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테니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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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 3인방, 그들의 비결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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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호주오픈 남녀 단식 4강에 진출한 8명의 선수 가운데 세르비아 선수는 3명이다. 노박 조코비치(랭킹 3위), 아나 이바노비치(랭킹 3위) 그리고 옐레나 얀코비치(랭킹 4위). 여자 단식에서 이바노비치와 얀코비치가 나란히 결승에 진출한다면 테니스 역사상 처음으로 그랜드슬램 결승에서 세르비아 선수들끼리 대결하는 진풍경이 연출될 수도 있다. 인구 1천만 명에 불과한 나라에서 3명이 한꺼번에 그랜드슬램 4강에 진출하자 여기저기서 "도대체 세르비아에서는 테니스를 어떻게 가르치길래 이렇게 테니스 잘하는 선수가 많냐"는 궁금증이 쏟아지고 있다. 세르비아 테니스를 이끌어가고 있는 조코비치, 이바노비치, 얀코비치가 말하는 "세르비아에서 테니스 이렇게 배웠다"를 소개한다. 세르비아의 환경이 정신적으로 강하게 만들었다! 사실 세르비아는 스포츠보다는 전쟁으로 세계에 잘 알려진 국가다. 유고연방 대통령이던 슬로보단 밀로세비치 대통령이 1990년대 초반부터 분리 독립을 요구하던 비세르비아계 민족을 향해 세 차례나 학살을 자행, 발칸반도는 포성이 멎는 날이 드물었다. 조코비치, 얀코비치, 이바노비치 모두 어릴 때 세르비아에서 테니스를 접하고 10대에는 독일, 미국, 스위스로 테니스 유학을 떠났지만 어렸을 적부터 전쟁의 포화를 경험할 수 밖에 없었다. 조코비치는 NATO군의 공증 폭격으로 생사의 고비를 몇 차례나 넘겨 이미 그때 두려움을 극복해서 “지금은 무서울 게 전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조코비치는 폭격을 경고하는 사이렌이 울려 퍼지고 포성이 울려도 야외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얀코비치의 경우 한창 민감한 시기이던 당시 포성으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대회에 나설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야위기도 했다. 야윈 몸으로도 테니스를 멈출 수 없을 만큼 재능과 열정이 뛰어났고 그때의 경험은 ‘강심장’을 갖도록 해주었다. 이바노비치는 “세르비아 선수들은 공통적으로 공격적인 기질, 정신적으로도 강하다”고 말하며 큰 무대에서도 기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비결을 밝히기도 했다. 테니스 전설 '옐레나 젠치치'가 극찬한 조코비치의 재능 ![]() 하지만 내전이 빗발쳤던 세르비아에서 비인기 종목인 테니스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10년 전만 해도 세르비아 내에는 전쟁의 후유증과 더불어 갱스터나 마약 딜러가 판을 쳤다. 1999년 조코비치가 12살 때, 나토 폭격이 일어났고 당시 그의 가족들은 벨그라드 코트에 있었던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당시에는 언제 어디서 폭격이 터질 지 몰라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고 조코비치의 어머니 디야나는 회상한다. 코트에서 하루종일 운동을 하다 7시가 되면 집에 들어가 불도 끄고 문도 꼭 잠근 채 어둠 속에서 아침을 기다리곤 했다. 조코비치의 부모는 이 같은 불안감에 아들의 미래를 맡길 수 없어 한때 영국 시민권 취득을 추진했으나 성사되지 않아 현재는 모나코 몬테 카를로 집을 오가며 투어생활을 하고 있다. 12살 되던 해, 조코비치는 독일 뮌헨에 위치한 니콜라 피리치 테니스 아카데미에 들어가 3개월 동안 짧지만 본격적인 수업을 받게 된다. 니콜라 피리치 아카데미는 보리스 베커, 고란 이바니세비치 등을 길러낸 니콜라 피리치가 운영하고 있는 명문 테니스 스쿨. 재능이 있다고는 하나 어린 조코비치에게는 후원자 조차 없었다. 하물며 주니어 유러피언 타이틀을 따냈을 때도 스폰서가 없어 조코비치의 가족들은 친지들에게 돈을 빌려가며 비용을 대곤 했다. 그 때문인지 조코비치는 자국의 특사라든지 사절단 임명에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토록 어렵게 운동했을 때 아무도 도움의 손길을 보내지 않았던 것에 아직도 아픔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조코비치, 이바노비치, 얀코비치와 팁사레비치 등의 선전으로 세르비아 내에서는 테니스가 축구와 농구만큼 인기종목으로 자리잡았다. 지난해 프랑스오픈에서 이바노비치와 얀코비치, 조코비치가 나란히 4강에 오른 이후 세르비아 내에서 테니스를 하는 인구가 40% 가량 증가했으며 농구 코트가 테니스 코트로 탈바꿈하는 곳도 늘어났다. 동갑내기인 조코비치와 이바노비치는 5살 때부터 함께 운동했던 소꿉친구다. 이바노비치, 든든한 후원자 만나 스위스로 ![]() 이바노비치는 "겨울에는 따뜻한 수영장에서 테니스를 연습했다. 사람들이 별로 사용을 안 했기 때문에 물을 빼 놓고 카페트를 깔아서 두 면의 코트를 만들었다. 내가 연습한 곳은 바로 거기다"라며 어려웠던 어린 시절을 밝혔다. "주니어 시절에는 여기저기 폭격 소리를 들으면서 힘들게 연습했다. 그 상황이 얼마나 계속될지 모르기 때문에 테니스를 계속 치기 불가능하다는 생각도 들었다"며 "다른 나라로 가는 것도 어려웠는데 비자를 받는 것도 힘들었고 세르비아에서 곧바로 나가는 비행기 편도 없었다. 버스를 타고 헝가리로 가서 비행기를 타야 했다. 테니스에서 성공하기 힘들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던 이바노비치는 든든한 후원자를 만나게 된다. 세르비아의 코치가 알고 지내던 단 홀츠맨이라는 스위스 사업가에게 이바노비치에 대해서 얘기했고 홀츠맨은 스위스에서 이바노비치를 도와주면서 지켜보기로 결정한 것. 이바노비치가 말하길 "이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고. 이바노비치는 스위스 바젤로 가서 홀츠맨을 만났고 그 때부터 후원을 받으며 스위스에서 본격적으로 테니스 기량을 갈고 닦았다. 이스라엘 출신의 홀츠맨은 당시 36살로 스위스에서 ‘주스 플러스’라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홀츠맨은 이바노비치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약 50만 달러를 아나에게 투자했다. 투자한 만큼 결과가 나오는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1년 반만에 이바노비치는 성적을 내기 시작했고 이바노비치의 매니저로써 돈을 벌어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돈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테니스를 좋아하는 여자 아이를 도와주고 싶었고 열심히 연습하고 최선을 다해서 해 주니 투자한 돈이 아깝지 않았다. 이바노비치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사업 수완이 뛰어났던 홀츠맨은 나이키에서 아디다스로 바꿔 바로 계약했고 아디다스는 이바노비치가 샤라포바를 누를 수 있는 선수로 확신하며 적극적으로 이바노비치를 후원해 주었다. 이바노비치가 스위스로 온 뒤 홀츠맨은 팀을 만들었고 그 때부터 이바노비치는 오랜 경험을 갖고 있던 프로 투어 코치인 에릭 반 하픈를 개인 코치로 두었다. 코치 에릭은 "이바노비치는 든든한 가족의 후원과 후견인을 두었다. 개인 코치와 전문 트레이너 등을 두며 체력적으로도 좋아졌고 기량도 많이 향상되었다"고 비결을 전했다. 얀코비치, 그녀의 재능이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 경제학자인 엄마의 권유로 라켓을 잡게 되었고 동유럽에서 테니스로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테니스를 시작한지 3년 만인 12살 때 닉 볼리티에리의 눈에 띄어 플로리다 닉볼리티에리 아카데미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세르비아에서는 하드코트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었고 높은 수준에서 테니스 연습을 하고 트레이닝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기 때문에 미국으로 유학길을 밟았다. 그 전에 재능을 인정 받은 것도 얀코비치로서는 행운이었다. 그 후 닉볼리티에리 아카데미에서 계속 훈련했던 얀코비치는 "아카데미에서 가장 좋은 점은 매일 연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른들과 테니스를 치기도 하면서 어린 나이에 경쟁심을 제대로 배웠다"고 말했다. |
첫댓글 이바노비치 만세.
이바 겸둥이 ^^
음.. 알고 보니 기득권(학살자 측) 자제들이었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