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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5일 오늘의 역사
2023년 멕시코 갱단 체포를 위한 군대와 시가전 총격전 발생 군경 29명 사망
멕시코의 전설적인 마약왕 ‘엘 차포’의 아들이자 갱단 실권자를 체포하기 위한 대규모 군사 작전이 펼쳐졌다 생쥐’라는 별명을 가진 오비디오 구스만은 멕시코에서도 손꼽히는 마약왕 호아킨 ‘엘 차포’ 구스만의 아들이다. 그는 종신형을 받고 미국에서 수감 생활 중인 부친을 대신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마약 밀매 조직인 ‘시날로아 카르텔’을 다른 형제들과 함께 지배해 왔다. 이번 체포 과정에서 시날로아 카르텔은 시내에서 군 병력에 총알을 퍼붓는 등 강렬하게 저항했다. 시설물이나 차량에 방화도 이어졌다. 일부 소셜미디어에는 상공을 끊임없이 비행하는 헬리콥터 소리와 함께 집중포화하는 듯한 소리가 담긴 영상이 공유됐다.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소요사태 속에 공항과 주요 도로는 카르텔 단원을 비롯한 무장 괴한들에 의해 폐쇄되거나 차단돼, 사실상 도시가 봉쇄됐다.
이번 작전으로 군 경 등 29명이 사망하고 38명이 부상했다.차량 250대가 불에 타거나 도난 당했고, 상점 4곳이 약탈 피해를 봤다.카르텔 조직원들은 오비디오 구스만 압송을 막기 위해 공항 일부 건물을 폭파하기도 했다.군은 무장화기를 실은 25대 넘는 카르텔 차량에 맞대응하기 위해 블랙호크 헬기를 띄우는 등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작전을 펼쳤다. 주 정부는 주민들에게 실내에 머물 것을 촉구했고 멕시코 주재 미국 대사관은 자국민에게 외출 자제 경고를 발령했다. 각급 학교도 임시 휴교령에 따라 문을 닫았고, 행정당국도 업무를 중단했다.
2022년 북한 두 번째 극 초음속 미사일 시험발사
2021년 물방울 화가 김창열 세상 떠남(92세)
2020년 영화 '기생충'(감독 봉준호) 한국영화 최초로 제77회 골든 글로브 외국어영화상 받음
2020년 이란 핵합의(JCPOA 포괄적 공동행동 계획) 사실상 탈퇴선언
2014년 남북적십자 실무접촉
판문점 북측 지역 통일각에서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위한 남북 적십자 실무접촉을 가졌다. 이 접촉을 통해 이산가족 상봉을 2월 20일에서 2월25일에 금강산에서 개최한다고 합의했다.
2011년 함바 운영권 로비 의혹 사건
‘함바(건설현장 식당) 비리’로 기소된 전현직 경찰 총수나 고위 간부들이 접견실이나 집무실에서 ‘검은 돈’을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강희락 전 경찰청장은 함바집 브로커로부터 건설 현장 민원 해결과 경찰관 인사 청탁 등의 명목으로 지난 2009년 4월부터 12월까지 총 18차례에 걸쳐 모두 1억9000만원을 수수한 혐의를 받아 구속 기소 되었다.
이후, 이길범 전 해양경찰청장, 장수만 전 방위사업청장이 기소되었다.
검찰에 따르면 이 전 청장은 지난해 5~6월 접견실에서 세 차례에 걸쳐 유씨로부터 여수에 짓는 해양경찰학교 건설현장 식당을 수주할 수 있도록 강평길 전 여수 해경서장에게 부탁해달라는 명목으로 모두 2천500만원을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또한, 장 전 청장은 함바 브로커로부터 청탁과 함께 금품을 수수하고, 대우건설 서종욱 사장에게서는 사업상 편의를 봐달라는 청탁과 함께 1천만원 상당의 백화점 상품권을 수수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그는 국방획득체계 개선 작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다가 일명 ’함바 비리’에 연루됐다는 의혹 등을 받고 취임 6개월 만에 사의를 표명했다.
검찰은 또 브로커 유씨로부터 건설현장 민원 처리 등의 명목으로 수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김병철 전 울산청장을 불구속 기소하고, 고소 사건 청탁 대가로 금품을 챙긴 이동선 전 경찰청 경무국장을 구속 기소했다.
SH공사 사장으로 재직하던 2007년에서 2008년 사이 브로커 유씨에게서 SH공사가 발주한 건설공사 현장의 식당 운영권을 달라는 청탁과 함께 9차례에 걸쳐 4천500만원을 받은 최영 강원랜드 사장도 구속 기소되었다.
2010년 中, 최초 소수민족 외교부 부부장 몽골족 출신 푸잉 대사
2010년 1월 5일 몽골족 출신의 푸잉(傅瑩·57) 대사가 중국 최초의 소수 민족 외교부 부부장(차관)이 됐다. 지난 1974년 왕하이룽(王海容) 이후 36년 만에 탄생한 중국의 두번째 여성 외교부 부부장이기도 하다.
1953년 네이멍구 후허하오터(呼和浩特)에서 태어난 푸잉 대사는 1969년 문화대혁명 당시 3년 동안 농장 등에 배치돼 고된 노동 속에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1977년 베이징외국어학원 영어과를 졸업하고 외교부에 들어간 뒤 1982년부터 1991년까지 최고지도자인 덩샤오핑(鄧小平)과 양상쿤(楊尙昆)·장쩌민(江澤民) 주석의 영어 통역을 담당했다.
1992년부터 외교부 아주사(亞洲司·아주국)에 배치돼 본격적인 외교 업무를 시작했으며, 2000년 4월부터는 아주사 사장으로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 실무를 총괄했다. 2004년과 2007년 각각 호주대사와 영국대사로 역임했으며 부드러운 인상에 완곡한 표현을 자주쓰는 외유내강형의 외교관으로 평가받는다
2000년 17세의 티베트 불교 지도자 카르마파 라마, 인도로 탈출
라마교 3대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당시 14세 소년인 제17대 카르마파가 2000년 1월 5일 티베트를 탈출했다. 1992년 중국에 의해 17대 카르마파에 추대된 우기엔 트린리 도르제(14)는 비구니인 누나(24) 등 5명의 추종자와 함께 눈덮인 히말라야 산맥 1400km를 8일 만에 넘어 인도에 도착한 것으로 밝혀졌다.
카르마파는 인도에 있는 교리 선생 방문을 위한 비자 발급을 중국 당국이 거부하자, 탈출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1월 8일 인도 북부에 있는 달라이 라마 망명정부를 방문했다. 카르마파는 판첸 라마에 이은 서열 3위의 라마승으로 7살 때 중국당국에 의해 추대됐다.
카르마파의 탈출은 지난 1959년 중국통치에 반대하는 티베트인들의 민중봉기가 좌절된 이후 당시 최대 종파인 겔루파 소속 달라이 라마와 제16대 카르마파가 인도로 망명한 이후 최대 탈출사건이었다. 특히 카르마파는 달라이 라마를 대신한 티베트 불교 지도자로 중국이 ‘이용’해온 인물이란 점에서, 중국에 충격과 함께 커다란 골치거리로 떠올랐다.
1997년 반(反) 김일성 운동가 허진씨 별세
“북한 민주화와 통일이 눈앞에 다가왔는데…” 반(反) 김일성 운동가 허진(69·본명 허웅배) 유러시아대학 이사장이 1997년 1월 5일 이 말을 마지막으로 모스크바에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했다.
허진 이사장은 1928년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시에서 한말 의병대장 왕산 허위의 손자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독립군 투사였던 아버지 허준씨를 따라 만주벌판을 헤매야만 했고, 특히 5촌 아저씨 허형식씨가 동북항일연군 지휘관으로 이름을 떨치는 바람에 일본군의 주요 추적대상이 되기도 했다.
해방 후 귀국한 그는 북한 민주청년동맹 선전부에서 활동하다가, 한국전쟁 당시에는 북한군 소좌 계급장을 달고 선무공작대장으로 서울에 들어오기도 했다.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은 1957년 소련에 망명을 신청하면서부터였다. 1952년 북한 국비장학생으로 선발돼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에 유학한 그는 1956년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운동을 보면서 김일성 반대운동을 결심하게 된다. 그가 1957년 11월 북한 대사관에 잡혔다가 2층 화장실 창문으로 탈출한 사건은 유명하다. 그후 소련 외교 아카데미 등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한-소 수교 당시 막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또 고려일보 회장과 고려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러시아 교포를 대상으로 끊임없이 북한 민주화 및 통일 사업을 전개, 러시아 주재 북한대사관의 감시대상 1호이기도 했다.
1996년 미국 화이트워터 문서 발견
클린턴 대통령이 아칸소 주지사 시절 부인 힐러리의 친구 제임스 맥두걸 부부와 함께 세운 화이트워터부동산개발 회사의 지역토지개발 둘러싼 사기사건 의혹, 클린턴 대통령의 대표적 스캔들
1995년 케이블 TV 시험방송 시작
1995년 1월5일 오전 10시. 케이블TV가 전국적인 시험방송을 시작, 기술적으로는 미진했지만 전체적으로 다매체시대의 개막을 실감케 할만큼 큰 영상 충격을 줬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케이블TV의 개업은 당초 예정됐던 시범방송과는 거리가 먼 단순한 기술시험에 그쳤다.
이날 방송하기로 되어 있던 전국 51곳 중 31곳의 방송국만 참여했고, 기존 시범구역을 빼면 1만명이 안되는 가구를 대상으로 했다. 대구 등 일부 지역에서는 방송 자체가 지연되는 일도 있었다. 소프트쪽에선 21개 채널 중 오락채널인 제일방송을 제외한 20개 채널이 참가, 기존 공중파와는 비교가 안될 규모의 다양한 영상을 선보였다. 하지만 몇몇 채널은 음질이 떨어지고, 준비 부족으로 자막방송에 그치기도 했다.
TV뷔페 현장 연출 종합유선방송위원회 심의본부에 설치된 21개 모니터들이 이날 내보낸 화면은 케이블TV가 몰고 올 영상 혁명 을 예고했다. 모니터에는 MBN의 경제뉴스를 비롯, 캐치원의 영화 인도차이나, 현대방송의 시리즈외화 삼국지 , 뮤직네트워크의 해외 뮤직비디오, 한국스포츠TV의 농구경기중계, 채널Q의 다큐멘터리 ‘최후의 원시림-마누’ 등의 영상들이 쏟아져 TV뷔페의 현장을 연출했다.
1994년 토머스 오닐 前 미국 하원의장 사망
미국의 원로 정치인 토머스 오닐 전 미하원의장이 1994년 1월 5일 오전 사망했다. 향년 81세였다. 오닐 전의장은 지난 1936년 민주당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한 이후 17회나 하원의원에 피선됐으며 1987년 은퇴할 때까지 5차례에 걸쳐 하원의장을 역임하면서 대통령에 이어 정치적 영향력이 가장 크다고 평가되던 거물 정치인이었다.
매사추세츠주 캠브리지 태생인 오닐 전의장의 반세기 정치인생은 보스턴대학 졸업반 때 민주당 소속으로 주하원에 발을 디디면서 시작됐다. 이후 오닐은 1949년 37세라는 나이로 최연소 주하원의장의 기록을 수립했는데, 전통적인 공화당의 아성 매사추세츠에서 민주당이 하원의장을 차지한 것은 남북전쟁 이후 오닐이 처음이었다.
오닐은 1952년 하원에서 상원으로 옮겨 간 존 F. 케네디 전대통령으로부터 캠브리지, 보스턴 등이 포함된 그의 선거구를 물려받아 연방 하원에 진출함으로써 활동의 무대를 중앙으로 넓혔다. 오닐이 전국적인 정치인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67년 오랜 당내 동료이자 친구이던 린든 B. 존슨 당시 대통령을 상대로 베트남전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하면서부터였다. 오닐은 베트남전이 본질적으로는 내부갈등이라고 규정하고 미국의 참전은 목표가 모호하고도 제한된 데 비해 그 대가는 너무나도 비싸다고 비판했다.
그를 특히 유명하게 만든 것은 하원의장으로 재임하면서 공화당의 레이건 대통령을 신랄하게 비판한 일이다. 그는 사회보장제도를 축소하려는 레이거노믹스에 대항해 격렬하게 싸웠으나 결국 보수 회귀의 사회적 분위기에 밀려 패배했다.
1993년 스코트랜드 세틀랜드 군도에서 유조선 좌초, 원유 2천400만 갤런 유출
1992년 부시 미국대통령 방한
1991년 소말리아에 군의료부대 파견 결정
1982년 야간통행금지 해제
37년간 규제속에 묶여 있었던 야간통행금지가 1982년 1월 5일 해제됐다. 정부는 이날 국무회의에서 통금해제안을 의결, 전국 50개시, 1백39개군, 1천4백41개 읍 면중 53개군 2백92개 읍.면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했다.
통금이 계속 실시되는 전방 전접지역으로는 경기도내 56개 유인도시와 인천시의 행정부에 속한 2개 유인도시 등 58개 도시를 포함한 10개군 71개 읍.면이며 후방 해안지역은 43개군 2백21개 읍.면으로 통금해제에서 제외됐다. 통금이 풀리는 지역의 면적은 전국 면적의 82%였다.
통금해제 첫날은 버스와 지하철이 자정 이후까지 연장 운행했고 택시도 철야로 다녔으며, 철야영업 간판을 내건 가게들도 속속 등장했다. 그러나 시민생활의 역사적 전환이 조용히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금이 없어진 첫날밤은 귀가 전쟁은 없어졌으나 서울시내의 도심이나 변두리 할 것없이 통금시점과 별다른 변화를 발견할 수 없었다.
1981년 한국과학원(KAIS)과 정부출연기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통합해 한국과학기술원(KAIST)으로 명칭 변경
1981년 경기도 양평 -32.6도, 온도 측정사상 최저 기온 기록
경기도 양평에서는 영하 32.6도로 우리나라 남한 역대로 최저온도를 나타낸 날이다
10위 : 1969년 2월 6일 강원도 춘천시 영하 27.9도
9위 : 1981년 1월 4일 강원도 홍천군 영하 28도
8위 : 1981년 1월 5일 강원도 홍천군 영하 28.1도
7위 : 1981년 1월 5일 충청북도 충주시 영하 28.5도
6위 : 1974년 1월 24일 강원도 대관령 영하 28.9도
5위 : 2001년 1월 16일 강원도 철원군 영하29.2도
4위 : 1981년 1월 3일 경기도 양평군 영하 30.2도
공동 2위 :1981년 1월 4일 경기도 양평군 영하 31도
1981년 1월 6일 경기도 양평군 영하 31도
1위 : 1981년 1월 5일 경기도 양평군 영하 32.6도
우리나라 (남북한 합쳐서) 기상관측사상 최저온도는
1933년 중강진 영하 43.6도
1979년 中, 랴오닝성(遼寧省) 일대 고조선시대 청동기 유물 1백여점 출토
1974년 일본-중국, 통상협정 조인
1973년 김종필 총리, 존슨 미국 대통령과 회담
1971년 민정당 창당(총재 윤보선)
1968년 두브체크, 체코 공산당 제1서기에 선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이 중앙위원회에서 안토닌 노보트니 대통령 겸 공산당 제1서기를 당제1서기로부터 해임, 대통령직만 유지하게 하고 1968년 1월 5일 알렉산더 두브체크를 당제1서기로 선출했다. 소련의 압력을 배제한 선출로 동구권중 최초의 수뇌교체였다.
이날 두브체크가 당제1서기에 선출된 것을 계기로 체코는 `프라하의 봄`이라고 불리워지는 시기를 맞게 됐다.
3월에는 검열법, 신문지법 등의 언론통제법이 개정되고 4월의 당중앙위원회에서는 결사-집회-정치적 신념의 자유에 더해져 국내여행과 국외체류가 승인됐다. 그러나 이 `프라하의 봄`은 8월의 바르샤바조약기구군의 침공으로 겨울을 맞게 됐다.
1967년 청룡야구대회 개최로 학생 야구의 전기 마련
1965년 정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발표
1961년 김상돈, 서울 첫 민선시장 취임
1959년 신보안법반대데모 전국에서 발생
1958년 독립운동가 임용상 사망
1957년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신중동 정책 발표(아이젠하워 독트린)
1956년 티토, 니제르, 동서군사블록 비난
1954년 미국,영국.프랑스, 대유고경제원조협정 체결
1953년 이승만대통령 일본 방문, 요시다 수상과 회담.
1953년 사뮤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파리에서 초연
아일랜드의 극작가 사뮤엘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가 1953년 1월 5일 파리 바빌론극장에서 초연됐다. 아일랜드 출신으로 파리에 와서 프랑스어로 작품을 쓰고 있는 베케트를 주목할 사람은 물론 이 연극이 성공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도 당시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본은 연출가들 사이에서 돌고 돌아다녔지만 통속극이 아니라는 이유로 연출가들의 외면을 받았다.
공연 다음날 피가로지 1면에는 `광대들에 의해 공연된 파스칼의 명상록`이라고 대단한 호평이 실렸다. 극장은 연일 만원이었고 배우들은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고 희희낙락했다. 자신의 예술에 방해된다고 아무도 만나려 들지 않는 베케트를 촬영하기 위해 미국 텔리비전 방송팀은 아파트 8층에 사는 그의 모습을 찍으려고 사다리를 올릴 정도로 법석이었다. 공연이 성공하자 `기상천외한 작가` `불가능한 완전한 침묵의 작가` 등의 수식어가 그를 따랐다.
그는 한때 더블린에서 교수생활도 했지만 알지도 못하는 것을 가르칠 수 없다며 1938년 파리로 떠나 그곳에서 사망할 때까지 거주했다. 1969년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받기 싫다며 스톡홀름에도 가지 않고 수상연설도 하지 않은 작가였다.
1951년 서재필 박사 별세
독립운동가 송재 서재필이 1951년 1월 5일 미국에서 향년 8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864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18세에 과거에 합격했지만 개화에 관심이 있던 그는 1884년 12월 김옥균·홍영식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실패하며 3일천하로 끝났고 이후 일본을 거쳐 1885년 미국으로 망명, 1889년 워싱턴대학에 입학했다.
미국 이름 필립 제이슨으로 생활하며 1892년 컬럼비아 의과대학을 나와 의사가 됐다. 서재필은 미국 시민권을 받은 최초의 한국인이었으며, 첫 한국인 미국 의사였다.
갑오경장 이후 역적죄는 사면되었고 조선 정부는 중추원 고문으로 서재필을 초청했다. 1895년 12월, 11년만에 귀국 한 서재필은 정부예산을 얻어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한편, 이상재·이승만 등과 독립협회를 결성했다. 1897년에는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이후 1898년 5월 수구파 정부와 일부 외국인의 책동으로 다시 미국으로 추방돼 있다가 3·1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한인친우회를 조직, 재미교포들을 결속하여 독립운동후원회를 만들었다.
1947년 미군정 장관 J.R.하지의 초청으로 귀국, 미군정청 고문(하지 사령관 고문 겸 남조선과도정부 특별의정관)으로 있는 동안 국민의 추앙을 받았으나 이승만과의 불화 및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하고 귀국 1년만인 1948년에 미국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으며 미국에 있던 그의 유해는 전명운 의사의 유해와 함께 1994년 4월8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1950년 소설가 김동인 사망
이광수, 염상섭 등과 함께 한국 현대 소설사의 첫머리에 우뚝 솟아 있는 작가 김동인이 1950년 1월 5일 사망했다. 그는 1919년 신문학 최초의 동인지 ‘창조’를 창간했다. 한국 리얼리즘 또는 자연주의의 빗장을 연 개척자이기도 했다. 일제하에서 3·1운동의 격문을 만들었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1942년에는 일왕에 대한 불경죄 죄명으로 6개월을 복역한 적도 있다. 그는 한국 문학사에 기념비로 남을 주옥같은 단편들을 남겼다.
사실주의 계열에 속하는 ‘감자’ ‘배따라기’ ‘김연실전’ ‘명문’ ‘태형’ ‘발가락이 닯았다’ 등이 있고, 탐미주의 계열 작품으로는 ‘광염소나타’ ‘광화사’ 등이 있으며, 민족주의적 색채를 보인 작품으로 ‘붉은 산’ 등이 있다. 그는 이광수의 계몽주의나 신경향파 및 카프의 사회주의 문학에 맞서서 ‘예술을 위한 예술’을 내걸고 탐미주의적 순수문학을 지향했다.
김동인이 한국 문학사에 끼친 공로는 그 소설들의 무르익은 구성 못지않게 문체에 있다. 그는 작중 인물의 호칭에서 영어의 he나 she를 ‘그’로 통칭하고, 용언에서 과거시제를 즐겨 사용해 문장의 시간 관념을 또렷하게 했으며, 짧고 간결한 문장으로 현대소설의 문체를 개척했다.
1949년 트루먼 미국 대통령 페어딜 정책 발표
1948년 킨제이보고서 `인간 남성의 성적 행동` 출판
"유부남의 30∼45%는 아내 몰래 바람을 피웠고, 남성의 90%는 자위 행위를 했다." 인대애나 대학 동물학 교수였던 알프레드 C. 킨제이 박사가 1948년 1월 5일 펴낸 보고서 `인간 남성의 성적 행동(Sexual Behavior in the Human Male)`이 던진 폭탄선언이다. 킨제이는 10년 동안 미국 전역에서 1만 8,000명을 인터뷰하고 얻은 1만 2,000건의 자료를 토대로 이 보고서를 작성했다. 매스컴의 집중 조명을 받은 이 보고서는 곧 바로 베스트셀러가 됐다. 25만부 이상 출판됐고 12개국 이상에서 번역됐다.
보고서가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 속에 담긴 다채로운 성생활 공개때문이 아니었다. 보고서 자체가 말 그대로 적나라했기 때문이었다. 책에 수록된 내용은 혼외정사, 동성애, 자위, 매춘 등에 대한 통계를 정확하게 제시해놓은 것으로, 당시까지 거의 금기시해 오던 주제였다.
킨제이는 5년 후 1953년 두번째 보고서인 ‘인간 여성의 성적 행동(Sexual Behavior in the Human Female)’을 발표했다. 이는 훨씬 더 자세한 연구서였지만 의회와 언론으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았다. 킨제이는 동료 학자들이나 의사들의 호응도 얻지 못했다. 사실 오늘날 학계에선 누구나 킨제이 보고서의 결점을 지적한다. 우선 보고서의 조사 대상자가 백인, 중서부 중산층, 대학생들에 치우쳤다는 것. 또한 조사에 응한 자원자들 중에는 죄수와 성범죄자들도 포함됐는데, 모두 정상적 신뢰도가 낮은 경우라는 것.
하지만 이같은 지적에도 불구하고 킨제이는 남성과 여성의 성 생활을 밀폐시켰던 방문을 활짝 열어젖힌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1947년 시인 홍사용 사망
1943년 미국 흑인인권운동가 카이버 사망
1938년 스페인 왕 후안 카를로스 출생
1933년 미국 제30대 대통령 쿨리지 사망
1932년 이탈리아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 출생
1928년 파키스탄 대통령 줄피카르 알리 부토 출생
1925년 제1회 전국빙상경기대회 개최
1924년 의열단 김지섭 열사 도쿄 왕궁에 폭탄 던짐
1923년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노백린 취임
1919년 독일, 노동자당(후에 나찌당) 결성. 베를린의 20만 노동자 무장봉기
1912년 아동문학가 이원수 출생
1910년 멕시코동란 발발
1902년 프랑스 `르몽드` 신문 창립자 위베르 뵈브 메리 출생
1899년 필리핀, 아키날도장군 독립선언
1896년 전국에서 민비 시해와 단발령에 저항하는 의병 봉기
1885년 안전면도칼의 발명자 질레트 출생
1876년 서독 초대 수상(1949-63) 콘라드 아데나워 출생
1874년 미국의 생리학자 조셉 얼랜저 출생
1855년 안전면도칼과 안전면도날 널리 보급한 킹 질래트 미국에서 태어남
1637년 병자호란중 김준룡 청군 격파
995년 고려, 관제(官制)를 개정, 6부상서(六部尙書)의 칭호 정함
675년 일본, 최초로 점성대(占星臺)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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