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유전을 따르는 신앙의 위험성
전통과 유전을 따르는 신앙의 위험성 (1)
(마15:1-20)
역사적 상황
본문 말씀은 세 부분을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3절이 첫째 부분인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아니하고 떡을 먹은 것을 꼬투리 잡고 예수님을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시비가 사실은 얼마나 잘못된 사상으로부터 나왔는가를 논박하십니다. 이때 특별히 이사야서 29장 13절의 예언을 인용하사 이들의 위선을 직접적으로 책망하십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라고 하시면서,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네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손 씻는 결례를 신앙의 관습으로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주전 2세기경부터 시작된 것인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더 잘 섬기겠다고 하는 열심으로, 당시 제사장들에게 해당되던 규례를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지도 아니하신 것을 행하는 지나친 열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씻는 규례를 제사장들에게만 주셨지 일반 백성에게는 안주셨습니다. 그렇지만 경건주의 운동을 펼쳤던 사람들은 지나친 열심을 발휘하여 일반 대중들에게도 이것을 가르쳤습니다. 제물을 바치는 제사장만 씻을 것이 아니라, 제물을 가져오는 자는 일반 백성이니, 일반 백성이 제물을 가져올 때부터 손을 씻는다면 하나님께 더 합당한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 범위가 점점 더 확대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를 하기 전에도 손을 씻었고, 떡을 먹을 때도 손을 씻었으며, 밖에 외출했다고 돌아와서도 손을 씻었습니다. 물론 위생상의 문제로 이렇게 한 것이 아니고 순전히 신앙적 차원에서 부지런히 손을 씻었습니다. 그러면서 나중에는 손을 씻는 것이 아니라, 물을 몇 방울 떨어뜨리고 묻히는 요식 행위로 발전했습니다.
이들은 이렇게 하는 것을 통하여 얻으려고 한 뚜렷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사람으로 구별된 티가 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속적인 사람이 아니오 경건한 사람인 표시를 내겠다는 것입니다. 손을 씻고 떡을 먹으면, 부정한 것에 접촉했을 가능성이 많은 손을 하나님 앞에서 정결케 하는 것이요, 정결한 손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을 먹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런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고 백성들 대다수가 이것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막 7:3-4)고 했습니다. 여기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라고 한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백성들 모두가 이런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그렇지 아니한 사람들을 보게 되면 시비를 걸고 정죄를 하는 것이 당연한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가뜩이나 예수님을 책잡기 위하여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던지라,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는 것을 보게 되자, “옳다, 제대로 걸렸다!”고 하면서 예수님께 비난을 가하며 나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위선이요 외식이다’고 하시면서 도리어 그들을 비판하셨습니다. 외적인 상징을 실질인양 붙잡고, 더욱이 그것으로 사람을 함부로 논단하고 나서는 태도는 참으로 악한 것입니다. 만일 손을 씻는 것이 정결의 상징이라면, 실제로 하나님 앞에서 회개를 하며 사는 실질이 있어야 합니다. 좀더 쉽게 말하자면, 만일 세례나 침례를 받았다면, 실제로 성령님의 역사를 힘입어 전개해 나가는 회개의 삶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회개의 삶이란, 지금까지 자기 멋대로 살아왔던 옛 사람의 습성을 벗어버리고,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자라면서 새 사람다운 면모를 자꾸자꾸 갖추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우리가 성도라고 하지만, 이렇게 회개를 하며 사는 삶의 실질이 없고, 그러면서도 세례나 침례를 받지 아니한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불쌍하게 보면서, 우리는 그렇지 아니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하는 말만을 뻔지르르하게 하고 있다면, 우리 역시 여기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의식과 형식만 붙잡고 있으면서 신앙의 도리에 충분히 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주일날 예배당에 와서 찬송부르고 기도하며 예배드리는 것만 잘 하면 그것으로 예수 믿는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바로 이러한 사고
방식을 예수님께서는 여기 바리새인들에게 하셨듯이 동일하게 책망하실 것입니다.
성도가 주일날 예배당에 나와서 드리는 예배가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으려면, 그는 사실상 한 주간의 삶 전체를 늘 성령님의 인도를 좇으며 사는 삶의 실질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군사이며, 범사에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하는 자라고 하는 의식을 한시도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의식이 늘 자기를 지배해야 비로소 회개하는 삶이 가능합니다. 옛 사람을 부단히 벗어버리는 가운데 새 사람으로 날마다 장성해 나가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이르려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식을 한시라도 흩으려 뜨려서는 안됩니다. 만일 이렇게 사는 실질이 없다면, 주일날 예배당에 나오는 것으로서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무서운 기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책망의 초점이 이 점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고르반 사상
4-9절은 두 번째 부분으로, 지금 유대인들의 신앙 사상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를 지적하시기 위하여 당시 이들이 행하고 있던 신앙 형태 중의 하나인 ‘고르반’을 책망하십니다. 여기 마태복음에서는 고르반이라는 말이 직접 나오지는 않지만, 병행 구절인 마가복음 7장 11절에서는 이 말이 나옵니다.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고르반이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물’이라는 뜻입니다. 유대교는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렸다면, 즉 고르반 했다면, 그것으로 최상의 신앙을 발휘한 것이므로 기타 다른 것들은 무시해도 괜찮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때 심지어 부모님께 대한 자식의 도리까지 저버려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까지 했던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특별하게 규정하셨습니다. 자식이 어려서는 부모님의 양육과 보호 아래 자라지만, 장성한 어른이 되어서는 연로한 부모님을 잘 공경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인간 세계의 중요한 도리로 규정하셨습니다. 모세는 십계명을 통하여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출 21:12).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했습니다(출 20:17). 지금 예수님께서도 4절에서 이 말씀을 직접 인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부모님을 봉양하는 데 있어서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 이상으로 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물론이고,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엄중하게 요구하시는 바입니다.
그런데 이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백성들이 한번 성전에 와서 고르반 했다면, 더 이상 무를 수 없다고 하면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고르반 했다는 것은, 예물 혹은 재산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즉 이것은 지금 실제로 재산을 바친 것은 아닙니다. 장차 바치겠다고 의사를 표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식이 나중에 와서 형편이 어려워졌다고 하면서 고르반 약속을 좀 완화시키면 안되겠느냐고 상의를 해옵니다. 그러니까 그때는 비록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약속을 하기는 했지만, 지금 현실적으로 부모님을 공경해야 할 문제가 생겼으니까, 옛날에 했던 고르반을 무효로 하거나 좀 완화하자고 하면서 자식이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에게 상의를 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은 이것을 허락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부분을 잘 해석해야 합니다. 허락하지 않는 쪽이 누구냐 하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자식이 허락치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허락치 않는다고 지적하셨습니다. 물론 자식들이 이렇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더 잘 섬긴다고 하면서 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식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바르게 가르쳐야 할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도리어 잘못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한번 고르반 한 것은, 부모를 위하여 무르거나 완화시켜달라고 할지라도 절대로 허락치를 않았습니다. 한번 하나님께 바쳤으면 그만이고, 그것이 최고의 신앙이지 왜 마음을 바꾸려고 하느냐고 하면서 도리어 책망하고 불신앙으로 몰아갔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내세운 것이 장로들의 유전과 전통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백한 말씀이 있는데, 장로들의 유전과 전통인 사람의 계명을 더 내세웠습니다.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이것이 과거부터 내려온 신앙의 전통이고, 우리 교단 혹은 우리 교회의 특색이다”고 하는 식입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정면으로 배척된 것입니다.
이런 모순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6절)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7장에서는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은 지키느니라”고 하셨고,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9-10절). 또한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13절)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대하면서, 과연 우리 중에는 이와 같은 모순이 없겠는가에 대해서 잘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깊이와 넓이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성경 구절 몇 군데를 아는 것으로서 만족하는 바, 얄팍한 지식을 붙잡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성경 구절 몇 개 암송하는 상태에서 그것으로 매사를 분석하고 판단하려 합니다. 이렇게 되면, 사실 명분상으로는 말씀을 내세우지만, 결국에는 교회의 전통과 장로들의 유전에 앞세우게 되는 모순에 빠져버립니다. 말씀을 아는 깊이가 그 정도밖에 안되면, 결국에는 자기네게 추구해 나온 교회의 전통이나 관습을 내세우거나, 자기 시대에 퍼지고 있는 교회의 유행을 붙잡으며, 혹은 소위 성공했다고 평가를 받는 교회들의 성공 비결을 뒤따라가는 것으로서, 그런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게 함으로, 실상은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게끔 하는 유혹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깨닫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제자들을 경계하여 가르치심
세 번째 부분은 10-20절입니다. 이 부분에서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을 특별히 경계하여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참된 불결이 무엇이고 참된 정결이 무엇인가를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10-11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듣고 깨달으라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품었던 악한 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이들의 입에서 나온 교훈은,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책잡을 수 있을까 하는 동기로부터 나온 것이기에 그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매우 악한 것이었습니다.
악한 짓을 하기 위하여 진리를 사용하는 경우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가령 바울이 로마의 옥중에 갇혀 있을 때, 그의 원수들은 바울을 더욱 곤경에 빠트리기 위하여 그가 전한 복음을 전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을 벌였습니다. 바울의 원수들은 그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하려고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빌 1:15-17).
상대방을 해코지 하려는 악한 마음은, 그것이 외형적으로는 설혹 진리를 표방하고 나온다 할지라도, 실상은 그 사람 자신을 더럽게 합니다. 그런데 여기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신 말씀은, 사실상 여전히 저들이 더럽다는 의미입니다. 즉 이 말씀은 더러운 것에서 더러운 것이 나온다는 직설적인 지적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바리새인들이 여전히 내면적으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바, 구습을 좇는 행태를 벗어버리지 못했다고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의지하지 못하고 사람의 계명을 내세운 것이라든가, 또 그렇게 행한 내면적인 동기로서 시비를 걸어온 악한 행위 등을 볼 때, 이들에게서는 도무지 하나님의 백성다운 태도가 보여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참으로 손을 씻어서 거룩케 하는 행위는 순전히 상징에 불과합니다. 상징에 불과한 것을 붙잡고는, 더욱이 그러한 상징이 요구하는 내적 정결의 실질도 없으면서, 상징을 행하지 아니했다고 해서 사람을 함부로 정죄하고 나서는 행위야 말로, 거듭나지 못한 악한 자들이나 행하는 더러운 행위입니다.
이러한 죄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다는 미명 아래 사실상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삶을 추구하게 될 때에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자신을 동시에 속이는 고도의 자기 기만에 빠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거룩한 의식이나 제도들과 관계를 맺어 접촉을 하는 사는 것은 정말 무서운 죄악입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이런 모습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이 널려 있는지 모릅니다. 문서 선교라는 미명 아래 말도 되지 않는 설교들을 모아서 책을 출판하는 출판사 사장이 있습니다. 결국 출판사 하나 운영하면서 밥벌이 하고 사는 것에 불과한데, 겉으로는 거창하게 문서 선교하는 것이라고 내세우고 다니는 것입니다. 또한 방송 선교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헌금만 많이 하면 어떠한 설교라도 방송으로 내보며, 결국에는 자기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위하여 방송국 하나를 운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선교 신문이라는 명분으로 성도들의 헌금으로 국민일보를 만든 경우는 또 어떻습니까? 지금 국민일보가 무슨 선교 신문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기껏해야 신문사나 하나 운영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기타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지만, 우리의 현실이 너무도 참담해지는 것 같아서 현실적인 비교는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이렇게 바울의 매임을 더 괴롭게 하기 위하여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비난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사용하는 이런 행태들은 이미 오래 전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국가적인 형태로도 나타났던 것의 새로운 반복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로 하나님을 이용한 여로보암
자기 자신의 먹고 사는 문제를 위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이용하고, 하나님께서 내신 거룩한 의식과 제도들을 이용한 데 대한 실례, 그것도 국가적으로 이런 죄를 시도한 데 대한 전형적인 실례를 이스라엘 북왕국의 시조였던 여로보암의 경우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 열왕기상 12장 25-33절을 보겠습니다.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 그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려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숭배함이더라 저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팔월 곧 그 달 십오일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 지은 산당의 제사장은 벧엘에서 세웠더라 저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팔월 십오일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
당시 북쪽 왕국을 차지한 여로보암은 먼저 세겜과 부느엘을 건축하여 국방선을 새롭게 구상하였습니다. 특히 남쪽의 르호보암이 북쪽으로 진군하기 위해 군대를 소집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은, 이 일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집권 초기에는 세겜에서 정치를 베풀었으나 이후 디르사로 거처를 옮기게 됩니다.
이렇게 저렇게 조치를 취하는 것을 통하여 안정된 왕권을 확립한 여로보암이었지만, 가장 결정적인 문제 거리가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전개해 나오고 있었던 종교적 제의와 관련한 문제였는데, 이스라엘은 이 종교적 제의로 말미암아 굳게 연합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에는 여로보암의 왕권은 불안한 것입니다. 본래부터 여호와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특징은 정치적인 데에 있는 것이기 보다는, 물론 이것이 전혀 배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종교적인 데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국가 종교 체제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온 백성은 정해진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으로 집결하여 각종 행사들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절기를 지낼 때에 중심 요소가 되는 예루살렘 성전이 이제 남조를 다스리는 르호보암의 영토에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절기가 닥치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것이었으며, 따라서 이러한 일이 빈번하게 진행되다 보면, 서서히 정치적인 결집력이 와해되는 것은 강 건너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습니다. 북국 백성들이 예루살렘을 자주 왕래하다 보면 여로보암이 정권의 정통성을 유지하기가 어려운 상황에 이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은 이것이 상당히 마음에 걸렸습니다.
여로보암의 염려는 상당히 현실적인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이 일년에 세 차례 지정한 장소 한 곳에서 종교적으로 결집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6장 16-17절을 보겠습니다.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에 따라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이렇게 이스라엘 남자들은 1년에 3차례씩 반드시 여호와 앞에 나아가야 했습니다.
여호와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이 종교적 결집을 위하여 지정된 장소입니다. 이 결집의 목적은 당연히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남북 백성들이 만나게 될 때에 동시적으로 얻어지는 효과가 무엇이냐 하면, 자기네가 피차 하나의 공동체인 사실을 확증하게 되는 일입니다. 연합적으로 제의에 참석하게 될 때에, 백성들은 자기네가 한 하나님으로부터 동일한 은혜를 입어, 한 하나님을 섬기는 바, 한 공동체인 사실을 더더욱 현실적으로 깨닫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제사 때마다 제물을 피차간에 음복하게끔 되어 있는 절차로 말미암아 이런 효
과는 자연스럽게 수반됩니다. 제사를 드리기 전에는, 이를 위하여 서로 협력하면서 교제하게 되고, 이후에는 다시 제물을 비롯한 기타 여러 음식을 서로 먹고 마시며 정을 나누게 되는데, 이런 과정을 통하여 자연히 이같은 의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런 일이 빈번하게 진행되다 보면, 서서히 피차간에 남북으로 분열해 있는 것에 대해서 모순을 느끼게 될 것이었습니다. 비록 처음에는 피차 현실적인 이해가 앞섰던 까닭에 앞 뒤 가릴 것 없이 국가를 분열하였지만, 이것이 원칙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걸맞은 도리가 아니라는 사실에 의식을 같이 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연합과 통일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이 일을 주도한 여로보암을 향한 반감이 고조될 것이 뻔한 이치였습니다. 분열을 주관하고 있는 여로보암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연합이나 통일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할 것이기 때문입니
다.
여로보암은 이러한 사태를 내다보았고, 지극히 염려되었습니다. 열왕기 기자는 이러한 여로보암의 염려를 묘사하기를,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된 그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27절)고 했던 말을 그대로 옮겨 놓는 것을 통하여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던 끝에 이제 여로보암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분열시켰던 죄에 빠져 있었지만, 여기에 다시 한 가지를 더하여 더더욱 고착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련의 극악한 조치들을 취하게 됩니다.
첫째, 여호와의 형상으로 두 금송아지를 만듦
여로보암이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하여 취한 첫 번째 종교적인 정책은, 보이지 아니하는 분이신 하나님 여호와를 눈에 보이는 하나의 형상으로 만들어 놓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다”라고 했던 일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율법에 명백히 금지되고 있었습니다. 제 2계명은 말하기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십계명은 구약 신앙의 중요한 도리를 핵심적으로 요약해 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형상을 만들고, 거기에 절하는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안 된다고 하는 이것이 제 2계명에 명백히 못 박아져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구약 신앙 원리의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계명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이스라엘 왕으로서 계속 군림할 수 있도록 하는 여러 가지 제도적인 장치들을 만들어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현재 누리고 있는 지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감히 하나님께서 주신 각종 신적 제도들을 임의대로 변경하고 편리한대로 수정하였습니다. 다시 말하여 종교의 변질과 왜곡을 시도했고, 자의적인 신앙형태를 고안하였습니다. 이럴지라도 “이것이 하나님을 더 잘 섬기는 방식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명분을 제시했습니다.
이것이 엄청난 죄악임에 틀림없지만, 일단 부패한 한 개인의 육욕과 관련되는 한에 있어서는 아무런 문젯거리도 되지 않았습니다. 여로보암은 이런 일을 서슴없이 추진하는 것을 통하여, 그가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전혀 믿지 아니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기에는 갑자기 주어진 자신의 권세가 너무도 매력적이었고, 따라서 이에 대한 집착욕이 너무나 강하였으며, 더욱이 그는 순전히 자신의 능력으로 이렇게 왕이 되었다고 생각하였고, 이런 까닭에 이것을 스스로 지키고 보존하는 일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습니다. 이런 연고로 여로보암은 서슴없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벧엘과 단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만든 후에,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28절)고 했던 말로서 의미하였던 것은, “이는 다시 새롭게 만들어낸 무슨 새로운 종교가 아니고,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광야에서 행하였던 그 전통적인 예배와 같은 형태인 것이며, 아론 자신이 친히 숭배하였던 것과 같은 그런 것이다”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절기 때마다 굳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느라고 온갖 불편을 겪지 말고, 편하게 여기 금송아지 앞에 나아와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북국 백성들이 절기를 지키려 할 때에 예루살렘까지 여행해야만 하는 불편을 교묘하게 이용하였습니다. 즉 굳이 힘들게 그곳까지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으며, 더군다나 금송아지 형상을 가리켜 하나님이라고 할 때에, 지금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입증하는 뚜렷한 표식이 없지만, 자신이 세운 새로운 제단에서는 이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느냐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여로보암이 다른 많은 형상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금송아지’를 여호와의 형상으로 취한 것은, 아마도 그가 망명 상태에 있을 때에 애굽에서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애굽은 금송아지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형상들을 만들어 놓고, 이를 신으로 받들어 섬기는 우상 종교국가입니다. 따라서 애굽에서 오랜 동안 망명생활을 했던 여로보암에게서 이런 영향이 나오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이는 과거에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광야에 있을 때에, 당시에도 여호와의 형상을 만드는 죄를 범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에도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것을 보면 충분히 개연성이 있습니다. 출애굽하기 전에 이스라엘은 애굽 사람들이 신이라고 하면서 섬기던 이 금송아지 형상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애굽 생활을 했던 한에는 이런 선험이 잠재해 있었기 때문에, 기회가 생겼을 때에 쉽게 금송아지를 만들게 되었는데, 이것이 출애굽 한 광야의 조상들에게서 발생했던 경우에서와 여기 여로보암의 경우를 통하여 공통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들을 안치하는 장소를 선택할 때에도 가급적이면 이스라엘 민족 안에 전통적으로 계승되어져 나오고 있던 전승과 밀착시키는 치밀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선택된 장소가 바로 벧엘과 단입니다. 벧엘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스라엘 조상 족장들의 종교적 제의와 관련하여 너무나도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단은 예전에는 라이스라고 불렀는데, 이곳은 단 지파에 의해서 오래 전부터 예배 장소로 구별된 곳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은 이러한 의미를 갖는 장소인 벧엘과 단에 두개의 금송아지 형상을 안치함으로써 예루살렘 성전의 정통성을 능가하
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는 생각을 백성들이 갖게끔 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일은 확실히 여호와께 죄가 되었는데, 이는 이 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을 극심한 우상 숭배에 빠트렸기 때문입니다.
둘째, 무자격 제사장들을 고용함
여로보암이 취한 두 번째 정책은, 아무 사람이나 데려다가 제사장으로 삼은 일입니다. 이 두 번째 정책으로 말미암아 첫 번째 정책이 더욱 견고해지고, 또한 다음에 다루게 될 세 번째 정책에까지 동일한 효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따라서 특별히 이 두 번째 죄는 여로보암의 죄를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특징을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보통 백성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았으므로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지면에서 끊어져 멸망케 되니라”(13:33-34).
율법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은 반드시 레위 자손이어야 한다고 엄격히 규정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이 통치하는 지경에는 레위인들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는 여로보암이 자신을 반대하는 레위인들을 쫓아버렸기 때문입니다. 과정은 이렇습니다. 당시 자기 임의대로 제사 제도를 만들고 있었던 여로보암이었던지라, 당연히 레위인들로부터 반대를 받았을 것입니다. 신실한 레위인들이 여로보암의 여호와를 빙자한 유사한 우상숭배 정책에 협조하지 않았을 것은 자명합니다. 이 때문에 레위인들은 남쪽을 쫓겨와서 르호보암을 도왔고, 르호보암은 초기 3년 동안 이
들의 도움을 입어 강성해지게 됩니다(대하 11:13-17).
이 문제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당시 신실한 레위인들은 여로보암이 시도하고 있었던 일련의 종교적 정책들이, 그 사용하는 용어나 형식과 사상 등에 있어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던 것에 대해서 시비를 걸었습니다. 레위인들은 여로보암의 종교 정책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정통적이며 전통적인 율법을 교묘하게 빗나가고 있는 것을 묵과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세우신 성직에서 실제적으로 봉사하였던 레위인들이었기에, 여로보암이 취한 종교 정책의 유사성들을 능히 분별하지 못할 리가 없었습니다.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조차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중에, 순전히 자신들의 욕망으로부터 부추겨진 종교심에 입각하여 신앙을 자의적으로 성립해 나가려는 사람들이나 이런 유사성에 쉽게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당시 북국 대다수 백성들의 종교적 각성이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는 알길 없으나, 레위인들만큼은 순결한 사상에 확고히 서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로보암의 죄에 협조할 리가 만무였고, 도리어 거세게 항거했던 것입니다.
사실 어느 영역이든지 공통적인 사항이겠으나, 특별히 종교가 타락하는 데에는 항상 지도자들, 혹은 주관자들의 영향이 크게 작용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크게 타락하고 집단적으로 배도한 데에는, 하나님께서 내신 진리와 상관없이 복음을 순전히 육적인 만족을 채우는 수단으로 삼아 이러 저리 몰려다니는 얼빠진 사람들의 군중 심리가 크게 작용하는 것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누가 뒤에서 조장하고 가르치는가 하면, 바로 자칭 그들의 지도자인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기독교 안에는 군중의 타락한 심리에 편승함으로 자신의 출세를 도모하는 모사가들은 있는 법인데, 한국 교회의 경우 많은 부흥사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물론 부흥사들 모두가 다 이런 것은 아닐 것이고, 특별한 경우 예외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수의 부흥사들이 사실상의 직업 종교꾼인 것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이들은 목사라고 하는 직무를 자기 자신의 사치스러운 삶과 출세와 치부와 권위의 방편으로 삼고 있으며, 이런 까닭에 타락한 본성에 쉽게 지배되어 살아가는 일반 군중의 종교 심리를 파악하고, 거기에 편성하여 자기를 발전시켜 나가는 일에 능수능란합
니다.
가령 군중들이 불치의 병과도 같은 것을 고쳐보기 위한 심정으로 신앙을 의지하려 할 때에, 혹은 새롭게 사업을 시작하면서 신의 도움을 의지하려는 자세를 보일 때에, 이들은 이런 상황에 걸맞은 이런 저런 성경 구절들을 제시하면서 얼른 여기에 편승합니다. 이러할 때에 항상 뒤따르는 것이 물질인 것이고, 이 물질은 헌금이란 명분을 업고서 취급되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해서 많은 헌금이 모이면 모이는 만큼에 비례하여 상대적으로 자신에게 돌아오는 몫이 크기 마련입니다.
이런 까닭에 군중들 역시 점차 시간이 지나게 되면서부터는 기왕이면 자기 자신도 한 번 종교 지도자로 나서고 싶은 생각을 다 공통적으로 해보기 마련이고, 설상가상으로 누군가가 옆에서 이것을 부추겨 준다거나, 또는 스스로 확신을 가지게끔 작용하는 어떤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되면, 이때부터는 앞 뒤 가릴 것 없이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 동원하여 마침내 목사의 지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재물욕 때문에만 이렇게 되는 것은 아니고, 명예욕 때문에 이렇게 되기도 하고, 기타 여러 가지가 숨은 동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처음에는 마음을 바르게 가졌을지라도 이후 이런 저런 과정 속에서 변질되기도 합니다. 그럴지라도 항상 겉으로는 복음 운운하고, 사명 운운하는 법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한 시대에 복음이 타락하는 데에는 군중과 지도자가 각자의 이익을 위해 묵시적으로 야합하고 피차 서로를 부추기는 비극적인 유유상종의 상황이 전개되게 됩니다.
여로보암이 북국 백성들의 편의를 빙자하여 일련의 정책들을 취했을 때에 이런 상황들에 편승하였고, 실제로 크게 효과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을 형상화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어 세웠을 때에 비록 레위인들의 저항은 있었을지 몰라도 대다수 군중들은 좋아하였습니다. 사실 구약 종교는 본래부터 하나님께서 당신을 형상으로서는 드러내시지 않는 것을 큰 특징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사람이란 자신이 섬기는 신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보기를 원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욕구입니다. 이런 까닭에 여로보암이 형상을 세웠을 때 이것이 배척을 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열화와도 같은 환영을 받았습니다.
중세기에 극치에 달한 로마 교회의 타락상 중에서 온갖 신의 임재를 상징하는 현상들이 난무했던 것이 다 이같은 심리로부터 온 것임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욱이 여로보암이 더더욱 인기를 얻은 것은, 아무 백성이라도 원하기만 하면 마음대로 목사(?), 제사장이 되게 한 일입니다. 구약 종교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제사장이 되려면 반드시 혈통이 레위 지파에 속해야 한다고 하는 제약을 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깊은 뜻이 계셔서 이러한 제도를 내셨겠으나, 레위 지파가 아닌 다른 지파들의 경우 이런 제약은 근본적으로 큰 불만이었습니다. 백성들이 평소에는 이런 불만을 드러낼 수가 없었으나, 난세가 되면 이런 저런 욕구들이 쏟아져 나오는 법입니다. 이러한 터에 여로보암은 북국 전역에 방을 내려 말하기를, “아무나 와서 제사장이 되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야말로 아무나 와서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나라 건국 초기에 개혁을 시도했던 불교계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당시 전국의 주요 사찰들을 일본 불교를 본받은 대처승들이 차지하였습니다. 대처승이란 부인을 두고 사는 중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불자들이 절에 가면 여인네 속옷을 빨래줄에 걸어놓고 햇볕에 말리는 경우들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해방된 후 불교계는 이러한 형편을 개혁하려 했지만, 대처승들이 쉽게 물러 나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력을 사용하게 됩니다. 힘깨나 쓰는 깡패들이 동원되어 대처승들을 폭력으로 몰아내고 사찰들을 접수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방법을 쓴 결과 대처승들을 몰아내기는 했지만, 상황은 또 다른 악을 낳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절을 차지하고 앉았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지도자들이 대처승들을 몰아낸답시고, 깡패들을 동원하여 무력을 행사하였는데, 그런데 나중에는 이들 깡패들이 아예 머리를 밀고 절을 차지하고 앉아서는 주지승 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깡패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는 아주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깡패로서 살아갈 때에는 사람들을 의식해야 하고, 자신들의 행동이 떳떳치 못한 데서 오는 도덕적인 부끄러움이 항상 남아 있어서 나름대로 괴로움도 느끼고 행동에 제약도 받고 했는데, 이제는 머리만 밀고 절에 앉아 있으면 그야말로 사람들이 저절로 찾아와서 “스님! 스님!”하고 부름으로 자기를 높여주고, 합장하여 예를 표하며, 더욱이 때때로 많은 물질을 바쳐 시주도 하고 했으니, 그들의 입장에서 얼마나 신나는 일이었겠습니까? 물론 지금 절에 있는 스님들이 다 깡패들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과거 불교계 역사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와 비슷한 심리 현상이 여기 여로보암의 때에 작용했습니다. 물론 성경은 여로보암이 아무 사람이나 데려다가 제사장을 삼은 것은, 당시 레위 지파 사람들이 남쪽으로 집단적으로 이주해 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즈음 레위인들은 집단적으로 남국으로 이주해 버렸습니다. 당시 신실한 일단의 레위인들은 여로보암의 정책에 대해 강한 반기를 들었는데, 따라서 여로보암은 아예 레위인들을 자신의 통치권 밖으로 추방해 버렸고, 이들을 대신하여 아무 사람이나 나서면 임의대로 제사장을 세워 나갔던 것입니다. 여로보암이 레위인들을 굳이 멀리 추방하였던 것은, 종교의 본질을 바르게 알고 있는 이들 신실한 레위인들에 의해서 여호와를 섬기는 바른 가르침들이 행해질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같은 박해로 말미암아 신실한 레위인들은 그들의 삶의 근간이었던 고향을 과감하게 떠나고 말았습니다. 비록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하여도 새로운 일자리가 주어진다는 보장을 얻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단이 주는 고기를 먹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굶주림을 택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주의 궁전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 84:10-12)라고 하였던 시인의 신앙고백에 동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레위인들은 이런 환난을 감내하는 것을 통하여 자기들이 삶을 반석 위에 건설해 나갔습니다.
셋째, 절기의 정해진 날짜를 변경함
7월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가장 바쁘고도 의미 있는 절기들이 세 가지나 집중되어 있습니다. 1일의 나팔절과 10일의 속죄일 그리고 15일부터 시작하여 한 주간 동안 진행되는 초막절이 이 달에 집중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중에 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절기는 속죄일이었지만, 이 날은 단 하루만 지키는 관계로 인하여 장막절로도 불리우는 초막절이 체감적으로는 더 큰 의의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이것마저도 자신이 마음대로 변경한 날짜에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율법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변질되었을지라도 외형적으로 볼 때에는 여전히 북국에도 여호와의 종교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여전히 북국 백성이 섬기는 신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거기에는 제사장 제도가 있어서 여러 가지 율법에 제정된 규례들이 집례되었고, 또 비록 날짜가 바뀌었을지언정 여전히 나팔절과 속죄일과 초막절 절기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제의적 축제일에 수반되는 바, 여전히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가 뒤따랐고, 율법에 규정된 갖가지 부속적인 제의와 의식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본질적인 면에서 본다면, 북국의 종교는 더 이상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에는 자의적인 숭배가 난무했을 뿐이고, 인간이 가진 타락한 종교심의 겉잡을 수 없는 폭발력이 발휘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당시 북국 사람들만의 오류는 아니었습니다. 신약시대의 교회 역시 동일한 오류를 답습해 나왔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런 현상을 로마 교회가 역사 속에서 자행해 나왔기 때문입니다. 로마 교회를 피상적으로 볼 때에는 그 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행위가 분명히 엿보였고,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성례전적인 의식과 제도들이 행사되었습니다. 로마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외칠 때에도 세상이 가진 온갖 신들은 다 무익한 우상숭배이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하나님이시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주장하는 갖가지 기독교 문화를 제정하고 선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기독교적인 모습과는 달리 그 실질에 있어서는 전혀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종교 개혁자들이 분연히 일어나서 개혁을 시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개혁자들이 개혁을 시도한 이유가, 당시 로마 교회가 공개적으로 드러내 놓고,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유일한 구원의 주이신 사실을 믿지 않겠다. 다른 신을 섬기겠다”고 했기 때문에가 아니었습니다. 로마 교회가 비록 극심하게 타락했을지라도 여전히 오늘날의 개신교가 갖고 있는 복음의 진리들을 외형적으로 다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구원의 유효한 수단인 사실도 생명처럼 붙잡았습니다.
당시 로마 교회는 도저히 복음의 종교라고 평해줄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온갖 기독교적인 용어들로 채색된 미신들이 난무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권위는 교황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체제하에서 운영되는 로마 교회는 사실상 도무지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개혁자들이 들고일어나서 진리를 밝히 드러내기 시작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생명을 빼앗기기까지 하는 극심한 박해를 받았을지라도 끝까지 투쟁함으로 급기야 진리를 회복한 것입니다.
이때 개혁자들은 ‘복음의 진수란 이런 것이다’고 하는 사실을 두루뭉실하게 전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종교 개혁이란 것이 하나의 위대한 운동이 되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영광을 얻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진리가 흐리멍덩하고, 그 내용이 생명처럼 다가오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걸면서까지 그렇게 개혁의 대열에 참여할 수 있었겠습니까? 성경 진리가 객관화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를 아는 지식이 명확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게 되었고, 성경에 비추어 복음의 진리를 분별한 많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로마 교회
를 떠나 개종하여 개혁파 교회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런 상황 속에서도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가령 영국의 헨리 8세는 순전히 자신의 개인적인 목적에 근거하여 당시의 타락한 로마 교회를 개혁하려고 했습니다. 당시 그는 교회 개혁의 명분을 내걸었지만 사실은 자신의 결혼을 로마 교황이 부정한 결혼이다고 하면서 허락해주지 아니하니까, 화가 나서 뛰쳐나와서 자기가 교회의 머리이다고 하면서 자리를 차지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명분을 얻으려고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타락한 여러 가지 것들을 개혁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교회 개혁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결과적으로는 성공회라고 하는 이상한 집단
을 하나 만들고 만 것에 그쳤습니다. 이런 자세한 과정을 모르는 오늘날 일반 세상 사람들은 성공회가 마치 개신교인양 잘못 알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헨리 8세의 정치적인 종교개혁은 과거 여로보암의 종교를 재현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이후 개혁자들은 로마 교회와 성공회의 그릇된 교리들을 명백히 규정짓는 복음의 진리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하는 것을 통하여 교회와 세상 앞에 공개적으로 공표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복음의 진수를 명료하게 다루었습니다. 물론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갑작스럽게 독단적으로 작성된 것은 아닙니다. 이미 앞서 발표되었던 정통 신조들의 신앙고백을 계승하였습니다. 그러고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더더욱 정통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고백서에서 진술된 내용들은 한결 같이 성경 구절들에 의해서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또한 개혁자들은 소요리문답과 대요리문답을 작성함으로 교회의 지도자가 되려는 이들과 일반 성도들의 신앙을 정립해 주었고, 덧붙여 교회 정치 원리와 교회의 예배 원리 등을 확정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개신교인 사실을 말할 때에 바로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전통 위에 서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월이 다시 흘러나오는 가운데 오늘날 현대 교회들이 바로 이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다시금 얼마나 많이 이탈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한결 같이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계승하는 정통 개혁파 교회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 볼 것 같으면, 교회라고 도무지 말할 수 없는 부정적인 속성들로 가득차 있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생각하기를 싫어하고, 순전히 감각적으로 자신의 신앙생활을 영위하려는 자들에게서는 이런 정통 신앙의 모습들이란 것이 보여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베뢰아 교회 성도들의 경우처럼, 다분히 신사적이어서 성경을 상고하기를 좋아하고 자신의 일체의 신앙 형태를 성경 진리에 입각하여 세워나가려고 조금이라도 애쓰는 사람들의 눈에는 이런 것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또 태산과도 같이 크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로마 교회 당시 종교 개혁이 필요했던 상황, 그리고 여로보암 당시 여호와의 종교가 피상적으로만 유지되었던 그 동일한 현상, 또한 자기들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기를 서슴지 않았던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들이, 오늘날 현대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슴 아픈 현실을 목도하는 우리의 입장에서, 그러면 과연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는 일에 가담할 수 있겠는가를 염려하며 걱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 사람들은 무서운 자기기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앞세워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장로들의 유전은 인본주의요, 종교 기업을 추구하는 수단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이런 것을 따르고 추종한 유대인들을 향하여 ‘외식하는 자’라고 하는 표현 한 마디로서 그들이 빠져 있는 어두움의 성격을 드러내셨습니다.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책망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유대교 사람들의 행위는 겉으로 볼 때에는 온갖 하나님의 일들에 열심을 내는 듯이 보였지만, 정작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이들이 지킨 손을 씻는 등의 정결 규례는 순전히 자기들의 의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갖가지 외형적인 형식들을 열심히 지켰고, 그것으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기까지 하였지만, 정작 자신들은 그와 같은 상징들이 요구하는 실질에 마음을 쏟지 않았습니다.
이제 이러한 사실들을 대하면서 과연 우리 자신의 모습은 어떠한가에 대해서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우리는 진정 의식과 형식을 벗어나 있습니까? 우리는 진정 교단과 교회의 전통을 앞세워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진정 우리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을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혹시라도 여로보암 식의 신앙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이런 질문들 앞에서 솔직한 자기 반성의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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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유전을 따르는 신앙의 위험성 (2)
(마 15:1-20 )
본문의 배경
오늘 본문을 좀더 충분히 해석할 수 있기 위해서는 14장 말미를 잠깐 상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14장 말미에 보면 당시 예수님께서 게네사렛 땅에 계시면서 사람들이 데리고 나오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고 계셨다는 사실이 보도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34-36절에 이렇게 기록된 것이 나타납니다. “저희가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그곳 사람들이 예수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다만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예수님이 게네사렛 땅에 이르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는 이러 저리 연락하여 모든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사 일일이 다 고쳐주신 것 같습니다. 미처 예수님이 직접 만져주지 못하실 정도로 분주해지시게 되자, 병자들은 예수님의 옷가지라도 만져보기를 소망했습니다. 어떡하든지 병을 고침받고야 말겠다고 하는 소망과 믿음과 기대가 얼마나 간절했든지, 자기네들의 손으로 예수님의 옷가지를 스치기만 해도 병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다분히 미신적이고 신비한 생각이지만, 그마만큼 병을 고침받아야 하겠다고 하는 열망이 간절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렇게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의 병을 고쳐주셨던 것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병고침 받은 사건들을 보여주는 많은 경우들이 보도되고 있고, 또 실제로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실정이기도 합니다. 기독교 안에는 기적 발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기적들 중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이 주로 병고침을 받는 경우입니다. 이런 까닭에 진위성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일단 우리 주위에는 많은 신유 은사 집회라는 것들이 널려 있습니다. 그러나 병을 고침받는 것 그 자체가 복음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점을 오해하면, 우리는 믿음의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큰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오늘날 소위 신유 은사라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복음과 병고침을 연결시키고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는 실정이라 할지라도, 사실이 아닌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께서 치유의 사역을 베푸신 것은, 그것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중요한 진리를 깨우쳐 주시려고 했던 데서 되어진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사단의 세계에 예속되어 있다는 것이요, 그 결과 인간은 온갖 병이 들어 고난을 겪게 되고, 또 늙어서 죽기도 하며, 심지어 땅과 하늘과 같은 자연까지도 두려워하는 존재로 전락하게 되었는데, 이제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인간들의 모든 불행을 해결해 주는 분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예수님은 각종 병을 고쳐주신 것은 물론이요,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고 잔잔케 하는 기적을 베푸시는가 하면, 또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서 무려 오 천명도 넘는 사람들을 먹이는 기적을 베풀어주기까지 하셨습니다.
이렇게 필요에 따라 각종 기적들을 베푸셨는데, 주로 병을 고치는 기적들을 많이 베푸셨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이것이 당시 인간이 빠져 있는 고통들 중에서 가장 현실적인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기적들을 베푸시는 사역만을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간의 한계를 가지고 기적들과 같은 신비한 것들을 대하게 되니, 이것들만이 예수님의 사역의 전부인 듯이 보는 편협적인 시각을 갖게 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사역은 기적만을 베푸신 것이 전부가 아니고, 진리를 가르치신 것이 더 많으며, 여기에 덧붙여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드리신 일이야말로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저런 기적들 베푸시고 다양한 진리를 가르치셨다 할지라도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이것이 사실상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십자가를 지시는 핵심적인 사역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 땅에 도래하셨던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신분으로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야 할 사실은,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신 분이라고 하는 사실과 이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아들 독생자로서 그렇게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 중에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여길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통하여 바로 이 사실을 주도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나타납니다. 첫째, 예수님은 당신께서 우리 인간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여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사역을 감당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둘째, 이렇게 십자가를 지고 어린양의 사역을 감당하시는 예수님은 과연 누구이신가 할 때, 바로 하나님의 외아들 그분 자신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외아들이라는 표현은 사실상 하나님 그분 자신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라고 하는 신비한 존재로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제 2위의 격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당신의 몸을 십자가의 형벌에 내어주실 수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사실상 하나님 그분 자신이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 그분 자신이 아니시라면 결코 우리의 죄값을 대신 감당하시는 십자가의 사역을 이루실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누군가가 우리의 죄값을 사하는 자격자가 되려면, 그가 우리와 똑같이 죄책을 지는 신분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이 땅에서는 그러한 자격자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아담 안에서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런 죄도 없으신 하나님 그분 자신께서 이 땅에 성육신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의 부계를 따라 세상에 오지 아니하시고, 오직 성령으로 잉태되어 세상에 나셨습니다. 마리의 몸으로 나셨지만, 이는 마리아의 몸을 빌리신 것에 불과할 뿐이요, 그녀의 몸에 잉태되신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았던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예수님은 한편으로는 인간이셨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 그분 자신이셨습니다. 바로 이 사실을 입증하고 증명하는 것이 무엇이냐 할 때, 바로 각종 기적들을 베푸신 사건들입니다. 기적이라는 것은 인간은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인간이 행할 수 있다면 그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인간이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하는 데서 기적이 성립되는 것이요, 이것은 오직 하나님과도 같은 신적인 존재만이 베풀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와 같은 기적들을 다발적으로 베푸셨던 것입니다. 왜 그러셨는가 하면, 바로 예수님 당신이 하나님 자신이신 것을 드러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기적들을 많이 베푸셨습니다. 바람도 꾸짖으시니 잠잠해졌고, 바다 역시 그렇게 잔잔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니, 이내 나무가 말라버렸습니다. 이러한 기적들 중에서 가장 많이 나타난 것은 인간들의 각종 병을 고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각색 병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문둥병자를 고치셨고, 앉은뱅이를 고쳐주셨으며, 소경의 눈까지도 뜨게 해주셨습니다. 심지어는 이미 죽은 지 오래 되는 사람까지도 다시 살아나게 해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통하여 많은 기적을 통하여 병자들을 고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각종 병을 고치신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에 되어진 일입니다. 즉 병이라는 것은 인간들이 당해 있던 가장 큰 고통거리였습니다. 더욱이 당시는 오늘날 20세기의 경우와도 같은 첨단 의학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질병 문제는 인간들에게 가장 심각한 고통거리였습니다. 물론 죽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차원에서는 예수님 당시의 1세기 때의 형편이나 지금의 우리의 형편이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오
늘날에 비해서 당시의 상황은 인간이 질병에 들게 되면 너무나도 비참했고, 절망적이었습니다. 이런고로 사람들이 처해 있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측면에서 예수님의 기적들이 병고치는 역사로 많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지금 여기 마태복음 14장 말미의 게네사렛 땅에서 일어난 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미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타나시는 곳곳마다 병에 걸린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직접 걷거나 움직일 수 없는 경우에는 사람들의 등에 업혀서라도 나아왔습니다. 자비와 긍휼이 충만하신 예수님은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일일이 다 고쳐주셨습니다. 병자들이 급한 마음에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져보려고 하는 미신적인 마음을 가졌을지라도 용납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병을 고치신 사역이 예수님의 사역의 본질이 아니었습니다. 반복하지만, 예수님께서 병자들의 병을 고쳐주신 것은, 당신이 바로 하나님 그분 자신이라는 것을 드러내보이시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각종 병들을 쉽게 고치시고, 바람과 바다와 같은 자연까지도 바로잡으시며, 심지어 죽은 자까지도 다시 살리시는 분이신 예수님을 볼 때에, 결코 사람의 차원에서 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차원에서 예수님을 보는 한에는
제아무리 높게 본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바르게 보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스승들 중의 스승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능력 중에 능력을 베푸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
예수님은 바로 이 사실을 선포하시고 입증해 보이시기 위하여 온갖 기적들을 베푸셨습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중풍병자의 병을 고치신 사건이 있습니다. 이 사건의 핵심 역시 예수께서 당신이 바로 “죄를 사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 자신이신 것”을 드러내시려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마 9:1-8). 물론 본 사건은 특별한 의미를 가져서 치유가 복음의 수여와 함께 베풀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외의 경우요, 특별한 상황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치유함을 받는 것이 구원을 받는 것과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여기 중풍병자의 치유 사건의 경우,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역사를 베푸시는 가운데 인간들을 그러한 불행에로 빠져들게 만들었던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분으로 오신 당신의 인격과 사역을 군중들 앞에서 드러내신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태는 이사야가 노래한 고난의 종의 노래, 곧 메시아의 노래가 예수님의 치유의 사역에서 성취되었다고 보도하였던 것입니다. 가령 마태복음 8장 14-17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이 날 예수님은 베드로의 장모의 병을 고쳐주시는가 하면 많은 귀신 들린 자들을 고쳐주셨고,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이 이사야가 예언한 예언의 성취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이사야서 53장 4절 말씀을 가리킨 것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런데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이사야의 예언을 마태가 문자 그대로 인용한 것은 아님을 보게 됩니다. 여기 이사야의 예언은 장차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고난을 짊어지실 여호와의 고난받는 종에 대한 예언으로 잘 알려진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지금 예수님께서 각종 병을 고치신 것에 적용된 것은 다소간 의아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마태복음은 지금 보다 광범위한 관점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다루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사역의 총체가 종의 사역이라는 사실에 비추어서 이 부분을 적용한 것입니다. 즉 마태가 이와 같은 이사야의 예언을 이곳에 연결시키는 이유는 예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는 사역 전체가, 이후 그가 이루시게 될 속죄 사역으로 말미암아 죄인들이 누리게 될 영원한 회복의 상징이었으며 또한 시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마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각종 병을 고치시는 사역을 베푸신 것은, 사실상 예수님 당신의 사역의 총체인 십자가를 지시는 사역의 한 부분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총체는 십자가에 달려 죽어주심으로 우리의 대속물이 되어주시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 하면 이것이 생각나는 것이고, 이것을 떠나서는 예수님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십자가의 사역은 떼려야 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이고, 십자가는 예수님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사역은 절대적으로 십자가의 사역에서 총체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분이신 예수님은 과연 누구이신가 하는 점입니다. 바로 하나님 당신 자신이라고 예수님은 친히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참으로 대단히 놀라운 선포요 충격적인 선포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것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뒤따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 그분 자신이시라면 표적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표적을 숱한 기적으로서 보이셨고, 동시에 죄를 사하는 권세를 베푸시는 것으로서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표적 중의 표적인 요나의 표적으로서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있다가 다시 세상에 나왔던 것처럼, 예수님 역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사흘 동안 무덤에 있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 표적은 예수님의 사역의 본질이기도 하였기에 잠시 뒤로 미뤄놓고, 공생애 사역의 시점에서는 각종 기적들로서 보이시거나 혹은 죄를 직접 사하는 권세를 베푸심으로서 당신이 하나님 자신이신 것을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2절하)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 주위에 있던 서기관들이 속으로 불평했습니다.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3절) 왜 이렇게 생각했습니까? 죄란 오직 하나님만이 사하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함부로 사람을 향하여 '네 죄를 사한다'고 하지 못합니다. 역사가 생긴 이래로 이 땅에서 어느 누구도 이렇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의 고유 권한이요, 영역이며, 또한 실제적으로 죄가 사해지는 효과도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시니까, 서기관이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이 서기관의 생각을 훤히 들여다보고 계셨습니다.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가운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올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4-6절).
이 얼마나 기가 막힌 말씀이십니까? 그것은 이렇게 하신 것과도 같습니다. “너희는 지금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옳은 생각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이제 이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겠다. 즉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내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나는 이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겠다. 그래서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너희에게 이 사실을 믿을 수밖에 없는 증거를 보여주겠다. 그것은 실제로 이 중풍병자가 병고침을 받고 일어나서 걸어가는 것이다. 만일 내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 중풍병자를 고칠 수 있겠느냐? 그렇지만 나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이 중풍병자를 간단하게 고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인 바, 죄를 사하기도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병고침 받는 것 자체가 구원인 것은 아님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나님 자신이신 것을 드러내 보이시기 위하여 각종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병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병고침을 받는 것 그 자체만을 놓고 보건대 그것은 복음 그 자체는 아닌 것입니다. 지금 여기 중풍병자의 경우는 예외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병고침을 받았다고 해서 더불어 구원까지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을 받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구속주이심을 믿는 데서만 되어지는 일입니다. 이것이 없이 병고침만을 받는 기적을 체험하는 것은, 그것이 비록 예수님의 이름으로 되어진 일이라 할지라도 구원과는 상관없습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든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낼 수 있고,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할 수 있으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할 수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마 7:21-23). 정작 중요한 것은, 나의 인생의 근본이 하나님 중심적인 삶으로 돌아서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삶의 중심이 여전히 자기 중심적인 상태에서 이 목적의 일환으로 하나님을 찾고, 기도도 하며, 적당히 헌금도 드리는 등의 신앙생활이라면, 이는 구원을 누리는 삶과
는 무관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우리에게 삶의 전환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영접했다고 하는 한에는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사는 존재에 머물러 있으면 안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전히 옛 사람의 삶의 형태일 뿐입니다. 사람의 삶이 제아무리 고상하고 도덕적이며 기독교적인 신앙형태를 취했다 할지라도 그 자체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삶의 중심과 목표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데로 변화되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이 분명하게 바뀌어지지 않은 상태의 사람이 어떻게 기회가 되어 병고침의 은사 같은 체험하게 되면, 그만이나 그것을 구원의 확신으로 붙잡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단의 미혹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병고침 받는 문제와 구원을 받는 문제는 전혀 별개의 사실인데 말입니다.
이 사실은 누가복음 17장에서 잘 나타납니다. 당시 열 명의 문둥병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병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나아와 감사의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비로소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고 하신 후, 그에게 이르시기를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열 명의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을
의지하여 병고침받았다 할지라도, 정작 구원에 이르렀던 것은 예수께 영광을 돌렸던 한 사람의 문둥병자뿐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이 한 사람 고침받은 문둥병자의 믿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진행하고 계시는 구속사를 인식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사람은 다른 아홉 명의 고침받은 자들과는 달리 예수님께 나아온 가운데 그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생각함에 있어서, 단순히 “아! 이분은 참으로 듣던 대로 희한한 능력을 베푸시는 기이한 분이시다”라고 생각했던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 하나님께서 이분을 통하여 이제 우리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을 진행하고 계신다. 이분은 조상적부터 약속되어진 바로 그 메시아이시다. 우리 이스라엘에게 참된 구원을 가져다 주실 분이시다”라고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시되 정치적인 의미를 초월하여 최종적으로 자기 몸을 대속물로 십자가의 형벌에 내어주심으로써 인간이 근본적으로 안고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방식을 통하여 참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분이 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구원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서 찾아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짐이 없이는 그저 옛날의 실패를 반복하는 순환적 과정을 되풀이만 할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듭되는 불순종의 문제, 바로 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하여 자신을 죄값으로 지불하시고, 거룩하신 성령님을 보내셔서 구원받은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실 것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의 신분과 자격으로서 세상에 들어오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것을 통하여 당신께서 이러한 의미에서의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신 사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계셨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박해한 근본적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책잡기도 하였지만, 근본적인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시하신 사실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세로써 말씀하셨고, 하나님만의 권세로써 죄인들의 죄를 사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유대인들의 심사를 뒤틀리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죽이기까지 예수님을 미워하면서 어찌하든지 함정에 빠트리려고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분위기가 팽배해 있던 시점에 이제 멀리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단의 종교 지도자들이 이르러 예수님을 책잡는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복음 진리는 이중의 결과는 냄
본문 마태복음 15장 서두의 “그 때에”라는 말은 본문의 논쟁이 일어난 시점을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그 때에” 일단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찾아서 예루살렘으로부터 여기까지 일부러 먼길을 여행해 왔습니다. 예수님께 대하여 항상 적대적이기만 한 이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항상 그랬듯이 이번에도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그렇게 나아왔던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진리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의 거짓과 모순이 드러나고 폭로되게 되자, 어떡하든지 예수님을 곤경에 몰아넣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람이 신앙생활 하는 가운데 자신의 잘못을 지적받게 되면 대게 두 가지 반응을 보이기 마련입니다. 첫째는 그 지적받은 잘못을 겸손히 수용해서 자기 발전의 기회로 삼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 대한 경배의 순수성을 더더욱 상승시킴으로 아름다운 자기 발전을 이룹니다. 이런 사람은 항상 스스로를 살피는 의식이 있어서 겸손한 심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자기의 부족함을 깨달아 어찌하든지 진리 안에서 신령하게 자라가기를 소망합니다. 반면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 항상 되지 못하고도 된 줄로 생각하는 착각 속에서 그 교만한 목을 한층 더 뻣뻣이 세우는 가운데 자기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본능적 방어에 바로 몰입해 버립니다. 그래서 지적과 충고를 고깝게 생각하여 듣지 아니합니다. 심지어는 자기의 왜곡된 고집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놀랍게도 진리를 적대하고 핍박하는 일까지도 서슴없이 자행합니다.
예수님을 핍박했던 유대인들의 모습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교훈에 따라 진리의 빛을 많이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돌이키고 고칠 생각은 전혀 하지를 않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사역이 진행되면 될수록 필연적으로 대립관계는 더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이들이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아니할수록 상대적으로 그 정도에 비례하여 당신을 향한 박해와 음모는 한층 증대되어 나갔습니다. 빛을 핍박함으로써 자기들이 처해 있는 어두움을 보존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존재와 그 사역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의 부끄러움이 하나씩 둘씩 드러나게 되자, 어찌하든지 예수님을 곤경에 몰아넣으려 했던 것입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세를 보여주지 아니하였고 도리어 그 마음을 강퍅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요한복음 8:37에서 말씀하시기를,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말씀의 이중 작용, 곧 말씀이 어떤 이에게는 생명으로 인도하나, 어떤 이에게는 사망에로 인도하는 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훗날 바울은 같은 의미로 말하기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그것을 감당하리요”(고후 2:15-16)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신분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사망에 속한 자인지 혹은 생명에 속한 자인지를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진리를 선포 나가셨을 때, 이 말씀은 유대인들의 허상을 여지없이 드러냈습니다. 말씀을 순종치 못하는 유대인들은 사사건건 주님을 반대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예 예수님을 시험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당시 사회 환경상 미묘한 문제인 “납세”의 건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을 시험했는데, 이것이 마태복음 22장 15-22에 나와 있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한대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로마의 식민지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막대한 세금을 거두어들였고, 이때 청부제를 도입하였습니다. 지금 이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가 바로 세리였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삭개오와 같은 사람은 유명한 세리장이었습니다. 세리들은 세금을 거두는 만큼에 비례하여 배당을 받았으므로 기를 쓰고 세금을 거두어들였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백성들로부터 인식이 좋지 않았고, 강한 조세 저항 기운에 부딪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세금을 내야 한다고 대답하실 것 같으면, 민족의 반역자로 몰아갈 계획이었습니다. 반대로 세금을 내지 말아야 한다고 대답하실 경우에는 로마에 대항하는 국사범(國事犯)으로 몰아갈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특별히 헤롯당이라고 하는 정치적 당파 사람들을 대동하고 와서는 예수님을 시험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들의 질문이 순수하지 못한 동기를 가진 것임을 바로 파악하셨습니다. 즉 이들의 질문이 사실은 당신을 향한 시험인 사실을 분명히 아셨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예수님은 이들의 악한 심보를 분명하게 지적하셨으며, 이어서 아주 지혜롭게 대답을 잘 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물러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물러간 뒤로 그냥 있었던 것이 아니고 다시 새로운 꾀를 열심히 궁구하여 어찌하든지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한 일에 몰두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향한 유대인들의 시험은 끊이지를 않았는데, 이 납세건의 시험이 실패한 이후에도 그 즉시로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을 통하여 새로운 도전이 다시금 시도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어지는 마태복음 22장 23-33을 보면,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었던 “수혼의 법칙”을 빌미로 주님을 시험했던 사건이 뒤이어 등장하게 됩니다. 말씀을 보겠습니다.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찌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세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찐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사두개인들이 질문한 내용은 얼른 보더라도 얼마나 불순한 것이었는지 한 눈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저들은 참으로 가련하게도 그 짧은 지식을 가지고 진리의 원천이신 주님을 대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번에도 예수께서 잘 대답하심을 통하여 이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험은 여전히 계속됩니다. 사두개인들이 꼼짝없이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번에는 바리새인들 중에서 율법사들이 나섭니다. 다시 마태복음 22장 34-40을 보면,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는 내용이 나오게 됩니다.
이들의 고집스럽고 강퍅하기 그지없는 무엄한 행위는 마지막으로 예수께서 당신의 권위를 다윗보다 위에 두시는 명쾌한 논증을 제기하심으로써 비로소 그쳐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22장 41-46에 잘 나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이렇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잡는 일에 혈안이 되어버렸습니다. 지금도 이처럼 예수님을 시험하고 책잡을만한 허물을 캐내기 위한 의도적인 목적으로 예수님이 계시던 게네사렛 땅으로 찾아 나왔는데, 그런데 바로 이 때에 마침 좋은 기회를 포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한 것'을 보게된 일이었습니다. 호시탐탐 기회만을 엿보아 나오던 이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은 체로 떡을 먹는 것을 보았을 때, 이는 예수님을 책잡음에 있어서 더 이상 있지 않을 듯 싶은 좋은 기회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빌미 삼아 예수님을 비방하며 시비를 걸어왔습니다.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마 15:1-2). 여기 '당신의 제자들이'라는 말의 어감을 보십시오. 이 말은 사실상 스승인 예수님을 겨냥한 것입니다.
유대교인들의 비난에 대한 사상적 배경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이 말은 비난자들이 걸어온 시비의 핵심입니다. 그러면 장로들의 유전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오경에 기록된 것 외에도 모세에게 말로 전해진 소위 구전 율법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유대교에서는 성경 율법이란 근본원리만을 제시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현실의 복잡한 생활 환경에 맞게끔 좀더 세세하고 구체적으로 규범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포로 생활로부터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후 랍비들은 고대의 전승 자료를 중심으로 세세한 생활 규정들을 정비하여 집성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장로들의 유전을 형성하였는데, 이것을 문서화시킨 것이 바로 탈무드(Talmud)입니다. 그런데 이 탈무드는 내용상으로는 율법의 세부 규정을 담은 '미쉬나'와 이것의 주석격인 '게마라'로 구분됩니다. 또한 이 탈무드는 문체상으로는 법 규정을 다루는 '할라카'와 각종 이야기를 통해 지혜와 훈계를 주는 '학가다' 등으로 구분됩니다.
이 중에서 할라카는 모세로부터 개개인에 의해 전래된 것과 모세의 기록에 기초한 규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613개에 달한다고 보았습니다. 유대교는 이것을 다시 인체의 뼈대수에 상응하는 18개 주제의 의무규정 248항목과 1년의 날수에 상응하는 13개 주제의 금지규정 365항목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지금 대적자들의 비난은 이와 같은 장로들의 유전에 근거하여 제기되었습니다. 물론 이들의 비난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고, 나름대로 그 기원을 모세의 율법에 두었습니다. 가령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정하고 부정한 규례'가 있습니다. 특별히 레위기에 보면 이에 대한 규례가 아주 세세히 수록되어 있어서, '문둥병 부정 규례', '산모의 부정 규례', '정하고 부정한 짐승 규례', '유출병 규례' 등과 관련한 정하고 부정한 규례들이 자세히 나옵니다. 예를 들면 피를 먹거나 혹은 비늘이 없는 짐승이나 어류, 낙지나 문어 같은 것을 먹거나 만지기만 해도 부정하다고 규정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종교적으로 특별히 부정하다고 규정된 것들에 접촉되게 되면, 그 사람은 부정한 자로 취급하였고, 특별히 요구된 일련의 제사를 드려야만 비로소 정하게 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제사를 드리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의식이 물로써 자기 몸을 씻는 규례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부정으로부터 깨끗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게끔 의도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만일 율법으로 규정한 어떤 부정한 것을 만졌을 경우에는 그에 규정된 일련의 제사를 드려야 하고, 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를 물로써 깨끗이 씻는 의식을 치러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제사장이 백성들의 제사를 집례하기에 앞서 물두멍의 물로 자신을 깨끗이 씻어야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질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당시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이 성막에 들어가기 전에 손과 발을 씻도록 요구하셨던 다음과 같은 말씀들을 발견합니다. “아론과 그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화제를 여호와 앞에 사를 때에도 그리할지니라 이와 같이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지니 이는 그와 그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출 30:19-21). 또 출애굽기 40장 12절을 보면, “너는 또 아론과 그 아들들을 회막문으로 데려다가 물로 씻기고”라고 했습니다. 포로기 이후 유대 장로들은 제사장들에게만 해당하는 이 말씀을 일반 백성들까지도 결례를 행하여야 한다고 확대 해석하여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스스로를 분리주의자로 자칭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런 결례를 지키는 데 큰 열심을 보였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바른 정신
그런데 이와 같은 율법의 의식적인 규례들은 그 외부적인 형식 자체를 문자적으로 시행하는 것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배후의 정신을 지키는 데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러한 외적인 의식이 내포하고 있는 “신학적인 의미”가 본질인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규례들은 종교적인 목적을 의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의 문화적 수준에 맞게끔 그런 식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러한 정결 규례를 통하여 이스라엘이 하나님 당신께 속한 구원의 은혜를 받은 백성으로서의 특별한 존재인 사실을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확립해 나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드러나게끔 하였던 이런 특징들이 반드시 정하고 부정한 규례들과 같은 예전적인 것들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은 다양한 형태의 율법들 가운데 한 부분을 형성하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기타 안식일 제도나 안식년 제도, 혹은 십일조 규례, 성전 제도, 각종 절기를 지키는 규례, 할례 등의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는 다른 의식들도 더 많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도덕법 규례도 큰 비중을 차지하여 세상의 수준보다 월등한 도덕주의 혹은 윤리적 요구가 주어졌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것들을 통틀어 집약적으로 말씀하시기를 마태복음 7:12에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22:37-40에서는 역시 한 율법사의 시험과 관련하여 말씀하실 때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갖가지 정하고 부정한 의식적 규례들은 다른 한편으로 사랑의 법인 도덕법들과 함께 준수되어야 했습니다. 이를 통하여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자신들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보존하고 또한 외적으로 드러내게끔 하는 좋은 표징으로 작용하였던 것입니다. 과연 이들 규례들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게 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 구별된 삶의 모습들의 원리를 한 마디로 크게 요약하면 '사랑'이라고 하는 놀라운 개념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되게끔 하였던 선행된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그러한 분이신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것의 구체적인 실천력으로서의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이 또한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사랑의 원리에 지배받음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는 자기들이 받은 구원을 더욱 확증해 나갈 수 있어야 했고, 외적으로는 제사장 나라로서의 거룩한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여 하나님의 성호를 빛내는 복음의 증거자가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다음 기회에 본문을 더 살펴보기로 하고, 일단 여기서 말씀을 맺고 정리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참으로 잘못된 교회의 전통들에 둘러 쌓여 있습니다. 도무지 진리가 아닌 것들이 진리요 생명인 듯이 교회 안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장려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장로들의 유전, 곧 교회의 전통 혹은 사람의 계명들은 나름대로 성경에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라고 하는 명분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껏해야 사건에 불과한 것들이요 도무지 원리들은 아닌 것입니다. 복음과 구원이라고 하는 기본 골격에 비추어볼 때 도무지 신앙이라고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대단히 놀랍게도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엄청난 모순을 자행하고 말았습니다. 도무지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신앙의 기초가 장로들의 유전이었던 데서 되어질 수밖에 없는 필연이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전통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대적자들이 기세가 등등하게 비난을 가해왔을 때,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3절)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7-9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장로들의 유전, 곧 교회의 전통에 근거하여 신앙생활하는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는 것이라고 하셨고, 이는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것으로 취급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많은 부분에서 장로들의 유전, 곧 교회의 전통으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병고침 받는 것을 마치 구원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여기 저기에 널려 있는 기도원을 보십시오, 이곳 저곳에서 벌어지는 은사 집회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또한 상급신앙과 기복신앙의 전통과 유전을 마치 생명이요 구원인 듯이 여기는 잘못은 얼마나 심합니까? 신앙생활의 목적이 이 땅에서 잘먹고 잘살기 위해서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부자되는 수단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기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어내고 받아내는 수단으로 기도를 사용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성령충만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한국 교회에서 이 개념 이상으로 비성경적이고 미신적으로 가르쳐지고 있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방언을 하기만 하면, 기타 신앙생활의 다른 측면들이 엉망이고 형편없어도 무조건 구원을 받았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까닭에 가짜 방언이란 것이 횡행하고, 마귀가 가져다주는 속이는 방언들도 난무합니다. 그러나 신비한 능력을 체험하는 것 그 자체는 구원과 전혀 상관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병고침받는 은사를 체험하는 것 그 자체가 구원을 보증하는 것
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일이 없이도 얼마든지 병고침을 받을 수 있고, 방언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이런 체험과 경험을 하는 것 그 자체를 구원과 동일시여깁니다. 바로 이런 가르침들이 장로들의 유전이요, 교회의 전통들인 것입니다. 이런 신앙 형태들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우리의 영혼을 멸망에 빠트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기회에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보고 반성해 보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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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유전을 따르는 신앙의 위험성 (3)
(마15:1~20)
장로들의 유전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예수님 당시 유대교의 문제점은, 이들이 신앙생활의 근거를 장로들의 유전에 두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맹렬히 질타하셨습니다. 장로들의 유전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기는 고사하고, 반대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3절에서 분명하게 지적하셨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지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를 비난할 때 제시한 것은, 장로들의 유전이었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도리어 하나님께서 내신 계명을 거스르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버젓이 하나님의 계명처럼 사용하면서 이것으로서 감히 예수님을 판단하며 시비를 걸기까지 하였습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 안에서 이와 같은 장로들의 유전은, 성경적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이라는 이름 하에 행해나가고 있는 여러 가지 관습과 전통들로서 재현됩니다. 예수님 당시의 장로들의 유전이 이 시대에도 온갖 형태로 오늘날의 수준에 맞게끔 변형된 가운데 '교회의 전통'이라는 옷을 입고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어쩌다가 한 두 가지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교회 전체를 주관해 나갈 정도로 많고, 또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혹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런 것을 따르고 있지나 않은지 점검해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당시 유대교가 생명처럼 여겼던 장로들의 유전은 무려 613가지 항목에 달했습니다. 그렇다면 유전이 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까? 그것은 이들 유전이 하나님의 계명을 대적하고 맞서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고 하는 말씀을 주셨는데, 장로들의 유전은 그것을 거스려 ‘저렇게 하고 그렇게 하면 된다’고 했으며, 그렇게 유전을 따르는 것으로서 실상은 하나님의 계명을 다 순종한 것이라고 우매하게 가르쳤습니다. 장로들의 유전이란 것이 이렇게 우매하고 하나님께서 내신 본래의 계명을 범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대중들은 쉽게 간파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전통은 하나님의 계명과 비슷했기 때문이고,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의 계명보다도 더 우월해 보이며 매력적이기까지 했습니다.
가령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염두에 두어야 할 여러 가지 신앙의 도리들을 가르칩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주일을 구별하여 지키는 것과 관계될 때에는, 하나님 계명은 우리가 주일날은 가급적이면 모든 일을 쉬고 함께 부르심을 입은 형제 자매들이 공동체로 연합하여 예배를 드리고 교제에 힘쓸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지만 장로들의 유전은, ‘아니 내가 주일에 좀 불충실하더라도 대신 더 많은 돈을 벌어서 그마만큼 더 많이 바치면 되지 않느냐?’고 하면서 나서게 됩니다. ‘주일을 못 지켜 좀 미안하긴 해도, 그 대신 그만큼 더 많이 벌어서 바치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의 눈에는 이것이 설득력이 있게 되고, 타협이 될 만한 미끼처럼 보이며, 심지어 더 좋게 보이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합니다. 그리하여 교회의 전통으로 자리잡게 되고, 이것이 신앙의 도리인 듯이 버젓이 행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가 바로 유전, 곧 교회의 전통으로서 하나님의 계명을 파하는 실례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도 이것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십니다. 여기 3절에서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라고 하신 후, 바로 이어 4-6절에서 한 실례를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하나님께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계명은 인간 사회의 근본 질서를 세우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를 낳아주신 부모님을 공경
해야 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하나님께서도 강력히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진정한 아버지, 곧 영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더 잘 공경해야 하는가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교의 유전은 '부모를 공경할 것으로 하나님께 드릴 것 같으면, 부모를 공경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라고 가르칩니다. “부모님을 다소간 허술히 대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더 잘 섬긴 것이 있으니 괜찮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공경하는 실질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계명의 골격인 십계명의 한 부분으로 이것이 세워진 것에서 잘 나타납니다. 자세히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20장 12절을 보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Honor your father and your mother, that your days may be prolonged in the land which the Lord your God gives you)고 했습니다. 이처럼 부모 공경을 요구하심에 있어서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하심으로 특별한 약속을 제시하시면서까지 명령하였고, 또한 출애굽기 21장 17절에서는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And he who curses his father or his mother shall surely be put to death)고 하시는 것을 통하여 분명한 경고까지 보이셨습니다. 이 사실을 중요하게 보았던 바울이었던지라, 그 역시 말하기를,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1-3)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 할 때에는 부모를 공경하는 실질이 실제로 있어야 하고, 이 능력의 연장선상에서 하나님을 또한 경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교는 만일 부모님께 드릴 것으로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바쳤다면, 그것으로 괜찮은 것이고,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낫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을 마가복음에서는 고르반이라고 했습니다(막 7:11). 즉 하나의 종교적 관례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 무엇을 해야 할 때에 “아, 내가 그것은 내가 이미 고르반 했기 때문에 곤란하다”고 할 것 같으면 만사 끝이었습니다. 고르반이라는 말을 악용하여 자신의 의무를 회피하는 풍조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장로들은 이런 것을 가르쳤습니다.
이것을 현대식으로 비교하자면, “성전 건축을 위해서 몽땅 바친 까닭에 가족들이 굶어 죽게 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위대한 신앙이요 축복받는 신앙이다”는 식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부모께 효도해야 할 부분에 대해서도 “아버님 이번에 제가 이것을 고르반 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아버님께는 제가 불효하게 되었습니다.”고 하면서 빠져나가는 풍습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여하튼 이런 가르침에서는 종교 지도자들이 백성들의 재물에 눈독을 드리는 모습이 역력히 보이고, 또한 백성들의 입장에서도 이들이 실제로 하나님께 바치기나 했는지도 의심스럽지만, 어찌되었든지 유대교는 이렇게 엉뚱하게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준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인간이 만든 계명이요,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율법주의 종교의 원인
오늘 우리도 구약의 계명들과 신약적 명령들을 잘못 해석하거나 오해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전통이라는 이름 하에 맹목적으로 지킴으로 사람의 계명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모순들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를 반드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현대 교회들은 이미 상당히 그러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경향들을 보입니다. 성경 말씀을 왜곡되이 해석한데 근거하여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아예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 교회가 행해 나온 전통이다' 라고 하는 명분 아래 행해 나갑니다. 이런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령 성전 건축의 경우를 보십시오. 현대 교회들의 거의 대부분이 교회당 건물을 솔로몬이 지었던 성전과도 같은 것으로 보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이것을 건축하기 위해서 헌금을 바치라고 요구하고, 헌금만 많이 바치면 다른 것들은 살펴볼 것도 없이 무조건 일등 신자로 추켜주지 않습니까? 십일조 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들이 십일조 헌금을 얼마나 강력하게 요구합니까? 그렇지만 신약 시대에는 더 이상 구약 교회가 취했던 방식의 십일조 헌금 제도란 것이 없는 것입니다. 제사 제도 자체가 폐지되었기 때문입니다. 제사 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성전도 폐지되었고, 레위 지파 제도도 폐지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일조 제도도 폐지된 것입니다. 큰 기둥이 폐지되었는데, 그것을 구성하는 한 부분에 불과한 것이 어찌 폐지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십일조 헌금을 바치도록 요구합니까? 뿐만 아니라 맥추절 절기를 지키면서 더 많은 헌금을 요구하는 것도 성경적 가르침이 아닌 것이고, 목사나 장로 혹은 집사들이 구약의 제사장직을 흉내내어 가운을 입고 예배를 드리는 것도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교회는 이런 것이 지금까지 교회가 행해 나온 전통이라는 이름 하에 맹목적으로 답습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계속 발전시켜 나가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가 이렇게 어리석게도 전통을 추구하는 종교 형태를 취하게 되는 큰 원인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에 대한 올바른 해석에서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구약계시를 구속사의 안목에서 해석하지 못함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구약계시가 지금까지 무엇을 보이면서 기록되어 나왔는가에 대하여 바르게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신앙의 중심을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사람의 영광에 맞추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함에 있어서 그들 자신의 이상과 이해 관계를 앞세워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명령에 순종하여 나온 것이 아니고, 자신의 종교적인 의를 펼쳐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주권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수고와 노력을 펼쳐나온 것입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그들의 인본주의적인 종교 형성을 위한 인간적인 규율들로 전락하게 되었고, 상대적으로는 그들의 의를 과시하는 전시 수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한 하나님을 믿는 같은 신앙을 추구한다 하면서도 이런 저런 파벌을 형성하였고, 서로 주도권을 차지하고 앞서기 위하여 피차간에 경쟁하였습니다. 그들은 대중들로부터 인정받는 종교인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자신들의 수고와 노력이 하나님을 움직이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세월이 흘렀고, 자연히 온갖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들이 교회의 전통으로 자리잡아 장로들의 유전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결과적으로 보건대 조상적부터 전승되어 나오는 하나의 종교는 계승하였는지 몰라도, 하나님의 통치가 역사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는 자유는 없었습니다.
둘째, 율법실천의 기초를 자기 능력에 두었습니다.
율법주의 종교는 자기의 능력에 대한 과신에서 생기게 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능력을 항상 자기 자신에게서 찾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상대적으로 자기 자신을 높이는 일이 뒤따르게 됩니다. 사람이 자기의 힘으로 열심히 율법을 실천하여 종교의 세계를 쌓아 가면 갈수록 거기에는 그것을 실천하여 나가는 자신의 자아도 함께 그만큼 쌓아져가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의 신앙에는 항상 자기라고 하는 것이 전면에 나타났습니다. 신약적인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하지 않고, 육신의 소욕을 좇아 행한 것이고, 이런 까닭에 매사에 자신을 드높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기란 것이 나서게 되면, 그마만큼 하나님의 의는 거역되기 마련입니다. 바울이 이것을 로마서 10장 2-3절에서 말했습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노력으로 행위를 쌓아 나가는 식의 신앙이란 것은 사실상 우상숭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행위를 추구하는 신앙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 한계는 결국 규율들이 끊임없이 자기를 억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게 되며, 따라서 진정한 자유와 안식이란 것은 맛볼 수 없게 됩니다. 구원을 얻으려고 수고하면 할수록 구원의 길은 더 멀어지기만 할 뿐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는 다시 새로운 돌파구를 찾게 되는데, 이번에는 자기의 능력과 한계를 꾸미고 치장하여 위선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즉 경건의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것처럼 꾸미는 것입니다. 외식주의자가 됩니다. 유대교는 이런 모순에 깊숙히 빠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유대교 사람들을 향하여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교회가 세상을 전도할 때에 자주 사용하는 구절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에게 외치기를 “당신들 중에서 인생살이에 실패하고 낙심하고 낙오한 사람들이 있어서, 곧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상태에 있다면,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와서 자유와 쉼을 얻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바로 말씀을 잘못 해석하고 잘못 적용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말씀을 불신자들에게 제시하신 것이 아니고, 당시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자처했던 유대교 사람들에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행위로서 구원을 얻으려고 함으로 헛된 수고와 무거운 짐에 눌려 있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겨냥하여 하신 특별한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도 같습니다. “너희가 너희의 그러한 수고와 노력, 곧 율법을 행하고 지키는 방식으로 구원을 얻기 위하여 얼마나 열심을 내고 있느냐? 그러나 그렇게 하면 할수록 실상은 더 죄의 노예가 되고 너희들의 수고와 노력은 헛된 열심이 되는 것을 너희 양심이 스스로 알지 않느냐? 너희는 근본적으로 율법을 잘못 해석하였다. 너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직접적인 수단으로서 율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율법은 의에 대한 너희의 한계를 깨우쳐 주고, 선에 대한 너희의 무능력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것을 애써 부정함으로 외식으로 치달리고 있느냐? 그런 식으로 어떻게 진정 구원에 도달하겠느냐? 헛수고만 하고 고
생만 할뿐이다. 이제는 더 이상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그쳐라. 내게로 오라! 내가 바로 진정한 구원을 너희에게 줄 것이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은, 율법으로서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한계를 깨닫고,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만을 의지하는 때입니다. 따라서 율법은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아는 사람들에게만 진정한 생명이 되고, 진정한 자유를 주게 되며,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해줍니다. 그러나 유대교 사람들은 이 점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속고 있었습니다.
구원의 근거를 자기 자신에게서 찾으려고 하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멸망으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비록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 할지라도 행여라도 이러한 경향이 틈타고 있는지를 부단히 성찰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항상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자비만을 의지하는 자세를 떠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능력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지 않아야 하고, 우리가 행해 나가는 모든 기독교적인 삶의 영역에서 이것을 늘 인정하여야 합니다. 이 원리는 구약 종교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하여 자신들의 무능력과 한계를 깨닫고 오로지 일편단심으로 하나님
의 은혜와 은총만을 의지해야 했으며,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자신들의 선과 의라는 것들이 그야말로 다 더러운 옷과 같고, 쇠패함이 잎사귀 같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더더욱 겸손해야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만이 자신들의 구원의 근거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유대교는 이 생명과도 같은 원리로부터 벗어났습니다. 행위구원을 가르쳤고, 상급신앙을 가르쳤으며, 사람의 수고와 노력에 중심을 둔 인본주의 신앙을 구축해 나갔습니다. 따라서 말씀은 서서히 변질되었고, 인간의 생각들이 비집고 들어왔으며, 이런 것이 장로들의 유전과 교회의 전통을 형성해 나왔습니다.
유대교의 태동
이렇게 해서 유대교는 장로들의 유전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찌들려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유대교의 왜곡된 열심은 포로생활로부터 귀환하게 된 때를 기점으로 서서히 발전되어 나왔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포로생활의 비극을 막 벗어난 때였으므로 자기들을 그처럼 포로가 되게 하였던 율법에의 불순종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아야겠다는 각성이 자연스럽게 퍼져나가는 분위기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이 때의 각성이 이번에는 다른 각도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진행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지나친 열심이었습니다. 사람의 생각이 끼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신앙의 내용들이 비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의도적인 불순종의 죄였다면, 이번에는 지나친 열심으로 말미암아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생각이 끼여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비유로 들어보자면, 만일 “꽃밭에 들어가지 말아라”고 하는 성격의 계명이 있다고 할 때, 이런 계명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합니다. 즉 잔디와 꽃을 사랑하고 보호하라는 것이 계명의 중심이요 기본적인 정신인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정신을 이해하고 지키는 데 있어 열심이 지나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그러면 꽃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조치를 취하면 되겠다”고 판단했고, 이에 따라 “아예 꽃밭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쳐버리자”라고 결정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후부터는 “꽃밭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가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계명이 전면에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발전하기를 “꽃이 있는 울타리는 어떤 것이든지 넘어서는 안된다”라는 내용으로 전개시켜 나갔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결국 계명의 본래 정신이 대치되어 버려서 “꽃을 사랑하라”고 하는 본래의 뜻이 사라져 버리고, “꽃이 피어 있는 울타리는 넘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전혀 엉뚱한 내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면적으로는 비슷하게 보였으므로 그 차이점을 잘 구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본래적인 의미가 분명히 왜곡되어버린 것을 알게 됩니다. “꽃을 꺾지 말아라”는 의미와 “울타리를 넘지 말아라”는 의미는 분명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계명의 중심이 꽃에서 울타리로 이동하였고, 더욱이 울타리 같은 계명은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명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율법의 본래의 뜻과 정신이 사라지고 인본주의 계명과 정신이 전면에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뒤죽박죽 되어 하나님의 본래의 계명과 사람의 계명이 뒤섞이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율법에 “간음한 자는 돌로 치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계명을 주신 이유는, 당신께서 그러한 부패한 행위를 혐오하신다는 사실을 주지시키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성결하고 거룩한 삶에 관심을 가지게 하시려는 의도였습니다. 즉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율법이 내포하고 있는 정신이요 의도인 것입니다. 즉 '돌로 치라'에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간음하지 말라'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나아가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이런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영원한 죄인이요,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이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유대교는 이 법을 지킴에 있어서 문자적인 의미 그 자체에 강조점을 두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덧붙여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정신까지 가미됩니다. 따라서 “간음하는 것은 하나님께 범죄하는 괴악한 행위요, 그 나라의 백성된 자로서 행할 바 합당한 도리가 아니다”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그러한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라는 형벌 집행적 표현에 관심을 두게 된 것입니다.
실례로 요한복음 8:1-11을 보면 한 여인이 간음했다가 군중들에게 붙잡혀 나오게 된 사건이 등장합니다. 이 때에도 유대인들은 이 사건을 빌미로 예수님을 시험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저들은 “간음한 자는 돌로 치라”고 했던 계명을 들어 예수님을 시험하였던 것입니다. 한번 말씀을 구체적으로 보겠습니다.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묻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시험하는 자들은 평소에 예수께서 보여주시고 가르치셨던 성품과 교훈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여인을 돌로 치라고 말씀하실 리 없다고 판단했고, 그럴 경우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자로 몰아 정죄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예수님의 지혜로우신 답변으로 말미암아 상황은 역전되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낭패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얼마나 우리 인간의 실상을 명확하게 꼬집는 말씀입니까? 유대인들은 이 율법의 본의를 깨닫지 못한 까닭에 자기들의 죄성을 해결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예 제쳐놓고, 여인을 정죄하는 일에만 혈안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유대인들은 이런 식으로 행하는 것을 통하여 사실상 반대급부를 얻으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즉 이 여인을 적극 정죄하는 것을 통하여 상대적으로 자기들은 간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요, 그래서 아주 깨끗하고 결백한 자들인 것처럼 과시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과도히 넘치는 노기를 여인에게 발하는 것을 통하여, 자기들은 아주 깨끗한 사람이요 그런 죄로부터 완전히 초월해서 사는 도인과도 같은 존재인 것처럼 과시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들 역시도 감추인 죄악으로 가득찬 자들이었습니다. 다만 다행스럽게도(?) 이 여인의 경우처럼 그것이 들키지 않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여인의 경우와 다를 바 없이 음욕과 그 행위로 가득찬 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사실인 것은 여기서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시니까,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고 한 데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간음죄'를 금하신 율법이 있을 때, 이것은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이런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존재인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산상수훈에서도 이 부분을 바르게 가르치시기를,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
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하심으로, 율법의 본래의 정신을 바르게 드러내시고 온전히 밝히셨던 것입니다. 율법의 본래의 의미가 이러한데, 이들은 어이없게도 남을 정죄하는 수단으로 삼았고, 자신들의 의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유대인들의 문제점은 이 가르침을 먼저 자신들에게 적용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유대교는 외식의 집단이었습니다. 말씀에 대한 오해, 사람의 계명으로의 발전, 외식주의로의 전락 등은 모두 일맥상통합니다.
과거 유대교의 모순이 교회 안에서 재현됨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유대인들의 외식주의가 한국 교회 안에서도 만연되고 있는 현상을 여러 부분을 통하여 목도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성도들이 식사시간 때마다 드리는 소위 “감사의 기도”에 있어서 그러합니다. 식사시간에 드리는 이 감사의 기도라는 것이 본래적인 의미를 충분히 살리지 못하는 가운데 하나의 형식과 의식으로 전락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요식 절차를 반드시 거치는 것이 신앙의 핵심적인 요소인 듯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미 교회의 전통이 되어 교회 안에 자리잡아 버렸습니다.
사실 우리가 음식을 대할 때마다 기회를 살려, 그처럼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의 전통과 형식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 이미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의 기도가 종교적 냄새를 적당히 풍기는 요식적인 의식으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식의 성의 없는 요식적 절차를 기도로 받으실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사시간에 형식적으로나마 이런 기도의 모습을 갖추지 아니할 것 같으면, 여기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에게 책잡힌 제자들의 경우처럼, 다른 바리새적인 성도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모 신우회의 성경공부 모임에서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식판을 들고 음식을 배급받기 위하여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나가는 동안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말씀으로 교제하는 기회를 주신 것도 감사한데, 기회를 살려 저녁식사까지 하게 되니,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세심한 손길이 각별히 감사하였습니다. 배식 시간 동안 이런 생각에 사로잡혔고, 잠시 후 차례가 되어 음식을 받아 식탁에 앉았고 식사를 시작했습니다. 이때 옆에 계신 분이 물어왔습니다. “아니, 목사님은 목사님이면서도 감사 기도도 안 드리고 식사를 하십니까?” 순간 참으로 난처해졌습니다. 그냥 못 본 척 지나쳐 주어도 될 일이었는데, 지적을 받은 것입니다. 솔직히 불편한 마음도 들고 해서 되물었습니다. “미안합니
다. 제가 시장해서 그랬나 봅니다. 그런데 성도님은 아까 기도하실 때에 무엇이라고 기도하셨습니까? 어떻게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까?” 그러자 이번에는 그분이 당황하면서 우물쭈물 넘어가려고 했습니다. 재차 물었습니다. “그냥 묵념을 하셨습니까? 아니면 일방적으로 주문을 외우듯이 몇 마디 속으로 하셨습니까? 저는 그런 것이 정말로 기도의 행위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분위기가 다소간 어색해졌지만 진리를 세우는 문제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식사 기도가 진정한 마음으로 드리는 감사의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이미 음식을 준비하는 태도와 자세에서부터, 그리고 음식을 먹는 목적에 대한 충분히 각성된 생각이 자기 안에서 일깨워져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분명한 각성이 없이, 마련하는 사람은 마련하는 사람대로 그저 있는 대로 호사롭게 장만하고, 먹는 사람은 먹는 사람대로 음식의 맛과 양 그 자체에만 탐닉되게 되면, 사실상 감사의 기도를 드리지 아니한 결과를 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는 것은, 먹는다는 사실 그 자체에 목적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 유행하는 말로, “먹기 위해서 사느냐, 살기 위해서 먹느냐”는 식의 사고는 우리와 거리가 먼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에게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기를 기뻐하시는 그 이유 때문에, 우리의 육체가 보존되게 하시기 위하여 필요한 음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음식은 이차적인 수단이요, 일차적인 수단은 그것을 제공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인 것입니다.
이런 원리를 기억하는 가운데 식사시에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기도를 드릴 수 있다면,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아니하고 묵념하듯이 그저 하나의 요식적 행사로 진행하는 식의 식사 기도일 경우, 예수님께서 책망하셨던 바리새인들의 어리석은 외식주의의 꼴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 교회는 형식적으로 하는 기도의 전통에 빠져들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마 하지 아니하면, 무슨 큰 불경죄나 범한 것처럼 몰아갑니다. 결국 사람의 계명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하는 어리석은 외식주의자로 전락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행위들을 단호하게 책망하십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8-9절). 유대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칠 때에 본래의 정신을 잘 깨달아 가르치고 교훈하기 보다는, 외적인 형식 그 자체에 빠져 이를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기타 쓸 데 없는 시행 세칙들을 만들어나갔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금 다음 세대를 거치면서 새로운 시행 세칙들이 더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들어내면 내는 만큼, 그것을 지키지는 못하는 까닭에 항상 무거운 짐으로 여
겨졌고, 결국 잘 지키는 척 꾸미고 치장하는 외식주의로 나아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꾀에 빠진 데서 못 벗어남으로 여전히 또 다시 새로운 가르침들을 계속 만들어 나갔습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장로들의 유전'의 출현 형태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장로들의 유전은 사실상 율법의 본질을 변질시켜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그 본래적인 의미가 감추어져 버렸고, 전혀 엉뚱한 시행 세칙들이 강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나마 이것들을 실천하는 것 조차까지도 외식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장로들의 유전은 유대교를 떠받드는 큰 기둥을 형성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도리의 정통인 것처럼 가르쳐졌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이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내는 친 백성의 모습인 것처럼 전면에 부상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런 그릇된 열심과 그릇된 성경 해석에 근거하여 예수님과 제자들을 대적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지금 3절에서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라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보다 더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들은 '장로들의 유전', 곧 '구약 교회의 전통'을 열심히 추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놀랍게도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무서운 결과'를 내었던 것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이 얼마나 어이없는 모습입니까?
자기 영광을 구하는 자들의 위험성
그러면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렇게 장로들의 유전을 맹목적으로 답습하고 따랐던 원인 혹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신앙의 초점이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데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요,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는 차원에서 신앙 생활을 하게 되는 때에는, 여지없이 장로들의 유전과 전통을 성경인 듯이 따르게 되는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처음부터 장로들이 유전이란 것을 만들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자기 영광 추구심 때문이고, 이것이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사람에게 영광을 주기 때문에 훗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추앙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 44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하나님께 열심히 있다고 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열심의 중심이셨던 예수님 당신을 배척하는 모순을 보이고 있었기에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신앙의 중심이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게 되면,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신앙할 수 없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사는 형태의 신본주의 신앙에 성립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도리어 예수님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인본주의 신앙형태를 취하게 됩니다. 그러나 인본주의 신앙과 신본주의 신앙은 피차 상극입니다.
유대인들이 성경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성경을 부지런히 상고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거부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애초부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예수님은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이들은 항상 배우기는 했어도, 정작 진리를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배우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의 이득을 얻는 방법을 배우려고 했습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한에는 자기를 위해서 사는 존재입니다. 즉 자기 자신을 위하여 성경을 보는 것이기 때문에 도무지 주님을 제대로 볼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영광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는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여기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이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워주신 십자가의 잔을 지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를 구원하셨고, 이것을 우리에게도 지워주셨습니다. 따라서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는 계명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중에는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사는 이들이 많지 않고, 십자가를 구하는 삶을 사는 이들도 많지 않습니다. 자기의 영광을 구할 뿐입니다. 신앙생활의 초점이 자기 자신입니다. 기도의 중심이 자기의 필요를 구하는 내용들로만 채워져 있습니다.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고 헌신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도하는 경우가 드뭅니다. 이런 저런 것을 도와주시고 응답해 주시며 소원을 들어달라는 부탁만을 드리는 기도들 뿐입니다. 가령 질병 중에 있을 때에도 왜 고쳐달라고만 기도합니까? 왜 한편으로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를 갖지 못합니까? 왜 놀라운 이적을 베풀어서라도 꼭 고쳐주어야만 된다고 생각합니까? 이렇게 살려달라고만 기도하는 이유는 다 자기 중심적인 신앙생활의 습관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동기와 목적을 명확하게 가지지 아니하면, 주님이 존재하시는 것도 우리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시는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니 성경을 보는 것도 자신을 위해서 보는 것입니다. 성경을 이용해서 내가 한 몫 해보자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음으로 하루하루의 액운이 물러가는 듯 생각합니다. 가정의 평안과 사업의 번창과 개인적인 위로를 얻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성경을 많이 읽었다는 것이, 기도를 많이 했다는 것이, 주일을 빠뜨리지 않고 잘 지켰다고 하는 이런 것들이 얼마나 이기적인 것이 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2장 43절에서도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 운운할지라도 실상은 순전히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의 의라고 하는 것이 전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심정을 간직하고 있었고,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그분이 내신 율법에 충실했던 것이 아닙니다. 순전히 자기들의 의로움을 과시하고 선전하며 즐기는 수단으로 그처럼 율법을 추종했을 뿐입니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과 계명은 사사건건 왜곡되거나 변질되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쁨이 없는 순종이었고, 즐거움이 없는 억지 굴복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고 보니 자기들이 행하고 성취한 계명 준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마만큼 더 상대적으로 공로와 업적을 내세우는 의식을 가지는 것이 필연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유대인들의 상급신앙과 보상신앙의 근거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때 그들만의 모순이었던 것이 아니고 오늘날 한국 교회가 빠져 있는 치명적인 모순이기도 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고는 있으나, 동기가 불순한 경우도 많고, 억지로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때 더욱 나쁜 것은 상급신앙이요, 보상신앙입니다.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을 때 남들보다도 더 많은 상급과 보상을 받겠다고 하는 심리로 이런 저런 신앙생활의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들이 기업화 형태를 띄고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는 원인도 여기에서 찾아야 합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는 까닭에 재산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수 십억, 수 백억 원의 재산을 소유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빙자하여 헌금을 거두어들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빙자하여 교회 재산을 늘려갑니다. 어쩌다가 선행을 베풀지라도 자기 영광을 구하는 까닭에 그것을 과시하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해마다 큰 수재를 당하곤 합니다. 국민들이 십시일반의 심정으로 성금을 모아서 피해를 입은 분들의 고통에 조금이나 마음을 보태기 위하여 애쓰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기독교인들도 많이 동참하였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아쉬웠던 것은 한결 같이 신문에 사진을 내고 이름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무명으로 성금을 기탁하였으면 좋았을 것을, 한결 같이 무슨 교회의 아무개 목사와 성도들 일동이 얼마를 냈다는 식입니다. 성금을 기탁한 액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사진도 크게 나왔고, 이름도 굵은 활자로 크게 박혔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정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의 바른 자세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선을 베푸는 것과 관련하여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하신 말씀을 외면하거나 무시하고서야 도무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과거서부터 의례히 이렇게 해 나왔다고 하는 전통에 근거하여 정당화시킵니다. 전통이라는 명분의 사람의 계명으로서 '은밀히 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는 것입니다.
작금의 어지러운 신앙 분위기를 조심해야 함
이상 살펴본 모습들은 우리 한국 교회의 현실과 관련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교회가 순전히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낸다거나 혹은 여러 가지 유용한 하나님의 계명들을 이용하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죄가 된다는 사실을 주목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속기 쉬운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신앙, 우리 교회의 신앙이 정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뚜렷하게 구현해 나가고 있는가에 대해서 솔직한 자기 점검이 있어야 합니다. 이 문제를 두루뭉실하게 넘어가면 안됩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이러 이러한 신앙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분명히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해 나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는 내용
이 있어야 합니다. 혹은 “우리 가정은 이러 이러한 관점에서 움직여지고 있기 때문에, 분명히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가정으로서 성립되어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실질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을 뚜렷하게 가지지 아니하면, 우리 역시 유대인들의 모순을 답습하기가 쉽습니다. 신앙의 기준과 가치관이 없기 때문에 아무 것이나 마구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적 근거가 없는 것들을 교회의 전통이라는 명분 하에 혹은 다른 교회들도 하는 것이라고 하는 명분 하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기복신앙과 상급신앙의 모순에 빠져 있는 원인이 이렇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것 같으나, 사실에 있어서는 자기들의 복리를 증진시키는 일에나 관심을 갖는 정도의 수호신적인 신앙에 불과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자신이 겪어 나가는 다양한 일들에 개입하셔서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고 문제를 풀어주시며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 정도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수호신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셨고 우리 인생을 창조하셨으며 인류의 모든 역사를 당신의 주권과 섭리에 따라 운영해 나가시는 분으로서의 인격적인 하나님으로는 생각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온갖 잘못된 교회의 전통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여기 저기서 소위 유명하다고 이름난 주의 종들이 나서서 그릇된 가르침들을 쏟아냅니다. 도무지 성경적이지 못한 설교가 국민일보에 떡 하니 실려서 수 백만 명의 성도들이 읽습니다.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인본주의 신앙의 설교들이 방송 전파를 타고 안방으로 날라듭니다. 사람의 행복에 초점을 맞춘 설교들이 활자화되어 서점에 깔립니다. 입심 좋은 부흥사들이 쏟아내는 사이비적인 설교들이 이곳 저곳의 교회당에서 울려퍼집니다. 이러할 때에 도무지 생각할 줄 모르고, 육체의 정욕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기에 바쁜 어리석은 성도들은 박수를 치며 이들을 환영합니다. 오늘날 통상 말하는 한국 교회의 양적인 성장이란 것이, 사실에 있어서는 바로 이런 저질적인 상황 속에서 나타나는 피차간의 종교 놀음인 밖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거듭 확인하지만, 오늘날 스스로 자기를 가리켜 종교 지도자들입네 하고 나서는 부흥사들이 지금까지 온갖 감언이설로 기독교를 기복과 상급의 수단과 방편으로 증거해 나왔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 즐비하게 포진해 있는 직업적인 부흥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들은 자신이 함께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성도들을 섬기는 일이 목사의 사역에 있어서 가장 비중 있는 일이요, 생명과도 같은 일이라는 것을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자기기만에 빠져 있는 자들입니다. 밖으로 이름내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고, 이런 저런 대접을 받는 일에 익숙해져 있으며, 사례비라고 하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받게 될 많은 보수에 눈독들어 있는 사람들이 바로 직업꾼 부흥사들입니다. 이들은 자신과 더불어 함께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말씀을 연구하며, 성도들의 가정을 섬기는 일이 목회의 본질인 것을 도무지 깨닫지 못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부흥사들은 거짓 삯군 목사들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메시지는 구구절절이 인간의 행복과 복리증진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들은 한국 교회가 빠져 있는 그릇된 교회의 전통들, 곧 현대판 장로들의 유전을 퍼뜨리는 장본인들입니다. 성경적 근거도 없는 민족 복음화와 민족 통일의 허상을 부르짖으며 여기 저기서 구국 기도회를 개최합니다. 성전 건축에 헌신하는 것이 일등 신앙의 전형인양 퍼뜨리고 이를 위하여 하늘의 보상과 상급이라고 하는 미끼를 남발합니다. 십일조 헌금을 신앙생활의 제일 가는 의무인 듯이 가르침으로 성도들의 주머니를 넘보는 직업꾼 부흥사들인 것입니다. 이들이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온갖 '사람의 계명들'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그런 육체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청중들로부터 열화와 같은 환영을 받으면서, 끼리끼리 유유상종하면서 기독교 놀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태를 예견하여 디모데후서 4장 3-5절에서 다음과 같이 경계하셨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이제 우리 교회는 이런 참담한 상황 속에서 정신을 바짝 차려서 개혁 신앙의 길을 바르게 가야 하겠습니다. 장로들의 유전, 곧 교회의 전통들과 과감하게 결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수호신처럼 생각하는 저급한 차원의 신앙관을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부성애가 충만한 아버지이심을 믿고, 아버지의 가정에 속한 한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자리를 굳게 지켜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하는 삶의 태도로 올라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자신의 행복에 초점을 맞추는 신앙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는 신앙을 구현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 자리가 여기에 진정으로 성립되어 있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검토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바른 신앙을 추구하는 자들답게 더더욱 자기성찰에 진실해야 하겠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의 동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부터 나타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로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순수한 열심이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의 동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대가 아니고서는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 과연 어떠한 것인가를 다시금 재확인해 보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진정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는가를 다시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이와 같은 은혜의 사랑에 보답하며 사는 길인가를 깊이 숙고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할 때에 우리의 구원은 안전할 것이며, 아울러 무엇이 참 하나님의 말씀이며,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한 인간의 계명인가를 분별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에 침투해 들어온 비성경적인 교회의 전통들을 과감하게 잘라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기복주의 신앙과 상급주의 신앙이 참 신앙을 파괴하는 얼마나 무서운 암적 요소이며, 사단이 우리의 영혼을 호리기 위해서 파고 들어오는 무서운 속임수인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는 것이 안전합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의 근본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냉철하게 점검해 봅시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초점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여전히 자기 자신을 휘황찬란하게 해나가는 여러 가지 수단들 중의 하나 차원에서 하나님을 신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솔직하게 자기를 성찰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당신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교회의 전통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인본주의적인 신앙은 우리의 영혼을 망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신본주의 신앙은 우리의 영혼을 부요하게 하며 영원한 구원의 항구로 우리를 안착시켜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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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유전을 따르는 신앙의 위험성 (4)
(마 15:1-20)
산상수훈 - 장로들의 유전을 지적하신 전형
(지난번 세 차례에 걸쳐서 보았듯이 예수님 당시 구약 종교의 문제는 ‘장로들의 유전’이 ‘하나님의 말씀’ 보다 앞서 있었다는데 있었습니다.) 산상수훈의 예는 장로들의 유전에 의하여 복음이 심각하게 변질된 사례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당시 유대교가 하나님의 계명을 잘못 가르치고 있던 구체적인 사례들을 몇 가지로 예로 드시면서 변질되어버린 계명을 부정하시고 그것이 담고 있는 본래의 바른 의미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 21절 이하에 보면, 공식과도 같은 두 문장이 등장하는데, 곧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구조입니다. 가령 21절에서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하셨는데, 이렇게 “…들었으나”라고 조건절로 말씀하신 것은, 그렇게 들은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배웠겠으나, 그것은 잘못된 가르침이요, 잘못된 배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내 22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시기 위한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산상수훈에는 예수님께서 이런 구조로 말씀하신 것이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지금 본 주제 외에도 ‘간음에 대한 교훈’에서도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잡으셨습니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하심으로, 잘못된 가르침을 드러내시고, 본래의 의미가 어떻다 하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27-30절).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이혼’(31-32절), ‘맹세’(33-37절), ‘복수’(38-42절), ‘사랑’(43-48절) 등의 주제와 관련하여 잘못된 가르침들을 바로잡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렇게 여섯 가지 주제에 대해서 바로잡으신 것은, 당시 장로들의 잘못된 가르침들 중에서 몇 가지만을 대표적으로 시정하신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이후에도 도처에서 장로들의 유전과 부딪히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유전에 근거하여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공격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제자들의 경우를 들어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시비의 내용인즉은, 왜 손을 씻지 아니한 체로 음식을 먹느냐는 것입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그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라는 말씀입니다
(3절). 이때 부모 공경에 대하여 말씀하신 하나님의 계명이 장로들의 유전에 의하여 어떻게 무시되고 있었는가를 예로 드신 후 다시 한번 말씀하시기를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6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당시 장로들의 유전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렸음을 보여줍니다. 즉 여기에 유대교 장로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여 가르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는 자기들 나름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풀어 해석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다른 측면의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와 관련해서는 그것을 정면으로 폐하는 가르침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들 나름대로 무언가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 하나를 세운다고 했지만, 실상은 다른 더 중요한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를 무너뜨렸던 것입니다. 여기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라고 하신 말씀과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가 이렇습니다.
여기서 유전이란, 어떤 집단이나 세대로부터 그 다음 세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즉 일종의 전통입니다. 당시 유대교 안에는 장로들의 유전이 전통이 되어 신앙생활의 척도 노릇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장로들의 유전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성경을 아무나가 손에 쥘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장로들의 유전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높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장로들의 유전이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어쩌다가 한두 가지 나타난 것이 아니고 거의 대부부분이 그러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당시 사람들이 장로들의 유전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섬겼을 때, 이것이 하나님을 섬겼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야 말았던 어이없는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가 갖고 있는 전통이라는 것들은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확증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교회의 전통 혹은 교회의 가르침은 그 자체로서는 맹신할만한 것이 못됩니다. 그것은 반드시 성경의 원리에 부합되어야 하고, 성경의 원리로부터 객관성이 입증되어야 합니다. 전통이 교회를 지지해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교회를 지지할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교회를 가리켜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합니다(딤전 3:15). 교회는 진리에 의하여 성립되어야 하고 진리를 선양해 나가야 합니다. 여기서 진리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사상을 가리킴에 다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 내의 모든 전통은 반드시 성경의 보증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교회가 잘못된 사상에 근거하여 커지게 되고, 주변에 영향을 미치며, 그 모습을 후대로 계승시키게 되면, 이는 여기 장로들의 유전의 경우처럼 도리어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게 하는 어처구니없는 잘못을 범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가르침은 철저하게 성경으로부터 나오고, 성경의 원리로부터 지지를 받으며, 성경 사상에 합치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려면 성경을 부분적이 아닌 전체적으로 배우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성경 어느 한 부분의 가르침은, 그 자체만으로 해석되는 경우도 있겠으나, 반드시 성경 다른 부분들과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가령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할 때, 이 사실만을 강조하는 것은 분명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동시에 ‘하나님은 엄위로
운 분이시다’라고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중간한 진리는 지극히 위험함
인간은 타락한 본성상 근본적으로 전통의 노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다수가 추구하는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마련인데, 이것이 종교적인 영역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서, 어떤 진리를 행한다 할 때에도 그것이 성경적으로 어떻게 정확한 것이냐의 여부를 살피려 하지 아니하고, 단지 많은 사람들이 행하는 것이니까 옳은 것이려니 하는 심정으로 뒤따르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단순히 그릇된 진리를 따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아예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전달자 노릇을 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게 됩니다.
전통을 맹목적으로 좇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진리를 어중간하게 안다는 데서 찾아집니다. 따라서 “어중간한 진리는 거짓보다 더 위험한 것이다”라는 말이 가장 잘 통하는 세계가 있다면 바로 기독교의 세계일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구속의 진리를 앎에 있어서 대충 대충 안다거나 또한 막연하게 아는 정도밖에 되지 아니하면서도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무조건 믿으라'든지, '덮어놓고 믿으라'는 대단히 위험한 말들이 위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이것이 소위 진리를 대충 대충, 막연하게 아는 지도자들에 의해 조장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이 교만하여 더 이상 배우기를 싫어하고, 단지 자기 시대의 타락한 사람들을 좇아 유행적이며 감각적인 지식을 고집스럽게 세워나갑니다. 무언가를 열심히 주장하지만, 도무지 성경의 진리 체계와는 맞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자기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될 경우 하나님의 참 진리를 배척하고 대적하는 결과밖에는 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크게 염려해야 합니다. 부족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종교적인 영역에서 세력을 행사하게 되면, 그 결과는 진리를 대적하는 결과만을 낳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 구성원들 전체에게 악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더욱 위험합니다.
사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유대인들은, 아무 것도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엄청난 죄를 범하게 되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사건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예수님의 행동을 비판했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의 행동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판단하였고, 끝내는 예수님을 사형에로 몰아갔던 것입니다.
유대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이러 저러한 일을 하실 것에 대해서 나름대로 알고 있었습니다. 만일 유대들이 이런 것들을 전혀 몰랐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당시 예수께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유대인들과 논쟁하는데 소비하셨는가를 생각해 보면 놀라울 정도입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그들이 알고 있었으며 추종하고 있었던 것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가 결정적으로 위협을 받는 것은 불신앙인들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나름대로 정당하고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자칭 기독교인들로 말미암아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부분적이며 편파적으로만 진리에 서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자기네가 모든 부분에서 진리에 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틀린 부분이 있고, 부족한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고치려 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이루는 데 있어서 이러한 태도는 자기 자신에게 큰 해가 되는 것은 물론이요 나아가 전체 성도들에게 지극히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교회의 화합을 해치고 분란의 어두운 힘을 산출하게 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크게 훼손하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사람은 자기가 빠져 있는 이 엄청난 자기기만을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어둠의 권세에게 충성하는 자로 차츰 차츰 전락해 나갑니다. 그러다가 끝내는 더 이상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벼랑에까지 나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교회를 대적하는 어둠의 세력인 사단의 권세는 이런 식으로 교만한 자들의 고집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파괴해 나갑니다. 이 점을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정신 바짝 차려서 이들의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사단은 부분적인 지식을 전체적인 지식인양 심어줍니다. 이때 자기 고집이 강한 사람들이 여기에 쉽게 빠져듭니다.
그런데 특히 이런 이들이 나아가 권세를 잡는 가운데 큰 제도권을 형성하게 하고 있을 경우에 있어서는 문제는 더더욱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저들은 자기들이 복음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가운데 정작 참된 복음의 길을 걷는 사람들을 모진 박해 속으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 거짓된 것을 마치 진리인양 오도시키면서 놀라웁게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크게 하고 있다고 여깁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제일 큰 박해를 받았던 상대는 하나님을 전혀 몰랐던 이방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모순되게도 하나님을 안다고 자처하였던 유대인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저들은 부분적으로 알고 있었으며 대충 알고 있었던 그 짧은 진리로써 바울을 거짓 일군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바울은 하나님의 율법을 폐하는 전대미문의 협작꾼이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저들 유대인들이 진리의 복음의 길에 큰 거침돌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진리란 부분적으로만, 그것도 극히 적은 가치를 가지는 부분에서만이 옳을 뿐이고 전체적인 차원에서 평가될 때에는 '다른 복음'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결과를 낳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것이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서 1장 8절에서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까지 말해야 했던 필연성과 정당성이 이에서 찾아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개혁되지 아니하는 이유가 이에 있음
오늘날 그릇된 진리가 전통의 옷을 입고는 참된 진리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의 척도가 성경인 것이 아니라, 자기네가 소유한 세력이 되어버렸습니다. 자기네가 속한 세력이 광대하다는 사실 하나로서 진리인 듯이 행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현대 교회에서는 구속사의 원리에 근거한 교회적이고 공동체적인 복음 전도를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선포하는 구원 역사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단지 이적 추구, 세력권의 인정, 도덕적인 선행, 인간의 행복 추구 등등의 복음과 본질적으로 괴리가 있는 값싼 구원관이 맹위를 떨치게 되었습니다.
참 진리는 그것의 가치와 정당성을 빛으로 드러내게 됩니다. 진리는 동시에 빛인 것입니다. 교회는 자기 존재의의를 찾음에 있어서 이처럼 진리를 기둥과 터로 삼는 데서 찾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디모데전서 3장 15절에서 말하기를,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교회됨은,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될 때에 있는 것입니다.
진리에 성립되고 진리를 선양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빛이 되어 세상 앞에 섭니다. 그래서 교회는 부득불 세상을 향해서는 어두움을 드러내는 빛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요 1:1-5 마 5:14-16 엡 5:8-14). 그런데 이렇게 할 때에 이 빛은 동시에 상대적으로 어두움의 방해를 받게 됩니다. 어두움은 자기네 행위가 빛에 의해 드러나게 된 사실을 참지 못하여 빛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두움의 본능이기도 합니다(요 3:16-21). 이처럼 어두움이 어두움인 것은, 그것이 빛과 반대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요, 빛을 향하여 대항한다는 데서도 찾아지는 것입니다.
현재 한국 교회가 처해 있는 현실이 바로 이렇습니다. 진리가 본래의 생명력을 드러내려 하니까, 상대적으로 큰 어두움의 세력이 이를 반대하여 핍박해 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것은 다수라고 하는 제도권을 형성한 가운데 참된 진리를 무섭게 배척하는 것입니다. 이 핍박은 결코 중단됨이 없이 진행이 되어집니다.
따라서 현상적인 의미에서 보건대 현세에서의 개혁은 사실상 성공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개혁 운동의 물줄기가 끊어지지 아니하고 그 전통을 이어나가긴 하지만, 그러나 역사 속에서의 승리는 영원히 요원한 것입니다. 오직 그 궁극적인 승리는 주께서 재림하셔서 모든 적대 세력을 심판하시는 때에 이루어질 것이어서, 곧 종말론적으로 성취될 것입니다.
개혁에 대한 열망은 거듭난 생명의 생명력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 시대의 남은 자들이 이렇게 힘들게 개혁 신앙을 추구해 나가는 것은, 거듭난 생명력이 구현해 나가는 본성인 까닭에 그런 것이지, 그렇게 하는 것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겠다거나, 혹은 타락한 인간에게서 나오는 어떤 영웅주의적인 욕구에 사로잡힌 때문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늘날 개혁 운동이 남에게 영향을 미치기는 고사하고 자체적으로도 자꾸만 그 생명력을 잃어 가는 것은, 개혁 운동을 자신의 의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삼고자 하는 미혹에 빠져드는 데서 초래되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의 남은 자들은 이런 미혹을 부단히 경계하여야 합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역사 속에서의 개혁 운동은 사실상 영원히 실패하기만 할 것입니다. 첫째로는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에 처해져야 한다는 원칙이 도출하는 바, 세상은 거대한 어두움 그 자체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두움의 세력이 실질적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는 곳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두 번째로는 소위 개혁 신앙을 추구해 나가는 바, 주동하는 지도자들의 그릇된 종교적 영웅주의 자세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처럼 어떤 방식으로든지 끝내는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 왜 우리가 이렇게 개혁 신앙을 생명까지 걸고서 추구해 나가느냐 하면, 그것은 다만 이것이 우리의 거듭난 자로서의 생명력 그 자체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거듭난 자로서의 생명력은 본능적으로 어두움과 짝하지 않게끔 되어 있는 것이요, 바로 이것이 거듭난 생명임을 자증하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사실상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통치가 역사되고 있는 사실을 보여주는 실제적인 증거도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를 무론하고 참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의 거듭난 본성적 생명의 특성상 이러한 개혁 신앙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밖으로는 소수의 남은 자에 속하는 ‘개혁자’라고 하는 모습으로 나타났고, 안으로는 구원받은 생명을 확인하고 누리고 유지하는 것으로서의 생명의 본성을 발휘하는 것으로서 나타났던 것입니다. 따라서 개혁의 행위와 구원받은 생명의 확인 행위는 동일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17장에서 사도 바울 같은 분이 아덴에 갔을 때, 그곳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는 열심이 다른 곳보다 한층 더하여, 심지어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이름을 써놓고서까지 미신적인 숭배를 하는 것을 보게 된 사실이 있었습니다. 16절을 보면 이 광경을 보는 바울의 마음에 분한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한 사람의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사람은 마땅히 한분 하나님만을 경배해야 된다고 하는 사실을 생명처럼 여기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사람들이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떠나서 사신 우상을 섬기는 것을 볼 때에, 바울의 마음에 거룩한 분노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러한 생명력은 사실 이방 종교를 대상으로 나타났다기 보다는, 이미 여호와를 신앙한다고 하는 유대교를 대상으로 하여 더욱 활기차게 전개되었습니다. 바울의 복음증거 대상은 언제나 일차적으로 기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의도적으로 세계 각처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찾아갔고, 그래서 의도적으로 저희의 종교의 중심적 기반 역할을 하였던 유대교 회당에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은 유대교라고 하는 거대한 제도권을 대상으로 진리 운동을 펼쳤으며, 이것을 위하여 그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비록 후기 시대인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건대 바울이 유명한 기독교의 영웅으로 평가되고 있으나, 그러나 당시의 역사 속에서는 바울은 다만 한 사람의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이 살아나가야 할 삶에 도리에 기본적으로 충실했을 뿐이었습니다. 바울은 무슨 위대한 특별한 신앙인으로서의 각성을 가졌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세우신 환경 속에서 묵묵히 자기의 사명에 최선을 다하면서 살았던 뭇 성도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개혁파 교회가 사도적 정통성에 입각하여 그들의 전통을 계승하는 개혁 신앙을 추구해 나가는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 일은 우리의 거듭난 본성이 자연스럽게 우리를 자극하는 데서 되어지는 본능일 뿐입니다. 다만 그렇지 아니한 제도권의 입장에서 볼 때 괜히 우리를 별스럽게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명 활동을 통하여 본의 아니게 자기네 어두움의 일들이 드러나게 되자, 필연적으로 적대시하며 대적해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입장에서 제도권을 볼 때에, 우리 역시 죄의 권세 아래 있었던 때에는 저들과 같은 처지에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서, 더욱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지만 제도권 사람들은 고집스럽게도 우리를 핍박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불가불 진리의 싸움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때 어두움의 세력인 제도권이 진리를 대적함에 있어서 근거로 삼는 것이 소위 말하는 자기네 전통인 것이요, 이 전통이란 것에 의지하여 무섭게도 진리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지금 유대인들도 순전히 이러한 장로들의 유전으로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였습니다. 이는 사실은 예수님을 비난한 것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교회도 많은 그릇된 전통에 사로잡혀 있음
이와 같은 현상은 이미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이런 일은 구약의 역사 속에서 비일비재하게 나타났던 일들의 반복인 것이요, 지금 예수님과 논쟁 관계에 있었던 예루살렘으로부터 올라온 종교 지도자들의 괴악한 행위를 통해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은 놀랍게도 자기네 전통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신실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현대 교회는 개혁할 것이 많이 있게 되었습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오늘날 교회들이 성도들에게 십일조를 강제로 내도록 강요하는 일이 그러합니다. 오늘날 십일조는 성경에 대한 구속사적 안목이 없는 일부 교회들에 의해서 거의 생명을 걸다시피 하면서까지 성도들에게 강제적으로 요구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말라기 3장 10절과 같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 말씀을 항구적인 원리로 작용하는 신약의 원리인양 직접적으로 대입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시험해보도록 하는 미끼로까지 제시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에 따라 성도들은 축복을 보상받기 위한 기복심리에 의하여 십일조를 바치거나 혹은 그렇게 하지 아니할 경우에 찾아올지도 모르는 하나님의 징계를 두려워하여 선뜻 십일조를 내고 있습니다. 나아가 이 십일조만 잘 내면 그것으로 신앙의 의무를 완수한 것으로 여깁니다. 심지어 교회 내에서의 위치도 십일조의 양에 따라서 결정이 되어집니다.
그러나 이 십일조는 그 제사법과 관련된 의식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신약시대에 있어서는 마땅히 폐지되어야 합니다. 구약시대의 십일조 규례는 레위인들의 생계와 직결되어 있고, 레위인들은 성전의 제사 제도를 보존하는 일을 전적으로 전담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제사 제도는 무용지물이 되었고, 따라서 십일조를 가져야 할 레위인들이나 제사장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십일조 제도가 아직도 유지되어야 한다면, 구약의 제사 제도 또한 지금도 시행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면, 교회의 목사를 구약적 제사장화하여 가운과 같은 종교적인 복장으로 치장하는 가운데 마치 자신이 특별한 신분으로 부여받은 제사장인양 과시하는 어줍잖은 자세도 신속히 벗어버려야 할 못된 전통에 속합니다. 궂이 가운을 착용하려면, 구약의 제사장들이 착용하던 제사장복을 입어야 그나마 구약을 보존하려는 열심일 것입니다. 신약시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백성들 모두가 다 한결 같이 사실상의 제사장인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위해 스스로의 몸으로 영원한 속죄의 제사를 드리신 영원하신 대제사장이십니다. ‘만인 제사장’이라고 하는 이 원리는 종교개혁의 중요한 이슈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어리석게도 이러한 가운을 착용하게끔 하는 미혹거리가 어디에서 찾아지는가 하면, 바로 자신을 권위자로 드러내 보이겠다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일반 성도들보다 특별한 위치에 있는 권위자인 것을 과시해 보려는 데서 그렇게 가운을 착용하곤 합니다. 그러나 사실 기독교 안에서의 참된 권위는 봉사의 원리에서 찾아지는 것이지,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높이는 특권의식으로 말미암는 교만에서 찾아지지 않는 것입니다(막 10:20-28).
왜곡된 은사론도 신속히 개혁되어야 할 종교적 전통의 한 부류에 속합니다. 즉 성령의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이라면 성령께서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에게 구원의 보증의 영으로서 내재하시기 마련입니다. 은사주의 운동은 이러한 원리를 오도합니다. 힘쓰고 애써서 간절히 부르짖고 간구하는 힘의 정도에 비례하여 성령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은사운동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신학적인 허점과 빈약성이 이미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런 운동이 전통적으로 지지되어 나왔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계속 주장해 나갑니다. 이런 사상은 심지어 성령의 은사가 능력 있는 종에 의해서 성도들에게 베풀어질 수도 있다는 식으로 잘못 가르치는 행위로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날 청중들의 저급한 욕구를 이용하고 편승하는 가운데 자기들을 신령한 사람인 듯이 보이고 싶어하는 일부 광신적 지도자들에 의하여 이 운동이 역사 속에서 쉽게 근절되지는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집회에 눈을 돌려보면 온통 무질서와 광란이 난무하는 것을 필히 보게 됩니다. 저급한 동물적인 격동과도 같은 혼란이 거룩한 열심과 경건으로 위장된 가운데 그 광란의 정도를 더해만 갑니다. 이런 전통은 하루 속히 벗어버려야 할 현대 교회의 악습입니다.
오늘날 지역 교회들 대다수가 저마다 추구하게 되는 ‘성전 건축’에 대한 욕구 역시 비성경적인 무서운 인간들의 전통입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누누이 말했듯이 구속사의 원리상 신약시대에는 더 이상 건물로서의 성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구약시대의 성전과 그것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던 일련의 각종 희생제들과 절기들은 장차 오실 어린양을 통하여 성취되어질 구속사역을 모형적으로 계시하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습니다(요 2:18-22). 예수께서 그리스도로 오심으로 말미암아 제사 제도가 폐지되면 성전도 동시적으로 폐지되고, 성전이 폐지되면 제사 제도도 따라서 폐지되게끔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직접적인 원인은 성전을 헐어버리겠다던 그분의 가르침에 연유합니다. 주님은 목숨을 걸고 유형적 건물로의 성전을 반대하셨던 것입니다.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옛 성전과 그에 부착된 모든 것은 폐지되야 마땅했기 때문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성도들 그 자신이 성전인 것이요, 더 이상 구약적 의미에서의 물리적 건물로서의 성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원리를 알지 못하는 많은 교회들이 저마다 ‘성전 건축’이라고 하는 거짓된 목표를 성취하는 일에 거의 생명을 바치다시피 하는 것을 보면, 무지한 것을 탓하기 이전에 아예 측은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면 반대로 생각해서, 그처럼 성전은 건축하면서 그것의 중요한 용도인 바, 생축으로 제사 드리는 일과 절기를 지키는 일 등등은 하지 않는 것 또한 기이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하늘의 하늘인들 하나님을 용납치 못하겠거늘, 하물며 그까짓 벽돌 몇 장 쌓아서 만든 몇십, 혹은 몇백 평의 공간이 그리하겠습니까? 공동체의 모임을 위한 공간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그릇되이 인식된 성전 개념 때문에 그야말로 예배당을 건축하는 일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입니다. 통상 예배당을 짖지 못한 목사와 성도는 무시를 당하고 있는 풍토 자체가 이미 한국 교회가 빠져 있는 전통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성전 건축’의 어리석음을 거듭거듭 강조하는가 하면, 이런 현상이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고질병이요, 그렇게도 잘못된 것이라고 외치고 또 외쳐도 도무지 고쳐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타 한국 교회가 속히 폐지해야 할 전통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령 구약 성경에서 나타난 안식년 제도들을 목회자의 장기 휴가의 근거로 이용하는 잘못된 전통도 폐지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목회자의 휴식을 싫어하시는 분이 아니시므로 휴식과 교육이 필요하다면 정당한 이유를 들어 합법적으로 쉬면 되는 것이지, 엉뚱하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되이 해석하여 자신의 필요를 채우려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목회자의 자기 개발을 위한 정당한 휴식의 기회를 가지기 위해서도 교회의 본질적 특성이랄 수 있는 공동체성 회복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입니다. 공동체성의 결여로 인하여 목사는 부목사나 전도사를 믿지 못하기에 스스로의 탈진을 보충할 길이 없고, 이를 개선하자니 교회를 철저히 조직화하여 장기 휴가에 대비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해서 휴가를 떠나도 여전히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영웅주의의 발로인 밖에 아무 것도 아닌 ‘민족복음화’라고 하는 비성경적 환상의 그릇된 전통도 마땅히 폐지되어야 합니다. 요즈음도 많은 부흥사들이 ‘세계 복음화’를 공공연하게 외치는 가운데 그 전 단계로서의 민족복음화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인 복음전도가 바른 구속사적 안목을 가진 교회 공동체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교회의 성성(聖性)은 무너지고 맙니다.
특별히 소위 말하는 ‘일등신자’를 평가하는 일에 있어서도 그 가치 기준의 대부분이 그들이 내는 헌금의 액수에만 치중하여, 그렇게 규정하고 있는 데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헌금을 많이 냈다는 외형적인 사실 그 자체만을 중시합니다. 정작 그보다 더 중요한 척도인, ‘의와 인과 신’에 대한 관점은 전혀 살펴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얼마만큼이나 장성해 가는가 하는 아예 안중에도 없습니다. 다만 헌금만 많이 하면 그것으로 다른 모든 것을 평가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형편을 보면, 특별히 장로의 직분을 감당하는 사람들의 경우 하나의 눈에 띄는 공통점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재산을 많이 가졌다는 데 있습니다. 즉 장로의 직분하면 일차적으로 그가 얼마만큼이나 많은 재산을 가졌고, 그래서 헌금을 얼마나 많이 하는 사람이냐 하는 사실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교회마다 장로의 직무에 취임하는 조건이 헌금하는 액수의 크기와 맞물려 있습니다. 헌금을 많이 낸다고 장로의 직분에 취임시키고, 또 그처럼 장로의 직분에 발탁되었다고 해서 ‘감사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거액의 헌금을 합니다. 이런 일이 보편 만성화되다 보니, 이제는 아예 얼마만큼의 헌금을 낼 것이냐의 사전 조건과 조정하에 장로의 직에 선출시키는 바, 소위 말하는 성직매매의 악습이 교회의 전통으로 자리잡아 버린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일이 노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거의 한결 같이 이런 내용을 떠나지 않는 것을 공통적으로 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어느 한 교회만의 일이 아니라, 대다수 교회가 지향하는 보편적 현상이라는 것과, 나아가 이런 일들이 이미 과거 옛적부터 행해오던 전통이라는 명분 하에 당연한 듯이 행세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행위는 하나님의 계명을 폐품으로 만들어버리는 무서운 타락의 결과를 낼뿐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성경 어디에서도 장로의 직분을 감당하는 조건이 그런 식의 헌금을 많이 하는 부에 달려 있다고는 전혀 말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가? 기독교적 종교단체인가?
이러한 개혁되어야 할 많은 내용들이 오늘날 ‘장로들의 유전’이요, ‘교단의 전통’이라고 하는 옷을 입고 나타나고 있으며, 바로 이 사실에 근거하여 참 진리가 무섭게 배척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런 여러 가지 그릇된 신앙적 내용들이 옛적부터 전통적으로 행해오던 것이라고 하는 단순한 사실 하나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배후에 가진 ‘기득권 수호의 욕구’에 의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을 변질시켜서 인간의 종교심이 구축해 나가는 바, ‘기독교적 종교 단체’로의 전락을 구현해 내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가 이 무서운 자기 기만의 함정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교는 진리의 종교를 추구해 나감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충 대충 생각하였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자기들의 천박한 욕구를 가미시킴으로 말미암아 사실상 복음을 변개시켜 놓았던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일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고, 한 가지 한 가지씩 양보하고 변개시키는 바, 역사의 옷을 입고 서서히 그렇게 변질되어 나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육체적 심리를 측은히 여기셨고, 생명의 길로 바르게 인도하시고자 본래의 진리를 밝히 드러내셨지만, 이미 전통에 깊이 물들어 있었던 유대교였던지라 배척으로 일관하기만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배후에는 자기들이 쌓아올린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천박한 욕구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지, 하나님의 진리에 의하여 교정받으려는 신실한 마음이 발동되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 사실을 책망하여 말씀하시기를,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눅 5:39)고 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금식하는 문제와 관련한 예수님의 생명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순전히 옛 것이 좋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즉 당시 유대인들은 새로운 것에로의 변화를 두려워하였고 싫어하였습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참된 평화가 오기 위해서는 거짓된 평화는 깨여져야만 하며, 이것이 없이는 결코 빛과 생명의 자리에 들어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처럼 그릇된 진리가 쉽게 전통을 형성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러한 가르침들이 한결 같이 인간에게 있는 자기 영광 추구의 심리를 만족시켜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기복신앙의 경우를 보면 쉽게 이해되며, 또한 상급신앙의 경우 역시 그러합니다. 이들 두 신앙의 부류는 그 내용과 목적에 있어서 전혀 인간 중심적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하여 완성된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이고, 이때 하나님의 나라 개념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개념은 하나님의 영광 개념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무시되는 것과 인간의 영광이 부각되는 것은 피차 반비례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이런 왜곡된 신앙관들은 한결 같이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켜준다는 데 그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대중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게 되고, 부지불식간에 다수를 형성하게 되며, 결국 전통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리고는 다시금 적절한 수준으로 변질되어 집니다. 이런 일이 역사 속에서 되풀이되면서 무서운 타락의 결과를 내는 것입니다. 작금의 한국 교회가 배교에 떨어진 것이 이런 식으로 유대교가 걸었던 점진적 타락의 과정을 똑같이 되풀이한데서 초래된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보여주고 있는 열심 있는 신앙의 내용이란 것이 사실상 기복신앙과 상급신앙에 의해 부추겨진 ‘인간의 영광 추구 심리’인 밖에는 아무 것도 아님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신앙관은, 복음이란 사실상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한다고 하는 근본 원리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있는 것이지, 인간의 어떤 욕구를 만족시키는 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다고 여겨지는 즉시 그것은 이미 복음에서 이탈된 것입니다.
전통은 정통으로부터 출발된 것이어야 함
교회가 가진 전통은 단순히 전통 그 자체만으로는 결코 옳지 못한 것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얼마만큼 성경적 진리에 충실한 것이냐의 사실에 있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기나긴 세월 속에서 지켜져 나오는 교회의 전통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성경적 진리에 기반을 두지 않는 것인 한에는, 사실상 신앙 생활을 대적하는 하나의 암적 요소인 밖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단이 일하는 방식이 이렇습니다. 사단은 교회에 전통을 심습니다.
정통적(正統的)이지 못한 전통(傳統) 그 자체는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무서운 결과만을 낳게 됩니다. 지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성경의 정통이 아닌 오직 그들의 전통에 의거하여 주님께 시비를 걸었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는 무서운 죄의 결과를 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저들의 그릇된 행위를 그냥 책망하시는 데서 그치지 아니하시고 3절과 6절에서,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는도다”라고 두 번씩이나 거듭 강조하시는 것을 통하여, 저희가 단순히 현실적으로 예수님을 대적하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는 무서운 죄를 범하고 있는 사실을 분명히 지적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저마다 개혁파 교회의 전통을 계승한다고 주장합니다. 신학적으로 개혁파 라는 말을 쓸 때에, 이는 과거 중세기에 타락한 로마 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로마 교회가 아닌 경우, 일반적으로 다 개혁파 교회의 노선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정작 개혁파 교회의 신앙을 계승하는 교회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실 개혁파 교회라고 할 때에는 기본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교회가 믿는 신앙의 도리로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잠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 개혁 당시 영국의 개혁자들이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모여서 교회들이 무엇을 믿고, 어떻게 교회를 이루어야 할 것인가 하는 신앙 도리를 공적으로 고백하고 선언해야 할 입장에 서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신앙고백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당시 개혁자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와의 차이점을 분명히 선언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1643년 7월에 회의를 소집하여 약 5년간에 걸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모여 신앙고백서가 작성되게 됩니다.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당시에 뛰어난 신학성과 훌륭한 경건성을 겸한 위대한 신학자들이었습니다.
마침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요리 문답서들이 작성되었는데, 여기에는 개혁파 교회가 믿는 신앙의 내용이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작성한 사람들은 다 칼빈의 신학과 그의 교리를 전수하고 그 사상들을 받들어 나온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바로 앞 시대 개혁자들이 만들어 놓은 여러 신앙고백서를 참고하고 보완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에는 개혁파 교회가 추구하는 신앙의 내용이 충분하고 명확하게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혁파 교회의 성도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나 요리 문답서들을 마음을 기울여서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혁파 교회의 정신은 교회는 철저하게 성경에 근거해서 교회의 내용이나 행진의 방향을 검토하고 거기에 맞추어 나가는데 있습니다. 개혁파 교회는 교리와 신학으로는 사도신경과 A. D. 325년에 작성된 니케아 신조 - 예수님의 기독론, 곧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에 대한 문제로 아리우스의 도전을 받게 되었을 때, 그의 주장을 배격하고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한 신조 - 와 칼케돈 신조를 비롯한 일련의 신조들과 이후 중세기에 개혁자들의 신학과 신앙의 영향을 받아서 계속 보완이 되고 만들어져서 나온 벨직 신앙고백서(1561년),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1563년), 도르트 신조(1618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7년) 등을 계승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통상 개혁주의 입장에 서 있는 교회라고 말한다면, 이러한 전통적인 신조들과 요리 문답서들을 신앙의 원리로 채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이러한 개혁주의 입장에서 세워졌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죤 낙스가 종교개혁을 해서 칼빈이 가르친 신앙의 도리를 가르치고, 그것을 고백으로 교회를 이루면서 교회 정치체제도 칼빈이 알려준 바에 따라 했습니다. 이래서 최초의 장로교회가 스코틀랜드에서 형성되었고, 명칭도 그러했습니다. 그 영향을 받아서 미국의 장로교회가 생기고, 미국의 선교사가 한국에 와서 한국 장로교회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장로교회는 처음부터 개혁주의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한 예수교 장로회 헌법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 문답서를 신앙의 도리로 채택한다고 선언한 데서 분명하게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장로교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개혁주의 신앙에서 이탈하는 현상, 곧 개혁주의를 포기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처지에서 일부에서는 개혁파 교회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것의 전통을 따라 정통성을 회복하려고 몸부림치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고, 매우 다행스런 일인 것입니다. 물론 이런 개혁주의를 주장하고 나서는 것은 어떤 새로운 분파주의를 만들자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역사적으로 개혁파 교회가 추구해 나온 그 신앙고백에 따라서 교회를 이루려고 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런 것일 뿐이지, 별 다른 교회를 새롭게 이루고 무슨 새로운 파벌을 만들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교회의 발전과 행진이라는 것은 같은 의식과 생각을 가지고 발전해 나오는 하나의 계통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역사적 신앙을 동일하게 고백하고, 이것을 동일하게 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회복이 필요함
현대 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신앙을 실질로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가질 수밖에 없는 관심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단순히 기독교적인 종교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역사적 교회의 신앙고백을 따르는 것에 대해서 무슨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자기 생각대로 밀고 나가서 우선 부흥하고 성공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기에 자기들 마음대로 필요에 따라 이런 저런 사람의 계명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이처럼 사람의 계명이 득세하는 헛된 경배가 난무하는 곳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곳에서는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 5:42)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게 되었던 것은 저희가 성경을 열심히 탐구한다고 하면서도 바로 그 성경이 전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당신께 대한 영접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요 5:39-40). 예수님은 이를 보시고 그 원인을 생각하시게 되었는데, 그것은 근본적으로 저희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임을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는 일을 간단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교회를 이룸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데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복음이 갖는 중요한 특성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은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나가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사실로부터 성립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찾아오신 사실이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의 사역을 가리키는 것인데, 성경은 이 중요한 원리에 대하여 ‘은혜’라는 개념으로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과연 자신을 사랑하심에 있어서 어떠한 방식으로 사랑하셨는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는 마음을 항상 간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사랑입니까? 그것은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하신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고 항상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에 복음의 고귀한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자신이 받은 구원의 은혜를 등한히 여기지 않는 지혜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 중심에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압도되어진 자세를 항상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할 때에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히 여기는 심정이 생성되게 되고, 은혜를 주신 하나님 그분 자신을 사랑하고, 흠모하며, 연모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거나 또는 섬기게 되면, 비로소 그가 있는 곳곳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를 내는 결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중심을 합당이 여기시고 기쁨으로 받으시니, 곧 항상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가운데 기쁨을 얻으십니다(살전 2:4).
만일 그렇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나서게 되면, 이 사람은 필연적으로 이와 같은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되어 헛된 경배의 미혹 속으로 떨어지게끔 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 외모로 보건대 열심의 모습이 있기는 분명히 있는데 그러나 헛된 열심이요 무익한 열심일 뿐입니다. 진실로 단언하건대 외형적인 열심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마음 중심에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히 여기는 데서 되어지는 바, 하나님을 사랑하는 소중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이런 마음을 갖춤이 없이 그저 자기 생각과 힘과 꾀를 적당히 내서, 그럴듯한 종교적인 의식을 이루어가는 데서 되어지는 일체의 것들은 결코 받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이런 식의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해 나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목사들은 목사들대로 자기의 힘을 의지하여 적당히 신학교에 다니면서 배운 그 머리만의 지식에 만족합니다. 성도들은 성도들대로 백 가지를 배우나 한 가지조차도 제대로 준수하지 않는 생활에 익숙해져 버림으로 말미암아 면역이 되어버린 위선에 깊이 빠져 있는지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어 나간답시고, 거창하게 떠들고 그 목소리를 크고 요란하게 냅니다. 그러나 그 근본적인 모순상 결국 사람의 계명만을 추종하는 결과를 낼뿐이고, 나아가 전통이라는 이름을 빌어 또 다른 새로운 사람의 계명을 만들어내기까지 하는 비참한 처지에로 전락할 뿐인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가 운영되는 것을 볼라치면, 그 권위가 그리스도도 아니고, 성경 말씀도 아닙니다. 그저 그때 그때의 형편을 따라 적당히 생각해내는 자기들의 종교적인 마음, 바로 그것에 의해서 교회가 운영되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이 도처에서 증명해 주듯이 신앙 생활에 있어서 자기의 생각을 주장하고, 자기의 방식을 추구해 나가는 등등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처럼 결정적으로 위험하고도 잘못을 자초하는 것도 없는 법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지금까지 교회에 들어와 있는 비성경적인 전통들이 어떠한 것들인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지 받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오늘날 한국 교회의 상황이 아주 열악하므로 더욱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온갖 비성경적인 교회의 전통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는 것들이, 마치 생명처럼 지켜야 할 교회의 전통인양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의 신앙생활은 유리방황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수준은 육신에 속한 자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로 머물러 있다는 것은 주님께 참으로 죄송한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교회의 전통들을 하나하나 일일이 성경적으로 점검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성경적이지 아니한 것은 과감하게 폐지하고, 성경적인 것은 더더욱 힘써서 밀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은 지혜가 될 것이요, 우리의 구원을 보다 풍성하게 증대시켜 나가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도우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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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한 에스라 성서 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장기용 (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