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 湲 來 /순천대 사학과 교수 전라도 해안지방 각처에서 일어나 전라좌수영에 자원 종군했던 해상의병의 활동은 대체로 두 가지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하나는 전방에서 직접 실전에 참여하는 전투활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투를 지원하는 병참활동이었다. 전투활동에 있어서는 수군 내부에 편성되어 직접 해전에 참가한 예가 많았지만, 혹은 일본군의 수륙병진이나 상륙전에 대비하여 해안지방의 방어임무를 맡은 예도 있었다. 후방에서 이루어진 각종 병참활동은 주로 군량이나 군기류를 지원․공급하는 역할이었지만, 전직관리나 無官士人들 중에는 수군지휘부의 측근에서 갖가지 군무를 보좌하거나 통신연락의 업무를 행한 예도 있었다. 해상전투에 참전하여 거둔 의병의 전과는 이순신이 남긴 승전기록을 검토해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최초로 벌어진 옥포해전에서 順天代将이란 仮官으로 참전한 前奉事 兪摂․及第 崔大成․裴応禄․李彦良․전봉사 金孝誠․李渫 및 防踏流配人 前僉使 李応華․興陽流配人 전봉사 朱夢竜 등이 모두 각각 적선을 격파하거나 불태웠다는 기록이 뚜렷하다. 이러한 예는 차후의 해전에서도 역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한산도해전에서 보더라도 급제 李奇男과 朴以良․전만호 尹思恭과 宋応珉․전현감 崔天宝․전봉사 崔道伝 등이 적선을 捕獲하고 많은 적병을 참획함으로써 큰 전공을 세웠다고 하였다. 특히 자력으로 전선을 마련하여 노예와 목동들을 거느리고 부산포해전에 자원 출전했던 순천감목관 趙玎은 적병을 다수 사살하였을 뿐 아니라 적의 군수물을 다량 노획하여 이순신이 그의 전공을 가장 높이 평가하였다. 또 태인출신의 校生이었던 宋汝悰도 낙안군수의 待変軍官으로 출전하여 옥포해전 이후 부산포해전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참전함으로써 충의에 감분해 싸운 그의 군공이 1등에 꼽혔을 만큼 의병의 활약은 컸다.4) 아울러 三恵와 義能이 이끈 의승군의 활약과 그들의 전과도 작지 않았다. 그 한예로서 1593년 2월에 있은 웅천상륙작전에서, “의승병들은 창검을 휘두르며 혹은 활로써, 혹은 화포로써 종일 力戦하여 무수한 적병을 사살하였다”고5) 한 이순신의 장계가 바로 그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이들 의승군의 활동은 임진왜란중 계속된 것으로 보이며, 전라좌수영에서 가까운 興国寺를 駐鎮寺로 삼아 3백명의 상비군을 갖추고 있었다.6) 전라도 해상의병의 또 하나의 임무였던 해안지역 방어활동은 주로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통하는 요해처를 중심으로 한 매복작전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天険의 요충을 이룬 광양의 銭灘․豆恥와 구례의 陶灘․石柱는 의병과 의승군이 집중 배치되어 복병을 통한 의병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이었다. 광양 전탄에는 란초부터 순천출신의 前訓練奉事 鄭思竣이 起復従軍한 뒤 그곳의 복병장으로 활약하면서 매복전술과 奇兵策을 구사하는 등 근처에 적이 접근할 수 없게 하였다. 두치진은 광양출신 의병장 姜姫悦과 의승장 性輝 등이 파수하였으며, 구례 도탄에는 구례출신의 의병장 방처인이, 석주관에는 의승장 信海가 각각 현지의 방어임무를 담당하였다. 의병의 이와 같은 활동은 수군의 해상전투를 측면지원하는 동시에 영호남의 접경지대인 섬진강하류의 길목을 차단, 수륙 양면에서 적의 호남침공을 저지할 수 있었다는 데에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한편 직접적인 전투활동 이외에 군량 군기류의 군수물을 공급․지원하는 등 후방에서 이루어진 의병활동도 활발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군량지원이었지만 櫓 제작용 목재나 목화․철․生麻에 이르기까지 각종 군수품을 조달하였으며, 특히 군량공급을 위한 노력은 종전기까지 계속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전라좌수영 관내에서 이루어진 募糧活動은 주로 전라좌수군을 지원한 것이었지만 그것이 아닌 예도 있었다. 란초에 순천에서 전 훈련봉사 정사준과 李義男, 그리고 校生 정빈 등이 주동하여 義穀을 모은 다음 이것을 직접 선박에 실어가 의주 행재소에 바친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7) 정사준은 이미 언급한 대로 광양 전탄에서 복병장으로 활약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또 일본군의 조총을 능가하는 새로운 화기를 제작, 이것을 이순신이 널리 보급함으로써 수군의 화력증진에도 공헌하였던 것이다. 그가 낙안출신의 冶匠 李必従․순천의 私奴 安成 등과 함께 正鉄을 단련하여 만든 신무기는 수군 各鎮에 뿐만 아니라 권율 휘하의 육상군에게도 보급되었을 만큼 그 제조법과 위력이 뛰어났다고 한다.8) 이렇게 본 해상의병의 활동과 역할에 대하여 수군통제사 이순신은 그의 장계에서 이렇게 평가하였다.
수군부대에 자원해온 의병장 순천교생 성응지와 의승장 수인·의능 등은 이번 난리통에 자신들의 편안함을 돌보지 않고 의기를 격발하여 군사를 모아 각기 수백여명 씩을 인솔해와 나라의 수치를 씻으려 함이 참으로 가상하다. 해상에 진친 뒤 군량을 自備하여 두루 공급하면서 어렵게 이어 댄 노고의 정상은 관군보다 배나 더함이 있었는데 아직도 그 수고로움을 꺼리지 않고 더욱 힘쓰고 있다. 지난날 전투에서 적을 침에 있어서도 뚜렷한 전공을 남겼으며 여전히 나라를 위한 충의심에 변함이 없으니 극히 가상할 일이다. 그러므로 성응지와 수인․의능 등은 조정이 특별히 표창하여 뒷사람들로 하여금 격발케 하여야 한다. 그리고 또 순천에 거주하는 전만호 李元男이 의병을 모집하여 거느리고 전선을 타고 와서 수군부대에 소속하기를 청함으로 곧 바로 장수로 배정시켜 적을 토벌하게 하였다.9) 이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2년 뒤에 順天校生 출신의 의병장 成応祉와 의승장 守仁‧義能 등의 활동에 한정하여 그들의 포상을 요청한 글 가운데 일부이므로 해상의병 전체에 대한 평가는 아니다. 그러나 해전에 자원하여 군량을 自備하면서 떨친 義気와 전공이 관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는 지적만으로도 조선수군이 초기해전에서 제해권을 장악한 데에 의병의 역할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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