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도꾸가와 정권이 가토릭을 박해하면서 신자를 가려내기 위해서 성모상을 발로 밟게 하는 모습이다. 밟지 못하는 사람은 신자로 여겨 배교를 위한 고문을 하다가 끝내 종교를 버리지 않으면 처형을 시켰다.
1867년 7월 7일 교황 비오 9세는 일본의 순교자 205명을 복자로 선포하였다.그런데 그 가운데 10명의 한국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그들은 모두 임진왜란때 왜군들에게 포로로 끌려 갔다가 예수회 신부들에게 세례받고 신자가 되어 믿음을 증거하다가 처형당한 사람들이다.
내 이름은 권빈첸시오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이며 조선의 아들입니다.청주교구 연제식 신부가 작곡한 칸타타 ,아! 불의 순교자 권 빈첸시오 성인,의 첫머리에 나오는 대사이다.
권빈첸시오는 최초의 신자인 이승훈보다 200년 앞서 가토릭 신자가 되고 예수회 수사가 된 사람이다.조선침략의 선봉장으로 왔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독실한 가토릭 신자로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이다.그가 잡아간 5만명의 조선포로 중에서 예쁘고 총명한 두 아이를 자기딸 마리아에게 보내 양자.양녀로 키우게 하였다. 당시 마리아는 대마도주 종위지의 부인신분이었다.
마리아는 아버지가 보낸 어린 아이를 성당으로 보내 교육시겼다.총명한 그는 권 빈첸시오라는 세례명을 받고 예수회 신학교에 입학했다.빈첸시오는 자신을 예수님 안에서 거듭나게 해준 신부들에게 대한 감사와 은혜로운 마음이 가득했고 신부들의 선교와 사목의 여행길에도 항상 함께하였다.
일본에는 도꾸가와정권이 들어서면서 가토릭 박해가 심해지자 동양선교의 새로운 전초기지를 조선에 마련하고자 하였다.권 빈첸시오에게 그의 조국인 조선에 들어가 선교의 가능성을 확인해 보게 하였다.그러나 임진왜란을 치른 조선해안의 감시가 철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그러나 조국땅에 복음을 전파하고자 사명감에 불탄 그는 중국을 거쳐 육로로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다.북경과 압록강변을 오가며 7년을 애태웠지만 누루하치의 여진족이 세운 후금의 방해로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게 된다.
1620년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예수회 졸라신부와 함께 숨어 살면서 포로로 잡혀온 조선 동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격려와 위안을 주었다.그는 1625년 체포되어 시마바라의 감옥에 끌려갔다.감옥의 온갖 형벌과 참혹한 학대는 그에게 영신수련의 기회가 되었다.ᆢ나는 천주교인입니다.결코 주님을 배반할수는 없습니다.나의 목숨을 빼앗을수 있을지라도 나의 믿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수 없을 것입니다.나는 천주교인으로 살고 천주교인으로 죽게 해주십시오,ᆢ
1626년 6월 20일 나가사키로 옮겨 마침내 화형이 집행되었다.권빈첸시오는 화형이 집행되기 며칠전에 예수회 일본 관구장이던 파체코 신부에게 자신을 예수회에 입회시켜 달라고 청원하였다.신부는 그의 마지막 소원을 받아들여 허원식을 베풀었다.권 빈첸시오는 한국인 최초의 예수회 수사가 되었다. 조국선교의 꿈을 이루지 못한채 그의 몸은 뜨거운 불길에 타들어 가면서도 성체찬미가를 노래하였다.
13살에 왜군의 포로로 끌려가 일본에서 예수회 신부들에게 세례를 받고 조선을 선교하고자 했던 그는 누구일까? 한국인 최초의 수사가 되어 화형당하면서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던 그는 일본에 끌려가지 않았다면 조선에서 어떤삶을 살았을까?
일본기록에는 기병 3천을 거느린 조선 장군의 아들.조선의 위대한 권장군의 아들로 소개되어 있다. 권 빈첸시오의 아버지는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