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 98.12.14. 토요법회 _ 김제원 교무님 설법
오늘은 먼저, 질문을 받겠습니다.
교당 내왕시 주의사항에 나와있습니다. “상시 응용 주의 사항으로 공부하는 중 어느 때든지 교당에 오고 보면 그 지낸 일을 일일이 문답하는 데 주의할 것이요.” 문답이나 감정하는 시간 가질까요. 해오도 좋습니다.
[문] 이호원
불지품 6장에 대한 질문입니다. 천도에 순응하는 것과 천도를 사용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요.
[답]
“천도에 잘 순응만 하는 것은 보살의 경지요, 천도를 잘 사용하여야 부처의 경지”라 하셨지요.
보살은 원불교로 말하면, 항마위 정도나, 출가위 초기 정도가 됩니다. 부처의 경지는 정식 출가위나 여래위 정도를 말합니다.
예를 들자면, 말을 길들이는 기수가 있습니다. 그 기수의 실력에 따라 사나운 말을 잘 길들이면 오히려 명마가 될 수도 있고, 순한 말도 잘 길들이면 순한 말 대로 좋은 말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기수의 실력이 보살의 정도라고 하면, ‘천도에 순응, 또는 사용한다’라고 합니다.
부처인 출가위는 국을 텄습니다. 하지만 보살인 항마위는 출가위아 같이 견성을 했어도, 자기에 묶여 있습니다. 자기 수도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출가위는 시방일가(十方一家)라 하지요. 세상을 내 집으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내 교당, 내 집가 같이 내가 속한 곳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항마위입니다. 출가위는 그것을 넘어 교구나, 총부나, 또는 북한 문제에도 관심을 가집니다.
그런데 범부들은 자기 코만 석자입니다. 김정은이 자기 고모부를 죽였든지 말든지 상관을 안 합니다.
김정은이 장택상을 죽였다는 것에서, 여러분들이 많은 감상이 나와야합니다. 일기도 많이 나와야하고요.
교황은 엊그저께 자본주의에 대해 한 말씀 하셨지요. 2-30년 전에는 CEO와 일반사원의 급여차이가 20배 차이였지만, 지금은 200배~500배 차이가 납니다. 교황이 이를 지적하면서, 구속이 없는 자본주의는 문제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김정은은 어떻습니까? “내 말 안들으면 다 죽여버릴거야” 했습니다. 공포정치입니다. 하지만 교황은, 혹시 CEO들이 천주교에 희사를 덜 주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지 않고 과감하게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여러분, 북한의 이 사태를 보면서, 정치와 종교의 차이를 생각해보셔야합니다. 정치에서는 태양이 둘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형제 중 하나가 임금이 되면, 다른 형제들을 다 쫓아버립니다. 아니나 다를까, 김정은도 고모부를 제거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김정은 입장에서는 필요도 한 것입니다. 고모부가 권력을 쥐고 있으니까요. 배다른 형 김정남과도 연결이 있었고요. 얼마든지 쿠데타 당할 수 있어요. 불안했겠지요.
그렇지만은,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직책보다 실력이 있는 사람이 주도권을 갖습니다. 사형제가 폐지되는 추세입니다. 그런데, 북한은 고모부와 고모부 수하 두 사람을 총살시켜버렸습니다. 사진 보셨어요? 장성택 왼쪽 눈이 파랗습니다. 뒤지게 두드려 맞았어요.
그걸 보면서, 여러분들이 정치라는 것이 무언가, 종교라는 것은 무엇인가. 인생이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생각을 가지셔야겠습니다.
우리나라 경기가 이렇게 안 좋은 것을 본적이 없다고 합니다. 신입 사원을 뽑지 않아요. 취업도 걱정일 테지만, 세상을 보는 눈도 가지셔야합니다. 부처님의 경지는 세상을 나의 일로 보고, 다 관심을 가집니다.
보살과 부처는 다 항마위 이상의 경지이지만, 천도에 겨우 순응하느냐, 아니면 그걸 자유자재 하느냐가 다릅니다. 출가위부터는 제법주(制法主)입니다. 법을 짤 수 있습니다. 항마위는 법을 못 짜고, 자기 수도합니다. 출가위는 세상이 나의 일이기 때문에 제법주입니다.
범부들은 본업, 즉 원업과 부업이 차이가 있습니다. 항마위 이상의 원업은 중생제도입니다. 만나는 사람을 모두 교화의 대상으로 바라봐요. 하지만 범부들은 원불교 다니는 것은 원업이 아니라, 부업으로 생각하지요.
엊그제 오민웅 교도를 만났습니다. 변호사입니다. 청년회 회장이지요. 그 사람은 변호사가 본업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원불교 공부하는 사람이 자신의 본업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업이나 생각이나 신앙이나 정성이 다른 세상에 흐르지 않는” 경지입니다.
특신급, 법마상전급까지는 자기 직업이 본업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항마위 이상은 그렇지 않고, 내 직업이 부업이고, 본업은 자기 수행과 중생제도라고 생각합니다. 불보살 중에서 보살급은 따르는 근기입니다. 순응하고 인과의 이치에 따라 받아들입니다. 출가위 이상은 순응을 넘어서 자유자재 하는 것입니다. 만들어 내기도 하고 짜기도 하고요. 요리 잘하는 사람에게 어떤 재료를 줘도, 요리를 뜻대로 만들어 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출가위 이상이 되면, 자기의 업을 자기가 뜯어 고칠 수 있습니다.
범부중생은 육도윤회와 십이인연에 끌려 다닌다 했습니다.
<십이인연>
[전생] ①무명(無明) ②행(行)
[현생] ③식(識) ④명색(名色) ⑤육입(六入) ⑥촉(觸) ⑦수(受) ⑧애(愛) ⑨취(取) ⑩유(有)
[내생] ⑪생(生) ⑫노사(老死)
십이인연으로 돕니다.
식, 명색, 육입은 태어나는 과정입니다.
중생들은 대개 힘이 없어서 십이인연에 끌려갑니다. 육신의 의식주가 본업이라 생각하고 영혼의 의식주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신의 의식주에 힘이 없으니까, 죽고 나서 빨려가 버리는 겁니다.
육신의 의식주를 구하는 것이 본업인지, 정신의 의식주를 구하는 것이 본업인지 판단을 잘 하셔야합니다. 대개 법마상전급까지는 육신의 의식주가 본업이라 착각을 많이 합니다. 죽으면 육신의 의식주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모릅니다.
촉은 감촉을 느끼는 것이고, 수는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마주하는 ‘수’는 아기들이 태어날 때 우는 것입니다.
애, 취, 유는 착심입니다. 원하는 것을 취해서 나에게 놓으려합니다. 중생들은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내 명예가, 내 자식이, 내 재산이, 내 특기가 나와 둘이 아니라고 착각합니다.
불교나 원불교에서 착심을 놓는 핵심은 변의 세계를 아는 것입니다. 중국에 각주구검(刻舟求劍)이라는 고사가 있습니다. 어느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던 중, 명검을 강에 떨어뜨렸습니다. 그 사람이 떨어뜨린 배 끝에다가 다른 칼로 새겨서 표시를 했어요. 지금은 강물이 깊어서 강물에 들어가 검을 찾기 어려우니까, 뭍에 다다른 후에 찾겠다면서요. 뭍에 다다른 후에, 표시한 데서 검을 찾으려했어요. 그 사람이 명검을 찾았겠습니까?
검이 그 자리에 있었겠습니까? 배도 움직이고, 검도 흘러가 버립니다. 여러분이 살면서 취하고자 하는 것이 그 명검과 마찬가지입니다. 중생들은 사랑으로 살고, 사랑이 삶의 에너지라고 합니다. 돈에 대한 사랑, 재산에 대한, 미에 대한, 음악에 대한 사랑 따위입니다. 애(愛)가 나쁜 게 아닙니다. 문제는 애(愛)가 ‘착‘으로 가는 것입니다. 마치 배위에다가 표시해놓고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변하지 않을 것이라 착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명검이라 생각하는 명예, 돈, 여러분들의 모든 인연들이 변합니다, 나도 변하고 있고 그 인연들도 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생의 세계는 사랑하는 사람, 돈, 자식 등이 자기 것이라, 영원하리라 착각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것 때문에 거짓말도 하고, 자존심도 세우고요.
그러나 불보살들은 이것들이 변하는 것임을 압니다. 오면 오는 대로 반기고 가면 가는대로 보냅니다.
생각해보세요. 김정은이 어렸을 때, 장성택이 김정은을 얼마나 귀여워했겠어요. 근데 그놈이 자기 죽이잖아요. 그게 세상이에요. 장성택이란 사람이 이 변하는 진리를 몰랐다면, 모를수록 괴로웠을 겁니다.
더 나아가서 이것이 인과입니다. 새로 몸을 받을 때, 중생은 무명(無明)으로 들어가고, 불보살은 명(明)으로 들어갑니다. 무명은 중생의 십이인연이지만, 불보살은 명으로 들어가고 전생에 닦은 만큼 금방 회복됩니다. 가장 평등한 이치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지혜를 연마하느냐, 어떤 인연을 좋은 인연으로 만들어 가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살아 있을 때 필요한 육신의 의식주는 죽으면 다 놓고 가지만, 정신의 의식주는 가지고 갑니다. 즉, 수양력, 연구력, 취사력을 본업으로 생각하고 얼마나 공을 들였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보살은 인과에 순응합니다. “지었다니까 받아야지”라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만 한 사람도 항마위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암이 걸렸다든가, 자식이 죽었다든가, 사업이 망했다든가하면 “내게 왜 이런 일이 생겼나”하지, 달게 안 받아져요. 그러나 인과를 알고, 최소한 견성을 하면 감수 정도는 됩니다.
출가위를 넘어서면 종은(種恩)합니다. 은혜의 씨앗을 뿌린다는 말입니다. 보산 고문국 종사 아들이 젊었을 때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그러자 보산 고문국 종사께서, 아들이 앞으로 살았더라면 내가 아들에게 도와주었을 돈을 맨해턴 교당을 짓는 데에 투자하셨습니다. 조건적 신앙을 하는 사람은 아들이 죽으면 원불교를 떠나지요. 순응만 하는 사람은 꾹 참으면서, 속에서 병만 키웁니다.
고문국 종사 같은 분들은 종은입니다. 출가위입니다. (그 집안에서 출가위가 5명 나왔습니다. 안병욱 교수가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인사를 올리는 모습이 가장 극절한 모습을 보았다”고 쓴 글이 있는데, 그 인사를 받는 사람은 정산종사요. 인사를 하는 사람이 예타원 김성덕 정사입니다. 예타원님이 보산 고문국 종사, 일정실업 운영하시는 감산 고문기 종사 어머님입니다. 창평교당 공덕주이시고요.)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식이 죽으니까, 원불교를 떠난다든가 꾹 참는 것이 아니라, 아들 이름으로 은혜를 심습니다. “필시 곡절이 있을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출가위이지요.
경계를 당해보면 다릅니다. 출가위라고 감정이 안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괴롭고요, 좋은 거 보면 먹고 싶고, 편하고 싶고. 누가 좋은 옷 싫고, 누가 맛있는 것 싫고, 누가 예쁜 여자, 멋있는 남자가 싫겠어요.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고 운용하고 어떻게 심신작용을 하느냐가 다른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삼세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우리가 인(因)을 지으면, 연(緣)을 만나서, 과(果)를 형성합니다. 그런데 연을 언제 만나서, 과가 언제 나오느냐가 다릅니다. 현세에 만날 수도 있고, 내생에 만날 수도 있고요. 부정업(不定業)이라고 해서, 언제 받을지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엔 연을 만나지 못한 채, 천년 이천년이 갈 수도 있습니다.
연꽃 씨가 썩지 않은 채 있다가, 천년 이천년이 지난 뒤 흙을 만나거나 물을 만나면 연꽃을 피웁니다. 연을 언제 만나냐에 따라 과를 받는 때가 달라지는 겁니다.
그런데 요즘은 시대가 빨라졌어요. 과거에는 이생에 업을 지으면 내생에 인과를 받았다고 하는데, 요즘엔 대체로 당대에 받는다고 합니다. 김정은이 극악무도하게 사람을 죽이면, 당대에 받을 수 있습니다. 전두환도 당대에 많이 받았습니다. 백담사로 쫓겨 가고, 당대에 재산 많이 뺏겼습니다. 옛날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지금은 평등을 이야기하고, 창조를 이야기하고, 모두가 부처님이라는 이야기하고, 지구촌을 이야기하고 있는 시대인데, 북한은 장성택이 주머니에 손 넣고 있다고 삐딱하게 앉아있다고 죽여 버립니다. 지금이 그런 세상입니까?
한류가 들어가서, 북한에도 소녀시대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예전에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 만났을 때, 남한 연속극이랑 뉴스 본다고 김정일 위원장이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방송으로 이간책을 쓰기도 해요. 장성택이 제2인자로서, 전복을 꾀하고 있다는 뉴스를 남한이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북한의 귀에 들어갔을 거예요. 그건 내 생각에는 잘못된 것입니다. 대안세력을 죽여 버리면 더 통일이 어려울 텐데 말이죠.
정산종사님은 전생, 내생이라 말하지 말고, 찰나로 이야기하셨습니다. 찰나 전이 전생이고, 찰나 후가 후생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의 현재는 모든 과거의 수많은 생의 종합입니다. 여러분들 사이에 지문, 홍채, 목소리, 생김새가 달라요. 왜 그런가요? 수많은 생을 살아오면서, 많은 환경의 종합이 모였기 때문입니다. 병나는데 한 가지 이유로 병납니까? 치료에 한 가지 방법만 있습니까? 수많은 것이 치료에 도움이 되지요. 내가 존재하는 것은 수많은 종합이 모여서, 여러분이 지금 생김새, 목소리, 인연, 경제, 여러분의 모든 것이 이루어 진 것입니다.
거울을 보시면서, 내가 이렇게 업을 지어서 이렇게 생겼구나, 감사하다 생각하세요. 눈이 작은 사람은 내가 심보가 작았나보구나, 심보를 키우자 생각해보세요. 나 같이 키가 작은 사람은 상이 많고, 자존심이 센 사람입니다. 거울 보면서 상 좀 죽여라, 마음먹습니다. 너무 멍청한데, 정말 건강해요. 전생에 소입니다. 출가를 했는데도 세속을 그리워하면, 다음 생애에 얼굴은 예쁜데, 찢어지게 가난합니다. 전생에 임금이었는데, 백성의 녹을 받으면서 (세종대왕 같이 업을 많이 한 사람은 괜찮지만) 날마다 흥청망청 쓰기만 했으면, 다음 생애에 가난합니다. 백성의 녹이 공금이잖아요. 공(公)자가 들어가면 업이 더 커집니다. 복을 지어도 공의 복을 짓거나, 죄를 지어도 공의 죄를 지으면, 결과는 열배 스무배가 넘어갑니다.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은, 감수불고(甘受不顧)하시고, 참회반성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힌두교와는 달리, 어쩔 수 없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내가 어떻게 심신작용 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여깁니다. 힌두교는 그저 꾹 참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십이인연을 돌 때,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봅니다.
육신의 의식주가 본업이라 생각하시나요? 죽고 나서는 그 본업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수의에는 주머니도 없어요. 죽고 나서는 육신의 것을 다 두고 가기 때문이죠. 수의에서 수(囚)는 관속에 사람이 있다는 글자입니다. 교무들 법복도 마찬가지로 주머니가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 법회 와서 한 가지만 갖고 가도 좋겠습니다. 육신의 의식주가 본업인가, 정신의 의식주가 본업인가. 이거 한 가지만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육신의 의식주가 본업인 사람은, 정신의 의식주를 구하는 이 법회를 우습게 생각할 것입니다. 정신의 의식주가 본업인줄 아는 사람은 육신의 의식주와 정신의 의식주가 떨어지지 않음을 인지합니다.
영육쌍전법에 의식주와 삼학으로 진리를 구하라 했습니다. 그때의 의식주는 육신의 의식주이고 삼학은 정신의 의식주입니다. 즉, 육신의 의식주와 정신의 의식주로 진리를 구하라는 말입니다. 육신의 의식주가 없으면, 진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병이 나서 몸이 아픈데, 당장 잘 곳도 없는데, 당장 먹을 것도 없는데, 어떻게 진리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정신의 의식주가 본업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든 본업을 챙겨야만, 죽을 때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육신의 의식주는 쓰다가 놓고 가는 것입니다. 무형의 마음공부야말로 진짜 내 본업입니다.
이를 아는 사람은 육신과 정신의 의식주, 두 가지를 병행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범부들은 본업과 부업이 바뀌어서, 종교는 육신의 의식주를 운용하는데 스트레스를 좀 풀어주고, 육신을 맑혀주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이런 범부들은 죽어서는 아무것도 가져가는 것이 없습니다.
이창훈 교도, 인물 좋고 키도 크고 대종사님 집안 인연이고요. 심법이 모진 사람도 아닙니다. 어려운 사람 보면 모른 척 하지를 않아요. 이창훈 교도에게 어느 부서든 부탁만 하면, 이창훈 교도가 희사해 줄 겁니다. (웃음) 이창훈 교도 심법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힌두교와는 달리, 원불교는 현재의 내가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이창훈 교도는 엄청난 복을 받아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가 육신의 의식주를 본업으로 생각하는지, 정신의 의식주를 본업으로 생각하는지에 따라 또 이창훈 교도는 바뀝니다. 이생에도, 내생에도요. 하다못해 얼굴도 바뀝니다. 심법을 좋게 쓰면 얼굴이 바뀝니다. 반면, 마음이 예전으로 회귀하면 기운이 막히고 어두워지고 빈티가 납니다. 본인이 짓고 받습니다. 삼세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찰나 전이 전생이고, 찰나 후가 후생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미래사도 신구의(身口意) 삼업으로, 얼마든지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심신작용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육도로 변화할 수도 있고, 진급으로 은생어해로 해생어은으로 무량세계를 전개할 수 있습니다.
[문] 양도인
정신의 의식주를 구하는 것을 본업으로 삼고, 현재 하는 일을 부업으로 생각한다면, 자칫 잘못한다면 저희 같은 중생들은 정성이 덜 해질 수도 있을 텐데,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지요?
[답]
원불교는 병행법이잖아요. 둘 다를 취한다는 말입니다. 시간과 에너지를 한계가 있잖아요. 둘 다 취하려면 엄청나게 노력 한다는 뜻입니다.
재가에서 핵심적으로 놓지 않을 것이 있습니다. 상시응용주의사항입니다.
제가 간사 때, 저에게 “출가를 할까요, 말까요?” 하고 물어본 연세대생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집에서 상시응용주의사항을 하는 사람이었어요. 제가 그랬습니다. “출재가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상관없습니다. 대신에, 본인이 일생 살다 죽을 때, 어떤 것이 본인의 마음공부에, 본인의 삼대력을 쌓는데 도움을 주는지, 대타적으로 출가를 통해 보은할 수 있을지 재가를 통해 더 보은할 수 있을지를 판단하십시오.” 그래서 그 사람은 재가를 했어요. 지금은 통일부 간부입니다. 교당 활동 열심히 하고, 단장하고, 합창단도 합니다. 그 사람은 다행히도 꾸준히 상시응용주의사항을 했던 거예요.
대체적으로 보면, 한때 출가를 하겠다는 사람도 재가를 하고 나면, 무너집니다. 결혼해서 무너지고, 좌선도 안 나오고 훈련도 빠지게 됩니다.
오세웅 교도는 전무출신을 하려 했는데 키가 작아서 안 되었다고 합니다. 별수 없이 서울대를 들어갔어요. 하지만, 오세웅 교도는 이십년 동안 좌선을 빠진 적이 없습니다. 고시시험 보는 날에도 좌선했답니다. 애기 낳고도 훈련 빠진 적 없어요. 내가 엊그제께 참 잘한다고 칭찬했어요. “당신은 오히려 전무가 못 되길 잘했다” 했습니다. 상시응용주의사항을 자력으로 할 수 있다면 재가가 오히려 나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무얼 말하고 있느냐. 자력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원업과 부업을 이야기했지만. 원업을 제대로 하려면, 부업이 없이 원업이 안된다는 것도 알아야하고요. 이 사람이 제생의세를 하려는데, 그러면 변호사를 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제생의세하기 위해서, 죽어라 공부한 것입니다. 시험 보는 날 까지 선을 하고요. 왜? 고시를 보는 것은 ‘주’가 아니라 ‘종’이기 때문입니다.
주와 종의 관계는 희한한 것입니다. 하나이면서, 주를 하면 종이 따라오는 것이 이치입니다. 하지만 종을 먼저 하면, 주와 종 모두 놓치는 것 또한 이치입니다. 이것이 영육쌍전의 원리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종을 놔버리면 안됩니다. 병진입니다. 병진하려면 나태심이 없어야 합니다.
전무출신을 하려다가 재가를 택한 사람이, 훈련을 빠지고, 하루일과에서 삼학 시간을 갖지 않고, 원업과 부업을 반대로 생각하다가 원불교를 떠난 경우도 있습니다. 그 핵심은 상시응용주의사항을 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육신의 의식주가 본업으로 바뀌어서 그렇습니다. 결국은 퇴보하고, 강급하고, 삼세를 통해서, 나중에 비참하게 허망하게 죽어갈 때는 하나도 가져가지 못할 육신의 의식주에다가 투자해 놓습니다. 죽고 나면 필요한 정신의 의식주는 하나도 갖추어진 게 없어요. 얼마나 불행하고 안타까운 인생인가요. 누구한테 원망할 것입니까.
교당이라도 열심히 다녔으면, 교무님이 천도라도 해주지요. 교당도 열심히 안 다니면 누가 해줘요? 아무리 돈 많으면 뭣합니까.
자각이 있어야만 합니다. 자각이 서지 않은 채 시키니까, 하라니까, 상주니까 해서는 안 됩니다. 자각이 있어야합니다. 자각의 핵심은 참 나에 대한 자각, 인과에 대한 자각, 사은에 대한 자각입니다. 이러한 자각만 서게 되면, 알아서 하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우왕~ 가장 값진 크리스마스 선물!!! 감사합니다!
지훈교우 쫭
와! 지훈이의 첫 타이핑! 고마워!!
한지훈훈^^ 훈훈하네요 감사합니다!
우앙~~!!!! 이쁜 지훈교우당,ㅎㅎㅎㅎ 마지막 4줄 정리가 완젼 짱!!! 좋아요.ㅎㅎㅎ
휴일에 고생많으셨습니다!! +_+ 감사합니다!! 복 받을 거임 >_<
정신의 의식주가 본업인 줄을 알고, 정신의 의식주를 챙기는 데 유념하겠습니다 ^ㅡ^
정말 마지막까지 정리 너무나 잘 해주셨어요 ㅋㅋ 능력잔데....???????? 마지막 정리해주신 4줄 유념하며 살도록 하겠습니당 ^^ 성해,지훈교우님 감사해욧
와우♡♥♡ 성해 지훈 교우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