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01년 방문한 부산 바닷가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텟짱 ⓒ권철 |
오는 18일, 전라남도 국립소록도병원에서 개원 100년 만에 처음으로 ‘한센회복자’ 사진전이 열린다. 사진의 주인공은 ‘텟짱’. 일본 구사쓰의 한센인 요양소 ‘낙천원’에 살았던 그는 시인이자 한센회복자였다. 1997년부터 텟짱이 사망하던 2011년까지, 14년 동안 그를 촬영해온 다큐멘터리 사진가 권철은 ‘한센병에 감사한 시인’이라고 텟짱을 소개한다. 14년의 기록은 지난해 9월 출간한 사진집 『텟짱-한센병에 감사한 시인』에 담기기도 했다. 그러나 ‘촬영했다’라는 표현으로는 사진의 질감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다. 사진은 텟짱의 신체로 드러나는 한센인의 삶, 그 전체를 호출한다.
텟짱, 치욕과 울분의 한센병에 ‘감사’한 시인
일본 관동대지진이 일어나던 1923년. 아오모리현 기타 쓰가루에서 태어난 나가미네 도시조. 열세 살에 한센병이 발병하고 열일곱 살에 한센병 판정을 받은 그는 한센인 수용소에 강제 격리·수용된다.
당시 한센인들이 수용소에 입소하며 가명을 쓰는 풍토에 따라 그 역시 본래 이름을 지우고 ‘사쿠라이 테츠오’라는 이름을 얻는다. 사쿠라이 테츠오, ‘텟짱’이라 불렸던 사내. 이름을 지우고 새로 얻는다는 것은 과거 삶을 지우고 새로운 삶으로 입성하는 것과 같았다. 새로운 삶이란, 한센인의 삶이었다.
스물두 살 되던 해, 그는 요양소 내에서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결혼한다. 그러나 한센인이라는 이유로, 임신한 아내는 임신 중절을 당하고 시간이 지나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텟짱 자신도 약의 부작용으로 신경통과 결절, 궤양, 실명 등이 덮치면서 건강이 악화하고 몸의 감각도 점차 사라진다. 한센인 요양소에서 평생을 산 텟짱. 그러나 ‘나병을 바로 알게 되던’ 어느 날, 입을 열기로 결심한다.
아버지의 엄명을 받들어 살아온 45년의 세월
나는 죽은 사람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중략)
이제는 입을 열자
나의 출생은 죄가 아닐뿐더러 내 병 또한 악의 소행이 아닐 터
나를 용서하거라, 그날 아침 아버지가 저에게 하신 말씀처럼
저 또한 지금 이렇게 당신께 용서를 빕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의 이해를 구하고자 당신과의 계(戒)를 파(破)하였으므로….
- 사쿠라이 테츠오, 파계(破戒) 중
이제는 입을 열자. 그리하여 텟짱은 권철에게 그러한 요청을 했는지 모른다.
“나는 내 얼굴을 봐달라고 말하고 싶다네. 이것이 바로 한센병의 모습이라고 말야. 우리들이 죽고 나면 아마도 이 나라에는 한센병이 사라지고 말겠지. 그러니까 분명 귀한 기록이 될 거야.”
![]() 담배를 손에 쥔 텟짱 ⓒ권철 |
텟짱은 깊은 고통과 슬픔에도 그 삶을 살아온 자신에게 긍지를 가진 인간이었다. 병으로 일그러진 신체를 감추기보다 드러내길 원했다. 자기 자신을 ‘증언’으로 기록해주길 요청했다. 그래서 권철의 기록은 텟짱이라는 사람에 대한 기록이자 한센병에 대한 기록이다. 14년, 그 세월 동안 텟짱은 그에게 곁을 내주었고 권철은 그의 곁에 머물렀다.
한센병에 대한 작업은 텟짱을 시작으로 낙천원에 있는 또 다른 한센인들과 일본 다마 전생원의 조선인들에까지 가닿는다. 취재는 쉽지 않았다. 그들 중 절반은 촬영을 거부했다. 재일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이름 밝히길 거부하는 이도 있었고, 사진은 찍되 자세한 이야기는 삼키는 이도 있었다. 재일조선인이라는 억압과 한센인이라는 굴레 속에서 살아온 이들의 삶은 기구했다. 그리고 한국엔 여전히 고립된 섬, 소록도가 있었다.
텟짱 또한 병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연(緣)을 끊어야 했고 죽고 나서야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한센병은 1940년경 약이 발명되면서 완치가 가능해졌다. 따라서 ‘한센인’이라는 명칭 대신 ‘한센회복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이들이 한센병에서 완치되고 전염에 대한 우려 또한 없음을 드러내야 한다고 권철은 말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알고 있는 이들은 드물다. 그래서 ‘한센인’이라는 이름엔 여전히 치욕과 울분의 역사가 묻어난다. 텟짱의 삶은 그러한 한센인의 삶이었다.
한센병, 완치됐지만 여전히 ‘침묵’하는 한국 정부
1994년 일본으로 건너간 권철은 꼬박 20년을 채우고 지난해 한국에 돌아왔다. 아직 한국에선 낯설지만 그는 번역서 2권과 지난해 일본에서 출판된 자서전을 포함해 총 14권의 책을 낸 저명한 사진가다.
그가 텟짱을 처음 만난 시기는 일본에서 나병예방법이 폐지된 다음 해인 1997년, 시부야 사진전문학교에서 사진을 공부하던 때였다. 제자들과 함께 창작시 모임 참석차 낙천원에 가던 게이센 대학 모리타 교수의 제안으로 그 길에 동행하게 됐다. 그곳에서 텟짱을 만난 권철은 어린 시절 고향에 대한 이야기로 그와 마음을 트게 되면서 우정을 쌓았다.
1967년생인 권철은 경북에서 나고 자랐다. 그가 살던 동네 옆마을도 한센인 집성촌이었으며, 당시엔 오일장만 가도 벙거지 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손에 붕대 감은 이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권철에게 한센인은 낯선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 그 역시 한센병에 대한 잘못된 정보로 그들을 오인하고 있었다.
당대의 풍경은 박정희 전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행보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1960년을 묻다-박정희 시대의 문화정치와 지성> 등을 쓴 성균관대학교 국문학과 천정환 교수는 과거 경향신문 기고에서 1970년대를 “한센병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사회적 배제가 여전하던 시절”로 그린다. ‘그럼에도’ 1970년대 초 육영수 여사는 전남 나주, 전북 익산 등의 한센인촌을 방문하고 소록도 한센병 환자 자녀들을 청와대로 불러 접견했다. 이에 대해 천정환은 “육영수의 ‘봉사 신화’가 만들어진 데는 한센병 환자를 도운 일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듯하다”라고 평했다. 이미 완치가 가능했음에도 한센인은 병을 옮기는 두려운 존재로 그려진 거다. 한센병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권철은 “과거사 청산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당시 정부는 아마 이들 병이 다 나았고 전염이 안 되리라는 걸 알았을 거다. 그런데 ‘자신들의 동상을 세우기 위해’ 정부는 그들을 ‘환자’라고 칭하며 여전히 병이 현재진행형인 것처럼 보이게 했다. 피해자를 더욱더 피해자로 만듦으로써 가해를 가한 거다. 한센병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교과서에 쓰거나 학교에서 한 시간씩이라도 교육하면 되는 문제였다. 일본의 경우, 1990년대까지 강제 격리·수용했으나 2000년대 초반 법을 제정해 모든 피해자에게 명예회복과 보상금을 지급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보상도 제대로 안 하고 있다. 정부는 한센병이 전염병이 아님을 공식적으로 홍보하고 알려야 한다. 이것이 과거사 청산이다. 일본에 대해서만 과거사 청산을 요구할 게 아니다.”
![]() 구 소록도갱생원 검시실 검시대 ⓒ권철 |
법에 따라 일본은 과거 격리·수용되었던 이들에게 1인당 800만 엔에서 1400만 엔까지 손해배상을 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2007년 제정한 ‘한센인피해사건의 진상규명 및 피해자 생활지원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1인당 15만 원의 생활지원금만을 지급할 뿐이다. 이마저도 기초생활수급자이거나 의료급여 수급자인 경우 ‘이중지급 금지’를 이유로 받지 못한다. 고령의 피해자들은 다시 한 번 ‘국가책임을 묻기 위해’ 대표적인 인권침해인 단종·낙태에 대한 국가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작가 권철, 그만의 저널리즘
지난해 3월 한국에선 권철이 1996년부터 2013년까지 일본 신주쿠 가부키초의 밤거리를 담은 책 『가부키초』도 발간됐다. 이 책은 일본에서 고단샤 출판문화상을 받았다. 그런데 텟짱 사진과 비교해 사진 양이 제법 차이 난다.
“촬영 기간에 비해 텟짱 사진은 양이 적다. 아마 신문사의 카메라맨으로 텟짱과 작업했다면 ‘좋은 사진들’을 많이 찍었을 거다. 그러나 텟짱과는 ‘같은 인간으로서’ 만나는 시간이 많았다. 외부인의 경우 별도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자야 했지만, 나는 자주 가다 보니 원생들이 생활하는 생활동의 텟짱 방에서 같이 잠들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사진 찍을 순간에도 카메라를 들고 있기보다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았다.”
‘선’이란 것이 있다면 종종 그 선은 무너졌다. 사진 찍는 것조차 잊어버릴 때도 있었다. 그래서, 상대방이 곁을 내주었을 때만 찍을 수 있는 사진들이 있다. 그 사진들은 단 한 번의 만남으로는 찍을 수 없는 무게고 깊이다. 다큐의 힘일 것이다. 그런데 같은 ‘다큐’인데 가부키초는 또 다르다. 공간을 파고들되 사람들과의 거리를 팽팽히 유지하는 묘한 긴장감이 서려 있다.
“가부키초는 가부키초의 특성이 있다. 그 안엔 권력, 야쿠자, 좋은 놈도 있고 나쁜 놈도 있고. 그래서 그에 대한 거리감이 있다. (피사체와의 거리가) 100미터라면 텟짱과는 90미터까지 다가가서 온기를 나눴고 가부키초는 70미터에서 에너지를 멈췄다. 그러나 어린아이들 사진에선 거리감이 좁혀진다. 고코로짱의 경우, (비유하자면) 거리가 95미터까지 좁혀졌다. 너무 깊게 들어갔다. 때로는 내가 그 아이의 아빠가 된 기분이었다.”
고코로짱은 권철이 가부키초를 촬영하던 당시 만난 네 살짜리 여자아이다.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 어머니는 정신장애가 있었다. 홈리스인 부모 따라 아이도 태어날 때부터 홈리스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일본에선 책 『가부키초의 고코로짱』이 별도로 출판됐다. 고코로짱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아이는 결국 보호시설에 보내졌다. 권철은 고코로짱이 성인이 되어 시설에서 독립하게 될 때를 대비해 고코로짱 사진집으로 얻은 인세를 모두 보관하고 있다. 그 책의 인세는 그 아이의 몫이라는 거다.
![]() ▲다큐사진가 권철. |
너무 가까워 때론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그러나 권철은 “후회하지 않는다”라고 단호히 말했다. 사진을 통해 현실을 알릴 수 있는 순간을 개인적 안타까움으로 놓친 것 아니냐는 물음에도 “그러한 비판도 받았다”라고 덤덤히 답했다. 그것은 아마 ‘나는 무엇을, 어떻게, 왜 찍는가’라는 근본 물음과 닿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얼마 전 한 인터뷰에서 “보도 사진가는 ‘사실’을, 다큐 사진가는 사실을 치고 들어가 그 안에 내재하는 ‘진실’을 찍는 것”이라고 했다. 그에게 사실과 진실의 차이에 관해 물었다.
“세월호를 예로 들어보자. 사람이 물에 빠졌고 구하려다가 못 구한 게 ‘사실’이다. 그런데 그 사실 속에 숨겨진 진실은 무엇인가? 진실을 보도하는 매체가 있었나? 진실은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 때 손을 대는 거다.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면 건드릴 수 없다. 내 어깨를 그 삶의 무게에 맞춰야 한다. 그러나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만 호랑이가 되어선 안 된다. 호랑이 굴에서 다시 나와야 한다.”
2008년 중국 사천대지진 때 지진으로 다리를 잃은 소녀를 만났다. 후에 자신의 카메라를 처분해 의족을 만들어 선물했다. 텟짱을 만나선 인간의 존엄을 배우고 비로소 진정한 다큐 작가가 될 수 있었다. 한센병과 한센회복자에 대해 바로 알리는 것은 텟짱과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다. 진실에 대한 복무 같은 것. 어쩌면 이것이 그만의 저널리즘인지 모른다.
“과거는 중요하다. 과거를 바로 알고 조명해야 오늘이 바로 서고 미래를 개척할 힘이 생긴다. 이 전시를 통해 한센병에 대해 바로 아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생긴다면 행복하다.”
텟짱 사진전이 3월 18일부터 21일까지 국립소록도병원 1층 전시실과 야외공원에서 열린다. 이어서 여수, 대전, 전주, 서울에서도 전시가 예정되어 있다.
5월엔 제주도 해녀 관련한 작업을, 8월엔 일본 야스쿠니 작업을 공개할 계획이다. 또한 그의 마음을 붙잡는 주제는 원전. ‘하고 싶진 않은데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자꾸 든단다. 진실의 무게에 진동하는 그의 행보가 주목되는 이유다.
출처 :참샘동호회 원문보기▶ 글쓴이 : 루시오
|
첫댓글 즐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