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처럼 살고 싶다
최원돈
제주 한림 금악오름 아래 삼만 평 황무지에 ‘탐나라공화국’이 세워졌다.
십여 년 전 물도 나무도 없는 황무지에 한 사람이 망치 하나 달랑 들고 바다를 건너 이곳으로 왔다. 쉰셋에 ‘박수 칠 때 떠난다’라며 14년을 기다렸다. 이 땅이 중국인 손에 넘어가면 중국 땅이 될 것이요 그러면 나라를 팔아먹은 놈이 될 거라며 팔을 걷어붙였다. 그가 강우현이다.
황무지에 꽃과 나무를 심고 연못을 파고 하늘 물을 받아 호수를 만들었다. 그 물은 폭포로도 변했다. 그의 상상은 현실이 되어 쓰레기는 ‘쓸애기’로 변해 꿈을 이루어 갔다. 헌책들을 모아 도서관을 만들었다. 도서관은 아틀리에로 변했고 책장은 전시 공간이 되었다. 그가 말한 한마디 한마디는 어록이 되어 시가 되고 산문이 되었다. 헌책 도서관은 30만 권까지만 그 숫자를 헤아렸다. 책장에 꽂지 못한 책들은 책 무덤에 묻어 백 년 후 엔 책 유물관으로 부르게 될 것이라 했다.
그는 어느 날부터 노자에 꽂히더니 ‘노자예술관’을 만들었다. 쓸모없는 땅을 파 노자의 도덕경을 실천했다. 중국 하남성 ‘노자 사상 연구소’로 날아가 노자를 외쳤다. 그곳 사람들은 진짜가 나타났다며 노자 관련 서적들과 노자의 돌까지도 기증해 주었다. 그는 노자예술관에서 매년 ‘노자 포럼’을 열먼서 ‘노자처럼 살면 노자가 될까’라며 스스로 묻곤 한다.
중국의 석학 ‘임어당(林語堂 린위탕)’은 ‘누가 인생을 가장 즐길 수 있는가’라고 그의 저서 《생활의 발견》에서 말했다. 그는 ‘어떻게 인생을 즐길 것인가’라며 인생을 있는 그대로 보며 평화롭게 일하고 유쾌하게 살려면 어떤 생활을 할 것 인가라고 물었다. 인생을 즐길 수 있는 이상적인 성격은 따뜻한 정이 있고 근심이 없으며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 했다. 이는 맹자가 말한 대현(大賢)의 성덕(成德)으로 정(情: 마음의 작용)과 지(智: 사물의 도리 시비선악을 판단하는 능력. 지혜)와 용(勇: 용기 결단력)이라 했다.
임어당은 노자의 철학인 평화 관용 소박 지족(知足)을 중국인의 최고 이상으로 보았다. ‘다투지 않으므로 천하가 그와 다투려고 하지 않는다.’라며 움직이면 추위를 이길 수 있으나 고요하면 더위도 이길 수 있어 맑고 고요함이야말로 천하의 바른 법이라 했다.
강우현은 맹자의 정(情)· 지(智)· 용(勇)을 실천코자 했다. 자신이 생각하고 말한 것은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반드시 실천하고 추진한 용기 있는 사람이다. 제주도의 ‘수눌음(품앗이) 정신’으로 정과 지로 사물을 판단하고 무슨 일이든 되게 한다.
그는 경영자이며 예술가로 돌을 깎아 조각하고 벼루에 먹을 갈아 자신의 어록을 서예 작품으로 만들었다. 서양화가로, 일러스터로, 디자이너로, 붓과 망치와 용접기로 자신의 꿈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진정한 예술가이자 자유인이다. 그는 지금도 탐나라공화국을 만들고 있다.
그의 아틀리에 도자로(陶磁爐)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지나온 자신의 날들을 이야기했다. 신명 난 사람처럼 한 시간이나 탐나라공화국 신화를 뱉어냈다. 용광로에서 펄펄 끓는 용암 한 국자를 퍼내어 위에서 부어 보였다.
“현무암은 이렇게 액체가 될 수 있어 ‘제주陶(도자기)’로 만들 수도 있지요.”
그는 시류에 물들지 않고 사사로운 이익에 연연하지 않았다. 오직 그가 꿈꾸어 온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묵묵히 앞만 보고 가고 있었다. 자신의 도록에다 일필휘지로 쓰더니 뒤집어 보니 내 이름 석 자가 나타났다. 그가 개발한 ‘꺼꿀체’이다.
“최 선생 제주 한달살이하는 동안 꼭 한 번 들르시오.”
“막걸리라도 한잔 나누고 싶소.”
그는 노자예술관 길목까지 나와 우리를 배웅하며 악어작품을 설명한다.
“이렇게 보면 악어 이빨로 보이지만 돌아서 보면 꽃이 되지 않소?”
”우리네 세상도 마찬가지 아니겠소. 하하하”
봄비가 내린다. 그는 직원을 불러 우의를 가져오게 했다. 우리는 우의를 입고 봄비를 맞으며 노자를 만나러 허우적허우적 걸었다. 노자예술관 길목에는 그가 만든 온갖 예술품들이 봄비를 맞으며 더욱 싱그럽게 다가온다. 돌담길을 돌아 노천 광장을 지나며 정자에 올라 무위(無爲)의 춤을 추어본다.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 名可名 非常名(명가명 비상명)’
도를 도라고 말할 수 있으면 영원한 도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이라고 말할 수 있으면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노자처럼 생각하고 노자처럼 먹고 자고 노자처럼 공부하고 노자처럼 살다 보면 노자처럼 될까?’ 노자예술관엔 노자의 서적들로 가득하다. 골방 안 깊숙이 틀어박혀 노자를 만나 노닐 수 있으리라.
봄비에 젖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노자의 집’ 기와지붕 아래 툇마루에 앉아 상념에 잠겨 노자를 꿈꾸어 본다. 나는 어느덧 노자가 되어 무위의 대자유인이 된 듯하다. 하얀 수염에 허연 눈썹을 휘날리며 노자가 대문을 열고 들어온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제는 없다. 내일은 모른다. 그래서 오늘이 좋다.“
그는 이 시대의 진정한 노자(老子)가 아닐까.
나도 노자처럼 살고 싶다. (2023. 02.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