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강빈 시인>>
<<임강빈 시인의 양력>>
* 1931 충남 공주 출생. 2016년 7월 16일 향년 85세로 영면.
* 공주사범대 국문과 졸업
* 1952년 청양중학교 교사로 교육계에 입문, 1996년 대전 용전중학교장으로 정년퇴임.
* 1956 <<현대문학>>에 <코스모스> 외 2편이 추천되어 등단
* 1966 충남문화상 수상
* 시집 : 『당신의 손』 『동목』 『매듭을 풀며』 『등나무 아래서』 『조금은 쓸쓸하고 싶다』 『버리는 날의 반복』 『버들강아지』
『버리는 날의 향기』 『쉽게 시가 씌여진 날은 불안하다』 『한 다리로 서있는 새』 『집 한 채』 『이삭줍기』
『바람, 만지작거리다』
* 시선집 : 『초록빛에 기대어』
<<임강빈 시인의 시>>
동목(冬木)/임강빈
한뿌리에서 자란
나뭇가지
그 가지와
가지 사이에 생긴 간격
겨울엔 너무 빤히
그것이 보인다.
바람 끝에
멈추는 적막이
내 뼈마디를 흔들어주곤 한다.
줄곧 나는 왜 한 나무만을 보아왔을까.
한뿌리에서 자라
그 가지와
가지 사이에 생긴 간격.
그 사이로
하루를 오르내리는
비탈길이 보인다.
밤을 한층 춥게 하는
별이 보인다.
바람/임강빈
식장산(食欌山) 자락에 둥지를 틀고
金丁洙 시인은 바람과 함께 산다
소나무 숲 사이를 스치는 바람이 제일이라 한다
다는 오르지 못하고
빈방으로 돌아와서 적막을 즐긴다
이 조촐한 일상
바람이 일러준 것이라 한다
※ 그대는 자신을 바람이라 했지
지난 해 가을, 몇 해만인가
바람처럼 왔다가
이튿날 아침 바람이 되어 떠나던 그대
그대의 회색빛 승복 등으로
쓸쓸히 흐르는 가을 햇살
바람은 소리는 있어도
그 뒷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조용하게 나직한 바람도
한바탕 흔들어대는 輪舞(윤무)도 그렇다
울컥울컥 토할 것 같은 슬픔은
오랜 세월 동거한
金丁洙 시인의 바람이라 한다
서정시인/임강빈
당신은 서정시인
빛 바랜 서정시인
산등성이에서
억새풀 흔드는
그런 시늉을 하다가
큰길을 피해
고샅을 만나는 달빛
허허 헛웃음 틈서리에서
눈물은 뜨겁고
오십이 훨씬 지나서야
철이 든 당신
혼자 있고 싶어하고
안으로 세상 일 삭이는 당신
약해도 단단한 뼈
섭섭한 날 있다
소리치고 싶은 날 있다
맑은 물소리에 귀세우는
당신은 아무래도 서정시인.
복숭아/임강빈
낮은 구릉에
복사꽃이 그림 같다
조치원에는
도원 문화제가 열린다
그날의 축제가 엊그제 같은데
다투어 열매가 탐스럽다
여인의 예쁘장한 둔부(臀部)
불그스레 분홍빛으로 익는다
천도(天桃)가 아니라서
한 입 깨물면
진짜 팔월 복숭아 맛이다
세수/임강빈
세면기에서 얼굴을 씻는다
안색이 좋아졌다고 하고
신수가 환해졌다고 한다
지나는 인사치레거니 하다가도
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지난날의 몰골은 어떠했을까
얼마나 비참했을까
그것은 우울과도 통한다
비누질을 한다
날마다 하는 일인데
물위에 때가 둥둥 떠다닌다
바람이 잘 닿는 각(角)으로
알게 모르게 낀 것일 것이다
흘깃 거울을 본다
가난한 이목구비
분명 나를 닮았다
손바닥으로 북북 문질러댄다
묵은 것이 손에 잡힌다
때묻지 않은 얼굴로 있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깡마른 정신으로 있다는 것
더 어려운 일이다
매미 소리/임강빈
한여름
무량사 매미와 만났다
오랜 세월 땅속에 있다가
겨우 삼 일 남짓 생을 마치는
매미 소리는 언제 들어도 애처롭다
졸졸 흐르는 계곡 물소리 따라
한결 시원하고
악쓰는 도시의 매미와는 차원이 다르다
서둘러라
넉넉한 건 아니다
무량한 시간 같지만 일순간이다
그 애절한 호소
산을 다녀온 며칠 후
우리 집 아파트 방충망에
매미 한 마리 달라 붙어서
무량사 매미 소리를 반복하고 있었다
순식간의 일이다
매력(魅力)/임강빈
당신의 시에는 매력이 없습니다
마음을 사로잡는 힘이 부족합니다
감동이 없습니다
길게 늘인다고 능사는 아닙니다
헉헉 숨막히게 하지 말아요
짧게 줄이세요
여백을 많이 두세요
서두르지 말아요
오두방정 떨지 말아요
그 알량한 매력이나마 죽이게 합니다
시는 감동입니다
감동을 흘리게 하는 매력입니다
평화/임강빈
바둑판처럼 반듯합니다
마을마다
나락이 익고 있습니다
초록이다가 노란빛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한 폭 그림입니다
기적도 숨죽이고
미끄러지듯 기차는 달립니다
허수아비도 만날 수 없는 이 적막에
느릿느릿한 것 같지만
열차는 직선으로 달리고 있습니다
질주하고 있습니다
이 넓은 평야에 마침내 황금빛 일색입니다
참, 조용한 평화입니다
바람 송頌/임강빈
바람은 자리가 따로 없습니다.
궁둥이를 붙일 틈을 주지 않습니다.
꽃 이파리가 흔들릴 때
나뭇가지가 흔들릴 때
깃발이 펄럭일 때
바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람은 언제나 바쁩니다.
한곳에 머물지 않고
변화무쌍합니다.
그 힘이 바람입니다.
바람은 소리가 있습니다.
살아있는 증표입니다
만개(滿開)/임강빈
겨울 뒤에서 숨어 있다가
작심한 듯
마침내 뇌관을 터뜨린다
일제히 터뜨린다
펑펑
가지마다 꽃이 만개한다
꽃은 몸 전체로 핀다
조용하지만 치열하다
순수하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꽃은 허구(虛構)가 없다
독작(獨酌)/임강빈
주량이 얼마냐고 물으면
좀 한다고 겸손을 떨었다
세상 한구석에서
대개는 외로워서 마셨다
몇 안 되는 친구가 떠났다
그 자리가 허전하다
거나하게
정색을 하며 마신다
독작 맛이 제일이라 한다
외롭지 않기 위해 혼자 마신다
안개꽃/임강빈
아침 이슬은
잠깐
있다 가는 집념이다.
안개꽃
한 아름
그렇게 있고 싶은 그대.
작은 욕망으로
가득 찬 꽃
흔들릴 수밖에 없는 꽃.
멀리서 볼수록
그것은
추상화의 선이다.
사랑은 때로
이것들의 선線인가
흔들림인가
이슬 같은 안개꽃 속에
장미 한 송이
그대 뜨거운 노래.
혼자 마시기/임강빈
목로에 혼자 앉아
마시기까지는
꽤나 긴 연습이 필요하다.
독작이 제일이라던
어느 작가의 생각이 떠오른다.
외로워서 마시고
반가워서 마시고
섭섭해서
사랑해서
그 이유야 가지가지겠지만
혼자 마시는 술이
제일 맛이 있단다.
빗소리 간간이 뿌리면 더욱 간절하다 한다.
생각하며 마실 수 있고
인생론과 대할 수 있고
아무튼 혼자서 마시는 맛
그것에 젖기까지는
상당한 연습이 필요한 모양이다.
햇살/임강빈
추위를 타는 편이다
염첨염천에도 그늘애 오래 잇으면
으스스 한기를 느낀다
햇살이 그립다
한동안 병원에 있다가
집에 들어왔다
왠지 서먹서먹하다
우리 집 베란다에
아침 햇살이 가득 넘친다
서둘러야지
나무의자에 앉아
일광욕日光浴 한다
쏴- 쏴-
앙금을 털어낸다
아픔을 씻어낸다
아, 눈부신 햇살
눈빛/임강빈
간밤에 칠흑이었다
우리가 잠자고 잇을 때
눈이 내린 모양이다
하얗게 변했다
세상이 교교皎皎하다
창문을 열었다
새벽 공기가 차갑지 않아다
베란다 아래
연두, 빨강, 갈색, 파랑 슬래브집이
일색이다
지붕마다 정지된 채로 조용하다
갑자기 적막감이 몰려온다
아, 나 떠나는 날
이처럼
하얀 눈빛이면 한다
날짜임강빈
마을에서 지근한 거리
누울 자리 하나 장만햇습니다
살아서 그래도행복했고
저승에서도 그럴 것입니다
지상이나
땅 속이나 시간은 같습니다
흔적도 없이 없어질 일이지만
몇 점 남겨 두었습니다
앞사람과 잘 어울릴지 몰라
걱정은 됩니다
간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아직 날짜가 잡히지 않았을 뿐입니다
은수저/임강빈
아내가 시집 올 때
가져 온 은수저로
밥을 먹습니다
아내의 수저는 꽃무늬가 박혀 있어
구별하기 쉽습니다
이것저것
음식을 나르느라
노고가 얼마입니까
지난 세월
무심했습니다
까딱하면 인사를
놓칠 뻔 했습니다
아내도
수그긍하는 눈치입니다
고맙다
은수저야
일의대수一衣帶水/임강빈
우리나라와 일본은
일의대수一衣帶水의 거리
두 나라는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
독도의 풍랑이 거세다
아베 총리는
자기네 땅이라고 서슴지 않고
입을 나불거리고 있다
그들의 간교가 눈에 선하다
가증스럽다
그냥/임강빈
모처럼 전화가 왔다
어떻게 지내느냐고
안부 전화다
반갑다
응, 그냥 잘 지낸다
며칠 후 이쪽에서 걸었다
건강은 어떠냐
뭐, 그냥 그래
왠지 퉁명스럽다
꿈이 없는 사람
무료한 사람
노인들은
그냥으로 통한다
나의 시/임강빈
남이 쥔 떡이
커 보입니다
남의 시가
커 보입니다
남의 시가
예뻐 보입니다
나의 시는
크지도 예쁘지도 않습니다
다만
야코죽지는 않습니다
봄/임강빈
안개가 자욱합니다
우릉 우르릉 발동 소리가 들립니다
한참 있다가 사람 소리가 납니다
꽃들은
먼저 피려고 다툽니다
나무 이파리도
뒤질세라 서둘러댑니다
천지에
가득가득 봄이 밀려옵니다
조금 남아 있다/임강빈
머리카락이 빠져 나갑니다
이빨이 빠져 나갑니다
기억이 빠져 나갑니다
빠져 나간다는 것은 없음과 같습니다
나는 조금
남아있을 뿐입니다
빗방울/임강빈
비가 지난간 뒤
빗방울이 모였습니다
빨랫줄 아래로 옹기종기
매달려 있습니다
순서는 없습니다
눈 깜빡할 사이
하나가 증발합니다
간단합니다
복잡할 것 같은데
참 간단합니다
우르르 빗방울이 뒤따릅니다
송고送稿/임강빈
우편으로 원고 청탁이 왔다
가뭄 끝에의 단비다
마감 날짜가 넉넉하다
활자화 된다는 설레임
그 마력
무엇으로 할까
이거루보낼가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
부러울 것이 없다
정중히 송고한다
등기로 보내는 건데 하능 아쉬움
무시히 도착했을까
기도하는 마음
이런 절차가 거의 없다
인터넷으로 주고받는다
원근법遠近法/임강빈
멀어지면
가까워진다는 것
가까우면
멀어진다는 것
겨우 알게 되었다
나는 얼마나 무지한가?
절필/임강빈
떠들썩하게
절필을 선언한 사람이 있다
나이 팔십에
시가 점점 멀어진다
내심 버릴까
시가 전부는 아니다
견딜 수 있다
단풍이 곱다
산에는
경연대회가 한창이다
절필하라는 약속
조용히
유보할까
소심한 사람/임강빈
기념사진 찍자고 한다
서둘러
맨 뒷자리에 섰다
아, 편하다
매서운 추위
삼삼오오 곁불로 모여들었다
움직이는 머리와 머리
그 사이로 손을 내밀었다
매사가 이렇다
아, 소심한 사람
난蘭/임강빈
참, 무심했다
난 한 그루
두 촉이 쏙 올라와
꽃이 되었다
시산이
그 쪽으로 쏠린다
가까이 와서
맡으라 한다
부끄러움/임강빈
남들이 애송하는 시
한 편 없으면
평생 시를 써 왔다
부끄러울 때가 있다
- 하늘엔 울타리가 없습니다
어느 신문 전면 광고
얼마나 멋진 문구인가
나는 하늘에
수많은 울타리를 쳐놓고
여태껏
주인 노릇을 한 적이 없다
애당초
버렸어야 하는 건데
미적미적하다가
어정쩡한 시인이 되었다
나의 전성시대/임강빈
방바닥에 배를 깔고
시를 쓰던 시절이 있었다
철이 없었다
하루에도 몇 편 시가 되었다
부나방같이 덤벼들었다
원고 청탁이 오면
부랴부랴 허둥댔다
시에 대한 경외심도 없었다
세월이 쏜살 같다
나에겐 얼마 남지 않은 황금 시간
그 시간과 가까워지면서
모처럼
봇물 터지듯 시가 되었다
왔다
나의 전성시대가 왔다
자위/임강빈
남들이 나를
시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자랑할 것 없이
팔푼이 시인으로 족했다
그런 나를 키운 것은
원고청탁이었다
멀리서 청탁이 왔다
아, 반갑다
실낱같은 모마움
그 원고청탁이 약속처럼 끊겼다
나는 늙었고
그럴 때가 되었다
적막강산/임강빈
나의 첫 시집 ‘당신의 손’에는
고독이나 슬픔이란 단어가 없다
유치하다는 생각에서
애초 버리기로 했다
나이 들면서
넘어지고 깨지고 하면서
이런 낱말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과용할 만큼
마감 날이 가까이 왔다
고독이나 슬픔 같은
사치스러운 시어는 이제 버리자
그냥
적막강산이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