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 湲 來 /순천대 사학과 교수
해상의병은 난초부터 전라좌수영에 자원 종군하여 이순신과 행동을 같이한 집단이 있었는가 하면, 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倡義하여 이순신의 지휘를 받거나 혹은 향리인 해안지대에서 독자적인 활동을 편 집단도 있었다. 의병지도층은 거의 전부가 전라도 연해지역에 거주하는 무과출신을 포함한 사족들이거나 승려계층이었는데, 사족들의 경우에는 부자․형제․族親․家僮․郷隣 등을 이끌고 전라좌수영에 來赴하여 水軍編制 안에 들어간 예가 많았다. 이들은 주로 좌수영에서 가까운 全羅左道의 해안지방 출신들이었지만, 좌수영 관내를 벗어나 멀리서 종군해 온 예도 있었다. 예컨대 전라우도인 나주로부터 전라좌수사 이순신 막하에 들어온 나주정씨 문중의 鄭詳과 鄭如麟 부자나 금성나씨 문중의 羅大用 일가의 형제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이들이 이순신 밑에 자원출전하였던 것은 기축옥사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관련된 동인계 인사들로서 党色과 관련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난초부터 해전에 종군한 의병사례는 이충무공전서나 난중일기의 기록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옥포․당포․한산도해전에 참전한 수군지휘부 가운데는 前奉事․前権管․前万戸․前県監 등 전직관료층과 及第․保人 등 無官의 인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던 점이 그것을 말해준다. 당시 그들은 형식상 주로 営軍官이나 鎮軍官으로 종군하였으며, 뒤에 軍功에 의해 훈련원의 主簿․副正․正으로 授職된 예가 많았다. 아울러 전직관료로 수군진에 뛰어든 의병 중에는 수영 인근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인사들이 포함된 예도 있었다. 방답(돌산도)에 유배중이던 前僉使 李応華가 전라좌수군의 中部将인 광양현감 魚泳潭의 진중에 참전한 것이나, 흥양에 謫居한 前奉事 朱夢竜이 녹도만호 정운 휘하에 들어가 後部所属의 統将으로 활약한 것이 그 예라 하겠다. 전라좌수영을 중심으로 봉기한 해상의병의 움직임이 더욱 활발해진 것은 몇 차례의 해전을 치르고 났을 때인 임진년 7월 이후부터의 일이었다. 당시의 상황은 옥포에서의 序戦이후 한산도해전에 이르기까지 전라도수군이 일본수군을 완전히 제압함으로써 해전에 자신감을 갖게 된 동시에 그 동안의 전력손실로 인해 그만한 兵力充員이 필요했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8월에 들어와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수영 근처의 각 고을에 공문을 띄워 사찰의 승려들과 관내 閑遊者를 대상으로 한 義兵召募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우렸다. 그 결과 1개월 안에 순천․흥양․광양 등지에서 4백여명의 승려들이 來集하였을 뿐 아니라 進士․閑良․校生 등 유생층도 의병을 이끌고 모여들었다. 이들은 모두 이순신의 지휘통제하에서 일부는 해안지역 요해처의 파수임무를 맡았으며 다른 일부는 수군병력으로 보강되어 직접 해전에 참가하였다. 여기에서 이와 관련된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장계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임진년) 8,9월 사이에 가까운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 여러 사찰에 숨어있는 승려들과 병적에 들어있지 않아 놀고있는 사람들을 적발하여 石柱․陶灘․豆峙 등지에 나누어 파수하도록 했더니 이 소문을 들은 승려들이 흔쾌히 모여들어 한달 안에 4백명을 헤아렸다. 그 중에서도 순천의 승려 三惠는 豺虎別都將, 흥양의 승려 義能은 유격별도장, 광양의 승려 性輝는 우돌격장, 광주의 승려 信海는 좌돌격장, 곡성의 승려 智元은 揚兵勇擊將으로 정한 뒤 따로 더 모병할 즈음에 구례의 진사 房處仁․광양의 무사 姜希悅․순천의 교생 成應祗 등이 의기를 분발하여 향병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이에 방처인은 구례 도탄으로, 강희열과 성휘 등은 광양 두치로, 신회는 구례 석주로, 지원은 운봉 팔량치로 가서 요해처를 지키며 관군과 협력하여 군사활동을 펴게 하였다. 그리고 순천의 성응지에게는 순천읍성의 수비를 전담케 하고 삼혜 역시 순천을 지키게 하였으며, 의능은 좌수영에 머물며 방위하고 있다가 적의 형세에 따라서 혹은 육전, 혹은 해전에 참전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수군의 전력을 보강하기 위해서 순천의 의병장 성응지와 의승장 삼혜 및 의능에게는 파손된 전선을 수리해 타고 해상전투에 참전하도록 지시하였다.2) 이들 해상의병은 해상과 전라좌수영에서 가까운 연해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지만 전투에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보좌하기도 하고, 때로는 군량보급의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위에는 보는 의병장 성응지나 의승장 삼혜․의능 외에도 전라좌수영 관내에 거주했던 전직, 또는 현직관리들 중에는 자신들이 직접 전선을 마련하여 의병활동에 참여한 예도 있었다. 즉 전만호 李元男이 義軍을 인솔하여 전선을 타고와 전라좌수군에 소속하였고, 順天監牧官 趙玎도 스스로 선박을 준비하여 집안의 노예와 목동을 이끌고 부산포해전에 자원 참전하였다. 또한 본래는 陸将이었던 강진출신의 裴慶男 같은 경우에는 身病으로 인해 향리에 있다가 이순신을 통하여 해전에 자원해온 사례도 있었다. 그가 이순신에게 보낸 글 속에서, “바닷가 강진에서 生長한 사람으로 선박에 다소 익숙하므로 수군에 소속하여 죽음으로써 討賊하기를 원한다”3) 라고 한 것을 보면, 바다와 선박에 익숙한 연해민들은 육전보다 해전에 자원한 예가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연해지역에서 일어난 해상의병이 전라좌수군과 연계되는 과정에서는 육상의병과의 마찰도 없지 않았다. 특히 三恵와 義能이 거느린 의승병의 경우, 이들의 지휘통솔 및 소속문제를 놓고 육상의 의승군과 전라좌수군 사이에 상당한 갈등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전국 의승군의 총수인 惟政과 의승장 処英 등이 수군에 자원한 의승병들을 탈취해갔을 뿐 아니라 임의로 면역․면천공문을 발급해 주며 軍糧捧納을 독촉하는 사례가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장계를 통하여 그 불법성을 조정에 고발함과 동시에 그들을 엄중히 懲治할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전라도 연해지역에서는 수륙 양면에서 의병이 일어나 총동원체제를 이룬 가운데, 해상의병은 유생층이나 전직관료 및 승려계층이 주도하여 바다와 선박에 익숙한 농어민과 천민층을 이끌어 봉기하였다. 따라서 이들 해상의병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작전지휘를 받거나 또는 그의 통제하에 들어가 해전에 참전하기도 하고, 혹은 전라좌수영 관내 해안방어의 임무를 수행하는 등 전라좌수군의 전력보강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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