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6장 26~37장 24절/왜곡된 신념(212/69)
욥의 친구들중에 세 번째로 엘리후의 마지막 말이다. 엘리후는 세 친구들과 같은 모습에서 욥을 계속해서 공격을 하고 있다. 자신의 강한 신념을 바탕으로 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은 언제나 옳고, 다른 사람의 신념은 틀리다는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씩 생각해 봐야 한다. 나의 신념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나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자리에 있게 되면서, 스스로 모순에 빠지게 된다. 엘리후가 바로 이러한 모순에 빠져 있다.
1.엘리후는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는 분이라고 말한다(26). 하나님은 엄청나게 크신 분이라서 사람이 감히 알 수 없는 분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높은지, 그리고 하나님이 몇 살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무한함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그에 비해서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면서 엘리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다스리는 원리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27~33).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시고 능력이 많으신지, 그분이 일하시는 것을 사람이 다 알고 이해할 수 없다. 물이 방울이 되게 하시기도 하시고, 안개가 되게 하시기도 하시고, 이슬이 되게 하시기도 하고, 큰 물방울이 되어 폭우가 되게 하시기도 하시는 그 모든 것을 알 수 있느냐라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사람이 어떻게 이해하고 그 섭리를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번갯불이 치는 것도 역시 사람이 다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하늘의 비와 번개와 같은 자연현상들은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복중에 복이다. 자연현상들을 우리는 전혀 복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는데 복중의 복이다. 가장 기본적인 복이다. 이 복이 임하지 않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가 없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복을 내리실 때 하나님은 악한 자와 선한 자를 구별하지 않으신다. 다시 말하면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에게 동일하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그러니까 이것은 인과응보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2.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다(1~14). 하나님은 사람이 헤아릴 수 없는 수없이 많은 일을 하신다(5). 헤아릴 수 없는 그 일들을 수 없이 많이 하시는데,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에 따라서 행하신다(12,13).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하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욥에게 계속해서 네가 아느냐라고 하면서 욥을 추궁하고 있다(14,15). 당연히 모른다고 말을 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자신의 뜻에서 일하는 것을 누가 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앞으로 어떻게 연결이 될 것인가 하는 것도 모르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말한다(23,24). 하나님은 자신의 정의와 공의를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욥이 재난을 당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따라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욥기의 출발을 알고 있듯이 욥기의 출발은 욥의 죄 때문이 아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정의와 공의를 세워가시는 분이지만, 지금 욥이 재난을 당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욥이 하나님께 보상받을 만한 일을 하지만 보상을 하지 말아 달라고 하였고, 하나님은 그에 응하셨다. 보상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그의 모든 복을 거두어 가버리셨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욥에게 보상을 중단해도 그가 과연 신앙을 지키는가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욥이 고난 가운데 그가 스스로 찾은 해결책은 ‘죽자’였다. 물론 자신 스스로 죽을 수는 없다.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생명을 거두어 가야 죽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에서 살기 힘들어 하는 여러 가지 처한 환경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물론 그들이 겪었을 아픔과 고통은 충분히 이해하고, 동감이 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죽음까지 동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죽음을 동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어떤 면으로 쉽다. 그 쉬운 길이 아니라, 그들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그 아픔과 고통을 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어려운 싸움을 싸워야 하는 것이 살아 있는 자의 숙제다.]
그러나 그 전에 죽기 전에 죽은 자가 싸워야 할 싸움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욥이 죽자라고 하였을 때, ‘죽일 수 없다’라고 하였다. 왜 죽을 수 없는가? 욥에게는 하나님의 명예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욥의 고난은 그저 한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에 불과 한 것이 아니다. 사탄의 거부와 불만 앞에서 하나님이 공정하게 꺼내 놓은 하나의 내기이다. 사실 우리 성도들은 모두가 우리가 겪는 신앙의 현실 속에서 단지 자신의 인생만을 책임지면 되는 평범한 한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명예를 위탁받은 자로 존재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대단한 명예이며 영광이다.
그래서 욥은 도망가는 길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나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답을 듣고 싶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는 것은 이전에 내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른 경험이고, 다른 상황이다. 그래서 그것을 알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참된 영광을 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는 아무리 극심한 고난이 와도 죽음도 자신 마음대로 죽을 수 없는 것이다. 죽어버리면 안 된다.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이 걸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