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이 사람 - 다음과 같은 것이 당시의 내 생각이었다, 화장을 잔뜩 했던 문둥이 같은 이 인간이, 바로 얼마 전에 회색의 군중들이 그렇게도 동경하여 꿈에도 그리던, 군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자였던가!
이 보기 싫은 가련한 인간이 구원받은 나비의 진정한 형상이었던가!
지금도 여전히 속고 있는 수많은 사람의 눈은 아름다움과 우아함과 완전함에 대한 그들의 은밀한 꿈을 이 나비가 실현시켜 주었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은 밤이 되면 환상적으로 빛을 발할 수 있는 구역질나는 연체동물과 완전히 똑같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게도 기분 좋게, 아니 그렇게도 열광적으로 이 사람에게 현혹당한 어른들, 세상사에
대해 대체적으로 알고 있는 어른들이 자기들이 기만을 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였단 말인가? 혹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기만을 기만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인가?
후자가 아마 더 가능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세히 생각해 보면, 언제 그 개똥벌레는 진정한 형상으로 나타난 것일까?
그 개똥벌레의 시적인 불꽃이 되어 여름밤을 헤매고 다닐 때인가?
아니면 미천하고 보잘 것없는 생물로서 우리의 손바닥에서 꿈틀거릴 때인가? 어느 쪽이었을까?
그것에 대해서 결정 내리기를 삼가라!
오히려 이전에 보았다고 믿고 있는 광경을 생각해 보라!
다시 말해, 유혹하는 화염 속으로 조용히 그리고 미쳐서 뛰어든 가련한 나방이나 모기들의 거대한 무리들을 다시 생각해 보라!
유혹을 당해 보자는 호의에 얼마나 일치된 마음으로 동의했던가?
여기에는 명백히 하느님 스스로가 인간의 본성에다 심어 놓은 보편적인 욕망이 지배하고 있는데, 뮐러로제의 재능은 이 욕망에 부합하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의심할 여지없이 인생의 살림살이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시설이 되어 있으며, 그 시설의 고용인으로서 이 사람이 채용되었고 또 임금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가 오늘 저녁 성공을 거두고, 또 틀림없이 매일 저녁 성공을 거두는 것에 대해서 그에게 경탄을 보내는 것은 지극히도 당연한 것이리라!
너의 혐오감을 억누르도록 하라!
그리고 그가 보기 흉한 뾰루지를 남 몰래 의식하고 느끼면서도 사람을 현혹시키는 자신만만 한 태도로 대중들 앞에서 행동할 수 있었다는 점을 완전히 느껴라!
물론, 불빛과 지분, 음악과 거리 등이 도움이 되었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관중들로 하여금 관중들의 마음의 이상을 자기라는 인물 속에서 들여다보게 할 수 있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관중들의 마음을 끝없이 위로하여 생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었다는 점을 완전히 느껴라!
더욱 많은 것을 느껴라!
무엇이 이 악취미의 익살꾼을 몰아대어 밤이면 밤마다 자기 자신을 빛나게 할 수 있게 가르쳐 주었는지 스스로 물어보라!
이전에 그의 육체를 손가락 끝까지 꿰뚫고 지배하고 있었던 매혹의 마력이 숨어 있는 비밀의 근원을 물어보라!
그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개똥벌레 한테 빛을 내도록 가르쳐 주는 것이 얼마나 말로 나타내기 어려운 힘이며, 말로써 아무리 달콤한 표현을 해도 당하지 못할 그런 힘이라는 것을 기억 하기만 하면 충분하다.(왜냐하면 너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이 사람은 자기의 연기가 관객의 마음에 들었다고 하는 보증의 말을, 그것도 진실로 보통 이상으로 관객의 마음에 들었다고 하는 보증의 말을 아무리 들어도 만족스럽지가 않다는 것을 명심하라!
순전히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있던 관중에 대한 애착심과 충동으로 인하여 그는 자기의 예술에 있어서 숙달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관중에게 삶의 즐거움을 나누어 주고, 여기에 대해 관중은 박수갈채로서 그를 포식시켜 주었는데, 이것은 서로 간에 만족을 주는 행동이 아닐까?
다시 말해 그의 욕망과 관중의 욕망이 서로 만나 마치 결혼식이라도 올린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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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결국에는 그리고 전체적으로 볼 때, 나의 기질은 진지하고 남성적이어서, 정력을 소모시키는 육체의 쾌락에서 엄격하고 긴장된 행태로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돌아가기를 요구했다.
또한 동물적으로 사랑을 실행하는 것은 내가 언젠가 한번 본능적으로 '커다란 기쁨' 이라고 이름 붙였던 것을 향유하는 데 가장 야비한 방법이 아닐까?
동물적인 사랑의 실행은 너무도 철저하게 우리의 욕망을 만족시킴으로써 우리를 쇠약하게 만들며, 또 한편으로는 당분간 세상이 가진 광택과 매력을 탈취해 버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들 자신의 사랑스러운 매혹을 탈취해 버림으로써 우리를 세상을 사랑하기에 아주 서투른 애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사랑이란 매혹은 그것을 갈망하는 사람에게만 있을 수 있는 것이며, 그것에 배부른 사람에게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 관한 한, 사랑 행위의 마지막에 이르러 욕망을 제한하고 사기꾼처럼 꿀꺽 삼켜 버리는 그러 한 야비한 성적 행위보다 훨씬 우아하고 감미로우며 신비스런 만족의 방법을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무작정 그러한 성적 쾌락의 목적만 노리고 뛰어드는 작자들은 행복이란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인 것이다.
내가 노력하고 있는 것은 언제나 커다란 것, 전체적인 것, 넓은 것으로 향하는 것이었으며, 또한 다른 사람들이 찾지 않을 곳에서 미묘하고 향기로운 만족을 채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옛날부터 그러한 노력을 전문가처럼 했다거나 정확하게 그 한계를 정해놓은 것은 아니었다.
이것이 내가 열정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모르는 듯 순진하게 동정을 지켰던 이유이며, 사실은 일생을 통해 내가 왜 어린애와 같은 몽상가로 살아 왔는지를 설명하는 원인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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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녀가 나간 지 3분이 채 되자마자, 우리들은 누이가 길게 비명을 지르면서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고 또 목적 없이 다시 계단을 올라가서 온 집 안을 뛰어다니는 소리를 들었다.
등골이 싸늘해진 나는 최악의 상태를 예측하며 단숨에 부친의 방으로 뛰어갔다.
그곳에는 그가 옷을 풀어헤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으며, 손은 그의 배 위 불룩 솟은 데에 놓여
있었고, 그의 옆에는 그가 부드러운 자기 심장에다 대고 쏜, 번쩍이는 위험한 물건이 있었다.
하녀 게노베파와 나는 둘이서 그를 소파 위에다 눕혔다.
그리고 게노베파가 의사를 부르러 달려가고 내 누이 올림피아는 여전히 비명을 지르면서 집 안을 돌아다니고, 어머니는 식당에서 감히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는 동안에, 나는 한 손으로 눈을 가린 채 나를 낳아 준 아버지의 식어 가는 육체 곁에 서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의 공물을 드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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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도대체 그 종교 고문관의 말이 내게 그렇게도 비상한 감명을 줄 수가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것을 그 당시 즉석에서 깨달았던 그대로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는 나를 칭찬해 주었다. 그런데 무엇을 칭찬했는가?
내 목소리의 매력적인 울림을 칭찬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해석에 의하면 어떤 공적과 결코 결부될 수 없는 특징 내지 타고난 재주이며, 또 그래서 누군가가 사팔 뜨기라고, 갑상선종이 있다고, 혹은 안짱다리라고 해서 책망할 생각을 못하는 것처럼 그것은 대체로 칭찬할 만한 공적이 없는 특징 내지 타고난 재주였다.
왜냐하면 우리들 시민 세계의 의견에 따르면, 칭찬이나 비난은 오로지 윤리 도덕에만 있을 수 있는 것이며, 자연물에 대해선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약 자연물을 칭찬한다면, 시민 세계의 의견으로 보아서는 옳지 못하고 경솔한 짓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사제 샤또 신부는 이와는 아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내게는 의식적이고 반항적인 독립의 표명처럼 아주 새롭고 대담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으며, 동시에 이러한 표명은 어딘가 이교도적인 순박한 점을 지니고 있어서, 나로 하여금 행복한 명상에 잠기게 하였던 것이다.
나는 자문해 보았다.
"자연적인 공적과 윤리 도덕적인 공적을 엄밀하게 구별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닌가?”라고, 삼촌과 숙모, 조부모들의 초상은 사실상 자연적인 유전이란 방법에 의하여 내가 얻은 장점이 정말로 별로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정말 이러한 장점을 형성시키는 데 내면적으로 조금도 기여한 바가 없었단 말인가?
아니면 오히려 거짓 없는 감정이 다음과 같은 사항을 보장해 낸 것이 아닐까?
그러한 장점이 어느 정도까지는 바로 나 자신의 작품이라는 것과 또 만약 내 정신이 지금보다 더 아둔했더라면, 내 목소리는 너무도 쉽게 천박해지고, 내 눈은 정기를 잃고, 내 다리는 꾸부러지게 되었을 것임을 말이다.
세상을 정말로 사랑하는 자는 그 세상의 마음에 들도록 형태를 갖추게 되는 법이다.
그래서 만약 자연물이 윤리 도덕적인 것의 작용으로 만들어지게 된 것이라면, 내 목소리가 좋다고 그 성직자가 칭찬한 것은 겉보기처럼 그렇게 부당한 것도 아니고, 변덕스러운 것도 아니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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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묘하고 유동적인 사물에 대해서는, 미묘하고 유동적으로 이야기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조심스럽게 보충적인 관찰을 삽입하려고 한다.
인간들이 접촉하는 양극에 있어서만, 즉 아직 말이 없거나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곳, 다시 말해 눈과 눈이 마주치는 곳과 서로 포옹하는 곳 이외에는 원래 행복이란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그곳, 그 경지에만 無구속, 자유, 비밀 그리고 깊은 무의식의 상태가 존재하기 때 문이다.
인간들의 상호 관련 속에 개재된 모든 것은 활기가 없고 미온적이며, 형식과 시민적 타협에 의하여 규정되고, 조건 지어지고, 제한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말이 지배적 역할을 하고 있다.
말이란 지루하고도 냉정한 수단이며, 인간이 길들여지고 절제할 수 있는 예절 문화 과정의 최초 의 고안물이며, 자연이 지닌 열정적이고도 신비로운 영역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물건이다.
그래서 모든 말은 그 자체로 그리고 그것으로서 이미 허튼 소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내 전기를 쓰는 작업에 몰두하면서 지금 이 말을 하고 있는바, 통속적인 표현을 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신중을 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본성이 말 한마디마다 그대로 전달하자는 것도 아니다.
나의 진실한 관심사는 그런 것에 있지 않다.
오히려 나의 관심사는 인간관계의 가장 극단적인, 무언의 영역에 해당되는 것이다.
즉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인간이 서로 낯설어하고 서로 관계를 맺지 못하는 시민적 경지가 아직도 자유로운 원시 상태를 고집하고 있어, 눈초리들이 서로 책임지지 않고 꿈과 같은 외설 행위 속에서 서로 얽히는 영역이요, 그 다음은, 그러한 말이 소용없는 원시 상태에 대하여, 가장 가능한 조화, 친교 그리고 융합 상태를 가장 완전하게 부활시키는 영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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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나이가 더 들어 심사숙고한 결과는, 물론 그 세계에 들어가는 것은 역시 큰 잘못이며, 오류였을 것이라고 나는 깨달았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군신 마르스의 별 아래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적어도 특별하고 실제적인 의미에서는 말이다!
물론 전사 다운 엄격함, 자제심, 위험 등이 나의 기구한 일생의 두드러진 특징을 구성하고 있었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의 생애는 우선 가장 먼저 자유라는 예비 조건인 동시에 근본 조건에 기초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볼품없이 실제적인 처지에 매인 몸이 된다는 것과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 되는 조건에 기초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군인과 같은 생활 방식을 취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군인으로서 살아야만 되겠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아마 어리석은 오해였을 것이다.
사실 자유의 감정과 같은 숭고한 감정을 이성의 측면에서 규정짓고 조정해야만 한다면, 군인처럼 살지만 실제 군인으로 사는 것이 아닌 것처럼, 비유적이지만 글자 그대로가 아닌 것처럼, 비유 속에 살 수 있다는 것은 실제로 자유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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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인간이 가진 욕망에 직업적으로 몸을 바치고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자신 쪽에서 결코 이러한 인간 본성에 깊이 뿌리박은 약점에서 벗어난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사람은 이러한 욕망의 보호, 각성, 만족에 완전히 제 마음과 몸을 바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욕망이 더구나 그 사람의 마음 속에 특별히 생생하게 살아 있지 않다면, 아니 그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서 욕망의 진정한 자식이 아니라면, 그런 욕망을 잘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두가 알다시피, 그런 여자들은 그녀들이 직업적으로 몸을 바치는 많은 애인들 외에, 대개는 자기의 진정한 친구이자 개인적인 연인을 갖는 일이 일반적이다.
그런 연인들은 그녀들과 같은 미천한 계층 출신들이며, 그녀들이 다른 사람들의 꿈을 토대로 삼아 사는 것처럼 역시 그자들도 계획적으로 그녀들의 행복에 대한 꿈을 자기들의 삶의 토대로 삼고 있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이런 작자들은 대부분 개념 없고 폭력적인 건달들이지만, 그녀들 중 한 여자에게 사사로운 정을 쏟아 그녀에게 기쁨을 마련해 주며, 또한 그녀의 장사를 감독하고 조절하며, 그녀에 대한 일종의 기사도적인 보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작자들은 그녀들의 완전한 주인 혹은 지배자로 군림하며, 그녀들이 번 돈을 대부분 갈취하고, 수입이 별로 만족스럽지 않으면 그녀들을 가혹하게 다루지만, 그녀들은 그런 것도 기꺼이 즐겨 견디어 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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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이란 사람을 동등하게 만들어 버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단순한 사고방식을 가져도 좋다.
하지만 나로서는, 두 사람이 똑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결코 그것이 같은 것이 될 수 없다는 대중적인 지혜를 믿고 있다.
물론 극단적일지 모르지만, 내 생각에는 "주정뱅이", "노름꾼" 혹은 "방탕아" 등의 꼬리표로서는 실제로 살아 있는 개개의 경우를 포괄할 수도 없고 규정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상황에 따라 그런 꼬리표를 가지고는 개개의 인간 행동을 결코 진지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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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어쨌든 나는 꾸미고 가장을 하였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현상의 형식 사이의 가면을 쓰지
않은 현실, 즉 '나-스스로의 존재'라고 하는 것은 규정지을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내가 그 두 가지 역할 중의 한쪽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즉 내 말은, 아무리 단호하게 그 훌륭한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고귀하신 신사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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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묘한 길동무는 내게 존재와 생명 그리고 인간에 대해 모든 것이 그곳에서 생겨나고 그곳으 로 돌아간다는 無에 대해서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가 말하기를, 이 지상에서의 삶이란 의심할 여지없이 비교적 급속도로 지나가는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을 뿐 아니라, 존재 자체도 無와 無 사이에 자리 잡은 에피소드적 성질과 같다는 것이다.
존재라는 것은 과거에 항상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앞으로 항상 있을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시초라는 것이 있었으면 종말이라는 것도 있을 것이고, 그러면 공간과 시간도 종말을 고할 것이다.
왜냐하면 공간과 시간은 오직 존재를 통해서만 존재하고, 존재를 통해서 상호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기를, 공간이란 물체 상호 간의 질서나 관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공간을 점유하는 물체 없이는 공간도 존재하지 않으며, 시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간이란 오직 물체의 현존에 의해서만 가능하게 된 사건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운동의 산물이며 원인과 결과에서 나온 것이고, 이 원인과 결과의 연속이 시간에 대해서 방향을 부여하는 것이며, 그것이 없으면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공간성과 무시간성, 그것이 無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無라는 것은 어떤 의미로나 범위가 없는 것이며, 불변의 영원인 것이다.
그래서 다만 임시적으로 공간적 시간적 성질을 가진 존재에 의해서 無는 중단된 것이다.
더 많은 기간이, 아니 영원무공한 기간이 생명보다는 존재에게 부여되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확실히 그것은 끝장이 날 것이다.
그리고 그와 똑같은 확실성을 가지고 시초는 종말과 일치하게 될 것이다.
과연 언제 그런 일이 시작된 것인가?
거부할 수 없는 필연성을 가지고 이미 '망할지어다'를 자기 속에 내포하고 있던 ‘이루어지리라'고 하는 성서의 명령에 의하여, 無로부터 튀어나오게 된 존재의 최초 발작은 언제였던가?
아마 이러한 생성의 '언제'는 결코 오래 되지 않았으며, 소멸의 ‘언제'도 그리 오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삼사 조 년 정도라고 예측할 수 있을지…
그러는 동안에 존재는 이 측정 불가능의 공간 속에서 자신의 요란한 축제를 벌이는 것인데, 이 공간이란 존재의 작품이며 이 공간 속에 존재는 소름끼치는 공허로 충만한 거리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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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쿡 씨는 그런 농담을 하고 난 다음 계속해서 말하기를, 진보라는 것은 있다고, 그것도 의심할 여지없이 진보란 존재한다고 하였다.
즉 직립 원인 피테칸트로푸스에서부터 뉴턴이나 셰익스피어에 이르기까지는 멀고도 결정적인 상
승의 도정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보란 다른 자연계에서 이행되는 것과 똑같이 인간 세상에서도 이행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곳 인간 세상에도 항상 모든 것이 모여 있으니, 먼저 문화와 도덕의 온갖 상태가 있고, 초기 시대에서부터 최근 시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어리석은 자에서부터 가장 현명한 자에 이르기까지, 가장 원시적이고, 가장 둔감하고, 가장 난폭한 친구에서부터 가장 발전한 인간이면서도 가장 섬세한 인간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이 세상에는 함께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가장 섬세한 인간이 종종 자기 스스로 피로하여 원시적인 것에 흠뻑 빠져서, 취한 듯 광포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관한 이야기는 이제 끝이 났다.
하지만 그는 인간에 대해서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할 것이라고 했으며, 나, 즉 베노스타 후작한테도 모든 다른 자연, 즉 유기적 자연이나 단순한 존재에 대하여 호모사피엔스로서 찬양받고 있 는 것을 인정하겠으며, 아마도 이것은 인간이 동물 세계에서 떠날 때, "부가된” 것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런 것이 인간이 가진 지식의 시초이며 끝이라는 것이다.
나는 인생에 대해 내 마음을 사로잡은 매력적인 말로 가장 인간적인 것을 표현했는데, 그것은 바로 '인생이란 단지 에피소드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의 무상성을 비난할 생각은 없고, 그것은 모든 현존하는 것에 대해서 가치와 존엄과 호의를 베푸는 바로 그런 말이라는 것이다.
오직 에피소드적인 것, 즉 처음이 있고 종말이 있는 것만이 흥미롭고 공감을 자아내는 것이며, 무상성에 의하여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즉 전체 우주의 존재는 무상성에 의하여 그 생명을 얻게 되지만 영원한 유일한 것과, 생명도 얻을 수 없고 공감의 가치도 없는 것은 '無'뿐이며, 이 '無'로부터 존재는 파생 되어 그것이 곧 즐거움인 동시에 고역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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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행복이 아니다.
그것은 즐거움이며 부담이다.
그리고 모든 공간적, 시간적인 존재, 모든 물질은 비록 깊고 깊은 잠 속에서나마 이 즐거움에, 이 부담에, 그리고 이것을 지각하는 데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지각이 인간에게, 가장 활발한 지각의 소유자인 이 인간에게 보편적인 공감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보편적인 공감을 말이오." 하고 쿠쿡 씨는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러면서 일어나려고 양손으로 식탁에 의지 하였고, 별처럼 반짝이는 그의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안녕히 주무시게, 드 베노스타 후작." 하고 그는 말했다.
"보아하니 우리가 식당차에서의 마지막 손님인 것 같소.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었구려.
후작을 리스본에서 다시 만나기를 바라오!
원하시면 내가 우리 박물관 안내인 역할을 해 주겠소.
안녕히 주무시게! 존재와 생명에 대한 꿈을 꾸어 보시게!
자기들의 존재의 즐거움과 부담을 지니고 있는 은하계의 혼잡한 회전에 대한 꿈을 꾸어 보시구려!
원시의 골격을 가진 날씬한 팔과 태양의 정기 속에서 생명이 없는 존재가 분열되어 생명 있는 육
체로 변할 수 있는 들판의 꽃을 꿈꾸시구려!
그리고 수천 년 전부터 산골 물가에서 거품과 물결에 목욕하고 냉각하고 씻기는 이끼 낀 돌을 꿈꾸는 것을 잊지 마시구려!
공감을 가지고 현존하는 것들을 들여다보고, 가장 명석한 존재로서 지극히 깊이 잠든 것들을 들여다보시게!
그리고 그들에게 창조의 이름 아래 인사를 보내도록 하시게나!
존재와 행복이 서로 어떻게든지 일치할 수 있다면 모든 존재는 만사형통이라고 하겠지요.
정말로 안녕히 주무시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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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의 수평선에는 지금 막 태양이 올라오고, 붉게 타오르면서 세계의 끝에서 고개를 쑥 내밀고 있었다.
그런데 지붕도 없는 그 방에는 엄청나게 힘세게 보이는 사나이가 팔을 치켜들고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꽃다발을 선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태까지 그런 것을 본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 사나이는 노인도 아니었고, 어린이도 아니었다.
인생의 황금기의 젊은이로 정정하였다.
그리고 그 사나이가 그렇게 힘차고 강했기 때문에, 그것이 그의 행동에 특별한 부드러움을 부여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살고 있었고 그를 어떤 사적인 이유에서 선발해서 그런 직무를 수행하도록 했던 사람들과 그는, 아직 집을 짓는 것을 몰랐고 지붕을 올릴 줄 몰랐다.
그들은 단지 돌을 포개 세워서 기둥으로 만들 수 있었고, 그 기둥으로 그런 행사를 할 수 있는 영역을 꾸민 것이었으니, 힘이 센 그 사나이에 의하여 완성을 본 것이었다.
그런 거친 돌기둥은 전혀 자랑할 만한 이유가 없다.
여우굴이나 곰의 굴 혹은 훌륭하게 엮은 새 둥지가 훨씬 더 나은 지혜와 기술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유용하다는 것 외에는 보잘 것이 없다.
몸을 숨긴다든가, 알을 품는 일 외에는 그들의 생각은 아무 데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둥의 영역은 뭔가 좀 다르다.
그것은 몸을 숨기고 알을 품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들은 지혜의 필요성을 떠나서 고상한 필요성으로 비약하려는 그들의 뜻에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자연계 속에서 그 누가 진실로 인간과 비견될 수가 있으며, 회귀하는 태양에다 직무상의 일로 그 누가 꽃다발을 바칠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것인가!
==
"아니, 대체 왜 그러시죠?
당신은 사랑에 대해서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침묵은 건전하지 못하다는 그럴 듯하게 정당한 원칙에 따라 말씀하셨지 않은가요?
그러나 당신은 사랑에 대해서 너무나도 거친 말씀을 들려주시고, 게다가 야비한 종교적 시까지
끄집어내셨기 때문에, 어떻게 사랑에 대해서 저렇게 냉정하게 말할 수 있는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사랑이라 불리는 이런 것의 존재에 대해서 당신은 아무 감정이 없이 너무도 냉정하게, 그런 것은 건전치 못하다는 식으로 거칠게 말씀하시는지, 당신을 뜯어고칠 의무를, 이런 말을 해서 안 됐지만 당신의 머리를 올 바르게 돌려놓아야겠다는 의무를 느낄 정도입니다.
만일 사랑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로운 눈으로 본다면, 얼마나 그것이 감동을 주고 놀랄 만한 물건인가를 알 수 있지요!
그것은 기적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분석하건대, 대체로 일괄하여 보면, 모든 존재는 기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제 평가에 따르면, 가장 크나큰 기적입니다.
당신은 얼마 전에, 자연은 한 인간을 딴 인간으로부터 조심스럽게 떼어 놓고 격리시켰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대단히 적절하고도 옳은 말이지요. 본래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랑에 있어서는 자연은 예외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만일 사랑을 새로운 눈으로 본다면 지극히 신비로울 것입니다.
잘 알아 두셔야 할 것은, 이러한 놀랄 만한 예외를 허용하거나 오히려 그런 예외를 만들어 내는 것이 자연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이 일에 있어서 자연에 찬성하면서 사랑을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자연은 당신에게 그런 짓에 대해 조금도 감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실수이며, 당신이 잘못해서 자연에 반대하고 나선 꼴이 됩니다.
당신의 머리를 올바로 돌려놓겠다고 작정을 했으니 저는 자세히 설명을 하겠습니다.
인간은 떨어져서 살고 딴 사람과 격리되어 자신의 살갗을 쓰고 산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 다른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기도 합니다.
인간은 원래 그렇듯 떨어져 있고 싶어하며, 혼자 있고 싶어 하고, 근본적으로 딴 사람과 아무런 상관을 맺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딴 사람, 즉 자기 살갗을 쓰고 있는 각각의 사람들은 그에겐 사실상 정말 불쾌한 것이며, 그리하여 오직 그에게는 단지 자기 자신 만이 불쾌하지 않지요.
이것은 자연 법칙입니다. 저는 있는 그대로를 말하고 있지요.
그는 생각에 잠겨 책상에 앉아 팔꿈치를 고이고 머리를 손으로 받치고 있으려면, 아마 한두 개 손가락을 뺨에 대기도 하고 하나쯤 입술에 얹기도 할 것입니다.
좋습니다. 그것은 자기 손가락이고 자기 입술입니다.
다른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다른 사람의 손가락을 입술 가운데 집어넣는다는 것은 그에게는 참을 수 없는 일일 것이고, 즉시 그는 구역질 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타인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대체로 근원을 따져 보거나 그 본성으로 보아 구역질이 날 뿐이지요.
다른 사람의 육체와 가까이한다는 것, 그것은 너무나도 압박을 주는 것이며, 지극히 불쾌하지요.
다른 사람의 육체와 가까이하는 데 제 감각을 열어 놓기 보다는 차라리 질식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자기 자신도 모르게 인간은 자기 살갗 속에 숨어 모든 주의를 기울이고, 그가 다른 사람의 감수성을 아끼는 것도 벌써 자기 자신이 떨어져 살려는 감수성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지요
좋습니다. 이제 그만하지요. 어쨌든 그것은 진실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서 저는 자연적이며 공통적으로 타당한 특징을 스케치하듯 추려서, 그러나 적확하게 그 윤곽을 그림 그리듯 표현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제가 원래 당신을 위해서 준비하였던 이야기의 일부를 끝마치려 합니다.
그것은 이제 여기에 일어난 근본 현상으로부터 자연이 놀랄 정도로 이 탈하는 어떤 일이 발생하기 때문에 한 말이며, 그 일을 통해서 자기의 육체와 더불어 혼자 있고 떨어져 있으려는 인간의 절대적이며 구역질나는 존재 방식, 즉 각자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 불쾌하지 않다는 엄격한 법칙이 완전히 희한하게 지양되어, 난생 처음 이런 일을 본다고 애써 생각하는 사람은 - 그리고 그렇게 애쓰는 일은 바로 인간의 의무이기도 하지만 - 놀라고 감동한 나머지 낙루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낙루'라는 말을 했지만, 그것은 문학적인 말로서 그 일에 어울리기 때문에 한 말이지요.
'눈물'이란 말은 이런 일에 대하여는 너무나 평범하다고 생각돼요.
석탄가루 한 알이 들어가도 눈은 눈물을 흘린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낙루'라고 한다면, 그것은 좀 고급스럽지요.
쑤쑤, 제가 당신을 위해 준비한 이야기를 하면서, 가끔 중단하고 소위 새로운 단락이나 항목을 시작하게 되는 것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는 위 에서 낙루 때문에 그런 것처럼 곧잘 탈선을 하는군요.
그리고 당신의 머리를 올바로 돌려놓도록 하는 과제엔 새로이 정신을 차려야만 하겠지요.
자, 그러면 시작해 보지요!
자연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며, 온 우주가 놀랄 일이지만 한 육체와 다른 육체 사이의 분리, 즉 나 와 너 사이의 분리를 없애 버리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사랑입니다. 일상적이고도 흔한 일이지요.
그러나 영원히 새롭고, 자세히 보면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일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고요?
두 눈이 떨어져 있는데도 서로 마주치지요.
보통 때 같으면 결코 두 눈이 그렇게 마주 칠 수가 없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놀라고 세상을 잊게 되고, 당황하고 다른 사람의 시선과 자기들의 시선이 완전히 다름에도 별로 부끄러워하지 않고, 이런 '다름'에 굴복하려고 하지 않고, 그들은 서로 상대방 속에 가라 앉는다는 말이지요.
당신이 원하신다면, 서로 그 상대방 속에 첨벙 빠져 버린다고 해도 좋아요.
그러나 '빠진다'고 할 필요는 없고, '가라앉는다' 는 것이 좋겠습니다.
동시에 양심에 꺼리는 마음도 약간 생기지요.
그것이 양심에 관련되는 문제라면 내버려 두기로 하겠습니다.
저는 단순한 귀족입니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제가 이 세상의 비밀을 해명할 것을 요구할 수는 없겠지요.
아무튼 일반적으로 생기게 되는 것은 가장 감미로운 양심의 가책인데, 이런 양심의 가책을 그들의 눈과 가슴 속에 간직한 채, 두 사람은 갑자기 모든 질서를 벗어남으로써 확고하게 서로 접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일상적인 말로 이것저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것저것 모든 것이 거짓말이며, 그 일상적인 말조차 거짓말인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들의 입은 말할 때처럼 거짓으로 일그러지고, 눈은 감미로운 거짓으로 가득하지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머리나 입술, 팔다리를 쳐다보지요.
그러다가 그들은 재빨리 그 허위로 가득 찬 눈을 아래로 내리 깔거나 이 세상 그 어딘가로 눈을 돌리거나 하지요.
그러나 그곳에는 그들이 찾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으며, 전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요.
왜냐하면 그들 두 사람의 눈은 자기들 두 사람을 제외한 모든 것에 멀었기 때문이지요.
그 눈들은 단지 이 세상에 잠시 숨어 있었을 뿐이며, 곧 다시 더욱 빛나면서 상대방의 머리, 입술, 팔다리 쪽으로 시선이 되돌아가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온갖 일상적인 성질과 비교하여 볼 때,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고 남의 것이기 때문에 품을 수 있는 좀 낯선 감정보다도 냉정한 감정, 즉 불유쾌한 감정, 그래요, 혐오스런 감정이 없어져 버리고 거꾸로 환희, 욕구, 접촉하려고 하는 정열적인 동경의 대상이 되어 버리기 때문인 것입니다.
즉 희열이 생기지요.
그래서 그 희열을 가지고 두 사람의 눈은 그들에게 주어진 능력보다 훨씬 많은 것을 미리 알아차리고, 미리 훔쳐 내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제 이야기의 한 단락입니다.
쑤쑤, 저는 그 항목을 끝마치겠습니다.
제 이야기를 잘 듣고 계시겠지요?
마치 당신이 처음으로 사랑에 대 한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그렇게 말이지요?
그러시기를 저는 희망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모든 속박에서 해방된 두 사람은 거짓말과 이것을 할까 저것을 할까 망설이는 것과 입을 그렇게 일그러뜨리는 것들이 죽도록 싫어지는 순간이 기어이 오고야 맙니다.
그러면 그들은 모든 것을, 마치 그들이 옷이라도 훌렁 벗어 버리는 것처럼, 내던져 버리지요.
그리고 이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진실한 말, 즉 그들을 위한 오직 하나밖에 없는 진실한 말을 하게 되지요.
거기에 비하면 나머지 모든 말은 단지 구실에 지나지 않는 허튼소리라고 할 수 있는, 바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해방이며, 지상에 존재하는 가장 대담하고 가장 감미로운 해방입니다.
그렇게 되면 '가라앉게' 되지요.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들의 입술은 서로 키스 속으로 첨벙 빠져 버린다고 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분리와 고립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현상으로, 어떤 사람은 '낙루'까지도 할 수 있게 된단 말예요.
제발 부탁합니다. 키스에 대해서 그렇게 상스러운 말을 좀 하지 마세요.
그것은 어쨌든 그런 분리와 고립적 태도가 놀랍게 지양될 수 있는 데 대한 확증이며, 한 인간이 자기 자신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역겨운 무관심을 지양할 수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저는 인정합니다.
저는 가장 열렬한 공감을 가지고 키스는 모든 다른 것에 대한 시초라는 것을 인정해요.
왜냐하면 이 키스라는 것은 육체의 접근, 가장 가까운 접근, 가능한 한 무제한으로 접근하는 것, 그러니까 보통 때 같으면 질식할 정도까지 부담되는 접근이 우리가 소원하는 모든 것의 화신이 되었다는 것을 묵묵히 놀랍도록 표현해 주기 때문이지요.
쑤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모든 것을 실행합니다.
그것은 육체적 접근을 무제한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두 개의 생명을 진정으로 완전한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 극단의 일을 해 보려 하고 실행하지요.
그러나 우습고도 슬프게도 그들은 아무리 노력을 해 보아도 두 개 생명의 일체화를 성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거기까지는 자연을 극복할 수가 없고, 자연은 자기 들이 사랑의 행사를 마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는 분리 상태를 고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일은 연인들끼리는 안 되지요.
그것은 아마 그들 이외 제삼자로서, 즉 어린애를 가지고 이루어 지게 되는 것이지요.
어린애는 그들의 노력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자식 복이나 집안의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그것은 저의 화제를 벗어나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저는 그것을 다룰 정도가 못 됩니다.
저는 사랑에 대해서 새롭고 고상한 말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며, 당신에게 사랑에 대한 새로운 눈을 가지도록 해 보자는 것이지요.
쑤쑤, 그리고 그 사랑의 감동적인 전대미문의 성질에 대하여 당신의 이해를 일깨우려는 것이지요.
당신이 다시는 사랑에 대해서 그렇게 상스럽게 표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단락을 지어 가며 하고 있습니다.
제가 단숨에 모든 것을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여기서 다시 한 번 일단락을 짓고, 이제부터 다음과 같은 것을 이야기 하기로 하겠습니다.
귀여운 쑤쑤, 놀랍게도 사랑은 하나의 고립된 육체가 다른 사람의 육체에 대해서 불쾌하지 않게 되는 열애 관계에 있는 것만은 아니지요. 사랑은 정다운 흔적을 남기고 자기의 존재를 암시하며 온 세상을 지나가고 있는 것이에요.
만약 당신이 길 모퉁이에서 당신을 치켜 보는 더러운 거지 아이 한테 몇 센타보를 던져 줄 뿐만 아니라, 당신이 장갑을 끼지 않았다 하 더라도 당신 손으로 아마 이가 득실거릴지도 모르는 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동시에 그의 눈을 보며 미소를 띠고, 이전보다도 좀 더 행복해져 지나간다고 한다면 - 그렇다면 이런 행위가 바로 사랑의 정다운 흔적 아니겠소?
자, 제 이야기 좀 들어 보세요.
쑤수, 당신이 맨손으로 이가 득실거리는 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 다음에 이전보다 좀 더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 그것은 사랑하는 육체를 애무하는 것보다 아마 더욱 놀랄 만 한 사랑의 표시일 것입니다.
이 세상을 한번 눌러보세요. 사람들을 한번 자세히 보세요.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당신은 도처에서 사랑의 흔적과 사랑의 여러 가지 암시를 볼 것입니다.
그리고 분리라는 측면과 한 사람의 육체가 다른 사람의 육체에 대해서 무관심하다는 측면에서 볼 때에도 사랑에 대한 여러 가지 승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서로 손을 붙잡지요.
그런 행동은 지극히 흔한 것이며, 일상적인 것이고, 관습적인 것입니다.
그럴 때 어느 누구도 딴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과는 다르게 사랑하는 사람은 이러한 접촉을 즐겁게 누리지요.
왜냐하면 그들에게 아직도 손잡는 것 외의 다른 것이 허용되지 않고 있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손잡는 짓이 관습화되어 버린 사랑이라는 데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고 감정도 없이 그런 짓을 하니 그저 버릇으로 하는 것이지요.
그들의 육체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지만 절대로 더 가까이는 가지 말자는 것이죠!
그러나 그 거리를 넘어서, 그리고 엄숙하게 지키고 있던 개별 생활을 넘어서서 그들은 팔을 뻗치고서 그 낯선 두 손이 합쳐지고 얽히며 서로 꼭 쥔단 말이지요.
그런데 이건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지극히 평범한 것이지요.
그런 것은 아무 소용도 없는 것처럼 보이고 또 그렇게들 생각하지요.
하지만 실제로는, 엄밀하게 검토해 보자면, 그것은 놀라움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며, 자연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일탈하는 조그만 잔치를 하고 있는 것이며, 낯선 것이 다른 낯선 것에 대하여 불쾌하게 생각한다는 자연의 원칙에 대한 부정이며, 신비스럽게 어디서나 존재하는 사랑의 흔적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