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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문화재답사 스크랩 ??큰 바위굴 암벽에 서 있는 가섭암지 마애여래삼존입상
청목/金永柱 추천 0 조회 39 13.06.08 10:1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큰 바위굴 암벽에 서 있는 가섭암지 마애여래삼존입상

 

가섭암지 마애여래삼존입상

 

 

가섭암지 마애여래삼존입상은 거창 수승내 남쪽에 있는 금원산 지재미골의 거대한 천연동굴에 적립암벽을 얇게 파고 부조(浮彫)한 마애불로서 침잠한 얼굴 표정과 특이한 대좌 형식 등에서 토속적인 느낌을 강하게 풍기는 불상이다

 

가섭암터가 있는 금원산은 거창군 위천면 상천리에 자리 잡은 해발 1353m의 산으로 그 옛날, 겉모습이 어둡게 보여 검은 산으로 불렸다고 하지만 그보다는 금빛 원숭이 한 마리가 바위 속에 살았는데 그 금빛 원숭이가 나와서 날뛰면서 피해를 주는 바람에 한 도승이 바위 속에 가두어 더는 해를 입지 않았다는 전설에서 유래해 금원산(金猿山)으로 이름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삼존불이 있는 지재미골

 

유안청계곡(지재미골의 반대쪽-삼거리에서 왼쪽길)

 

유안청계곡의 자연 휴양림

 

금원산 자연휴양림 매표소를 지나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가면 자연휴양림과 선녀탕, 폭포가 있는 유안청 계곡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문바위와 가섭암터가 있는 지재미골이다.

오른쪽 지재미골로 접어들어 조금만 가면 주차장이 나온다. 이 곳에 주차를 하고 약 10분간 개울을 건너고 소나무 숲속 길을 걸으면 가섭암터에 이른다

 

여름철 장마비가 끝난 뒤는 두 서너군데 신발을 벗고 물을 건너는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문바위 (門岩)

 

문바위-입구쪽에서 본 모양

 

문바위-가섭암터쪽에서 본 모양

 

 

주차장에서 '지재미골' 계곡을 따라 약 5분쯤 오르다 보면 거대한 바위가 앞을 가로막는다. 바로 문 바위(門岩)이다. 단일 바윗돌로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것이라고 한다.

한자로 문문(門)자를 쓴 것으로 보아 가섭암의 일주문 역할을 해기 때문에 문(門)바위라고 불려진 것은 아닐까?

실제로 바위 밑에는 돌로 받침 담을 쌓아 놓았고 그 옆에는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통로 같은 것이 있다.

현재 가섭암지로 가는 시멘트 포장길이 없었을 때는 통로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문바위의 아래 담을 쌓아놓은 부분

 

담을 쌓아놓은 옆에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통로가 보인다

 

이 바위는 가섭암, 금달암, 두문암, 기도암, 지우암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도 불렸다고 하는데 주변에는 가섬암지를 비롯한 많은 절터가 있었다고 전해져 옛날부터 이 문바위를 신성시했을 거라는 추측이 든다.

 

문바위를 순절암으로도 불리는데 여기에는 고려 말 충신인 달암 이원달의 망국의 한에 얽힌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

이원달은 합천사람으로 호는 달암(達岩)이며 병조참판을 지낸 분이다. 고려말 참판의 벼슬을 지내다가 이성계 일파에 의해 최영, 정몽주 등이 비명에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이곳 위천으로 들아와 우국의 마음으로 나날을 지새웠다. 마침내 고려조가 멸망하고 조선조가 세워지자 태조 이성계는 이원달의 재주가 아까워 여러번 불렀으나 불사이군(不事以君)의 충정으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두문동 왕 씨들의 비참한 소식을 전해 듣고는 금원산 지재미 골짜기에 숨어 살다가 비통한 한을 품은 채 죽었다고 한다. 이때 이원달과 함께 이곳으로 온 부인도 남편을 따라 함께 숨졌다고 하는데 그때부터 이 바위를 순절암으로 불렀다고 한다.

 

" 달암 선생 순절동(達岩李先生殉節洞)"이라고 각자되어 있다

 

문바위의 앞면에는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이 원달 선생을 기리기 위해 "달암이선생순절동"이란 글자를 네모나게 바위를 판 후 음각을 해놓았는데, 언제 누구에 의해서 새겨진 것인지는 확실치가 않다

 

이 외에도 문바위와 관련된 설화들이 주민들 사이에는 전해지고 있는데,

옛적에 천태산 마구 할멈이 금원산에서 두 개의 큰 돌을 아주 가느다란 칡 끈으로 묶어서 내려오다가 그 중 하나는 문바위가 있는 아랫녘 넓은 초원인 황사 밭터에 놓아두고 하나는 지재미에 가지고 와서 놓았다고 한다. 황사 밭터에 있는 것이 숫바위이고 지재미의 문바위는 암바위라고 한다.

 

지재미라는 이름은 옛날 이 골짜기에 지장암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문바위 위에는 작은 돌탑이 쌓여 있다. 누가 어떤 간절한 소원이 있어서 저 높은 바위에 쌓아올렸을까?

 

 

구한말 애국지사인 면우 곽종석 선생이 이곳을 찾아 문바위를 노래한 칠언절구의 시가 있다

시냇가에 우뚝 솟은 바윗돌 신의 도끼로 다듬어 낸 듯

머리 위에 소나무 자란 것 더욱 정을 끄누나

높이 치솟아도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네

저처럼 부끄러울 일 없이 푸르게 살아가리라.

 

 

가섭암터 삼존마애여래상 - 보물 제 530호

 

 

문바위를 돌아서 조금만 오르면 초라한 건물이 하나 서 있고 건물 옆으로 돌계단이 보인다. 이 돌계단을 약 50m 오르면 바위굴이 있고 안쪽 남향 바위에 삼존불이 새겨져 있다. 바로 가섭암지 마애여래삼존입상이다

 

건물 옆 계단으로 약 50여m오르면 삼존불이 있는 석굴이다

 

아래 바위 사이로 계단이 보인다

 

석굴로 오르는 계단

 

굴의 내부

 

굴이라고 하지만 바위를 뚫은 굴이 아니고 아주 큰 바위들이 겹쳐지면서 저절로 만들어진 열 평 남짓한 공간으로, 즉 바로 선 바위에 다른 바위가 비스듬히 쓰러져 생긴 삼각형의 공간이며 그 공간의 바로 선 바위면에 삼존불이 새겨져 있다

 

삼존불은 굴 안에 있어서인지 훼손이 거의 되지 않고 전체적으로는 상태가 좋지만, 조각을 한 형태를 보면 그리 뛰어난 것은 아니다.

 

 

 

 

 윗부분 삼각형으로 깊게 파놓은 것이 물끊기 홈이다

아미파여래불은 보부형의 광배를,양쪽 협시보살은 원형광배를 하고 있다

 

삼존불의 윗부분에는 삼각선으로 깊게 패여 있는데 이는 바위틈으로 스며든 빗물이 삼존불 위로 흘러내리지 않고 옆으로 빠지도록 물홈을 파놓은 것이다.

물홈의 아래쪽에 바위면 전체를 배(舟) 모양의 보주형으로 다듬어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를 만들고 그 안에 삼존불(三尊佛) 입상을 얕게 새겨져 있다. 가운데의 부처가 두 보살을 좌우 협시로 거느린 모양인데 가운데 부처는 아미타여래이며, 오른쪽은 관음보살, 왼쪽은 지장보살이다.

 

불상들과 대좌는 얕은 돋을새김으로 새긴 반면 두광만은 테두리만 남긴 채 안쪽을 오목하게 파내었으며, 나머지 불상 주위의 여백 또한 깊게 파내 여느 바위면과 쉽게 구별이 되도록 하였다

 

 

 

본존불인 아미타여래

 

본존불(本尊佛)인 아미타여래불은 본존상의 높이가 150cm, 대좌의 높이가 65cm이다.

소발의 머리위에 크다란 육계가 있고 넓적한 얼굴에 비해 눈과 입은 작으며 코는 세모꼴로 뭉텅하다. 귀는 납작하고 길다

밋밋한 어깨에 신체의 볼륨은 크지 않으며 통견(通肩)의 대의(大衣)는 간결한 옷 주름이 중첩되어 있고 대의 하단은 짧게 표현되어 양 다리가 길게 노출되어 있다.

 

양손은 가슴 앞에서 모아 엄지와 인지를 맞댄 상품중생인(上品衆生忍)을 하고 있다.

 

 

본존불의 대좌

 

양 발은 발꿈치를 서로 맞대 옆으로 벌린 자세여서 정면을 보고 있는 불상과는 어울리지 않고 부자연스러우며 대좌의 윗면에는 5엽의 앙련(仰蓮)을 내부에서 간엽(間葉)이 3엽의 복련(覆蓮)을 표현하였다.

 

광배(光背)는 보주형(寶珠形)이며 선으로만 표현되어 있고 내부에 아무런 장식이 없다

 

 

좌우의 협시보살-지장보살과 관음보살

 

 

좌우에 있는 협시보살은 본존불에 비해 여성적인 얼굴에 머리에는 화불(化佛)을 새긴 화려한 화관(花冠)을 썼으며 수발(垂髮)은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본존불과 거의 같은 저부조로 조각되었으며 어깨의 표현이 본존불보다는 좀 더 부드러운 곡선으로 처리를 하였다.

 

 

양 옆으로 고사리처럼 번잡하게 뻗어나온 천의(天衣)자락과 영락 장식 등은 장식성이 강하여 조금은 화려하고도 번잡한 느낌이다. 특히 한손으로 천의 자락을 잡은 자세는 삼국시대 보살상을 연상시키지만 그 보다는 훨씬 도식화되었다.

광배는 원형 두 광배이며 대좌는 사실적인 연꽃으로 구성되었다.

 

삼존불의 대좌

 

 

 

가섭암지 마애여래삼존불은 모두 양각으로 도드라지게 새겼으나 전체적으로는 낮은 부조이며, 본존불의 각진 어깨, 밋밋한 가슴, 부자연스럽게 모은 팔, 막대 같은 다리, 좌우로 벌린 발등과 같은 도식적인 처리는 고려시대 부처상의 특징으로, 삼국시대 불상의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고려적인 도식화가 반영된 고려불상이다

 

가섭암지 삼존석불은 우리나라 석굴사원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조상기(造像記)

 

석굴의 입구쪽에 조상기가 새겨져 있다

 

좌협시 보살 옆에 불상을 조성하게 된 이유와 경위를 적은 조상기(造像記)가 새겨져 있다

세로 88㎝, 가로 77㎝, 깊이 약2㎝ 정도로 암벽을 파낸 다음 해서체로 1행 26자씩 총 21행에 540여 글자를 새놓았으나 마모가 심하여 일부 글자는 판독이 어렵다,

1989년에 동국대학교 고고미술 사학과의 학술조사팀에 의하여 조사되었고 명문은 전각가 안광석(安光碩)선생가의 의하여 판독이 되었다고 한다

조상기의 내용 중에는 고려 16대 왕인 예종(1106~1122在位)이 천경원년(天慶元年-예종 6년)인 1111년에 그의 어머니 왕생극락을 위해 효심으로 조성하였다고 한다.

 

현재까지 고려시대 마애불상 중 조상기가 새겨져 있는 곳은 두 곳 밖에 알려지고 있지 않아서 이 가섭사지 마애삼존불상의 조상기는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가섭암삼존불의 조상기

 

 

석굴 아래에는 1770년대까지 절이 있었다는데, 지금도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몇 개의 석재가 남아 있을 뿐옛모습은 간데 없고 최근에 지은 건물 한동이 서 있다.

 

이 곳에 서 있던  삼층석탑은 지금 위천초등학교에 옮겨져 있다고 하는데 마애여래삼존불과 비슷한 시기에조성된 고려 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가섭암자는 유물로 보아 고려 중기 이전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되며 석굴을 법당으로 사용한 석굴사원의 형태로 유지되어 왔으나, 언제 폐사되었는지도 전해지지 않는다.

 

 

진재 김윤겸의 가섭암(조선)

가운데의 바위가 문바위로 보여지는데 그림을 보아 현재의 통로가 아니고

문바위를 통해 바로 오ㅇ르는 길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가섭암지 앞은 금원산, 기백산으로 오르는 등산로와 연결되기 때문에 많은 등산객이 오르내린다

 

 

 

수승대가 있는  거창군 위천면 소재지에서 남서쪽에 있는 금원사자연휴양림으로 가다보면 강남리석조여래좌상을 만날 수 있고 더 들어가 휴양림매표소에서 오른쪽 길로 가면 가섭암터삼존불을 만날 수 있다

농암리 석조여래입상과 갈계리삼층석탑도 위천면소재지에서 승용차로 각각 10여분 거리에 있다

 

 

거창군내에는 이 외에도 거대한 석조여래입상이 여러 기가 있으며 둔마리벽화고분과 거창박물관도 있다.

 

 

 

거창 양평리 석조 여래입상 - 보물 제377호

 

 

 

 

 

 

거창읍 양평리의 금용사(金龍寺)에 있는 이 석불은 화강암으로 만든 석가여래입상(釋迦如來立像)으로 전체 높이는 3.7m이고 불상 높이 2.75m인 거대한 불상으로 원래 이 부근에 금양사(金陽寺) 또는 노혜사(老惠寺)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석불의 몸은 머리에 비해 약간 가늘어 보이지만, 몸의 굴곡이 충실하게 표현되어 있다.

 머리에는 나발(螺髮)이 뚜렷하며, 둥근 얼굴에 뚜렷한 이목구비(耳目口鼻), 반쯤 뜬 두 눈과 입가의 미소는 부처의 자비(慈悲)를 느끼게 한다.

 

 

 

짧고 굵은 목에는 윤회(輪回)의 인과(因果)를 뜻하는 삼도(三道)가 선명하고, 머리에 비해 약간 좁은 어깨 양쪽에는 통견(通肩)으로 걸친 대의(大衣)자락이 몸에 밀착되어 가슴가 허리, 양다리의 볼륨이 뚜렷하다.

대의 아래에 입은 긴치마 모양의 군의(裙衣)는 접힌 것까지 잘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정병을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옷자락을 잡고 있다

 

왼손은 인지(人指)를 곧게 펴 가슴 높이로 들고 오른손은 곧게 내려 엄지와 인지로 옷자락 끝을 살짝 쥔 특이한 수인(手印)을 하고 있다.

 

머리 위의 천개(天蓋)는 근간에 민들어 올려진 것으로 보인다

 

 

 

 얇게 걸치고 있는 옷자락은 U자형으로 흘러내리다가 다리부분에서 긴 타원형을 그리고 있다

 

 

 

불상의 대좌는 아랫폭이 155㎝ 크기인데 둘레에 복판의 복련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불상의 앞에는 앞쪽에 폭 135㎝, 높이 25㎝크기의 앙련석(仰蓮石)이 놓여져 있는데 불상을 보수할 때 부근에서 수습한 것이라 한다. 아마 불좌대의 상대석이 아닐까 한다

 

 

석불의 주위에는 구획이 설정되어 있는데 네 모서리에 네모진 기둥받침을 설치하고 그 사이로 긴 장대석으로 연결하였다.

전체적으로 정제된 조형미에서 약간 벗어나 있으나 늘씬한 체격으로 세련된 조각과 전체적인 조화는 통일신라 전성기 양식을 계승한 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불상 주위에 주춧돌과 기와조각들이 확인되고 있어, 노혜사(老惠寺) 또는 금양사(金陽寺)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뒷받침하고 있다.

 

 

 

상림리 석조보살입상 - 보물 제 378호

석주형 석불의 관음보살상

 

 

  머리 위의 사각형의 석주는 천개를 끼우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연화대 위에 서 있는 고려초기의 석주형(石柱形) 석불로 왼손에 연꽃봉오리를, 오른손에 정병(淨甁)을 쥐고 있는 관음보살상이다.

 

어깨가 각지고 신체조형이 편판적이며 전체 외형은 사각형의 돌기둥 같은 느낌을 준다. 머리에는 높은 육계가 솟아 있으며 보관은 별도로 만들어 씌웠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직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에 눈은 가늘게 뜨고 있으며 일자로 꽉 다문 입은 근엄하게 보이고 길게 새겨진 코에는 약간의 파손이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를 새겼으며 평평한 가슴에는 10개의 고리로 된 목걸이가 장식되었고 양어깨에서 부터 걸쳐진 천의(天衣)는 단조로운 주름이 잡혀 있다.

허리선에서 접혀져 드리워진 군의(裙衣)자락과 천의의 옷주름은 얇은 판을 서로 잇댄 듯 평판적이어서 마치 금동불의 옷주름을 연상케 한다.

 

 

떨어진 발은 복원을 하여 붙였는데 접합부분이 매끄럽지 못하다

보살상을 받치는 8각형의 대좌(臺座)는 상단부에 복련의 연꽃을, 하단부의 면에는 안상을 새겨 놓아 아름다움을 더한다

 

이 일대에 건흥사(乾興寺)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있어 건흥사에서 모시던 보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지방화 된 불교와 불상을 짐작케 해주는 자료가 되고 있다.

 

 

※ 도로변에서도 보이는데 도로변에 주차를 하고 석불상 옆의 민가로 들어가는 길로 걸어가는 것이 좋다. 승용차를 몰고 들어갔다가는 돌려나오기가 쉽지 않다

 

 

 

농산리 석조여래입상 - 보물 제1436호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불상

 

 

 

이 불상은 광배와 받침대를 모두 갖춘 비교적 완전한 형태의 석불이다. 바위를 원추형으로 쪼아서 불상과 광배가 하나의 돌에 조각되었다.

 

머리 부분의 상투모양은 높고 뚜렷하게 표현하였다. 알맞은 이목구비를 갖춘 둥근 얼굴은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다.

당당한 가슴과 함께 부드러운 경사를 이룬 유연한 어깨, 잘록한 허리와 날씬한 다리, 얇은 옷자락 속에 드러난 사실적인 몸매는 불상의 뛰어난 입체감을 더해 준다. 양쪽 어깨에 걸친 옷자락은 가슴위로 몇 갈래의 U자형 주름을 그리면서 내려오다가 허리부분에서 Y자형으로 갈라지고, 두 다리에 살짝 밀착되어 작은 U자를 그렸다가, 종아리 부분에서 큰 V자로 마무리되었다.

 

이러한 옷자락의 표현법을 인도의 우드야나(Udyana)왕 여래상 형식이라 부른다. 그 유래는 석가모니가 성불한 후 한때 도리천에 올라가 그곳에서 다시 태어나[往生] 어머니에게 설법하였는데, 그때 밧사(Batsa) 국의 우드야나왕이 부처가 잠시라도 지상에 없는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150㎝ 크기의 여래상을 만들어 공양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불상이 최초의 부처상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그 여래상의 옷자락의 조각 형식이 이 석조여래상과 같은 형태였다고 한다. 이 같은 옷자락의 표현은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에서 나타나고 있다.

 

 

 

 

 

두 발은 불신과 별도로 대석 위에 조각되어 있는데 마멸과 손상이 심하여 왼쪽 발가락 일부만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우측 상단부가 깨어져 나간 광배는 불신과 한 돌로 이루어진 배 모양의 주형거신광으로 어느 정도의 형태는 유지하고 있으나 화염문 등 구체적인 문양 표현은 알 수 없다.

연꽃잎이 아래로 향한 대좌는 심하게 마멸되었으나,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조각 솜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형태는 통일신라 700년 전후 추정의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사암제불입상을 비롯하여 719년 경 감산사상, 730년~760년 경 추정의 경주 굴불사지 사면석불 남면 불입상 등 8세기 이후 상들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비록 부분적인 파손이 있으나 이 불상은 야산의 구릉에서 원위치를 지키고 있는 귀중한 불상으로 규모가 비교적 크고 정제된 조각수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비슷한 예가 많지 않은 점에서 가치가 있다.

 

<관련자료 : 토함산솔이파리 http://blog.daum.net/kinhj4801/15960412 >

 

 

 

강남사 석조여래입상 - 유형문화재 제 322호

원추형 광배를 구비한 독립형 불상

"높이 365㎝, 넓이 130㎝의 화강석의 불상으로 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

 

보호각 안에 석불이 모셔져 있다. 전각 ?쪽에 보이는 산이 금원산이다

 

위천면소재지에서 가섭암지가 있는 금원산 쪽으로 가다가 있는 강남마을에서 안내판을 따라 왼쪽으로 미을 안 좁은 길을 조금 내려가면 시내를 건너기 전에 석조여래상 주차장이 있다,

 

원추형 광배를 구비한 독립형 불상으로 높이 365㎝, 넓이 130㎝의 화강석에 새겨져 있는 신라시대 불상으로 금원사 기슭 강남사라는 옛 절터에 서 있는 석조여래입상이다

옛부터 강남사에 있었다하여 강남불이라고 불려져왔으며  마을이름도 강남사가 있어 강남마을이라 하였다고 하나 . 강남사가 어떤 절인지, 또 누가 언제 지었으며, 언제 없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전해져 오는 기록이 전혀 없다. 다만 고려 숙종 때까지는 있었다고 전해진다.

 

넓은 판석에 ?은 저부조로 새개져 있어 입체감이 적고 세밀하지 못하다

 

얼굴 부분이 심하게 훼손되어 그 모습을 알 수 없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머리의 상투 모양은 크고 뚜렷하며 목에는 세 가닥의 주름이 뚜렷하게 표현되었다,

양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자락은 U자형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물결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손 모양은 훼손되어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오른손은 중생의 두려움을 덜어준다는 시무외인을, 왼손은 중생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여원인을 표현한 듯하다.

불상은 연꽃 받침대 위에 서 있으며, 뒤에는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가 크게 표현되었다. 전체적인 조형 수법으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갈계리 삼층석탑

 

 

 

 

갈계리 삼층석탑은 북상면 갈계리 탑불이라는 마을로 부터 약 200m 떨어진 도로변 옛 절터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절터가 대부분 경작지로 변해 절의 규모를 파악하기 힘들뿐만 아니라 절의 내력을 전해주는 자료도 없지만, 석탑 부근에서 발견되는 기와조각으로 보아 고려시대 중기 이후에 건립된 사찰로 추정될 뿐 절의 이름조차 알 수 없다.

 

탑의 높이는 3.2m 이며 사각형의 2중 받침대를 두고 있어 통일신라의 일반 석탑형식을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간략화된 조성기법이 고려시대 이후의 변화양상을 보여주고 있어고려시대에 조성된 석탑으로 추정되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7호로 지정되어 있다.

 

 

2층과 3층의 탑신은 결실된 부분을 복원해 놓은 것이다

 

 

 

기단 부분은 위 아래 기단 모두 모서리 기둥(우주)과 함께 중앙에 받침기둥(탱주)을 새겼고 각각 한 개의 돌로 만들어졌다, 하층 기단 위에는 2단의 쇠시리를 둘렀다

몸체와 받침을 이어주는 갑석 역시 경사가 별로 없는 한 장의 돌로 조성하였으며 갑석 아래에는 부연을 두어 석탑의 기본을 충실히 따랐다.

 

탑신에도 모서리기둥을 조각했을 뿐, 그밖에 별다른 조각은 없다. 지붕돌의 받침은 각각 4단이며, 추녀의 물받이면은 낮게 조성하여 경사가 심하지 않다. 그러나 모서리 부분은 너무 치켜오려 과장이 심한 편이며 지붕돌이 너무 두터워 투박한 느낌이 든다.

상륜부에는 노반인지 탑신인지 구별이 안되는 사각의 석재 두 개가 올려져 있다

 

기단부에 비해 탑신과 옥개석이 왜소해 보여 전체적인 조형미를 갖추지 못하였으며,

옥개석도 너무나 두꺼워 투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알려 주는 당산리 당송 - 천연기념물

 

 

 

 

갈계리 삼층석탑에서 조금만 더가면 당송리 마을 안 뒷산에 언덕배기에 서 있다

거창 당산리의 당송은 나이가 6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가 18m, 둘레는 4.05m이다. 나무껍질은 거북등과 같이 갈라져 있으며, 밑동 부분에는 도끼자국이 남아있고, 남쪽의 가지 하나가 죽었으나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소나무이다.

 

당송은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소리를 내어 미리 알려준다고 하는데 이처럼 신령스럽다 하여 영송이라 부르기도 하며, 국권을 빼앗긴 일(1910), 광복(1945) 및 한국전쟁(1950) 때에는 몇 달 전부터 밤마다 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대보름마다 이 나무에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주민 전체가 모임을 만들어 특별히 보호하고 있다. 거창 당산리의 당송은 민속적, 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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