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 남자는 마침내 자신이 깨달은 새로운 신으로부터 듣게 된다.
자신의 조바심과 불안이 결코 헛되지 않았으며, 이러한 그의 고통이 열매를 맺어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무수한 개종자를 생산할 것이며, 이들이 씨앗이 되어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한마디로 자신은 축복받은 존재가 되리라는 약속을 얻은 것이다.
축복이라고?
이 단어로 과연 남자의 얼굴에, 인생을 살아 가는 기본 정서에, 또 그의 자의식에 흔적을 남긴 사건들의 의미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축복' 이라는 단어 뒤에 깔려 있는 가치 평가는 뭐랄까, 조금 특별해서, 우르를 떠난 이 남자와 같은 남자들의 기질과 활약을 이런 말로 묘사하는 건 왠지 거북하다.
마음이 편치 않아 정처 없이 객지로 떠돌다, 새로운 신의 영접으로 미래가 달라질 운명을 가진 그런 남자들을 선뜻 축복 받은 남자라 표현하는 건 망설여진다는 뜻이다.
그네들의 삶이 의심의 여지라고는 한치도 없이, 정말 말 그대로 순수하게 축복만 받은 삶을 의미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거나 아예 없다.
이런 부류에 속하는 남자들의 일생 이야기라면, 그들이 신으로부터 들은 속삭임을 놓고 축복을 운운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때의 신의 언약을 올바로 옮긴다면, 어느 나라 말로 하든, 대강 이런 뜻이 될 것이다.
그것이 네 운명이 될지어다.
이 운명이 하나의 축복을 뜻할 수 있는가 아닌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언제라도 다른 대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르를 떠나온 남자의 후손들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남자의 육신이 낳은 자손이든, 아니면 정신적 후예이건, 이들 역시 갈대아의 우르에서 남자를 인
도한 신을 그와 마찬가지로 참된 바알로, 진정한 아두로 인식한 까닭이다.
요셉도 예외가 아니다.
그 또한 우르 남자의 후손답게 자신의 정신과 육체의 뿌리를 거기서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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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어린 요셉은 현기증을 느꼈다.
어디 요셉뿐인가.
우물에 턱을 고이고 저 아래를 들여다보려고 고개를 숙인 우리도 어지럽기는 마찬가지다.
요셉의 매력적이고 귀여운 머리가 떠올리는 생각들 중에는, 정확하지 않아서 우리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것들도 몇 가지 있다.
그렇지만 요셉 역시 우리처럼 과거의 우물, 저 깊고 깊은 지하세계를 내려다보고 있다 생각하면, 왠지 그와 좀더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아니, 그와 같은 시대를 사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된다.
따지고 보면 요셉이 우리와 뭐가 다른가.
우리보다 조금 일찍 태어났을 뿐, 요셉도 인류의 기원으로부터 (만물의 기원은 아예 제외하고서라도) 수학적으로 계산한다면 우리만큼이나 아주 멀리, 정말 멀리 떨어져 있다.
실제로 인류의 기원은 아득하기만 한 깜깜한 우물 바닥에 놓여 있다.
그 깊이를 파헤치려 하면 두 가지 방법뿐이다.
우르 남자를 그 남자의 아버지와 혼동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증조부로 착각한 요셉처럼 가상의 시초를 기원으로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해변에서 마주친 일종의 무대 장치인 사구에 끌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곳으로 유인당하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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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른 형제들과 함께 가축을 돌봐야 했다.
물론 형들처럼 매일 그 일만 한 건 아니다.
그저 기분이 내킬 때만 헤브론의 초원에서 아버지의 양과 염소, 그리고 소를 돌봤다.
그럼 이 동물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우리가 오늘날 키우는 동물과 다른 점이 있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지금 가축들이나 마찬가지로 유순하게 길들여진 동물이었다.
그리고 목축의 수준도 우리 시대와 다를 바 없었다.
예를 들어 야생 물소를 집소로 길들인 목축의 역사는 어린 요셉이 살던 시대에도 이미 오래 전의 일로 기억되었다.
물론 여기서 ‘이미 오래 전’이라는 표현은 실제 기간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올 정도다.
소의 경우 철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를 앞선 석기 시대에 이미 목축의 대상이었음은 증명된 사실
이다.
석기 시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는 바빌론-이집트 시절을 보낸 아모리 사람 요셉도 우리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요셉이 기르던 소나, 우리가 기르는 소나 별로 다를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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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 아무렇게나 자라나는 열매 없는 풀들이 빵을 만들 수 있는 곡식알을 맺도록 개량된 것도 바로 그때이다.
우리도 먹고 있고, 당시 요셉도 식량으로 삼았던 보리와 호밀, 옥수수 그리고 밀 같은 곡식의 원조가 무엇이었는지 그 야생식물을 찾아보려고 하면,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식물학은 아무것도 알려 주지 못한다.
그리고 어떤 민족도 자기들이 제일 먼저 개량하여 재배했다고 자랑할 수 없다.
사람들 말을 들어보면, 석기 시대의 유럽에는 밀 종류만 해도 다섯 가지가 있었고, 보리는 세 종류가 있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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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기호로 표시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헤아릴 수 없는 판이니, 입으로 말하는 언어의 시작은 과연 어디서 찾아야 할까?
가장 오래된 언어, 최초의 언어는 인도 게르만어라고들 말한다.
즉 인도 유럽어, 산스크리트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최초'라는 것도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너무 성급한 표현이리라.
이보다 더 오래된 원어가 당연히 있었을 것이고, 이 원어로부터 아리아어와 셈어 그리고 함어가 갈라져 나왔을 게 틀림없다.
아마도 그 원어는 아틀란티스에서 사용되던 언어였을 확률이 높다.
이 아틀란티스의 아련한 실루엣이 과거라는 무대 장치 뒤에 펼쳐진 또 다른 해각인 것이다.
그러나 이곳 역시, 말을 하는 인간의 원래 고향이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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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관심거리는 숫자로 확정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오히려 설화와 예언이 혼동되는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과정을 통해 시간이 극복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언젠가'라는 단어이다.
이 낱말에는 과거와 미래, 이 두 가지 의미가 다 들어 있어서, 언제든 현실이 될 가능성을 내비친다.
바로 이것이 재구현이라는 발상의 뿌리다.
곱슬 수염을 자랑한 바벨의 사계의 왕도 그렇고, 상 하 이집트의 왕으로 테벤의 '궁궐에 있는 호루스', 즉 '아문은 만족스럽다' 로 불린 왕도 그렇거니와, 그 이전의 왕들과 뒤를 이은 후계자들 모두 태양신의 육화였다.
이 말은 신화가 그들에게 신비가 되었다는 뜻으로, 존재와 의미를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성찬이 희생양의 육신 그 '자체' 인지, 아니면 단순히 그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이런 문제로 다툴 수 있으려면 이때로부터 300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이처럼 한가로운 논쟁도, 신비의 본질이 시간이 없는, 곧 시간을 초월한 현재이며 앞으로도 그러하리라는 사실에는 아무 영향도 미칠 수 없었다.
바로 이것이 의식, 축제의 의미이다.
매해 성탄절이 돌아올 때마다, 세상을 구원하는 구세주가 요람에 든 갓난아기로 탄생한다.
이 아기는 이 땅에 태어나 고난을 받다가 죽어서 천국으로 올라갈 운명이다.
그러므로 요셉이 시겜이나 벧-라하마에서 한 여름날 통곡하는 여인들의 축제, 촛불 축제, 곧 탐무즈 축제를 구경하면서, 살해당한 잃어버린 아들, 청년 신, 우시르-아도나이(주님)의 죽음을 애통해 하고, 그의 부활을 맞아 피리를 불며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는 의식을 가까운 곳에서 자세히 체험했다면, 이는 신비를 통해 시간을 초월한 셈이 된다.
우리가 이 점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이것이야말로 모든 수해를 간단히 대홍수로 인식하는 사고에 내포된 논리적 걸림돌을 멀찌감치 치워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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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료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면, 이 기억이 서쪽의 그 나라와 결부되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한 위대한 민족이 전무후무한 신의 은총 아래 매우 지혜롭고 경건한 생활을 했다는 바로 그곳이 인류의 고향이자 타락의 장소였던 '에덴 동산'은 아니다.
이곳 또한 낙원으로 나아가는 시간과 공간 여행의 임시 목적지, 또 다른 무대 장치일 뿐이다.
고대 지질학 연구만 보더라도, 아틀란티스 대륙에 사람들이 살기 훨씬 이전의 시간과 공간에서 최초의 인간, 아담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눈속임과 유혹이 많은 숨바꼭질 여행인가!
황금 사과가 달려 있는 나라, 네 줄기의 강물이 흐르는 곳을 낙원과 동일시하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아니 도대체 용서나 할 수 있는 일인가?
설령 착각이었다고, 아니 너그럽게 봐줘서 자기기만이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이런 오류를 범할 수 있었을까?
오류라고? 물론이다. 생각을 해보라.
과거로 인도하는 그 다음 무대 장치가 어떤 곳이었는지, 거긴 밤 도깨비가 따로 없는 세상이 아니었던가.
여기 등장하는 인간을 어디 인간이라 할 수 있는가?
그 참담한 인간 애벌레를?
아니다. 이 모습은 미소년 요셉이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이해하려 해도, 도저히 자신의 원모습 이라고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상상을 해보라. 두꺼운 갑옷으로 완전무장하고, 산더미 같은 거대한 공룡과 날아다니는 도마뱀들과 사투를 벌이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으로 가슴이 새까맣게 타 들어갔을 그런 인간의 모습을 과연 낙원에 사는 인간으로 볼 수 있을지!
그곳은 에덴의 동산이 아니었다. 거긴 지옥이었다.
오히려 타락 이후 최초의 저주가 나타난 상태였다.
시간과 공간의 시초에서 쾌락과 죽음의 나무 열매를 따먹은 곳은 이곳이 아니다.
이보다 훨씬 이전의 일이다.
시간의 우물은 우리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 모든 것이 시작된 그 지점에 이르기도 전에 바닥을 드러낸다.
인간의 역사는 인간의 의지가 만들어낸 물질세계의 역사보다 길다.
그리고 인간의 의지에 기초한 삶보다 더 긴 것이 인간의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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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실제로 자신을 어떻게 느꼈는지, 이에 관한 긴 설화가 하나 있다.
옛날 옛적, 아주 먼 옛날에 나온 이 설화의 유산은 종교와 예언, 그리고 동방의 인식론으로 흘러 들어가기도 했다.
조로아스터교와 회교, 마니교, 그노시스교리, 헬레니즘 등이 그 예이다.
이 설화는 바로 최초의 인간, 또는 완벽한 인간, 히브리어로 아담 카드몬이라 불리는 존재에 관한 이야기이다.
순수한 빛으로 이루어진 이 청년은 세상이 시작되기 전 인간의 원형이자 총괄 개념으로 창조되었다.
이 최초의 인간에 대해서는 다양한 교리와 기록들이 있다.
이들의 모양은 각기 다르지만, 핵심은 거의 동일하다.
최초의 인간은 맨 처음 창조가 이루어지고 난 직후, 창조를 위협하는 악에 대항하여 싸울 전사로 선발된 자였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부상을 입고 악령의 포로가 되는 바람에 물질에 붙들려 자신의 근원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이에 신은 다시 두번째 사자를 보냈는데, 신비롭게도 최초의 인간보다 고귀한 자아인 이 두번째 사자 덕분에 세속의 육신으로부터 해방되어 다시 빛의 세계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때 그는 물질세계와 땅의 인간을 만드는 데 사용 될 재료로 자신의 빛 일부를 남겨두어야 했다.
이 기적 같은 이야기에는 구원과 관련된 종교적 뉘앙스도 녹아 있긴 하지만, 그보다는 우주론적인 의도가 단연 돋보인다.
신의 인간, 최초의 인간을 서술하는 표현을 한번 보자.
최초의 인간은 빛으로 이루어진 실체이다.
그런데 그 안에 들어 있는 일곱 개의 금속에서 일곱 개의 유성이 만들어지고 여기서 다시 세상이 만들어진다.
또 아버지의 원천에서 나온 빛으로 구성된 인간이 일곱 개의 유성 차원을 거치며 아래로 내려오는 과정에서 각 차원을 지배하는 자들로부터 차례차례 본성을 얻었다는 표현도 있다.
이렇게 자신의 본성을 얻은 인간은 하늘 아래로 눈을 돌렸다가 물질에 비친 자신의 상에 마음을 뺏겨 아랫세상으로 내려가는 바람에, 그곳의 낮은 본성과 몸을 합치게 된다.
이것이 인간의 이중성, 즉 고향인 거룩한 세상의 자유와, 낮은 세상의 무거운 구속이 하나로 뒤엉킨 상태를 설명해 준다는 것이다.
이처럼 비극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척 우아한 나르시스의 모습에서 설화의 의미가 정화되기 시작한다.
자 보자.
신의 아들이 빛의 세상으로부터 아래쪽의 자연세계로 내려간다.
신의 명령을 받아 고귀한 임무를 수행할 목적으로.
여기까지는 괜찮다. 이는 스스로 책임질 이유가 없는 행동이다.
그런데 이렇게 아랫세상으로 내려가는 행동이 자유로운 결정에 근거한 독자적인 행위로 바뀌어, 일종의 과실의 성격을 띠게 되는 순간, 의미정화가 시작된다.
그뿐 아니다. 암흑에 갇힌 빛-인간을 고향으로 데려가려고 땅으로 내려왔다는, 보다 높은 의미에서는 빛-인간과 동일한 존재라는 ‘두번째 사자'의 의미도 이제 서서히 베일을 벗기 시작한다.
이제 교리는 물질과 영혼과 정신이라는 세 가지 성분으로 세상을 구분하게 되고, 이 세 가지가 신성과 얽히고설키면서 이야기 보따리를 풀기 시작한다.
다들 눈치 챘 겠지만, 주인공은 모험을 즐기며 모험 속에서 창조력을 발휘하는 인간의 영혼이다.
최초의 기록과 마지막에 관한 예 언을 하나로 결합시켜 낙원의 참된 장소와 타락의 역사에 대해 보다 분명한 사실을 들려주는 신화다운 신화에 귀를 기울여보자.
영혼이 있었다.
여기서 영혼이란 최초의 인간다운 존재를 말한다.
물질과 마찬가지로 처음에 도입된 원리 중의 하나였던 영혼은 생명은 가졌으나 지식은 소유하지 않았다.
아는 게 얼마나 없었으면, 평안과 행복이 지배하는 높은 세상, 그처럼 가까운 곳에서 신을 모시고 살던 세상을 마다하고, 아직 형체를 갖추지 않은 물질에 마음이 기울었을까?
기울었다는 표현은 말 그대로 아래로 기울었다는 뜻이다.
여하튼 영혼은 물질과 몸을 섞어 형체를 만들고 싶어 안달이 나서 아래로 내려간 것이다.
이렇게 형체를 만들어 육신의 쾌락을 얻고자 하는 욕구만 컸지, 영혼은 정말 무지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막상 쾌락의 유혹을 못 이겨 고향을 떠나 아래로 내려오고 보니, 여간 괴로운 게 아니었다.
물질이 말을 들어야 말이지, 워낙 제멋대로에, 게으르긴 또 얼마나 게으른지 원래대로 무형 상태로 있고 싶다고 버티질 않나. 도무지 영혼을 기쁘게 해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이런 곤란한 상황에 개입한 것이 바로 신이다.
아무리 자신에게 등을 돌린 영혼이지만, 차마 두 눈뜨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반발만 하는 물질의 사랑을 얻지 못해 괴로워하는 영혼을 도와주려고 세상을 창조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신은 최초의 인간다운 존재를 돕기 위해, 수명이 긴 견고한 형체를 만든 것이다.
영혼이 이 형체들에서 육체의 쾌락을 얻고, 인간을 생산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신의 조처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에게는 보다 고귀한 계획이 있었다.
우리가 자료로 인용하고 있는 기록을 그대로 옮기자면, 신은 자신의 신성으로 정신을 만들어 이 세상의 인간에게 보냈다.
정신은 인간의 육신을 안방 삼아 쿨쿨 잠만 자고 있는 영혼을 깨워 아버지의 명령을 상기시켜야 했다.
실제로 정신은, 지금도 이 세상은 영혼이 머물 곳이 아니며, 육신의 열정을 못 이겨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죄이며, 그 때문에 이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일러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영혼이 어리석게도 물질과 몸을 섞는 바람에 이 세상이 창조된 만큼, 이제 영혼만 떠나면 형체의 세계도 끝나게 될 테니까.
영혼으로 하여금 이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 정신의 사명이다.
정신은 그래서 열정적인 영혼이 제발 자기 고향이 높은 세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머릿속에서
낮은 세상을 떨쳐내 원래 고향, 평안과 행복이 있는 고향으로 되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일이 일어나는 순간, 이 낮은 세상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렇게 되면 물질은 원래의 게으르고 제멋대로인 고집을 되찾을 테고, 형체에 묶여 있던 상태에서 풀려나, 다시 옛날의 무형의 상태로 돌아가게 된 것을 무척이나 기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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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에 대한 교리이자 소설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거슬러 올라가기'는 여기서 끝을 맺는 게 분명하다.
인간의 가장 오래된 과거는 바로 여기에 모습을 드러내며, 낙원이 결정되고 타락과 인식 그리고 죽음의 역사가 진실된 원래의 모습, 순수한 형태로 소급되는 곳도 바로 이곳이다.
최초의 인간다운 존재인 영혼, 이것은 하나였고 가장 오래된 것이다.
신이 그러했고, 물질이 그랬듯이, 시간과 형태가 있기 전부터 늘 존재했으니까.
그리고 영혼을 고향으로 데려오기 위해 파견된 두번째 사자인 정신은, 여하튼 영혼과 아주 유사하다. 하지만 영혼 그 자체는 아니다.
그 이유는 정신이 영혼보다 젊기 때문이다.
영혼이 먼저이고, 정신은 나중에 생겼다는 뜻이다.
신께서 영혼을 깨우쳐 해방시킴으로써, 형체의 세계를 없앨 목적으로 낮은 세상으로 파견한 것이 정신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교리가 조금 바뀌어 영혼과 정신이 하나라고 주장하거나, 또는 비유적으로 그렇게 암시되기도 하는데,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최초의 인간다운 영혼이 신을 대신하여 악과 싸우기 위해 전사로 파견된 것이나, 나중에 영혼의 해방을 위해 파견한 정신이 하는 역할이 매우 유사한 탓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원래 교리의 형태로는 영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 모험 소설에서 정신이 맡은 역할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하여, 부득이 보충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영혼과 물질로 이루어진 형체의 세계인 지금의 세상에서, 정신이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분명하다.
자신을 망각한 채 형체와 죽음에 얽매여 있는 영혼에게 보다 고귀한 자신의 신분을 상기시키는 것이 정신의 사명이다.
영혼으로 하여금 물질과 몸을 섞어 형체와 죽음의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 실수였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절실히 느끼도록 하여, 마침내 비통과 육으로부터 벗어나 집으로 날아가게 만드는 것, 그리하여 세상엔 종말이 도래하여 물질은 예전의 자유를 되찾고, 세상에서 죽음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 이것이 정신의 사명이다.
그러나 여기서 잠깐 적국에 들어간 어느 외교관을 생각해 보자.
워낙 체류 기간이 길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동화되어 그 나라 사람이 되어버린 사신이 어느새 자신의 고유한 색깔을 잃고 적국의 사고방식과 입장을 받아들이고 말았다면, 조국의 입장에서 볼 때 타락한 나머지 더 이상 조 의 이해를 대변할 능력이 없어졌다면?
그에게 남은 길은 본국으로 소환되는 것뿐이다.
정신도 이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다.
이 아랫세상에 머무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정신은 앞서 말한 외교관과 똑같은 갈등을 겪어, 직무
수행에 문제점을 드러내게 된다.
이쯤 되면 높은 곳에서 모를 리가 있겠는가. 당장이라도 정신을 소환하려 했을 게 뻔하다.
정신 을 대신하여 이 일을 정말 잘 해낼 수 있는 자로 교체하는 문제를 생각보다 수월하게 풀 수만 있었다면 말이다.
세상을 파괴할 자, 세상의 무덤을 파는 자의 역할을 오랫 동안 수행한다는 건 정신에게도 쉽지 않은 일임에 분명하다.
정신 역시 세상 탓에 자기 색을 잃을 가능성이 크며, 그렇게 되면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도 점차 변하기 마련이다.
세상에서 죽음을 몰아내야 하는 사명만 해도 그렇다.
이 사명 때문에 정신은 자신이 이 세상에 죽음을 가져오는 자라고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시각과 해석의 문제이다. 이렇게 평가할 수도 있고 또 저렇게 평가할 수도 있으니까.
다만 자신이 어떤 사고방식을 가져야 하는지, 그리고 집안 대대로 어떤 사명을 물려받았는지, 그걸 안다는 게 중요하다.
그렇지 못할 경우, 우리가 타락이라고 말하는 현상이 등장하여, 자신의 본분에서 멀어지고 만다.
여기서 정신이 지닌 유약한 성격이 드러난다.
그는 주변에서 자신을 가리켜 형체를 파괴하려는, 살상의 원리라고 말한다는 사실을 안다.
아니 주변 세상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 자신까지도,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그저 자신을 심판하고 싶은 충동에 이끌려 그렇게 평가한 부분도 적지 않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명예를 걸고 이런 식의 평판을 떨쳐내려고 한다.
그렇다고 자신의 사명을 배반할 의도는 없다.
결과적으로 정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는 자신을 심판하고 싶은 충동과 영혼에 대한 일종의 금지된 사랑이라 할 수 있는 동요가 뒤섞여 뉘앙스가 묘해진다.
이렇게 변질된 정신의 말에 영혼은 불쾌하기는커녕 으쓱해 한다.
다시 말해, 정신의 말은 원래 의도했던 순수한 목적에 대한 유머가 되어 오히려 생명과 형체를 편들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배신 행위, 또는 배신과 유사한 행위가 정신 자체에 이득을 주는 것은 아닐까?
또는 정신의 이런 행위가, 물질세계에서 영혼을 해방시켜 물질세계를 지양하려는 자신의 목적 수행에 오히려 기여하는 것은 아닐까?
혹은 정신이 다 알면서도 확신이 있기 때문에, 겉으로만 배반 행위를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질문들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는다.
여하튼 정신이 이처럼 우습게도 자신의 의지를 부인하면서 영혼의 의지와 결합한다는 사실이, 두번째 사자는 악과 싸우기 위해 파견된 빛 - 인간의 또 다른 자아였다는, 교리의 비유적 전환을 가능케 한다.
그렇다. 이 표현법에는 신의 은밀한 결정에 대한 예언적 암시가 깔려 있을 수 있다.
신이 내리신 비밀스럽고 은밀한 결정은 툭 터놓고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성스럽고, 또 그렇게 한다 해도 알아들을 사람이 없으리라 생각하고 암시만 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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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여기서 생명은 어디 있고, 죽음은 어디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해질 수 있다.
자연에 얽매여 있는 영혼과 세상 밖에 속하는 정신은, 다시 말해서 과거의 원리와 미래의 원리는
각기 자신의 의미에 따라 생명수가 되고자 하는 요구를 지니고 있으며, 상대방이 죽음과 함께 한다고 서로 책임을 전가한다.
둘 다 그럴만하다.
정신이 없는 자연도 그렇고, 자연이 없는 정신도 그렇고, 둘 다 생명이라 부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밀은, 그리고 신이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은 어쩌면 이 둘의 결합에 있는지도 모른다.
정신이 정말 영혼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이 두 원리가 서로 하나로 융화되고 상대방을 거룩하게 만들어, 그것이 인간의 현실이 되도록 하려는 것이 신의 간절한 희망이 아닐까?
그렇게만 된다면, 인간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축복과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축복을 동시에 움켜쥐게 되리라.
이것이야말로 신비로운 가능성이고, 교리에 대한 궁극적인 해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한 가지 의문점은 계속 남는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 내뱉는 비난을 너무 쉽게 받아들인 나머지, 자신을 오히려 부인하고 아첨을 떨기도 하는 정신의 행동이, 과연 위에서 말한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올바른 방법인가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정신이 설령 영혼의 말없는 열정에 고작 유머나 더해 주고, 무덤들을 찬미하며, 과거를 생명의 유일한 원천이라 부르고, 자신이 고약한 광신자요, 생명을 노예로 삼는 살기 등등한 의지라고 고백한다 치자.
그래도 정신은 여전히 정신이다.
정신이 어떤 태도를 보이든, 정신의 본질에는 변함이 없다.
정신은 경고장을 들고 온 사자다.
자극을 주고, 모순을 깨닫게 하여 긴 나그네 길로 등을 떠미는 원리다.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쾌락을 추구하는 개개인의 가슴속에 다른 한편 자연을 뛰어넘으려는, 고통스러운 불안을 일깨우려 하는 것이 정신이다.
그리하여 인간을 이미 되어진 것, 이미 존재하는 것에 안주하지 못하도록 문 밖으로 몰아내어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로 떠밀어 넣는 것 그게 정신이다.
이렇게 정신에 떠밀려 긴 모험 여행에 나선 인간은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순간, 굴러 가는 돌멩이로 변한다.
여기 부딪치고 저기 부딪쳐가며,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무작정 구르기를 계속해야 하는 돌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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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란 것의 과거가 우리 이야기의 무대다.
예전에 있었지만 지금은 죽은 세상, 우리들의 생명도 언젠가 깊숙이 들어가게 될 세상, 그리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이 과거의 시초가 놓여 있다.
죽는다는 건 당연히 시간을 잃고 시간을 벗어난다는 뜻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대신 영원을 얻어 어디든 있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여기서 비로소 진정한 생명을 얻는다고도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생명의 본질은 '현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의 비밀은 오로지 신화를 통해서만,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 형태로 자신을 드러낸다. 이것이 생명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일상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비밀은 오로지 선택받은 자들의 것이다.
사람들은 백성들에게 영혼이 여기저기 떠돈다고 가르친다.
식자들은 이러한 가르침이 영혼의 편재라는 비밀이 걸치는 옷일 뿐임을 알고 있다.
죽음이 영혼을 가두고 있는 독방을 부수는 순간, 생명이 온전히 영혼의 것이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우리는 일종의 모험가로서 이 과거 여행을 통해 죽음을 맛보며, 죽음에 대한 인식이 어떤 것인지도 더불어 알게 된다.
가슴 한편이 설레면서도 온몸이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두려움보다는 즐거움이 우리를 더 강하게 사로잡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또 이것이 육신에서 비롯되었음을 부인 할 생각도 없다.
즐거움을 주는 대상이, 우리들이 말하고, 질문하고, 관심을 갖는 것의 처음이자 마지막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것이다.
저 아랫세상에서, 죽음 가운데에서 탐무즈를 찾아 헤맨 이쉬타르처럼, 우시르를 찾아 헤맨 에세트처럼, 과거가 있는 곳에서 이 인간 존재를 인식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존재는 항상 어디서나 늘 지금의 모습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설령 ‘옛날에 그랬다' 고 말하더 라도 달라질 건 없다.
비밀이 걸친 옷에 불과한 신화는 늘 이렇게 '옛날에' 라고 말한다.
그러나 비밀의 예복은 바로 축제다.
축제는 해마다 반복되면서 시간의 그물을 잡아당겨 과거에 있었던 일과 앞으로 생길 일을, 사람들로 하여금 지금의 일로 느끼게 만든다.
축제 속에 항상 인간적인 것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관습의 동의 아래 음란한 것으로 변질 되고, 그 안에서 죽음과 생명이 서로 한 몸이 되었다 해서 그게 뭐 놀랄 일인가?
이야기 축제! 그것은 생명의 신비가 걸치는 예복이 아니던가!
그대야말로 사람들에게 시간의 구속을 받지 않는 신화를 불러내어, 그들의 눈앞에서 바로 지금 이 순간 생생하게 살아나도록 해주지 않는가!
죽음의 축제, 저승 나들이, 그대는 진정 하나의 축제이며, 육신에 갇힌 영혼에게 기막힌 즐거움을 선사한다.
영혼이 과거, 즉 무덤들과 경건했던 옛날에 집착하는 것은 괜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정 신 또한 그대와 함께 하여 가슴 깊숙이 자리잡기 바라니.
부디 하늘로부터의 축복과 저 깊숙한 심연으로부터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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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어리석은 양보다 더 어리석어요.
그리고 무척 영리한 자라 불린 노아는 이 철없는 소년에 비하면, 그 지혜가 낙타만 하죠.
제 자신을 부끄럽게 만드는 아버지의 지적에 대한 대답이 아버지 말씀보다 더 빛날 수는 없겠지만, 이 어리석은 아이가 보기에는, 만일 아버지께서 스스로를 시험 하신 거라면 아버지는 아브라함도, 야곱도 아니었고,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좀 두렵지만, 바로 주님이셨던 것 같아요.
주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던 것처럼 아버지를 시험하시어, 아버지로 하여금 주님의 지혜를 깨닫게 하시려 한 것 같아요.
아버지에게 내리려는 시험이 어떤 건지 알게 하시려고 말이에요.
그 시험은 아브라함한테 내린 것과 마찬가지로, 애당초 시키는 대로 해주길 바라고 내린 시험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러주시려 하신 거죠.
주님께서 처음에 아브라함에게 '나는 멜렉, 곧 황소 왕 바알이로다. 네 첫 소생을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아브라함이 그것을 가지고 가려 하자, 주님께서는 그 즉시 이렇게 말씀하셨으니까요.
당장 그만 두어라! 내가 멜렉, 곧 황소 왕 바알이란 말이나?
아니로다. 나는 아브라함의 신이요.
그 얼굴이 뙤약볕 에 갈라진 대지 같지 아니하고, 오히려 달의 모습과 유사하도다.
그리고 내가 명령한 것은, 네가 실제로 그렇게 하라고 명한 것이 아니로다.
오히려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네가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리 한 것이니라.
왜냐하면 그것은 내 눈앞에 혐오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로다.
여기 이 숫양을 번제에 올리거라.
자, 보세요. 아버지께서는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금지시켰던 일을 가지고 자신이 그 일을 할 수 있는지 스스로를 시험하신 거예요.
그러고서 자신은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깊이 상심하시는 거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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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공간은 보충과 상응으로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반쪽이 두 개 모여 하나를 이룬 곳이다.
위에 있는 반쪽과 아래에 있는 반쪽, 즉 하늘을 이루는 반구와 땅의 반구가 모여 전체를 만든다.
그래서 위의 것은 아래의 것이기도 하고,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하늘에서 반복되기도 하며, 하 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땅에서 재현되기도 한다.
두 개의 반쪽이 모여 하나의 전체가 되는, 즉 하나의 공처럼 둥근 물체를 이루는 이 반쪽들의 상호상응은 실제 변화와 흡사하여 뒤집기와 마찬가지이다.
우주공간은 구른다.
이것이 우주공간의 본성이다.
위가 곧 아래가 되며 아래가 위가 된다.
그러므로 어디든 아래라 할 수 있고, 어디든 위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즉 거룩한 것과 속세의 것이 상대방에게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각각 상대방으로 바뀐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우주공간의 회전에 힘입어 거룩한 것이 속세의 것으로 변하고, 속세의 것이 거룩한 것으로 바뀐다.
결과적으로 신들이 인간이 되는 반면, 인간은 신들이 된다.
사실이 그렇다.
그래서 우시르, 곧 참고 인내하는 자, 몸이 동강난 자는 이전에는 인간이었지만, 즉 이집트의 어떤 왕이었지만, 나중에는 신이 되었다.
물론 그럴 때마다 그는 번번이 다시 인간이 되고 싶었다.
이집트 왕들이 항상 인간인 동시에 신이었던 사실이 그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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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자신들의 지식만 믿고 제풀에 화가 나서, 에사오를 가리켜 ‘낯선 이방의 신'이라 불렀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이들은 불상사를 막고 싶었을 뿐이다.
세상에 등장한 에사오가 거칠고 천박하긴 하지만 그래도 너그러운 성품을 보인 까닭에, 혹시라도
사람들이 우주 공간의 순환에서 에사오가 맡은 역할이 실제로 어떤 존재 인지 몰라 착각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우주 공간은 돌고 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존재들이 아버지와 아들이 되기도 하며, 붉은 자와 축복받은 자로 등장하기도 하며, 아들이 아버지를 거세하기도 하고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이 처음에 어떤 것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르며) 서로 형제가 되기도 한다.
세트와 우시르, 카인과 아벨, 셈과 함처럼.
그리고 우리도 알다시피 이들은 셋이 되기도 하여 두 개의 쌍을 이루기도 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한 쌍과 또 하나는 형제의 쌍이 되는 것이다.
이스마엘의 경우가 그렇다.
이 거친 야생 당나귀는 아브라함과 이사악 사이에 있다.
아브라함에게는 낫을 든 아들이며, 이사악에게는 붉은 형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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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들이 벌이는 우상숭배를 보지 않으려고 이사악이 급기야 눈이 먼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아, 그건 이사 악이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웠던 여러 가지 중 극히 작은 일에 불과하다.
그로 하여금 눈이 멀어버리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눈이 멀어야만,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년들이 자라날수록 큰 신화의 윤곽은 보다 분명해졌다.
단순히 태어난 순서에 근거한 '작은' 신화는 아무리 아버지가 원칙적으로 큰아들 편을 들어도, 점차 억지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이 쌍둥이 형제가 누구인지 확연히 드러난 것이었다.
붉은 자와 매끄러운 자, 사냥꾼과 집안에 머무는 자가 누구의 발자취를 따라가는지, 누구의 이야기를 발판으로 삼고 있는지 명백해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야생 당나귀였던 이스마엘과 한 형제로, 카인이 아니라 아벨이었고, 함이 아니라 셈이었으며, 세트가 아니라 우시르였고, 이스마엘이 아니라 진정한 아들이었던 이사악이, 어떻게 볼 수 있는 눈으로 자신이 에사오를 더 좋아한다는 가정을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그의 시력은 저무는 달처럼 점점 떨어졌고, 어두운 곳에 누워 장자 에사오와 함께 속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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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시간을 빨리, 그리고 효과적으로 보낼 수 있을까?
단조로운 한 가지 형태로?
아니면 시기별로 구분되는 변화무쌍한 형태로?
여기에서는 각자 의견들이 다르다.
그러나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긴 보내야 한다.
살아 있는 자는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
다시 말해서 시간을 뒤로 보내려 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는 죽음을 향해 달리는 것이다.
마치 삶의 목표와 전환점을 찾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죽음을 향한 질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온 시간이 여러 시기와 단계로 구분된다 하더라도, 결국은 하나의 형태. 즉 ‘자신'의 시간일 뿐이다.
자신이라는 항상 똑같은 전제조건에서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시간을 보내며 인생을 사는 데는 단일 형태와 구분되는 변화무쌍함, 이 두 가지 모두가 필요하다.
언뜻 보면 시간을 구분한다는 것은 칼로 물 베기와 별로 다를 바 없다.
이렇게 베든, 저렇게 베든 칼로 선을 긋는 동안 물은 어느새 하나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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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반의 이 그럴듯한 말은 그럴싸한 생각에 옷을 입힌 것이다.
그러나 말은 둘째 치고 속물의 생각은 그 자체가 이미 또 다른 옷이다.
자신이 추구하는 바와 관심을 아름답게 포장한 옷, 그것이 속물의 생각이다.
그래서 말을 꺼내기 전에 이미 거짓말을 하는 셈이다.
그 말이 그럴싸하게 들리는 이유는 말이 나오면서 거짓말이 되는 게 아니라 이미 생각 안에 거짓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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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는 라헬의 비애를 단 한마디로 설명한다.
야곱 앞에서 아무 가치도 없던 레아를 불쌍히 여긴 신께서 그녀에게는 출산의 축복을 주시고, 라헬의 출산은 막으신 거라고.
이것은 다른 설명들과 마찬가지로 짐작일 뿐, 백 퍼센트 옳다고는 할 수 없다.
엘 샤다이, 즉 전능하신 주님께서 직접 나서서 야곱의 뜻이나 혹은 라헬의 소원에 반대되는 자신 의 의도가 뭔지 차근차근 밝힌 적도 없지 않은가.
따라서 만일 위에서 소개한 설화의 해석보다 나은 해석이 있다면 당연히 그것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나마도 여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설화가 제시하는 기존의 해석이 핵심적인 면에서는 지극히 옳기 때문이다.
그 핵심이란, 신의 섭리가 적용되는 대상, 혹은 최소한 그 첫번째 대상이 라헬이나 또는 레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라헬을 불리하게, 혹은 레아에게 유리해 지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야곱을 경계하려는 의지가 앞선 것이다.
그렇다면 야곱의 어떤 점이 문제였던가?
그건 야곱의 교만이었다.
엘로힘은, 누구는 좋아하고 누구는 마다하는 자신의 선택적인 감정을 오히려 당당하게 여기는 야곱의 교만을 허락할 생각이 없었다.
야곱은 자신이 선택한 사람에게만 관심과 사랑을 쏟으려는 성향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리고 온 세상 사람들이 이를 무조건 경건한 신앙심으로 받아들여 주기를 원했다.
경건한 신앙심? 그렇다.
자신은 다만 거룩한 주님을 따라 한 것 뿐이니까.
그분도 자신이 선택한 사람에게만 관심을 쏟지 않으시는가.
그분이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그분 마음 아닌가.
이렇게 그분을 본받으려는 열의, 오히려 그것 때문에.
도리어 그 때문에?
그렇다. 바로 그것 때문에 야곱은 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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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반은 훨씬 더 철저하게 속아넘어가야 했다.
야곱 개인의 복수 때문이 아니다.
남을 속이는 악마는 더 철저하게 속아넘어가 다른 사람의 조롱거리가 되어야 마땅해서였다.
하지만 우리들의 주인공 야곱은 이 정한 이치를 실현할 수 있는 적당한 수단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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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그래야만 했을까?
야곱 가족이 평화롭고 유쾌한 분위기에서 살 수는 없었을까?
서로서로 용납하면서 만사를 원만하게 풀어갈 수는 없었던 것일까?
안타깝게도 그건 불가능했다.
어차피 일어나도록 정해진 일은 마침내 일어나며, 어쩌면 그 사건이 발생했다는 자체가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어 있었고, 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인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위대하다.
이러이러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수 없는 것처럼, 이러한 사건을 야기하는 열정들이 아예 없기를 바라서도 안 된다.
잘못과 열정이 없다면 진보도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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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이 풍부한 자들이 다 알면서 자유와 평안을 무시하는 것인지, 그래서 모든 것을 알면서 스스로 재앙을 자초하여, 언제든 칼을 맞을 준비를 하고 항상 두려움 속에서 살고 싶어하는 것인지는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다.
아마도 이처럼 오만불손한 의지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여 거기서 행복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늘 따라다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전제 조건이 어떤 고통이라도 받겠다는 각오라는 것과, 이 세상에서 조심성 없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게 바로 사랑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여기서 드러나는 자연의 모순은, 이런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그 삶이 요구하는 짐을 짊어질 능력이 없으며, 반대로 이러한 짐을 짊어질 만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자들은 의외로 자신들의 마음을 노출시킬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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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시작했으니 여기서 끝을 맺으리라.
그분이 이곳에서 그녀를 거둬 가셨으니 여기 묻혀야 한다.
무덤을 파거라. 저기 담 옆에 구덩이를 파도록 해라!
짐 꾸러미에서 부드러운 아마포를 꺼내거라.
그 천으로 그녀를 쌀 것이다.
그리고 무덤에 세울 비석을 고르도록 해라.
그런 후에 이스라엘은 다시 길을 떠날 것이다.
라헬 없이 아이들만 데리고"
남자들이 땅을 파는 동안 여자들은 머리를 풀고 가슴을 풀어헤쳤다.
그리고 흙먼지를 물과 섞어 가슴에 마구 문지르며 슬픔을 표현했다.
그런 다음 피리소리에 맞춰 애절한 노래 자매를 잃은 비탄을 부르면서, 한 손으로는 정수리를, 다른 손으로는 가슴을 쳤다.
야곱은 그러나 사람들이 그에게서 라헬을 데려갈 때까지 여전히 양팔로 라헬의 머리를 안고 있었다.
가장 사랑했던 여인의 몸은 흙으로 뒤덮였다.
주님이 그의 품에서 그녀를 앗아간 길가에 무덤이 완성되자, 이스라엘은 다시 길을 떠났다.
그리고 옛날 망대, 곧 믹달 에델이라 불리는 도시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은 르우벤이 아버지 야곱의 첩 빌하와 죄를 지어 저주를 받게 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