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어머니의 열가지 은혜
출가후 20년만에 먹은 어머니의 밥
◇ 마가스님과 어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불효자'
저는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부모은중경』의 구절을 곧잘 들려줍니다. 예를 들면 이런 내용입니다.
“어머니의 은혜는 다음 열 가지로 나누어 들 수 있다.
첫째, 아이를 잉태하여 열 달 동안 온 정성을 기울여 보호해준 은혜.
둘째, 낳을 때 고통을 감내한 은혜.
셋째, 자식을 낳고 모든 근심을 잊는 은혜.
넷째, 입에 쓴 음식은 삼키고 단 음식은 먹여 주는 은혜.
다섯째, 마른자리 골라 아이 눕히고 자신은 젖은 자리에 눕는 은혜.
여섯째, 때맞추어 젖을 먹여 길러준 은혜.
일곱째, 똥오줌 가려 더러운 것을 빨아주는 은혜.
여덟째, 자식이 먼 길을 떠나면 생각하고 염려하는 은혜.
아홉째, 자식을 위해 나쁜 일을 하는 은혜.
열째, 늙어 죽을 때까지 자식을 사랑해준 은혜.”
<내 마음 바로 보기> 수업을 하면서 저는 사회의 근간인 가족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사춘기 이후 부모님과 대화가 단절된 학생이 무척이나 많았습니다. 하여 저는 학생들에게 부모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게 했습니다.
편지 내용은 가지각색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카리스마가 느껴진다.”라고 쓰는 학생도 있었고, 어머니에게 “아버지와 연애할 때의 감수성을 지니고 있다.”라고 쓰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학생들의 편지 내용을 보고서 저는 세상은 마음가짐에 따라 달리 보임을 또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에게서 카리스마가 느껴진다고 쓴 학생의 예를 봅시다.
만약 그 학생이 부정적인 시각에서 아버지를 봤다면 평가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권위적이라느니, 가부장적이라느니, 마초라느니 하는 말로 아버지를 비난했을 테니까요.
저는 부모님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에게 부모님의 답장을 받아오라고 했으니까요. 단,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부모가 자녀를 칭찬하는 내용이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습니다.
학부형들이 보내온 답장은 자녀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많은 학생과 학부형이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그간 마음속에만 두었던 말을 건넬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저는 부모님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도 기회가 된다면 부모님 은혜를 갚고 싶었습니다.
자비 명상 템플스테이 지도와 <내 마음 바로 보기> 수업 이후 이런저런 강연 요청이 잇따랐던 터라 부처님께 감사하는 마음,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하게 된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은 어느 정도 갚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만큼은 갚을 길이 막연했습니다. 하여 저는 부모님 은혜에 보답할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 길은 부처님 가르침에 입각해 온 가족이 화해를 도모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속으로 이렇게 되뇌 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아래서 깨달은 후 수행 공동체를 꾸리셨다. 그 수행 공동체에는 부처님의 아내인 야소다라도, 부처님의 아들인 라훌라도, 부처님의 유모 역할을 한 이모인 마하파자 파티도, 사촌동생인 아난다도 포함됐다. 부처님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수행의 목적은 개인의 깨달음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그러던 중 출가 후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고향 집을 찾는 일이 생겼습니다. 어머니가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가만있을 수 없었습니다. 고향 집으로 가는 차에 앉으니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 하는 출가자임에도 불구하고 저도 모르게 하염없이 눈물이 나더군요.
오랜 세월 홀로 계신 어머니에게 무심하게 연락조차 못 드렸다는 자책감 때문이었습니다. 고향 집에 도착해 보니 어머니는 기척도 못할 만큼 아픈 상태로 누워 계셨습니다. 감을 따다가 나무에서 떨어져 뼈에 금이 간 거라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저를 보자 반가워하시면서 아픈 몸을 이끌고 부엌으로 향하셨습니다. 제게 밥을 지어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상을 받고 나니 사래라도 걸린 양 목이 잠기더군요.
더운 밥 위로 피어오르는 김을 보고서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것은 어머니의 정이라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언젠가 제가 절 살림을 맡게 되면 어머니를 모셔 와 따뜻한 밥 한 그릇 지어 드려야겠다고.
오래지 않아서 저는 천안의 한 절에서 주지를 맡게 됐습니다. 가람을 정비한 뒤 어머니를 한 달가량 모시면서 공양을 올렸습니다. 제가 차린 밥을 드시는 어머니를 뵐 때마다 눈물겹도록 행복했습니다. <계속>
글 | 마가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