선 위스키나 꼬냑을 잔 술로 팔었던 것이다.
고백하자면 여기부터 나의 술자리는 빛이(?) 나기 시작했다.
이 조용한 술집 여주인들은 대부분 우아했고, 나름 예술에 일가견이 있는듯해 보였다.
그중 처음으로 단골이 된 칵테일 빠(이젠 이름을 잊었다) 주인은 남편이 외항선 마도로스였는데, 그 남편이 입국할 때 가져왔다는 이름도 낯선 양주를, 지금도 그렇지만 독한 위스키를 잘 못마시는 나에게 향이 좋은 꼬냑 종류인 '브랜디'를 소개하줬다.
아하,
나는 그 향기에 반해 잔 술 꽤나 마셨다.
당시 가난한 불루칼라였던 나는 병째 시켜먹을 입장이 아니어서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며 당시 4천원이나 하는 잔술을 머리속으로 계산을 하며 마셔야 했다.
그러다 어느날인가부터 주인장과 빠텐더였던 아가씨는 내 팬이 되었다~^
당시 문청文靑이었던 나는 문학을 좋아하던 여주인과 아가씨에게 문학에 대한 썰을 풀었던 거시다...ㅋ
그러자 이 두 여자분덜은 초저녁무렵 술집에 들어가면 지루한 시간도 죽일겸 내 옆에 앉아 문학 썰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냥 듣기 미안했는지 남편이 숨겨두고 먹는다는 꼬냑을 한잔씩 써비스로 따라 주기도 하고 이쁜 아가씨는 손님이 키핑해 둔 고급 양주를 몰래 한잔씩 갖다 주기도 하는 것 아닌가~^ㅎ
언제부턴가 체면치레로 한잔만 시키면 서너잔은 써비스로 마시는, 참 거시기한 입장이 되었다.
그자리에서 박인환의 고단한 삶과 술을 얘기해줬고 김수영, 박목월, 이중섭 '대한민국 김관식'...뭐 두서없이 생각나는대로 떠들어댔던것이다.
그러다 어느날 안주인이 김상용을 좋아한다고 해서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 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를
즉석에서 읇어주기도 했던것이다^^
이 당시 꽤 여러편의 시를 암송하고 다녔었던 때라 나 역시도 이런 자리가 꽤나 재미있었다.
그러자 그 여주인은 홀딱 반해서(?) 그날 이후로 아주 친해져버린 것이였던 것이다.
이후 오랫동안 단골로 다녔는데 그만 문을 닫아버렸다.
애석함으로 한동안 술을 마시면 그 집앞을 서성거리곤 했다^^
그리고, 그 집이 문을 닫고
마침내 '그때 그사람'을 잘 부르는 여인을 만나게 된것이다.
당시 나는 숙소를 번화한 곳에서 한갖진 곳으로 옮겼는데, 딴에는 번화한 곳을 벗어나 책도 열심히 보고 당시 소설을 쓰겠다고 의욕을 보이던 시절이어서 나름 정진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참새 방앗간처럼 퇴근할때면 매번 동료들의 한잔 유혹을 내치지못해 가볍게 한잔 걸치곤 버스 타면 잠깐인 십여리 길을 싸목싸목 걷곤했다.
한적한 그 길을 걸으며 큰소리로 시를 암송하고 노래를 부르고 사색을 하곤했다.
스물 댓살 부근의 청년은 그렇게 감성이 풍부해져 갔던것이다.
그러다 이 여인을 알게된 것이다.
어느날 못보던 술집 하나가 숙소 가는 길에 눈에 띤것이다.
자그마한 술집이었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자, 딱 내 스타일이었다.
까페형 칵테일 바였던 것이다.
이 당시 이런 술집이 유행이었던 모양이다.
여기서 그녀를 만난 것이다.
심수봉의 노래를 심수봉처럼 부르는 앳된 여인을.
첫날 빠 테이블에 앉아 당시 유행하던 진토닉 한잔을 시켜 마셨던 것같다.
그리곤 여러날이 흐르자 그녀와 나는 급격히 친해졌다.
이 앳된 여인은 나보다 두어살 아래였다.
칵테일 기술에 자부심이 강한 이 여인은 이른 저녁 첫손님으로 온 나와 이런저런 얘기, 그중 문학 얘기를 아주 즐거워했다.
누구나 그러했듯 문학소녀였던 처자는 호기심과 열정이 뒤섞여 내 문학 이야기에 즐거워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왔고 하동인가가 고향이라고 했다.
그리곤 당시엔 여수에 부모님이 계신다고 했다.
하동과 여수는 어디쯤일까?
저 강원도 벽지 출신인 나로서는 가늠이 잘 안가는 동네였다.
어느새 이런 신상도 다 아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사실 여부는 확인할수 없었지만 남동생이 서울의 유명대학에 다닌다고,자신이 열심히 벌어 동생을 거둬야 한다고, 당시의 딸들이 가지는 보편적인(?) 생각을 털어놓으며 자신도 공부좀 했는데, 앞으로 대학을 꼭 가겠다는 포부를 말하곤 했던 것이다...
그녀와 그러면서 친해졌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박인환의 고단한 삶을 얘기하면서 '세월이 가면'에 얽힌 스토리와 이 샹송같은 노래를 나즈막히 불렀던 것이다.
이 느닷없는 상황에도 그녀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 팝송을 답가로 불러줬다.
제목도 모르는 팝송이었다.
아주 잘 부르는 솜씨였다.
그리곤 후일 여러곡의 팝송을 불러주고 설명해주곤 했다.
당시 팝송에 문외한이었던 나는 그녀로인해 팝에 눈을 뜨게 된것이다.
그러면서 친해짐이 발전해 연애 감정이 들었다.
젊은 청춘남녀의 당연한 이치 아니겠는가.
일요일이면 만나 데이트를 즐겼다.
여인은 착했고 박식했고 세상사에 열정이 넘쳤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순리대로라면 우리는 사랑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허리를 다쳐 병원에 여러날 입원해야 했다.
아프다는 연락도 안했는데 어떻게 알곤 그녀가 병문안을 온 것이었다.
여러날 안보여 수소문했다고.
병원 정원을 걸으며, 허리에 압박 붕대를 해서 어그적 걷다 의자에 앉아 쉬며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다,
그녀는 나를 위로하는 건지 멋적은 건지 나즉히 노래를 불렀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언제나 말이 없던 그사람....
팝송만 부르던 그녀가 의외로 트롯을 불렀다.
그녀가 부르는 노래는 감미로웠다.
아하, 그냥 심수봉이었다.
애잔하고 우수에 차고, 기어코 어깨에 손을 얹고 다독거려야 할 것 같은 감정이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한 글래머 하던 그녀가 내 가슴에 들어와 조용히 안겼다.
사랑이 싹텄다.
스물 다섯의 청년은 그러나, 너무 순진했다. 착했다....
더이상 진도가 나가지 못했다.
끝내 아무일도 없었다.
그때 진도가 깊어 사고를 쳤으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ㅋㅋ
그리곤...
그녀는 어느날 갑자기 내앞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한동안 사랑을 속삭였던 어느날,
부모님 집에 일이 있어 여수에 간다고 했다.
당시는 통신이 지금처럼 발전하지 않았던 시절.
내 숙소에도 따로 개인전화가 없어 공중전화로 연락하던 시절이었다.
곧 돌아온다던 그녀는,
거짓말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까페에도 연락이 없었다.
보고싶을때 못보는 아픔.
볼 수 없으니 아픔이 더 깊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보고픔이 더하고
해가 지면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그곳으로 향했으나,
부질없어라 그녀의 소식은 요원했다.
신기루였을까?
키가 크고 글래머였던 그녀, 아직도 얼굴엔 몇개의 여드름이 남아있던 그녀.
팝송을 잘 부르고 병원에 입원한 나를 찾아와 그때 그사람을 나즈막히 불러주며 위로해주었던 그녀.
더러는 장난처럼 오빠, 라고 불러 아래위로 여형제가 없어 그 생소함과 다정함에 가슴 설레게 했던 그녀....
그후 나는 혹여나 만날수 있을까 하는 희망에 무작정 여수를 찾기도 했었다.
시내 여기저기를 걷기도 하고 돌산 공원에 가 낮술에 취해 슬픈 전설을 간직한 동백과, 모가지 채 뚝 뚝 진 낙화의 처절함에 갑자기 사라져버린 그녀를 대하는듯 가슴 아파하기도 했다....
지금도 궁금한 그녀.
왜 그녀는 사라진것일까?
이 순진해빠진 '오빠'가 애처러웠던것일까~^^ㅋ
아님, 내가 모르는 말 못할(?)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오랫동안 나는 심수봉의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아려왔고 그녀가 생각났다.
지금은 이름도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 그녀지만 심수봉의 노래속에 아직도 떠오르는 그녀.
어딘선가 이제는 나처럼 나이 먹어 갈 그대,
부디 건강하시라, 행복하시라...
각설.
MBN은 왜 다시 트롯 경연대회를 열고,
아니 연 것은 좋은데 이제는 잊혀져 거울앞에 선 누님처럼 조용히 살고있을 심수봉을 불러내 잊혀진 그 시절의 여인을 떠올리게 하는가^^
그리하여 애틋하고 애잔한 젊은날의 풋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것인가~^^ㅋ
그래도
내 젊은날이여,
저런 사랑이라도 있어 즐겁웁나니....ㅎ
*주말을 맞아 홀로 고향집에 다녀오며 적절히 막히는 길, 차안에 심수봉 노래를 유툽으로 들으며 오다, 불현듯 내 인생을 거처간 '그 때 그 사람들'을 불러내 추억하듯 글을 쓰면 꽤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은 '그 때 그 여인들'을 불러내는 일부터 해볼까나?ㅡㅎ
https://youtu.be/v7gu9tdGMsA
https://youtu.be/v7gu9tdGMsA
첫댓글 https://youtu.be/v7gu9tdGM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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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된 댓글 입니다.
육프로님도 옛 여인들은 소환해서 글로 써보시죠~^^ㅎ
이게 의외로 매너리즘에 활력이 되네요
뭐든 직격할만했던 청춘 시절,
의외로 우유부단했던 로맨티스트였군요
그 처자는 고향 엄니로부터
“ 야야, 참한 총각 중매 들왔다”
라는 기별 받고 내려간 것이려니 생각하세요^^ ㅋㅋ
그런 생각은 못했군요.
선을 보고 날을 잡았을수도 있겠군요~^^ㅎ
무튼 어디선가 잘 살고 있겠지요?ㅡㅎ
지가 생각보다 맴이 여려서 막 질러대질 못합니다.
특히 여성에게는 ~^ㅎ
신기루 맞는데요~~ 그런 분 안계세요 ㅋㅋㅋ
그레게요.
글로 쓰니 만난 시간이 긴거 같은데 생각해보니 아주 짧아네요.
그러니 신기루가....ㅎㅎ
@퍼팅박사 저랑은 많이 다르세요…많이 홀리고 다니셨어 ㅋ
@송감독 홀리는건 아니고, 그저 내 진심을 보였고 여인들이 거기에....ㅎ
이렇게 해석을 해주십사 요청을...ㅎ
@퍼팅박사 그니까요~~ 진심을 보였는데 쌩까니 내려가셨죠 ㅋㅋㅋ
@송감독 그런건가요~^^ㅋㅋ
미처 몰랐슴다^^
@퍼팅박사 ‘미쳐버리겠네, 흥!’
선수 ^^
누가요?
제가?
아님 여인이?ㅡㅎ
캬~~~~~~~~~~~첫사랑이었겠지요?
애잔한 그리움이 물안개처럼 번져 오르는 아련한 추억.
여름방학 그러니까 기말고사를 치루고 한창 반정부 독재타도의 데모로 인한 최루가스가 광화문 .시청의 공기를 탁하게 만들던
회현동 하숙집 방구석에서 야한 만화책을 뒤적이며 홀로 몸부림치던 심심함을 달래기위해 통일호 기차를 타고 부산친구만나러 내려갔었지요.
그 때 처음갔던 부산서면 가라오케에서 노래를 신청하면 찾아서 틀어주던 예쁘게 생긴 아담한 아가씨.
통신시설이 여의치않았던 시절'손편지로 안부를 전하기만했었고 간혹 부산에 가서 데이트도하고
태종대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나누었던 첫키쓰의 추억이 아련합니다.
졸업후에 한두번 만나다가 한달후엔 그녀의 친척이 산다는 오사카로 간다는 말에 나누었던 뜨거운 그날 밤만은 유독
날씨가 흐리거나 비올라고 하면 아픈 신경통처럼 생각납니다.
짧지만 찐한 사랑의 추억을 간직하고 계시는군요~^ㅋ
오사카라, 국경을 넘나드는 버라이팅한 사랑입니다~^ㅎ
태종대에 얽힌 추억이 제게도있습니다^^
첫사랑은 아니었고 짧아서 더 안타까운 사랑이라고 할까요?ㅡㅋ
우야튼 어디선가 잘살고 있겄지요~^
@퍼팅박사 저도 지난 설날 태종대…..갔다 코로나 걸림요 ㅋㅋㅋ
@퍼팅박사 나만의 비밀인거죠. 총각때였으니 마누라가 알아도 상관은 없지만....ㅋㅋㅋㅋ총각딱지 뗀 첫경험?? ㅋㅋㅋㅋㅋ
@타이틀리스트1 너무 파격적인 고백이신데요~^ㅋㅋ
@퍼팅박사 뭐 지금30년 살아왓는데 알아도 뭐 그닥 킹받지는 않을 우리 마누라입니다.ㅋㅋㅋㅋ
잘읽고갑니다~~~~
느낌이~~~~
긴글 읽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냥 심수봉씨가 자주나와 옛날 생각이 문득 나서 끄적여봤습니다~~~^
@퍼팅박사 늘건강하시고기분좋은일
만가득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