黔澗先生 交遊錄
외 후손 인동 장달수 근술
목차
0 김성일(金誠一)1538 본관은 의성(義城 호는 학봉(鶴峰). 문충공(文忠公)
0 정 구(鄭 逑) 1543 본관은 청주(淸州). 호는 한강(寒岡) 문목공(文穆公)
0 권응인(權應仁) 1517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송계(松溪).
0 김극일(金克一) 1522 본관은 의성(義城). 호는 약봉(藥峰). 사성
0 구봉령(具鳳齡) 1526 본관은 능성(綾城). 호는 백담(柏潭). 문단공(文端公)
0 김 각(金 覺) 1536 본관은 영동(永同). 호는 석천(石川). 용궁현감
0 김우옹(金宇顒) 1540 본관은 의성(義城). 호는 동강(東岡). 문정공(文貞公)
0 김홍민(金弘敏) 1540 본관은 상주(尙州). 호는 사담(沙潭). 전한
0 김 륵(金 玏) 1540 본관은 예안(禮安). 호는 백암(柏巖). 민절공(敏節公)
0 금응훈(琴應壎) 1540 본관은 봉화(奉化). 호는 면진재(勉進齋). 현감
0 오 운(吳 澐) 1540 본관은 고창(高敞). 호는 죽유(竹牖). 경주부윤
0 류성룡(柳成龍) 1542 본관은 풍산(豊山). 호는 서애(西厓). 문충공(文忠公)
0 이 우(李 瑀) 1542 본관은 덕수(德水). 호는 옥산(玉山). 군자감정
0 강봉수(姜鳳壽) 1543 본관은 진주(晋州). 호는 송암(松庵). 평창군수
0 백현룡(白見龍) 1543 본관은 수원(水原). 호는 성헌(惺軒). 진사
0 이 봉(李 逢)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운(子雲). 옥천군수 통정대부
0 박이장(朴而章) 1547 본관은 순천(順天). 호는 용담(龍潭). 이조참판
0 성 영(成 泳) 1547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태정(苔庭). 이조판서
0 송원기(宋遠器) 1548 본관은 야로(冶爐). 호는 아헌(啞軒). 헌납
0 이시립(李時立) 1548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지가(志可). 시정
0 서사원(徐思遠) 1550 본관은 달성(達城). 호는 악재(樂齋). 정랑. 옥과 현감
0 강복성(康復誠) 1550 본관은 신천(信川). 호는 죽간(竹磵). 지중추부사. 전주부윤
0 귄 위(權 暐) 1552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옥봉(玉峯), 예조정랑
0 여대로(呂大老) 1552 본관은 성주(星州). 호는 감호(鑑湖). 지평. 합천군수
0 손처눌(孫處訥) 1553 본관은 일직(一直). 호는 모당(慕堂).
0 고상안(高尙顔) 1553 본관은 개성(開城). 호는 태촌(泰村). 함양군수
0 정윤해(鄭允諧) 1553 본관은 청주(淸州). 호는 서귀자(鋤歸子). 참봉
0 손처약(孫處約) 1553 본관은 일직(一直). 호는 오매(五梅). 진사
0 강 인(姜 絪) 1555 본관은 진주(晋州). 호는 시암(是庵). 한성좌윤. 晋昌君
0 박선장(朴善長) 1555 본관은 무안(務安). 호는 수서(水西). 예안현감(禮安縣監)
0 성 람(成 灠) 1556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청죽(聽竹). 무주현감
0 조 익(趙 翊) 1556 본관은 풍양(豊壤). 호는 가휴(可畦). 광주목사(光州牧使)
0 송광정(宋光廷) 1556 본관은 야로(冶爐). 호는 송간(松澗). 울산부사. 지평
0 권 욱(權 旭) 1556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매당(梅堂). 참봉
0 이항복(李恒福) 1556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백사(白沙). 영의정. 문충(文忠)
0 차천로(車天輅) 1556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오산(五山)· 봉상시첨정
0 김 용(金 涌) 1557 본관은 의성(義城). 호는 운천(雲川). 병조참의. 여주목사
0 성진선(成晋善) 1557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연강(烟江). 부제학. 경상감사
0 이 전(李 㙉) 1558 본관은 흥양(興陽). 호는 월간(月磵). 지례현감
0 손기양(孫起陽) 1559 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오한(聱漢)· 상주목사
0 이수준(李壽俊) 1559 본관은 전의(全義). 호는 용계(龍溪). 승문원판교. 길주목사
0 윤광계(尹光啓) 1559 본관은 해남(海南). 호는 귤옥(橘屋). 예조정랑
0 이 준(李 埈) 1560 본관은 흥양(興陽). 호는 창석(蒼石). 문간공(文簡公)
0 조우인(曺友仁) 1561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매호(梅湖)· 승지
0 김광엽(金光曄) 1561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이회(而晦). 부응교. 집의
0 김윤안(金允安) 1562 본관은 순천(順天). 호는 동리(東籬). 대사간
0 김광두(金光斗) 1562 본관은 상주(尙州). 호는 일묵재(一默齋). 진사
0 강응철(康應哲) 1562 본관은 재령(載寧). 호는 남계(南溪). 찰방
0 정경세(鄭經世) 1563 본관은 진주(晋州). 호는 우복(愚伏). 문장공(文莊公)
0 최 현(崔 晛) 1563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인재(訒齋). 정간공(定簡公)
0 윤효전(尹孝全) 1563 본관은 남원(南原). 호는 기천(沂川). 경주부윤
0 최정호(崔挺豪) 1563 본관은 충주(忠州). 호는 저곡(樗谷). 광주목사(廣州牧使)
0 전 식(全 湜) 1563 본관은 옥천(沃川). 호는 사서(沙西). 충간공(忠簡公)
0 고인계(高仁繼) 1564 본관은 개성(開城). 호는 월봉(月峯). 성균관사예
0 이광윤(李光胤) 1564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양서(讓西). 부제학
0 손 린(孫 遴) 1566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문탄(聞灘). 좌랑. 단성현감
0 김 녕(金 寧) 1567 본관은 선산(善山). 호는 돈봉(遯峯). 사예· 예안현감
0 조 즙(趙 濈) 1568 본관은 풍양(豊壤). 호는 화천(花川). 동부승지
0 권 흔(權 昕) 1568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절(叔節). 수찬. 의정부 사인
0 김지복(金知復) 1568 본관은 영동(永同). 호는 우연(愚淵). 장령. 사예
0 노경임(盧景任) 1569 본관은 안강(安康). 호는 경암(敬菴). 교리. 성주목사
0 이윤우(李潤雨) 1569 본관은 광주(廣州). 호는 석담(石潭). 공조참의. 응교
0 정 장(鄭 樟) 1569 본관은 청주(淸州). 호는 사곡(沙谷). 예조좌랑. 전라도사.
0 정 온(鄭 蘊) 1569 본관은 초계(草溪). 호는 동계(桐溪)· 문간공(文簡公)
0 이시발(李時發) 1569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벽오(碧梧). 형조판서. 충익(忠翼)
0 심 집(沈 諿) 1569 본관은 청송(靑松). 호는 남애(南崖). 예조판서. 효간(孝簡)
0 정영후(鄭榮後) 1569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인보(仁輔), 참봉
0 박수춘(朴壽春) 1572 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국담(菊潭). 증 호조참의
0 이의활(李宜活) 1573 본관은 여주(驪州). 호는 설천(雪川). 흥해군수. 좌랑
0 박회무(朴檜茂) 1575 본관은 반남(潘南). 호는 육우당(六友堂). 의금부도사
0 목대흠(睦大欽) 1575 본관은 사천(泗川). 호는 다산(茶山). 예조참의
0 임숙영(任叔英) 1576 본관은 풍천(豊川). 호는 소암(疎庵). 부수찬. 지평
0 오 흡(吳 潝) 1576 본관은 함양(咸陽). 호는 용계(龍溪),
0 김영조(金榮祖) 1577 본관은 풍산(豊山). 호는 망와(忘窩). 이조참판
0 정영방(鄭榮邦) 1577 본관은 동래(東萊). 호는 석문(石門). 진사
0 전이성(全以性) 1577 본관은 용궁(龍宮). 호는 운계(雲溪). 합천군수.
0 조희인(曹希仁) 1578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여선(汝善). 사예. 합천군수
0 김 태(金 兌)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구봉(九峰).
0 신 즙(申 楫) 1580 본관은 영해(寧海). 호는 하음(河陰). 사복시정(司僕寺正)
0 유 진(柳 袗) 1582 본관은 풍산(豊山). 호는 수암(修巖). 지평. 청도군수
0 조우신(趙又新) 1583 본관은 한양(漢陽). 호는 백담(白潭). 성균관 전적
0 여희필(呂姬弼) 1584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가회(嘉會). 진사
0 김응조(金應祖) 1587 본관은 풍산(豊山). 호는 학사(鶴沙). 한성우윤
0 신열도(申悅道) 1589 본관은 아주(鵝洲). 호는 나재(懶齋). 장령. 능주목사
0 전극항(全克恒) 1590 본관은 옥천(沃川). 호는 규천(虯川). 예조정랑
0 서희조(徐希祚) 1592 본관은 이천(利川). 자는 경승(景承). 벽사도 찰방
0 김세렴(金世濂) 1593 본관은 선산(善山). 호는 동명(東溟). 호조판서.문강(文康)
0 이원규(李元圭) 1597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기거(器擧). 대구부사. 예빈시 정
0 조정융(曺挺融) 1598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호옹(湖翁). 정랑. 고원군수
0 양경사(楊景泗) 1598 본관은 중화(中和). 자는 계원(啓源). 진사 (91)
* 嶺南同道會題名卷
* 黔澗 先生 文科 同榜錄
黔澗先生 交遊錄
0 김성일(金誠一) 1538년(중종 33)∼1593년(선조 26).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
아버지는 청계(淸溪) 진(璡)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6년(명종 11) 아우 복일(復一)과 함께 도산(陶山)의 퇴계 이황을 찾아 《서경》·《역학계몽(易學啓蒙)》·《심경》·《대학의의(大學疑義)》등을 익혔으며, 1564년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그 후 다시 도산에 돌아와 퇴계에게서 수학하고, 그로부터 요순(堯舜)이래 성현이 전한 심법을 적은 병명(屛銘)을 받았다.
1568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고, 이듬해 정자가 되었다. 이어서 검열·대교 등을 거쳐 1572년 봉교가 되어 노산묘(魯山墓)를 노릉(魯陵: 端宗의 陵)으로 봉축하고 사육신(死六臣)의 관작을 회복시켜 그들의 후손을 녹용(錄用)하도록 진언하였으며, 군덕(君德)과 시폐(時弊)를 논하였다.
이듬해 전적과 형조·예조의 좌랑을 거쳐 정언이 되었고, 이어서 홍문관수찬으로 지제교·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다.
1574년 부수찬을 거쳐 다시 정언이 되어 변장(邊將)으로부터 초피덧저고리〔貂裘〕를 뇌물로 받은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을 탄핵하였다.
이듬해 이조·병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77년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해 노력하였으며, 돌아와 이듬해 홍문관교리가 되고, 이어서 장령·검상·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1580년 함경도순무어사(咸鏡道巡撫御史)로 함흥·삼수·길주·종성 등을 살피고 돌아와, 변장으로서 직무에 충실한 혜산첨사 김수(金燧)를 당상관에 승품하고, 영건만호(永建萬戶) 우응장(禹應長)과 정현룡(鄭見龍)·김광옥(金光玉) 등을 선전관(宣傳官)에 기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1583년 사간이 되고, 이어서 황해도순무어사로 다녀와 군기관리(軍器管理)를 소홀히 하고 창곡(倉穀)을 부실하게 한 황주목사 윤인함(尹仁涵)의 파직을 건의하였다.
이듬해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민원(民寃)의 처리에 노력하고, 오랫동안 끌어온 이 고을 임씨(林氏)·나씨(羅氏)간의 송사(訟事)를 해결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이곳 금성산(錦城山)기슭에 대곡서원(大谷書院)을 세우고 한훤당 김굉필(金宏弼)· 일두 정여창(鄭汝昌)· 정암 조광조(趙光祖)· 회재 이언적(李彦迪)· 퇴계 이황 등을 제향하는 한편 선비들을 학문에 전념하게 하였다.
1586년 나주 사직단(社稷壇)의 화재에 책임을 지고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주자서절요 朱子書節要》, 이황의 《자성록 自省錄》·《퇴계집》 등을 편집, 간행하였다.
1588년 종부시첨정이 되고, 이어서 봉상시정·경기추쇄경차관(京畿推刷敬差官)·예빈시정·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590년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이듬해 돌아와 일본의 국정을 복명할 때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는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는 달리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하여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 그해 부호군에 이어 대사성이 되어 승문원부제조를 겸하였고, 홍문관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592년 형조참의를 거쳐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재직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일의 복명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 서울로 소환중, 허물을 씻고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을 간청하는 서애 유성룡(柳成龍) 등의 변호로 직산(稷山)에서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되어 다시 경상도로 향하였다.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의병활동을 고무하는 한편, 함양·산음(山陰)·단성·삼가(三嘉)·거창·합천 등지를 돌며 의병을 규합하는 동시에 각 고을에 소모관(召募官)을 보내 의병을 모았다.
또한,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화시켜 전투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해 8월 경상좌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우도관찰사로 다시 돌아와 의병규합·군량미확보에 전념하였다.
또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으로 하여금 의병장들과 협력,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진주성을 보전하게 하였다.
1593년 경상우도순찰사를 겸하여 도내 각 고을의 항왜전(抗倭戰)을 독려하다가 병으로 죽었다. 정치적으로 동인(東人)에 가담, 1590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한 수우당 최영경(崔永慶)의 신원(伸寃)을 위해 서인(西人)의 영수 정철(鄭澈)을 규탄하였으며, 그후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릴 때 서애 유성룡, 동강 김우옹(金宇顒) 등과 입장을 같이하여 남인을 이루었다.
또, 학문적으로는 퇴계 이황의 고제(高弟)로서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주리론(主理論)을 계승하여 영남학파의 중추 구실을 하였으며, 학통은 경당 장흥효(張興孝)―갈암 이현일(李玄逸)―밀암 이재(李栽)―대산 이상정(李象靖)으로 이어 전해졌다.
또한, 예학(禮學)에도 밝아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서는 모든 예절을 《가례(家禮)》에 따라 행하였으며, 《두씨통전(杜氏通典)》·《구씨의절(丘氏儀節)》·《향교예집(鄕校禮輯)》 등을 참고하여 《상례고증(喪禮考證)》을 지었다.
1664년(현종 5)에 신도비가 세워지고,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사빈서원(泗濱書院), 영양의 영산서원(英山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하동의 영계서원(永溪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해사록(海槎錄)》·《상례고증》 등이 있으며, 1649년(인조 27)에 문집으로 《학봉집》이 만들어졌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鶴峯先生遺事
○公少做擧子業。而立志以爲己爲本。自遊溪門。所學日進。已覺聲利之爲輕。及筮仕。謂許身之義不宜顧念私事。家屬窮餓。幾不能存。而略不經心。惟以忘身徇國爲意。立朝幾三十年。知無不言。言無不盡。其直如矢。未嘗以榮辱利害動其心。
○公事父兄以禮。睦親黨以義。父兄或有過擧。必和氣柔聲以諫。委曲作道理。期於必改。於族黨亦然。甚者。告宗長警責之。門闌之內。不使有圯類犯分之風。
○公敎子弟必以義方。一言一行。不使放過。進退拜揖之節。一依屠氏鄕校禮爲訓。國俗。祭儀外不用再拜。公遂創行。以爲一家法。且倣華制。令童子作丱加總纚。擬革辮髮之陋。人多有從之者。
○公勤於訓後進。以是心至者。雖三尺童子。不厭施誨。提耳諄諄。必要心喩而後已。每省覲下鄕。鄕子弟執冊而問業者充衍堂宇。而終朝逮夕。講劘不輟。傍人或苦其耐久。公了無倦容。或剖論義理。或掲示往行。欲人之必立於無過之地。故從公受業者。雖頑童懦夫。便能竪立。自無鄙悖惰慢之習。
○公正己率人。爲一世矜式。外而鄕曲。內而門黨。事有難處。皆諮稟於公而行之。
○公律己以禮。雖造次顚沛之際。不失其莊敬之容。閒居終日。不以幽獨小懈。喜飮酒。未嘗及亂。或酒後興至。輒取筆硯吟哦。與諸子弟互相唱酬。整襟斂容不妄一語。雖同席之人。不知其被酒。
○公性喜文史。退朝之暇。輒斂膝端坐。手不釋卷。有嘉言善行。必默識而思齊焉。
○公不喜名勢之途。雖相信之人。非公事。未嘗輕進其門。以守靜爲行身之方。
○公性好善。長於嫉惡。見人不善。若將浼己。自守皎潔。苟同爲恥。以此不爲世容。動遭訾謗。而人亦不敢公言排之。故己丑逆禍。一時士類幾盡受誣。而公獨不掛於羅織之口。以其無玷可指也。
○公以舍人丁外艱。送終諸儀。一遵朱文公家禮及儀禮通典等書。過毁成疾。葬前幾不能支。諸兄强勸疏食。終不變。居廬墓下。非喪事。寸步不出。朞悲哀。三年憂。始終如一日。葬時。方伯帖旁邑優致賻物。公以太煩爲未安。諸邑所送。一切不受。只令子弟發書以致謝。方伯實不知也。服闋之日。有遺衣服財貨。稟諸伯仲。悉分與諸母及甥姪之貧乏者。有妹無代㸑。公以己隷與之。父母所愛。雖厮養犬馬之賤。亦惓惓不能忘。
○公居官簡潔。非其義。一芥不取。人亦不敢干以私。嘗宰湖邑。湖俗多武斷。羅又大邑。簿牒雲委。號稱難治。公左酬右答。剖決如流。力折强豪。不避權勢。吏畏民懷。治有異績。邑有林羅之訟。父子未定。積年推擠。未有能斷之者。公深究事情。參商公議。能辨其僞。物論快之。
○公在官時。伯兄判事公訃至。哀慟過禮。葬祭應入之物。逐一官備曰。吾兄嘗以五城致養。極其甘旨。而吾竊位于朝。祿不逮親。吾今以事父者事兄。猶吾憾也。況送終大節。寧可忽乎。雖以此得罪。不暇避也。至於扶恤族黨。務以優厚。湖邑去鄕甚遠而宗族之貧者。皆籍記而均惠之。未或遺忘。
○往在庚寅。島夷之求信使也。朝廷難其選。竟以公爲副。命下。公促裝登途。行到南州。有一士人致唁於路。公厲聲峻責曰。人臣之義。夷險一視。可擇地而仕乎。逮入鯨穴。同舍怵禍。懼失夷意。公獨以禮自律。動遵王法。事無巨細。必以義處。夷始頗驕蹇。終焉致恭。至令國書改其傲辭。使還。無一物自隨。下史所齎。幷皆搜去投水。纔返命。時宰有做出激變生事之語。以惑聖聰。遽自銀臺。出持閫節。實壬辰四月之日也。未及交符。邊報告急。公倍道馳赴則列城已失守矣。悍將勁卒。相繼潰走。事無可爲。公仰天沫血。自分一死。俄而以變出適符前謗。有命拿訊。公怡然就途。內無所動。惟以縱賊入都。未效臣職爲痛。行及半道。旋膺招諭之命。瀝血飛檄。士夫應響。江右諸邑之得以保存者。實公之力也。是歲秋。賊圍晉陽。以爲長驅湖外之計。公與趙君宗道同在一城。趙曰。晉陽。湖嶺之堡障。今已事急。餘邑非吾有。失今不死。求死無所。吾等義不辱賊手。遂北面再拜。擬與同死。公曰。封疆之臣。當死封疆。晉陽雖或不守。尙有他數邑在。俟吾力屈而死未晩。遂四求聲援。內外協勢。以死固拒。賊百計鑽破。竟至自敗而遁。癸巳新正。靖以義兵事上謁於軍門。仍留數日。公食不甘味。夜不就寢。憂思憤慨。不能自抑。靖曰。有身然後方可有爲。令公自處。不幾過乎。公曰。身當閫寄。坐視君父蒙塵。曾不能辦一策出一奇以效絲毫。復見新歲月。如此而尙忍生爲。俄有馳報。兩王子已被虜入海壘云。公遽推案下涕曰。事已矣。仍廢食咄咄者移晷。左右亦爲之扼腕。是年四月日。竟以勞悴得疾。遂不起。臨卒。無一語及家。惟以國事爲憂。
○乙未冬賊酋之再求通信也。其將義智說向我人曰。曩者。黃某醉酒昏睡。許某自以在下。處己不爲周審。金某惟尙節義云云。公平生以風節自勵。之蠻貊。不變其素守。宜其爲夷人之聳慕。
0 정구(鄭逑) 1543년(중종 38)∼1620년(광해군 12).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성주(星州) 출신. 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으로, 판서 사중(思中)의 아들이다.
12세에 덕계(德溪) 오건(吳健)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퇴계(退溪) 이황(李滉). 남명(南溟) 조식(曺植)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 일컬었다.
1573년(선조 6)에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의 추천으로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에도 계속하여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그때마다 사임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따라서, 선생의 학문하는 자세와 인격수양의 방법은 퇴계선생을 닮았고, 천성이 호방하고 원대한 기상은 남명선생의 모습 그대로였다.
1580년 창녕현감을 시초로 하여 그 이듬해에 사헌부지평, 1582년에 군자감판관에 제수되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사임하고, 1584년 동복현감에 이어, 1585년에 교정청의 교정랑이 되어 《경서훈해 經書訓解》를 교정하였다.
1591년 통천군수에 부임하고, 그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격문을 각군에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도록 선도하였다.
1594년에 우승지·강원도관찰사·성천부사·충주부사·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 대사헌이 되었으나, 임해군(臨海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관련된 사람을 모두 석방하라는 상소를 올린 뒤 고향으로 돌아갔다.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상소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려 하였으며, 향리에 백매원(百梅園)을 세워 향우문도(鄕友門徒)를 모아 교육하였다. 선생은 관도에 나왔으나 내직을 사양하고 주로 외직을 맡았다. 이것은 당쟁에 얽힌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중앙정계보다 외직을 맡아 자신의 덕치주의 이상인 지방학문을 융성시키고 민중을 교화하기 위함이었다.
선생의 학문세계는 우주공간의 모든 것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경서(經書)·병학·의학·역사·천문·풍수지리 등 모든 분야에 통달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예학(禮學)은 특출하였다.
선생의 예는 가깝고 먼 것을 정하고, 믿고 못믿음을 결정하고, 같고 다름을 구별하고, 옳고 그름을 밝히는 기준이라고 밝히고 있다.
저서《오선생예설분류 五先生禮說分類》는 명도 정호(程顥)·. 이천 정이(程頤).
횡거 장재(張載)·사마광(司馬光)· 회암 주희(朱熹)의 예설을 분류한 것으로 예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예를 통하여 이웃과 사회, 그리고 국가생활을 이롭게 한다는 도덕지상주의적인 이론을 펴고 있다.
그리고 선생의 성리학 부분의 대표작으로는 《심경발휘 心經發揮》를 들 수 있다. 이 책은 그의 경사상(敬思想)을 토대로 하여 이황의 《심경후론 心經後論》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역사서로는 고금의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정치의 득실과 그 요체를 밝힌 《고금충모 古今忠謨》와 《고금치란제요 古今治亂提要》 등 10여권이 있으며, 의서로는 눈병에 관한 처방을 수록한 《의안집방 醫眼集方》과 산아와 육아에 관한 《광사속집 廣嗣續集》이 있다.
그밖에도 수령직을 맡을 때마다 그 고장의 산천·물산·고적·인정·풍속 등을 조사, 수집하여 내용을 정리한 7종의 읍지(邑誌)를 간행하였는데, 현존하는 것은 《함주지 咸州誌》 하나뿐이다.
그밖에 《성현풍 聖賢風》·《태극문변 太極問辨》·《수사언인록 洙泗言仁錄》·《오복연혁도 五服沿革圖》·《심의제도 深衣制度》·《무이지 武夷志》·《곡산동암지 谷山洞庵志》·《와룡지 臥龍志》·《역대기년 歷代紀年》·《경현속록 景賢續錄》·《관의 冠儀》·《혼의 婚儀》·《장의 葬儀》·《계의 稧儀》·《갱장록 羹墻錄》 등이 있다.
인조반정 이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천곡서원(川谷書院), 충주의 운곡서원(雲谷書院), 창녕의 관산서원(冠山書院), 성천의 학령서원(學翎書院), 통천의 경덕사(景德祠) 등에 제향되었다.
그 뒤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寒岡先生挽詞 三首○庚申
關閩嫡緖潁箕風。名世當年道又東。砥柱頹波倫紀立。蓍龜濁世士民從。
惠咸一域身無位。學啓群蒙敎有宗。痛哭斯文天不憗。樑摧今日怨何窮。
何曾畎畝蹔忘君。身退猶思志願伸。兩表刳肝忠貫日。一書編禮世興仁。
豈知運氣摧倻角。終使絃歌輟泗濱。痛恨無人承法器。茫茫厚夜幾時晨。
投拜門墻在弱冠。錫余名字奬愚頑。訓銘肝肺心猶炳。身沒塵埃鬢已斑。
尙冀迷途資擿埴。豈知凶訃報摧山。世間何處承淸範。雲外崇岡萬仞寒。
* 祭寒岡先生文
夙稟間氣。挺生南服。脫落科臼。求道志篤。摳衣山海。千仞是望。立雪溪門。式定趨向。精思力踐。直泝伊洛。禮以律身。準平繩直。吐辭擧足。爲世儀則。德崇道尊。家可移國。鸞棲屈棘。豈咸其惠。丁世艱危。望屬弘濟。宣化東隅。一路澄淸。糾違鳥府。百邪遁形。志在先格。事求後正。竚安其位。得展忠鯁。將見擧國。盡復彝秉。曾未暖席。有懷長往。三辭一揖。難進易退。身雖在野。心豈恝世。遇事無隱。必陳必閉。蓍龜破疑。砥柱障流。民庶不溺。功莫與儔。亦慮蒙學。考證迷方。裒集衆說。節文甚詳。從違向背。燭照冥行。光前啓後。斯道復明。一時何否。萬世猶亨。何言不弔。遽痛天喪。倻摧峻角。泗轍微響。文明一域。轉成長夜。而余小子。質最昏惰。猥蒙奬許。粤自童年。命名施訓。不啻呼眠。言猶在耳。身實自棄。逮分鰲府。屢陪杖几。有問必辨。有失輒規。諄諄提警。俾不磷緇。銘感在骨。義同生成。今焉失托。白地聾盲。旣爲公哭。又哭吾私。視天瞢瞢。痛豈有涯。仰止高岡。氣像依俙。究厥方策。典刑在玆。潛心服膺。可則可師。不亡者存。其又何悲。嗚呼哀哉。
* 再祭寒岡先生文
學承溪緖。性全民彝。頹波砥柱。冥世蓍龜。功存繼開。道屈平治。於公何病。彼天難知。顧余小子。屢荷提撕。樑摧一夕。擿埴迷歸。星霜不留。奄及再期。玆憑薄具。敢敷忱辭。英靈不昧。庶冀歆玆。
한강집
*答趙安仲 靖
一別三歲。懷想日新。玆奉辱惠問書。傾倒蘇慰之至。有不可喩。虜情不順。邦國多虞。嫠婦之憂。徒切漆室之下。別紙下示。誠非所知。而貴邑諸文契。已畢講定。積病濱死之中。其何有一言之妄報乎。謹承謬問。秪增感怍。
0 권응인(權應仁) 1517(중종12)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원(士元), 호는 송계(松溪)이다.
희맹(希孟)의 아들이며,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한리학관(漢吏學官)을 지냈다. 1562년(명종 17) 문장에 능한 일본 사신이 왔을 때 시재(詩才)가 뛰어났으므로 특명으로 선위사(宣慰使) 일행의 한 사람이 되어 이를 만났다. 당시 송(宋)나라의 시풍(詩風)이 유행하던 문단(文壇)에 만당(晩唐)의 시풍을 받아들여 시단(詩壇)에 큰 전환을 가져왔으며, 시평(詩評)에도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저서에 《송계집(松溪集)》이 있다.
*試後途中遇權 應仁 呼韻
荊闈初罷陣。山磴偶聯鑣。坐對淸溪石。還忘故國遙。
0 김극일(金克一) 1522(중종 17)∼1585(선조 18). 선생의 장인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백순(伯純), 호는 약봉(藥峰).
증 통례 만근(萬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좌승지 예범(禮範)이고, 아버지는 증 이조판서 진(璡)이며,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로 병절교위 세경(世卿)의 딸이다. 아버지로부터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커서는 아우 명일(明一)·성일(誠一)과 함께 이황(李滉)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546년(명종 1)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교서관정자에 임명되었다. 그 뒤 수의부위·사용을 거쳐, 1551년에 승문원정자·저작·박사가 되었다. 1553년 승정원주서가 되고, 얼마 뒤 형조좌랑·사헌부감찰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홍원현감(洪原縣監)을 역임하였다. 1556년 청홍도도사(淸洪道都事)를 거쳐, 1558년 성균관직강·형조정랑·예조정랑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 경상도도사를 거쳐, 1560년에 다시 예조정랑이 되었다. 얼마 뒤 군기시첨정과 평해군수를 역임하였다. 1566년에는 사재감첨정을 거쳐 다시 예천군수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569년(선조 2) 성균관사성과 사도시정(司歸寺正)을 거쳐, 외직으로 성주목사를 역임하였다. 성주목사 시절 ≪계몽익전 啓蒙翼傳≫을 간행해 스승 이황으로부터 격려를 받기도 하였다. 1575년 밀양부사에 임명되고, 1582년 내자시정, 이듬해에는 사헌부장령을 겸하였다. 그는 주로 지방관을 역임했고, 효성이 매우 지극하였다. 문장은 고결하고 창고(蒼古)해 한 글자도 진부한 말이 없었다고 한다. 더욱이 시에 뛰어나 시인으로서 명성이 높았다. 저서로는 ≪약봉일고 藥峰逸稿≫가 있다. 안동의 사빈서원(泗濱書院)에 배향되었다.
* 盈德淸心樓。次藥峯先生壁上韻。
奎璧沈黃壤。餘霞一片明。山川還動色。牙頰自生淸。
昔是風流地。今成感慨情。江西無老眼。雋永付誰評。
0 구봉령(具鳳齡) 1526년(중종 21)∼1586년(선조 19).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경서(景瑞), 호는 백담(柏潭).
문정공(文貞公) 휘(褘)의 8세손이며, 겸(謙)의 아들이다.
7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1세에 아버지마저 죽자 초상집례(初喪執禮)에 있어서 어른을 능가하여 마을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처음 외종조 권팽로(權彭老)에게 《소학》을 배워 문리를 얻고, 1545년 이황(李滉)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546년(명종 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60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봉교(奉敎)를 거쳐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에 이르고, 1564년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하여 수찬·호조좌랑·병조좌랑을 거쳐, 1567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뒤, 정언·전적·이조좌랑·사성·집의(執義)·사간을 두루 거치고, 1573년(선조 6) 직제학에 올랐으며, 이어 동부승지·우부승지·대사성·전라관찰사·충청관찰사 등을 지냈다.
1577년 대사간에 오르고, 이듬해 대사성을 거쳐 이조참의·형조참의를 지냈다.
1581년 대사헌에 오르고, 이듬해 병조참판·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그는 한때 암행어사로 황해도·충청도 등지에 나가 흉년과 기황(飢荒)으로 어지럽던 민심을 수습하기도 하였다. 당시는 동서의 당쟁이 시작될 무렵이었으나 중립을 지키기에 힘썼으며, 시문에 뛰어나 기대승(奇大升)과 비견되었고, 또한 〈혼천의기 渾天儀記〉를 짓는 등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만년에 정사(精舍)를 세워 후학들과 경사(經史)를 토론하였다.
죽은 뒤 용산서원(龍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백담문집》 및 그 속집(續集)이 있다. 시호는 문단(文端)이다.
*輓詞[趙靖] 검간집에는 미수록
儒林楷範國蓍龜。餘事文章出等夷。道直何妨三見黜。憂深無奈五成噫。
寬閒勝致兼龜鶴。瀟灑幽懷託酒詩。運屬龍蛇驚往歲。沈冤非但爲吾私。
0 김각(金覺) 1536년(중종 31)∼1610년(광해군 2).
본관은 영동. 자는 경성(景惺), 호는 석천(石川).
아버지는 진사 언건(彦健)이다. 상주 출신.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의 상을 당한 뒤로는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낙동강변에서 낚시로 소일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여름에 상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적을 다수 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감사 이수(李睟)가 그의 전공을 행재(行在)에 보고하여 사온서주부(司醞署主簿)를 제수받았고 그해 가을에는 함창현사(咸昌縣事)를 제수하였으나 나가지않았다.
1596년 왜적이 용궁현(龍宮縣)을 유린하자 조정에서는 그에게 용궁현감을 제수하여 적에 맞서게 하였다.
그 뒤 1604년 온성판관(穩城判官)을 역임하였다.
*竺山金使君 覺 邀商龍兩邑人作會溪上。射帿爲樂。同席者李都事叔平,閔典籍士新等四十餘員也。次叔平韻。二首
麗日連鑣作勝遊。高亭俯壓白鷗洲。鸞凰似入言公室。氣像如登邵子樓。
滿地煙霞詩愧短。棲苴行李迹嫌浮。留連擬做通宵話。他日難期此水頭。
偶尋前約作淸遊。倚玉芳筵盡上洲。許國世無蘇武節。憂時今倚仲宣樓。
干天劍氣豐城屈。破浪風稜巨艦浮。莫道詞人無膽氣。東溟會見落旄頭。
0 김우옹(金宇顒) 1540년(중종 35)∼1603년(선조 36).
본관은 의성.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東岡) 또는 직봉포의(直峰布衣).
아버지는 삼척부사 칠봉 희삼(希參)이다.
남명 조식(曺植). 퇴계 이황 문인이며,
1567년(명종 2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를 역임하고, 1573년(선조 6)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오랫동안 경연관(經筵官)으로 있었다. 1576년 부교리가 되고 이어 이조좌랑·사인 등을 지냈으며, 1579년에는 부응교가 되어 붕당의 폐를 논하였다. 그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하도록 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양하고 이듬해 선위사(宣慰使)로 일본 사신 겐소(玄蘇)를 맞이하였는데, 사신의 접대에 여악(女樂) 금지하도록 진언하였다. 1582년 홍문관직제학, 1583년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안동부사(安東府使)로 나갔다가, 대사성이 되고, 대사간을 거쳐 1584년 부제학이 된 뒤 전라도관찰사·안동부사를 역임하였다. 1589년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정여립(鄭汝立)과 조식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하였다는 이유로 회령에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속강목(續綱目)》 15권을 찬(撰)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사면되어 의주 행재소(行在所)로 가서 승문원제조로 기용되고, 이어서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명나라 찬획(贊劃) 원황(袁黃)의 접반사(接伴使)가 되고, 이어 동지중추부사로 명나라의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을 위한 문위사(問慰使)가 되었으며, 왕의 편지를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에게 전하였다. 그해 상호군을 거쳐 동지의금부사가 되어 왕을 호종하고 서울로 환도하여, 한성부좌윤·혜민서제조 등을 역임하였다. 1594년 대사성이 되고, 이어서 대사헌·이조참판을 거쳐 1597년 다시 대사성이 되었으며, 이어서 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599년 사직하고 인천에서 한거하다 이듬해 청주로 옮겨 그곳에서 죽었다. 서애 류성룡(柳成龍)· 학봉 김성일(金誠一) 등과 가까워 정치적으로도 이들과 입장을 같이하는 동인(東人)으로서, 서인 정철(鄭澈)·이경률(李景慄)·이징 등이 쟁단을 일으키려 한다 하여 파직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이이에 대하여만은 존경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청주의 봉계서원(鳳溪書院),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청천서원(晴川書院), 회령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1661년(현종 2)에 문집이 간행되었으며 1723년(경종 3)에는 이현일(李玄逸)이 지은 신도비가 세워졌다. 저서로는 《동강집 東岡集》·《속자치통감강목 續資治通鑑綱目》 등이 있으며, 편서로 《경연강의 經筵講義》가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挽金東岡先生 三首○甲辰
豈謂東岡老。云亡在此時。橫流砥柱折。迷道指南隳。
後學將安仰。斯文更倚誰。臨風遙掩涕。不獨爲吾私。
又
志槪松筠節。儀刑雪月姿。儒林依領袖。邦國有龜蓍。
德業兒童誦。文章走卒知。皇天終不憗。小子哭公私。
又
來謫塵間六十年。一邦人未或之先。溫溫美玉藏春谷。淡淡香蓮濯碧漣。
君責舜堯誠貫日。學窮經史識通天。高科顯職皆餘事。長慟儀刑隔九泉。
0 김홍민(金弘敏) 1540년(중종 35)∼1594년(선조 27).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임보(任父), 호는 사담(沙潭).
범(範)의 아들이다.
1570년(선조 3)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과 삼사(三司)를 거쳐, 1584년 이조좌랑으로 삼사와 같이 이이(李珥)와 박순(朴淳)을 탄핵하였다. 사인(舍人)에 이어 1590년 전한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규합하여 충보군(忠報軍)이라 칭하고 상주에서 적의 통로를 막아 적군이 부득이 호서지역으로 통행하게 하는 공을 세웠다.
중년 이후로 주자서(朱子書)와 《심경 心經》·《근사록 近思錄》을 탐독하였고 역학에도 뜻을 두었으며, 역사서로는 주로 《통감강목 通鑑綱目》을 읽었다.
*挽金沙潭 弘敏○二首○遷葬時
詩禮傳家訓。風流動士林。登筵紆聖眷。分虎得民心。
豈謂風塵際。旋驚玉珮沈。秪應忠孝傳。留與後人欽。
徃屬龍蛇歲。俱爲避地人。分齎資遠涉。傳札作良因。
忍說當年事。還慚未死身。傷心求道里。無復躡淸塵
*祭金沙潭 弘敏 文 庚戌遷葬時
惟靈。夙稟間氣。挺生南服。弱不好弄。壯益勤業。德淸白焉傳家。訓詩禮之承庭。擢筍班而玉立。紆寵眷於宸情。忠雖篤於許身。孝不衰於將母。章累上而乞養。竹再分於湖右。推老老之深仁。賀赤子之得乳。雖大惠專而不咸有。足見不負所學。際辰巳之屯否。封豕極於荐食。戀西狩而心腐。提病卒而倡義。塡海雖難。精誠在是。艱難顚沛。備嘗危險。志益烈而心益强。嗟弘亂之未濟。西日頹兮萱堂。欒欒兮素韠。不以當亂而廢禮。及其形毁而性滅。人猶不敢勉以權制。固忠孝之出天。於人事則大憾。掩奎璧於嬴博。白日忽其幽暗。睠東洛之有原。是夫人之幽宅。聞載還之有期。傾百里而匍匐。或奠綿芻。或賻財帛。悲噓涕泣。有逾骨肉。苟非先生之義有以入人之洽。動人之深。其何能相感於數十年之後。而拔貧致哀之若得新訃也哉。人有秉彝。好是懿德。益信此理之難誣。如靖自在平昔。最承知奬。臭味旣同。何論少長。憫余蹭蹬。勸余無畫。亂離中途。餬口俱急。風漂浪泊。朝東暮北。三山道上。邂逅相遇。悲辭苦語。各敍深疚。分行槖而救飢。戒輕涉於畏途。十步九回。掩淚踟蹰。那知此別。遽隔生死。每一念至。五內如燬。今玆路左。獲拜神柩。縱幽明有間。而莫接其風度謦欬。沒世而難忘者。怳若耳有聞而目有覩。悲慰難雙。氷火交如。嗚呼哀哉。生爲吉人。歿有令譽。如子之殁。殁亦有榮。後死無狀。殃禍來幷。林回抱璧。子夏全明。如我之生。不如無生。寧將屛息收視。自分窮中乾死之鬼。無意於此世間人事。非余之知其知我。則亦何敢相紼而呈誄。靈若有知。想必有感於斯語。知素性之不嗜。不以酒而以醴。冀一歆於菲薄。庶舊眷之無替。嗚呼哀哉。
0 김륵(金玏) 1540년(중종 35)∼1616년(광해군 8).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희옥(希玉), 호는 백암(柏巖).
아버지는 진사 사명(士明)인데, 백부인 형조좌랑 사문(士文)에게 입양되었다.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76년(선조 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78년 검열·전적을 거쳐서 예조좌랑·정언이 되었다.
부수찬·지평·직강 등이 되고, 1584년 영월군수로 갔을 때 노산군(魯山君: 단종)의 묘를 배알하고 제청(祭廳)·재실(齋室)·찬청(饌廳)을 묘 옆에 짓고 처음으로 ‘노산군’이라는 호칭을 신주(神主)에 써서 부인 송씨(宋氏)의 신위와 함께 모셔 신임군수마다 죽던 변을 막았다.
3년 후에 돌아와 선조로부터 많은 치하를 받고, 교리에 서용되고, 1590년 집의·사간·검열·사인·사성·사복시정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형조참의를 거쳐 안동부사가 되었다가, 경상도 안집사(安集使)로 영남에 가서, 충성스럽고 의기있는 선비들에게 국가의 뜻을 알리고, 왜적을 토벌하도록 장려하고 백성들을 잘 다스렸다.
이듬해 경상우도관찰사가 되어 전라좌·우도의 곡식을 운반하여 기근이 든 백성들을 구제하고자 하였다. 이어 도승지·대사간·한성부우윤·대사성을 거쳐, 1594년 동지의금부사·이조참판·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대사헌이 되어 〈시무16조〉를 상소하였는데, 모두 치안에 좋은 대책이라는 평을 들었다.
1599년 명나라 장수를 접반하고 형조참판에서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
1612년 하절사(賀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명나라 군사가 조선에 남아 있는 것처럼 꾸며 일본의 재침략을 막아 달라는 청을 올려, 명나라로부터 일본에게 재침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칙서를 보내게 하고 돌아왔다. 곧, 대사성이 되고 안동부사로 나아가 범람하는 낙동강의 재해를 막기 위하여 제방을 수축하여 후세에까지 칭송을 들었다.
그러나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되고 또 앞서 광해군의 생모인 공빈 김씨(恭嬪金氏) 별묘(別廟)의 의물(儀物)을 종묘의 의물과 똑같게 하는 것에 반대한 것과 관련되어 강릉으로 유배가게 되었는데, 여러 대신들의 변호로 풀려났다. 영천의 구산서원(龜山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백암문집》이 있다.
이조판서가 추증되었고, 시호는 민절(敏節)이다.
* 挽金參判 玏 백암 김륵에 대한 만사
儒林楷範國蓍龜。餘事文章出等夷。道直不妨三見黜。憂深無奈五成噫。
寬閒勝致兼龜鶴。灑落襟懷托酒詩。歲在龍蛇傷往事。沈冤不但爲吾私。
0 금응훈(琴應壎) 1540년(중종 35)∼1616년(광해군 8).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훈지(壎之), 호는 면진재(勉進齋).
아버지는 훈도(訓導) 재(榟)이고. 외조부는 생원 김효(金孝盧)이다.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
1570년(선조 3) 사마시에 합격, 1594년 학행으로 영의정 류성룡의 천거를 받아 종묘서부봉사(宗廟署副奉事)에 제수되었다.
그 뒤 영춘현감과 양천현감, 제천현감, 등을 역임하고 1601년 의흥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류성룡과 조목의 요청에 따라 사직하고 《퇴계선생문집》 간행실무자로 참여했다.
외관시에는 선정으로 명망이 높았고, 퇴관해서는 후진교육에 전력해 큰 성과가 있었다. 형 일휴당 응협, 외사촌 산남 김부인, 후조당 김부필, 양정당 김부신, 읍청정 김부의 설월당 김부륜과 더불어 오천 칠군자라 칭하였다.
*挽琴堤川 應壎
倜儻襟懷豈弟資。早從溪上服鑢錘。家傳孝友鄕邦敬。邑遍仁恩父老思。
耕鑿一丘安晚節。儀刑千載有餘師。傍人莫恨螽斯少。䌓慶他年足一夔。
0 오운(吳澐) 1540년(중종 35)∼1617년(광해군 9).
본관은 고창(高敞). 자는 태원(太源), 호는 죽유(竹牖)·죽계(竹溪).
수정(守貞)의 아들이다. 퇴계 이황(李滉)· 남명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1년(명종 16) 생원시에 합격하고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의 학유·학정·박사·전적·직강 등을 역임하였다.
1583년(선조 16) 경원부 아산보(阿山堡)의 추장 번호(藩胡)가 난을 일으키자 북도조전장(北道助戰將)으로 나가 공을 세웠다.
그뒤 충주목사 겸 편수관(編修官)을 거쳐 성균관사성을 지낸 뒤 사재감정이 되고, 1589년 광주목사(光州牧使)로 나아갔다가 해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서 소모관(召募官)·수병장(收兵將) 등으로 활약하였다. 그때 백령(白嶺)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전후 2만여명에 이르렀다.
특히 의령부근의 전투와 현풍전투에 군공이 뛰어났다.
1593년 상주목사가 되고, 이듬해 합천군수를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다시 합천부근의 왜적을 쳐서 공을 세워 도원수 권율(權慄)의 추천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명장 진린(陳璘)제독의 접반사(接伴使)로 활약하였다.
1599년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장례원판결사에 승진하였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608년 다시 기용되어 경주부윤이 되었으며, 1616년(광해군 8) 공조참의에 올랐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때 시정득실(時政得失)을 진술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와 동고분전한 17장(將)의 한 사람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고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영주의 산천서원(山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는 《죽유문집》이 있고, 편서는 《동사찬요 東史纂要》가 있다.
만사 趙靖[黔澗] 검간집에 미수록
久繋蒼生望、重分嶺外符。尊兼齒德爵、惠及鰥寡孤。
一疾因勞悴、諸郞致婉婾。榮哀人莫幷、行路亦嗟呼。
0 류성룡(柳成龍) 1542년(중종 37)∼1607년(선조 40).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
공작(公綽)의 손자로, 황해도관찰사 중영(仲郢)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진사 송은 김광수(金光粹)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과 동문수학하였으며 서로 친분이 두터웠다.
1564년(명종 19) 생원·진사가 되고, 다음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한 다음,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로 춘추관기사관을 겸직하였다.
1568년(선조 1) 대교, 다음해 전적·공조좌랑을 거쳐 감찰로서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어 부수찬·지제교로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춘추관기사관을 겸한 뒤,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그 뒤 정언·병조좌랑·이조좌랑·부교리·이조정랑·교리·전한·장령·부응교·검상·사인·응교 등을 역임한 뒤, 1578년 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직제학·동부승지·지제교로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춘추관수찬을 겸하고, 이어 이조참의를 거쳐 1580년에는 부제학에 올랐다.
1582년 대사간·우부승지·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에 승진하여 왕명을 받고 〈황화집서 皇華集序〉를 찬진(撰進)하였다.
1583년 다시 부제학이 되어 〈비변오책 備邊五策〉을 지어 올렸으며, 그해 함경도관찰사에 특제되었으나 어머니의 병으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어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다가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예조판서로 동지경연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제학을 겸하였으며, 다음해 왕명으로 〈정충록발 精忠錄跋〉을 지었고, 또 그 다음해에 《포은집 圃隱集》을 교정하였다.
1588년 양관대제학에 올랐으며, 다음해 대사헌·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왕명을 받아 〈효경대의발 孝經大義跋〉을 지어 바쳤다.
이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있게 되자 여러 차례 벼슬을 사직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소(疏)를 올려 자핵(自劾)하였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이해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관련되어 죽게 된 최영경(崔永慶)을 구제하려는 소를 초안하였으나 올리지 못하였다.
다음해 우의정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이어 좌의정에 승진하여 역시 이조판서를 겸하였으며, 이해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서인 정철(鄭澈)의 처벌이 논의될 때 동인 중의 온건파인 남인(南人)에 속하여 같은 동인의 강경파인 북인(北人)의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하였다.
왜란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형조정랑 권율(權慄)과 정읍현감 이순신(李舜臣)을 각각 의주목사와 전라도좌수사에 천거하였으며, 경상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을 이일(李鎰)로 교체할 것을 요청하는 한편, 진관법(鎭管法)을 예전대로 고칠 것을 청하였다.
1592년 3월에 일본사신이 우리 경내에 이르자, 선위사(宣慰使)를 보낼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아 일본사신은 그대로 돌아갔다.
그해 4월에 판윤 신립(申砬)과 군사(軍事)에 관하여 논의하며 일본의 침입에 따른 대책을 강구하였다.
4월 14일 일본이 대거 침입하자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군무(軍務)를 총괄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고, 이듬해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 그뒤 충청·경상·전라 삼도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하였다.
이해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의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으며, 이여송이 벽제관(碧蹄館)에서 대패하여 서로(西路)로 퇴각하는 것을 극구 만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권율과 이빈(李薲)으로 하여금 파주산성을 지키게 하고 제장(諸將)에게 방략을 주어 요해(要害)를 나누어 지키도록 하였다.
그해 4월 이여송이 일본과 화의하려 하자 그에게 글을 보내 화의를 논한다는 것은 나쁜 계획임을 역설하였다.
또 군대양성과 함께 절강기계(浙江器械)를 본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성곽의 수축을 건의하여 군비확충에 노력하였으며, 소금을 만들어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할 것을 요청하였다.
10월 선조를 호위하고 서울에 돌아와서 훈련도감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변응성(邊應星)을 경기좌방어사로 삼아 용진(龍津)에 주둔하게 함으로써 반적(叛賊)들의 내통을 차단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며, 1594년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 紀效新書》를 강해(講解)하였다.
또, 호서의 사사위전(寺社位田)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군량미를 보충할 것과 조령(鳥嶺)에 관둔전(官屯田)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는 등 명나라와 일본과의 화의가 진행되는 기간에도 군비보완을 위하여 계속 노력하였다.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하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들의 탄핵으로 관작을 삭탈당하였다가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하여졌다. 안동의 병산서원(屛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挽柳西厓先生 丁未
絶學承陶叟。殷梅早見嘗。文章優黼黻。操履薄氷霜。撥亂功推度。持危責在光。
惠何公易介。璟自石爲腸。積羽翻沈艫。孤根合守岡。跡隨煙壑遠。心逐露葵長。
柱石須傾圮。蓍龜協弛張。未酬民手額。遽見廈摧樑。輟市都人哭。加麻國士傷。
斯文同墜地。末學痛迷方。抵死猶陳劄。平生不置庒。惟應憂國淚。泉壤亦沾裳。
*祭西厓先生文
嗚呼。先生易簀。于今八旬有九日。卽遠有期。將反而亡。山立玉色之容。氷淸蘖苦之操。琅然之語。肅然之儀。冠冕玉珮之文。忠信篤敬之行。其不可得以復接。斯文何恃而在玆。正氣何托而不衰。邦國生民。何所倚重而能活。新學後生。於何考德而問業。詖邪險僻之害。將日滋而無忌。怠慢滅劣之習。其孰振而能立。興思至此。氣塞忘言。嗚呼。天之降先生。實非偶然於斯世。而壽不滿其德。先生之遇斯世。不可謂下焉不尊。而志不得大布。使斯世止於斯世。斯民止於斯民。而身且不得安於朝廷之上。以卒其格非回泰之責者。是何天意之難諶。而人事之多舛也。嗚呼。是皆在彼。而非吾所能及。惟其在我者。則一心徇國。終始不渝。不以其不可爲而自倦。甚至於顚沛而不沮。擯斥而愈懇。及其屬纊之日。猶且惓惓焉以國事爲憂。炳然丹悃。披露兩箚。冀補其萬一。先生於此。眞不負其所學。而訃及之日。宸眷特優。痛念股肱之無人。而備禮營奠。一視舊典。至於市廛之氓遠方之士。亦能聚哭而給喪。繭足以赴弔。苟非先生之忠之篤而惠之深。其孰能使之然哉。嗚呼。先生之德業文章。太史書之。衆口銘之。目之而思。耳之而悅。其將質諸神明而無愧。垂諸後世而不朽。獨恨其棲息之地。微響已輟。謦欬難尋。玉淵煙霞。鷗鳥是占。舊架圖籍。蠧魚來飽。羮墻猶是。杖屨莫陪。了了心目。觸緖增悲。後死而生。寧不長痛。而如靖湔劣昏愚。無足有取。特荷先容。終不擧臂。雖不得摳衣束脩。日厠於函丈之後。而有時承眄。必傾肝膽。及吾得科。衆賀而獨憂。縷縷以言遜括囊爲戒。引喩古訓。極其丁寧。雖不能體行於身上。而佩服心胸之間。何敢頃刻而暫忘。言猶在耳。而遽遭今日。撫躬增感。長慟欲絶。嗚呼。生榮死哀。信知先生之無憾。而㝠途失相。其奈小子之靡歸。靈若有知。亦必有感於斯文。嗚呼哀哉。
0 이우(李瑀) 1542년(중종 37)∼1609년(광해군 1).
본관은 덕수(德水). 이름은 위(瑋) 또는 후(珝). 자는 계헌(季獻), 호는 옥산(玉山)·죽와(竹窩)·기와(寄窩).
원수(元秀)의 아들이며, 율곡 이(珥)의 동생으로, 어머니는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이다. 1567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비안현감과 괴산·고부군수를 거쳐 군자감정에 이르렀다.
시(詩)·서(書)·화(畵)·금(琴)을 다 잘하여 4절(四絶)이라 불렸다. 그림은 초충(草蟲)·사군자·포도 등을 다 잘 그렸는데, 어머니의 화풍을 따랐다.
아들 경절(景節)도 가법(家法)을 이어 서·화·금에 능하여 3절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가 초충을 그려 길에 던지면 닭이 와서 쪼았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화훼초충(花卉草蟲)을 잘 그렸다고 한다.
묵매화(墨梅畵)는 주로 횡관식구도(橫貫式構圖)로 힘차게 묘사하였다. 유작으로는 〈설중매죽도 雪中梅竹圖〉(개인 소장)·〈노매도 老梅圖〉·〈수과초충도 水瓜草蟲圖〉〈포도도 葡萄圖〉 등이 전하고 있다.
*次李槐山 瑀 韻仍寄之
風塵久作異鄕人。望月天涯幾愴神。佇見妖氛淸海宇。淸樽相對上洲春。
0 강봉수(姜鳳壽) 1543년(중종 38) 온양 출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덕수(德叟), 호는 송암(松庵).
증조부는 판관 자위(自謂)이며, 아버지는 기(琦)이다.
1573년(선조 6) 진사가 되었고 158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뒤에 과거시험 답안지가 유실되어 당시 시험 감독관이었던 임열(任說)·김귀영(金貴榮)이 탄핵을 받았다. 이 같은 사고로 초사(初仕)가 늦었으나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내다가 1604년 건강이 좋지 않아 평창군수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평소 효성이 지극하여 1666년(현종 7) 송준길(宋浚吉)의 상소로 정문이 세워졌다.
1791년(정조 15)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온양의 충효사우(忠孝祠宇)에 배향되었다.
*珍山郡。奉謝主倅姜德叟。鳳壽○乙未 1595(선조 28)
一逢知勝十年書。身命俱經萬死餘。斗水莫言爲惠少。西江那得及枯魚。
0 백현룡(白見龍) 1543년(중종 38)∼1622년(광해군 14).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문서(文瑞), 호는 성헌(惺軒).
진사 미량(眉良)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강성문씨(江城文氏)로 참봉 언(誾)의 딸이다.
처음 유일재 김언기(金彦璣)에게 글을 배우다 뒤에 퇴계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월천 조목(趙穆)· 학봉 김성일(金誠一)· 서애 유성룡(柳成龍)과 교유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함(李涵)·백인국(白仁國) 등과 의병을 일으켜 학봉 김성일의 휘하에 들어가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는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들어가서 망우당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적을 무찔렀다.
1609년(광해군 1)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힘썼다. 운산서원(雲山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성헌집》이 있다.
*옥봉집
1582년(선조 15) 7월 학봉선생이 백운정에 계실 때 성헌(惺軒) 백현룡(白見龍: 자는文瑞). 검간선생. 매당(梅堂) 권욱(權旭 자는景初). 옥봉 권위등 학봉문인들이 모여 백현룡이 고향으로 돌아가자 전별연을 하였다.
0 이봉(李逢)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운(子雲).
서애 류성룡(柳成龍) 송강 정철(鄭澈)· 백사 이항복(李恒福)·등과 함께 학문에 힘써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중봉 조헌(趙憲)· 우복 정경세(鄭經世) 등과 의병을 규합, 험준한 요지에 진을 치고 적군의 후방을 교란하여 물리쳤다.
서울이 수복된 뒤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왕명으로 상경하여 1595년 사헌부감찰에 발탁, 이듬해는 옥천군수로 나아가 부호들의 창곡(倉穀)을 풀어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도 관군과 의병을 각 요충지에 배치하여 왜군의 진격을 막은 공으로 당상관에 올랐으나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냈다.
李逢
字子雲完山人壬辰倭寇充斥逢與趙重峯憲謀擧義旅於是憲之沃川收聚鄕兵公往
嶺南則前翰林鄭經世進士金湜及趙靖宋匡國等十餘人糾合義旅見公大喜推以爲將於
是乃作文誓衆賊退大駕還京罷陣將歸以顚末上達上特拜沃川郡守[주:人物考]
*次義兵大將李 逢 贈行韻 二首
諸葛思存漢。阿蒙尙守吳。行裝一鞭在。誰復謂秦無。
又
久絶江淮援。襄陽不屬吳。進明猶戴首。一劍可容無。
公與同志倡義。推李逢爲大將。公爲佐幕。是年八月。以義兵陳達事將赴巡營。大將亦以設伏事出向兎遷。臨發。大將書二絶以別。公和之。
附元韻
陳琳飛檄草。威勢振孫吳。一言如撥亂。吾刃血將無。
計同侯救趙。事異鄧歸吳。擎天憑隻手。忠義世應無。
*贈槐山倅李 逢○五首○丙申十二月。公上疏請親征於闕下。歸時到槐山贈詩。
1596(선조 29) 검간선생이 친정상소를 올린후 돌아오는 길에 의병장이 였든 괴산군수 이봉을 만나 지은 시
奮義當年起草廬。天心應不李晟虛。捐軀不患臨危日。綜理休忘竹木餘。
李公曾爲義兵將。故首句云。
滿腹神韜局一麾。丹心不與鬢毛衰。祇今社稷危霜葉。肯爲全軀惜死綏。
漢使虛廻海上槎。廟堂無策可誰何。夷情不是初難見。今古同愚一字和。
詔使通和不利。故云。
親討元非壞廟謨。聖綸猶復罪還都。區區獻計歸無用。我亦乾坤一腐儒。
章上不報。自上以昨年還都咎大臣。故云。
山河千里帶腥臊。誰爲君王辦一鏖。苟活本非吾分內。東沈休道魯連高。
0 박이장(朴而章) 1547년(명종 2)∼1622년(광해군 14).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숙빈(叔彬), 호는 용담(龍潭)·도천(道川).
승지 양좌(良佐)의 아들이다.
어려서 가학(家學)을 수업하고, 23세에 남명 조식(曺植)을 찾아 덕산(德山)에 갔으며, 1572년(선조 5) 향시(鄕試)에, 이듬해 회시(會試)에 합격하였다.
1574년 소재 노수신(盧守愼)을 찾아가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영숭전참봉(永崇殿參奉)으로 나아갔으나 곧 사직하고 돌아와 학문에 몰두하였다.
1586년 별시문과에 갑과로 합격하여 승문원정자·홍문관수찬·교리 등을 지내고 1591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임진왜란 때 학봉 김성일(金誠一)의 주청으로 종사관이 되어 크게 활약하였다.
1593년 10월 사헌부지평·지제교·정언을 지내고 다음해 이조좌랑, 이어서 세자시강원사서를 겸직하였다.
1595년 이조정랑·부응교를 거쳐 1599년 사간·집의에 있을 때에 홍여순(洪汝諄)을 탄핵하였다.
1601년 성균관전적·상의원정을 지내고 이듬해 집의·홍문관직제학 겸 시강원보덕·동부승지·참찬관을 역임하였다. 이 당시 유영경(柳永慶)파인 소북(小北)으로 반대세력을 비방, 탄핵하였다.
1603년 동지정사(冬至正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고, 대사헌·이조참판·부제학을 지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鄭仁弘)을 논계하였다.
이듬해 대사간이 되고, 이어 동지춘추관사·대사성을 거쳐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1615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가 삭직되었다.
그 뒤 성주로 내려가 저술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경상도 초계(草溪)에서 죽었다.
문장에 능하였으며, 특히 시에 이름이 있었다.
저술로는 《용담집》·《정서절요 程書節要》·《육경여해 六經蠡海》가 있다.
성주의 청천서원(晴川書院)에 제향되었다
* 月波亭。贈朴叔彬。而章○丁未 1607(선조 40)
勝事遙期江上亭。政當啼鳥入幽聽。汀蘭岸芷俱堪賞。莫慰靈均澤畔醒。
*挽朴參判叔彬 1622년
間氣鍾南服。聲華世莫肩。揚廷忠獨炳。屈棘惠還專。
晩景辭騰踏。窮廬守靜便。歿寧存亦順。應不愧人天。
0 성영(成泳) 1547년(명종 2)∼1623년(광해군 15).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사함(士涵), 호는 태정(苔庭).
강원감사 세평(世平)의 아들이다.
1573년(선조 6)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병조좌랑·헌납·장령·집의 등을 거쳐, 1592년에 여주목사가 되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도순찰사로서 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였고, 이듬해 경기좌도관찰사가 되었다. 다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호조참판에 재직중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남정양향사(南征糧餉使)로 군량미 조달을 맡아보았다.
1599년 공조참판·한성부좌윤·대사헌·예조참판·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1601년 한성부판윤이 되고, 이듬해 지중추부사로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대사헌·충청감사·호조판서·병조판서를 역임하고, 1605년 좌우참찬을 거쳐, 1607년 이조판서를 지냈다.
이듬해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鄭仁弘) 등에 의하여 유영경(柳永慶)의 당인으로 몰려 파직되었다가, 1616년(광해군 8) 연일(延日)에 유배되어 1623년 배소에서 죽었다.
*挽成判書士涵 泳○二首○癸亥 1623(인조 1)
榮辱何嘗枉一身。胸襟皎皎玉無磷。世間多少崇班子。說道淸修有幾人。
海鄕南望路漫漫。魂逐歸雲幾往還。今日却成攀櫬別。此生無復接容顔。
0 송원기(宋遠器) 1548년(명종3)~1615년(광해군7 을묘) 성주
본관은 야로(冶爐). 자는 학무(學懋), 초자는 자용(子容). 호는 아헌(啞軒).
증조부는 방현(邦賢). 조부는 응규(應奎). 아버지는 사호(師灝).
선조(宣祖) 6년 (1573)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광해군(光海君) 2년 (1610) 경술(庚戌) 별시(別試)에 급제(63세)하여 사간원 헌납을 지냈다.
(동계 정온과 대과 동방)
계암 일록에 보면 이때 유일재 아들 김득의. 해저 개암의 손자 김률, 서애 아들 수암 류진. 개암 김령. 소고 박승임의 아들 박회무와 같이 대과를 보았으나 영남사람으로는 공과 동계 정온만이 급제하였다.
이때 시관은 좌의정 백사 이항복. 대제학 월사 이정구. 박승종, 조탁. 허균이였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과 교유하였다.
김광계의 매원일기에 보면 선조41년(1608) 성주 청천서원에서 한강 정구와 裵應衮 ·金軸 ·鄭錘 등 많은 사람들이 회합하였다.
* 挽宋學懋 遠器
侯門終不曳長裾。舊業還尋萬卷書。夫子自能齊得喪。皇天何遽報乘除。
逍遙杖屨空梅墅。寂寞儀刑返柳車。舊要伊西餘病守。他時忍復過門閭。
0 이시립(李時立) 1548년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지가(志可). 충범(忠範)의 아들.
선조(宣祖) 12년(1579)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선조(宣祖) 38년 (1605) 별시(別試)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강진현감. 시정을 역임
*이시립에 대한 만사(挽李正 時立)
憶曾京洛蓋初傾。相識雖新有舊情。古貌古心徇古道。浮榮浮世任浮萍。
一宵棠館承淸眄。十載巖雲阻耦耕。豈意巫陽傳詔遽。旋令老子悼晨星。
0 서사원(徐思遠) 1550년(명종 5)∼1615년(광해군 7).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행보(行甫), 호는 미락재(彌樂齋)·악재(樂齋).
전교 흡(洽)의 아들이며, 큰아버지 형(浻)에게 입양되었다. 이천 출신이며,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주자학 및 이황(李滉)의 문집을 깊이 연구하고 중년 이후는 후진을 가르쳤다. 선조 때 학행으로 감역·찰방을 지내고, 1595년(선조 28) 청안현감(淸安縣監)에 부임하여 학문의 진흥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그 뒤 1597년 옥과현감(玉果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이듬해 사임하였다.
1602년에도 연기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 형조·호조 정랑, 역학교정 등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모두 응하지 않았다.
모당 손처눌. 여헌 장현광과 도의지교를 가졌다.
대구의 이강서원(伊江書院),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악재집》이 있다.
* 낙재 서사원에 대한 만사(挽徐樂齋行甫 思遠)
平生山仰樂齋兄。高古風標瘦鶴形。巷裏一瓢安苦淡。日中三省勉誠明。
槎通泗汭迷津豁。琴接溪徽荷蕢驚。豈謂斯文天不憗。遽看奎璧閟佳城。
0 강복성(康復誠) 1550년(명종 5)∼1634년(인조 12).
본관은 신천(信川). 자는 명지(明之), 호는 죽간(竹磵).
중진(仲珍)의 증손이고 유선(惟善)의 아들이다.
1579년(선조 12) 사마시에 합격한 뒤, 참봉·직장(直長)·찰방(察訪) 등을 역임하였다.
1595년 서애 류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여헌 장현광(張顯光) 등과 함께 발탁되어 장수현감이 되었으며, 곧 김제군수로 옮겼는데, 이때는 정유재란 때 명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남원에 주둔한 왜적을 쳐서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뒤 고양군수·천안군수를 역임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잠저(潛邸) 때에 시강(侍講)한 인연이 있다 하여 가자(加資)되었으며, 동부승지·우부승지를 거쳐 평산부사·전주부윤·청송부사 등의 외직에 보임된 뒤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을 제수받았다. 이때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시키는 등의 난정을 행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인조반정 뒤 다시 부평군수를 제수받았으며, 곧 성주목사로 옮겼다.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즉시 군대를 모아 인조를 호위하였다. 그 공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되었고, 곧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진되어 지중추부사를 제수받았다.
그러나 노쇠하여 향리인 선산으로 귀향하여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그는 일찍이 재행(才行)을 겸비하고 학술이 정심(精深)한 것으로 천거되었으며, 목민관으로 선정을 베풀었다. 저서로는 《죽간집》이 있다.
* 죽간(竹磵) 강복성에 대한 만사(挽康知事明之 復誠)
曾見東坡出守徐。朱幡頻到少游廬。聲名穌老陶甄後。氣節舟川樹立餘。
伯叔淸風人共仰。龔黃政績史堪書。玆當遠日違臨壙。衰境空敎涕滿裾。
0 귄위(權暐) 1552(명종 7)∼1630(인조 8)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회(叔晦), 호는 옥봉(玉峯),
아버지는 심행(審行)이며, 학봉 김성일 유일재·김언기 ·월천 조목의 문인이다.
어려서 동당시(東堂試) 별시(別試)에 합격하였으며 1601년 문과 급제 하였다. 전적(典籍) ·공조좌랑(工曹佐郞)을 거쳐 호조좌랑 ·예조좌랑을 역임하였다. 뒤에 형조 ·예조정랑을 제수받았지만 부임하지 않았다. 도계서원(道溪書院)에 제향되어 있다.
옥봉집
1582년(선조 15) 7월 학봉선생이 백운정에 계실 때 성헌(惺軒) 백현룡(白見龍: 자는文瑞). 검간선생. 매당(梅堂) 권욱(權旭 자는景初). 옥봉 권위등 학봉문인들이 모여 백현룡이 고향으로 돌아가자 전별연을 하였다.
* 敬次鶴峯先生韻、送白文瑞歸鄕幷序。 歲壬午夏、先生在白雲亭。余與白文瑞、
趙安仲、權景初、共學朱書。七月日、 文瑞、有微恙告歸。先生賦五言詩以 遣。
因各次韻。
嶺海久離違、幸此共文房。心期同一調、酬唱宮與商。朝來告別語、使我心永傷。
念初學朱書、多君好商量。得師不自力、愧我無短長。庶幾相講劘、終升君丁堂。
如何志未遂、望雲歸思忙。沈痾雖祛體、道路宜周防。晨昏愼止宿、僕夫戒玄黃。
好去當自求、存存勿舍亡。爲學豈有他、要須勉就將。歲暮有幽期、勿棄吾狷狂。
願言勤命駕、好會成一塲。臨別愧無贐、作詩爲君蘉。
0 여대로(呂大老) 1552년(명종 7)∼1619년(광해군 11).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위수(渭叟)·성우(聖遇), 호는 감호(鑑湖).
아버지는 정자 응구(應龜)이며, 남명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1582년(선조 15)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성균관박사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권응성(權應星)과 함께 금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권응성을 가장(假將)으로 삼고 의병장 김면(金沔)과 협력하여 지례·금산의 적을 거창 부근에서 격파하여 공을 세웠다.
적을 격파하고 군량을 관장한 공으로 지례현감·예조 및 병조좌랑·대구판관·사헌부지평·합천군수 등을 지냈다. 이조참의에 추증되고, 경양사(鏡陽祠)에 봉향되었다
*감호(鑑湖) 여대로에 대한 만사(挽呂陜川聖遇 大老 1619(광해 11))
故舊仍婚媾。知公莫我親。臨民春有脚。持己玉無塵。
閣上期聞鳳。人間忽泣麟。九原長慟處。定省曠昏晨。
0 손처눌(孫處訥) 1553년(명종 8)∼1634년(인조 12).
본관은 일직(一直). 자는 기도(幾道), 호는 모당(慕堂).
현감 치운(致雲)의 손자이다. 성주(星州) 출신.
한강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여헌 장현광(張顯光)· 낙재 서사원(徐思遠)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과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왜군과 투쟁하려다가 친상을 연이어 당하여 실행하지 못하였다.
난 후 향교의 재건에 앞장서서 후진양성에 노력하였고, 정인홍(鄭仁弘)의 이황(李滉)배척에 대항하여 척사부정(斥邪扶正)의 글을 지어 도내사림을 규합하기도 하였다.
대구의 청호서원(靑湖書院)에 제향되었다.
* 모당 손처눌의 운에 차운하다(次孫幾道慕堂韻)
不見同人意惄如。强回歸旆問幽居。一堂揭號終身慕。孝友全天賀有初。
*손처눌에게 답하다(答孫幾道 處訥 )
意外得奉手帖。就審陽和。靜履萬勝。且荷藥桃之惠。爲治痰深謝。愚伏事。豈但關一時禍福。將有網打之擧迫在朝夕。死生間直有先後而已。士生斯世。幼學壯行。惟忠孝是企。分義是謹。而所遭如此。氣憫奈何。惟念聖明在上。搢紳之无妄者。曾已次第疏放。只恃聖恩。此外何說。心煩謾及。
* 손처눌에게 답하다(答孫幾道)
謹承尊翰。就審春暖。尊候萬勝。慰慰。不佞。衰病憂患。只合歸休。尙此推擠。有愧初心。可歎可歎。餘俟早晏謀敍。
모당집
* 검간 조안중에 감사하다(謝趙黔澗安仲[靖]自鰲山解綬過訪[丁巳]
(주) 1617년 검간선생이 청도군수를 지내고 돌아오는 길에 모당선생을 찾아갔다
오산(鰲山)은 청도의 古名
休官行色野僧如,來訪窮山病友居.爲謝慇懃觴詠別,梅花已謝杏花初.
* 검간에게 주다(寄趙黔澗安仲)
衡茅一別夢依依,邈阻聲音已久時.長記在官貽壽板,最思留斾贈情詩.
隨風塵事何煩說,明義丹靑各自知.促席揚觴難再得,三淸契寞以爲期.
0 고상안(高尙顔) 1553년(명종 8)∼1623년(인조 1).
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사물(思勿), 호는 태촌(泰村). 천우(天佑)의 아들이다.
1573년(선조 6) 진사가 되고, 1576년에 문과에 올라 함창현감·풍기군수 등을 지냈다.
40세가 되던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침입하자, 향리인 상주 함창에서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큰 공을 세웠다.
49세 이후 지례현감·함양군수를 지냈고, 이덕형(李德馨)·이순신(李舜臣) 등과의 서사기록(書事記錄)도 남긴 바 있다.
그뒤 울산판관을 지낸 후, 벼슬을 그만두고 전원생활을 하였다.
泰村集
* 검간에게 술을 권하며(酬趙安仲 靖○二首)
別來知幾日。華髮已盈簪。坐費鈴齋嘯。遙思澤畔吟。
惡懷隨歲長。離恨共春深。世乏鍾期耳。何心擬鼓琴。
可惜倚樓子。一鳴旋謝簪。江山添筆力。風月共行吟。
素節窮猶確。丹衷謫更深。世人渾不識。煮鶴謾燒琴
0 정윤해(鄭允諧) 1553년(명종 8)∼1618년(광해군 10).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백유(伯兪), 호는 서귀자(鋤歸子).
부친은 정련(鄭璉)이고, 숙부는 약포(藥圃) 정탁(鄭琢)이다.
어려서부터 문사에 능하고 예법을 지켜 월천(月川) 조목(趙穆)과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아성(雅性) 청고(淸高)하고 영달(榮達)을 구하지 않았으며, 벼슬은 참봉(參奉)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 창의(倡義)하여 태조(太祖)의 영정(影幀)을 수호한 공로로 원종훈(原從勳) 3등(三等)을 받았다.
광해군(光海君)의 난정을 보고는 세상에 나가지 않고 시와 술로 세월을 지냈고, 특히 도연명(陶淵明)과 소강절(邵康節)의 시와 문천상(文天祥)과 사첩산(謝疊山)의 시문(詩文)을 좋아하였다.
문장이 창건 풍부하고 조탁을 일삼지 않으며 한 번에 많은 글을 썼다.
저술에 시문집 《서귀자선생유고(鋤歸子先生遺稿)》가 있고, 함창(咸昌)의 청암서원(淸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서귀자 집
* 검간공과 가규공에게 주다(贈趙黔澗安仲[靖]可畦棐仲[翊])
安仲其兄棐仲弟。兄為清道弟梁山。割鷄焉用牛刀試。㭪闕宜充諌諍官。
0 손처약(孫處約) 1553년(조선 명종 8)~1634년(인조 12)
본관은 일직(一直). 자는 희로(希魯). 호는 오매(五梅).
조부는 현감 치운(致雲). 선무랑 수(遂)의 아들.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의 동생.
한강(寒岡) 정구(鄭逑) 문인
광해군(光海君) 5년 (1613) 진사(進士)에 합격.
蔡楨 崔東岦 李景培 都聖兪 閔蓍國 李之華 崔東嵂과 교유
*손처약에게 화답하다(和贈孫上舍希魯 處約)
昨見蘇門作。如聞擲地聲。留連三日話。不盡四年情。
病守風流薄。詩豪氣味淸。逢場終酩酊。秋日任西傾。
* 손처약의 운에 차운하다(次五梅亭韻 二首)
幾處園林天下名。君家獨有五梅兄。此間來往吾曾熟。特地行尋分㝡生。
凈砌雪濃傾臘酒。晴窓露滴點羲經。眞人與世相忘久。秖恐風傳十里馨。
一之猶足五爲名。何獨於花愛此兄。跫斷月庭疏影亂。露收風榻暗香生。
淵明宅裏虛三徑。博士床頭枉五經。何似歲寒同卜築。一生眞趣飽芳馨。
* 손처약의 동생들에게 답하다(答孫幾道昆季)
季進之行。忽荷僉盛札。就審僉履動靜萬吉。感慰之餘。益謝僉念愈久不替也。不佞。重茅破榻。眠食猶人。若視前日倥傯敲扑之苦。豈不此勝也。每念疇昔過從之款。耿耿在心。不敢暫忘也。季進留連數夜。遽爾告別。臨岐益令人增惱也。
0 강인(姜絪) 1555년(명종 10)∼1634년(인조 12).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인경(仁卿), 호는 시암(是庵).
아버지는 우의정 사상(士尙)이다.
천거로 왕자사부에 제수되었고,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낸 뒤 1594년(선조 27)에 공조좌랑이 되었다.
이듬해 영유현령(永柔縣令)이 되고 선정하였다 하여 승직되어, 1602년 선천군수(宣川郡守)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한 공으로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녹훈되고, 진창군(晋昌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홍주목사가 되고 1610년(광해군 2) 상주목사를 역임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회답사(回答使)로 적진에 내왕하여 적정을 비밀리에 탐색하였다.
1632년 한성부좌윤, 1634년 한성부우윤을 역임하였다.
일찍이 선천군수로 있을 때 30여리의 관개수로를 팠는데, 백성들이 이것을 ‘강공제(姜公堤)’라 불렀다.
* 상주목사 강인의 부인에 대한 만사(挽姜晉昌 絪 夫人 )
(주) 강인은 당시 상주목사로 재임 중이였다
載駕來時路。魚軒變素帷。攀號傾百里。寂寞掩重闈。
有女纔分語。無人可奉慈。還知泉壤恨。不但鳳孤飛。
0 박선장(朴善長) 1555년(명종 10)∼1616년(광해군 8).
본관은 무안(務安). 자는 여인(汝仁), 호는 수서(水西).
아버지는 북평사(北評事) 전(全)이며, 어머니는 웅천주씨(熊川朱氏)이다.
4세 때 아버지가 서울에서 돌아가시자, 10세 때 어머니를 따라 경상도 영천(榮川:지금의 榮州)에 있는 외가에 내려가 그의 사부이자 장인이기도 한 남몽오(南夢鰲)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05년(선조 38) 51세의 늦은 나이에 증광별시(增廣別試)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고 성리학에 힘썼다.
1608년 예안현감(禮安縣監), 1614년(광해군 6) 경상도사(慶尙都事) 등을 역임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한문시가 〈박박전가 薄薄田歌〉와 시조 〈오륜가 五倫歌〉가 있으며, 저서로는 이들 작품이 수록된 문집 《수서집 水西集》이 있다.
* 공암에서 박선장에게 차운하다(孔巖。次汝仁)。
衣上千峯雨。筇邊萬仞巖。畫屛新讓巧。仙掌逈摏巉。
噴雪蛟蟠瓮。依广鶴着龕。夕陽增悄愴。不可久停驂。
0 권욱(權旭) 1556(명종 11)∼1612(광해군 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초(景初), 호는 매당(梅堂),
심언(審言)의 아들이다.
8, 9세에 『효경(孝經)』과 『소학(小學)』의 장구(章句)를 읽고 통달하였으며,
학봉 김성일(金誠一)의 문하에 나아가 주서(朱書)와 『심경(心經)』에 대해 질문하였으며, 1590년(선조 23) 진사가 되었고, 1592년(선조 25) 임진란에 창의(倡義)하여 의병들과 문경 지역을 방어하였다.
1602년(선조 35)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물가에 작은 집을 짓고 매화를 심어 ‘매당(梅堂)’이라 칭하고 학문을 연구하고 벗들과 교유하며 여생을 보냈다. 문집으로 花山世稿가 있다.
*1582년(선조 15) 7월 학봉선생이 백운정에 계실 때 성헌(惺軒) 백현룡(白見龍: 자는文瑞). 검간선생. 매당(梅堂) 권욱(權旭 자는景初). 옥봉 권위등 학봉문인들이 모여 백현룡이 고향으로 돌아가자 전별연을 하였다.
0 성람(成灠) 1556년(명종 11)∼1620년(광해군 12).
본관은 창녕(昌寧). 초명은 협(浹), 자는 사열(士悅), 호는 청죽(聽竹).
감사 세평(世平)의 아들이다.
일찍부터 성리학에 뜻을 두어 형 호(浩)와 함께 남언경(南彦經)에게 수업하여 학문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이이(李珥)·성혼(成渾)을 사사하였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연구에 몰두하였고 의학에도 밝아 많은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하였다.
구언령(求言令)이 있을 때마다 수천언으로 진소(陳疏)하였으며, 임진왜란 후에는 처가인 상주에 거처하면서 조익(趙翊)·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 등과 교유하였다.
벼슬은 효릉참봉(孝陵參奉)에 임명된 이래 장원·별좌·공조좌랑·무주현감을 역임하였다
* 성람을 송별하면서(送成士悅 灠)自註。時士悅避亂江陵。適唐人在座。故末句及之。
風光又屬踏靑辰。時事悠悠入愴神。臨別莫言東海遠。坐中還有浙江人。
0 조익(趙翊) 1556년(명종 11)∼1613년(광해군 5). 선생의 동생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비중(棐仲), 호는 가규(可畦).
아버지는 광헌(光憲)이며, 어머니는 홍윤최(洪胤崔)의 딸이다.
백씨(伯氏) 검간공(黔澗公)과 함께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582년(선조 15) 생원시를 거쳐 1588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호남지방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난 후에 진주겸하지사(陳奏兼賀至使)의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그 후 예조(禮曹)와 이조(吏曹)의 정랑(正郞), 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 경상도사(慶尙都事), 양산군수(梁山郡守) 등 여러 관직을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의성의 속수서원(涑水書院)과 상주의 장천서원(長川書院)에 제향되었다.
* 귀양가 있는 동생을 생각하며(憶遷客 壬寅○時公弟可畦公謫在公山)
이 시는 1602(선조 35) 동생 가규공이 공주로 귀양 갔을 때 지은 시
幾回相憶不相將。夢逐邊鴻夜夜忙。天道忍添灾並疾。人情還遣惡生瘡。
頻聞澤畔形容悴。不盡天涯骨肉傷。遙寄一書仍引領。淚和西日自盈眶。
*동생 가규공에게 주다(寄舍弟棐仲)
癯疏風骨別多辰。隨計西行幾日臻。身有風痾憂失攝。性無機慧恐生嗔。
節當回雁來書少。草爲思君入夢頻。缺一句 到頭持病且持身。
* 서장관으로 떠나는 동생을 송별하며(送棐仲以書狀赴京)
이 시는 1599(선조 32) 동생 가규공이 서장관으로 중국에 갈 때 지은 시
肇秋分手仲春期。可耐看雲至歲移。賴有天心有明月。淸光應慰兩鄕思。
가규선생문집 (可畦先生文集)
아래 시는 한강선생의 아들인 사곡(沙谷) 정장(鄭樟)이 연기현감을 지낼 때로
1610년 경으로 보인다. 검간선생과 가규선생 사곡선생이 만나 시를 지었다
* 형님 검간공에게 화답하다(附伯氏和韻)
麗日連鑣作勝遊。高亭俯壓白鷗洲。鸞凰似入言公室。氣像如登邵子樓。
滿紙煙霞詩愧短。棲苴行李跡嫌浮。畱連擬做通宵話。他日難期此水頭。
偶尋前約作淸遊。倚玉芳筵盡上洲。許國世無蘇武節。憂時今倚仲宣樓。
干天劔氣豐城屈。破浪風稜巨艦浮。莫道詞人無膽氣 東溟會見落旄頭。
*연기현감과 형님의 운에 화답하다(附燕歧與伯氏相和韻)
雲雨交情未可知。與兄終始結幽期。商鄕儻借華山半。同隱何嫌世路譏。
疎拙難堪世路知。憑兄聊與託襟期。相逢不覺心先醉。詩酒如今又犯譏。 [右沙谷]
衷情都許鄭兄知。歲暮行裝與子期。名利儻來眞一夢。莫嫌浮世謾多譏。
自憐飄梗少心知。何幸竆途遇子期。從此峨洋成密契。任他塵土足訕譏。 [右黔㵎]
孤蹤湖外少相知。彼此何時有好期。相思雨裏偏多感。况復殘生困衆譏。
早隨黔㵎結心知。此地逢兄豈所期。聖主洪恩能識未。不妨塵網自多譏。[右二首][沙谷幷寄余]
0 송광정(宋光廷) 1556년(명종11 병진)~ 1607년(선조40 정미) 성주
본관은 야로(冶爐) 자는 찬재(贊哉) 호는 송간(松澗). 한강 정구 문인.
증조부는 야계 희규(希奎). 조부는 정자(正字) 현(鉉). 아버지는 생원 유경(惟敬)이며. 어머니는 평산 신씨이다
선조(宣祖) 18년(1585 을유(乙酉) 별시(別試)에 급제하여, 1586년 임영교수. 선조23(1590)년 대구교수로 나갔다가, 다음해 성균관 학유로 들어와 여름에 군자감 봉사가 되었다. 선조25년 상을 당하여 선조28년 복을 벗고 성균관 학정과 전적이 되었다. 가을에 병조좌랑이 되었다. 선조32년(1599)에 전라도 도사로 나갔다가, 선조34년 정선군수가 되고 선조36년 가을에 형조좌랑이 되고, 다음해에 정랑이 되고, 가을에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선조38년 삼도도통사의 종사관이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아 파직되었다. 선조39년(1606년) 가을 울산도호부사로 나가 다음해인 선조37년 임소에서 졸하였다.
여헌 장현광과 도의지교를 맺었고 사돈이 되었다. (사위는 여헌의 아들 부제학 청천당 응일)
*아래의 시는 1599(선조 32) 검간 선생이 희릉 참봉(禧陵 參奉)이 제수되어 서울로
갈 때 송광정(宋光廷) 선생과 함께 가면서 단양 이락루에서 지은 시.
*丹陽二樂樓阻水。示同行宋贊哉,洪澤精。己亥 1599년
形勝湖西擅石門。峽中飛閣倚朝暾。此行縱後朝天日。看遍名區亦聖恩。
0 이항복(李恒福) 1556년(명종 11)∼1618년(광해군 10).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 또는 백사(白沙).
고려의 대학자 제현(齊賢)의 후손으로 참찬 몽량(夢亮)의 아들이다.
1571년(선조 4)에 어머니를 여의고, 삼년상을 마친 뒤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에 힘써 명성이 높았다. 영의정 권철(權轍)의 아들인 권율(權慄)의 사위가 되었다.
1575년에 진사초시에 오르고 1580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1583년에 사가독서의 은전을 입었다.
그뒤 응교·검상·사인·전한·직제학·우승지를 거쳐 1590년에 호조참의가 되었고,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처리한 공로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그 이듬해 정철(鄭澈)의 논죄가 있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워 정철을 찾는 사람이 없었으나, 그는 좌승지의 신분으로 날마다 그를 찾아가 담화를 계속하여 정철사건의 처리를 태만히 하였다는 공격을 받고 파직되기도 하였으나 곧 복직되고 도승지에 발탁되었다.
이때 대간의 공격이 심했으나 대사헌 이원익(李元翼)의 적극적인 비호로 진정되었다. 병조판서·이조판서,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는 등 여러 요직을 거치며 안으로는 국사에 힘쓰고 밖으로는 명나라 사절의 접대를 전담하였다. 명나라 사신 양방형(楊邦亨)과 양호(楊鎬) 등도 존경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찾았던 능란한 외교가이기도 하였다.
1598년에 우의정 겸 영경연사·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에 올랐는데, 이때 명나라 사신 정응태(丁應泰)가 같은 사신인 경략(經略) 양호를 무고한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우의정으로 진주변무사(陳奏辨誣使)가 되어 부사(副使) 이정구(李廷龜)와 함께 명나라에 들어가 소임을 마치고 돌아와 토지와 재물 등 많은 상을 받았다.
그 뒤 문홍도(文弘道)가 휴전을 주장했다고 하여 유성룡(柳成龍)을 탄핵하자 그도 함께 휴전에 동조하였다 하여 자진하여 사의를 표명하고 병을 구실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조정에서 그를 도원수 겸 체찰사에 임명하자, 남도 각지를 돌며 민심을 선무, 수습하고 안민방해책(安民防海策)16조를 지어 올리기도 하였다.
1600년에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사, 세자사(世子師)에 임명되고 다음해에 호종1등공신(扈從一等功臣)에 녹훈되었다.
1602년 정인홍(鄭仁弘)·문경호(文景虎) 등이 최영경(崔永慶)을 모함, 살해하려 했다는 장본인이 성혼(成渾)이라고 발설하자 삼사에서는 성혼을 공격하였는데, 그는 성혼을 비호하고 나섰다가 정철의 편당으로 몰려 영의정에서 자진사퇴하였다.
1608년에 다시 좌의정 겸 도체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이해에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여 북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는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臨海君)의 살해음모를 반대하다가 정인홍 일당의 공격을 받고 사의를 표했으나 수리되지 않았다.
그뒤 정인홍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배향을 반대한 바 있어 성균관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정인홍의 처벌을 요구했다가 도리어 유생들이 구금되는 사태가 벌어져 권당(捲堂: 동맹휴학)이 일어났는데 그의 주장으로 겨우 광해군을 설득, 무마하여 해결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정인홍 일당의 원한과 공격을 더욱 받게 되었으며, 곧이어 북인세력에 의하여 자행된 선조의 장인 김제남(金悌男)일가의 멸문지환,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살해 등 북인파당의 흉계가 속출하였고, 그의 항쟁 또한 극렬하여 북인파당의 원망의 표적이 되어왔다.
그리하여 1613년(광해군 5)에 인재천거를 잘못하였다는 구실로 이들의 공격을 받고 물러나와 별장 동강정사(東岡精舍)를 새로 짓고 동강노인(東岡老人)으로 자칭하면서 지냈는데, 이때 광해군은 정인홍 일파의 격렬한 파직처벌의 요구를 누르고 좌의정에서 중추부로 자리만을 옮기게 하였다.
1617년에 인목대비 김씨(仁穆大妃金氏)가 서궁(西宮)에 유폐되고, 이어 왕비에서 폐위하여 평민으로 만들자는 주장에 맞서 싸우다가 1618년에 관작이 삭탈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 적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죽은 해에 관작이 회복되고 이해 8월에 고향 포천에 예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백사 이항복을 곡하다 (哭李相國白沙 戊午)
○自註。車南致鰲城答書。且傳訃音。痛哭而書。
書與訃音同日至。開緘不覺淚翻河。重拜九原應有日。分崩其奈我邦何。
0 차천로(車天輅) 1556년(명종 11)∼1615년(광해군 7).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복원(復元), 호는 오산(五山)·귤실(橘室)·청묘거사(淸妙居士). 송도(松都) 출신. 고려의 간의대부 원부(原頫)의 6대손으로, 식(軾)의 아들이다. 화담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개성교수(開城敎授)를 지냈고, 1583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86년 정자(正字)로서 고향 사람 여계선(呂繼先)이 과거를 볼 때 표문(表文)을 대신 지어주어 장원급제시킨 일이 발각되어 명천에 유배되었다가 1588년 문재가 있어 용서되고, 이듬해 통신사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그때 얼마 되지 아니한 기간이었으나 4,000∼5,000수의 시를 지어 일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명나라에 보내는 대부분의 외교문서를 담당하여 그 문명이 명나라에까지 떨쳐 동방문사(東方文士)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명사(明使)들이 문장의 속작을 실험하기 위하여 미리 준비한 시에 거침없이 수응(酬應)함으로써 이름을 더욱 떨쳤다.
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을 거쳐 1601년 교리가 되어 교정청(校正廳)의 관직을 겸임하였고, 광해군 때 봉상시첨정을 지냈다. 한호(韓濩)·권필(權韠)·김현성(金玄成)과 더불어 서격사한(書檄詞翰)이라 하였으며, 특히 시에 능하여 한호의 글씨, 최립(崔岦)의 문장과 함께 송도 삼절(松都三絶)이라 일컬어졌다.
또, 아버지 식, 아우 운로(雲輅)와 함께 세인(世人)으로부터 3소(三蘇)라 불렸다. 가사(歌辭)와 글씨에도 뛰어났다.
저서로 《오산집 五山集》·《오산설림 五山說林》, 작품으로 〈강촌별곡 江村別曲〉 등이 있다.
오산집
* 送黔澗先生湖西幕府 車天輅
검간선생이 1611(광해군 3) 충청도사로 나갈 때 차천로가 지어준 시.
趙璧曾傾十五城。如何只博一參卿。幕中婉畫須強佐。席上儒珍負大名。
地盡海雲鰲背出。天開湖日馬頭生。山川不改扶餘國。收拾風煙在此行。
0 김용(金涌) 1557년(명종 12)∼1620년(광해군 12). 선생의 처사촌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도원(道源), 호는 운천(雲川).
찰방 귀봉 수일(守一)의 아들이며, 학봉 김성일(金誠一)의 조카이다.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를 거쳐 예문관검열로 옮겼다가 천연두가 발병하여 사직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인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안동수성장(安東守城將)에 추대되었고, 이듬해 예문관의 검열·봉교, 성균관의 전적 등을 지냈다. 이어 정언·헌납·부수찬·지평을 거쳐 이조정랑에 올랐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제도도체찰사(諸道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수행하여 많은 활약을 하였으며, 교리에 재임중 독운어사(督運御史)로 나가 군량미 조달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조정에서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이루어져 후원하던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서인에 의하여 축출되자, 탄핵을 받아 선산부사로 체직되었다.
이때 금오서원(金烏書院)을 이건하고 향교를 중수하는 등 문교에 힘썼다. 이후 계속되는 대간의 탄핵을 받으며 경직과 외직을 전전하였는데, 일시 제용감정·필선(弼善)·집의 등 경직에 머물다가 예천군수·상주목사·홍주목사 등의 외직을 지내면서 오직 보민(保民)과 흥학(興學)에 힘썼다.
1609년 봉상시정으로 춘추관편수관을 겸하여 《선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라 병조참의를 지내고, 1616년에 여주목사로 나갔는데, 이때 나이 이미 60세였다.
조정의 당쟁이 날로 심해지므로 맏아들의 죽음을 구실로 향리로 돌아왔다가 4년 뒤에 죽었다. 안동 덕봉서원(德峯書院)·묵계서원(默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운천집 雲川集》·《운천호종일기 雲川扈從日記》 등이 있다.
* 挽金驪州道源 涌 운천에 대한 검간선생 만사
出口何曾錯一端。律身嚴密與人寬。當官益勵氷霜操。遇遯惟堅鐵石肝。
止酒中年尤寡過。投簪晩景亦多閒。豈言天道終冥寞。旋遣衰翁發蕙嘆。
雲川集
* 柳氏姑壽席。次趙安仲靖韻。
幔亭高宴酌霞觴。簫鼓嘲轟舞作行。大姥當筵開一笑。曾孫喜氣溢雙眶。
縱未相呼共一觴。當年雁序自聯行。傷心此日惟姑在。我淚如何不迸眶。
伯父藥峯先生詩云。令弟開樽勸我嘗。嘗多不覺醉頹床。季妹與我生同日。恨未相呼共一觴。
乃戊辰年是日作也。感傷揮涕而書之。令弟卽先君也。
0 성진선(成晋善) 1557년(명종 12)∼미상.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즉행(則行), 호는 연강(烟江).
참의 수익(壽益)의 아들이며, 목사 호선(好善)의 동생이다.
일찍이 천거에 의하여 관직에 나아가 도사(都事)로 재직하던 중 1594년(선조 27) 정시문과에 응시, 동생 계선(啓善)과 함께 나란히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7년 전라도도사로 있을 때, 형장(刑杖)을 남용하며 이서(吏胥)들을 지나치게 엄히 다룸으로써 소요를 일으키는 폐단이 잦다 하여 파직된 일이 있었으나 곧 재기용되어 홍문관수찬·사간원정언·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 등을 지냈다.
1613년(광해군 5)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이 일었을 때 아들 하연(夏衍)과 조카 이생인(李生寅)이 이이첨(李爾瞻)의 사위 이상항(李尙恒) 등과 함께 대비를 모해하는 상소를 올려 그의 처지를 난처하게 하였으나 자신은 절의를 지켜 끝까지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았다.
1615년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뒤 대사간·홍문관부제학·승정원우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 成方伯則行 晉善 餞席。次留別韻。三首○丙辰
1616년(광해군 8) 당시에 선생은 청도군수였고, 감사 성진경은 1615년에 부임하여
다음해 이임할 때 지은 전별 시
宣化周南六十城。幾回原隰任行行。秖緣聖渥終難報。身外浮榮一羽輕。
秦京迢遞隔重城。奉送襜帷幾日行。虐雪釀寒風色勁。萬金行李莫言輕。
六載支離滯一城。我行何意後君行。眼中蓬鬢同衰暮。此別人間未可輕。時公守淸道
0 이전(李㙉) 1558년(명종 13)∼1648년(인조 26).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숙재(叔載), 호는 월간(月磵).
수인(壽仁)의 아들이고, 창석 준(埈)의 형이다.
동생 준과 함께 서애 유성룡(柳成龍)의 문하에서 퇴도(退陶)의 학설을 배워 주자서(朱子書)를 전심으로 공부하였다.
임진왜란 때 준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 적중에 포위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병(病)한 그가 동생을 데리고 적진 탈출에 성공하여 형제가 무사할 수 있었다. 뒤에 준이 감복하여 화공을 시켜 이 모습을 그리게 하고 〈급난도 急難圖〉라 이름하니, 당시의 명공·거경들이 이 일을 가영(歌詠)하였다고 한다.
1603년(선조 36) 사마시에 합격, 세마를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 때에는 지례현감을 제수받았으나 사퇴하였다. 상주의 옥성서원(玉城書院)에 배향되었다.
아래 시는 임진왜란중 의병활동을 같이 할 때 검간선생이 월간 이전(李㙉) 선생에게
지어준 시
*親討元非壞廟謨。聖君猶復罪還都。區區獻計歸無用。我亦乾坤一腐儒。
又曰。
*山河千里帶腥臊。誰爲君王辦一鏖。苟活本非吾分內。東沈休道魯連高。
*行蹟[李㙉] 월간 이전선생이 지은 검간공 행적
公早遊鶴峯金先生之門。得聞向裏之學。授讀朱子書節要。著實體會。終身受用。雖不免場屋之文。而不爲得失所累。蓋以先立乎其大者也。居家孝友。接物忠厚。惻怛之仁。最急於恤窮。推其所有以濟貧乏。遠近資活者甚衆。少時群居黨庠。有友人貧窶衣甚薄。一友在傍。脫公新製絮袍。加之其人。蓋試其意也。公怡然許之。略無靳固色。此是與朋友共之義也。性剛果。善善惡惡。聞人之善如己出。見人之非若浼己。儕輩以畏友目之。鄕俗有所恐懼。後生有所矜式。其功大矣。奉先之誠。至老不少衰。祭必盡禮。愛敬兼至。一從文公家禮。其理郡也。作事精密。毫髮不差。謹於奉公。簡於持己。臨民以恕。御吏以法。所至有聲績。入仕于朝。典禮大常。明乎禘嘗之義。一時稱其盡職。惜乎不諧於世。不得究其底蘊。優游有洛之上。撫翫松竹。以畢餘年。二老康寧。子孫蕃衍。雍雍愉愉。和氣滿堂。琴瑟之樂。門戶之盛。世不復有如公者矣。二子嘗爲郡縣。養以專城。極其甘旨。此實作善之報也。
0 손기양(孫起陽) 1559년(명종 14)∼1617년(광해군 9).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경징(景徵), 호는 오한(聱漢)·송간(松磵).
조부는 응(凝) 아버지는 생원 겸제(兼濟). 숙부는 추천(鄒川) 손영제(孫英濟)
약관으로 백가(百家)의 책을 통해 학식이 매우 깊었고, 1585년(선조 18)에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8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전적을 거쳐, 경주제독·울주판관을 지냈다.
1602년 체찰사 이덕형(李德馨)의 천거로 영천군수가 되었고, 창원부사를 지냈다.
1612년(광해군 4) 광해군의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그뒤 다시 사헌부와 사간원의 벼슬을 거쳐, 상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여생을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황(李滉)의 학통을 이은 정구(鄭逑)와 도의(道義)의 계(契)로 깊은 관계를 맺었던 성리학자이며, 정경세(鄭經世)·조호익(曺好益)·이윤(李潤)·이전(李㙉) 이준(李埈) 등의 영남명유들과 교유가 있었다.
만년에는 역학(易學)에 전심하여 침식을 잊을 정도였으며, 평일에 독서할 때는 《논어》만 읽는 성벽이 있었다.
저서로는 《배민록 排悶錄》·《철조록 輟釣錄》 등이 있다.
* 雲門。書贈孫景徵 起陽 嘲後至。
落葉埋山徑。閒雲鎖洞門。山靈分付意。應欲截來轅。
0 이수준(李壽俊) 1559년(명종 14)∼1607년(선조 40).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태징(台徵), 호는 용계(龍溪). 스스로 지범재(志範齋)라 하였다. 병마절도사 제신(齊臣)의 아들이다.
우계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1589년(선조 22) 사마시를 거쳐, 이듬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에 추천되었다가 주부·감찰·호조좌랑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나아가 통진현감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녀자와 선비 및 양식을 통진에서 강화도로 보낸 뒤, 우성전(禹性傳) 등과 함께 경외(京外)에 흩어진 군졸들을 모아 왜적을 방어하고, 통진현을 안전하게 지키는 데 공을 세웠다.
1593년 예조정랑에 제수되었으며, 장악원첨정을 거쳐, 1595년 영해부사로 나아갔다.
1599년 강화부사·봉상시첨정·성균관사성·사헌부장령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외직으로 종성·강계·나주·광주(光州) 등의 부사와 목사를 제수받았으나 부임하지 않고, 그뒤 사복시정(司僕寺正)·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길주목사·영흥부사,공주목사등을 역임하였다.
1606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승문원판교로서 춘추관편수관을 겸하여 임진왜란 때 소실된 실록을 중인(重印)할 때 참여하였다. 이해에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던 중 영평(永平)에서 병을 얻어 이듬해 봉산관(鳳山館)에서 죽었다.
* 送李台徵之任公州 三首○幷小序○壬寅
1602(선조 35) 5월 이수준은 사헌부 장령으로 있다가 공주목사가 되어 나갈 때 지어준 시로 검간 선생은 廣興倉 副奉事로 재임중이였다
公大藩。屬玆南鄙多梗。朝廷難其守。三易擬有是命。顧不重耶。自此湖民庶有其蘇之望矣。如生倚玉雖晩。少時嘗一辱先大人之知。近又一弟得罪淸時。累在境下。奉送襜帷。情豈雷同。末什屬遷客。乞爲傳示。
膺命還當重外辰。公山雖舊化應新。昏門自絶懷金吏。委巷寧容佩犢民。
已賀恩風蘇死草。豈憂潦轍泣窮鱗。區區一喜公私並。漢璽行看寵紫綸。
攀拜先庭閱幾蓂。此來人事苦難平。淸新儀範泉原閟。潦倒風塵鬢髪明。
京洛卽今逢玉樹。文章從古有金聲。還知此別吾無恨。憑慰鴒原謫裏情。
異時離別亦關情。況此窮途各暮齡。蝶夢不知千里遠。雁書眞覺萬金輕。
炎蒸嶺海䨪連瘴。憔悴江潭影伴形。臨紙重陳加飯祝。吾王明聖攬群英。
0 윤광계(尹光啓) 1559년(명종 14)∼미상.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경열(景說), 호는 귤옥(橘屋).
목사(牧使) 행(行)의 손자이며, 화중(和中)의 아들이다. 조헌(趙憲)의 문인으로 1585년(선조 18)에 생원이 되었고, 158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01년 주서·세자시강원설서를 거쳐, 1603년 호조정랑으로서 지제교 겸 춘추관기주관이 되어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역대실록의 재간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예조정랑을 거쳐 1606년 평안도도사가 되고 다음해 공조좌랑이 되었다. 조헌의 문인이었기 때문에 시론의 배척을 받았다.
광해군 때는 말단의 관직을 전전하다가 고향 해남에 은퇴하여 있었다.
그의 시는 시격이 정련(精鍊)되었고 율조(律調)가 청아한 것으로 일세(一世)를 풍미하였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귤옥집》이 있다.
*次尹光啓慰章
이 위장은 검간선생이 해남군수 재임시 아들 진사공을 대신보냈다 (달수)
蕭寺秋光屬暮天。小輿回磴費人肩。誰憐子夏明猶在。自悼林回璧不捐。
雲外亂山魂欲斷。日邊歸路眼空穿。此生有恨無終極。直到黃泉始豁然。
時公宰海南。遭第三子進士弘遠之喪。
0 이준(李埈) 1560년(명종 15)∼1635년(인조 13).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숙평(叔平), 호는 창석(蒼石). 수인(壽人)의 아들이다.
서애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1582년(선조 15) 생원시를 거쳐 1591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교서관정자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난민과 함께 안령에서 적에게 항거하려 하였으나 습격을 받아 패하였으며, 그뒤 정경세(鄭經世)와 함께 의병 몇천명을 모집하여 고모담(姑姆潭)에서 외적과 싸웠으나 또다시 패하였다.
1594년 의병을 모아 싸운 공으로 형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듬해 경상도도사가 되었으며, 이때 중국 역대 왕들의 덕행과 신하들의 정사(正邪)를 밝힌 《중흥귀감 中興龜鑑》을 지어 왕에게 바쳤다. 당시 정인홍(鄭仁弘)이 세력을 키워 많은 사람들을 주위에 모았으나 가담하지 않았다.
1597년 지평이 되었으나 유성룡(柳成龍)의 국정운영에서의 잘못 등으로 인하여 공격을 받을 때 함께 탄핵을 받고 물러났다. 같은해 가을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군비를 정비하는 등 방어사(防禦使)와 협력하여 일하였다. 이어 예조정랑·단양군수 등을 거쳐, 1603년 수찬으로 불려들어와 형조와 공조의 정랑을 거쳤다.
1604년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광해군 때 제용감정(濟用監正)을 거쳐, 교리로 재직중 대북파의 전횡이 심해지고, 특히 1611년(광해군 3) 정인홍이 이황(李滉)과 이이(李珥)를 비난하자 그에 맞서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바뀌자 다시 교리로 등용되었다. 인조 초년 이귀(李貴) 등 반정공신을 비롯한 서인 집권세력이 광해군의 아들 폐세자(廢世子)를 죽일 때, 은혜를 베풀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다가 철원부사로 밀려났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군대를 모아 의승군(義勝軍)이라 이름하였으며, 그뒤 부응교·응교·집의·전한·사간 등 삼사의 관직을 각각 여러 차례 역임하였다.
이즈음 왕권에 위협이 된다 하여 집권 서인세력이 선조의 아들인 인성군(仁城君) 공(珙)을 죽이려 하자 남인의 일원으로서 반대의견을 주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였고, 조도사(調度使)에 임명되어 곡식을 모았으나 화약이 맺어지자 수집한 1만여섬의 군량을 관에 인계하였다. 이 공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1628년 승지가 되고 1634년 대사간을 거쳐, 이듬해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선조대에서 인조대에 이르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 국방과 외교를 비롯한 국정에 대하여 많은 시무책(時務策)을 제시하였으며, 정경세와 더불어 유성룡의 학통을 이어받아 당시의 학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남인세력을 결집하고, 그 여론을 주도하는 중요한 소임을 하였다. 상주의 옥성서원(玉城書院)과 풍기의 우곡서원(愚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창석집》을 남겼으며, 《형제급난지도 兄弟急難之圖》를 편찬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 竺山金使君 覺 邀商龍兩邑人作會溪上。射帿爲樂。同席者李都事叔平,閔典籍士新等四十餘員也。次叔平韻。二首
麗日連鑣作勝遊。高亭俯壓白鷗洲。鸞凰似入言公室。氣像如登邵子樓。
滿地煙霞詩愧短。棲苴行李迹嫌浮。留連擬做通宵話。他日難期此水頭。
偶尋前約作淸遊。倚玉芳筵盡上洲。許國世無蘇武節。憂時今倚仲宣樓。
干天劍氣豐城屈。破浪風稜巨艦浮。莫道詞人無膽氣。東溟會見落旄頭。
*醉次蒼石韻。奉別一寒契丈。二首○
時公與李蒼石,金陜川昌一,崔監司晛。會于金烏書院。
偶忝金烏益者三。留連不覺興偏添。却嫌世故驅人急。他日佳期指道南。
燈前細話夜經三。風緊何嫌酒更添。勝地留連猶未洽。又陪鳩杖到城南。
*三足堂。次李叔平韻。二首
山川夙孕精英氣。宇宙長吹肅爽風。君子處窮宜見節。丈夫名世不論功。
三間小閣依蒼壁。一點浮雲過碧空。誰瀉㙜前千斛水。爲澆今日磊嵬胸。
碧梧零落鳳高飛。寂寞空庭不掩扉。慕德郞今侯獨有。知音從古世稱稀。
巖花雨足紅全洗。汀草春深綠滿圍。物色可憐如昨日。儀刑無路更摳衣。
*逍遙堂。次李叔平韻。
亭下澄江玉一圍。㙜南茅棟掩松扉。淵明亦不支離甚。荒徑柴桑未賦歸。
*挽李蒼石 埈○二首
擢第揚庭荷聖恩。忘身夙夜盡忠勤。更膺麟鳳振振慶。福履欽君裕後昆。
同鄕同契忝姻親。討款平生喜有因。何意到今先厭世。衰蹤孑孑憫無隣。
*祭李蒼石叔平文
鄕邦不幸。禍變至斯。儒亡師表。國失蓍龜。矧余衰質。孑孑靡依。興言及此。死欲無知。玆憑薄羞。敢吐哀辭
*再祭李蒼石文
日月不居。葬期已迫。儀刑漸遠。誰從考德。而余衰敗之質。疾病沈綿。不得躬進致酹。尤增痛怛。罔知所喩。
창석집(蒼石集)
* 送黔澗出宰淸道 李埈
검간집 중 투증에 수록된 시로, 1611(광해군 3) 12월 검간선생이 충청도사에서
청도군수가 제수되어 부임할 때 전별하며 지어준 시. 이때 창석선생은 홍문관 전한이였다
海城湖幕藹嘉聲。才降于天運不亨。天上久宜班八座。嶺南今復擁雙旌。
已知榮悴渾閑事。欲把行藏且細評。三子一時同去遠。廬陵舊事足傷情。
廬陵三子事相近。故今及之。
*自道南同趙安仲金无悔曹汝善金時直泛洛而下。至伴鷗亭。
반구정에서 검간선생, 창석선생, 김지복(金知復), 조희인(曹希仁: 조우인의 동생)
과 뱃놀이를 하다
尊中斟桂酒。江上刺蘭橈。勝地蓬瀛界。群仙玉雪標。
鰲頭仍繫纜。䳽肯怳聞簫。安得丹靑手。淸遊入素綃。
*謝趙安仲來訪月澗兄步月追至
검간선생이 찾아옴을 고마워하며 달밤에 형 월간공이 오다.
雪山如玉月如銀。三老逍遙酉水濱。氣力尙憐衰後健。心情逾向老來親。
臞形共對千年鶴。瑞來爭看一角麟。欲喚沙西成四皓。風流長作畵中人。
*謝趙安仲靖來訪 검간선생이 찾아옴을 고마워하며
詔顏如玉氣如春。八十年先只隔旬。盛代卽今優耆德。佇看林下降蒲輪。
*與趙安仲靖
陽生之慶齋居。道體益福。贊喜何已。就中有奉稟事。前日之請臨玉成者以此。而風日寒烈。兄不果臨。敢此致書。以聽裁處焉。麗末樞密院直學士金先生得培。以西北面都巡問使討滅紅賊。奸臣金鏞忌鄭世雲功高。又恐安祐, 李芳實, 金得培成功。欲使祐等殺世雲。因以擅殺世雲爲罪而盡殺祐等。密喩祐等。令圖世雲。祐等就得培牙帳曰。鏞書如此。不可不從。得培曰。穰苴擅誅莊賈。衛靑不殺蘇建。古今明鑑可證。今甫平寇亂。何可自相剪滅。祐等復來言。得培堅執不許。祐等強之。邀世雲擊殺之。祐凱還詣行宮。鏞果以擅殺世雲殺之。又令捕得培至尙州。斬以梟首。門生鄭圃隱請王收屍。爲文以祭之。其文曰。當紅寇闌入。國家之命。危如懸綫。公首倡大義。遠近響應。出萬死之計。復三韓之業。今之食於斯寢於斯。伊誰之功。又以詩哭之曰。忠魂壯魄今安在。回首靑山空白雲。惟此一文一詩。可以見學士公之平生大節也。以泰山之功。而血奸人之鋒。忠魂壯魄。至今飮泣於九泉之下。歴三百年之久而不得洩。況我志士之生同桑梓之鄕。有懷百代上忠烈者。雖不能誅鏞賊於旣朽之餘。寧不倡義風於一鄕。以寓平日蘋藻之誠乎。古今立祠。非一道。或以孝行。或以忠直。或以節義。或以道學。或有勳業於國家。或有惠澤於生民。稽諸古事。其類非一。非惟標表一世。亦以矜式後人。考諸一統誌。古今祠廟之棋布於天下。尸而祝之者。無非表章先賢。勸奬後世。而以吾州文物之鄕。而前後無旌異之事。非此地之無人也。特以風習之於此事。少激勵之氣也。今以金先生震霆轟雷之功。窮天極地之寃。祭之於社。香火不輟。一以樹風聲。一以雪至寃。其於事理。實合修擧缺典。而況圃隱敍述之文。旣日星于天。西厓平日。嘗以吾鄕之無此祠。累言於黃公直諸人。今之與靈川列享於玉成。固無可遲疑等待者。以吾兄義氣。而亦樂於成人之美。久願一拜論此事。極欠相會之便。無暇奉吐矣。兄之架上。有高麗史。想已照過本傳矣。今不須至此覼縷。而近聞康明甫有入享未妥之語。或恐不識先生之大忠大功大寃者亦偶有此見欲望兄將此議說破也。
*答趙安仲時有金大妃國喪
示及成服所着。雖未知禮文之意。而在官之人。皆用齊衰白色團領。此皆從麻布之新者而言耳。前銜以下。旣降齊衰。而着白衣白帶。則此非常着故衣故帶也。必從新衣帶而言。而但於五禮儀。旣不分新故而言。且三品以下及生進生徒。豈皆饒於財力。而可辦新衣於六日間倉卒之際乎。如其可辦則辦新衣似當。而不能則用常着之衣。似恐無妨也。網巾則依前着爲是。而嘗見在官之人。或有用布爲之者。似詭於流俗矣。成服後似當焚香行四拜禮。然此出於臆見。未知於禮無違否。求道於盲。敢以謬見而爲答。更須商量處之如何。文武官三品以下妻。用白布大袖云。三品官以下。雖曰前銜。而其用新衣似無疑。然禮之不明言者何也。未可知也。
*答趙安仲
近者非無往來之便。而偶有酬酢之宂。不得候問動靜。脈脈方苦。忽承手帖。慰謝倍常。生。數日前見洛中知舊書。以不卽奔赴。時議喧然。欲於晦間邐迤而西。大病之餘。一綫殘喘。其得達城中可期乎。念六。欲歴拜城主。仍向汾曲留數日。有攀敍之便耶。佇仰。前帶之職。以所上封章因國恤未入之故。時未遞。種種狼狽可慮。洛書云。外方罷散官聞國恤來會。而獨尙州鄭,李兩人不來會。時議藉藉。以此見之。兄之當赴。與生一體。想必有往哭之意也。
*與趙安仲
近日動靜若何。生。再昨低此。今與數三年少。上東皐。望裏秋山有佳色。恨不與老兄同賞也。頃見鄕所通文。明日之會。是一州大擧措也。城主於新政之初。慨然以淑人心變俗習爲意。欲行藍田之約。吾儕老人。頃先倡率鄕人。以助成美事。想老兄必投袂而起。以爲一鄕之倡也。生。數日勞攘之餘。頗覺困頓。而然必欲策蹇而進耳。
*與趙安仲
臣民不幸。承此國母之訃。奔走哀號於深山窮谷之中者。其情曷涯。所當會哭於公處。仍爲成服。而時無公文之來。未知如何處之也。或云國恤聞訃後七日而成服。未知何据也。旣知此訃之非浪傳。則會哭一節似不待公文。而相去之遠。不得相議爲恨。埈大病之餘。元氣尙未完復。餘喘纔一綫悶悶。
*與趙安仲
衰病戀別。有同兒女子之情。方切悵然。卽承示帖。有慰悁滯。如得後日上來。可免旅次踽踽。何以異於萬人叢中之見兄弟也。而天寒遠遊。可易得耶。嘗見兄周急手段之大例如是。此實古人輕財重義之風。安得以此事而播揚之。使惜財如命之人。知所法哉。可敬可敬。餘望寢膳益福。
*與趙安仲
有再枉。無一謝。知老兄必恕其不逮。而豈得安於心也。卽承盛問。益增兢愧。生西行差退於六日。盖以家兄有恙。不果於遠征也。朝有本曹吏持朝報而來。因吏曹過限未上來之啓。聖批有調理上來之敎。今之前赴。宜不俟駕。而病冗衮衮。遲却數日。古之君仁臣恭之義。豈如是耶。踧踖無任。入城之後。歸期想不遠。而猶不能無戀於遠別之際也。餘望勿以無病爲恃。而節食生冷之物。恐痰火之動。治之未易也。
*與趙安仲
卽日燕申動靜如何。生昨自梅湖。同汝善到書院。見凡事弛紊。經紀之責。實鄕父老所荷。耈俊如兄。豈但袖手傍觀而已耶。方馳書于院長。想未暮而來。切望委臨議處。兼賞江天霽景如何。汝善雖差少。不妨作四皓會也。
*趙安仲啓
同聲相應。夙締金蘭之交。微德以堪。猥荷絲蘿之託。屬黃梅之雨潤。捧彩牋而氷兢。伏惟郡守贒契高義薄雲。淸䂓照物。家聲振代。至使君而益恢。世澤多賢。又季子之最秀。念弱息之無訓。媿家室之有齊。嫁女量其才。本不習於刀尺。生男願有室。宜其順於瑟琴。更申兩家之歡。佇看萬福之萃。
0 조우인(曺友仁) 1561년(명종 16)∼1625년(인조 3). 예천 출생.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여익(汝益), 호는 매호(梅湖)·이재(頤齋).
증조부는 우부승지 계형(繼衡). 조부는 언홍(彦弘). 아버지는 몽신(夢臣)
외조부는 신주(申澍). 처부는 우암(遇岩) 이열도(李閱道). 형은 군수 조희인(曺希仁)
1588년(선조 21)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60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다가 1616년(광해군 8)에는 함경도 경성판관을 지냈다.
대구부사. 승지를 지내고, 1621년에는 제술관(製述官)으로 있으면서 고궁(故宮)이 황적유폐(荒寂幽閉)함을 보고 감회일장(感懷一章)을 지어 광해군의 잘못을 풍자하였다가 필화를 입어 3년간 옥고를 치르고, 인조의 등극으로 풀려나 상주의 매호에서 은거하며 여생을 마쳤다. 시·서예·음악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저술로는 문집 《이재집》과 가사집 《이재영언》이 있다.
*挽曹承旨汝益 友仁 승지 조우인에 대한 만사
質稟氷霜操。才兼錦繡腸。譽騰蓮桂籍。忠炳搢紳行。短律敷深悃。長歌替痛傷。
幽都昇瑞旭。羑里脫誣殃。晉接紆宸眷。承宣補袞裳。淸班辭二竪。委巷滯三霜。
未慰蒼生望。先驚玉樹僵。老夫妨執紼。遙涕寄哀章。
0 김광엽(金光曄) 1561년(명종 16)∼1610년(광해군 2).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이회(而晦). 상주 출신.
아버지는 어모장군(禦侮將軍)병마만호(兵馬萬戶) 침(琛)이며, 어머니는 원주원씨(原州元氏)로 승문원판교 수장(壽長)의 딸이다.
1590년(선조 23) 생원시에 장원으로,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한 뒤 그해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과 예문관에 임용된 뒤 승정원주서로 옮겼다.
그뒤 옥당의 저작, 홍문관의 부수찬·부교리·부응교와 사간원의 정언·헌납과 사헌부의 집의·지평 등 요직을 거쳐서 이조정랑과 성균관의 직강·사예·사성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흥해군수를 역임하였는데, 주민생활에 이로운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의 칭찬을 들었다.
저서로는 《죽일문집 竹日文集》이 있다. 풍기의 우곡서원(愚谷書院)에 제향되었다.
*挽金而晦 光燁 김광휘에 대한 만사
契以鄕隣密。心因道義親。升沈雖異路。肝肺本無磷。
晩計存商舍。幽期指洛濱。子今先厭世。衰朽我誰因。
*祭金應敎而晦文
嗚呼慟哉。以子之才之美質之懿。志業之勤。行誼之篤。文章班馬。科第郊圻。遭遇休明。歷剔淸顯。天其或者必不偶然於斯世。而三品之官。未足言尊。五十之年。豈曰仁壽。今其亡矣。萬事休矣。此則時之不幸也。堂有鶴髮。臨年失養。小子童孫。俱未知方。家徒四壁。室如懸磬。死喪之誰恤。定省之誰視。人情到此。行路亦傷。此則家之不幸也。吾儕幷世同鄕。業亦同道亦同。磨肥戛骨。麗澤資深。以位則陞沈雖異。而論心則肝膽不隔。義雖朋友。情猶骨肉。窮途末契。惟子是仗。而天不憖遺。使我靡托。此則吾儕之不幸也。而顧在時在家者。天也命也。吾末如之何也已。若其在我者。則當盡其在我之責。思所以保護於萬一。而聞子之嗜飮而傷生也。旣不能忠告之善導之。制止於未病之前。及其旣病而沈綿也。又不能奔走之診審之。醫治於未革之際。卒使靑霞奇意。入夜不暘。玉樹精華。未秋先萎。以不免一時之不幸一家之不幸。則吾儕刻骨之痛。塡胸之憾。此生未死之前。將無時而或已矣。此吾儕之所以不暇悼一時一家之不幸。而悼吾儕之不幸也。不但悼吾儕之不幸。而實痛吾儕終始不能盡吾心而致吾力也。興言及此。五內自火。哀哉哀哉。慟矣慟矣。且有一痛。子在牀褥。非不欲促駕相問。一敍衷曲。而當冬日冽。慮妨起居。且得來報。要以春温。職此淹延。終負面訣。使平生莫逆之懷。遂成千古不瞑之冤。此吾儕之食不下咽。愈久而愈不忘者也。哀哉哀哉。慟矣慟矣。宇宙茫茫。人亦無數。屈指男兒。幾箇如子。與其才不與其壽。與其德不與其福。死者而含冤。生者而貽慽。天亦不仁。地亦不仁。子若有知。想亦感泣於斯言。嗚呼。酒之流禍。易溺難救。噬臍之悔。亦罔非酒惟辜。持盃侑君。應有所不安於冥冥。惟祀玆酒。禮則爲然。物雖菲薄。庶歆寸誠。
0 김윤안(金允安) 1562년(명종 17)∼1620년(광해군 12). 안동 구담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이정(而靜), 호는 동리(東籬).
조부는 자순(自順). 아버지는 현감 박(博). 외조부는 진성 이의(李漪).
처부는 백담 구봉령(具鳳齡)
서애 류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1588년(선조 21)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임진왜란 때 근시재 김해(金垓) 휘하에서 형 윤명(允明)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604년 생원으로 상소를 올려 오현(五賢)을 문묘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였으나, 선조가 이언적(李彦迪)의 사적에 미심쩍음이 많다고 하여 부당하다는 전교를 내렸다.
1612년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대구부사·대사간을 역임하였다.
특히 대구부사로 있을 때, 백성을 관대하게 다스리고 권세 앞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정온(鄭薀)이 영창대군 피살의 부당함을 주장하다가 제주로 유배될 때에는 시를 지어 그를 위문하였다.
*次金東籬而靜 允安 看字韻 癸丑○時公與金公遊雲門
1613년(광해군 5) 검간 선생이 청도군수로 재임 중 대구부사로 있던 동리 김윤안과 만나 운문산을 유람하였다, (동리선생 년보)
勝水佳山次第看。錦粧巖壑玉涵灣。詞高郢調難成和。天爲詩豪剰借閒。
已喜玆遊同酩酊。豈嫌於世異醎酸。臨分更與歌兒說。莫唱驪駒興易闌。
*挽金大丘而靜
千頃汪汪不見涯。幾年藜榻守書帷。壯心晩境淹黃綬。雋望當時邁白眉。
一別無因看海鶴。九原何處掩瓊芝。從今宇內知音少。吟斷平生白雪詞。
*與金而靜
隔歲阻信。常切懸想。頃得便風。乃吾賢友金士悅訃也。痛哭何言。當日過門時留詩敍別。有海南眞萬里。誰謂是吾鄕之句。三復愛玩。以不獲見面爲恨。豈料此別遽隔幽明也耶。尤增慟怛。平生信實。吾輩中甚不易得。想左右從遊失此强輔。益復何以爲懷耶。僕。落在一涯。家鄕杳然。官儲且竭。倍費心力。昨得西報。有山戎隳突之漸。聞來益覺茫然。
0 김광두(金光斗) 1562년(명종 17)∼1608년(선조 41). 상주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여우(汝遇), 호는 일묵재(一默齋).
아버지는 진사 인(仁). 서애 류성룡(柳成龍)의 문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에 검간 선생과 우복 정경세(鄭經世)· 월간 이전(李㙉)·창석 이준(李埈)· 사서 전식(全湜)등과 같이 함창(咸昌)·황령(黃嶺) 등지에서 창의하여 의병을 모집, 왜군과 맞서 싸웠다.
1606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효곡서원(孝谷書院)에 제향되었다.
*挽金上舍汝遇 光斗 김광두에 대한 만사
爽俊容姿灑落襟。逢場每覺起人欽。靑年氣像唐虞際。白首風流寂寞潯。
遺子自多經一篋。忘憂不厭酒千斟。可憐淸疾神慳祐。從此俱亡子敬琴。
0 강응철(康應哲) 1562년(명종 17)∼1635년(인조 13).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명보(明甫), 호는 남계(南溪).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병을 모집하여 경상도 상주를 지켰다.
그 뒤 정기룡(鄭起龍)이 이끄는 의병과 뜻을 같이하여, 여러 곳에서 왜적들과 싸워 이를 무찔렀다. 벼슬은 찰방에 이르렀으나, 광해군의 폭정에 분개하여 은퇴하고 고향에서 독서와 저술로 일생을 보냈다.
상주의 연악서원(淵岳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남계문집》이 있다.
*挽康察訪明甫 應哲
夙忝忘年契。欽君稟質純。慈良春茁物。簡潔玉含溫。
懇懇承先訓。振振裕後昆。何言旋厭世。脩夜遽藏魂。
0 정경세(鄭經世) 1563년(명종 18)∼1633년(인조 11).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
아버지는 좌찬성 여관(汝寬)이며, 어머니는 합천이씨(陜川李氏)로 가(軻)의 딸이다.
처부는 이결(李潔). 서애 류성룡(柳成龍)의 문인
1582년(선조 15)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86년 24세로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였다. 괴원(槐院)에 들어서 부정자((副正字)가 되었고 곧 사관으로 경연에서 선조의 대문에 응했다. 영남관찰사로 있을 적에 민풍을 일으켜 성망이 높았으며 이때 류성룡을 위해 상장(上章)했다가 귀양살이를 하였다. 1607년 대구부사가 되었고 이어 나주목사·전라관찰사를 지냈다. 이때 당화(黨禍)에 얽혀 세 차례나 입옥치리(入獄治理)되었다. 인조반정후 홍문관부제학·대사헌·이조판서. 대제학을 지냈다. 예학에 조예가 깊어 국가전례나 의례의 변칙이 있으면 반드시 그의 의견을 들었다.
저서로는 사문록(思問錄)』,『주문작해(朱文酌海)』,『상례참고(喪禮參考)』등이 있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龍仁漾碧亭。次荷渠韻。荷渠。愚伏初年軒號。(하거는 우복의 초년 호(號))
過盡長亭與短亭。豈緣塵事未曾冥。天雲自有徘徊妙。山外山中莫異聽。
附元韻
日暮來投漾碧亭。滿庭松檜雨冥冥。分明一樣琮琤水。不及山中獨夜聽。
*挽鄭愚伏 經世○癸酉(1633)
擢第揚庭自妙齡。一時輿望屬治平。憂深末路供忠直。寵溢崇班荷聖明。
稀壽到今旋厭世。英魂從此遽藏塋。忍看虛榻啼孤鳳。題了哀詞痛失聲。
*祭鄭愚伏景任文
天生我公。秀于南中。啓我群蒙。眞積之力。精明之學。君子之德。三朝重望。一代宗匠。主盟吾黨。論思講筵。格王必先。啓沃之賢。天何不佑。未竟其壽。理莫能究。國無蓍龜。士失依歸。我心孔悲。其色之溫。有道之言。終不可諼。庶羞淸酌。薦此菲薄。庶幾歆格。
*再祭鄭愚伏文
嗚呼我公。何遽至斯。儒亡師表。國失蓍龜。獻可替否。啓沃憑誰。考德問業。開奬何托。興思至此。五內昏塞。顧余庸賤。夙忝婣款。積歲陪從。賴濟慵懶。樑摧今日。我懷焉極。含哀奠酌。老淚沾臆。不昧有靈。庶歆菲薄
。
우복집(愚伏集)
*與趙安仲 靖○壬申(1632)
病廢出入。外間事一切不聞。頃日聞諸丈以院儒輩全不預駿奔之列。此習不可長。沒數停擧。其罪與罰固爲當矣。而但念許多人才。一時竝停。此亦重難。未知末梢如何稱停。數日來。微聞諸生中有識事理輕重者。多欲親詣諸尊丈座下。受撻而退。生聞之心動。謂吾鄕長長之風自此大行。亟欲稟議于老兄。以圖善處。似聞金無悔言儒生何可因一停擧。自請受撻云。生聞之怫然。無悔之見事不精。自前類此。本不足怪。但以方在院長之席而首發此論。則諸生之所見未定者。不無風靡之弊。豈非可慮之甚也。以生所見。諸老丈端坐丈席。數諸生之犯而撻以記之。以懲其後。一善也。諸生引分受罪。免罰於鄕長。而淨洗停擧之名。以慰諸父兄之心。二善也。無悔聞之。亦必絶倒之不暇矣。朱夫子之言曰。世間自有一條平正大路。人不肯行。只管上山下水。今之取舍。得無近此。幸須商量善處。進此而又有一說。諸丈之規警後生也。純是惻怛之心。絶無一點挾長矜傲之色。後生之受責於諸丈也。純是敬畏之心。絶無一點受屈狷忿之氣。然後方是善之又善。如何如何。
0 최현(崔晛) 1563년(명종 18)∼1640년(인조 18).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계승(季昇), 호는 인재(訒齋).
아버지는 심(深)이며, 어머니는 동래정씨(東萊鄭氏)로 희좌(熙佐)의 딸이다.
학봉 김성일. 한강 정구(鄭逑) 문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도처에서 공을 세웠고, 1598년 그 공으로 원릉참봉(元陵參奉)이 되었다.
1606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08년 예문관대교에 제수되었다. 같은해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가서 황제로부터 《은자대학연의소대전 銀字大學衍義昭代典》을 받았고, 1612년(광해군 4) 실록청 겸 춘추관에 들어가 《선조실록》 편수에 참여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홍문관수찬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예부종사관을 거쳐 형조참의·부제학·강원도관찰사에 이르렀다.
1627년 횡성사람 이인거(李仁居)의 모반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투옥되었으나 왕의 특명으로 곧 석방되었다.
숙종 때 선산의 송산서원(松山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인재집》이 있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정간(定簡)이다.
*挽詞[崔晛] 인재 최현이 검간선생께 올린 만사
寄世苦無悰。但有親朋思。親朋日以稀。心緖日以悲。有朋孰匪親。親仁誠可恞。髫年負笈日。與公同事師。春川同詠歸。秋寺同吾伊。中逢亂離辰。飄泊同寒飢。晩復入脩門。瞿塘同險夷。夷險心不渝。百年同爲期。白首退休同。江鄕可棲遲。公茹商嶺芝。登陟如奔騅。我是蒲柳姿。望秋先離披。豈無訪載舟。其如二豎欺。詩筒雖不繼。念念長在斯。商山四老會。已矣成夢戲。愚翁與蒼石。公永相從隨。地下若有問。人間眞險巇。
0 윤효전(尹孝全) 1563년(명종 18)∼1619년(광해군 11).
본관은 남원(南原). 초명은 효선(孝先), 자는 영초(詠初), 호는 기천(沂川).
아버지는 희손(喜孫)이고, 어머니는 이수(李琇)의 딸이다.
백호 휴(鑴)의 아버지이다. 경주분윤 재임시 한강 정구의 문인이 되었다.
1605년(선조 38) 현감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왕자사부를 거쳐 이듬해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
그뒤 1613년(광해군 5) 익사공신(翼社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대사헌이 되었을 때는 임해군(臨海君)옥사를 모사한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의 꾐에 빠져 곤혹을 치렀다.
그 뒤 지의금부사에 이르고 1617년 경주부윤을 역임하였다.
일찍이 호남의 군수로 재임시 군도사(郡都事) 김시양(金時讓)과 함께 시험을 관장하던 중 시제가 휘호에 저촉되어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挽尹慶尹 貽永
吾榜當年得雋髦。驚看風采動淸朝。英猷協贊千年運。善政讙騰百里謠。
颿過洛東曾遽別。鶴歸蓬島逈難招。孀慈失養兒無怙。泉壤應知恨未消。
0 최정호(崔挺豪) 1563년(명종 18) 선생 종동서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시응(時應), 호는 저곡(樗谷).
증조부는 최홍(崔洪), 조부는 최대관(崔大觀), 아버지는 최수도(崔守道)이며,
처부는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이다.
1591년(선조 24)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시에 합격하고,
1603년(선조 36)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급제하여
1623년(광해 1)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이후 정인홍(鄭仁弘)에 우호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현달하지 못하고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1625년(인조 3)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지냈다.
* 정언 최정호에 대한 만사(挽崔正言時應 挺豪)
夙稟慈良性。能敦孝友忱。譽騰蓮桂籍。政得吏民心。
世不容何病。人無間可欽。老夫還後死。和淚寫哀音。
0 전식(全湜) 1563년(명종 18)∼1642년(인조 20).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정원(淨遠), 호는 사서(沙西).
조부는 혼(焜).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여림(汝霖). 외조부는 이신(李信).
처부는 경상감사 홍위(洪葳)의 아들인 생원 홍천서(洪天敍)
서애 류성룡(柳成龍)· 여헌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1589년(선조 2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왜적을 토벌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김익남(金益南)의 추천으로 연원도찰방(連原道察訪)이 되었다.
1599년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으로 전임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160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07년 전적·예조좌랑과 정랑을 거쳐, 1611년 울산판관이 되어 고을 백성들의 교화에 힘썼다.
다음해 전라도도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실정으로 벼슬을 단념하고 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 등과 산수를 유람하여 세칭 상사(商社)의 삼로(三老)라 일컬어졌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새 왕이 등위하자 예조정랑에 이어 수찬·교리가 되어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태복시정(太僕寺正)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 천안에 이르러 집의가 되었으며, 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와 원수 장만(張晩)의 실책을 논하였다. 이어 병조참의·병조참지에 승진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뒤 대사간·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적을 방어하였고, 왕이 도성으로 돌아오자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그뒤 예조참의와 예조참판에 제수되었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계(陞階)하였으나 이를 사양하였다.
1638년 대사간·대사헌을 거쳐 예조참판·대사성이 되었다. 왕이 순검사에 명하여 하삼도의 수군을 정비하게 하였으나 적절한 시책이 아님을 들어 이를 반대하였다.
1642년 자헌(資憲)에 가계(加階)되고 지중추부사 겸 동지경연춘추관사(知中樞府事兼同知經筵春秋館事)에 임명되었다.
그뒤 재차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상주 백옥동서원(白玉洞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 送全凈遠 湜 赴京 乙丑
주) 1625(인조 3) 검간 선생은 군기시 주부로 재임 중이였고, 사서 전식은 형조 참의가 되어 朝京使로 연경으로 갔다
冒衝鯨浪逾千里。專對皇庭秉一心。遙贐謾言君可恕。昭昭頭上日星臨。
사서집(沙西集)
* 검간 선생에 대한 만사(輓趙安仲 靖)
齒德兼高爵。鄕邦仰達尊。斯文今日喪。吾黨幾人存。
有淚時霑臆。無歌可倚門。龍鍾天豈憖。朝夕會泉原。
* 검간 선생에 대한 제문(祭趙安仲文)
緬脩短之有數。知終始之素定。孰久視而長存。宜順受而聽命。發深情於悼亡。非爲公而誰慟。昔鳳毛之始生。人不勝乎慕用。余互鄕之倀倀。有文擧之了了。求元禮而通名。向龍門而相要。遂肩隨而兄事。久而敬之不衰。樂莫樂兮知心。垂六旬于今玆。顧糠粃之在前。傷枳棘之久居。力未贍於薦鶚。心實負於連茹。終齋宿於太常。豈爲人而擇官。公何憾於素位。非我輩之所安。理不爽於福善。家尙肥於流光。多簪笏於石門。見緦功於汾陽。數大家於今世。蓋如公者有幾。嗚呼哀哉。居家奉先之孝。恤族急人之義。遇事斷斷之心。接人款款之悃。今不得而復見。人焉取以爲訓。恨沈痾之在身。而冬日之尙寒。得鷄綿而未薦。增余涕之汍瀾。嗟代哭而借手。豈平日之情素。若死友之今有。應元伯之暫駐。嗚呼哀哉。
0 고인계(高仁繼) 1564년(명종 19)∼1647년(인조 25). 상주
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선승(善承), 호는 월봉(月峯).
예문관직제학 거(距)의 6세손으로 아버지는 전력부위(展力副尉) 경운(慶雲)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安東金氏)이다. 큰아버지인 고성군수 흥운(興雲)에게 입양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는 피난 중에서도 입양모 박씨(朴氏)를 극진히 봉양하였다.
1605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의 학유(學諭) 및 박사가 되었다.
이때 동인으로 북인에 가담하지 않아 연서찰방(延曙察訪)으로 좌천된 뒤 곧 관직에서 물러났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성균관전적·형조좌랑·형조정랑·충청도도사·예안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공조정랑·성균관사예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관직을 그만두었다.
1645년(인조 23) 왕이 80세가 넘은 신하들에게 가자하매, 81세로 통정대부에 오르고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이 되었다. 상주 효곡서원(孝谷書院)에 제향되었다.
* 검간 선생에 대한 만사(挽趙黔澗安仲 靖○丙子(1636) )
一生才望夐超儕。時命如何苦不齊。霜鶚會從霄漢擧。祥鸞旋向棘林棲。
江湖有約行藏決。歲月無情宰樹迷。病未知時歸未訣。哀辭那忍挽毫題。
* 검간 선생에 대한 제문(祭趙黔澗文)
薑桂之性。竹箭之材。稟質强矯。守正不回。尙論古人。如凂俗流。餘事文章。切逼曹劉。侍車元方。入洛陸機。香聞遠播。祥蘭瑞芝。中間蹭蹬。荊璞稱寃。材貴晩成。命不終屯。纔拈蓮榜。遂登桂籍。驊騮啓足。鵰鶚振翮。縱步雲程。靑紫可拾。酸醎異好。鑿枘不合。一麾出守。三換竹符。斂此大手。施于一區。廣漢潁川。羣豪膽落。仁軌濟川。盃水餞別。入長太常。位躋三命。奉公以誠。處事以敬。世道乖心。林泉入夢。南山弊廬。老退是勇。黃鵠凌雲。白駒在谷。安富尊榮。穩享淸福。鄕邦無祿。南極遽晦。慟纏黎庶。淚徹靑佩。伊余無似。追隨妙齡。襟期照澈。如犀通靈。圖書講究。若響斯應。南院遞幹。西林共訂。中因遊宦。良晤久闊。鏗然瓊佩。繹焉簡牘。歲晏幽期。丘園舊躅。公遽捨我。此計虛擲。人世隻影。曙天殘星。綴此苦辭。一觴椒▼(酉+靈)。
* 검간선생의 행적(黔澗趙公行蹟)
趙公諱靖字安仲。系出豐壤。公穎拔夙成。自幼有過人資質。甫弱冠。律己以禮。持論以正。處事之審。接物之謹。恢然有古人形貌。遠近聳慕。以得被容接爲幸焉。事親則務在色養。凡所以承顔順旨者。無不極其方。處兄弟得其懽心。待族黨盡其恩意。盖天性然也。接朋友則必以誠信。笑語款洽。而尤致力於濟竆恤患。憫惻調護。多人所難能。見人有小善寸長。則心誠嘉賞。延譽稱道。惟恐其不聞於人。或有過失者。必正色䂓責。其好善之誠。偲切之益。咸盡其道者如此。爲詩章高古簡潔。雖古之瓊琚玉佩之文。不足多讓。一家才名。有連璧之盛。而至論格局則元方宜爲兄也。以風儀倡一鄕。凡論議之大段者。大槩多出於公之指揮。牧守之來。或有疵政。則必爲之請見。具陳利害而極言之。辭直義正。有足敬憚人者。爲守者不能不屈意從之。晩年喜讀朱子書。誦詠不輟。雖未嘗聞於人。而其平生志意之所存。從可知矣。家計甚饒。喫着不盡。而奉身儉素。蕭然若寒士。以薦授禧陵官。再轉爲廣興倉奉事。錢穀出入之汗漫。文簿朱墨之塡委。人多爲胥吏所眩弄。偸耗相仍。公固扃鐍謹監視。精察明審。吏不敢欺。國儲之裕。祿俸之剩。物論稱之。癸卯中蓮榜。乙巳登桂籍。時論以公聞望夙著。欲處以侍從經幄之任。爲不快者所尼。竟不果。蓋公風標耿介。志氣剛果。任眞秉直。不爲俯仰於世。凡事有合於心而不違於理。則斷然直行。不以人言而有所前卻。不以禍福而有所撓改。故雖爲人所貴。而亦爲人所忌。以此不得袞袞於臺閣之上。未免棲棲於郡縣之間。識者爲朝廷惜焉。且其方言直氣。咸稱有諍臣風。使其得列於論思之班輔導之任。則其所建白匡正之效。豈曰淺淺乎。而時之不遇。鬱而不伸。豈非命耶。佐幕湖西。風裁自持。憚壓守宰。爲上使所敬重。歷典數邑。未嘗以疎外自懈。職所當爲。必盡心力。簡以持己。嚴以御吏。仁以撫民。刑政俱擧。恩威幷行。號令一出。人不敢違。至於詢訪弊瘼。興利除害。恤鰥寡澤顚連。汲汲然惟日不足。而凡爲政。要爲久遠之圖。不以小惠悅人。是故在官無過情之聲聞。而及去多截鐙之遺愛。逮拜金堤。以邑多豪右。下戶受病。乃畫便民之策。使賦役均平。强弱如一。而果爲巨室者所謗。多爲干紀之事以,驚動之。公待之以法。不小假貸。爲政不撓。坦然如平日。奸猾漸熄。民賴以穌。入爲太常正。正爲一寺之長。例以寺事委諸色官而不數臨視。及公爲之。憤痼弊之謬。以爲本司國家祭享所寄。豈可聽下僚之專管。任胥輩之偸竊而莫之恤乎。乃間日坐仕。撿看庶務。其不憚勤勞。盡心職事。類如此。在正準朔則例有陞拜之䂓。而公辭老勇退。脫去名韁。棲遲山水。惟意所適。子孫滿前。年逾八耋。佳賓美酒。足以樂仲長統之志。以畢餘年。斯其善人也。而亦非福人耶。嗚呼休哉。
0 이광윤(李光胤) 1564년(명종 19) 청주(淸州)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극휴(克休), 호는 양서(讓西).
진사 잠(潛)의 아들이다.
3세에 이미 글자를 배우고 8, 9세에 문장을 지었으며 초서를 잘 썼다.
1585년(선조 18)에 진사가 되고, 159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601년(선조 34) 강원도도사가 되고. 1602년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교리·수찬 등을 역임하고, 1607년 서천군수. 부제학을 지냈다.
도승지에 추증되고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다.
* 취중에 이극후에게 시를 지어주다(醉贈李都事克休 二首)
1601년(선조 34) 검간 선생이 광흥창 부봉사로 재임중 이광윤이 강원도도사로 나가자
전별하며 지어준 시
自恨平生多病痛。送君今日㝡關思。仙山從古多靈藥。倘借蔘苓得一醫。
聞說金剛自少年。秖今雙鬢雪飄然。從君細聽遊仙語。似躡瑤臺水石邊。
* 서장관으로 떠나는 이극휴에게 주다(贈李克休以書狀赴京 癸卯 1603)
男兒本有四方期。況此明時志願施。禮樂正應饒北學。詩書元自賁東陲。
嘉猷敬賀千秋鏡。遐算欣瞻八彩眉。專對歸來宣聖化。奔鯨帖海石停移。時有石移之妖故云
0 손린(孫遴) 1566년(명종 21)∼1628년(인조 6).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계진(季進), 호는 문탄(聞灘).
조부는 세경(世經). 아버지는 덕운(德雲).
동강 김우옹(金宇顒)과 한강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600년(선조 33) 향시에 합격한 뒤 1606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11년(광해군 3) 회재 이언적(李彦迪)과 퇴계 이황(李滉)의 문묘종사론(文廟從祀論)이 일어나 정인홍(鄭仁弘)이 이를 논척하자, 종질인 모당 손처눌(處訥)과 함께 부정척사문(扶正斥邪文)을 만들어 이를 비판하였다. 이 때문에 정인홍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오랫동안 벼슬길이 막히었다.
1615년 안동교수(安東敎授)가 되고, 1618년 예문관봉교를 거쳐 1623년 인조반정 뒤 예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 병조좌랑, 단성현감을 지냈는데 자못 치적이 있다는 평을 들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우복 정경세(鄭經世)에 의하여 추천되어 의병장이 되었고, 난후 향리로 돌아가 벼슬하지 않았다. 정경세가 여러 차례 서신을 보내어 벼슬길에 나갈 것을 권하였지만 끝내 따르지 않고 여헌 장현광(張顯光)등과 교유하며 지냈다.
그의 문집에 실려 있는 시는 강직한 성품을 잘 나타내주고 있으며 걸작으로 칭송받았다. 대구의 봉암사(鳳巖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문탄집》이 있다.
*與孫季進
一別十載。信息亦阻。區區懸遡。豈有涯極。千萬意表。忽奉手滋。就審炎熱。尊字履支勝。慰豁且感。靖。衰病日甚。加以家內喪憂層疊。長在摧咽中。奈何奈何。每念尊兄剛褊。無異於鄙生。屢聞以賦役均施不暇寬貸之故。見過於土豪。咨謗騰播。心切奉慮。僕之在湖邑。未免此厄。常爲狼狽矣。幸賴知舊之力。前春遞還。私切感幸。丹之爲邑。素稱凋弊。遠想尊兄酬應號令之際。必多憂惱之苦。奉慮不已。切仰寬猛隨便。不失下情。如何如何。
*答孫提督 1615(광해군 7) 주)손린이 안동교수(安東敎授)로 있을 때 보낸 편지
得奉手滋。曾是不意。慰沃之餘。感拜千萬。夏末辱復。亦已奉悉。但今承懇辭。以必遞爲期。廣文寒局。有何煩劇蒸熱之苦。而强避至此。吾儕今日。非此它無著足地。萬乞速枉。兼與知舊從容敍懷。亦不易得之一樂也。如何。泗水安否。一未承聞。不任憂鬱之至。
0 김녕(金寧) 1567년(선조 즉위)∼1650년(효종 1). 선산(善山)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여지(汝知), 호는 돈봉(遯峯).
아버지는 습독관 숭렬(崇烈)이다.
한강 정구(鄭逑)에게서 《근사록》과 《태극도설》을 수업하였고,
여헌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기도 하다.
1610년(광해군 2)에 진사가 되었고, 1612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나 이듬해 인목대비를 폐하자는 논의가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23년 인조반정 뒤 임실현감으로 등용되었으나 같은해 파직되었다가 다시 전적·사예· 예안현감을 역임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 국왕이 남한산성에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71세의 고령으로 의병을 규합하여 이끌고 가다가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말을 듣고 돌아왔다.
1611년 이후 정인홍(鄭仁弘) 계열과 일반 사람들 사이에 학통을 둘러싸고 논전이 벌어지자 스승 정구를 변호하는 명문의 〈한강선생변무소 寒岡先生辨誣疏〉를 올렸다.
성품이 청렴하고 가진 재물이 없어 습격한 도둑들을 감동시켰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황(李滉)을 추모한 도학자로서, 문집으로 《돈봉집》이 전한다.
* 검간선생에 대한 만사(輓趙黔澗 靖○丙子)
托契于今四十年。纔承淸誨每欣然。森森簪笏華堂滿。濟濟芝蘭彩帳連。
直節稜稜驚俗累。高標落落脫塵緣。哀詞題處那堪痛。遙向西風泣九原。
0 조즙(趙濈) 1568년(선조 1)∼미상.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덕화(德和), 호는 화천(花川).
증조부는 첨정 종돈(宗墩), 조부는 정권(廷權). 아버지는 수원(守元).
외조부는 김수종(金壽宗). 처부는 박문충(朴文冲)
1591년(선조 24)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6년에 주서가 되고, 이듬해 사서를 거쳐 1600년 정언이 되었다. 이어 1604년 부수찬을 거쳐 이듬해 전적이 되고, 1611년(광해군 3)에 장령을 역임하였다.
그 뒤 1617년에 영해부사가 되었다.
1623년(인조 1)에 행호군을 거쳐 이듬해 동부승지가 되었고, 《명종실록》의 개수·편찬 때 부교리로서 참여하였다.
한편, 1622년에 등극사(登極使)로 임명되었을 때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고 비난을 받았으나, 인조가 등극한 해에는 사은사 겸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문장이 뛰어났다.
*聞順天報捷。次趙得和 濈 韻識喜。戊戌(1598)
南邊知道息狼煙。捷報中宵夢破圓。從此東人應奠枕。大明天子萬千年。
*送趙得和通判完山 戊申○正月。偕棐仲送別於州西溪邊。吟一絶以贐。
1608(선조 41) 전라도사 조즙을 강가에서 동생 가규선생과 함께 서쪽 강가에서 전송하다
전 해에 동생 가규공이 유배가 풀려 고향으로 돌아왔다. (달수)
草草西汀惜解擕。東風料峭寒猶緊。浮生聚散本無常。月是襟期詩是贐。
0 권흔(權昕) 1568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절(叔節).
조부는 이(頤). 아버지는 화(和). 외조부는 윤건(尹健)
선조(宣祖) 35년 (1602) 임인(壬寅) 알성시(謁聖試) 을과(乙科) 1위로 급제.
승정원 주서. 설서. 예조좌랑. 병조좌랑. 문화현령. 수찬. 의정부 사인 역임
*挽權舍人叔節 권흔에 대한 만사
間氣應非偶。明庭早見揚。風流傾玉筍。操履薄氷霜。
志在君爲舜。心慚世不唐。何言天奪速。泉壤遽沈璜。
0 김지복(金知復) 1568년(선조 1)∼1635년(인조 13).
본관은 영동(永同). 자는 무회(旡悔) 또는 수초(守初), 호는 우연(愚淵).
아버지는 군자감정 각(覺)이며, 어머니는 상산김씨로 사성(司成) 충(沖)의 딸이다.
서애 류성룡(柳成龍)을 사사하였으며, 창석 이준(李埈)· 우복 정경세(鄭經世) 등과 학문적인 교유가 있었다.
1612년(광해군 4) 사마시에 합격,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이무렵 광해군의 난정으로 권세를 잡은 간신 이이첨(李爾瞻)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관철되지 않자, 은둔할 생각으로 고향에 돌아갔다.
그 뒤 이준· 정경세를 비롯하여 조찬한(趙纘韓)· 강응철(康應哲) 등 당시에 뜻있는 선비들과 서로 수창(酬唱)하며 때를 기다리다가, 1623년 인조반정 후 경안찰방에 임명되었다. 그 이듬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합격, 성균관학유가 되고, 1625년(인조 3) 전적을 거쳐 형조좌랑이 되었다.
그 뒤 병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병조정랑 겸 춘추관기주관·사복시첨정·시강원문학·사헌부장령·부호군·영천군수 등을 역임하고, 1635년 성균관사예에 임명된 뒤 죽었다.
저서로는 《우연문집》 2권 1책이 있다.
검간집에 있는 아래 시에 보면 검간선생이 김지복의 아버지 김각을 모시고 상주 용궁 두 읍의 선비 40여 명과 낙동강에서 시회를 가졌다
*竺山金使君 覺 邀商龍兩邑人作會溪上。射帿爲樂。同席者李都事叔平,閔典籍士新等四十餘員也。次叔平韻。二首
창석집
*自道南同趙安仲金无悔曹汝善金時直泛洛而下。至伴鷗亭。
반구정에서 검간선생, 창석선생, 김지복(金知復), 조희인(曹希仁: 조우인의 동생)
과 뱃놀이를 하다
0 노경임(盧景任) 1569년(선조 2)∼1620년(광해군 12).
본관은 안강(安康). 자는 홍중(弘仲), 호는 경암(敬菴).
아버지는 진사 수함(守諴)이며, 어머니는 인동장씨(仁同張氏)로 이조판서 열(烈)의 딸이다. 겸암 류운룡의 사위이다.
외삼촌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과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1년(선조 2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을 거쳐 홍문관정자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에 돌아와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에 대항하였다.
1594년 사헌부지평이 되었고, 그뒤 예조좌랑·강원도순안어사(江原道巡按御使)가 되어 삼척부사 홍인걸(洪仁傑)의 비행을 적발, 보고하였다.
그 뒤 다시 지평을 거쳐 예조정랑이 되었고,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이 되어 삼남지방(三南地方)을 순찰하면서 임기응변으로 일을 잘 처리하여 그의 신임을 얻었으며, 1597년 이원익의 지시를 받고 올린 전쟁상황의 상세한 보고로 선조의 신임을 얻어 교리로 임명되었다.
1598년 사간원헌납·종부시전적(宗簿寺典籍)에 제수되었지만 부임하지 않다가 그 뒤 영해부사(寧海府事)·성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에 앞서 스승 장현광의 심부름으로 정인홍(鄭仁弘)을 만나보고 돌아와 대단히 간사한 인물이라고 말했던 일이 뒷날 정인홍에게 알려져서 무고한 탄핵을 받고 성주목사에서 파직되었다.
그 뒤 낙동 강변에 은거하고 여생을 보내다가 선산(善山)에서 졸하였다.
승정원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경암집》 7권이 있다.
*挽盧校理弘仲 景任○二首 노경임에 대한 검간선생 만사
烏山洛水孕才良。早擢嵬科遂立揚。正色三朝供獻替。推恩諸邑保流亡。
幽居爲卜林泉勝。怪說翻騰土木祥。奉缺晨昏脩夜閉。萱闈鶴髮有誰將。
風塵傾蓋托襟期。偏愛氷肝不受緇。地夐縱違時月見。情深每切樹雲思。
衰遲我合江湖散。晉接君宜禁闥隨。豈意晨星今落落。窮途遽哭哲人萎。
0 이윤우(李潤雨) 1569년(선조 2)∼1634년(인조 12).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무백(茂伯), 호는 석담(石潭). 성주 출신.
고려의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집(集)의 후손으로, 희복(熙復)의 아들이다.
처음에는 율곡 이이(李珥)로부터 수학하였으나 그 사후에 한강 정구(鄭逑)의 문인이 되었다.
1591년(선조 24) 진사가 되고 1606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을 거쳐 광해군 즉위초 승정원주서를 지냈다.
1610년(광해군 2) 예문관검열로서 시강원설서를 겸임하고, 이어 사관으로서 정인홍(鄭仁弘)의 비위사실을 직서하였다가 탄핵을 받아 사퇴하였다.
그뒤 예문관의 대교·봉교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다가 수성도찰방(輸城道察訪)을 지냈고 대북의 전횡이 심하여지자 사직하였다.
1623년의 인조반정 후 예조정랑·사간원정언·홍문관수찬·교리를 거쳤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초유어사(招諭御史)로 특배(特拜)되었고, 이어 예문관응교·사간·성균관사성을 역임하고 1631년 공조참의에 이르렀다.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칠곡 사양서원(泗陽書院)과 성주 회연서원(檜淵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석담집》이 있다.
석담집
贐章[趙靖] 석담 이윤우를 전별하며 쓴 검간선생 시.(검간집에는 미수록)
膺選還當重外辰。潭鄕雖舊命惟新。昏門自絶懷金吏。委巷寧容佩犢民。
化洽布韋倫就正。惠咸鱞寡俗回淳。却憐朽質分携遽。踽踽無緣更接隣。黔澗趙靖
* 與趙黔澗 靖,李蒼石,金東溟 世濂。同遊分韻。二首
검간선생, 창석 이준, 동명 김세렴, 석담 이윤우가 같이 유람하며 시를 짓다.
簪笏欺人世味酸。偶然今日拂塵鞍。千年華表尋遼鶴。兩字陰厓憶漢官。
萬里雲霞來几案。一帆烟雨滿衣冠。忽思南國新篁長。倘及秋風斬釣竿。
雨餘殘照下江干。六月蘋風滿渚寒。渡口布帆來極浦。海門烟浪遶僊壇。
一村桑柘依俙見。十里雲山杳藹看。局促塵埃頭似雪。歸心日夜大行盤。
0 정장(鄭樟) 1569년(선조 2)∼1614년(광해군 6).
본관은 청주(淸州). 호는 사곡(沙谷) 또는 만오(晩悟).
개국공신 총(摠)의 7세손으로, 한강(寒岡) 구(逑)의 아들이며, 백곡 곤수(崑壽)의 조카이다. 중부 곤수가 종계변무(宗系辨誣)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한 공으로 선조로부터 자제 중에서 관직에 제수할 사람을 추천하도록 특명을 받자, 자신의 아들을 제쳐두고 장을 추천하여 빙고별제(氷庫別提)가 되었다.
이어 사섬시직장(司贍寺直長)·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감찰·연기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612년(광해군 4)에 신녕현감으로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1614년에는 성균관전적이 되었다가 충청도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예조좌랑에 임명되었다. 이어 전라도도사 겸 춘추관기주관이 되었으나 임기도 못 채우고 병을 이유로 사직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죽었다.
*在京。次鄭燕岐 樟 韻。辛丑
1601(선조 34) 광흥창에 재임 중 한강 선생의 아들 정장에게 시를 지어주다.
衷情都許鄭兄知。歲暮行藏與子期。名利倘來眞一夢。莫嫌浮世謾多譏。
0 정온(鄭蘊) 1569년(선조 2)∼1641년(인조 19).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고고자(鼓鼓子).
진사 유명(惟明)의 아들이다.
1601년(선조 39)에 진사가 되고, 1610년(광해군 2)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시강원겸설서·사간원정언을 역임하였다. 임해군옥사에 대해서 전은설(全恩說)을 주장하였고, 영창대군이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서 피살되자 격렬한 상소를 올려 정항의 처벌과 당시 일어나고 있던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이에 광해군은 격분하여 이원익(李元翼)·심희수(沈喜壽)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문할 것을 명하고 이어서 제주도에 위리안치하도록 하였다.
그뒤 인조반정 때까지 10년 동안 유배지에서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중국 옛 성현들의 명언을 모은 《덕변록 德辨錄》을 지어 이것으로 자신을 반성하였다. 인조반정 후 광해군 때 절의를 지킨 인물로 지목되어 사간·이조참의·대사간·부제학·이조참판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였다.
특히, 언관에 있으면서 반정공신들의 비리와 병권장악을 공격하였고, 폐세자(廢世子: 광해군의 아들 祗)와 선조의 서자 인성군(仁城君) 공(珙)의 옥사에 대해서 전은설을 주장하여 공신들을 견제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행재소(行在所)로 왕을 호종하였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이조참판으로서 명나라와 조선과의 의리를 내세워 최명길(崔鳴吉) 등의 화의주장을 적극 반대하였다.
강화도가 함락되고 항복이 결정되자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수치를 참을 수 없다고 하며 칼로 자결하였으나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뒤 관직을 단념하고 덕유산에 들어가 조〔粟〕를 심어 생계를 자급하다가 죽었다. 숙종 때 절의를 높이 평가하여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어려서부터 당시 경상우도에서 명성이 자자하던 정인홍(鄭仁弘)을 사사하여 그의 강개한 기질과 학통을 전수받았다.
1607년 정인홍이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의혹을 일으키는 유영경(柳永慶) 등 소북파를 탄핵하다가 처벌을 받자 정인홍을 위하여 변호상소를 올렸다.
광해군 때는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옥사를 두고 비록 의견이 달랐지만 정인홍에 대한 의리는 변하지 않아 인조반정 후 정인홍의 처벌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후 격화된 당쟁 속에서 그와 그의 후손들이 남인으로 처신하였고, 정인홍이 역적으로 심하게 몰리면서 한강 정구(鄭逑)를 사사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의 현실대응자세는 조식(曺植)에서 정인홍으로 이어지는 강개한 기질을 이어받아 매사에 과격한 자세를 견지하였다. 그것은 영창대군옥사 때의 상소나 대청관계에서의 척화론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조선 후기 숭명배청사상이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김상헌(金尙憲)보다 크게 추앙받지 못한 것은 색목(色目)이 노론이 아니었는 데 연유한다.
허목(許穆)·조경(趙絅) 등 기호남인(畿湖南人)과도 깊은 관계를 가져 이황(李滉)―정구―허목으로 이어지는 기호남인학통 수립에도 큰 구실을 하였다.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에 제향되었다. 그의 생가는 중요민속자료 제205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挽詞[鄭蘊] 검간선생에게 올린 만사
公亦商山才府一。剛腸貞操世無知。官卑自有歸譏地。天定終符錫福期。
潤博年高猶勁悍。希元孫衆儘英奇。邇來儒老連乘化。衰蕙如何不歎芝。
0 이시발(李時發) 1569년(선조 2)∼1626년(인조 4).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양구(養久), 호는 벽오(碧梧) 또는 후영어은(後潁漁隱).
아버지는 진사 대건(大建)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安東金氏)로 도(燾)의 딸이다.
이덕윤(李德胤)의 문인이다.
1589년(선조 2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낙상지(駱尙志)가 인솔하는 명나라 군대가 경주에 주둔하여 있을 때 접반관(接伴官)으로 임명되었고, 도체찰사(都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1594년 병조좌랑에 재직중 명나라 유격장(遊擊將) 진운홍(陳雲鴻)을 따라 적장 고니시(小西行長)의 군영을 방문하여 정탐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이듬해 병조정랑으로 승진하여 순무어사(巡撫御史)를 겸임하였다.
1596년 이몽학(李夢鶴)이 홍산(鴻山: 지금의 부여)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그를 토벌하는 데 전공을 세워 난이 평정된 뒤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승진하였다. 그해 겨울 찬획사(贊劃使)로 임명되어 충주의 덕주산성(德周山城)을 쌓고, 또 조령에 방책(防栅)을 설치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분조(分朝)의 호조참의가 되어 명나라 원병의 군량미보급을 관장하였다.
1602년 경상도관찰사로 임명되어 4년간 선정을 베풀었으며, 1604년 형조참판을 지내고, 이듬해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포루(砲樓)와 성곽을 수축하고 그해 가을에 예조와 병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였다가 양사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였으며, 1619년(광해군 11) 광해군의 특명으로 오도참획사로 임명되어 다음해 평안도에 가서 민폐를 크게 고치고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군량을 충족하게 하였다.
이때 고향의 친척인 옥강만호(玉江萬戶) 변일(邊溢)이 청병(淸兵)의 침입을 막지 않고 성을 버리고 도망함으로써 사형에 처한 사건이 있었는데, 광해군이 크게 노하여 그 책임을 그에게 묻자 신병을 칭탁하고 사직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한성부판윤에 등용되었고, 이어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 체찰부사(體察副使)로 난의 수습에 공을 세웠다.
그뒤 삼남도검찰사(三南道檢察使)가 되어 남한산성의 역사(役事)를 감독하였다.
저서로 《주변록 籌邊錄》·《벽오유교》가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鳥嶺山城。贈贊畫使李養久。時發○三首○丁酉
1597년(선조 30) 이시발이 찬획사가 되어 충주의 덕주산성을 쌓고 조령에 방책을
설치할 때 만나 지어준 시.
寇至無長策。吳薪亦枉陳。纔迴蜀道駕。復議奉天巡。
縱有金湯險。誰爲社稷臣。刳肝竟無補。心膽自輪囷。陳疏乞親征不報。故末句及之。
雅望歸山甫。恩綸擢筍班。藏胸森萬甲。唾手整三韓。
西塞曾開霧。東溟竚息瀾。還知雪山重。旌節暎南關。
風塵行役苦。宇宙此身微。信玉從三刖。辭金報四知。
澗松驚晩翠。簾月伴孤輝。偶忝靑油話。煩襟得細披。
0 심집(沈諿) 1569년(선조 2)∼1644년(인조 22).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자순(子順), 호는 남애(南崖).
아버지는 목사(牧使) 우정(友正)이다.
1596년(선조 2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고 수원판관이 되었는데 당시 간관이었던 정홍익(鄭弘翼)과 함께 무고를 받은 성혼(成渾)을 변론하다가 옹진현령으로 좌천되었다.
1605년 전적·예조정랑·정언 겸 문학 등을 두루 거쳐 1607년에는 죽산부사(竹山府使)로 나아갔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장령으로 직언을 하다가 다시 면직되었다. 은계찰방(銀溪察訪)·해운판관(海運判官)을 거쳐 고령현감이 되었으나, 정인홍(鄭仁弘)의 당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을 비방한 데 반발하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아 다시 면직되었다.
1614년(광해군 6) 양호염철조도사(兩湖鹽鐵調度使)로 나갔다가 사예·검상·사인·보덕 등을 역임하고, 폐모론이 일어나자 한때 관직에서 물러났다. 인조반정 후 병조참지가 되고, 왕의 신임을 얻어 도승지·안변부사, 형조·공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636년에는 형조판서로서 남한산성에 왕을 호종(扈從)하였다.
이때 화친의 조건이 되는 볼모로서 왕족인 능봉군(綾峯君)이 왕의 동생으로, 판서인 그가 대신으로 가장하여 회담에 참가하였으나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듬해 이로 인하여 유백증(兪伯曾) 등의 탄핵을 받아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으나 1638년에 용서받아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그러나 1644년 아들 동구(東龜)가 심기원(沈器遠)의 모반사건에 연좌되어 유배되자 지병이 악화되어 죽었다. 뒤에 아들로 말미암아 직첩(職牒)을 환수당하였으나 숙종 때 신원되었다.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次沈子順留別韻
同是天涯憶故園。一樽相屬兩銷魂。香傳小樹梅經臘。影轉虛簷月暎村。
聚散無期眞可惜。升沈有數不須論。惟將共保桑楡境。時托雙魚寄好言。
0 정영후(鄭榮後) 1569(선조 2)~1641(인조 19)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인보(仁輔), 初名은 영국(榮國)이었으나 후에 榮後로 改名하였다. 아버지는 정식(鄭湜)이고, 어머니 安東權氏는 정제세(權濟世)의 딸이다.
아버지가 13살 때 죽었기 때문에 어머니 안동권씨의 엄격한 교육 아래 성장하였다. 구암(懼庵) 우복룡(禹伏龍)이 고을의 영재들을 모아 가르칠 때 함께 참여하여 수학하였고, 이후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임진왜란 당시 老母를 모시고 피난하였다가 倭兵에게 붙잡혔는데 노모를 걱정하는 효심이 賊將을 감동시켜 무사하였다. 동생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과 우애가 돈독하였다. 司宰監 參奉에 천거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挽詞 [鄭榮後] 정영후가 검간 선생께 올린 만사
五福今誰享。三尊古絶倫。而公能綽綽。於藝又彬彬。妙齒呑文石。長途轉法輪。
虞郊來彩翮。羲野出祥麟。靑海揚風采。明庭貢席珍。儀閒凝袞冕。色正動簪紳。
野鹿呦呦士。場駒皎皎賓。雲浮時世變。天道否亨因。聖主飛龍日。孤忠牝馬辰。
松筠節益礪。薑桂性彌辛。汲直雖忱血。馮唐奈鬢銀。翻思籬菊暮。歸趁澗蓴春。
潦藻于湘釜。商芝可谷神。人間遐鶴算。象外等仙眞。聖夢年非已。賢嗟月在申。
靈龜今已喪。聾俗孰還淳。猥以涼涼迹。叨爲瑣瑣姻。膠絃雖或密。誠腆愧如醇。
海鶴成長別。杯蛇苦掣身。生芻躬未奠。情義負朱陳。
0 박수춘(朴壽春) 1572년(선조 5)∼1652년(효종 3).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경로(景老), 호는 국담(菊潭) 또는 숭정처사(崇禎處士).
동몽교관(童蒙敎官) 신(愼)의 아들이다.
가학(家學)을 이어받았으며 《소학》을 항상 애독하였다.
1957년 정유재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싸웠다.
1618년(광해군 10)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문제에 대하여 춘추대의(春秋大義)로써 그 부당성을 지적하는 상소를 지어 올렸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창의(倡義)격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켰으나, 화의(和議)성립의 소식을 듣고 산중에 들어가 숭정처사로 자처하며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다.
또한, 한강 정구(鄭逑)· 여헌 장현광(張顯光) 등과 이기설(理氣說)을 토론하는 등 성리학의 연구에 힘썼다.
1672년(현종 13)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참의에 추증되었고, 1694년(숙종 20) 대구의 남강서원(南岡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국담박선생문집》·《독서지남 讀書指南》·《학문유해 學問類解》·《도통연원록 道統淵源錄》·《동방학문연원록 東方學問淵源錄》·《의례견문해 疑禮見問解》 등이 있다.
*題菊潭軒序 黔澗趙靖 검간선생이 지은 국담헌 서문
主公卜居。取勁節於隱逸。開三徑。景虗凈於寶鑑。鑿半畒。結廬臨池。乃合而顔其堂曰菊潭。主公襟懷。未易窺也。夕餐秋後之落英。芊原高調。日玩源頭之濶水。紫陽幽趣。明窓靜几。左右圖書。小塢方塘。逍遙吟詠。寓意乎栗里田園。托興於濂溪風月。噫主公古之元亮歟。今之茂叔歟。
0 이의활(李宜活) 1573년(선조 6)∼1627년(인조 5).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호연(浩然), 호는 설천(雪川). 경주 출생.
회재 언적(彦迪)의 손자로, 판관에 추증된 응인(應仁)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옥산장씨(玉山張氏)로 세마(洗馬) 응기(應機)의 딸이다.
1610년(광해군 2)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고, 2년 뒤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호조좌랑을 거쳐 감찰이 되었다가 고령현감을 역임하였다.
1618년 증광시에 급제하여 전적을 지내고 함경도사로 나갔다.
1620년 이이첨(李爾瞻) 등이 전횡을 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623년(인조 1) 반정이 성립되어 흥해군수에 발탁되었는데, 지나간 폐정을 바로잡고 백성을 진휼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며 탐관오리의 부정을 근절하였다.
1627년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주야로 집무하다가 병을 얻어 군청에서 순직하였다. 저서로는 《설천문집》 4권이 있다.
*挽李興海 宜活 설천 이의활에 대한 검간선생 만사
晩忝忘年契。欽君挺禮門。慈良春茁物。簡潔玉含溫。擢第光生戶。分符頌溢村。
孤忠思替否。輿望屬亨屯。豈意同朝款。翻成隔世冤。遙知環海境。思惠哭聲呑。
0 박회무(朴檜茂) 1575년(선조 8)∼1666년(현종 7).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중식(仲植), 호는 육우당(六友堂)·숭정야로(崇禎野老).
조부는 목사 소고 승임(承任). 아버지는 도사 취수옹(醉睡翁) 녹(漉).
한강 정구(鄭逑)· 우복 정경세(鄭經世)의 문인으로 어려서부터 중후한 성품을 지녀 노성인(老成人)의 기품을 지녔으며, 1606년(선조 39)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서 왕이 강화도로 몽진하자 의금부도사로 왕을 호종하였다. 소를 올려 화의를 배척하며 자강(自强)을 도모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636년(인조 14)에 또 소를 올려 시정(時政)과 서북관방의 허술함을 논하고 선정양병(選丁養兵)의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해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출정하였으나 이미 화의가 성립되어, 통곡하며 되돌아와 두문불출하고 소나무·전나무·매화·대나무·연·국화를 심고 애완하며 여생을 마쳤는데, 육우(六友)라는 호는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영천의 산천서원(山泉書院)에 제향되었다.
*挽詞[朴檜茂] 소고 박승임의 손자 박회무가 검간선생께 올린 만사
憶從鵷鷺忝追隨。幷轡江都扈聖時。人事百年如過鳥。林泉十載老蓍龜。
驚聞南極星光晦。咸惜商顔哲士萎。布帛之文菽粟味。世間爭頌口成碑。
0 목대흠(睦大欽) 1575년(선조 8)∼1638년(인조 16).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탕경(湯卿), 호는 다산(茶山) 또는 죽오(竹塢).
이조참판 첨(詹)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증병조판서 정건(鄭謇)의 딸이다.
1601년(선조 34) 진사가 되고, 1605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07년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어 부응교(副應敎)·집의(執義)를 거쳐, 1612년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지내고 공조참의·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종군하여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632년 예조참의가 되고 이듬해 강릉부사가 되었는데, 민심을 얻어 나중에 유애비(遺愛碑)가 세워졌다. 천성이 고결하고 시문에 뛰어났다.
저서로는 《다산집 茶山集》이 있다.
*贈睦湯卿 大欽○二首 검간선생이 목대흠에게 준 시
이 시는 1604(선조 37)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시의 내용에 창석 이준이 연경에 갔다고 하니 창석 선생은 이해에 世子冊封奏請使 월사 이정구의 서장관이 되어 연경에 갔다.
一別瓊標歲月深。忽看霜雪點朝簪。良緣非賴高天畀。佳客誰敎遠地臨。
大嶺衝飈含朔氣。嚴程殘角訴離心。仍思石友 蒼石 燕關路。錦槖應饒對月吟。
關山矗矗海雲深。佳會何時更盍簪。芝札忽驚中夜至。柴門仍憶上賓臨。
迢迢遠地迷孤夢。耿耿寒燈照兩心。路入衡陽應有雁。莫辭頻寄短長吟。
0 임숙영(任叔英) 1576년(선조 9)∼1623년(인조 1).
본관은 풍천(豊川). 초명은 상(湘). 자는 무숙(茂淑), 호는 소암(疎庵).
감역 기(奇)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지었고 기억력이 뛰어났다 한다.
1601년(선조 34)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10년 동안 수학, 논의가 과감하였으며 전후 유소(儒疏)가 그의 손에서 나왔다.
1611년(광해군 3) 별시문과의 대책(對策)에서 주어진 이외의 제목으로 척족의 횡포와 이이첨(李爾瞻)이 왕의 환심을 살 목적으로 존호를 올리려는 것을 심하게 비난하였다. 이를 시관 심희수(沈喜壽)가 적극 취하여 병과로 급제시켰는데 광해군이 대책문을 보고 크게 노하여 이름을 삭제하도록 하였다. 몇 달간의 삼사의 간쟁과 이항복(李恒福) 등의 주장으로 무마, 다시 급제되었다.
그뒤 승문원정자·박사를 거쳐 주서가 되었다.
1613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무옥이 일어나자 다리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정청(庭請)에 참가하지 않았다. 곧 파직되어 집에서 지내다가 외방으로 쫓겨나 광주(廣州)에서 은둔하였다.
인조반정초에 복직되어 예문관검열과 홍문관정자·박사·부수찬 등을 거쳐 지평에 이르렀다.
고문(古文)에 힘썼으며, 중국 육조(六朝)의 사륙문(四六文)에 뛰어났다. 그가 지은 〈통군정서 統軍亭序〉는 중국학자들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다 한다.
*呈黔澗先生 任叔英 임숙영이 검간선생께 드린 시
十年淹滯屈高才。惟有剛腸不小摧。吏隱江湖空老去。無人解惜棟樑材。
0 오흡(吳潝) 1576(선조 9)∼1641(인조 19)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선원(善源), 호는 용계(龍溪),
아버지는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된 극성(克成)이며, 어머니는 평해황씨(平海黃氏)로 교위(校尉) 승백(勝白)의 딸이다. 간재 이덕홍(李德弘)의 문인이며,
1636년 남한산성에서 치욕을 당한 뒤로 는 세사(世事)와 인연을 끊고 후진교육에 전념하였다.
*與黔澗趙丈 오흡이 검간선생께 보낸 편지
天時已新。人事依舊。向慕之誠。靡日不勤。㐲惟經履體候。循序康衛。潝如干志業。久離教席。安知無不䧟於上蔡鸚鵡之譏耶。大學序云。氣質之稟。或不能齊。新安陳氏云。氣有淸濁。夫二說固難領會。故人有問于退溪先生。先生答曰。一元之氣。分爲陰陽。則其氣固有淸濁之分。陰陽又分爲五行。則其爲氣也。或生或克。或順或逆。或升或降。或往或復。紛紜交盪。顚倒錯綜。淳漓淸濁。有萬不齊。朱夫子曰。質是成這模様子底。如今染絲。其色形則相似。而其染也。有善染者有不善染者。是質各有美惡也。推此究之。則陰陽五行。稟賦於人。而豐嗇各異。故厚稟於火氣者。質多浮揚。厚稟於水氣者。質多流順。厚稟於金氣者。質多剛猛。厚稟於木氣者。質多仁厚。此論如何。若有別義。㪅爲昭示㐲望。
*挽黔澗趙公[靖]
投紱鈴軒返舊林。儒門碩朘重南金。桐鄕遺犢賢侯政。栗里歸鷴處士心。
江右鯫生知有託。雲間仙馭杳難尋。追思先契依如夢。孤露悲懷自不禁。
0 김영조(金榮祖) 1577년(선조 10)∼1648년(인조 26).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효중(孝仲), 호는 망와(忘窩).
산음현감 대현(大賢)의 아들이며, 학봉 김성일(金誠一)의 사위이다.
9형제 중 5명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1601년(선조 34)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612년(광해군 4)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를 거쳐 전적에 승진하였으나, 당시 혼란한 정치를 보고 10여년간 은거생활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복관되어, 정언·지평·부수찬·장령·대사헌·대사성·대사간·부제학·이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여섯 차례나 어사로 나갔다.
1624년에 지평으로 있으면서 대사헌 정엽(鄭曄), 대사간 이현영(李顯英) 등과 함께 인성군(仁城君) 공(珙)이 이괄(李适)의 난에 간여하였다고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1625년에 장령으로 있으면서 목성선(睦性善)의 상소내용이 경망하다 하여 처벌할 것을 주장하고, “인성군 공은 광해군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모할 때 동조하였고, 또 이괄의 난에 내응하여 자식과 신하의 도리를 벗어났으니 처형해야 마땅하다.”고 또다시 주장하였다.
1633년에는 세자책봉을 주청하기 위해 주청사(奏請使) 한인급(韓仁及)과 함께 부사로 중국에 다녀왔으며, 그 공로로 노비 3구와 토지 10결을 하사받았다.
1642년에 이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취재(取才)때 인사 부정이 있었다 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그의 생애를 보면 특별히 모나지 않았고 체구가 작았으며 단정하였다. 영천의 구산정사(龜山精舍)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망와집》이 있다.
*挽趙黔澗 靖 참판 망와 김영조가 검간 선생께 올린 만사
才大成還晩。名高命不謀。潘生拙官序。陶令勇歸休。
八袠光陰疾。三城惠澤流。靑山一抔土。何處掛吳鉤。
0 정영방(鄭榮邦) 1577년(선조 10)∼1650년(효종 1).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경보(慶輔), 호는 석문(石門).
조부는 진사(進士) 정원충(鄭元忠)이며, 생부는 정식(鄭湜), 양부는 정조(鄭澡)이다.
우복 정경세(鄭經世)의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수학하였다.
1605년(선조 38) 을사(乙巳)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이 즉위하여 실정(失政)을 거듭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진성(眞城)에 은퇴하여 학문으로 일생을 보냈다.
당시(唐詩)에 뛰어났다. 후에 예천군(醴泉郡) 용궁면(龍宮面)의 마산리사(馬山里社)에 제향되었다. 저서로《석문집(石門集)》이 있다.
*輓趙黔澗 靖 정영방이 검간선생께 올린 만사
昭代簪纓族。東韓禮法家。驊騮方展足。世道劇頹波。
紫陌收歸興。靑門學種瓜。精神猶不泯。商嶺鬱嵯峨。
0 전이성(全以性) 1577(선조 10) ~ 1645(인조 23)
본관은 용궁(龍宮). 자는 성지(性之). 호는 운계(雲溪)
아버지는 호조참판에 증직된 행(행)이며, 어머니는 영춘진씨(永春秦氏)로 장령 호(浩)의 딸이다. 한강 정구(鄭逑)와 우복 정경세(鄭經世) 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24년(인조 2)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의병을 일으켰으나 강화가 성립되어 해산하였다. 뒤에 고성과 합천의 군수를 지냈다.
*次棐仲韻。贈全性之 以性 謫扶安。庚戌 1610(광해 2)
歲暮關河行路難。饕風挾雪釀朝寒。知君爲索臨岐語。要把衷情別後看。
*與全性之
年華向闌。遠惟謫裏諸況支勝。荷渠公爲其道伯。爲兄私喜。寧容口喩。凡百安之。惟不輟經學上工夫。是區區故人之祝也。僕。今忝湖西幕府。白首殘生。決非所堪。而揆分未安。近將登道。如果到彼。可得源源相問。而會面却似不易。是可歎。千萬只祝加餐。此中諸舊幷好樣。勿慮也。
*與全性之
序屬炎蒸。未想謫中寢食起居如何。懸慕苦苦。靖。月初八。始到公山。極欲蘇敍。而官守有拘。莫知爲計。斯文不幸。空館至再。交章叫閤。百僚同然。天聽邈邈。又多有未安之批。言之惶憫。奈何奈何。嶺儒月十二。封疏上來云。想時方可到洛也。叔平已於月初。挈家南歸矣。新到意促。草草奉候。
0 조희인(曹希仁) 1578(선조 11)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여선(汝善).
몽신(夢臣)의 아들. 외조부는 신주(申澍). 승지 우인의 동생
인조(仁祖) 5년 (1627)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로 급제하여 권지 성균관 학유로 분관되었고, 인조 11년 병조좌랑을 지내고 인조 15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자 사서 전식과 근왕병을 이르켰다가 화의가 성립되자 돌아왔다. 바로 성균 사예가 제수되고, 12월 배천군수(白川郡守)가 되었다. 인조 21년 병조정랑이 되고, 다음해 합천군수(狹川郡守)로 나갔다. 효종 3년 통례원 상례(相禮)가 되었다.
0 김태(金兌)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설(士說), 호는 구봉(九峰).
서애 문인
*別黔澗之任海南 金兌
1608(선조 41) 9월 검간선생이 해남현감(海南縣監)으로 부임할 때 김태가 지은 전별시
直道難容世。微官不足傷。海南眞萬里。誰謂是吾鄕。
0 신즙(申楫) 1580년(선조 13)∼1639년(인조 17). 상주 출신.
본관은 영해(寧海). 자는 여섭(汝涉), 호는 하음(河陰).
주부 경남(慶男)의 아들. 우복 정경세(鄭經世)의 문인이다.
1606년(선조 3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문한직인 전적을 지냈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 대북정권이 패륜행위를 거듭하자 벼슬을 버리고 명승지를 찾아 유랑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강원도도사로 종군하였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의병장이 되었고,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이르렀다.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강하였다. 성리학을 비롯하여 의약·복서(卜筮)·지리·천문 등에 통달하였으며, 스승 정경세와 학문과 의례에 대하여 많은 문목(問目)과 토론을 하였다. 상례(喪禮)와 복제(服制)에 관한 문목이 《우복집 愚伏集》에 수록되어 있다.
*奉別申汝涉 楫 赴關東蓮幕 丙寅
1626(인조 4) 8월 검간선생이 통례원 상례(相禮)로 재임 중에 신즙이 강원도 도사로
나가자 전별시를 지어주다
久抱同朝款。窮途忝後行。閒忙今異路。離合古難常。
鶴骨筇邊白。鯨波眼底蒼。應知遊覽處。一念到黔鄕
0 유진(柳袗) 1582년(선조 15)∼1635년(인조 13).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계화(季華), 호는 수암(修巖).
아버지는 영의정 서애 성룡(成龍)이다. 충재 권벌의 증손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우복 정경세 문인.
임진왜란 뒤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우고 1610년(광해군 2)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1612년 해서지방에서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이 일어났을 때에 무고를 당하여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616년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뒤 다시 학행으로 천거되어 봉화현감이 되었다. 수령으로 있으면서 전무(田畝)와 부세(賦稅)를 바로잡았다.
이듬해 형조정랑이 되었는데,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원옥(寃獄)을 해결하여 판서 이서(李曙)의 경탄을 샀다.
1627년에 청도군수가 되었다가, 이듬해에 수포장인(收布匠人)에 대한 보고에 허위가 있다 하여 파직당하였다.
1634년 지평으로 있을 때 장령 강학년(姜鶴年)이 당시 서인정권의 정책을 크게 비판하여 심한 논란이 일어났는데, 이때 그를 두둔하여 대간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고관대작을 역임하지는 않았지만 세신(世臣)의 후예답게 깨끗하고 성실하게 생애를 보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안동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수암집》이 전한다.
* 祭柳持平季華 袗 文 수암 류진에 대한 검간선생 제문
嗚呼哀哉。稟性慈良。持心簡潔。經明行篤。聲譽洋溢。屢佩南符。民皆臥轍。一言忤時。三宿猶遲。簞瓢陋巷。聊以樂飢。那意今日。遽至不淑。儒亡師表。於何考德。矧余衰庸。分義俱切。得疾沈綿。身未執紼。代手酹觴。益增摧割。嗚呼哀哉。
0 조우신(趙又新) 1583년(선조 16)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여읍(汝揖), 호는 백담(白潭). 상(相)의 아들이다.
우복 정경세(鄭經世)· 이현영(李顯英)의 문인이다.
1613년(광해군 5) 진사시에 합격하고, 광해군의 폐모론에 반대하여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유희분(柳希奮)의 3적신(賊臣)을 참할 것을 주장하는 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환(仕宦)을 단념하고 향리에 은거하였다.
1644년(인조 22) 학행(學行)으로 천거를 받아 참봉이 되었고, 4년 후에 봉사(奉事)로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정자를 거쳐 학정·전적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백담집》이 있다. 상주의 지강서원(芝岡書院)에 제향되었다.
검간선생 시.
이 시는 1622(광해 12) 7월 16일 낙동강에서 25인이 만나 뱃놀이를 하며 소동파 적벽부의 운으로 지은 시로, 검간선생과 월간 이전. 창석 이준. 사서 전식. 남계 강응철. 검간선생. 수암 류진. 우연 김지복. 송계 김혜. 이희성. 김정헌. 국원 김정수. 현감 이대규(이준 아들). 이희성, 김기, 서곡 이원규(이준 아들), 이문규(이준 아들), 이신규(이전 아들). 우처공, 구산립, 생원 손윤업(字.汝述), 규천 전극항(전식 아들). 진사 전극염(전식 아들). 조광령이 였다.
*壬戌七月旣望。泛舟洛東江。同遊凡二十五人。以赤壁賦從頭分韻。次第占之。得戌字。公與李希聖,李月澗㙉,李蒼石埈,康南溪應哲,金寭金知復,金廷獻,金廷堅,柳修巖袗,趙又新,李大圭,韓克禮,金墍,李元圭,李文圭,李身圭,禹處恭,丘山立,孫胤業,全沙西湜,全克恒,全克恬,趙光靈同遊。
元豐歲壬戌。七月十六日。蘇仙泛赤壁。勝事難更軼。我輩物外人。風流皆第一。
天啓後壬戌。佳會任眞率。相擕至書院。手中橫健筆。江雨屬乍收。峽雲黝如漆。
夜色正沈沈。索然懽意失。少焉月華漏。放舟凌蕩潏。蠲酲膾銀縷。朗詠和觱篥。
絶勝蚕頭會。掩篷眠促膝。浮生能幾何。鬱鬱老蓬蓽。坡翁泛舟秋。其年四十七。
天地寄蜉蝣。人生哀遽疾。況我六十八。長生寧有術。奈何逐名利。役役靡終畢。
壯遊天幸借。舊事今可述。翌日泝龍淵。淸幽探更悉。悠哉赤壁遊。比之誰甲乙。
欲借畫圖傳。安得王摩詰。臨分問後期。十月望日吉。
백담집
*天啓二年壬戌七月旣望。泛舟東江。同遊凡二十五人。以赤壁賦從頭分韻。次第占之。得子字。同遊月澗李㙉,蒼石李埈,沙西全湜,南溪康應哲,黔澗趙靖,修巖柳袗,愚淵金知復,松溪金寭,李希聖,金廷獻,進士金廷堅,縣監李大圭,韓克禮,金墍,鋤谷李元圭,李文圭,李身圭,禹處恭,丘山立,進士孫胤業,翰林全克恒,監役全克恬,趙光靈。
蘓仙泛赤壁。風流曠誰似。壬戌歲更回。蘭舟共君理。蒼壁圍作屛。飛霞散成綺。
沙明水更碧。風景畫圖裏。江神貸淸遊。佳客東南至。文章四五公。皆是玉墀士。
追遊十餘人。磬折陪烏几。牽興不覺暮。曜靈迫蒙汜。東嶺灝氣浮。天公洗眸子。
江聲與月色。足以娛聽視。舟行玉鏡中。微波恬不起。吹簫舞潛蛟。奏琴出遊鯉。
尋幽欲竆源。遇勝輒徙倚。玆遊眞勝事。高躅超前軌。可嘆東坡翁。登仙還自擬。
奈何哀人生。却把蜉蝣比。物理有盈虛。何用浪悲喜。固知䆠謫中。未得眞興耳。
吾儕幸無事。早占湖山美。不解廟堂憂。又免羈愁被。傾盡一盃酒。酒盡更酌水。
兩日同觴咏。一別如弦矢。吟詩記歲月。不羡書蠒紙。
0 여희필(呂姬弼) 1584년(선조 17)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가회(嘉會).
합천군수 감호 여대로(呂大老)의 아들.
광해군(光海君) 5년(1613) 진사시에 합격.
*挽詞[呂姬弼] 검간선생에 올린 여희필(감호 여대로(呂大老)의 아들)의 만사
商顔秀氣毓精神。洛士咸稱嶺有人。早歲文聲金擲地。一生襟韻玉無塵。
位何副德纔三品。壽可徵仁浹八旬。先執卽今零落盡。後生懷舊淚沾巾。
0 김응조(金應祖) 1587년(선조 20)∼1667년(현종 8).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효징(孝徵), 호는 학사(鶴沙) 또는 아헌(啞軒). 안동 출신. 산음현감 대현(大賢)의 아들이다. 학봉 김성일의 손서. 난재 신열도와 동서
17세 때 서애 류성룡(柳成龍)을 사사하였으며, 1613년(광해군 5)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당시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보고 문과응시를 포기하고 여헌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학문연마에 힘썼다.
1623년에 인조가 즉위하자 알성문과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의 형제 9명 중 5명이 문과에 급제했다. 병조정랑·흥덕현감·선산부사 등을 역임하고, 1634년(인조 12)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가 다시 지평·장령·헌납·수찬·교리·부수찬·집의·사간·응교·승지·호군·공조참의·대사간·한성부우윤 등의 관직을 인조·효종·현종 삼대에 걸쳐 역임하였다.
1637년에는 청나라 사신이 빈번히 출입하자 접대비 염출을 위해 삼분모회록법(三分耗會錄法)을 제안하여 이를 시행하게 하고, 그뒤 필요가 없게 되자 1658년(효종 9)에 폐지하게 하였다.
1638년에 장령으로 있으면서 8조를 건의하였는데, 그 중 하나는 ‘명대의(明大義)’로 사대교린의 외교정책을 지지하고 절의를 고집하면서 교린을 가볍게 단절함을 비판하였다.
1651년(효종 2)에는 《대학연의 大學衍義》의 강(講)을 마치고, 근래에 들어 문교(文敎)가 전폐됨을 개탄하고 학문 권장을 건의하였다
.1656년에는 예조참의로 있으면서 수심양성(收心養性)·경천휼민(敬天恤民)·우문흥학(右文興學)할 것을 건의하고, 1659년(현종 즉위)에는 공조참의로 있으면서 임금으로서 행하여야 할 도리를 상소하였다.
1664년에는 금성산성(金城山城)군량미 문제로 예조판서 홍중보(洪重普)와 병조판서 김좌명(金佐明)의 탄핵을 받았으나, 현종은 삼조(三朝)를 시종한 신하로 나이 80세이며, 먼 영남의 집에 있는 점을 고려하여 사면하였다. 문장에 능하였으며, 안동의 물계서원(勿溪書院), 영천의 의산서원(義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학사집》·《사례문답 四禮問答》·《산중록 山中錄》·《변무록 辨誣錄》 등이 있다.
*挽詞[金應祖] 검간 선생에게 올린 학사 김응조의 만사
藹鬱聲華伯仲間。虯光炯炯豹藏斑。向來才望眞翹楚。老去功名只散班。
善慶佇看延苗裔。義風咸服恤孤鰥。南星晦彩餘芳遠。白首吟詩獨一潸。
0 신열도(申悅道) 1589년(선조 22)∼1659년(효종 10).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진보(晋甫), 호는 나재(懶齋).
성은 흘(仡)의 아들, 교리 달도(達道)의 동생.
학봉 김성일의 손서. 우윤 학사 김응조와 동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0여세에 경사(經史)에 통하고 1624년(인조 2)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1627년 정묘호란 때에 인조를 호종하였다.
이듬해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예조정랑·정언을 거쳐 1638년 울진현감을 지내고, 1647년 장령이 되어 민생에 대하여 상소하였고 뒤에 능주목사를 지냈다.
저서로는 《선사지 仙槎志》와 《문소지 聞韶志》가 있다.
*奉別冬至使書狀官申佐郞 悅道 赴京 戊辰
1628(인조 6) 신열도가 동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로 떠날 때 지어준시
신열도는 검간선생의 처 종질서이다
何處祥雲是帝州。風帆遙向海西頭。玉淸路遠聞笙鶴。銀漢槎危犯斗牛。
絶域奇珍歸貢禹。大邦文物屬觀周。龍墀賀罷瞻佳氣。萬歲山高紫翠浮。
0 전극항(全克恒) 1590년(선조 23)∼1636년(인조 14).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덕고(德古)·덕구(德久), 호는 규천(虯川).
대사헌 사서 식(湜)의 아들. 초은(樵隱) 조기원(趙基遠)의 사위. 선생 손서.
우복 정경세(鄭經世)와 창석 이준(李峻) 문인.
1624년(인조 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대교(待敎)를 거쳐 예문관검열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때에는 예조정랑으로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호종하던 중 인조의 명에 따라 다시 한양으로 되돌아가 성을 지키다 전사하였다.
특히, 시에 뛰어났고, 박람강기(博覽强記)하여 선진들로부터 경이와 찬탄을 받았다. 도승지에 추증되고, 1778년(정조 2) 정려되었다.
*黔澗先生壽席有賦 사서 전식의 아들 전극항이 검간선생 수연에서 지은 시
暮年投紱好歸休。南國名區占上游。園竹葉寒侵酒氣。野花枝折替觥籌。
華堂綺席佳辰敞。翠峽仙雲盡日留。欲賦壽詩歌盛事。半酣呼取管城侯。
*輓趙黔澗 전극항이 검간선생께 올린 만사
父友元鄕丈。儂妻更女孫。貧居縻義廩。贅寄忝名門。
接席聞餘論。通家見達尊。繋官違執紼。東望愧英魂。
0 서희조(徐希祚) 1592(선조 25) 상주
본관은 이천(利川). 자는 경승(景承). 서의(徐誼)의 아들.
광해군(光海君) 5년(1613) 진사시에 합격하고,
인조(仁祖) 2년 (1624) 33세로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가 되고
1627년 벽사도 찰방(碧沙道察訪)으로 재임중 졸하였다.
*挽徐察訪希祚 二首○丁卯 1627
검간선생이 지은 서희조에 대한 만사로, 젊은 나이로 죽어 아까워하다
佇聽君消息。書來是訃音。顔回何命短。伯道且冤深。
冷榻啼行雁。空閨斷友琴。幽明俱有憾。天理邈難諶。
又
孺子稱三秀。才良㝡白眉。攀龍趨北闕。管馬向南陲。
遽致沈綿痛。翻爲解遞歸。何言命云短。一疾竟難醫。
0 김세렴(金世濂) 1593년(선조 26)∼1646년(인조 24).
본관은 선산. 자는 도원(道源), 호는 동명(東溟).
아버지는 통천군수 극건(克鍵)이며, 어머니는 양천허씨로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 봉(篈)의 딸이다.
22세에 생원·진사시에 합격, 1616년(광해군 8) 증광문과에서 장원급제하여 예조좌랑이 되었으며, 시강원사서를 겸임하였다. 이어 홍문관수찬·지제교를 거쳐, 1617년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이해 폐모론을 주장하는 자들을 탄핵하다가 곽산으로 유배, 1년 만에 강릉으로 이배(移配)되었다.
1년 뒤 귀양에서 풀려났지만 벼슬은 하지 못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기용되어, 홍문관수찬·사간원헌납·홍문관교리를 거쳐 이듬해 수의어사(繡衣御史)로 충청도를 살폈으며, 사헌부지평·교리·부응교를 역임하였다. 집의로 있을 때 공신 이귀(李貴)가 이조판서로 자천(自薦)하는 방자함을 왕에게 아뢰다가, 왕의 뜻에 거슬려 1634년 현풍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636년 통신사가 일본에 파견될 때 부사로 선발되어 일본을 다녀와 사간이 된 다음 황해도관찰사로 부임했으며, 1638년 동부승지를 거쳐 병조참지와 병조·형조·이조참의,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641년 늙은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외직을 구하여 안변도호부사·황해도관찰사를 지내면서, 《근사》·《소학》·《성리자의 性理字義》·《독서록 讀書錄》 등을 간행하고 향약을 실시하는 등, 도민의 교화에 힘썼다.
1644년 평안도관찰사로 옮겼다가 대사헌으로 조정에 들어가 홍문관제학을 겸임하였고, 바로 도승지를 거쳐 호조판서로 군현방납(郡縣防納)의 폐단을 시정하였다.
만년에는 경서연구에 전력하였고, 문장이 아름다웠으며, 특히 시문에 능하였다. 그를 가리켜 김류(金瑬)는 ‘진학사(眞學士)’로, 정경세(鄭經世)는 ‘당대 제일의 인물’이라고 칭송하였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저서로는 《동명집 東溟集》·《해사록 海槎錄》 등이 있다.
검간선생, 창석 이준선생, 석담 이윤우선생과 김세렴이 같이 유람하였다. (석담집)
*與趙黔澗 靖,李蒼石,金東溟 世濂。同遊分韻。二首
簪笏欺人世味酸。偶然今日拂塵鞍。千年華表尋遼鶴。兩字陰厓憶漢官。
萬里雲霞來几案。一帆烟雨滿衣冠。忽思南國新篁長。倘及秋風斬釣竿。
雨餘殘照下江干。六月蘋風滿渚寒。渡口布帆來極浦。海門烟浪遶僊壇。
一村桑柘依俙見。十里雲山杳藹看。局促塵埃頭似雪。歸心日夜大行盤。
0 이원규(李元圭) 1597년(선조 30)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기거(器擧). 창석 이준(李埈)의 아들.
인조(仁祖) 5년(1627)에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하고,
인조(仁祖) 17년(1639)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
예조좌랑. 전라도사. 성균 사예. 대구부사. 우통례. 예빈시 정을 역임
祭文[後學李元圭] 창석 이준의 아들 이원규가 검간선생께 올린 제문
先生之德義文章。人皆聞而信見而知。豈小子區區之所能形容爲哉。只以情所不能已者而哭吾之私。尙冀先生之靈之監于玆也。嗚呼哀哉。昔我先子之亡。公之春秋已八十餘矣。固非筋力自勉之時。乃能先衆人匍匐。旣哭之慟而侑之以辭。又進諸孤而勉以無死。此固公之細行。而他人不能。而公獨能之。安得不使我小子而感泣悲思耶。謂當朝夕一死。持此而歸報先人。如其頑命幸免。則當更奉杖屨於門下。以遂其區區之志願者實在乎斯。而胡帝之不仁。終不畀公以期頤。而公又繼而亡焉。則哀我小子。何所瞻仰。何處依歸。嗚呼哀哉。墓草再宿兮離離。求先生之典刑兮不可追。思先生兮終不可諼。瞻彼高岡兮綠竹猗猗。
0 조정융(曺挺融) 1598년(선조 31)∼미상.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유첨(維瞻), 호는 호옹(湖翁).
매호(梅湖)·우인(友仁)의 아들이다. 여헌문인 도계(陶溪) 조정생과 재종간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났으며, 사마시를 거쳐 1631년(인조 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내직에서 여러 관직을 거친 다음 사예가 되었다.
그 뒤 외직인 수령으로 나가 네 고을을 역전(歷典)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그가 다스린 고을마다 송덕비가 세워졌다.
문장과 절행이 뛰어났다. 상주의 지강서원(芝岡書院)에 제향되었다.
挽詞[曹挺融] 매호 조우인의 아들 조정융이 검간 선생께 올린 만사
商山奇秀洛江淸。淑氣扶輿稟最精。削玉高文推哲匠。凝霜英論聳營情。
惟尙古人敦實行。不知今世重虛名。人中豈乏孫陽眼。櫪下誰憐逸景鳴。
明時知足辭金闕。帝座徵賢返玉京。生逸死安奚所憾。佩仁行義以爲榮。
文星永閟泉臺裏。凶聞遙傳海驛程。小子零丁依杖屨。法門規範覩分明。
哀窮最軫飢寒甚。戀德那堪感愧幷。官繫末由參執紼。一抔新隴是誰塋。
0 양경사(楊景泗) 1598(선조 31)
본관은 중화(中和). 자는 계원(啓源).
양우형(楊遇亨)의 아들
인조(仁祖) 8년 (1630) 진사시 합격.
祭文 [門人楊景泗] 문인 양경사가 검간선생께 올린 제문
惟先生。稟天地純剛正氣兮。又重之以姱節。堂堂風力之正。宜霜臺柏府兮。奈時世之難合。進旣不得施用兮。退而復修吾初服。讀古書而求其志兮。道旣成而德立。嫉惡如讐而持論嚴簡兮。鄕人咸畏夫君實。昔分憂於道州兮。距弊閈其一舍。憐余之汨沒貧窶兮。引而置諸館下。召季胤使爲之主兮。荷情意之綢繆。解衣衣而推食食兮。朅來承誨連三秋。俄杖屨之離違兮。川原浩其阻脩。二十載逈隔儀形兮。心如結而情莫由。曩再侍於函丈兮。款款語而詩短律。至今遺墨之在篋笥兮。藹餘薰之來襲。乘化歸盡焉小子何托兮。已星霜之換節。漬綿數百里外兮。酒一斟而香一炷。文不盡意而淚有餘哀兮。倘英靈之歆顧。
嶺南同道會題名卷
해제: 인동 장달수
선조 35년(1602) 7월 장악원에서 영남사람으로 당시 내직에 있던 26명이 장악원(掌樂院)에 모여 영남동도회를 하면서 서문을 오봉 이호민이 짓고, 참석자의 관직과 이름. 자. 출신지를 기록하였다. 서천부원군 백곡 정곤수는 병으로 참석하지 못하였으나 첫머리에 기록하였다. 경비는 각자 염출하였다. 참가자 들이 지은 시가
몇 사람의 문집에 보인다.
출신지를 보면 상주 9명. 함창 4명. 군위 3명. 영해 2명. 단성 2명. 안동 1명.
의성 1명. 초계 1명. 예안 1명. 거창 1명. 김산 1명. 고령 1명으로
상주 권 인물이 13명으로 가장 많다.
*題嶺南同道會題名卷幷序 오봉 이호민 찬
我嶺南人宦遊于京者。作同道會于掌樂院新廨。至者二十六人。時萬曆辛丑秋七月也。西川鄭相公以病不克赴。其聞而樂之。則視赴者有加。會已各捐俸。謀所以題名壽跡者。幷錄西川公于首簡。屬余志其事。噫。嶺之士仕于朝者。舊不止此數。而名儒鉅卿茂才者居多。向雖存亡聚散之不常。其存者相愛之情。亦不以聚散而替焉。斯可尙也已。仍係詩以美之。
1.輔國崇祿大夫西川君 鄭崑壽 汝仁 星州. 상주
정곤수(鄭崑壽)1538년(중종 33)∼1602년(선조 35).
본관은 청주(淸州). 초명은 규(逵). 자는 여인(汝仁), 호는 백곡(栢谷)·경음(慶陰)·조은(朝隱). 곤수는 명종의 하사명이다.
아버지는 부사맹 사중(思中)이며, 어머니는 부사과 정희수(鄭希壽)의 딸이다.
큰아버지인 대호군 승문(承門)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문인. 동생은 한강(寒岡) 정구(鄭逑)이다
1567년(선조 즉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72년 천거로 의금부도사되고 경력·전생서직장·주부·장례원사평을 역임하였다.
선조(宣祖) 9년(1576) 장원급제하여 1577년에 공주목사로 승진하였다가 곧 상주목사로 옮겼다. 1581년 파주목사, 1583년 부호군 겸 오위장을 거쳐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때 단종의 능인 영월의 노릉(魯陵)에 사묘(祠廟)를 세우고 위판(位版)을 봉안하였다.
1585년 첨지중추부사·동부승지·우부승지, 1586년 상호군·호조참의·좌부승지·우승지를 역임하고, 1587년에는 여러해 흉년을 겪은 황해도의 관찰사로 특별히 임명되어 진휼사업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1588년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서천군(西川君)에 봉하여졌다.
1589년 도총관을 겸하고 판결사가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충훈부 공신등록을 편찬하고 동지돈령부사 겸 오위장·대사성·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1591년 동지의금부사·대사성·한성부좌윤 등을 거쳐 1592년 병조참판이 되었다가 형조참판으로 옮겼으며, 그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선조를 호종하였다.
대사간이 되어서는 명나라에 원병을 청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청병진주사(請兵陳奏使)로 중국에 파견되었다.
1593년 원병을 얻어온 공로로 숭정대부에 오르고 판돈령부사가 되었다. 이즈음 영위사(迎慰使)·접반사(接伴使)를 맡아 명나라 장수와의 교섭을 담당하였다. 같은해 거듭 보국숭록대부에 오르는 상을 받고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1595년 도총관·예조판서, 1596년 좌찬성을 역임하고, 1597년 판의금부사·도총관 등을 겸하고 사은 겸 변무진주사(謝恩兼辨誣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1년 선조를 호종한 원훈으로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녹훈되었다. 일찍이 수령을 지낼 때는 학문을 진흥시키고 사풍(士風)을 진작시키는 데에 힘썼으며, 임진왜란 당시의 대명외교에 큰 역할을 하였다.
사후 인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1등에 녹훈되었으며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에 추록되었다. 성주의 유계서원(柳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민(忠愍)이었는데 충익(忠翼)으로 바뀌었다.
저서로 《백곡집》이 있다.
2.正憲大夫行同知中樞府事兼弘文館提學同知成均館事 李好閔 孝彦 軍威
이호민(李好閔)1553년(명종 8)∼1634년(인조 12).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효언(孝彦), 호는 오봉(五峯)·남곽(南郭)·수와(睡窩).
증조부는 호조판서 연안군(延安君) 숙기(淑琦). 조부는 수찬 세범(世範).
아버지는 현감 국주(國柱). 외조부는 성균관 직강 박여(朴旅)
1579년(선조 12)에 진사가 되고, 1584년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85년 사관(史官)으로 발탁되고 계속해서 응교·전한을 역임하였으며, 집의·응교를 겸하였다.
1592년 이조좌랑으로 임진왜란을 만나 의주까지 왕을 호종하였다가 요양(遼陽)으로 가서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명나라의 군대를 끌어들이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상호군(上護軍)·행사직(行司直)을 거쳐, 1595년 부제학으로 명나라와의 외교문서를 전담하여 초안하였다.
1596년 참찬관(參贊官)을 거쳐 1599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사은사(謝恩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1년 예조판서로 인성왕후(仁聖王后)의 지문(誌文)을 다시 썼고, 대제학·좌찬성을 지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다.
그 뒤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가 되고,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즉위를 반대하고 적서의 구별 없이 장자를 옹립하여야 된다는 입장론(立長論)을 주장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고부청시승습사(告訃請諡承襲使)로 명나라에 가서 입장론을 내세웠다. 공을 세운데 대하여 포상하려 하자 〈고부시공로사차 告訃時功勞辭箚〉를 올려 이를 사양하였다.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옥사에 연루되었고, 1614년 동계 정온(鄭蘊) 등이 영창대군 살해에 대한 항의를 하다가 귀양을 가게 되자, 〈청환수정온보외차 請還收鄭蘊輔外箚〉를 올려 이들의 방면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1615년(광해군 7) 정인홍(鄭仁弘) 등의 원찬론(遠竄論)에 봉착, 7년간 교외에서 대죄(待罪)하였다. 인조반정 후 구신(舊臣)으로 우대를 받았고, 죽은 뒤 청백리에 올랐다. 지례(知禮)의 도동향사(道東鄕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오봉집》이 있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3.推忠奮義平難功臣嘉義大夫戶曹參判 晉興君 姜紳 勉卿 尙州
강신(姜紳)1543년(중종 38)∼1615년(광해군 7).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면경(勉卿), 호는 동고(東皐).
생부는 우의정 사상(士尙)이고 사안(士安)에게 입양되었다.
생모는 임간(任幹: 손자 광絖은 참판으로 시호가 충간(忠簡)이다)의 딸이며, 양모는 윤광운(尹光雲)의 딸이다.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77년(선조 10)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1589년 문사랑(問事郞)으로 정여립옥사(鄭汝立獄事)의 처리에 참여하여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책록되고 진흥군(晋興君)에 봉해졌다.
이조낭관·홍문관직을 역임하고, 1592년 승지·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임진왜란을 맞아 함경도순찰사를 거쳐, 1594년 도승지, 1596년 서북면순검사(西北面巡檢使)와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601(선조 34년) 호조참판. 1602년 경기도관찰사, 1609년 우참찬, 다음해 좌참찬을 역임했다. 진흥군(晉興君)에 봉해졌다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시호는 의간(毅簡)이다.
4.折衝將軍行忠佐衛副護軍 姜綖 正卿 尙州
강연(姜綖)1552년(명종 7)∼1614년(광해군 6). 상주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정경(正卿), 호는 청천(菁川).
조부는 의정부 사인 온(溫). 아버지는 충청감사 사필(士弼). 외조부는 정윤수(鄭允壽). 처부는 판결사 정응규(鄭應奎). 참판 강신(姜紳)의 동생
아들 강원감사 도촌(道村) 강홍중(姜弘重)은 여헌 장현광 문인이다.
1590년(선조 23)에 증광문과에 급제, 1593년 봉교(奉敎)가 되었고, 그뒤 정언·병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594년에 지평·헌납·필선(弼善), 1595년에 장령·겸문학(兼文學), 1599년에 사성(司成)·군기시정(軍器寺正)을 거쳐 집의(執義)가 되었다. 임진왜란 후 복구작업의 시급함을 들어 외방 수령직 가운데 비어 있는 곳은 경관(京官)으로써 우선해서 충원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그뒤 사간·부교리·보덕(輔德)·좌부승지·우승지·좌승지를 거쳐 1603년에 공조참의가 되었다.
이듬해 인천부사, 1606년에 첨지중추부사, 1609년에 한성부판윤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청천일기》가 있다.
5.通訓大夫軍資監正 尹曄 汝晦 尙州
윤엽(尹曄) 1546(명종 1 병오)~1604(선조 37)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여회(汝晦)
조부는 증 영의정 징(澄). 아버지는 응교 극신(克新). 외조부는 남견손(南堅孫).
처부는 성척(成惕).
동생 윤돈(尹暾)의 호는 죽창(竹窓) 예조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선조(宣祖) 13년(1580)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직강. 선조 24년 사간원 정언(이때 초간 권문해가 司諫이었다). 선조 27년 전라도사. 32년 상의원 정. 34년 군자감 정
선조 37년 서천군수로 재임 중 졸하였다
6.顯信校尉守訓鍊院僉正 朴應立 信甫 寧海
박응립(朴應立) 영해 출신
본관은 무안(務安). 자는 신보(信甫) 아버지는 경장(敬長)
선조(宣祖) 27년(1594) 무과급제
7.中直大夫行禮曹正郞知製敎 申之悌 順夫 義城
신지제(申之悌) 1562년(명종 17)∼1624년(인조 2). 의성 출신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순보(順甫), 호는 오봉(梧峰)·오재(梧齋).
1589년(선조 22)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 1601년 정언·예조좌랑, 이듬해 지평·성균관전적 등을 거쳐 1604년 세자시강원문학·성균관직강을 역임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창원부사로 나가 백성을 괴롭히던 명화적(明火賊)을 토평하고 민심을 안정시켜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고, 인조반정초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죽었다.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고 경사(經史)에 통달하여 유성룡(柳成龍)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예안현감 재직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대를 모집, 적을 토벌하였다. 간관으로 있을 때 직간하였고, 수령재임 때에는 치적을 남겼다. 그의 시문은 문집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의성에서 장대서원(藏待書院)을 세워 지방자제교육에 힘썼고, 죽은 뒤에는 김광수(金光粹)·이민성(李民宬)·신원록(申元祿)과 함께 그 서원에 배향되었다.
8.保功將軍行翊衛司翊衛 姜純 一作紞 文卿 尙州
강담(姜紞) 상주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문경(文卿)
아버지는 우의정 사상(士尙). 좌참찬 진흥군(晉興君) 강신(姜紳)의 동생
음보로 익위사 익위. 군수를 지냈다
9.奉列大夫行蔚山都護府判官 金澤龍 施普 禮安
김택룡(金澤龍) 1547년(명종 2)∼1627년(인조 5). 예안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시보(施普), 호는 와운자(臥雲子).
아버지는 양진(楊震)이다.
선조(宣祖) 9년(1576) 생원시에 합격하여 참봉을 거쳐, 1588년(선조 21)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세자시강원·문학을 역임하였다.
1595년 병조좌랑이 되고, 이어 선조 앞에서 《주역 周易》을 강의하였다. 같은 해 헌납·성균관직강을 거쳐 이듬해 지평·세자시강원 겸 사서를 역임하고, 전라도 광양·운봉에서 적을 무찌른 공으로 공적이 널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성균관 전적 사예를 거쳐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전라도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문집으로 조성당집 (操省堂集)이 있다
10.中直大夫行司憲府監察 權景虎 從卿 咸昌
권경호(權景虎)
유고: 晩悟公遺稿
검간 조정의 행장에 七月丁亥。公與權公景虎,鄭公經世,李弘道蔡有喜等。會咸昌之黃嶺僧舍將擧義。淸州人李逢者。號爲有武略。推爲上將。而公爲參謀。兼掌書記。
贈吏曹參判晩悟軒權公墓碣銘 並序 입재 정종로 찬
愚嘗讀先祖文莊公曁蒼石李先生誄晩悟軒權公文。見其或稱公爲莫逆交。至以松栢芝蘭之相悅歎况之。而又盛言其臨亂殉國之志。或稱公資學之美及服官政務持大體。罔試不可。一時名公咸爲之磬折。於是槩知公平生而慕想者夙矣。今公之七世孫樸氏持家狀。屬余銘公墓。自惟蔑識甚。然其敢辭諸。謹按公諱景乕字從卿。晩悟其自號也。權氏出安東。麗太師幸之後。歷數十世。至諱琳縣監贈參判。祖諱達手官校理號桐溪。燕山甲子。直言被害。中廟改玉贈都承旨。考諱紹選賢良官府使。妣淑人張氏宣畧將軍仲羽女。以嘉靖丙午生公。姿表器度瑰偉異常。博學有才行。爲儕流所推重。年四十蔭補獻陵參奉。入爲金吾郞。出昌樂丞。秩滿歸。壬辰亂。與吾先祖曁全沙西,趙黔澗諸賢倡義。時鶴峯金先生按嶺右。以公爲召募官。糾集益多。遂把截要害。所在斬獲亦衆。邑倅忌其功。誣奪義旅。公知事不濟。灑泣西赴行在。冒危險萬死得達。癸巳扈駕而還。甲午出守長城。時兵荒甚至人相食。公竭力賑濟。得全活之。上賜表裏以褒。未幾謝病歸。丁酉倭再動。公又倡義。與南儒䟽請親征。庚子拜司憲府監察。丁未守金山。愛民禮士有治績。己酉二月卒于官。返葬故里。邑民皆哭送之。後十年以扈從勳贈吏曹參判。配星州李氏典籤愿之女。有淑德。生一男淳縣令。以原從功贈吏判。文化柳氏司僕正德。男女不育。側出男二。洛奉事,溶僉知。縣令有五男三女。以稷宣務郞,以益通德郞皆無后,以說禁府都事,以伋生員察訪,以亮縣令。女縣監許嶙,同知洪時挺,士人沈長儒。公性恬澹。不樂進取。間嘗退休于岐亭舊居。每遇良辰美景。與同志諸賢。相招邀爲樂。誄文中岐湖愚谷。匹馬過從及步臨秋澗。杯酒盡歡。亦其一事也。是其高情雅致。豈不亦可想也哉。後百有二年。移封于尙州幕谷向酉原。墓無刻。是爲銘。銘曰。
材蔚時望。誠效國難。允矣夫公。名祖克纘。
11.宣敎郞省峴道察訪 柳仲龍 汝見 居昌
유중룡(柳仲龍)1558년(명종 13)∼1635년(인조 13). 거창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여현(汝見), 호는 어적산인(漁適散人).
조부는 하(賀). 아버지는 승지 유춘(有春)이며, 어머니는 청주경씨(淸州慶氏)로 부장(部將) 지(祉)의 딸이다.
덕계 오건(吳健)의 문인으로 1582년(선조 15)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대암 박성(朴惺)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김면(金沔)의 진중에서 활약하였고, 다시 의병을 규합하여 우현(牛峴)·상암(箱巖) 등지에서 왜적을 막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의병장 망우당 곽재우(郭再祐)휘하에 종군하여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전쟁의 계책을 도왔다.
1600년 병과에 급제, 성환찰방·성현찰방·전적·사예·예조정랑 등을 거쳐 1612년(광해군 4)에 장령을 지내고, 이듬해 금산군수가 되었으나 정치가 점점 문란하여짐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다.
인조반정 뒤 문과중시에 장원급제하여 홍문관수찬이 되었으며, 1626년(인조 4) 교리를 거쳐 다음해 성균관사성이 되어 치사하였다. 문장에 능하였다.
저서로는 어적집(漁適集) 3권이 있다.
12.承議郞重林道察訪 全雨 時化 草溪
전우(全雨) 1548(명종 3)∼1616(광해군 8) 초계
본관은 완산(完山). 자는 시화(時化), 호는 수족당(睡足堂), . 아버지는 치원(致遠)이며, 합천(陜川)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순진하고 효우를 돈독히 하여 문장에도 능했으며 글씨 또한 뛰어났다. 산수를 사랑하여 정자를 짓고 `수족당(睡足堂)`이라 편액하니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초당서수족(草堂書睡足)"이란 글에서 따온 것이다.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 자암(紫巖) 이민성(李民宬), 대암(大庵) 박성(朴惺),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 무민당(无悶堂) 박연(朴絪) 등의 명사들과 친교 하였다.
임진란에 부친을 모시고 의병을 이끌고 적을 무찔렀으며, 이러한 공으로 사축서별제(司畜署別提)와 중림도찰방(重林道察訪)이 되었다.
13.奉正大夫前行黃澗縣監 吳克誠 誠甫 寧海
오극성(吳克成)1559년(명종 14)∼1616년(광해군 8).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성보(誠甫), 호는 문월당(問月堂).
참봉 민수(敏壽)의 아들이다.
1594년(선조 27)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으로 등용되었다. 당시 왜란으로 전선의 소식이 두절되자, 삼남(三南)에 내려가 도원수 권율(權慄)과 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진중을 찾아다니면서 전황장계를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 뒤 사복시주부를 거쳐 1596년에 황간현감이 되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병사(兵使)를 도와 전공을 세웠다. 1601년에 훈련원판관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문월당문집》이 있다.
14.奉直郞前行靑山縣監 李弘發 景晦 金山
이홍발(李弘發) 자는 경회(景晦) 김산 출신
임진왜란 때 우병사 김응서의 휘하에서 김응서의 명으로 소서행장을 만났다
청산현감. 경산현감. 설봉현령 연기현감(燕岐縣監) 역임
15.奉直郞行昌寧縣監 朴光先 克懋 高靈
박광선(朴光先)1562(명종 17) 고령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극무(克懋).
조부는 택(澤). 아버지는 정완(廷琬). 외조부는 조몽길(曹夢吉)
1618년(광해군 1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正言)·사서(司書)·장령(掌令) 등을 역임하였다.
1622년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서 필선(弼善)·보덕(輔德)으로 왕세자를 모시다가 인조반정으로 은진(恩津)에 유배되었다.
16.宣敎郞前行長鬐縣監 權世仁 景初 丹城
권세인(權世仁) 거: 단성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초(景初)
아버지는 상의원 별제 운(運).
장기현감(長鬐縣監). 해남현감. 군기판관 역임. 아들은 광주목사 준(濬)
조카는 여헌 장현광 문인 충강공(忠康) 동계(東溪) 권도(權濤)
17.承議郞前行司宰監主簿 權淳 和甫 咸昌
권순(權淳) 1564(명종 19)~1622(광해군 1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화보(和甫). 호는 매오(梅塢)
동계(桐溪) 권달수(權達手) 후손. 아버지는 만오 경호(景虎)이다(앞 10 참고)
1589(선조 22) 생원시에 합격하여 1597(선조 30) 의금부도사. 1599(선조 32)
사재감 주부. 1604(선조 37) 산음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치로 표리를 하사받았다.
그뒤 선공감 주부 우봉현령을 역임하였다. 증직은 이조판서이다
유고: 永嘉世獻/梅塢公遺稿 참고: 현손 침(琛)이 지은 유사
18.進勇校尉龍驤衛副司果 權澍 汝霖 咸昌
권주(權澍) 함창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림(汝霖)
동계(桐溪) 권달수(權達手) 후손.
선조 30년 군자감 주부. 함열현감. 전주판관. 군수
19.秉節校尉忠武衛副司果 金寭 晦仲 尙州
김혜(金寭) 1566(명종 21)~1624(인조 2) 상주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회중(晦仲). 호는 송만(松灣),
아버지는 수길(綏吉)
서애 류성룡 문인. 임진난에 우복 정경세, 창석 이준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였다. 선조(宣祖) 23년(1590)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4(宣祖 27)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이 되고, 찰방을 거쳐 감찰이 되었다. 1605년 문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호조좌랑(戶曹佐郞),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거쳐 칠도도사(七道都事)를 역임하였다. 광해군 난정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서당과 서원을 창립하고 선비양성에 진력하였다. 풍속을 바로 잡기에 노력하였고, 인조반정 후 이조좌랑을 거쳐 풍기군수가 되었다.
유고: 송만선생일고 (松灣先生逸稿)
검간 조정의 문집에
壬戌七月旣望。泛舟洛東江。同遊凡二十五人。以赤壁賦從頭分韻。次第占之。得戌字。公與李希聖,李月澗㙉,李蒼石埈,康南溪應哲,金寭 金知復,金廷獻,金廷堅,柳修巖袗,趙又新,李大圭,韓克禮,金墍,李元圭,李文圭,李身圭,禹處恭,丘山立,孫胤業,全沙西湜,全克恒,全克恬,趙光靈同遊。
20.承訓郞前行繕工監直長 盧道亨 伯嘉 尙州
노도형(盧道亨) 1571년(선조 4)∼1615년(광해군 7).
본관은 광산(光州). 자는 백가(伯嘉).
조부는 영의정 소재 수신(守愼)이며, 아버지는 군수 대해(大海)이다.
음서로 관직에 나아가 선공감 직장. 1604년(선조 37) 지례현감(知禮縣監)을 지내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봉되었다. 이조참판을 증직받았다.
좌의정 일송 심희수의 시에
贈別盧道亨醴泉之行
遊宦人間自有時。六年何恨遠相離。念吾夫婦俱衰病。在世重逢未可期。
朝暮相從四十年。平生惇睦未嘗疏。此行堪賀還堪惜。白首臨岐淚滿裾。
21.通仕郞承文館著作 李民宬 寬甫 軍威
이민성(李民宬) 1570년(선조 3)∼1629년(인조 7). 의성 출신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관보(寬甫), 호는 경정(敬亭).
조부는 여해(汝諧). 아버지는 관찰사 학동 광준(光俊)이며, 어머니는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인의(引儀) 권(權)의 딸이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문인. 동생 형조참판 자암(紫巖) 민환(民寏)과 아들 충주목사 만옹(漫翁) 정기(廷機)도 여헌 문인이다.
1597년(선조 30) 정시문과에 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뽑혔으며, 1601년 승정원주서를 거쳐 그 이듬해 시강원설서에 제수되고 사서로 승진, 서장관(書狀官)으로 차출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3년 예조좌랑을 거쳐 병조좌랑에 전임되고, 곧 정랑으로 승진되었다.
1605년 이조정랑에 천거되었으나 정인홍(鄭仁弘)일당의 반대로 제주점마어사(濟州點馬御史)가 되었다.
그뒤 얼마간 일을 보다가 시사(時事)의 동향이 심상하지 않아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1608년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으며, 문학(文學)으로 옮겨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 이듬해 옥당(玉堂)에 선입(選入)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귀향, 여묘(廬墓) 3년을 마치고 홍문관수찬에 다시 임명되었으며, 그뒤 교리·세자시강원겸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1617년(광해군 9) 정조(鄭造)·윤인(尹訒) 등이 폐모론을 발의하자 윤기(倫紀)에 득죄(得罪)함이 심하다는 내용의 차자(箚子)를 올렸다가 이이첨(李爾瞻) 등의 모함을 받아 삭직되어 그뒤 고향에 내려가서 거의 10년 동안 글씨와 그림으로 소일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 때 사헌부장령에 복직하였다.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그 공로로 성균관사성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가자(加資)를 받고, 아울러 전답과 노비를 하사받았다.
그 뒤 동부승지를 거쳐 좌승지에 승진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스승인 영남호소사(嶺南號召使) 장현광(張顯光)의 추천으로 경상좌도의병대장이 되어 전주에까지 진출, 왕세자를 보호하였다.
1629년 형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 그해에 죽었다. 직언을 잘하기로 이름 높았으며, 의리에 강하여 광해군의 난정 때 간당(奸黨)들에게 모함을 받은 한음이덕형(李德馨)· 오리 이원익(李元翼)과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출하려고 힘썼다.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명나라에 갔을 때 그곳의 학사·대부들과 수창(酬唱)한 시는 사람들에게 애송되어 중국사람들이 그를 이적선(李謫仙: 이태백을 이름.)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까지 전하는 시는 1천여수에 이른다.
의성의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 경정집 조천록(朝天錄)
22.啓功郞行弘文館著作 權濟 致遠 丹城
권제(權濟) 1538년 단성(산청)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원(致遠). 초명은 징(澄)
조부는 참봉 규(逵). 아버지는 문현(文顯)
임진왜란 때 창의. 선조(宣祖) 24년(1591) 문과급제
선조 37년 공조좌랑. 군수를 역임하였다(여지도서 단성읍지)
23.宣敎郞行繕工監奉事 申景翼 文叔 尙州
신경익(申景翼) 상주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문숙(文叔)
조부는 공헌(公獻) 아버지는 주부 운(雲). 아들은 장령 백원(百源) 석번(碩蕃)
1602(선조 35) 내자시 주부. 고령현감. 단성현감
灑然堂[縣監申景翼所居]李德馨
一見堂顏意盡傾蕭然勝槪愜幽情溪風睡榻驚松籟山雨碁燈送竹聲
却恨乳離居未定偶來遊宦歲頻更春晴洛水盈歸夢幾度鄕心對月明
24.從仕郞前行藝文館檢閱春秋館記事官 李民寏 而壯 軍威
이민환(李民寏)1573년(선조 6)∼1649년(인조 27).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이장(而壯), 호는 자암(紫巖).
아버지는 관찰사 광준(光俊)이며, 어머니는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선무랑 권(權)의 딸이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으로, 1600년 별시문과 급제하였다.
그 뒤 검열·정언·병조좌랑을 거쳐, 1603년 암행어사로 평안도에 가서 수령의 비행과 민정을 살폈으며, 1608년 영천군수로 나갔다.
1618년(광해군 10) 명나라에서 군원을 요청하자, 원수 강홍립(姜弘立)의 막하로 출전하여 부차(富車)싸움에서 패하여 청군의 포로가 되었다.
17개월 동안 청나라의 항복 권유를 물리치고, 1620년에 석방되어 의주에 이르렀을 때 사원을 가진 박엽(朴燁)의 무고를 받아 4년간 평안도에서 은거생활을 하다가 1623년(인조 1)인조반정으로 서울로 올라왔다.
이괄(李适)의 난 때와 정묘호란 때 왕을 호종하였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스승 영남호소사(嶺南號召使) 장현광의 종사관이 되어 출전하였다. 난이 끝난 뒤 군자감정으로 통정계(通政階)에 올랐고, 이어 동래부사가 되어 번거로운 폐단을 근절하였다.
그 뒤 판결사·호조참의·형조참판에 임명되었다가, 1645년에 경주부윤으로 나갔다.
저서로는 《건주견문록 建州見聞錄》·《자암집》이 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25.宣敎郞行廣興倉副奉事 趙靖 安仲 尙州
조정(趙靖) 1555년(명종 10)∼1636년(인조 14).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안중(安中), 호는 검간(黔澗). 광헌(光憲)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홍윤최(洪胤崔)의 따님이다 (홍공은 우암(寓菴) 홍언충(洪彦忠)의 사위, 허백정 홍귀달의 손서이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과 한강(寒岡) 정구(鄭逑) 의 문인으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고, 1596년 왜와의 강화를 배격하는 소를 올렸다. 1599년 천거로 참봉이 되고, 1603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1605년 좌랑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까지 호가(扈駕)하였고, 그 뒤 벼슬이 봉상시정에 이르렀다. 또한 경술(經述)과 문장에 뛰어났다.
눌은 이광정(李光庭)이 찬(撰)한 행장에 의하면 선생은 가정훈회(家庭訓誨)를 본받아 문세(文勢)가 조성(早成)하여 18세 때 이미 향시(鄕解)에 합격하였다. 아우 가규공 익(可畦公 翊)과 더불어 조씨가문의 쌍벽이라 일컬어졌다. 한강(寒岡) 정선생(鄭先生)을 사사하여 『소학(小學)』과 『심경(心經)』 등을 수업했으며, 약봉(藥峯) 김극일 선생(金克一先生)의 가문에 장가들고 학봉 김선생(鶴峯 金先生)으로부터 『주자서(朱子書)』를 수학하며 더욱 친자(親炙) 복응(服膺)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경호(權景虎: 자는 從卿), 우복 정경세(鄭經世), 이홍도(李弘道), 채유희(蔡有喜) 등과 의병을 일으켜 왜적의 토벌에 힘쓰고 친명(親命)으로 기원(基遠), 영원(榮遠) 두 아들을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망우당(郭忘憂堂: 재우) 진중(陣中)에 보내 직접 싸우게 하였다. 또 월간(月澗) 이전(李㙉: 창석 이준의 형) 등 동지들과 소를 올려 국왕의 친정(親征)을 청하는데 공이 소를 초(草)하니 사의(辭意)가 엄정 개절(愷切)하여 가히 천애(天哀)를 감동시킴이 있었다.
임란 후 1599년(선조 32) 희릉참봉(禧陵參奉)이 되었다가 160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05년 대과에 급제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지냈다 그 후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예조좌랑(禮曹佐郞), 대구판관(大丘判官), 경조제독관(慶州提督官), 사섬시정(司贍寺正) 등을 거쳐 1627년(인조 5) 봉상시정(奉常寺正)에 제배(除拜)되었다. 상주의 제현들과 더불어 도남서원(道南書院)을 창건하여 오현(五賢)을 존사(尊祠)했으며, 성동(城東)과 노곡(魯谷)·단구(丹丘) 등 여러 곳에 향약을 실시하였다.
1642년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고 1730년(영조 6)에는 사림들에 의해 속수서원(涑水書院)에 추향되었다.
부인 의성김씨는 약봉(藥峰) 극일(克一)의 따님으로 학봉 성일의 질녀이다. 5남 2녀이니.
장남 기원(基遠: 號 樵隱)은 黃澗縣監이고。
차남 영원(榮遠)은 從仕郞이고。
삼남 홍원(弘遠)은 進士이고。
사남 형원(亨遠)은 武科에 급제하여 同知中樞이고。
오남 은 흥원(興遠)이다.
사위 이기(李岐)는 퇴계선생의 증손자로 호가 수졸당이고。정주(鄭煟)는 참봉이다。
* 장남 기원(基遠)은 2남 6녀이니
장남은 환(秇)이고. 차남 균(稛)은 현감이다.
사위는 여절(呂沏)이고,고이행(高爾行)이고,전극항(全克恒)은 정랑이고,조정융 (曹挺融)은 현감이고,박준(朴璿)이고,윤성(尹晟)이다。서출 자녀가 있다。
*차남 영원(榮遠)의 아들 릉(稜)은 生貟이고。사위는 강홍록(姜弘祿)이고,이윤배(李 胤培)는 參奉이며,홍승(洪昇)은 生貟이다。庶出子는 穟,秞,稦,稃,,稊,稉, 稑이고。사위는 전극증(全克憕)이다。
* 삼남 홍원(弘遠)의 사위는 정온(鄭熅)이고。
* 사남 형윤(亨遠)은 아들이 없어서 래(䅘)를 후사로 삼았다。사위 呂㴰는 성균관 學諭이다
* 오남 은 흥원(興遠)의 아들은 䆃이다.
* 사위 이기(李岐)의 아들은 희철(希哲),극철(克哲)이고。사위는 금삼달(琴三達), 금종성(琴縱成),임헌(任憲)이다。
* 사위 정주(鄭煟)의 아들은 요봉(堯封),요좌(堯佐),요우(堯佑),요필(堯弼)이고。 사위는 박정재(朴廷榟)이다。
26.宣務郞行濟用監參奉 曺友仁 汝益 咸昌
조우인(曺友仁) 1561년(명종 16)∼1625년(인조 3).예천 출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여익(汝益), 호는 매호(梅湖)·이재(頤齋).
증조부는 우부승지 계형(繼衡). 조부는 언홍(彦弘). 아버지는 몽신(夢臣)
외조부는 신주(申澍). 처부는 김산군수 우암(遇岩) 이열도(李閱道)이다
1588년(선조 21)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60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다가 1616년(광해군 8)에는 함경도 경성판관을 지냈다.
1621년에는 제술관(製述官)으로 있으면서 고궁(故宮)이 황적유폐(荒寂幽閉)함을 보고 감회일장(感懷一章)을 지어 광해군의 잘못을 풍자하였다가 필화를 입어 3년간 옥고를 치르고,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동부승지. 우부승지가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상주의 매호에서 은거하며 여생을 마쳤다. 시·서예·음악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묘지명은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지었다
27.通仕郞權知承文館副正字 南復圭 汝容 安東
남복규(南復圭) 1559(명종 14)∼1615(광해군 7). 안동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여용(汝容). 아버지는 호인(好仁)
선조(宣祖) 21년(1588) 생원시에 합격하고, 선조(宣祖) 33년(1600) 문과에 급제
선조 37년 평안 평사(平安評事). 형조좌랑. 예조좌랑. 37년 경상도사. 38년 예조좌랑. 39년 예조정랑. 형조정랑. 40년 사헌부 지평. 형조정랑. 41년 사헌부 장령
광해군이 즉위하자 유영경의 당이라 하여 유배되었다
題嶺南同道會題名卷幷序 오봉 이호민 찬
我嶺南人宦遊于京者。作同道會于掌樂院新廨。至者三十六人。時萬曆辛丑秋七月也。西川鄭相公以病不克赴。其聞而樂之。則視赴者有加。會已各捐俸。謀所以題名壽跡者。幷錄西川公于首簡。屬余志其事。噫。嶺之士仕于朝者。舊不止此數。而名儒鉅卿茂才者居多。向雖存亡聚散之不常。其存者相愛之情。亦不以聚散而替焉。斯可尙也已。仍係詩以美之。
文獻吾東說嶺南。世生卿相賁朝參。向來蹤跡成漂梗。勝日盃樽倚半酣。
梅竹幽居同晚計。朱陳厖俗顧何慚。秋風懷土人人是。夢裡相携訪舊庵。
寄呈嶺南同道諸老座上時嶺儒以晦齋辨明事來上章。上命設庭試恩賞以榮之。
吾道南歸後。兵餘尙繼聲。將興漢禮樂。須起魯諸生。
裹足封章遠。承恩過嶺榮。提壺阻相送。脈脈宦遊情。
題嶺南同道契會軸
遊宦四方士。誰無懷土情。況吾嶺南客。遠寄漢陽城。
暇日徵琴酒。歸心說稻秔。何時淸洛畔。相對耦而耕。
同道會。草次大學士五峯韻。 경정 이민성
今代儒林傳。洋洋頌有聲。道昭歸簡冊。文在被諸生。
明得東南吉。恩踰衮黻榮。文衡詩枉讀。尤仰景賢情。
時嶺南儒生金允安等。赴闕拜疏。辨誣晦齋先生。批答甚優特命庭試入招者。
各賜恩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