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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0일 오늘의 역사
2022년 캘리포니아 북부서 규모 6.4 지진…수만 가구 단전 피해
2021년 헬리콥터 추락 좌석 껴안고 12시간 헤엄쳐 생환
아프리카 남동부의 섬나라 마다가스카르 장관이 헬리콥터 추락으로 바다에 빠진 뒤 12시간 헤엄을 쳐 해변까지 다다른 뒤 기진맥진해 구조대원들의 들것에 실려가며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아직 죽을때가 안됐다니까”. 세르주 겔레(57) 경찰 장관과 다른 두 명의 안전 관련 관리는 20일 오후 이 나라 북동부 해안에서 침몰한 선박 수습 과정을 지휘하다 저녁 7시 30분쯤 헬리콥터가 추락하는 바람에 물에 빠졌다가 제각각 마함보 항구 해변에 다다랐다. 겔레 장관이 헤엄쳐 해변에 돌아온 시간은 이날 오전 7시 30분쯤이었다.
이 선박은 원래 화물선인데 불법으로 여객을 태웠다가 침몰했다. 적어도 39명이 목숨을 잃었다. 실종된 사람도 46명이나 된다. 45명의 승객은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2021년 홍콩 총선 친중 여권 압승 90석 중 89석 당선
2011년 대구에서 왕따 피해 중학 2년생 투신자살
2009년 이란 고위 성직자 호세인 알리 몬타제리 사망
이란 이슬람 혁명을 이끈 주역이면서도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현 대통령이 이끄는 이란 정부를 독재 정권으로 비판해온 고위 성직자 그랜드 아야톨라 호세인 알리 몬타제리(Montazeri·87)가 자택에서 천식과 동맥경화증으로 사망했다.
몬타제리는 "종교 지도자가 정부 위에 있어야 한다"는 이슬람 신정(神政)주의의 기초를 닦은 인물. 한때 초대 최고 지도자인 아야톨라 호메이니(Khomeini)의 후계자로도 거론됐었다. 하지만 1988년 이슬람 예언자 무하마드를 조롱하는 '악마의 시'를 발표한 영국인 살만 루시디(Rushdie)를 살해하라는 호메이니의 지시를 거부하는 등 호메이니의 강경노선을 비판하다 실각(失脚)했다. 이후 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Khamenei)의 자격 문제를 거론했다가 가택연금에 처해지기도 했다. 가택연금에서 풀려난 뒤에도 아마디네자드에 맞서는 개혁파의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해 왔다.
2009년 여배우 브리트니 머피 사망
2009년 12월 20일 오전 할리우드 여배우 브리트니 머피(32)가 웨스트 할리우드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요절했다.
현지 소방당국은 오전8시께 머피의 자택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출동해 머피를 세다스-시나이 병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병원 측은 오전 10시께 머피가 응급조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후송 전 이미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1977에 태어난 브리트니 머피는 뉴저지에서 유년기를 보냈으며 14세 때 토니상을 수상한 연극 ‘다리에서 바라 본 풍경’으로 브로드웨이에서 연기를 시작했다.
영화 ‘8마일’, ‘클루리스’, ‘처음 만나는 자유’, ‘우리 방금 결혼했어요’ 및 ‘씬시티’ 등에 출연했다. 폴 오켄폴드와 함께 부른 ‘패스터 킬 푸시켓’이 빌보드 댄스 차트 1위에 오르는 등 만능 엔터테이너로 인정받았다.
2009년 일출 명소 향일암 화재
2009년 12월 20일 오전 0시 20분쯤 발생한 화재로 향일암(向日庵·전남도 문화재자료 40호)에서 화재가 발생해 사찰 건물 8동 가운데 대웅전과 종무실, 종각 등 3동이 전소됐다.
전남 여수시 돌산읍에 위치한 향일암은 해안의 대표적인 해맞이 명소로 연초마다 6만~8만명의 인파가 몰리는 곳이다. 화재 당시 사찰에는 스님과 신도 등 26명이 있었지만, 긴급대피해 인명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사찰이 가파른 산 중턱에 있고 날씨가 건조했던 터라, 불은 약 3시간여 계속됐으며 건물 3동과 대웅전 안에 있던 청동불상과 탱화 등 문화재도 상당수 소실됐다. 소방서 측은 이번 화재로 약 5억9000여만원 상당의 재산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향일암은 화엄사의 말사(末寺)로, 원효대사가 659년(의자왕 19년) 원통암(圓通庵)이란 이름으로 창건했으며 1715년 인묵(仁默)대사가 지금의 자리로 암자를 옮기고, ‘해를 바라본다’(向日)는 뜻의 향일암으로 명명했다. 국내 4대 관음기도 도량 중 하나로 1984년 전남도 문화재자료 제40호로 지정됐다. 대웅전 등은 1986년 새로 지었다.
2008 이라크 파병 자이툰부대 완전 철수
2008년 미(美) 인권운동가 베벨목사 사망
저명한 인권운동가였으나 말년에 근친상간 혐의로 오점을 남긴 제임스 베벨 목사가 2008년 12월 20일(현지시각) 72세를 일기로 미 버지니아 자택에서 숨졌다. 자신의 딸과의 근친상간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가 최근 보석으로 풀려났던 베벨 목사는 췌장암으로 투병해왔다.
베벨 목사는 지난 1960년대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을 이끌었으며, 킹 목사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측근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1960년대 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SCLC)와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SNCC)를 이끌며 미국 남부 흑인들의 인종차별 철폐에 앞장섰고,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등 반전 운동에도 적극 나섰다.
1968년 킹 목사의 피살 후에는 멤피스에서 환경미화원의 파업을 지원하는 등 킹 목사의 유지를 받들어 인권운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15년 전 자신의 10대 딸과 성관계를 가진 혐의가 인정돼 지난 4월 유죄평결을 받았고, 수개월 복역하고 보석금을 내고 풀려난 뒤 항소를 진행하고 있었다
2002년 한나라당 이회창후보 정계은퇴 선언
2000년 프로야구 6개 구단, 선수협의회 회장단 6명을 방출한다고 발표
LG·두산·한화·SK·해태·롯데 등 프로야구 6개 구단이 2000년 12월 20일 선수협의회 회장 송진우(한화)를 비롯해 부회장 양준혁(LG)과 마해영(롯데), 박충식(해태), 심정수(두산), 최태원(SK) 등 선수협 중심 선수들을 모두 자유계약선수로 풀어 구단과 선수간 갈등이 더욱 심화됐다. 구단들의 초강경 대응에 대해 선수협 측도 강하게 반발, "국민의 기본권인 결사의 자유를 무시한 폭거"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발생 34일 만인 2001년 1월 20일, 프로야구 사장단과 선수협의회 대표가 김한길 문화관광부 장관 중재로 가진 회의에서, 방출된 선수 6명 전원을 즉시 복귀시키고 8개 구단에서 선수들이 재선출하는 선수 대표로 1년 임기의 새 집행부를 구성하는 것을 골자로 한 5개항의 합의안에 서명함으로 `선수협 사태`가 일단락됐다.
1999년 국내최초 관측위성 ‘아리랑1호’ 발사
한국의 7번째 인공위성이자 국내 최초의 실용 관측 위성인 `아리랑1호`가 1999년 12월 20일 미 캘리포니아주 반덴버그 공군기지에서 미 오비탈사의 토러스로켓에 실려 성공적으로 발사됐다. 아리랑1호는 발사 후 13분48초 만에 상공 685㎞의 궤도에 진입하면서 로켓에서 분리됐으며, 15분 후 남극의 미 항공우주국(NASA) 맥머도 지상국과 첫 교신을 가졌다.
중량 470㎏의 아리랑1호는 지상 685㎞ 상공에 떠서 하루에 지구를 열네 바퀴 반 돌면서 지상 관측, 해양 관측, 우주환경 관측 등의 임무를 수행하게 됐다.
과학기술부 차관은 아리랑1호가 성공적으로 궤도에 진입한 후 "아리랑1호의 제작과정에서 실용위성체 개발 기술 중 약 80% 이상을 국산화했다"며 "한국도 차기 인공위성을 독자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1999년 한국-미국 범죄인 인도조약 발효
1999년 최병모 특별검사, 옷로비 의혹사건 발표
1999년 마카오, 442년만에 중국에 반환
식민지 마카오의 주권이 1999년 12월 20일 442년 만에 중국으로 되돌아갔다. 이로써 명조말 이래 계속돼 온 포르투갈의 마카오 식민통치는 종식되고, 1국 2체제하의 '마카오 차이나' 시대가 개막됐다. 유럽의 마지막 아시아 식민지였던 마카오 주권의 회복으로 서구 열강의 아시아 식민시대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중국 광둥성의 주장 삼각주 남단에 위치한 마카오는 포르투갈 상인들이 1557년 해적을 소탕한 공로를 인정받아 청조 황제로부터 '하사' 받아 건설됐다. 1887년 정식 식민지로 편입했고, 1951년 포르투갈 새 헌법에 따라 '해외주(州)'가 된 후 본국 정부가 임명하는 총독의 통치를 받았으며 73년 '자치령 '이 됐다. 포르투갈이 중국에 마카오 반환 용의를 처음 표명한 것은 74년 사회주의 혁명을 겪고 나서였다. 이후 양국은 79년 외교관계 수립에 이어 87년 마카오 반환협정에 서명했다. 마카오 주권교체식은 12월 19일 밤 11시35분부터 이날 0시16분까지 마카오 외항 신전해(新塡海)구 문화센터 광장에 임시로 설치된 식장에서 세계 60개국 귀빈 2500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됐다. 주권교체식장에 나타난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 등 중국 지도부의 자세는 당당해 보였다. 드디어 20일 0시, 주권반환 기념식장에서 중국의 장쩌민 국가주석과 조르제 삼파이유 포르투갈 대통령 등 양국 고위인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포르투갈 국기가 내려지고 중국의 오성홍기가 게양됐다. 마카오는 본토와의 일국양제(一國兩制) 합의에 따라 50년간 자치권을 행사하게 됐다. 중국은 이날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했다
1998년 한국, 제13회 방콕아시안게임에서 종합2위(금메달 65, 은메달 47, 동메달 52)
1998년 미국하원 사상 두 번째로 클린턴 대통령 탄핵 결의
1998년 이봉주, 제13회 방콕아시안게임 남자마라톤에서 2시간 12분 32초로 우승
이봉주 선수가 제13회 방콕아시안게임 남자마라톤에서 2시간 12분 31초로 우승했다. 폐막식에 앞서 열린 마라톤 경기에서 이봉주 선수가 일본의 마나이 아키라(2시간13분24초)의 추격을 따돌리고 우승함으로 한국은 1990년 김원탁, 1994년 황영조에 이어 아시안게임 마라톤 3년 연속 정상에 올랐다.
이봉주는 레이스 시작부터 북한의 김중원, 마나이, 김이용과 함께 선두그룹을 형성, 쾌조의 출발을 보였다.
27㎞지점에서 마나이와 공동 선두를 이룬 뒤 당초 작전대로 29㎞지점 고가 오르막에서 정상을 향한 혼신의 스퍼트를 감행, 마나이를 20m차로 따돌리고 마침내 선두에 나섰다. 이어 이봉주는 38㎞지점에서 마나이를 100m차로 따돌려 우승을 확정지은 뒤 한국응원단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
1997년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사면 복권 발표
1996년 천문학자 칼 세이건 사망
1994년 국내 최장 슬치터널(6,128m) 착공 5년 만에 관통
1991년 강경대군 치사사건 관련 유서대필 혐의로 구속된 강기훈에 3년 선고
1990년 국무회의 군인복무규율개정안 의결
1989년 남북고위당국자회담 제5차 예비회담 개막
1989년 국방부, FX기종 FA18기 확정
국방부는 1989년 12월 20일 한국공군의 다음세대 전투기로 미국 맥도널 더글러스사의 최신예기 FA18기를 채택, 구매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날 국방부는 제너럴 다이나믹스사의 F16기와 MD사의 FA18기 등 양 기종을 놓고 성능, 가격, 기술이전문제 등을 정밀검토한 결과 대당가격면에서는 비싸지만 공중전투 능력, 지상공격능력 신무기체계의 수용성, 작전운영, 군수지원의 효율성 등을 고려, FA18기를 선택키로 했다고 밝혔다.
FA18기는 공중전시의 전투기 대 전투기간 전투능력과 함께 대 지상공격 능력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다. 적재무기로는 스패로 미사일 4기, 열추적식 사이드와인더 미사일 2기, 공대지HARM미사일, 대전차 메브릭 미사일과 대 지상공격용 유도탄 등 9기를 장착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정찰기능도 갖추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는 1993년 1차로 완제품12대를 구입한 다음, 2차로 주계약업체인 삼성항공이 36대를 조립생산케하고 나머지 72대는 삼성항공과 대우중공업 대한항공이 공동으로 면허생산하는 등 1990년대 말까지 모두 1백20대의 FA18기를 구입 또는 합작생산하기로 했다. 그러나 1994년 12월 미국의 록히드사의 FA-16으로 기종을 변경하면서 도입하지 않았다.
1989년 미국, 파나마 침공
미국이 1989년 12월 20일, 파나마의 군부 독재자 미누엘 노리에가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파나마를 침공했다. 미국과 노리에가는 그동안 협력관계를 유지해 왔지만 노리에가가 파나마를 마약조직의 중간 거점으로 제공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더구나 노리에가가 미국의 첨단 기술과 첩보를 공산권에 팔아넘긴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
미국은 침공명분으로 첫째, 미국시민의 생명보호 둘째, 파나마조약의 보호 셋째, 노리에가 체포 넷째, 파나마의 민주헌정질서 회복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2년동안 미국은 파나마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중남미 여러국가와 외교 및 협상 노력을 전개해왔으나 노리에가가 이 모든 것을 거부하고 12월 15일 미국과의 전쟁상태를 선포하면서 미군장교 1명을 사살하자 총 2만6천여명의 병력을 동원해 침공했다.
1900년 이래 4번째인 이번 침공으로 1만5천명의 파나마인이 집을 잃었고 459명의 비전투원이 사망했다. 결국 노리에가는 체포돼 미국으로 압송됐지만 침공을 바라보는 시각 중엔 소국의 주권을 무시한 강대국의 논리라는 비난의 소리도 있었다.
1987년 필리핀 근해서 여객선 도나 파즈호 유조선과 충돌. 1천7백49명 사망
1987년 12월 20일. 도나파즈호는 수도 마닐라에서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려는 승객들을 한 배 가득 싣고 레이테섬을 떠나 마닐라로 향하던 중이었다.
대다수 승객이 잠자던 오후 10시 30분에 8,800톤 가솔린을 적재한 유조선 벡터호와 충돌하며 폭발했다. 대부분의 가솔린이 새어나오며 불이 붙었고 벡터호와 도나파즈호는 불길에 휩쓸렸다. 근처 바닷물까지 이 불길에 휩쓸리면서 수온이 급격히 높아지면서 바닷물까지 끓어오르기 시작했고, 생지옥이 되고 말았다.
탑승 인원은 1,450명이나 이 날은 정원의 3배이자, 진수 때의 7배가 넘는 무려 4,388명이라는 가공할 숫자의 사람이 타게 되었다. 바로 도나파즈호의 소유주인 술피치오 선박회사가 불법적으로 암암리에 표를 계속 팔았기 때문이었다.
비행기나 안전운행을 하는 다른 배의 삯과 비교할 수 없었기에 가난한 서민들이 엄청 몰렸고 사망자 대다수가 필리핀 사람이었다. 당시 승선객이 하도 많아서 타길 포기해 목숨을 구한 몇몇 관광객도 있었다.
도나파즈호에서는 4,388명에서 단 24명(비율상 겨우 0.55%), 벡터 호에서는 13명 가운데 2명만 살아남았다. 모두 4,375명 사망. 그리고 생존자 모두 지독한 중화상을 입었다. 20세기, 아니 인류 역사상 벌어진 여객선 침몰사고에서 사망자가 가장 많은 참극으로 손꼽힌다.
1983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아라파트파 4000명 레바논 철수
1983년 유전자공학육성법 제정
1983년 코모로 북한과 단교
1982년 미국 피아니스트 루빈스타인 사망
1982년 터키 에브렌 대통령 내한
1982년 1천만 이산가족 재회추진위원회 발족
1981년 폴란드 계엄 하 유혈사태 2백 명 사망
1980년 국내 최초 프로축구팀 할렐루야 창단
1980년 조자양(趙紫陽) 중국수상 평양 방문
1979년 군사재판, 김재규 김계원 등 피고인 7명에 사형선고
1979년 10월 유신체제 말기 정치세력간의 갈등이 날카롭게 빚어짐에 따라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지내던 김재규가 직속부하인 박선호, 박홍주 등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는 사건(10.26사태)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12월 20일 육군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김재규, 김계원, 박홍주, 박선호에게 사형이 선고됐고, 김계원을 제외한 나머지 전원에게 사형이 집행됐다. 이로써 12월 4일부터 시작된 재판은 이날 종지부를 찍었다.
1978년 제8회 아시안 게임 폐막, 한국3위
1977년 이란에 대지진, 800여명 사망
1976년 고물카 폴란드 전 수상 사망
1974년 문세광 사형집행
1973년 블랑코 스페인 수상 피살
1971년 파키스탄 대통령에 부토 취임
1968년 미국 소설가 존 스타인벡 사망
빈민계층과 소수 민족들의 이야기와 기계문명에 반대하는 글을 주로 써 온 존 스타인벡이 1968년 12월 20일 사망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고교시절부터 농장일을 거들며 고학으로 스탠퍼드 대학에 진학했으나 결국 학자금 부족으로 중퇴하고 문학의 꿈을 키워야 했다.
문학의 황무지 시대라고 할 수 있는 1920년대 후반 영국 해적 헨리 모건을 주인공으로 한 `황금잔`이 그의 처녀작이었다. 1930년대의 대공황기에는 자연주의적 경향이 짙은 인물에 관심을 가졌고 이민노동자의 비극을 그린 `생쥐와 인간`(1937년)을 출간하자 그의 인기는 치솟기 시작했다.
`분노의 포도`(1939년) 이후의 대작으로 꼽히는 `에덴의 동쪽`(1952년)은 평론가들로부터 도덕적 혼란을 준다고 비난받았지만 남북전쟁에서부터 제1차대전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에덴동산을 찾아, 미래를 꿈꾸는 자들의 이야기를 섬세한 필치로 그려냈다. 스타인벡은 이후에도 도덕규범의 붕괴로 인한 사회문제를 다룬 `우리들의 불만의 겨울`로 196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고 1964년에 존슨 대통령에게 자유의 메달을 받았다
1967년 을지로1가 '새서울 지하상가' 오픈
1965년 한국 첫 다목적댐 섬진강댐(전북 임실 높이 64m 길이 335m 만수위 표고 196.5m 만수 면적 26.5㎢ 저수량 4억 6,000만㎥) 완공
1964년 월남군부쿠데타(구엔 칸 최고사령관 주동), 최고회의 해체
1961년 UN총회, 대기권 평화적 이용안 가결
1960년 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 결성
1975년 사이공을 함락시킨 두 주역 가운데 하나인 베트남 민족해방전선(NFL)이 ‘반(反) 고 딘 디엠, 반미’를 기치로 내걸고 1960년 12월 20일 캄보디아 국경 부근 밀림지대에서 결성됐다. 각계 대표 약 60여명이 참석한 회의장 안에는 창립총회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있었고, 노출을 꺼리는 비밀요원 20여명이 커튼 뒤에 숨어 안건을 논의했다. 이틀간의 논의 끝에 민족주의연합정부 수립, 토지개혁 등 10개항의 강령이 채택됐다. 의장에는 이듬해 구엔 후 토가 선출됐다.
해방전선은 결성 1년 만에 해방구를 전영토의 20%까지 확대하고 군사조직도 만들어 1962년 2월경에는 무장병력이 10만명을 넘어설 정도로 성장했다. 베트남 노동당의 남부지부로 남베트남 인민혁명당을 결성(62년 1월)하고, 베트남 임시혁명정부를 수립(69년 6월)하는 등 세력을 키워 결국 1975년 남베트남을 점령한다.
1955년 공산주의 운동가 박헌영 처형
박헌영이 평안북도 철산군 내의 산골에서 고문을 받다 1955년 12월 20일 처형됐다. 박헌영은 1919년 3월에 당시의 경성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고)를 졸업하고, 1920년 9월에 일본 동경을 거쳐 곧바로 중국 상해로 망명, 그곳의 기독교청년회(YMCA) 강습소에서 영어를 공부하는 한편, 프랑스 조계에 위치한 사회과학 연구소에 들어가 본격적인 사회주의 공부의 첫 발을 들여놓았다.
그 후 1921년에는 상해상과대학에 입학했으나, 1년쯤 후에 사회주의 연구소에서 알게 된 사람으로부터 일금 1백 원의 자금을 받아 공작 차 귀국하다가 당시 중국의 안동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평양의 법원에서 1년 6개월의 형을 받고 복역했다. 1924년 1월에 출옥,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기도 했으나, 사회주의 경력 때문에 쫓겨났다.
사회주의에 대한 박헌영의 이론적 정리는 1926년 4월 26일 신의주 형무소에서 쓴 ‘공산주의’라는 제목의 문건에 나타난다. 이 문건은 그가 양면 괘지에 잉크로 쓴 27쪽의 소논문인데, 형무소 당국이 신의주 지방법원 검사국으로 보낸 것이다. 그 내용은 공산주의를 이론적으로 설명한 것으로써 표현자체가 설교식 어조로 돼있다.
해방 후 박헌영은 공산당을 재건, 대구폭동사건, 여수-순천 반란 사건 등 커다란 사회 불안을 조성했다. 핵심공산당 간부에 대한 미군정의 체포령으로 검거가 임박하자, 박헌영은 1946년 9월 5일 동료들과 함께 관속에 누운 채 영구차 행렬로 자신들을 위장해 북한으로 탈출한다. 북한에서는 남조선 노동당을 지도하며 외상 겸 부수상이라는 요직에까지 오르지만, 남쪽에 세력기반을 가지고 있던 그는 소련을 등에 업은 김일성의 남로당 숙청으로 체포되어 결국 이날 처형당했다.
1950년 러셀 블레이즈델 중령(목사) 전쟁고아 제주도로 이송
1949년 최초의 국영기업 대한해운공사 출범
1945년 합동통신 창립
1945년 조선연극동맹 결성
1942년 노기남 신부, 한국 최초로 주교에 임명
1930년 중국, 치외법권을 철폐
1917년 광복단 총사령 박상진 체포
1916년 윌슨 미국 대통령, 강화각서 발표
1916년 미국 월스천문대의 100인치 대망원경 완성
1905년 일본, 한국통감부 및 이사청관제 공포
1901년 시인 박영희 출생
1880년 개화추진 위해 통리기무아문 설치
1876년 미국 천문학자 월터 시드니 애덤스 출생
1848년 루이 나폴레옹, 프랑스 대통령에 취임
1803년 미국,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구입
1795년 독일 역사학자 레오폴드 랑케 태어남
1722년 청나라 2대 황제 강희제 사망
1550년 황해감사 주세붕, 수원서원 창건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 사망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가 1519년 12월 20일 유배지 능주에서 사약을 받고 숨졌다. 38세였고, 관직에 몸담은 지 5년 만이었다. 성리학의 토대 위에 유교적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정암이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中宗)의 눈에 든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전임 연산군의 악정을 개혁하고 파괴된 유교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중종과 정암의 공통된 목표였다.
사간원을 거쳐 사헌부의 대사헌에 오른 정암은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소명감에 불타있었다. 먼저 착수한 것이 현량과 설치. 과거제의 폐단을 없애려면 인재를 천거해 뽑아야 한다는 점을 명분으로 삼았지만 사실은 기득권층을 중심으로 형성된 기존의 인사틀을 과감히 흔들어놓자는 구상이었다. 정암의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는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와 곳곳에서 마찰을 일으켜 수시로 충돌이 빚어졌다. 중종도 상소(上疏)를 일삼는 정암의 개혁에 피로함을 느낀다. 265차례의 소격서폐지 상소 등 거의 3∼4일에 한번꼴로 상소를 했으니 어느 왕인들 달가워했을까. 중종 친위인 반정세력 중 그의 탄핵상소를 받지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위기의식을 느낀 훈구파는 나뭇잎에 과일즙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 글자를 새겨 벌레가 파먹게 하고는, 민심인 것처럼 조작해 정암을 견제했다. 주(走)와 초(肖)를 합한 조(趙)씨가 왕이 된다는 것이다. 1519년 10월 마침내 어느 한쪽도 피할 수 없는 한판승부가 시작됐다. 반정공신(反正功臣) 위훈삭제(僞勳削除)가 그것. 주특기인 상소로 반정을 주도한 공신 117명 중 76명의 훈작을 삭탈할 때만해도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훈구파의 역습은 결정타였다. 4일 후에 기묘사화가 일어나고 조광조 등 관련자들은 처단된다. 조광조에겐 ‘탁월한 개혁가’ 와 ‘실패한 이상주의자’ 란 서로 다른 평가가 따라다닌다.
69년 제8대 로마제국 황제 비텔리우스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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