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2일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제1독서 : 말라 3,13-20ㄴ
복 음 : 루카 11,5-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5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6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7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10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11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12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인기 연예인의 수필을 읽다가 이런 내용을 보았습니다.
어렸을 때, 자전거를 타다가 발등을 다치게 되었는데
제대로 관리를 안 해서인지 피부 괴사가 진행된 것입니다.
결국 수술까지 하게 되었고, 수술 결과로 발등에 흉터가 생겼습니다.
이 흉터가 정말로 싫었고, 이 흉터에 대한 남의 시선을 느끼면서 하나의 선택을 하게 되었습니다.
타투를 해서 흉터를 가린 것입니다.
이렇게 흉터를 가려서 사람들이 더 이상 자기의 흉터를 보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피곤한 일이 더 생겼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이게 뭐야? 안 아팠어? 왜 했어? 어디서 했어?” 등의 질문이 계속해서 주어졌습니다.
못난 흉터가 보이는 발등에 대해서는 아무도 어떤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타투로 꾸며진 발등에 대해서는 너무 큰 관심과 시선이 쏟아지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관심과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발등을 더 숨기고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사실 나의 단점에 대해 다른 이는 그렇게 크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나만 관심을 가질 뿐입니다.
사람들도 나처럼 흉하게 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오히려 더 큰 관심을 끌게 되었던 것을 보면서,
다른 이의 시선보다 나의 시선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이의 시선을 신경 쓰기보다 주님의 시선에 신경을 써야 하지 않을까요?
더욱 올바르게 살게 되면서 자기 시선에 대해서도 만족스럽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내맡기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해주십니다.
즉, 필요한 것을 청할 때, 한결같이 신뢰하고 끈질기게 청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성령까지도 주실 것이라고 하시지요.
사람의 시선이 먼저가 아니라, 하느님의 시선이 먼저였습니다.
사람의 시선만을 따지면 계속해서 숨으려 하고 더 나아가 좌절과 절망 속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 가득하신 하느님의 시선에 집중할 수 있다면,
자기를 드러내고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길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루카 11,9)
빵을 꾸어 달라고 간절히 청하는 친구에게 빵을 내어주는 것은
혈연이나 학연, 인맥과 화려한 경력 때문이 아니라,
청하는 이의 간절함과 진실함 때문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주님만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여러분에게 바라는 건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모습을 유지하고, 친절한 행동으로 세계를 계속 놀라게 하십시오(마야 안젤루).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우는 아이에게 젖을 준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나 원하는 사람이 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간절히 원하면 반드시 얻을 수 있습니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월드컵 축구 시합 응원에서 “꿈은 이루어진다”는 희망을 표현했고 그 희망이 기쁨을 주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야고4,2).
그러므로 구하십시오! 주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구한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으로 주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다림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11,9-10)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꼭 들어주신다는 보증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을 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1,6-7). 사실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1요한5,14-15).
청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고 주시는 것은 그분의 몫입니다.
그러나 청해도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시편66장 18절을 보면
“만일 내 마음속에 죄악이 들어 있었다면 주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셨으리라” 적고 있습니다.
완고한 자의 기도는 응답받지 못합니다.
“율법을 듣지 않고 귀를 돌리는 자는 그 기도마저 역겹다”(잠언28,9). 그리고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야고4,3).
더더욱 악행을 저지른 자의 기도는 외면하십니다.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한다. 할지라도 나는 들어주지 않으리라.
너희의 손은 피로 가득하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이사1,15-16).
기도 했는데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첫째는 마음 없이 청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청해야 합니다. 양다리 걸치기는 없어야 합니다.
또한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디안들이 가뭄에 기도하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합니다. 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도한답니다.
한편 내가 겸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기도는 어느 쪽에 가까운지를!
또 다른 이유는 들어주면 오히려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과일을 까고 있는데 어린아이가 칼을 달라고 졸라대며 칭얼거린다고 칼을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허락하면 교만해지고 피해가 간다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청하되 합당한 마음으로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믿음으로 소원을 하느님께 말씀드리길 바랍니다.
‘믿고 바라고, 믿고 감사하고, 믿고 기뻐하며, 믿고 사랑하라!’
하느님의 손길을 분명히 느끼게 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과’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판도라 상자’는
이야기의 내용은 다르지만, 이야기의 구성은 비슷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낙원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을 맡겨 주셨습니다. 다만 ‘선악과’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성서는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을 받았다고 전해 줍니다.
유혹을 받은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의 열매를 먹었고, 결국 낙원에서 쫓겨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하와에게는 출산의 고통이 주어지고,
아담에게는 거친 땅을 일구어야 먹을 수 있는 노동의 고통이 주어집니다.
'판도라'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류 최초의 여성입니다.
불의 신 프로메테우스가 신들의 나라에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자
제우스는 대장간의 신 헤파이스토스를 불러 아름다운 여자를 만들게 하고,
여러 신에게 자신의 가장 고귀한 것을 선물하게 하였습니다.
이로써 '모든 선물을 받은 여인'이라는 뜻의 판도라가 탄생하였습니다.
제우스는 판도라에게 온갖 고통과 악이 들어 있는 상자,
즉 '판도라의 상자'를 준 뒤 절대로 열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였습니다.
프로메테우스의 아우 에피메테우스와 결혼한 판도라는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다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만 상자를 열었습니다.
그 순간 상자 속에서 슬픔과 질병, 가난과 전쟁, 증오와 시기 등 온갖 악(惡)이 쏟아져 나왔으며
놀란 판도라가 황급히 뚜껑을 닫았으므로 희망은 빠져나오지 못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인간은 이전에는 겪지 않았던 고통을 영원히 떨쳐 버릴 수 없게 되었으나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간직하며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선악과와 판도라의 상자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유의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할 수 있는 자유와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자유의지는 이제 우리의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습니다.
헌법 37조는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
헌법에 의해서 우리는 신체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보장받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자유에 따른 ‘책임’입니다. 자유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우리의 몫입니다.
자유의지가 이성과 오성을 만나면 종교가 되고, 문화가 되고, 역사가 됩니다.
자유의지가 교만과 욕망을 만나면 폭력과 전쟁이 되고, 증오와 원망이 됩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제 너희는 주님을 경외하며 그분을 온전하고 진실하게 섬겨라.
그리고 너희 조상이 강 건너편과 이집트에서 섬기던 신들을 버리고 주님을 섬겨라.
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너희 눈에 거슬리면, 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
아니면 너희가 살고 있는 이 땅 아모리족의 신들이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민족들과 이 땅에 사는 아모리족을 우리 앞에서 몰아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신앙의 여정도 그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죽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처절한 실패이고 억울한 죽음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다시 일어났습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났습니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일어났습니다. 원망에서 감사함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것을 선택하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을 선택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축복을 넘치도록 주실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깃발을 선택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는 머물 곳이 많습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빠, 아버지”께 기도할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한밤중에 찾아온 벗에 대한 비유’와 ‘세상의 아버지에 대한 비유’를 통해
아버지께서는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넉넉히 주시는 분이심을 가르쳐주십니다.
첫 번째 비유는 잠을 자던 사람도 벗의 끈질긴 간청에는 마지못해 들어주거늘,
하물며 주무시지도 않으며 오히려 잠든 우리를 깨워 간청하게 하시는 아버지께서야
얼마나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는지를 들려줍니다.
두 번째 비유는 세상의 아버지들도 제 자식들에게는 세상의 좋은 것을 주거늘,
하물며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야 어련히 하늘의 좋은 것들을 주시지 않겠는지를 들려줍니다.
그러니 이토록 넉넉히 주시는 아버지께 청하라 하십니다.
“청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루카 11,10)
여기에서는,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을 통해
하느님을 향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이를 우리는 대신덕 혹은 향주덕이라 부릅니다.
곧 ‘청하라’는 것은 희망하고 열망한 바를 입으로, 곧 말로 간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곧 희망을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께 두고 겸손하게 청하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먼저 아시고, 우리가 그것을 청하기를 바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기와 욕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청할 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진정 원해야 할 것을 원하고, 청해야 할 것을 청해야 할 일입니다.
‘찾아라’는 것은 믿음을 아버지께 두고, 믿는 바를 몸으로 수고로움을 바쳐 찾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사실, 아버지께서는 먼저 우리를 찾아 나서시며, 우리가 찾아 나서기만 하면
“네가 나를 찾아 부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나 여기 있노라’ 하고 말씀하시는 분”(이사 65,24; 베네딕도 규칙서 머리말 18)이십니다.
비록 우리가 불신과 의혹에 빠져도 결코 우리에게서 믿음을 거두지 않으시고
끝까지 충실하시고 신실하시고 항구하게 우리를 찾으시니, 우리 또한 그렇게 찾아 나서야 할 일입니다.
'두드려라'는 것은 사랑의 가슴으로 두드리라는 것을 말합니다.
당신께서 사랑으로 마음을 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주님께서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이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라고
먼저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희망과 믿음과 사랑으로, 말과 몸(행동)과 가슴으로,
곧 전인격으로 아버지께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곧 희망하는 바를 말로 청하고, 믿는 바를 행동으로 찾으며,
사랑하는 바를 마음으로 두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불신과 분리를 조장하는 교활한 뱀이 아니라,
거센 파도에도 상하지 않고 온몸을 맡기는 일치와 믿음의 생선을 주실 것입니다.
뒤꼬리에 독침을 품고 있어 뒤를 경계하게 하는 전갈이 아니라,
병아리를 탄생시킬 앞을 바라보게 하는, 희망의 달걀을 주실 것입니다.
단단하여 도저히 삼킬 수 없는 돌이 아니라, 생명을 살찌울 사랑의 부드러운 빵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청한 것보다도 “좋은 것”(마태 7,11), 곧 “성령”(루카 11,13)을 주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루카 11,9)
주님!
희망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 희망을 당신께 두게 하소서!
제 희망이 아니라 당신이 희망하는 바를 청하게 하시고,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말로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당신을 몸으로 찾게 하시고,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진리의 문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두드리게 하소서!
우리를 가로막은 장막을 찢으시고, 서로가 열리게 하소서! 아멘.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한밤중에 온 식구와 잠자리에 든 벗을 깨워 자기가 필요한 것을 얻어낸 사람이 있다.
잠자리에 든 친구는 친구의 끈질긴 요구를 마지못해 들어주었지만,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를 깨워 기도하게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겠는가?
그분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벗(요한 15,13 참조)이시기 때문이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9절)
하늘나라는 게으르고 한눈파는 자들이 아니라,
그것을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들에게 주어지고 발견되고 열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나라의 문은 기도로 청하고 바른 삶으로 찾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두드려야만 열리는 문이다.
기도와 올바른 삶 그리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노력해야 한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12절) 하신다.
여기서 생선은 믿음을 상징한다.
생선은 물세례를 연상할 수 있고 이 세상 파도에 상처를 입지 않는다.
반대로 뱀은 사람을 속여 하느님을 믿지 않게 만든다.
달걀은 희망을 상징한다. 앞으로 병아리가 생겨나듯 곧 눈에 보이리라고 희망하기 때문이다.
전갈은 희망의 반대이다.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꼬리에 독침을 품고 있는 전갈을 경계해야 한다.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태 7,9)
빵은 사랑을 상징한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1코린 13,13)이라 하였고,
음식물 가운데서는 빵이 단연 으뜸이기 때문이다.
돌은 그 반대이다. 돌처럼 단단히 굳은 마음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것은 당신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실 줄 아시는 그분이
우리에게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13절)
우리의 마음이 악에 휩쓸리기 쉽고 만유의 하느님과 달리 선에만 이끌리는 존재가 아니지만,
우리 자식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듯이 그분께서는 성령을 주신다고 하신다.
여기서 성령은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 들어감을 뜻하며 또한 성령의 은사를 가리킨다.
그것은 모든 면에서 좋은 것이다.
그것을 얻는 사람은 가장 복되고 칭송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될 것이다.
기도로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좋은 것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느님 안에 깨어있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여야겠다.
참된 기도가 어떤 것인지 늘 고민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을 화두 삼아, 대체 무엇을 청할 것인가? 고민하고 묵상해 봅니다.
난데없는 고통이 다가올 때, 예기치 않았던 환난이 밀려올 때,
자녀된 입장에서 사랑하는 아버지께 도움을 청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이들이 점차 청소년, 청년, 장년으로 성장해 나가듯이,
우리의 기도 역시 성장해 나가야 마땅합니다.
어른이 되면 더 이상 아기 때처럼 부모에게 칭얼거리거나
그저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청하기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자녀들은 힘겹게 낳아주시고 지극정성으로 양육해주시고,
잘 교육시켜주신 덕에 한 사회인으로 성장하게 해주신 부모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면서,
이제 더 이상 부모에게 청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뭔가라도 드리고 싶어 합니다.
감사의 마음을 담은 선물도 드리고, 영양제도 챙겨드리고, 용돈도 드리고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기도도 그렇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냥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졸라댈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크신 은혜와 자비에
깊이 감사드리는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대자연을 창조하시고, 사랑스런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
찬미의 기도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참된 기도가 어떤 것인지 늘 고민해 봅니다.
한 인간 존재가 자신의 창조주이며 근원이신 하느님,
나를 극진히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나는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을 나른 바라보는 것,
그분이 너무 사랑스러워 그저 가까이 앉아 있는 것만 해도 행복한 상태.
결국 유한한 한 인간 존재가 영원하신 하느님께 항상 연결되며
사랑을 주고받는 것, 그것이 기도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지향하는 청원의 기도를 들어주셔도 좋지만 당장 들어주시지 않아도 괜찮은...
그저 우리가 하느님과 소통하고 대화하는 그 자체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그저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그분 안에 머무는 그 자체에 만족하고 행복해 하는...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는 하느님
박상대 마르코 신부
기도 중의 기도요, 가장 완벽한 기도이며,
모든 기도의 모범이 될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 예수께서
오늘은 일용할 양식 외에도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청할 것을 허락하신다.
아니, 청할 것을 서둘러 권고하신다.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청원기도에 대한 두 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주신다.
첫째는 청원기도를 드리는 태도에 관한 것으로서 기도의 항구함과 인내와 끈기이다.(5-10절)
둘째는 청원기도의 내용에 관한 것으로서
무엇을 청해야 하는 지를 가르치고 있다.(11=13절)
우선 루카 복음이 독자적으로 보도하는 예화가
바로 기도에 인내와 끈기가 있어야 함을 가르쳐 준다.
예화는 한밤중에 한 친구의 방문을 받은 다른 친구가 내놓을 빵이 없어서
또 다른 친구를 찾아가 빵을 청하는 다소 극단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예화의 결론은 사람이 우정만으로는 빵을 얻지 못하지만,
귀찮을 정도로 끊임없이 졸라대면 결국 빵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청원기도에는 항구함과 끈기와 인내가 있어야 한다.
아울러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찾는 사람에게,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그 청을 거절하지 않고 꼭 들어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그러니 청원이 이루어질 때까지 항구함과 끈기와 인내로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청원기도에서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를 알아보자.
예수께서는 일단, 자기 자녀들에게 그들이 청하는 것을 다 들어줄 줄 아는 이 악한 세대의 아버지들과
청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를 비교하는 對比論法을 통하여,
세상의 아버지들보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더 선하시고 자비로운 분이심을 암시하신다.
나아가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청하는 무엇이던, 청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신다는 뜻이다.
즉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청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를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이며,
결국에는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령이란 바로 하느님을, 자신을 가리킨다.
세상의 아버지들은 그 자녀들이 생선을 청하면 생선을 주고, 달걀을 청하면 달걀을 주지만,
하늘의 아버지는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보다 더 좋은 “하느님 당신”을 주신다는 것이다.
인간은 감사와 찬양으로만 하느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깡그리 비운 두 손을 믿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올림으로써 그분을 경배할 수도 있다.
나에게 없는 것을, 필요한 것을 하느님께 겸손되이 청하는 것도 하느님을 경배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예수께서 우리가 무엇이든지 하느님께 청하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느님께 하느님 당신을 달라고 청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청한 바로 그것을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이런 기도를 바칠 수 있다면 어떨까?
“당신께서 가난하셨는데 내가 어찌 부자 되기를 바라겠습니까?
거짓 예언자를 높이고 참 예언자를 쳐 죽인 자들의 후손들이 당신을 거부하여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내가 어찌 사람들 눈에 유명하고 권세 있는 자 되기를 애써 바라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리겠다는 희망을, 그 희망이 결국은 절망을 가져다줄 뿐인데,
내가 어찌 그런 희망을 가슴속에 품어 기르겠습니까?”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내놓을 것이 없네
박 마리 피앗 수녀
내놓을 것이 없네.
벗과 이웃과 지인.
그 경계는 어딜까?
청할 때 흔쾌히 '예'하는 만큼
찾을 때 흔쾌히 '내어주는' 만큼
문을 두드릴 때 흔쾌히 '열어주는' 만큼
그 만큼의 거리가
벗인지 이웃인지 그냥 면식 있는 지인인지를 가늠한다.
예수님과 나의 거리는 어느 만큼일까?
[출처] 루카 11,5-13 연중 제27주간 목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