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은 나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으로 돌아가라.
스스로를 발견하지 못하고, 누군가에게만 의지하는 추종자로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에서 니체가 “언제나 학생으로만 머문다면 그것은 스승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스스로의 경지를 개척하고서 홀로 굳건하게 서는 것, 그것이 이 땅에 인간으로 태어난 소명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를 못하고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며 사는 삶, 그런 삶도 삶의 한 형태는 될 것이지만 도대체 그런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대大라는 글자가 공公에게 필수 약이오. 크지 않으면 자신도 지킬 수 없소, 하물며 남을 지킬 수 있겠소, 또한 큰 사람으로서 남을 지키지 못하고 비호庇護를 받는 경우는 이제껏 없었소, 대인大人이란 남을 지키는 사람이고, 소인小人이란 남에게 비호를 받는 사람이오. 대인의 식견識見과 역량力量이 일반인과 다른 것은 모두 남을 지키는 것으로부터 생기는 것이오. 날마다 커지고 자라고, 날마다 자라고 창성昌盛해지는 것이오.
만약 남에게 비호를 받기만 하면 식견과 역량이 있는 날은 죽는 날까지 없게 될 것이오. 지금 사람들은 모두 남에게 비호를 받는 자들이오. 애초에 남을 비호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모르지요. 집에 있을 때는 부모의 비호를 받고, 관직에 있을 때는 상관의 비호를 받고, 조정에 있으면 재상의 비호를 받고, 변방 장수가 되면 중앙 조정관의 비호를 받고, 성현이 되면 공맹의 비호를 받고, 문장을 지으면 반고와 사마천의 비호를 받지요,
스스로 보기에 모두 자신은 큰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는 이가 없소만, 사실 모두 어린아이이면서 그걸 모르지요, 호걸豪傑과 보통 사람의 구분은 오직 사람을 지키는 것과 남의 비호를 받는 것으로부터 알아볼 수 있는 것이오.“
명나라 때 사람으로 <분서焚書>를 짓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중국 사상사에서 최대의 이단아인 이탁오의 말입니다.
한 나라도 그렇지만 개개인 스스로를 아름답게 만드는 일의 첩경 또한 ‘자력갱생自力更生’ 이라는 네 글자에서부터 비롯될 것입니다.
자력갱생, 그 말처럼 공부라는 것도 어떤 수준을 넘어서면 홀로 하는 것이지, 누군가를 신처럼 떠받들면서 따라다닌다고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대들은 그대 자신을 만나기 전에 나를 만났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믿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믿음이 어느 날 뒤집혀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대들은 나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으로 돌아가라.”
다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몇 소절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이라는 높은 파도를 헤엄쳐가기를 이탁오도 니체도 충고하고 있듯이 진리는 지금, 내 곁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가까운 곳을 보지 못하고, 먼 곳, 요원한 곳만 동경하고 지향하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인지도 모릅니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쏜 살처럼 지나가고 있는데,
2022년 9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