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요... 광고성 글로 찍혀서 삭제 당할련지 모르겠지만 카페 대문의 배경음악도 노찾사음악이니까 한번 올려봅니다... ^^
노래를 찾는 사람들 20주년을 기념해서 2집과 3집을 하나로 묶은 음반이 나왔습니다.
2장의 음반과 그 때를 회상하는 사진집을 추가했고 나름대로 기념음반으로성릐 성의를 다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아래의 글은 음반사에서 제작한 보도자료입니다.
다른 음반들의 보도자료보다 상당히 긴 분량입니다. '좀 간추려 볼까?' 생각하다가 음악을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오히려 그것이 더 방해가 될 것 같아 그대롷 보내드립니다.
그리고 혹시 구매의향이 있으시면 문화가 숨쉬는 장터 Disc4U (www.disc4u.co.kr)를 이용해 주세요!!! ^^
[ 구매하기 ]
20주년 기념 재발매 노래를 찾는 사람들 2*3
사계, 광야에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그날이 오면, 임을 위한 행진곡 등세월을 뛰어넘어 기억되는 노래로 시대정신과 감성의 울림을 실천해온, 올해로 20주년을 맞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기념음반. 이 음반은 발매 당시 폭발적인 지지와 성원을 받았던 2집과 3집을 묶어낸 것으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대표곡 모음집이라고 불릴 만큼 중요한 트랙들을 담고 있다.
세계음악의 큰 지도 속에서 미래의 유산이 될 이 음반은 음질열화를 막기 위해 96KHz/ 24Bit 리마스터링을 거쳤으며, 44페이지에 달하는 충실한 설명과 공연사진을 담고 있는 내지를 수록해 소장가치를 높였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노래를 찾아 헤매던 길고 오랜 여정은 현재로 남은 역사로 다시 우리 앞에 설 것이고, 노래는 그렇게 우리 곁에 남을 것이다.
- 신현준 (음악 평론가)
시대와 민중이 낳아주고 성장시켜준 소중한 빚을 갚을 길 없고, 노래는 지금도 우리들 모두를 기억한다. 그래서 지금 다시 기록한다.
- 강민석 (前 노찾사 멤버, 現 BBS-FM ‘세계음악여행’ 진행자)
ØØ 글 싣는 순서
- 음반을 기획하며: ‘노래를 찾는 사람들’ 기획실
1. 인사말 – 한동헌(노래를 찾는 사람들 대표) [‘노래를 찾는 사람들’2*3집 재발매에 부쳐]
2. 회고의 글 – 강민석 (前 노찾사 멤버, 現 BBS-FM ‘세계음악여행’ 진행자) [노래를 불렀고, 아직 노래가 나를 기억한다.]
3. 총평 – 신현준 (음악평론가)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찾고 있는 노래, 혹은 민요와 가곡 사이에서]
4. 음반발매 당시 설명 – 김창남 (성공회신학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1) 노래를 찾는 사람들 2집
2) 노래를 찾는 사람들 3집
5.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지나온 길.
'노래를 찾는 사람들'은 1984년 김민기와 대학노래패 출신의 사람들이 함께 시작함으로 노래운동의 시작을 열었던 단체입니다. 문화예술의 갈래로서 노래가 지니는 사회적 책임과 역사성을 담아내며, 시대의 아픔을 표현함으로 80년대의 정서적 교감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했습니다.
이후 광범위한 노래운동의 대중화가 이루어지는 시기에 선두주자로서 광야에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임을 위한 행진곡, 그날이 오면, 사계 등 시대를 뛰어넘어 기억되는 노래들의 생산자이자 일터와 거리, 대학을 오가며 수많은 공연을 통해 대중들을 만났던 그룹으로서 다양한 활동을 지속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89년의 2집과 91년의 3집은 당시 대중가수들의 인기를 훨씬 넘어서는 사랑을 받기도 했으며, 이를 포함해 84년의 1집, 94년 4집과 더불어 발매되었던 '10주년 기념음반', 97년에 발매되었던 '모음 하나' 까지 모두 6장의 음반을 출시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한국 대중 가요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故 김광석, 안치환, 권진원 등 음악인들의 요람이기도 했으며, 지금까지 약 150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작사, 작곡, 편곡, 노래, 연주, 기획, 공연 연출 등의 분야에서 각자의 역할을 맡으며 지켜오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은 건강한 삶의 노래를 찾고 만드는 작업과 함께 문화 예술에 대한 진지한 담론의 생산을 진행해 나갈 것입니다.
ØØ 음반을 기획하며: ‘노래를 찾는 사람들’ 기획실
20세기 중반을 지나며 음악이 '산업화'의 길로 접어들던 시대에 '포크 리바이벌' 바람이 음반시장에 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전통의 계승, 발전을 통해 시대상을 반영하던 그 흐름은 이완 맥콜, 마틴 카씨로 대표되는 영국이나 우디 거스리, 피트 시거, 밥 딜런, 조안 바에즈로 대표되는 미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일제히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독재에 항거하기 위해서, 전쟁 반대를 위해서, 음악 그 자체를 위해서......
'포크 리바이벌'의 바람이 쉽게 저물지 않는 거대한 흐름을 이루는 한쪽에서는 제국주의, 독재정권에 맞선 음악가들이 자신의 음악으로 '정의의 칼날'을 세우기도 했었습니다.
'트로피 깔리스모 무브먼트'의 카에타노 벨로주, 질베르토 지우, 마리아 베따니아 등.
'누에바 깐시온'의 메르세데스 소사, 유팡끼, 빅토르 하라와 비올레타 파라, 낄라빠윤 등.
그리스의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와 마리아 파란두리,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미리암 마케바 등.
이들은 비록 당시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던 영미권 음악의 영향을 받았지만, 자국의 언어로 옷을 갈아 입힌 후, 민족 정서와 전통 양식으로 꾸며낸 새로운 '틀'을 만들어 완벽한 홀로서기에 성공하며, 때로는 영미권의 상업적인 벽을 허물기도 했었습니다.
우리는 이 흐름에 참여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쳐 버렸습니다. 음악발전의 암흑기로 불리는 70년대가 끝나자, 80년대에 이어진 군부독재의 통제 앞에서 전통은 박제화되어 '박물관'에 모셔졌고, 민족적 정서는 개발우선주의 앞에 잠들어 버리고, 메시지를 담아 내고자 했던 음악인들은 지하로 숨어들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의 아픔을 이겨내며 전 국토에 울려 퍼졌던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노래들은 우리 음악이 월드뮤직 역사에 간신히 체면을 차릴 수 있게 해준 그나마 얼마 되지 않는, '폭정의 강을 건너온, 불안의 시대를 이겨낸 자랑스러운 음악유산'이라는 생각입니다. (각주1)
나아가 그런 이유로 이 노래들은 더 이상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노래일 수는 없습니다.
(여러 가지로 부끄럽고 부족하나마) 이 노래들은 '동시대의 진지한 고민과 희망의 모색'에 마음으로 동참하셨거나,
눈물과 땀으로 이 노래를 함께 불러주신 분들과 거리에서, 일터에서 내일에 대한 가슴 벅찬 희망을 단 한 번이라도 품어 보셨던 모든 분들의 것이라고 해야 옳을 것 입니다.
자신의 '터'에서 최선을 다해 빛나는 '꿈'을 빚고 계시는 분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각주1) 실제로 Simon Broughton와 Mark Ellingham의 저서 ‘World Music Volume 2: the Rough Guide’(Rough Guides Limited 2000.10.19 출판)에 김민기 선배와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한국을 대표하는 월드뮤직 아티스트로 함께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1. 서문
노래를 찾는 사람들’ 2*3집 재발매에 부쳐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첫 앨범을 낸지도 벌써 20년이 되었습니다.
민주주의와 정의를 갈망했던 수 많은 우리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열어 놓은 공간 안에서 '노래를 찾는 사람들'도 나래를 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로 인해 우리의 노래들도 생명을 얻을 수 있었지요.
그 때 우리 노래에 공감해주신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이제 노찾사의 존재 의미가 가장 뜨거웠던 시절의 노래들을 담은 2집[1989년]과 3집[1991년]을 묶어 다시 이 세상에 내놓습니다.
1987년 6월의 감격도 많은 우리들에게 이미 희미한 기억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2004년 가을 우리가 이 노래들을 들을 때 그 때의 함성과 열망과 다시 만나게 되기를 저는 희망합니다.
그리고 그 만남을 계속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더 정의롭고 아름다운 삶을 꿈꾸고 있으니까요.
노찾사의 유산을 정리, 재발매하는 작업은 아직 조금 더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과제는 의미의 재발견과 새로운 감성의 창조인 것 같습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은 지성과 생명의 힘으로써 진심의 노래와 문화의 창조를 위해 일익을 담당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 그리고 꾸지람을 기다리겠습니다.
한동헌('노래를 찾는 사람들' 대표)드림
2. 회고의 글
4노래를 불렀고, 아직 노래가 나를 기억한다.
강민석(前 노찾사 멤버, 現 BBS-FM ‘세계음악여행’ 진행)
1.
힘이었다. 궁정의 악사로 왕을 위해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 것이 음악인에게 최고의 출세였던 중세 유럽이나 세기말 세기초의 한국이나 음악에 대한 근원적 사유는 결국 크게 다르지 않다. 꿈을 꾸고 삶을 살려 하는데 삶이 준 무거움과 고통 때문에 지친 이에게 빛과 힘이 되는 것. 목소리를, 기타를, 시를, 그리고 마음을 갈고 닦는 일 그리고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달려가는 일이 존재의 전부였던 시절이 있다. 팔십년대 후반의 청년기였고, 다른 희망이 있었으며 늘 그것을 제어하는 부비트랩이 몇 발자국 밖에 있었다. 사람이 있고 노래가 있는데도 신나기보다는 두렵고 고단했다. 그래도 노래가 늘 힘이었으므로 노찾사가 만들어진 1984년 이후 이십년이 지나는 동안 우리들의 시대와 세상은 좌절과 성취를 거듭하며 진화해왔던게 틀림없다. 생각할수록 힘이 되고 빛이 되는 노래를 찾는 일은 캄캄한 심해 속에서 수십만 킬로미터의 수로를 여는 일처럼 아득하고 즐거운 고행이었지 싶다.
2.
평범했다. 그들은 늘 어느 거리 어느 동네를 가도 만날 수 있는 사회인, 청년들이었고 여린 사람들이었 으며, 80년대라는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불안한 역동의 자식들이었다. ‘노래를찾는사람들’ 이라는 이름의 정치적 함의가 더 이상 현실적으로 유효하지 않아지는 때까지 노래를 찾기로 한 우리들은 늘 노래를 쓰다 듬고 다가 가게 만들고 그것으로 인해 뼈아프게 스스로의 유약함을 자각 하거나, 좀더 강하게 진화했다.
노찾사 들에게 노래는 늘 사랑하고 싶은데 너무 부족하고 그래서 늘 목마른 연인과 같다. 동시대를 향한 유일한 자유언어였고 꿈처럼 여겨지는 세상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꽁꽁 닫힌 커다란 관문이기도 했 다. 마치 모든 근심이 레몬즙처럼 녹아 굴뚝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순간을 기다리던 도로시와 양철 나뭇꾼과 마법사들이 바라보는 무지개처럼.
3.
기억이 있었다. 전진상교육관, 명동성당 앞 광장과 전국 대학의 노천극장 그리고 영등포 성문밖교회. 부평의 어느 공단. 노래가 힘이 되고 무기가 됨을 아는 사람이 많았다. 노찾사 시절은 늘 무의식마저 지배하는 근원적 동력의 장(場)과 다름없다. 그렇게 나른한 일상의 멜로디를 무기로 가다듬어 반민주와 싸우며 진정한 축제를 기다렸던 날들이 강물처럼 흐르고 그곳에는 노래운동 세대의 ‘기억’이 있었 다. 사십대가 되어도 성장이나 퇴화가 멈춘 듯 흥분하거나 아프거나. 다른 무엇도 생각 못하게 하는 광포한 연애처럼, 나는 여전히 그 기억의 어쩔 수 없는 노예다. 어쩌면 그 불나비같고 바람같던 노래가 나를 기억해주는건지도.
4.
민주와 통일과 자유에 꿈을 맡긴 세기말 한국의 시민들. 사월혁명, 오월광주, 유월항쟁의 주인공들. 월드컵이 열릴 때, 그리고 나라의 주권을 위협하는 전쟁에 반대해야 할 때 평화의 광장을 스스로 만들어 필승과 평화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동아시아의 한 지점에서 평등하고 통일된 조국을 꿈꾸는, 아직 국토분단을 짊어지고 걷는 여행자들. 노찾사는 바로 그들 자신의 수많은 이름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변함없이 늘 성장하고 투쟁하는 우리들의 오늘을 있게 한 조국에 대해, 그리고 노찾사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은 어머니-1970,80년대 그리고 김민기-에게 우리는 많은 빚을 졌다.
돌아보면 아쉬움과 반성의 계기들로 넘친다. 채 완전한 준비가 갖춰지기도 전에 무언가를 발표해야 했기에 좀더 자기 수련과 창작에 매진하지 못한 아쉬움, 좀더 동지들을 사랑하지 못했던 자책. 노찾사가 필요했던 모든 삶터와 싸움터에서 늘 변함없이 기다리던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더 가깝고 유용한 무기와 친구가 되지 못한 것, 더 혼을 담아 노래하지 않은 것, 그리고 노찾사를 사랑으로 비판하던 당대 의 일꾼들에게 좀더 겸허하게 배우고 넓지 못했던 것도. 수많은 아쉬움의 흔적들 그리고 그 모자람 의 크기들이 노찾사 ‘이후’ 삶에 숙제가 되었으며 미래가 되어 버렸다. 늘 등 두드리며 포기 하지 못하게 하던. 그리움과 추억이 아니라 삶의 거울로, 화두로, 일상으로 나를 여전히 가두곤 하는 그 노래는 어디에 있을까. 혹시 이미 같은 시대를 기다리며 살았고 싸웠던 이들 모두 무지개 너머로 함께 날아 찾아내고만걸 나만 몰랐던 걸까!
5.
시대와 민중이 낳아주고 성장시켜준 소중한 빚을 갚을 길 없고, 노래는 지금도 우리들 모두를 기억 한다. 그래서 지금 다시 기록한다. 이제는 유효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노찾사 ‘이후’를 위해서, 마지막이거나 혹은 또 다른 처음을 위해서.
3. 총평
4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찾고 있는 노래, 혹은 민요와 가곡 사이에서
신현준 (음악평론가)
안타까운 일이지만,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하 노찾사)에 대한 일반 대중의 기억은 이제 흐릿해져 가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에게 노찾사의 이름은 이곳을 거친 다음 솔로로 나선 포크가수들 (혹은 민중가수들), 예를 들어 고(故)김광석, 권진원, 안치환 등과 연관되어 가끔씩 기억을 방문하는 정도일 것이다. ‘노찾사’라는 이름은 ‘1980년대’, 그리고 그 시기의 ‘노래운동’과 더불어 망각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일까?
그때 노찾사가, 그리고 노래운동이 희구했던 것이 무엇이고, 그것이 왜 ‘절반의(혹은 그 이상의) 실패’를 맛보았는가에 대한 체계적인 규명을 하기에 지금은 그리 적절한 시점은 아니다. 그렇지만 적절하지 않다고 해서 망각에 묻어두는 것이 능사가 아닌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기억들을 다시 불러 보자.
집단에 대한 기억들
노찾사는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하는 그룹으로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는 집단이므로 노찾사는 ‘보컬 그룹’으로 분류될 것이다. 그렇지만 통상적인 보컬 그룹이 듀엣이나 트리오이고, 아무리 많아도 쿼르텟을 넘지 않는 반면 노찾사의 멤버들은 최소한 다섯 명 이상이었다.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적어도 4명 이상 있었고, 대중음악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 중창이 아니라 - 합창 형태의 곡이 다수 있었다.
둘째, 노찾사를 ‘보컬그룹’으로 한정할 수도 없는데, 그 이유는 악기 연주를 담당하는 밴드의 성원도 그룹의 정규 멤버들이었기 때문이다. 즉, 악기 연주를 담당한 이들은 그때그때의 필요에 의해 기용된 ‘세션’들이 아니었고, 따라서 노찾사는 그룹 차원에서 노래와 연주를 모두 담당하는 자기완결적 집단이었다. 노래나 연주를 담당한 사람들 외에 각종 스태프(staff)들을 포함한다면 규모는 더욱 크다.
셋째, 노찾사는 개인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노찾사와 개인적 친분을 맺고 있는 사람을 제외한다면, 그룹 멤버들 개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앞서 언급했던 김광석과 권진원과 안치환 등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도 그들이 솔로로 독립한 다음이었다. 그룹에 몸담고 있던 시절의 그들은 하나의 불가분한 단위의 구성요소였지, 그룹의 프론트맨(front man) 혹은 프론트우먼이었던 적은 없다. 전면에 나서는 일은 가급적 자제해야 될 그룹의 윤리였다. 그래서 솔로 가수의 노래 같은 트랙에도 그의 이름은 없고, ‘노찾사’라는 기호만 남아 있다.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희귀한 이런 그룹 형태, 그렇기 때문에 상업적 관점에서는 기동성도 효율성도 떨어져 보이는 이런 형태가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당연한 말이지만 이는 노찾사의 음악적 지향의 반영이자 결과였다. 그렇다면 그 지향은 무엇이었을까? 이를 순수하게 음악적인 이유만으로 설명하기 힘들다. 그러기 위해서는 1980년대 대중음악계의 형세를 고려해야 한다.
노찾사의 음악적 지향
회고해 볼 때 노찾사의 음악적 지향은 두 가지 길을 거부하는 것으로 출발했다. 그 하나는 상업적이고 프로페셔널한 연예집단이 되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연발생적이고 아마추어적인 ‘노래패’로 남는 길이었다. 이런 가설이 틀리지 않다면, 노찾사의 음악적 방향은 어렴풋이 짐작 할 수 있다. 즉, 상업적 대중가요와는 상이한 음악적 양식을 추구하면서, 그와 동시에 ‘민중가요’의 조야한 음악적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달리 말한다면 노찾사의 전략은 1980년대 초반 이래(혹은 그 이전 시기부터) 축적된 민중가요의 성과를 한편으로는 ‘심미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화’시키는 이중의 전략이었다. 그들은 민중가요와 대중가요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서 있었다. 운때가 맞았는지 이런 좁은 입지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가 종말을 고하는 1989년에 발표된 [노래를 찾는 사람들 2집]은 대중의 큰 호응을 거두었다. 2집 음반의 성공과 더불어 미리 발표되었던 1집 음반도 뒤늦게 ‘스테디 셀러’가 되었다. 조금 과장한다면, 노찾사의 2집 음반의 ‘성공’은 들국화의 1집 음반과 더불어 1980년대 대중음악계의 2대 이변으로 기록할 만한 사건이었다.
이런 ‘성공’의 원인을 노찾사의 음악 및 노찾사라는 뮤지션의 정체성에 관한 분석을 통해 파악해 볼 수 있다. 또한 그 정체성은 두 개의 각도로 분해해서 살펴 볼 수 있다. 노찾사는 ‘노래’를 추구했다. 그런데 노래, 그리고 진정한 노래란 무엇인가? 멍청한 질문은 집어치우자. 우리는 일상 의식에서 ‘노래 = 대중가요’라는 등식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렇지만 노찾사는 위 등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우변의 타자(他者)를 찾았다. 우리도 그 타자들을 찾아 나서 보자.
현대의 민속음악(folk song)
노찾사가 상업적 연예의 세계를 거부했던 옵션은 당시의 상황에서 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노찾사는 기성의 대중음악을 부정하면서 출발했다. 노찾사의 음반의 수록곡들, 그리고 그들이 많은 공연을 통해 연주했던 곡들은 가사에 담긴 ‘메시지’의 전달에 주력했다. 가수들은 가사를 명징하게 발음했고, 리듬은 가급적 절제되었다.
이런 스타일이 유례없는 것은 아니다. 이데올로기적 지향의 차이는 있었을지 몰라도 우리가 포크음악 (folk music)이라고 부르는 스타일은 모두 메시지를 투명하게 전달 하는 일을 목적으로 삼아 왔다. 그럴 때 노찾사의 음악은 한국에서 ‘포크 음악’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 ‘포크 음악’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다시 짚어볼 필요가 있다. 원론적으로 설명하면 포크음악 이란 구전(口傳)에 의해 전승되는 음악이며, 따라서 원곡의 작곡가가 있어도 새로운 연주자가 자신의 개성이나 연주 스타일을 부여하면서 멜로디나 가사나 리듬이 변화한다. 그런 점에서 포크음악은 작곡자 개인이 작품에 대해 유일한 음악적 해석을 부여하는 예술 음악(art music)과 차별적이다.
또 하나. 포크 음악이란 ‘공동체(community)’의 음악이다. 포크는 특정 공동체의 성원이 아니라면 공유하기 힘든 사회적 정체성을 반영하고 형성한다. 그 점에서 익명의 대중이 향유하는 ‘대중’ 음악이라기보다는 상대적으로 소규모의 집단이 향유하는 음악이라는 의미를 추가할 수 있다.
1970년대 이래 한국에서 포크라고 불렸던 음악이 ‘우리’의 전래 민요로부터 계승한 것이 아니라는 지적은 불모적인 것이다. 미국으로부터 수입되어 변형된 포크는 대학생 공동체의 음악으로 정착했기 때문이다. 한 예로 1970년대 한대수와 김민기의 가사와 음악은 대학생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 아니면 정확한 ‘메시지’를 판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노찾사의 음악은 포크 음악라는 규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노찾사가 녹음하고 연주한 음악들 가운데 절반 정도는 자연발생적으로 대학가에서 소통되던 노래들을 발굴·수집한 것들이다. 창작곡도 상당 수 있었지만 작곡자의 ‘저작권’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노찾사는 이미 만들어져 대학생 공동체들 사이에서 불려지던 노래들을 재해석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데 주력했다. 노찾사가 1980년대까지 살아남은 거의 유일한 포크 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지만 노찾사의 음악을 ‘포크송’으로 못박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한국에서 ‘포크송’이라는 단어가 ‘1970년대’에 묶여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포크’의 원산지를 ‘영미권’으로 못박는 관습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노찾사의 음악이 진정한 포크 음악이었다’라고 우기기보다는 다른 영토를 찾는 것이 나을 것이다.
현대의 가곡(art song)
1970~80년대 ‘대학가 문화운동’의 과거를 더듬어 보면, ‘노래’는 1970년대 이후 대학가에서 실험했던 여러 가지 예술 형태들 중 지금까지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는 예술 형식이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중반까지 대학가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탈춤이나 마당극은 그때의 위세가 무색하게 가뭇없이 사라져 버린 반면, 노래는 여전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단지 장르의 문제일까.
그렇지 않다. 노래가 살아남은 이유는 당시의 노래운동이 다른 장르의 문화운동에 비해 ‘전문성’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당시 탈춤이나 마당극을 주도한 세력들이 문화를 ‘놀이’라고 기능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던 반면, 노래운동은 노래 고유의 예술적 가치에 대해 심도 있게 사고했다. 이 점은 당시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던 문화운동계 내부의 논쟁을 기록한 자료들을 뒤지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주1] 노래운동 내부로 시야를 돌리더라도 노찾사는 일반적인 ‘노래패’들처럼 아마추어리즘과 기능주의를 찬양하지는 않았다. 노찾사는 처음부터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노래집단을 지향했다.
그 점에서 노찾사의 음악 스타일이 정립된 2집과 3집에 ‘가곡’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곡들이 많이 수록된 것은 징후적이다. “녹두꽂”과 “청산이 소리쳐 부르면” 같은 수집곡이나, “이 산하에”와 “솔아 솔아 푸르는 솔아”같은 창작곡들은 수십 년 동안 박제화된 채 음악 교과서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예술 가곡의 수준과 비교하더라도 그리 손색없는 곡들이다. 단지 작곡된 노래 텍스트뿐만 아니라 악기와 성부의 편성을 비롯한 편곡과 프로듀싱에서 세심한 배려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주 2]
따라서 노찾사의 음악은 단순히 민중의 정서를 자연발생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를 목적의식적으로 조탁했다. 이 점이 노찾사가 민중가요와 대중가요의 경계에서 자신의 영토를 차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따지고 보면 현대의 민요 혹은 현대의 가곡이 ‘대중음악’의 한 장르가 되었던 보기 드문 시대였다. 그 시대가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 이후......
회고해 보면 1980년대와 1990년대를 잇는 과도기가 노찾사의 ‘전성시대’였다. 그 뒤 한국 대중 음악계에 빅뱅이 발생하고, 이 빅뱅은 철옹성 같은 ‘연예계’의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 시스템의 효과는 노찾사의 음악적 뿌리를 이루었던 ‘자연발생적이고 아마추어적 음악적 실천’을 고사시키는 것이었다. 이제 직업적 연예가 아닌 음악적 실천을 위한 장은 거의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노찾사 역시 1980년대의 크고 작은 영웅들과 더불어 무대 뒤로 퇴장했다. 시간이 더 흐르면서 노찾사의 음악은 ‘386가요’의 하나가 되어 버렸다. 이것으로 충분할까. 혹시 노찾사의 음악은 ‘흘러간 노래’(oldies)가 아니라 ‘고전’(classic)이 될 가치가 있는 몇 안 되는 음악적 유산으로 남을 수는 없을까. 물론 이 말이 당위가 아닌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도 노래를 ‘찾는’ 작업이 계속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노찾사를 포함한 1980년대의 노래운동에 대해, ‘좋았던 시절’을 낭만화시키는 노스탤지어가 아니라 미래를 지향하는 현재의 시점에서 정리가 필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럴 때 노래를 찾아 헤매던 길고 오랜 여정은 현재로 남은 역사로 다시 우리 앞에 설 것이고, 노래는 그렇게 우리 곁에 남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서 사라져 버린 것 같다가도 어느 날 문득 주위를 돌아보면 오랫동안 거기 서 있는 무언가처럼......
[각주]
1) 예를 들어 <<문화운동론 2>>, 공동체, 1986 특히 최승운의 글 <문화예술운동의 현단계>를 참고하라. 최승운이라는 필명을 쓴 저자의 본명은 문승현으로, 그는 노찾사의 음반에 수록된 많은 곡들, 예를 들어 <기도>(1집), <그날이 오면>(2집), <이 산하에>(3집) 등 굵직한 곡의 작곡자이자 이 시기 많은 민중가요 레코드의 실질적인 음악감독이었다.
2) 1집의 실질적 프로듀서가 김민기이고(음반에 공식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2집의 편곡자가 나동민(<따로 또같이>의 리더)이라는 사실은 노찾사의 역량 부족의 반영이라기 보다는 언더그라운드의 프로페셔널 뮤지션과 노찾사 사이의 교감, 그리고 80년대 노래운동의 ‘공동체적’ 성격을 확인해 준다.
4. 음반발매 당시 설명: 김창남 (성공회신학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1) 노래를 찾는 사람들 2집
1987년 10월 어느날 종로5가에 자리 잡은 ‘기독교백주년기념관’에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첫번째 공연이 열렸을 때 관객들이 보여준 뜨거운 반응은 우리 모두의 상상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
공연 시작 몇 시간 전부터 몰려든 관객들은 공연 내내 진심어린 박수를 보내주었고 일부 관객은 노래를 함께 부르며 눈물을 펑펑 쏟기도 했다. 이후 노찾사의 역사는 바로 그 순간 관객들과 함께 확인했던 정서적 일체감, 오랜 억압과 투쟁의 세월을 지나 저 6월 항쟁의 빛나는 함성을 통해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한 자유의 공기와 승리의 신념이 빚어낸 그 뜨거운 공감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노찾사 자체에 대한 것이었기 보다는 노찾사의 노래들이 근거하고 있던 80년대의 지난한 역사, 그 속을 함께 헤쳐 나온 모두의 삶에 대한 기꺼운 상찬이었다. 80년대가 저물어 가던 시점에 마침내 합법의 틀을 통해 세상에 나온 노찾사2집이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엄청난 호응을 얻었던 것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노찾사2집의 노래들이 담고 있는 역사성은 다만 노찾사라는 이름의 집단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엄혹했던 시대를 함께 버텨온 우리 민중 모두의 것이었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찾사 2집에 실린 노래들을 살펴보는 것은 80년대의 민중사, 혹은 노래운동사를 되새김해보는 일과 다름이 없다. 70년대 말 대학가에서 싹을 틔운 노래운동의 흐름은 80년대 저항의 시대를 산 젊은이들의 삶과 영혼을 대변했다. 이 흐름은 노동 현장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던 노동 가요와 함께 80년대 민중음악의 가장 중요한 맥을 형성한다. 노찾사는 애초에 80년대 초 대학가 노래운동 출신들이 시작한 노래모임 ‘새벽’에서 분기한 집단이었고 노래운동과 대중 공간을 연결하는 전술적 단위이자 합법적 틀이었다. 노찾사2집은 노찾사의 이런 정체성을 그대로 담고 있다. 여기 실린 노래들을 작곡한 문승현, 문대현, 안치환, 류형수는 모두 대학 노래패에서 시작해 ‘새벽’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며 이후 80년대 진보적 노래운동에서 하나의 음악적 흐름을 만들어냈던 주역들이다. 이들의 음악은 보다 현장에 밀착해 노동 대중의 감성을 반영하고자 했던 노동 가요 쪽과 달리 좀더 음악적으로 전문화되고 세련되며 지적인, 굳이 말하자면 가곡의 정조와도 유사한 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의 노래는 음악적 단위 하나하나에 보다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좋은 의미에서 지식인적인 특성을 보여주며 노찾사2집은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곡들로 채워져 있다.
노래모임 ‘새벽’의 리더였고 80년대 노래운동의 음악감독 격이었던 문승현은 노찾사의 음악적 방향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곡이 이 음반에 무려 4곡이 실려 있는 것은 이 노래들이 노찾사의 색깔과 지향을 가장 정확하게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5월의 노래’는 광주의 피 냄새가 채 가시기 전인 1981년 당시 대학생이던 문승현의 문학적 음악적 감성이 빚어낸 5월 광주의 진혼곡이다. ‘이 산하에’는 84년 무렵 ‘새벽’이 본격적인 공연활동을 시작하던 당시 만들어진 곡이고, ‘사계’는 최근 거북이라는 팀에 의해 힙합버전으로도 발표된 바 있는 노찾사 최고의 히트곡이며, ‘그 날이 오면’은 전태일 열사 추모의 의미를 담은 80년대 최고의 명곡 가운데 하나이다. 문승현의 이러한 작품 활동은 곧 노래운동이 캠퍼스 아마츄어리즘에서 벗어나 음악운동적 전문성을 획득해 가는 과정 그 자체였다고도 말할 수 있다.
87년 6월의 시간은 어두운 곳에서 숨죽이며 불리던 노래들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가장 크고 떳떳하게 불려질 수 있던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대학생이던 안치환에게 자신의 노래가 수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불려지는 체험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런 충격적 체험을 거치며 그는 이 시기 뛰어난 민중가요의 절창을 만들어냈다. 노찾사 2집의 머리곡이며 최근 MC스나이퍼에 의해 힙합버전으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이한열 열사 추모 음반에 실려있고 평양을 방문한 문익환 목사가 불러 화제를 모았던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제주 4.3항쟁을 주제로 담은 ‘잠들지 않는 남도’가 그것이다. 이 노래들은 안치환이 뛰어난 록커이기 이전에 가장 치열한 의식을 가장 서정적으로 형상화할 줄 알았던 음악인임을 보여준다.
문대현과 류형수 역시 대학 노래패 출신이며 ‘새벽’에서 활동했던 작곡가들이다. 노찾사2집에는 이들 각각의 대표곡인 ‘광야에서’와 ‘저 평등의 땅에’가 담겨 있다. ‘광야에서’는 얼마 전 CM으로 사용되었을 만큼 대중성을 갖춘 80년대 노래운동의 상징적 작품이고 ‘저 평등의 땅에’는 ‘새벽’이 전문 음악 집단으로서 보여준 다양한 음악적 모색 과정의 산물이다. 이들은 이후에도 노래운동의 일선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뛰어난 작품들을 만들어낸 바 있다.
노찾사 2집의 레퍼토리들은 80년대 민중운동의 정서적 흐름을 담보했던 대표적인 노래들이며 그런 의미 에서 한국 대중음악사의 고전으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노찾사2집이 날개 돋친 듯 팔리고 노찾사 공연마다 이 노래들이 울려 퍼지던 시대는 분명 지나갔지만 이 노래들이 상징하는 저 80년대적 시대정신, 자유와 저항과 진보의 역사적 의미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 노래를 찾는 사람들 3집
노찾사2집이 발표되고 1년 반 정도가 흘렀을 무렵 노찾사의 사회적 위상과 역할에는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노찾사의 활동이 본격화되면서 합법 공간에서 대중적으로 활동하는 노래운동 모임들이 속속 늘어났고 이들이 음반 출반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한 편으로 정태춘을 중심으로 음반심의제도 철폐를 주장하는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처음 노찾사에 부여되었던 의미와 역할에는 일정 정도 변화가 불가피하게 된다. 노래운동 전반의 외화된 합법 틀로서의 의미는 다소간 희석될 수밖에 없었고 노찾사2집에 부여되었던 ‘유일한 민중가요 합법음반’의 타이틀은 이제 ‘최초의 민중가요 합법음반’ 정도로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찾사는 새롭게 정체성을 고민하게 된다. 당시까지도 남아 있던 아마츄어리즘에서 확실히 벗어나 프로페셔널한 음악집단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 그 하나의 고민이었고 노찾사만의 음악적 정체성을 분명하게 세워야 한다는 것이 다른 하나였다. 이 시기 노찾사의 활동은 눈부셨다.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공연 활동을 벌였고 새로운 노래들을 쉴 새 없이 만들어냈으며 민중운동의 다양한 현장과 결합하면서 수많은 대중들을 만났다. 그렇게 활발한 전성기를 보내던 바로 그 시기가 노찾사로서는 새로운 정체성과 존재방식을 고민하던 모색과 위기의 시기이기도 했다.
노찾사3집 음반은 바로 이 시기 노찾사의 고민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노찾사의 모집단이었던 ‘새벽’의 음악적 성과를 새로운 그릇에 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2집과 달리 3집은 80년대 시대정신을 담보하면서 새로운 시대적 상황에 적응해야 했고 노래운동의 가장 대중적인 연결 고리로서 역할을 다 하면서 동시에 노찾사만의 색깔을 만들어가야 했다. 이 음반이 몇 가지 경향의 노래가 뒤섞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바로 그런 고민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과 ‘의연한 산하’는 80년대 전반기 민중가요의 한 특성을 잘 보여주는 노래들이다. 주로 대학가에서 불려졌던 이 노래들이 가진 서정적이고 비장한 분위기는 엄혹한 시대 이상과 현실의 갈등 속에서 고뇌했던 당대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노래들이 90년대 초의 시대 정신과 어떻게 조응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도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이 노래들이 민중가요 대중화의 기수라는 정체성을 버릴 수 없었던 노찾사의 고민을 드러내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녹두꽃’이나 ‘일을 위한 행진곡’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해방 정국에 김순남 등과 함께 민족음악운동을 벌였던 고전음악계의 원로 작곡가 조념 선생이 70년대에 발표한 ‘녹두꽃’은 70년대말 대학가 노래운동에서 재발견된 걸작이다. 그런가 하면 ‘임을 위한 행진곡’은 80년대 집회 현장에서, 거리에서 항상 들을 수 있었던 그 시대 전투적 민중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곡이다. 이 두 곡은 노찾사3집이 여전히 저 억압과 투쟁의 시대에 배태된 저항적 서정의 맥락을 잃지 않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귀례 이야기’와 ‘선언’은 노래모임 ‘새벽’의 창작물이다. 여전히 노찾사의 음악적 지형은 ‘새벽’ 시절에 형성된 노래운동의 한 경향, 이를테면 가곡적 서정과 포크적 지성을 주조로 하는 혁명적 낭만주의의 흐름 속에 있음을 알게 해 주는 작품들이다.
노찾사의 정체성 고민을 보다 잘 보여주는 것은 ‘그리운 이름’ ‘사랑 노래’ ‘일어서는 사월’ ‘만화경’ 같은 노래들이다. 앞의 세 노래들은 모두 노찾사 구성원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만화경’의 경우는 안혜경의 곡에 노찾사가 새롭게 노래말을 붙인 곡이다. 이를테면 이 작품들은 노찾사가 나름의 방식으로 당대의 상황에 대응하며 독자적인 정체성을 모색하던 과정의 음악적 산물들이다. 물론 이들 노래의 감성은 노찾사가 뿌리를 두었던 80년대적 서정의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그러나 이미 적지 않은 대중 공연을 경험했고 TV매체에 까지 진출한 바 있는 노찾사로서는 다른 민중가요 노래패들과는 다른, 이를테면 좀 더 대중적인 음악적 소통 방식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들 작품은 다소간 바로 그런 고민 속에서 산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모색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 단순히 민중가요의 전달자라는 위상을 넘어 대중문화권에서 독자적으로 생존해야 한다는 의식이 당대 노찾사 구성원들에게 적지 않은 과제로 다가왔다는 사실이다.
노찾사3집은 2집이 얻었던 엄청난 성공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중적 호응을 덜 받았다. 그러나 이는 노찾사의 음악적 역량이나 전문성의 문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노찾사의 음악적 역량은 과거에 비해 훨씬 높아져 있었다. 그보다는 노찾사2집이 87년 이후 민주화 국면 속에서 폭발했던 대중의 욕구를 정면으로 받아낼 수 있던 시점에 존재했던 반면, 노찾사3집이 나왔던 시점은 이미 90년대의 시대적 징후 속에서 점차 대중의 관심과 욕구가 변해가기 시작하던 바로 그 때였다는 데서 그 원인을 찾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노찾사는 90년대 내내 시대의 변화 속에서 끊임없이 정체성을 고민해야 했지만 80년대 시대정신의 자식이라는 바로 그 사실만큼은 결코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5.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지나온 길.
1984. 4. 대학노래패 출신들이 모여 ‘노래이야기 가지꽃’을 공연함(애오개 극장)
- 이 모임이 발전하여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시작됨.
12. 음반 "노래를 찾는 사람들1" 출반 (서라벌레코드)
1987. 10. "노래를 찾는 사람들" 첫 번째 정기공연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
1988. 3. 제1회 민족극 한마당 특별 초청공연 (예술극장 미리내)
4. 극단 연우 무대 특별기획 제2회 정기공연(16일) (연우소극장)
8. 예술극장 한마당 개관 기념공연(3일) (예술극장 한마당)
10. 제 3회 정기공연 (동성고 대강당)
1989. 4. 제 4회 정기공연 (연세대 100주년 기념관)
5. YWCA"청개구리마당" 초청공연 (YWCA 대강당)
원주 MBC 초청공연(원주 MBC 공개홀)
7. 정태춘, 한돌, 노래를찾는사람들 Joint Concert (연세대 100주년 기념관)
10. 음반 "노래를 찾는 사람들2" 출반 (서울음반)
11. 제 5회 정기공연 (한양대 대강당)
1990. 4. 제 6회 정기공연 (동성고 대강당)
6~9. "겨레의 노래" 전국 순회공연 (부산 외 5개 도시)
10. 제 7회 정기공연 (홍익대 체육관)
11. 여성노래한마당 "가자 우리 노래가 되어" 기획공연 (연세대 대강당)
민족음악협의회 창립 축하공연 (이화여대 대강당)
1991. 4. 음반 "노래를 찾는 사람들3" 출반 (서울음반)
제 8회 정기공연 (세종대 대양홀)
4~5. 3집 음반 발매기념 전국 순회공연 (부산 외 전국 각지)
6. "세계환경의 날" 기념공연 (서강대 메리홀)
8. 청소년대상기획공연 "푸른 내일을 향해"(28일) (학전 소극장)
11. 제 9회 정기공연 (숭의 음악당)
12. 민예총 주최 "우리 시대의 노래" 초청공연 (류관순 기념관)
1992. 4~5. 제10회 정기공연 "끝나지 않은 노래 "(15일) (학전 소극장)
5~10. "끝나지 않은 노래" 지방초청 순회공연 (진주 외 전국각지)
11. 제11회 정기공연 "신개발 지구에서 " (계몽아트홀)
1993. 1. "끝나지 않은 노래" 앵콜 공연 (문예회관 대극장)
2. "끝나지 않은 노래" 민예총 민족예술상 수상
4~5. 제12회 정기공연 "더 먼길을 가기 위하여"(30일) (학전 소극장)
9. 제13회 정기공연 "책의 해 기념 문학 콘서트" (연강홀)
1993. 10. 문학콘서트 "노래로 읽는 책이야기 "지방순회공연 (대구 외 전국각지)
11. 문학콘서트 앵콜공연 (학전 소극장)
12. 김남주 문학의 밤 (여성백인회관)
1994. 1. 故 문익환 목사 추모제 (한신대 수유리캠퍼스)
3. 한겨레21 창간 축하공연(김덕수 사물놀이 협연) (서울,부산,대구,대전,광주)
4. "노래를 찾는 사람들" 4집음반 출반 (서울음반)
5. 4집음반 발매기념 콘서트(15일) (연강홀)
5.18 전야제 초청공연 (5.18광장)
10. MBC 대학가요제 축하공연 (고려대 노천극장)
뮤지컬 "영고" 공연 참가(7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12. 10주년 기념음반 출반 (제일기획)
10주년 기념 콘서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1995. 4~7. 전국 중소도시 순회'시민,청소년 어울마당' (16개 도시)
8. 광복50주년 행사 초청공연 (세종로)
1997. 9. "노래를 찾는 사람들" 모음 하나 음반 출반 (서울음반)
12 만화경 콘서트(9일) (마당세실극장)
1999. 4. 포크페스티발 中 "노래를 찾는 사람들” 콘서트 (호암아트홀)
2001. 5. 진실,희망찾기 콘서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2002. 5. 다음카페에 ‘공식 팬 사이트’ 개설 http://cafe.daum.net/realsong
"바람이 분다" 서울 콘서트 (연세대노천극장)
6. "바람이 분다" 부산 콘서트 (부산대 대운동장)
6월 항쟁 15주년기념 문화축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10. 문학카페 명동 초청공연(소설가 현기영과 함께) (명동 밀리오레 이벤트홀)
2003. 6. "6월 난장 – Oh! PEACE KOREA!" 공연참가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시청앞 광장)
2004. 9. 20주년 기념음반 ‘노래를 찾는 사람들 2*3’ 출반 (다르마뮤직)
첫댓글 김민기님의 "공장의 불빛"이 CD/DVD판으로 복간되었습니다. 씨디 한장, 디비디 한장으로 묶여서 나왔는데, 가격은 22800원이더군요.
공장의 불빛을 며칠간 찾아 헤맸는데 포너(www.phono.co.kr)란 사이트에서만 현재 판매중이더군요. 오늘 주문했어요. ^^
CD는 정재일, 이적 등 젊은 뮤지션이 참여하여 리메이크로 제작을 했고 DVD는 70년대 당시 불법 테이프를 복원하고 노동현장과 민중운동 등의 이미지를 가미해서 제작했다고 합니다. 정말 기대됩니다.
엠파스에서 치셔도 팔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