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3 성공과 회복원칙(23) 나중이 좋아야 되는데! [대하26:16-23]24.6.9 주일2부-3부설교
인생은 처음보다 나중이 좋아야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서 처음보다 나중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역대하 26장은 웃시야 왕에 대한 내용입니다.
열왕기서 에서는 웃시야의 이름은 ‘아사랴’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뜻은 '여호와는 도움이시다'입니다.
역대기서에서 표현한 ‘웃시야’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힘이시다'입니다.
그래서 역대하 26장은 '힘'에 대한 언급들이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웃시야는 아버지인 아마샤가 북이스라엘에 포로로 잡혀갔던 16세에 남 유다를 섭정하였으며,
10년 후에 부친 아마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 나서는 부친 아마샤와 공동으로 섭정을 하게 됩니다.
그 이후 아마샤가 살해당했을 때부터는 52년 동안 왕으로서 남 유다를 통치하게 됩니다.(왕하26:3)
웃시야 왕은 아버지 아마샤를 본받아서 정치를 잘하였습니다.
암몬에게서 조공을 받았습니다(8절). 나라가 강해져서 애굽 변방까지 지경이 넓어졌습니다(8절). 그곳은 광야입니다.
그 광야에 망대를 세우고, 물을 많이 개발하여 사막을 옥토로 만들었습니다.
농토를 늘리고 목축을 늘렸습니다(10절). 요즈음 말로 황금 시절을 누리게 하였습니다.
국방도 튼튼하게 만들었습니다. 군사 수가 307,500명 이었습니다.(10절)
모든 일이 시온의 대로를 달리는 것같이 순탄하였습니다.
대하 26장14절-15절에는 웃시야 하나님께 받은 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웃시야가 그 온 군대를 위하여 방패와 창과 투구와 갑옷과 활과 물매 돌을 예비하고 또 예루살렘에서 재주 있는 사람들에게 무기를 고안하게 하여 망대와 성곽 위에 두어 화살과 큰 돌을 쏘고 던지게 하였으니
그 이름이 멀리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더라”
모세가 그렇습니다. 모세가 모세된 것은 결코 모세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양을 치려고 가지고 있던 지팡이로 14번 기적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지팡이가 뱀이 된 적이 있습니다.
지팡이로 반석을 치니 물이 나왔습니다.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있을 수 없는 기이한 일입니다.
그 지팡이로 홍해를 치니 바다가 갈라져 길이 났습니다.
기이한 도우심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바울도 그렇습니다.
바울이 사용하던 손수건만 아픈 사람에게 얹어도 병이 나았습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입니다.
다니엘도 그렇습니다.
죽이려고 사자굴 속에 넣었는데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주내 주셔서 사자 입을 막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으로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도 그렇습니다.
헤롯이 기독교를 핍박하면서 베드로를 사형시키려고 잡아 감옥에 넣었습니다.
천사가 와서 옥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기이한 도우심으로 베드로는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어제와 오늘도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모든 분들에게 이런 선물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기이한 도우심으로” 복되고 창대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떤 이들에게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이 주어지는 것일까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웃시야의 좋은 시작(열왕기하26:1-15)
1) 웃시야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누린 일은 ‘엘롯’을 건축한 결과로 나타났습니다.(왕하26:2)
솔로몬 시대에 엘롯을 점령한 이후, 웃시야가 다시 이 지역을 점령하고 무역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내용들이 바로 웃시야가 하나님께 받은 축복이었습니다.
2)웃시야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였습니다.
“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대하26:4)
3)하나님을 찾으며 스가랴가 전하는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찾았던 웃시야에게 하나님께서는 큰 축복을 주셨고, 그 축복은 웃시야를 거쳐서 유다 백성들에게까지 흘러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군사적인 면과 농업에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성경은 웃시야의 축복을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셨다’, ‘형통하였다’, ‘강성하다’ 등의 힘과 관련된 단어들로 표현하였습니다.
웃시야의 나쁜 결말(역대하2616-23)
1)웃시야가 누린 강성함에서 떨어진 것은 ‘교만함’ 때문이었습니다.
역대하26장16절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월권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파괴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나병에 걸리게 됩니다.
나병은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성전 안에서의 분향(출 30:1-10)을 교만하게 웃시야가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대통령이 어느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간단한 인사말이나 연설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제사장이자 목사의 고유 영역인 ‘축도’를 한다고 합시다. 그것은 너무나도 가당치도 않는 행동입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었던 사울 왕도 이러한 잘못을 범하다가 하나님의 버림을 당하게 됩니다.
사무엘상13장8절-14절에 보면,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번제 드리기를 마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니 사울이 이르되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2)이러한 행동에 대한 책망을 들으면서도 오히려 제사장에게 화를 냄으로써 심판을 자초하게 되었습니다(17절-19절).
“제사장 아사랴가 여호와의 용맹한 제사장 팔십 명을 데리고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가서 웃시야 왕 곁에 서서 그에게 이르되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 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할 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왕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이다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화를 내니 그가 제사장에게 화를 낼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들 앞에서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긴지라”(대하26;16-19)
웃시야는 하나님을 배반하거나 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웃시야는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교만의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리고는 회개하기는 커녕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뻔뻔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자 즉각적인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나병’이 든 것입니다.
이 심판으로 웃시야는 평생 성전과 왕궁에는 들어가지 못하였으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나아가지도 못하였습니다.
웃시야의 안타까운 결말을 볼 때, 바울이 했던 순종에 대한 교훈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웃시야 왕에 대하여 역대기 저자는 ‘시작은 좋았지만 그 끝이 부족했다’ 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삶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웃시야 왕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서 결론하려고 합니다.
1. 좋은~~~ 것을 좋아~~하여야 한다.
나쁜 것을 좋아하는 이에게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이 임하지 않습니다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웃시야가 예루살렘에서 성 모퉁이 문과 골짜기 문과 성굽이에 망대를 세워 견고하게 하고 또 거친 땅에 망대를 세우고 물웅덩이를 많이 팠으니 평야와 평지에 육축을 많이 기름이며 또 여러 산과 좋은 밭에 농부와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를 두었으니 농사를 좋아함이더라”(대하 26:9-10)
웃시야 왕은 왕인데도 불구하고 농사를 좋아하였습니다.
당시 왕들은 대부분이 사냥을 좋아하고 건축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러나 웃시야 왕은 농사를 좋아하였습니다.
그래서 거친 땅을 개간하였습니다. 망대를 세우고 물웅덩이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풀들을 길러 목축과 농사를 겸하기를 좋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농사를 좋아하는 그에게 풍성한 열매를 주었습니다.
좋은 것을 좋아하여야지 안 좋은 것을 좋아하면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OECD 국가 가운데 자살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자살율이 높은 곳이 강원도입니다. 강원도에서도 가장 자살이 많은 곳이 태백과 정선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카지노 때문입니다.
카지노 하루 수입이 20억원입니다. 3000명의 딜러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재산을 탕진하고 있습니다. 놀음은 한번 하기 시작하면 안 할 수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돈을 좀 따면 따는 재미에 하게 되고, 잃으면 도로 찾으려고 하게 됩니다. 결국은 가지고 있는 것 모두를 없앨 때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살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라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목회하고 있는 목사님이 생명의 전화를 만들어 놓고 자살 방지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안 좋은 것을 좋아하면 문제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복이 임할 수 없습니다.
좋은 곳을 좋아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축복하여 주십니다.
안 좋은 마약을 좋아하면 안 됩니다.
술 담배를 안 좋아야 해야 합니다.
예배드리기를 좋아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영혼이 회복됩니다.
구제를 좋아하는 사람은 윤택하여집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지혜로워집니다.
기도를 좋아하는 사람은 응답을 받습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은 건강하여집니다.
복음을 전하기를 좋아해야 합니다.
좋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기이한 일을 주십니다.
2.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좋아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대하26:5)
이 말은 웃시야 왕이 스가랴 선지자와 같이 하기를 좋아했다는 말입니다.
웃시야는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사람인 스가랴와 함께 있기를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웃시야 왕은 영적인 사람을 좋아하였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영적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영적 역사를 싫어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영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입니다.
영적인 성경을 좋아하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입니다.
영의 사람은 영적 현장인 예배드리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에게 기이한 도우심이 임하게 하십니다.
3.하나님을 구할 동안에만 형통하게 하신다.(대하26:5)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
이 말씀은 이렇게 말해도 좋습니다.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만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
딴 짓을 할 때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화]
삿갓조개 이야기를 알고 계십니까?
삿갓조개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조개가 바위에 붙어 있으면 얼마나 단단하게 붙어 있는지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조개를 떼려고 하면 바위가 부스러진다는 것입니다.
그 조개가 배 밑에 붙어 있을 때 떼려고 하면 배에 구멍이 난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거냥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500km로 불어오는 바람과 파도에도 견딘다는 것입니다.
삿갓조개는 자기가 붙어 있는 것에 이렇게 집착을 합니다.
우리는 주님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떨어지지 말고 붙어 있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
“오직 예수!”
주님에게 이렇게 붙어 있으면 주님은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4-5)
하나님을 찾을 때와 하나님을 찾지 아니할 때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크리스찬’으로 시작하여 ‘사탄’으로 끝났습니다. 이런 이를 가리켜서 ‘크리스탄’이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바울은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탄으로 시작하여 진실한 크리스챤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시작하여 믿음으로 마쳤습니다. 크리스찬입니다.
사람은 처음보다 나중이 좋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과정 속에서 힘듦도 있고, 서글픔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가 좋아지면 칭찬합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의 인생의 끝이 좋아지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붙들고 놓치않는 것입니다.
요한1서2장15절-17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다같이 찬양 –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원제:돌아서지 않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