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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을미사변 직후 순명효황후가 순종의 세자시절 스승인 김상덕에게 쓴 한글 간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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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명효황후의 친정아버지 민태호. 그는 1884년 갑신정변 때 金玉均 일파에 의해 피살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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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송씨 문중의 고문번역가 송병혁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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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백작이 된 민영린(왼쪽)과 가족들. 민영린은 순종과 처남매부 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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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명효황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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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박물관에 소장된 애국지사 민영환의 血竹 사진. 피묻은 옷을 간직했던 마루에서 대나무가 자랐다고 한다. 민영환의 손자 민병진씨(사진 오른쪽). |
여흥민씨 宗中이 주장하는 역사왜곡
종중은 기구치의 대표적인 왜곡 사례의 하나로 명성황후가 완화군·이귀인의 사망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들었다. 고종은 명성황후와 결혼하기 전 궁녀 출신인 귀인 이씨를 먼저 알게 되어 1868년 완화군을 낳았다. 기구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완화군의 생모인 이상궁이 갑자기 서거하니 사람들은 모두 그 급사에 대하여 의심을 하였으며 설상가상 완화군도 또한 흉거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종중 측은 “완화군이 1868년 출생해 1880년 1월 12일 13살에 죽고(《승정원일기》), 어머니 이귀인은 명성황후 사후인 1928년 12월 17일 노령으로 죽었는데도(《동아일보》 1928년 12월 19일자 2면 ‘李貴人別世’ 기사) 황후를 포악한 여인으로 부각시키고 꾸미기 위해 이귀인을 완화군의 죽음보다 먼저 명성황후가 죽인 것처럼 썼다”고 밝혔다. 또 황현의 《매천야록》과 정비석의 소설 《민비》 역시 왜곡에 일조했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매천야록》에는 ‘황후가 끝까지 그(대원군)를 꺼려 남모르게 자객을 시켜 그를 해치려고 하였다’거나 ‘기묘년 봄 완화군이 사망했다. 전하는 말에 명성황후가 젓동우(생산 염장동이)에 거꾸로 넣어 죽였다고 하고, 일설에는 방망이로 때려 죽였다고도 한다’, ‘황후는 의화군의 어머니 상궁 장씨의 음부 양쪽 살을 도려낸 후 그를 낭가에 실어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등이 조작됐다는 것이다. 또 “1980년 간행된 정비석의 소설 《민비》 역시 황후를 ‘사내아이와 같은 괄괄하고 기승스러우며 억센’ 무명천녀(無名賤女)로 비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전남 광양 출신의 황현(1855~1910)은 스물한 살(1876년) 때 서울로 와서 스물아홉(1883년)에 전남 구례 만수동으로 귀향했다. 1888년 34살에 성균회시에 장원급제하고 2년간 서울에 머무르다 서른여섯에 다시 귀향했다. 그가 남긴 문집은 《매천야록》, 《매천집》 등이다. 삼방파 민병설 이사장은 “황현의 서울 거주 기간은 불과 10년이고, 일생 대부분을 서울에서 멀고 먼 구례 산골에서 살았는지라, 그의 기록은 대부분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한 소문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민동환 이사도 “소문에 근거한 황후의 이야기 일부는 기구치 겐조가 조작한 내용들이 사실인 것처럼 인식하는 데 일조했다”며 “정비석 역시 기구치가 조작한 역사를 토대로 황후를 더욱 포악하고 음란한 여성으로 그렸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