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죽을 거야
그런데, 하나님이 부르시는 때에
글쓴이: 박영종 (대전순복음교회)
(글쓴이는 05년 11월에 폐암말기 진단 후,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으로 완치되어
현재 우송대학교 중국유학과 교수로 재직 중임)
jesus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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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제가 의학적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절망과 두려움과 슬픔 속에서 주님을 찾았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한량없는 사랑으로 지난 잘못들을 다 용서해주시고,
제 기도를 들어주셨으며 제 눈물을 보아주셨습니다.
아버지!
이제 죽음을 이기신 아버지의 능력으로 되살아나,
고난이자 축복의 시간이었던 지난 동안 몸소 체험한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은총을 간증하려합니다.
아버지의 사랑하는 귀한 자녀가 혹 힘든 처지에 놓였다면,
이 간증이 힘이 되게 하옵소서.
기적과 능력의 하나님,
치료와 축복의 하나님이
이 순간 함께 하고 계심을 알게 하옵소서.
이 간증문을 써주신 주님께 무한한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그래 죽을거야
그런데, 하나님이 부르시는 때에“
<말기페암에서 완치된 한사람의 말>
“예? 내가 폐암말기라고요?”
05년 9월 어느 날, 갑자기 쉰 목소리가 나서 동네 이비인후과를 찾았습니다. 후두염이라고 해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는데, 한 달이 지나도록 차도가 없었습니다. 이상해서 다른 이비인후과를 두 곳이나 가보았지만 진단이 전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곧 좋아지겠지.”하고 의사의 지시대로 뜨거운 물을 많이 마시고, 되도록 말을 적게 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 정기적인 혈액검사에서 간암을 나타내는 알파피토프로테인의 수치가 높이 나왔습니다. 곧바로 간 CT 촬영을 했는데 다행히도 정상이었습니다. 의사는 간혹 이럴 수 있다며 한 달 후에 다시 혈액검사를 다시 해보자고 했습니다. 아내가 놀랄까봐 말도 안 했던 저는, 일단 CT 결과에 마음을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한 달 후의 검사에서는 수치가 더 높게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의사도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CT 결과를 믿었던지, “보름 후에 다시 한번 검사를 해보자.”는 말만했습니다. 무언가 이상하다 싶어서 의사인 매형에게 상의했습니다. 이리저리 알아보더니, 혹시 모르니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에 걸쳐 암을 체크하는 PET 검사를 받아보라고 했습니다. 11월 14일, 저와 아내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대전의 을지대학병원에서 이 검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설마 했던 것과 달리 결과가 너무나도 어마어마했습니다. 폐와 폐 사이의 종격동에서 어린아이 주먹만한 크기의 종양이 발견되었습니다. 담당의사는, “정확한 것은 조직검사를 해봐야합니다. 그런데 악성이라 하더라도 종격동암이라면, 그래도 치료가 잘되는 편입니다.”하며 저를 안심시켰습니다.
조직검사를 위해 일산의 국립암센터를 찾아갔습니다. 도착하여 차에서 발을 내려놓는 순간,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절제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어쩌다가…겨우 이 나이에….”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전에 들은 의사의 말에 희망을 걸었고 또 막연히 검사결과가 좋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며칠 뒤 의사로부터 조직검사 결과를 듣는 순간, 실낱같은 희망은 산산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조직검사 결과 종격동암이 아니고, 폐암이며 말기입니다.” “예? 내가 폐암말기라고요?” 의사의 절망적인 말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종양이 대동맥, 식도, 후두신경 등과 붙어 있어서 수술도 할 수 없습니다. 목이 쉰 것은 종양이 이미 후두신경을 침습한 결과이고, 이것으로 보아 대동맥도 침습된 것 같습니다. 마지막 방법으로 방사선치료나 한 번 받아보세요.”
겨우 40대 초반이라는 나이에 이처럼 엄청난 진단을 받고 나니 서있을 힘조차 없었습니다. 기가 콱 막혔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멈춘 듯 망연했고, 고개를 흔들며 부정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냉혹한 현실이었습니다. 망연자실하고 있는 가운데, 아내가 광주의 의사 형님에게 진단 결과를 전해주었습니다. 가슴을 졸이며 결과를 기다리던 형님 역시 낙망한 목소리로, “모든 검사자료들을 챙겨서 광주로 오라.”고 했습니다. 평소에 매우 자신감이 넘치고 담대한 편이던 저는 불과 몇 분 사이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광주를 향했습니다.
끝없는 절망과 슬픔
광주공항에 도착하여 형님을 보는 순간 암센터에서 참았던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습니다. 아내를 위해서도 참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형님은 정신적으로 이미 공황상태에 빠진 저를 전남대학교 화순병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 곳에서 의학적으로 마지막 수단인 방사선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치료가 시작되었지만, 마음속으로는 머잖아 세상과 이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슬펐습니다.
땅에 구르는 낙엽을 보고는, “내년에도 이 낙엽을 볼 수 있을까?”
전기면도기를 사러 가서는, “어차피 오래 못 쓸 텐데 제일 싼 걸로 사야지.”
옷장에 죽 걸린 양복들을 보면. “아내가 내 양복 입은 모습이 참 멋지다고 했는데, 이제 다 지난 일이구나.”
길을 가다 나이 든 사람들을 보면, “저들은 무슨 복일까? 나는 왜 이만큼 밖에 못사나?” ……. 정말이지 모든 사물이 슬프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은 더했습니다. 막 돌이 지난 늦둥이를 떠올리면, 실로 기가 막혔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낳지 말 것을, 어쩌자고……아빠가 있는 친구들을 얼마나 부러워하게 될까?”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제 겨우 13살인데……고등학교 때 늦게 귀가하면 차를 태워주려고 했는데……이 애는 아픔을 담고 살겠지.” 아내를 생각하면 더 괴로웠습니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다니……혼자 어떻게 애 둘을 키울까?……길눈이 어두워서 내가 운전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데……이제 장볼 때 무거운 짐을 누가 들어주지?” 온갖 염려들이 끝없이 몰려왔습니다.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되어, 자신이 죽이도록 원망스러웠고 아내와 자식들에게 너무나 미안했습니다. “정말 어떻게 되돌려 볼 수 없을까?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면…”하는 안타까운 마음에 먼 산만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1-2)
하루하루 희미해져가던 생명에게 유일하게 희망의 빛을 비춰 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아내의 손에 이끌려 2년 정도 교회를 다녔지만, 전혀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교회 문을 나설 때마다, “대표기도는 왜 내용이 항상 똑같아? 그렇게 할 말이 없나?”“오늘의 대표기도는 왜 그리 길어?” “한 번 부른 찬송가를 왜 다시 부르나?” “그 집사는 언제 보아도 호감이 안 간다니까.” 등의 불평들을 늘어놓기 십상이었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자연히 하나님도 믿지 않았습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지었다니, 말도 안 돼. 오병이어의 기적, 그냥 하는 소리지.” 마음의 문을 꼭 닫고, 아예 믿을 생각조차 안 했습니다.
그러던 제가 진단을 받은 후에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이 교회였습니다. 저도 왜 그런지 몰랐습니다. 그냥 교회에 가면 희망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목사님은 그런 저를 향해,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에게 달려있지, 의사의 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박교수를 크게 쓰시려고 연단을 겪게 하시는 겁니다.”라고 얘기해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당시 뿐 아니라 이후의 투병생활 내내 매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 때 저는 장로교회를 다니고 있었는데, 어떤 분이 이렇게 절박할 때는 뜨겁게 기도하는 순복음교회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마침 아랫집 문에 순복음교회 교패가 붙었던 것을 기억하고, 아내가 무작정 찾아가서 사정을 말했습니다. 다른 경로를 통해 이미 소식을 듣고 딱해하고 있던 그 집의 김정숙집사님은, 그 날 밤으로 우리를 운명적인 겟세마네기도회로 인도하였습니다.
아내의 손에 이끌려 겟세마네기도회에 나가기 시작했지만, 저는 여전히 겹겹의 절망감과 두려움과 어두움 속에서 완전히 삶을 포기하고 너부러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말씀을 들음으로 성장한다.”
는 말씀이 결코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매일 하나님의 긍정적인 말씀을 듣는 가운데, 이렇게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함께 점차 기운이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목사님들이 집중적으로 강조하시는 ‘기적의 하나님․능력의 하나임․치료의 하나님․축복의 하나님’은, 제가 이전에 알아왔던 잘못하면 벌을 주시는 ‘무서운 하나님’과 너무 달랐습니다. “이런 하나님께 매달리면 혹시?”하는 희망이 피어났습니다.
마음속에 희망이 불씨가 피어나자, 곧바로 성경 구절들이 살아 운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위 분들이 들려주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1-2)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
등의 말씀들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제 피와 살 속을 타고 흐르면서 심령을 울렸습니다. 너부러져 있던 육신에도 새 힘이 돌기 시작 했습니다
‘말씀’이 곧 ‘생명’임을 발견하고, 이때부터 주야로 성경을 읽었습니다. 이렇게 얼마가 지날 무렵, 정말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전에 성경을 대하면서 가졌던 두터운 의심이, 마치 아침 안개처럼 한 순간에 걷혀졌습니다. 창세기 1장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는 말씀이 곧이곧대로 믿어졌고, 그 이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세상의 힘으로는 절대 극복할 수 없는 폐암이라는 병마보다, 훨씬 더 위에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은 천지를 지으셨고, 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길이 없는 곳에서도 길을 만드시며, 그가 한번 연 문은 어느 누구도 닫을 수 없는 절대자였습니다. 이처럼 전능하신 분의 시각에서 바라보자, “폐암도 별 것 아니네.”라는 전에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생각이 찾아왔습니다. 그야말로 생각이 변하자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그동안 ‘폐암’ 두 글자에 짓눌려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고 지냈던 저는, 모처럼 길게 심호흡을 하고 가슴을 쭉 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6)
‘전능’하심 못지않게, 하나님의 ‘사랑’도 저를 크게 고무시켰습니다. 구약에는 무서운 하나님이 자주 등장하지만, 다행히(?) 그때 제가 주로 읽었던 신약 속의 하나님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디를 읽어보아도 그분은 벌을 내리는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라, 오히려 저의 많은 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제가 잘 되기만을 바라는 사랑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분은 어느 누구보다도 안타까운 시선으로 병상의 저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진단을 받은 후 많은 지인들이 무척 염려해주었습니다. 혹은 눈물로 기도해주셨고, 혹은 물질로 위로해주셨고, 혹은 제가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문자메시지로 격려해 주셨습니다. 또 어떤 분은 매일 병원까지 저를 태워주고 식사까지 챙겨주었습니다. 그분들의 뜨거운 사랑은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으며, 지금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는 그동안의 교제에서 비롯된 인간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달리 하나님 품안에서 생전 처음 알게 된 형제자매들은, 저로 하여금 처음으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김명희권사님은 국립암센터에서 겨우 몇 분이라는 짧은 인연을 맺었지만, 그 이후 불철주야로 저를 위해 기도해주셨습니다. 대학 후배지만 한동안 왕래가 없었던 이수연자매와 그가 소개해준 기도 팀도 그랬습니다. 그분들 또한 생면부지였지만 폭설로 얼어붙은 도로사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늦은 밤에 수차례나 집으로 찾아와서 눈물로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이외에, 한번밖에 뵌 적이 없는 한 권사님은 외국에서 나를 기도를 하시다가 전화로 안부를 묻기도 했습니다. 순복음교회에서 처음 교제를 나누는 목사님․전도사님․구역장님․형제자매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모두들 친자식, 친동생, 친형제를 위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해주셨습니다.
이 분들의 정성어린 기도를 대하면서 저는 한동안 어리둥절했습니다. “어쩌면 저렇게 따뜻한 눈길로 나를 바라볼 수 있을까? 어떻게 초면의 사람을 위해 저처럼 눈물로 기도할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비로소 그것이 인간이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3:16)
라는 말씀처럼, 저를 너무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이미 준비해두신 많은 형제자매님들을 통해서 제게 어마어마한 사랑을 쏟아 부어주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나를 사랑하신다면, 결코 나를 쉽게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 형제자매님들의 고귀하고 뜨거운 사랑을 받으면서, 저는 저절로 깊은 반성과 회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적지 않은 중보기도자들의 삶이 결코 그렇게 편안하고 여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어떤 분은 심한 물질적 어려움을 겪고 있고 어떤 분은 홀몸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등, 세속적인 눈으로 볼 때 그분들 자신도 많은 위로와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심지어 저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놓인 분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은 자신의 문제들을 일단 덮어두고, 오히려 남인 저를 위해 눈물로 기도해주었습니다. 이와 같은 헌신과 사랑 앞에서, 그동안 비교적 여유 있는 삶을 영위하면서도 늘 자신의 문제에만 파묻혀 남의 어려움을 돌아본 적이 없었던 지난날이 너무나도 부끄럽게만 느껴졌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내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깨달은 후에 기도만이 살길임을 깨달았다면, 무한하신 사랑을 깨달은 후에는 하나님께서 결코 나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내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33:3)
라는 말씀을 붙들고, 매일 밤 교회를 찾아가서 간절히 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의사들은 방사선 치료 중이므로 감기에 걸리면 절대 안 된다며 바깥출입을 염려했지만, 저는 방한모․마스크․내복으로 중무장을 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주중에는 광주에서 주말에는 대전에서 겟세마네 기도회에 참가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말씀처럼 힘껏 부르짖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아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이비인후과․방사선과․내과 의사들은 목소리가 다시 돌아오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돌아온 탕자’의 심정으로 울부짖으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했습니다.
“하나님, 그동안 저는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제 마음대로 살아왔습니다. 세속적인 욕심을 위해 불철주야 쉬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남은 것은 세상의 힘으로 치료할 수 없는 병든 육신뿐입니다.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자부했던 것들이 다 헛된 것이었으며, 나를 지켜준다고 굳게 믿었던 것들이 조금도 나를 보호할 수 없음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주님. 이제 저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주님, 지금 이렇게 살다가 아버지 앞으로 가기에는 제 삶이 너무도 허망합니다. 주님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데에는 분명 뜻하신 바가 있을 터인데, 부디 그 뜻대로 다시 살아볼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주님, 저를 받아주옵소서,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옵소서. 오직 하나님만이 저를 치료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치료의 첫 걸음은 회개와 감사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하나님께 자비를 구함과 동시에, 지난날의 많은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먼저 감사할 줄 모르고 지냈던 죄를 고백했습니다. 저와 아내는 비교적 안정적인 교수직에 있었고, 아름다운 집을 가졌으며, 귀엽고 건강한 아들딸도 있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부족함이 없는 행복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이와 같이 많은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조금도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오히려 현재에 불만을 갖거나 더 많은 재물과 명예와 지위를 위해 욕심을 부리기도 했습니다.
병원 치료를 받는 중에, 한 번은 식당에 들렸습니다. 옆의 세 여자 손님이 대화를 나누는데, “나는 이 뱃살만 빠지면 원이 없겠어.” “나는 보톡스로 얼굴의 주름을 제거할 거야.” 등의 대화를 주고받으며, 주로 자신들의 외모에 대한 불만을 쏟아놓았습니다. 당시 “큰애가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만 살 수 있어도”하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저로서는, 그들의 대화가 참으로 씁쓸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이 원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깨달음이 찾아왔습니다. “아, 저게 바로 내 옛 모습이구나!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 많은 것은 차치하고,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은혜였는데, 그것도 모르고 불평불만 속에 살았으니!” 지난날의 제 모습이 너무도 한심스럽고 후회되었습니다. 이때 비로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라는 말씀이 우리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소중한지를 비로소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18:12)
교만의 죄는 더욱 심각했습니다. 저는 교회를 다녔지만 하나님보다 저 자신을 믿었습니다. 내 힘으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모든 일이 형통하는 듯 했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기고만장해졌습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불행이 찾아오는 것을 보면서도, 기도하는 대신 내게는 저런 불행들이 닥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건강에 있어서는 더욱 자부했습니다. 매일 빠트리지 않는 운동과 남들보다 자주 받는 건강검진이 병으로부터 안전하게 저를 지켜줄 것으로 굳게 믿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는 반년에 한번씩 혈액검사․간 초음파검사를 했고, 일년마다 위․대장 내시경과 폐 CT 검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몸에 조그만 이상만 나타나도 곧바로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주변의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나 아픈데도 병원을 찾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저러다 큰일 나지.”하고 조금은 한심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 건강이 이렇게 무너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것도 평소에 건강검진 한 번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빨리 쓰러지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의사들은 종양이 이렇게 크려면 약 3,4년이 걸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폐 CT를 한지 불과 1년 사이에 그렇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때 저는 비로소, “아, 이것이 인간의 한계구나. 결코 내가 나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지켜주실 수 있구나.”라는 것을 통절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 “그동안 내가 이룬 모든 것이 결코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해주신 것이구나. 내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도뿐이구나.”라는 사실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결국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18:12)하는 말씀처럼, 바로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믿었던 저의 교만이 저 자신을 사망과 멸망의 길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이 외에도, 늘 의인의 입장에 서서 다른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정죄 했던 것에 대해 깊이 회개했습니다. 또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원망했던 것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동시에 이 모든 악한 생각들이 제 마음에서 깨끗하게 떠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어떤 때에는 제가 미처 깨닫지 못한 잘못을 하나님께서 꿈속에서 일러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철저히 회개하는 가운데, 문득 제가 왜 병에 걸렸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항상 주님의 뜻대로 살며 무엇보다도 영적 건강을 유지해야 합니다. 불행히도 저는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그 탓에 저의 영은 병들대로 병들었고, 그로 인해 육신마저 병들고 만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온 삶이 너무도 후회스럽고 어떻게든 되돌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는 생각에 안타까움만 몰려왔습니다.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얍2:14)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그렇다고 주저앉아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살아야겠다고 작정했습니다. ‘낫게 해주시면’이 아니고, ‘바로 이 순간’부터이었습니다. 그 일환으로 보험회사에서 지급해준 위로금을 전에 다니던 교회의 건축헌금으로 냈습니다. 큰돈은 아니지만 그래도 망설여졌습니다. “혹시라도 내가 잘못되면 아내에게 도움이 될 텐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씨앗’을 심는다는 마음으로 기쁘게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십일조도 아내와 따로 정확하게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왠지 “살면서 처음으로 재물을 값지게 사용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 한편이 뿌듯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서기 위한 영적 생활의 실천은 물질적인 것보다 더 어려웠습니다. 예컨대, 저를 아끼시는 한 은사님이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좋도록 무조건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감사할 수 있나?”하고 스스로 반문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로 했으니 억지로라도 해야지.”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뜻밖에도 감사거리가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이 병이 아내와 자식이 아닌 내게 찾아온 것에 감사했습니다. 다음으로 아내와 장모님이 이처럼 큰 고난에 직면해서 두려움 대신 웃음으로 믿음으로 기도하게 해주시니 너무 감사했습니다. 혹 아내가 “네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했던 욥의 아내 같았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또 수많은 분들이 저와 같은 큰 죄인을 위해 진정으로 기도하고 염려해주시니 너무 감사했습니다. 세간에는 병원비를 걱정하는 병자들도 적지 않은데, 저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 감사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암 진단을 받고 나면 입맛을 잃는다는데, 저는 오히려 식사를 더 잘하니 감사했습니다. 건강 빼고는 부족한 것이 없음을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계속 감사를 하다보니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던 감사가 나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제라도 제가 하나님께 돌아와 지난날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게 해준, 이 폐암이라는 질병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영몽 Ⅰ
등 뒤에 서 계신 주님
매일 겟세마네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가장 궁금하고 염려되는 것은, “나는 믿음도 약하고 초신자나 다름없는데, 과연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의 기도를 들어 주실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어떤 병자들이 성령의 불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으로 혹은 환상을 보는 것 등으로 치료를 받았다는 간증을 접하면 정말 부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제발 단 한번만이라도 예수님께서 나를 찾아와 주시면.”하고 간절히 염원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체험해본 적이 없는 저는, 그렇게만 되면 저의 오락가락하는 믿음이 확고해질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오”
라는 말씀처럼 정말로 예수님께서 조용히 찾아오셨습니다.
꿈속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엎드려 기도하고 있는 저를
등 뒤에서 자비가 가득한 눈빛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러다 잠시 후에는 예수님이 사라지고 대신
손바닥을 합쳐놓은 모양의 노란 불빛들이,
기도하는 저를 에워싸고 나비처럼 춤을 추었습니다.
꿈에서 깬 뒤, 저와 아내는 이 것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주기 위해 꿈으로 찾아오신 것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미칠 듯이 기뻐하고 용기백배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징표는 현실적인 방사선치료에 바로 나타났습니다. 방사선과 의사는 치료를 시작할 때, “종양과 식도가 붙어있어서 종양에 방사선을 쏘이면 어쩔 수 없이 식도가 손상됩니다. 이 때문에 아마 2주 후부터는 식사를 못하고, 대신 죽을 먹어야 할 것입니다. 아예 죽조차 먹기 힘들 수가 있는데 그러면 잠시 치료를 중단해야 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저와 아내 그리고 많은 중보기도자들은 한마음으로 매우 구체적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주님의 날개깃으로 덮어주셔서,
방사선이 종양만 치료하고 다른 어떠한 신체부위도
손상시키지 못하도록 지켜주옵소서.”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와 같은 기도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셨습니다.
제 식도는 2주는 물론 7주간의 방사선 치료를
다 마치도록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의사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제가 치료를 중단하지 않을 욕심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것 같았습니다. 기도는 의학적인 상식과 염려마저 불식시켜버린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시작하면 입맛이 없어지고 체중이 주는데, 저는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영적으로 매일 말씀을 먹고 악령들과 영적 전쟁을 치르는 것처럼, 육적으로도 어떻게든 잘 먹고 병마에게 무릎 꿇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 역시 기도대로 되었습니다. 치료기간 동안의 매끼 식사는 마치 꿀맛 같았고, 덕분에 체중이 5kg이나 늘었습니다. 진단을 받기 전에는 밥을 겨우 반 그릇밖에 못 먹었고 거기에 소화제까지 먹어야했던 것과 비교하면 너무도 큰 변화였습니다. 저와 아내는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위부터 치료를 해주셨다고 믿고 감사했습니다.
또 한번의 절망
꿈을 통해 하나님께서 동행하신다는 것을 안 후, 저는 하나님이 의사의 손길을 통해서 종양을 깨끗이 없애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되기를 매순간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런 중에 방사선 치료가 다 끝나고 그 한 달 후인 2월 16일, 의사의 지시대로 CT를 찍게 되었습니다. 저는 깨끗이 치료되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검사결과는 다시 한번 저를 크게 절망시켰습니다. 종양이 줄긴 했지만 아직도 대추만한 크기로 남아있었습니다.
이미 방사선 치료를 최대한으로 받았기 때문에 추가 치료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담당 선생님이 여러 요인을 고려하여 마지막으로 5번 더 치료를 한 후, 이제 그동안 몸속에 주입한 방사선의 치료효과를 기대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더 이상 의학적으로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말에, 처음 진단을 받았던 때보다 더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이젠 끝이구나,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안 들어주시는구나.” 라는 생각에 그동안의 믿음이 통째로 무너지고, 희망의 불씨가 완전히 식어버렸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홀로 남았다는 생각에, 한동안 외면하고 살았던 두려움과 슬픔이 다시 파도처럼 몰려왔습니다.
이때 마음속에 문득 ‘금식기도’가 떠올랐습니다. 평소에는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하고 회의적이었는데, 이번에는 왠지 성령님의 인도하심 같아서 그냥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또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계속 여쭈었습니다. 하루, 이틀이 지났지만 하나님은 묵묵부답이셨습니다. 갈수록 답답한 나머지 조급증까지 났으며, 처음 해보는 금식이라 육체적으로도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 심신이 매우 지친 가운데,
“아들아, 네가 손마저 내밀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너를 돕겠느냐?”
라는 음성이 똑똑히 들려왔습니다. 저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아, 이렇게 포기하고 주저앉아 있으면,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도우실 수 있겠는가?”
문득 자포자기한 학생들은 아무리 성의껏 끌어 주려해도 뜻대로 되지 않았던 학생지도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그런 모습으로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얼른 몸과 마음을 추스렸고, 오직 믿음만이 살길임을 되뇌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랬듯이 믿음을 쌓은 데에는 기도 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매일의 겟세마네기도회에서 초심으로 되돌아가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9:22)
이렇게 기도하는 가운데, 저는 목사님의 설교에서 매우 중대한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많은 사람들이 문제 해결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하긴 하지만, 정작 마음속으로는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기도응답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마태복음 9장에 나오는 혈루병을 앓는 여인을 비롯해서 성경 속의 많은 병자들은, 모두 자신의 믿음으로 병 고침을 받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는 그들에게 매우 분명히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9:22)라고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목사님의 설교와 성경 말씀은 마치 저를 정면으로 겨냥한 것 같았습니다. 저는 발병 후에 비록 한시도 쉬지 않고 간절히 기도했지만, 마음 저변에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실제로 나을 수 있을까?”하는 의심이 짙게 깔려있었던 것입니다.
‘의심’이라는 문제의 본질을 분명히 알아차렸지만, 그것을 마음에서 쫓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눈에 보이지도, 손으로 만져지지도, 귀에 들리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다고 하니 더욱 그랬습니다. 하나님에 비할 수 없는 사람들의 언약은 잘 믿으면서, “너는 살 수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믿어지지 않으니 실로 답답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살길은 오직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뿐입니다.
제발 제게 믿음을 주시옵소서.
믿음에 믿음을 더해주시고,
모든 의심이 사라지게 해주옵소서.”
믿음이라는 문제는 자신이 해결해야 할 터인데 그것까지 하나님께 구하고 있는 제 자신이 한심스러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기도를 들어 주실까?” 하는 의문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성경 중의 한 귀신 들린 자의 아비가 예수님께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막9:24)
라고 소리쳤던 것을 거울삼아, 염치 불구하고 무조건 매달렸습니다. 한없이 좋으신 하나님은 이러한 기도에도 응답해주셨습니다. 다시 믿음의 벽돌이 차곡차곡 쌓이며 의심이 조금씩 떠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이사야53:5)
막 새롭게 믿음의 벽돌을 쌓고 있던 어느 날, 담임 목사님께서 “그가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이사야53:5)라는 말씀으로 두 가지를 강조하셨습니다. 첫째, 이 말씀에 따르면 예수께서 이천 년 전에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이미 모든 질병에서 자유롭게 되었으므로, 저의 병도 이미 나았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 말씀을 조금의 의심도 없이 믿고 받아들이는 그 순간에 바로 하나님께서 역사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반신반의하고 있는 저에게 목사님이 다시 말씀했습니다. “믿음은 결단입니다. 처음에는 안 믿어지지만, 그것을 믿기로 작정하고 믿어질 때까지 노력해야합니다. 그러다 보면 머릿속에서 왔다갔다하던 믿음이 점차 가슴으로 내려가고, 다시 배까지 내려가게 되어 배짱 있는 믿음으로 변합니다. 그 순간 하나님의 치료가 이루어집니다.”
이어서 목사님은 이처럼 배짱 있는 믿음을 갖기 위해서 일단 교회 기도원에 들어가서,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는 말씀을 만 번 쓰고, 또 쓰는 중에 입으로도 계속 선포하라고 시키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기독교인들이 한 구절의 말씀에 의지하여,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온갖 역경들을 헤쳐 나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컨대 저희 목사님은 평생 동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라는 말씀을 붙들고 기도함으로, 여러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극복하셨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목사님이 역설해주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는 이 한 구절이 저의 생사를 결정짓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믿으면 살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곧 죽음이었습니다. 의학적으로 이미 아무런 방법이 없었으므로,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한 구절의 말씀은 제 꺼져가던 생명을 되살려놓았고, 앞으로의 인생에도 매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기도원에서의 치열한 영적 전쟁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
다음 날 바로 목사님의 말씀대로 저희 교회의 기도원을 찾아갔습니다. 종종 방송에서 기도원에 관한 부정적인 뉴스를 접한 적이 있는 저는, 기도원이라는 곳에 대해 일종의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를 맞이한 대전국제금식기도원의 김완수전도사님과 젊은 전도사님 내외분은 첫눈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한 분들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기도원의 첫 새벽기도 때, 김완수전도사님께서 저를 위해 기도하시던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시편 27편1-3절의 말씀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부리나케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 하리요.
나의 대적, 나의 원수 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 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 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초신자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 자체가 매우 생소했던 제게 전도사님께서 그 의미를 설명해주셨습니다. “병마가 박교수를 삼키려고 달려들었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힘으로 그것을 너끈히 물리치게 된다는 뜻이니, 앞으로 조금도 염려하지 말고 열심히 기도하며 푹 쉬면 반드시 나을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나서 기분은 매우 좋았지만, 솔직히 곧이곧대로 믿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성령님께서 일찌감치 김완수 전도사님을 통해서 결과를 일러주신 것이었습니다.
기도원 생활은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단순했지만, 속으로는 끊임없이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렀습니다. 예배와 성경 읽기를 제외한 나머지 시간 내내, “그가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는 말씀을 계속 썼고 또 내 귀에 들리도록 선포했습니다. 밥을 먹고 산보를 할 때에도, 오직 이 말씀만 생각하고 중얼거렸습니다. 심지어 밤중의 잠결에도 그러했습니다. 실로 사활을 걸고 이 말씀을 믿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때 악령들 역시 발악하듯이 훼방하고 나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손으로 쓰고 입으로 선포하는 중에, 머리 한 편에는 암이 온몸에 전이되어 꼼짝 못하고 병상에 누워있거나 아내가 제 장례식장에서 조문객을 받는 등의 모습들이 떠올랐습니다. 목사님은 마귀가 주는 이러한 부정적인 생각에 절대로 넘어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미래의 일을, 그것도 꼭 불행한 결과만을 미리 앞당겨서 염려하는 것은 바로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부정적인 미래도 하나님께서 허락할 때 비로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오늘밤이라도 당장 부르시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게 되고 미래의 일은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게 됩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생각이 찾아오면 얼른 정신을 차리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를 삼키려드는 어둠의 세력과 병마귀신은 떠나갈 찌어다. 나는 하나님의 존귀한 아들로 이미 치료받았노라. 너는 내 몸의 세포 하나도 해칠 수 없노라.”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꿈을 꾸었습니다. 예전보다 건강한 모습으로 복직하여 동료들 앞에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치료되었노라고 증거하거나 교회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간증하거나 학생들에게 전도하는 것 등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런 모습들을 떠올리며 혼자 즐거워했습니다. 또 훗날의 간증문을 머릿속으로 매일 새롭게 썼습니다. 매일 쓰다보니 내용도 매일 늘어갔습니다. 그런데 이 간증문은 제가 쓰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쓰고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내일 내용이 무엇인지, 언제 끝날지, 마지막은 또 어떻게 될지 등을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간증문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간증문이 온 세상에 주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훌륭한 증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와 같이 “너는 죽을 것이다.”는 어둠의 세력과 “너는 이미 나았다.”는 하나님의 생각 사이에서 벌어지는 ‘영적 전쟁’은, 하루에도 수백 번씩 되풀이되었습니다. 막 기도원에 들어갔을 때에는 어둠의 세력이 일방적으로 기세를 부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쓰며 선포하고, 의심을 물리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또 김완수전도사님․이정조전도사님 내외분이 매일 저를 영적으로 무장시키고 헌신적으로 보살펴주는 가운데 상황이 변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점차 부정적인 생각을 쫓아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의심과 두려움과 염려가 사라지고, 그 대신 “내가 이미 나았다.”는 믿음과 평안과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급기야 사탄이, “네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넌 죽어”라고 소곤거리면, “그래 죽을 거야. 그런데 하나님이 부르시는 때에”라고 대답하며 씩 웃을 수 있는 여유도 생겼습니다. 그뿐 아니라 똑같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여호수아와 갈렙이 “우리는 저 땅에 사는 자들에 비하면 메뚜기다.”라고 했던 나머지 사람들과 달리 “저들은 우리의 밥이다.”라고 외쳤던 것처럼, 나도 “폐암 네가 나를 삼키려왔지만, 여호와가 함께 하시므로 오히려 내가 너를 밥으로 먹어치우고 전보다 더 건강해질 것이다!”라고 외쳤습니다. 목사님의 “처음에는 머리에서 왔다 갔다 하던 믿음이 가슴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배로 내려가서 배짱 있는 믿음으로 자리 잡는다.”는 말씀이 실감났습니다.
영몽Ⅱ
하나님의 방법으로 치료하시다
“예수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는 말씀을 만 번 다 써가고 마음으로도 그것이 믿어질 무렵, 두 번째 영몽이 찾아왔습니다.
3월 15일,
꿈속에서 제가 수술대에 누워 있는데
기생충 한 마리가 가슴에 솟아올랐습니다.
수술 칼을 손에 쥔 외과의사가 그것을 제거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날쌔게 도망치는 것을
어찌하지 못하고 결국은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김완수전도사님께 말씀드렸더니, “하나님께서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보여주신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랬습니다. 누가 보아도 저의 병은 세상의 힘으로 치유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날 저는 종일
“하나님, 제가 세상의 방법으로 나을 수 없음을 잘 압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저를 치료하실 수 있습니다.
죽어 가는 생명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생기를 불어넣어
주옵소서.”
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날 밤에 꿈이 이어졌습니다.
제가 왼쪽 겨드랑이를 조금 절개한 상태로
수술대에 누워 있었고,
희고 통통한 닭이 그 옆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밤의 기생충이
절개된 곳으로 슬며시 고개를 내밀자,
흰 닭이 순식간에 그것을 쪼아 먹었습니다.
너무 간단하다 싶을 정도로 단번에 깨끗하게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 순간에 잠이 깨었는데, 즉각 기도의 응답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김완수전도사님께 말씀드렸더니 역시 하나님의 치료를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는 영몽이라며 기뻐하셨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새벽기도를 드리러 가는데,
생전 처음으로 별똥별이 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얼른 “하나님 깨끗이 낫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했습니다. 왠지 지난밤의 꿈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저녁 겟세마네기도회에서는 더욱 범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기도회의 마지막 순서로 막 주기도문을 외우려고 하는데, 갑자기 목사님께서 잠깐 중지시키시더니
“오늘 폐암이 나았습니다.”
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저와 아내는 얼떨결에 ‘아멘’했는데 정말 소름이 돋을 만큼 깜짝 놀랐습니다. 저희는 목사님께 꿈에 대해 말씀을 드린 적도 없었습니다. 영의 세계는 하나로 통한다는 사실을 그 날 처음 알았습니다.
그 날 저는 닭 꿈, 별똥별, 목사님의 선포 등으로 매우 고무되었습니다. 맹장염 환자가 수술을 받고 나면 근본치료는 이미 끝마쳤고 꿰맨 상처만 나으면 되듯이, 나도 하나님께서 이미 영적으로 치료를 하셨으므로 육적으로 보이는 종양은 이제 곧 사라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특히 이날의 닭 꿈은 이후의 영적 전쟁에서 대단히 큰 힘이 되었습니다. 마치 요셉이 자신이 꾸었던 꿈을 붙들고 숱한 고난을 이겨내었던 것처럼, 저도 어려운 순간마다 이 이 꿈을 떠올리며 마음의 의심을 내쫓고 믿음으로 극복하였습니다.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마21:21-22)
일련의 일반적이지 않은 체험들로 승리를 확신하던 차에 항암제를 맞을 때가 되었습니다. 방사선 치료를 모두 마친 후, 의사는 남아있는 종양을 없앨 수는 없겠지만 암이 전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항암제를 맞으라고 말한 바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은 하나님의 ‘믿음 시험’이었습니다. 아내와 장모님은 이미 다 나았으므로 항암제를 맞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비록 영적으로 이미 치료를 받았지만, 육적으로 아직 종양이 남아 있으니 당연히 의학적인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 뜻대로 항암주사를 맞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첫 번째 주사를 맞고 난지 얼마 안 되어, 목사님이 저를 찾아 근황을 물으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치료해주실 것은 확실히 믿습니다. 그런데 아직 종양이 남아 있으므로 항암주사를 맞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기도와 의학적 치료를 병행하는 것이 하나님께 죄송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목사님도 그것이 죄를 짓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대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이 그처럼 양다리 걸치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며, 진짜 믿음에 대해 설명해주었습니다. “‘없어질 것’을 확신한다면 왜 앞당겨서 ‘없어진 것’으로 믿지 못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믿고 구한 것은 ‘받을 줄로’가 아니라 ‘이미 받은 줄로’ 알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믿음이란 미래형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현재형으로 믿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는 아직 종양이 남아있더라도 그것이 이미 없어진 것으로 믿는 것 그것이 바로 진짜 믿음입니다.”
말씀을 듣고 나서, 그동안 하나님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던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아직도 마음의 의심을 완전히 씻어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 저를 향해, 목사님은 이미 만 번이나 쓴 “예수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는 말씀을 오천 번 더 쓰고, 또 더 이상 하나님과 의사 사이를 왔다 갔다 하지 말고 단호하게 결단을 내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전에 저는 병원치료를 거부하고 기도에만 매달리는 사람을 보면 거의 비이성적인 ‘광신자’로 매도했습니다. 너무나도 상식에 서 벗어나 보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작고하신 아버님이 의사이셨고 형님과 매형도 현재 의사로 활동 중이다 보니 남달리 의학을 의지하고 신뢰해온 저로서는, 더욱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제가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난 뒤, 불현듯 다음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맞아, 하나님이 지켜주시면 항암제 같은 것 맞지 않아도 전이가 안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항암제 할아버지를 맞는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거야.” 정말 놀라운 변화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아니었다면, 결코 그동안 하나님 외의 또 하나의 생명 줄처럼 의지하며 매달리던 의학의 끈을 이처럼 단번에 내려놓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날 밤, 저는 목사님이 언젠가 설교 중에 해주신 파리가 미국 가는 얘기를 떠올렸습니다. 이 세상의 어떠한 파리도 자신의 힘으로는 태평양을 건너 갈 수 없습니다. 대신 미국행 비행기에 탄 뒤 천장에 가만히 붙어있으면 아주 쉽게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비행기에 오른 파리가 무임승차한 것이 미안하다고 해서 혹은 더 빨리 가야겠다며 비행기 안을 이리저리 날아다닌다면,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오히려 잘못하다가는 사람들에게 잡혀죽고 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자신의 문제를 일단 하나님께 맡겼으면 묵묵히 기도하며 기다려야지, 괜히 인간의 얄팍한 지식이나 염려 등에서 출발하여 내가 무언가를 해보겠다고 나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괜히 고생만 자초하고, 하나님이 일하시는데 방해가 될 뿐입니다. 제가 항암제를 한 번 맞았다가 머리가 다 빠지는 불편을 겪었던 것이 좋은 예입니다.
영몽Ⅲ
말씀을 주시다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마음속의 의심이 많이 걷혀진 그날 밤, 저는 또 한번의 영몽을 꾸었습니다.
검정 칠판에 크고 흰 글씨로
‘대하17:1-3’라고 쓰인 것이 꿈에 보였습니다.
새벽에 깨어 그것이 무엇일까 궁금해 하던 저는, ‘17:1-3’이 성경 구절을 가리키는 것 같아서 구약부터 쭉 살펴보았더니 “역대하”라는 편명이 있었습니다. 이거구나 싶어서 찾아보았더니, 유대의 한 임금인 여호사밧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우상을 섬기지 않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복을 받아 누렸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반면에 바로 앞 16장에 나오는 그의 아버지 아사는, 중병에 걸렸을 때 여호와보다 의사를 먼저 찾았다가 결국 죽고 말았다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생전 처음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았다는 것도 놀라운데, “더 이상 의사라는 우상을 숭배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라, 그리하면 복을 누릴 것이다.”라는 메시지는 바로 지난밤에 이제 더 이상 의사를 의지하지 말고 사나죽으나 하나님께 맡기라고 했던 목사님의 말씀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어서 더더욱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들은 이전의 닭 꿈, 목사님의 치료선포 등과도 무관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곰곰이 정리해보니 하나님께서는 일찌감치 닭 꿈과 목사님의 선포를 통해 치료해주실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믿음이 약하고 의심이 많은 탓에, 저는 하나님의 생각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항암제를 맞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답답해지신 하나님은 목사님을 통해, “더 이상 의사를 믿지 말고 나만 믿으라.”고 재삼 강조하셨습니다. 그것도 모자랐던지 그 날 밤 또 ‘역대하’의 말씀으로
“그렇게 하면 네가 진정 복이 있을 것이다.”
는 계시까지 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마음의 의심을 걷어내기 위해 얼마나 애쓰셨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종종 하나님은 친절한 분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직접 체험하면서 정말로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약1:6-7)
항암제를 맞지 않겠다고 하자, 제일 먼저 형님의 반대가 극심했습니다. 왜 항암제를 맞아야 하는지를 의학적으로 설명해주는데 너무도 의학적이고 과학적이며 이성적이었습니다. 누님도 “신앙생활 하는 것은 좋지만 최소한 주위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어야 하지 않느냐?”며 답답해했습니다. 다른 많은 분들도 이제 내가 완전히 삶을 포기했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예수님이 말씀으로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나사로를 되살린 것 등을 세상의 논리, 이성, 지식 등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믿음이란 본래 초자연적인 것임을 역설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 엎드려 저들이 훗날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제 믿음이 견고한 듯 했지만, 솔직히 마음속의 모든 의문과 염려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천은 치료와 기도를 병행하는데, 나는 목사가 될 사람도 아니면서 왜 치료를 받으면 안 되나?”
“항암제를 맞지 않으면 전이될 수 있다는데, 목사님은 걱정도 안 되시나?”
“…혹시 목사님이 극적인 간증거리를 만들려고 그러시나?…아니야. 그 분의 신앙과 인격을 믿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서 누구를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이었습니다. 목사님과 마찬가지로 항암제를 맞지 말라고 하시는 김완수전도사님께 조금은 원망스러운 투로 여쭈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사람마다 다르게 역사 하십니다.
치료와 기도를 병행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런데 박교수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꿈 등을 통해서
당신이 직접 치료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것은 결코 평범하거나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박교수를 통해서 주님의 큰 능력을 나타내시고
그것으로 영광을 받으려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 바라봐야지,
세상 의사에게 의지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다시 가장 걱정스러운 점을 여쭈었습니다. “전이가 안 될까요?” “100%보장합니다. 절대 전이가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온전히 바라보는 사람을 특히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시는 박교수를 반드시 지켜주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표정이 얼마나 분명하고 확고한지, 더 이상 의심할 수가 없었습니다. 후에도 전이의 두려움이 찾아오면, 이 때 전도사님이 보여주셨던 단호한 표정을 떠올리며 다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세상의 눈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람의 능력으로 어떻게 전이가 안 된다고 100% 보장할 수 있단 말입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전도사님 안에 내재하신 성령님께서 전해주시는 메시지였습니다. 아무튼 전도사님께서 승리를 확신하고 반석과 같은 믿음으로 인도하시는데, 제가 주춤거리고 있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습니다. 목사님이 자주 하시는 “혹시 운이 없어서 호랑이 등에 올라타게 되더라도, 호랑이가 지쳐 죽을 때까지만 버티면 사는 것은 물론 호랑이까지 잡게 된다.”는 말씀을 떠올리고 오직 믿음으로 전진 또 전진하기로 다짐했습니다. 문득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약1:6-7)는 말씀이 떠오르며, 하나님과의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고난인가? 축복인가?
사실 의학적으로 이미 별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제 마음 속에는 그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병원을 몇 군데씩 가본다는데 나도 그렇게 해볼까? 아니면 미국으로 한 번 가볼까? 혹시 종양이 줄어들어서 수술이 가능한 날이 오지 않을까?”
가엽게도 저는 하루에도 수차례 이런 생각들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단호하게 십자가만을 바라보기로 결정하자, 주님께서 곧바로 귀한 선물들을 주셨습니다. 먼저 승리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었습니다. 목사님의 지시대로, “예수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는 말씀을 다시 오천 번 쓰기 시작했는데, 마음속으로는 이미 최후승리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도 중에 약속을 꼭 지키시라고 하나님을 협박(?)하기도 했습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역대하16:9)’
고 약속하신 하나님. 이제 그 말씀에 따라 병원도 끊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봅니다. 사람들은 그런 저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지만, 아버지는 신실하신 분이시니 꼭 약속을 지켜주십시오. 아멘.” 이때부터 찬송가 487장의 3절 가사를 참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친구 멸시하고 너를 조롱하여도~예수 품에 안기어서 참된 위로 받겠네.”
다음으로 항상 마음이 편하고 즐거웠습니다. 예컨대 전에는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을 볼라치면 정말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습니다. 제가 집을 떠나 기도원에 묶었던 큰 이유 중의 하나도 이러한 고통을 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직접 식구들을 돌봐주신다고 생각하니, 이전의 아픔과 염려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그 대신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평안함과 새로운 가족애로 가슴이 충만해졌습니다. 또, 전에는 연세 많은 분들이 세상의 누구보다 부러웠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 된 제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평안함과 행복감은 살면서 처음 맛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동안 모든 일을 내 힘으로 하겠다며 늘 긴장과 염려와 불안 속에 지내온 것과 너무도 대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지인들이 “얼마나 견디기 힘드냐?”고 위로할라치면, “어, 아닌데 난 지금 너무 행복한데”라는 정반대의 생각이 들었고, 심지어 “지금이 도대체 고난의 시간인가? 축복의 시간인가?” 하고 헷갈려 했습니다. 돌아보면, 이 기간은 제 삶에서 가장 큰 고난이자 동시에 가장 큰 축복의 시간이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희를 대적하라.” (벧전5:8)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시126:5-6)”
라는 말씀처럼, 믿음의 씨앗을 뿌린 뒤 눈물로 물을 대고 기쁨의 결실을 눈앞에 두자, 원수마귀들이 별별 시험으로 저를 무너트리려고 했습니다. 어쩌다 티브이를 켰는데, “폐암말기랍니다. 아무 희망이 없답니다.”라는 연속극 대사가 들려왔습니다. 또 어쩌다 신문을 보았는데, 모 인사가 폐암으로 사망했다는 기사가 눈에 띠였습니다.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맞아, 폐암에서 어떻게 산다고.”라는 생각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습니다. 그럴 때면 곧장 하나님이 제게 주신 약속과 말씀들을
떠올리며, “난 반드시 승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할 것이다.”고 소리쳤습니다. 심지어 같은 크리스천이 시험을 줄 때도 있었습니다. 한 번은 믿음이 좋은 친구동생 내외가 격려한다며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줄곧 “천국에 대한 확신이 있느냐? 이제 천국에 소망을 두라.”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 말고 이 땅에서의 천국과 하나님의 기적을 꿈꾸며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르는 저의 사기만 떨어뜨릴 뿐이었습니다.
육적인 고통이 찾아올 때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가슴이 무척 아팠는데, 무어라고 설명조차하기 힘든 종류의 통증이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도 괴롭지만, 혹시 상태가 악화된 것은 아닐까하는 정신적 두려움은 더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이 때, 정말 솔직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 이제 저는 찾아갈 의사도 병원도 없습니다. 제가 왜 아픈지 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이유를 아시고 치료하실 수 있습니다. 아버지 제발 도와주시옵소서. 아멘.” 똑같은 기도를 2주 동안 하는 가운데 통증이 사라졌습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
라는 말씀이 실제로 증명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도응답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밀접해졌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낮에 늘 영적으로 깨어있으며 틈을 보이지 않자, 교묘한 마귀들은 밤중의 꿈이나 기도중의 환상으로 나타나 두려움을 주고 믿음을 흔들려고 했습니다. 어떤 때는 지인의 모습으로, 어떤 때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모습으로, 어떤 때는 무시무시한 괴물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예수의 피’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쫓아버리거나 성령의 검으로 조각 내버렸습니다.
마귀들과의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했습니다. “내가 죽으면 이 세상이 큰일 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아. 나를 슬퍼하던 사람들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겠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떠나보내고도 잘 사는 것처럼. 따라서 삶과 죽음의 문제가 자신이 아닌 주님을 위한 것일 때 비로소 의미가 갖게 되는 거야.”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투병의 목적이 매우 확실하고 분명해졌습니다. 이제는 단순히 내 수명을 얼마간 연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정말 죽어도 승리하겠다는 각오가 생겨났습니다. 이는 언젠가 목사님이 “박교수가 살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려고 기도하라.”하고 말씀하신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큰 깨달음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싸울 때 하나님은 반드시 나를 도우실 것이므로, 전보다 훨씬 더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심지어 이제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병마와 싸워주시므로, 이 싸움은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는 싸움이었습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81:10)
믿음이 충만하다고 생각되자, 두 달간의 기도원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가족들을 보고 예전처럼 마음이 아프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늦둥이의 재롱에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기도원에 있을 때처럼, 낮에는 시간이 되는 대로 성경을 읽고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다 밤이 되면 빠짐없이 겟세마네기도회에 나가서 영의 양식을 먹고 힘껏 기도했습니다. 말씀과 찬송과 기도가 바로 치료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건강 상태를 물으면, “다 나았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대해 믿음이 좋은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맞아요, 좋아지겠지요.”라고 화답했습니다. 제 말을 믿지 못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이때 비록 목소리가 조금씩 좋아지고는 있었지만 아직도 정상적인 대화가 힘들었고, 몸에는 종양이 남아있었습니다.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가는 교회지만 그래도 이 두 가지를 기도제목으로 사십일 작정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치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세상지식을 더 믿는 사람들이 아버지의 위대하심을 깨닫고 아버지 앞에 겸손히 엎드릴 수 있도록, 의학적으로 깨끗하게 해주옵소서. 목소리를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전에는 제 영광만을 위하던 것을 이제는 가족예배, 성가대 봉사, 전도 등과 같은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에 힘껏 사용하려고 합니다. 아버지 도와주옵소서. 아멘” 목소리의 조속한 회복을 위해 믿음으로 성가대에 서서 벙어리 찬양을 하기도 했습니다. 주위 분들도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겠다는 것이니, 이제 박교수보다 하나님이 더 답답해서 얼른 고쳐주실 것이다.”하며 격려해주셨습니다.” 항암제 부작용으로 머리가 다 빠지는 바람에 찬양대에 설 수 없게 되었을 때에는, 대신 매일 산에 올라가서 찬양을 했습니다. 여전히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목소리는 회복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했던 의사들의 말이 떠올랐고, “목소리는 돌아오지 않더라도 종양만 없어져도 그것이 어딘데”하고 일시적으로 꿈이 오그라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에게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81:10)하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또 목사님도 설교 중에 자주, “무소부재하시며 무소불위하신 하나님, 온 우주의 운행과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찾아놓고 겨우 호박 한 덩이나 구하는 바보 같은 성도가 되지 말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청댐만큼 입을 벌리기로 작정했습니다. “하나님, 종양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하고, 앞으로 주님을 위해 열심히 충성․봉사할 수 있도록 20대 때와 같은 건강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목소리도 아름다운 찬양을 올려 드릴 수 있도록, 아프기 전보다 고음이 더 잘나오게 해주십시오. 물질의 축복도 주셔서 십일조를 천만 원씩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아멘.”
하나님의 기적은 밤사이의 소리 없는 눈처럼
남이 들으면 꿈같은 소리를 사십 일 작정기도 동안 내내 되풀이했습니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 눈에 띠게 점차 목소리가 좋아졌습니다.
그러던 6월의 어느 날,
산에 가서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찬송 539장 ‘이 몸의 소망 무엔가’를 소리 죽여 부르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터지면서
예전처럼 이 찬송을 부를 수가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그 감격은 정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그분의 기적은 결코 요란스럽지 않았습니다. 다만 매일 겟세마네기도회에서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송할 때, 마치 밤사이의 소리 없는 눈처럼 아무도 모르게 강림하셔서 마침내 목소리를 묶고 있던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신 겁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조용히 일하시며, 결코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종종 “정말 그 분이 했나?”하는 의심을 받으실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베푸시니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입니까?
목소리가 회복되어 마음껏 성경을 소리 내어 읽을 수 있고, 찬송가를 부를 수 있고, 사람들과 자유롭게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꿈같았습니다.
그런 중에, 일찍이 하나님께 목소리가 회복되면 행하기로 약속했던 세 가지 서원을 떠올리고 곧바로 실천에 옮겼습니다. 가장 먼저 매일 아침 가족예배를 드림으로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다음으로는 성가대 활동을 재개함으로 교회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제가 만난 하나님을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오 나의 아버지 하나님!
호사다마라는 말처럼 목소리가 좋아진 대신 갑자기 두통이 찾아왔습니다.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은, “약 좀 먹으면 좋아지겠지.”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을 것입니다. 암환자인 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두통약도 들지 않으면 좋지 않은 겁니다.”라고 했던 의사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전이의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두통 자체보다 훨씬 더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급기야 기도원을 찾아가서 3일간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통증은 더 심해졌고, 두려움도 불어났습니다. 믿음만이 살길인 제게 있어서, 두려움과 의심은 가장 무서운 적이었습니다. 부득이 병원검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김완수전도사님은 안수기도를 하신 뒤 절대 염려 말라고 하시면서, 가슴도 다 나은 것 같으니 폐 검사도 함께 받아보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아! 작정기도 대로, 이제 의학적으로도 증명해주시려나 보다.”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곧바로 병원에 예약을 했습니다.
6월 27일, 머리 MRI 검사를 위해 광주로 향했습니다. 비록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을 굳게 믿었지만, “전이가 됐으면 어떻게 하지?” 하는 두려움이 엄습해왔습니다. 몇 시간 후에 자기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자신이 너무도 불쌍해 보였습니다. 자신만만한 것처럼 살아왔지만 나란 존재는 그처럼 연약할 뿐이었습니다. 입술을 깨물며 오직 하나님만이 나를 지켜줄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마음에 되새겼습니다.
병원에 도착하여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MRI 검사를 받았습니다. 검사 내내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잠시 후, 담당 의사로부터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검사 결과를 듣는 순간 하나님께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셨습니다. 항암제 대신 당신을 택한 저를 지켜주신 것입니다. 그동안 다소 멀게 보이던 하나님이 한발 더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다음 날의 PET검사는, 지난 2월 CT상에 남아있던 종양의 상태 및 몸 전체에 걸쳐 전이여부를 체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7개월 전, 정말 감당하기 힘든 충격을 안겨주었던 검사를 다시 받으려니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그때와 달라진 점은 검사 내내 하나님께 매달린 것입니다. 그동안 그 것만이 저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기도 속에 촬영을 다 마친 듯싶었는데, 갑자기 검사를 맡은 젊은 의사가 목 부위를 다시 촬영하자고 했습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정확한 것은 내일 교수님들이 나와 봐야 알겠지만, 아무래도 암이 임파선 쪽으로 전이된 것 같아서 그 부위를 더 상세히 찍자는 것이었습니다. 의심스러운 부위를 다시 촬영하고 병원 문을 나서는데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이전에 의사들이 전이 방지를 위해 항암제를 맞아야한다고 했을 때,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뜻에 순종하여 그것을 거부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고 말았지?” “하나님이 없다는 말인가?” “내가 꾸었던 꿈들과 목사님과 전도사님이 해주셨던 말씀들, 그 모든 것이 다 거짓이란 말인가?” 마음 한편으로 이런 의심과 부정적인 생각들이 마구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왠지 다른 한편으로는 의사가 뭐라고 했던지 절대로 그럴 리 없다는 막연한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김완수전도사님에게 전화를 드려 병원에서의 일을 전해드렸습니다. 전도사님은 절대 그럴 리 없다며, 사무엘상1:17-18절의
“엘리가 대답하여 가로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느니라”
라는 말씀을 읽어주시며 편히 자라고 했습니다. 한나라는 여인이 아들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는데, 그 것을 본 엘리 라는 제사장이 그대로 될 것이라고 하자, 그녀가 더 이상 수심하지 않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말씀 속의 한나처럼, 하나님께서 다 해주실 것으로 믿는다면 더 이상 염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의사가 무슨 말을 했던지 말입니다. 그래서 전도사님 말씀대로 편안하게 마음을 먹고 잠을 청했습니다.
다음날 검사결과를 듣기 위해 아침 일찍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담당교수님이 회의 중이라서 약 두 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저는 차안에서 혼자 사도신경, 찬송, 말씀, 주기도문 순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1인 예배였습니다. 그런 중에 전날 의사가 아무리 촬영결과에 근거하여 판단을 내렸다고 하더라도, 절대 그럴 리 없다는 믿음이 점점 더 확고해졌습니다. 그 때 누군가 제 생각을 엿보았다면, 아마도 저를 의학적으로 근거가 있는 엄연한 객관적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으려는 광신도로 취급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처럼 비의학적이고 비과학적이고 비이성적으로 보여 지는 믿음이 마침내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저를 처음부터 계속 진료해온 방사선과 의사가 전날의 검사 결과를 보더니, 젊은 의사가 의심했던 임파선 쪽은 예전부터 있던 것이라며 전이된 것이 아니라고 단정지어 말했습니다.
할렐루야! 젊은 의사가 저를 처음 진료한 탓에 벌어진 일종의 해프닝이었습니다. 결국 지난밤만 해도 전이되었다는 암이 하룻밤 사이에 없어진 셈이 되었으니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한 일입니까. 게다가 다른 곳으로도 전혀 전이가 되지 않았다니, “오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외침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뿐 아니라 마치 그분의 숨결이 내 목덜미에 느껴지는 듯 했습니다.
방사선과 의사선생님은 제가 가장 궁금해 하는 가슴의 종양상태에 관해서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우선 지난 2월 사진에 비해 크기가 줄어들었다며 기뻐했습니다. 전에는 종양과 식도가 딱 붙어있었는데, 지금은 그 사이에 틈이 보일 정도로 종양이 작아져서 어쩌면 수술로 완전히 제거해내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냐고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보다 더 고무적인 점은, 현재 사진으로 보이는 형태도 껍데기만 존재할 뿐, 실제로는 이미 죽은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일부분이 조금 의심스러워 보이니, 다음 주에 의사 몇 분들과 함께 만나 상의해보자고 했습니다.
그동안 항암제를 포함하여 아무런 치료를 받지 않았는데도 전보다 크기가 줄어들었고, 전이도 안 되었고, 게다가 남아 있는 형태도 일부만 살아있는 것으로 의심된다니 정말 꿈만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동안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부지런히 예배드리고 기도할 때 주님께서 직접 만져주셨음이 틀림없었습니다. 혹시 의사의 말처럼 일부가 살아있다 해도 조금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박진순전도사님이 말씀해주신 것처럼, “그까짓 것, 기도하면 없어져.”라는 자신감이 넘쳐났습니다. 전화로 소식을 전해들은 아내는 한술 더 떴습니다. “기계를 어떻게 믿어요. 의사가 의심하는 부분도 이미 하나님이 다 치료하셨어요. 다만 사탄이 우리를 시험하려고 그렇게 보이게 하는 거예요.”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아내의 믿음은 저보다 한 걸음 앞서 있었습니다. 이날 저는 “오 나의 아버지 하나님!”을 수없이 외쳤습니다.
믿음은 끝없이 성장하는 생명체와 같은 것
온전한 ‘믿음’으로 살아가기란 정말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검사결과를 듣고 병원 문을 나설 때만해도, 저는 한없는 기쁨으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일부가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 영 찜찜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의사가 “종양과 식도사이에 틈이 생겨서 어쩌면 수술이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고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습니다. 거의 동시에 김완수전도사님의 오빠가 서울대의대 동창회장이라는 것도 생각났습니다. 얼른 전도사님께 전화를 드려서, 종양이 줄어든 것이 어쩌면 하나님께서 수술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인지도 모르니 오빠께 부탁해서 유능한 의사를 소개받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일순간에 벌어졌습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하나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원이나 없게 우리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의사에게 수술을 받아보자.”라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긴다고 하면서도 “혹시 의사가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와 잠재의식이 일시에 분출된 결과였습니다. 저는 평소에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매일 주시는 만나 덕분에 생명을 유지하면서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심하고 원망하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해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어쩌면 저렇게 배은망덕하고 한심스러울까? 나는 절대로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하고 다짐했었습니다. 그러던 제가 한 순간에 그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런 저를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다음날 아침, 전도사님과의 전화가 연결되었습니다. 저는 좋은 소식을 듣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잔뜩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전해 듣는 순간, 저는 마치 전기에라도 감전된 듯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여기저기 알아보신 전도사님의 오빠께서 병원의 책임자를 잘 안다며 소개해준 곳은 다름 아니라 바로 국립암센터였습니다. 그 병원으로 가면, 어떤 의사를 찾아가게 될지 뻔했습니다. 저는 일찍이 그 의사로부터 도저히 수술이 불가능하고 살 가능성도 거의 없다는 진단을 듣고서 완전히 절망한 바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나라에 흉부외가 의사가 한 두 명이 아닐 테고, 병원도 다른 좋은 곳이 많을 텐데, 하필이면 그 병원 그 의사란 말인가?”하는 원망과 한탄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깨달은 후, 오히려 그 절묘한 인도하심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주님을 향하던 눈을 잠시 세상으로 돌리자, 아예 이 병이 처음 시작되었던 원래의 자리로 데려다 놓으셨습니다. 그럼으로 제가 다시 한번 주님만이 이 병의 유일한 의사이심을 철저히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고 해놓고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던 속내를 들키고 나니, 너무도 부끄럽고 죄스러웠습니다.
그 날 밤, 목사님께 그동안 머리검사부터 수술에 이르기까지 천당과 지옥을 오갔던 일련의 일들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목사님의 답변은 매우 간단하고 명쾌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목소리가 좋아지고, 종양이 줄어든 것이 누가 해준 것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왜 갑자기 의사를 찾습니까? 하나님은 일을 시작하시면 당신이 직접 마무리하시지, 절대 중간에 남의 손을 빌리는 법이 없습니다.”
“그게……종양이 조금 남아 있는 것 같다고 해서요.”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지금까지 치료해주신 것처럼 나머지도 낫게 해주시면 될 것 아닙니까? 시간이 조금 걸리면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매일 이길 힘만 주시면 됩니다. 바울선생도 늘 몸에 병을 달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박선생 자신보다 더 박선생을 잘 아십니다. 아직 의심스러운 부분을 남겨 둔 것도, 다 하나님이 생각하는 바가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단숨에 치료해주시기를 기대하며 조급증을 냈던 자신이 너무도 창피했습니다. 인간인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때’를 알 수 있겠습니까? 또 수술이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는 의사의 한마디에, 그동안 치료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세상의 힘으로 해보겠다고 난리를 쳤으니, 정말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 날 밤 저는 믿음이 적은 것을 주님 앞에 회개하고, 또다시 하나님만 바라보기로 다짐했습니다. 도대체 몇 번째 하는 다짐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역시 믿음에는 완성이 날이 없었습니다. 매일 도전 받고 극복하는 중에 끊임없이 성장시켜야하는 생명체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4:10)
의사들과 다시 만나기로 한 날이 가까워질 무렵, 저와 아내는 느닷없는 재물시험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발병한 뒤, 저희는 모든 수입에 대해 정확히 십일조를 지켰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축복 받을 그릇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십일조가 조금도 아깝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형제들의 공동명의로 되어있는 건물이 갑자기 팔려서 목돈이 조금 생겨났습니다. 이 건물은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것이었습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재물을 얻은 저희는, “할렐루야! 하나님이 이제는 건강에 이어서 물질까지 축복을 해주셨다.”며 함께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십일조에 관해서는 의견을 달리했습니다. 아내는 무조건 해야 한다고 했지만, 저는 반대했습니다,
“당신도 알겠지만, 내가 번 돈이면 조금도 아낌없이 할 거야. 그런데 여기에는 돌아가신 부모님의 땀이 배어있어. 난 도저히 못하겠어.”
“부모님이 주셨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셨다고 생각해야 해요.”
“당신 말이 맞다고 해. 그래도 이것은 원래 우리가 소유하고 있던 부동산이 현금으로 바뀐 거야. 그래도 십일조를 해야 한단 말이야? 새로운 수입이 아니잖아?”
“글쎄. 그건 또 그렇네요.”
“그러니 좀더 생각해보기로 합시다.”
저희는 이렇게 한동안 설왕설래하며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거기에다 참고로 들어본 신앙인들의 십일조 관념이 제각각이어서 더욱 헷갈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문득 마치 이 문제에 대해 결론짓듯이 말했습니다.
“여보, 이성적으로 복잡하게 생각하지 맙시다. 어떤 명목으로든 하나님께 많이 드리면 좋은 것 아닌가요? 지금 이렇게 나은 것만 해도 얼마나 큰 은혜예요? 하물며 우리의 모든 것이 어차피 다 하나님 거잖아요?”
아내의 말을 듣는 동안, 그동안 나를 주저하게 했던 모든 것들이 나도 모르게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아내의 말이 다 옳았습니다. 특히 나를 살려주신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귀히 여긴다면, 그것은 정말 도리가 아니었습니다. 곧바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그동안 계속 찜찜했던 마음이 봄눈 녹듯이 깨끗이 사라지고, 대신 주님께 한 걸음 더 나아갔다는 기쁨이 몰려왔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15:7)
의사들과의 약속 날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저를 진료해준 네 분의 의사들이 그동안의 경과와 지난주의 검사결과를 토대로 다음처럼 말씀하셨습니다.
“PET검사가 매우 정확하기는 한데, 너무 민감해서 이미 죽은 것이 산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저희가 의심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뭐라고 결론을 내리기가 참 어렵습니다. 일정기간 후에 다시 CT촬영을 한 다음, 크기를 비교해서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크기에 변화가 없으면, 껍데기만 남고 실제로는 다 죽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살아있다고 의심되는 부분이 임파선 쪽입니다. 임파선으로 전이가 되면 매우 위험합니다. 그러니 안전하게 가기 위해서, 다음 번 CT를 찍기 전까지 항암제를 맞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순간, 의사 네 분의 눈이 모두 나를 향했습니다. 지난 3월에 항암제를 거부한지 삼 개월 만에, 저는 또다시 하나님과 의학 중 택일이라는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잠시 멈칫했던 저는, 자신도 모르게 다음처럼 말했습니다. “저는 선생님들이 의심하고 있는 부분이 이미 하나님의 치료로 다 죽었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항암제는 맞지 않겠습니다.” 한 분이 안타까운 듯이 물었습니다. “혹시 개인적으로 드시는 약이라도 있나요?” “아닙니다. 저는 민간요법도 하지 않습니다. 오직 매일 교회에 가서 기도할 뿐입니다. 교회에는 저와 같이 해서 승리한 분들이 많습니다.” 고맙게 그 분들도 “그렇지요. 자신의 믿음이 가장 중요하지요.”라고 동조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표정에서 금방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아무튼 그분들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치료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미안했지만, 더 이상 하나님께 죄송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다음 CT촬영 예약을 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방금 항암제를 권했던 선생님이 내게 달려와서, 저를 안심시키듯이 말했습니다. “항암제를 맞지 않는다고 해서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지금까지 너무 잘해왔습니다. 지금처럼만 잘 유지하십시오.” 나는 그 분의 팔을 붙들고, “이렇게 격려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는 승리를 확신합니다.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 후 카페에 앉아서 함께 동행해준 선배교수님에게 방금 일들을 얘기해 주었습니다. 그 분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분인데도, 그동안 치료해주신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기를 백 번 잘했다고 말했습니다. 문득 이번 일이 하나님의 저를 향하신 마지막 믿음시험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시험을 통과했다고 생각하니, 생전 처음의 뿌듯함이 밀려왔습니다. “‘내가 주안에 주가 내 안에’라는 말씀이 이제야 실현된 거야. 하나님과 일체가 되었어.”라는 생각과 함께 “이제 이 병을 완전히 이겼다.”라는 확신도 들었습니다. 할렐루야!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6)”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푹 안겼다는 느낌, 너무도 편하고 좋았습니다. 비록 의사들은 아직 의심쩍어했지만, 저는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걱정해준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음을 알려주며 주님의 영광을 선포했습니다. 지난 9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꾸어왔던 ‘꿈같은 꿈’이 현실로 구현되었습니다.
오랜만에 찾아간 연구실은 한없는 감격으로 저를 기다려 주었습니다. 9개월 전 진단을 받고서 간단히 짐을 챙겨 떠날 때만해도, 저를 비롯한 모든 동료들은 그것이 마지막이라고 여겼었습니다. 그 때의 주체할 수 없었던 슬픔과 끝이 안보이던 절망감을 떠올리자, 다시 한번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에 온 몸이 뜨거워졌습니다. 그 사랑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 서 또 본인이 그렇게 좋으신 하나님을 직접 믿고 기적을 체험하라고, 학교에서 만나는 분들에게 하나님을 증거 하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동안 매일 머리로만 써왔던 간증문을 실제 글로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간증문과 관련하여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간증문을 제가 쓰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저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간증문이 언제 어떻게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지도 하나님만 아셨습니다. 그래서 새로 시작한 사십일 작정기도에서 매일 다음처럼 기도했습니다.
“아버지, 전혀 믿음이 없던 저에게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으로 지금까지 승리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버지, 이제 그 길고도 험했던 영적 전쟁의 마지막 구간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아버지 이 순간에도 믿음과 힘을 주셔서, 다음 검사 때 의사들의 의심이 완전히 불식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여주옵소서. 그것으로 이 간증문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제가 당당히 세상에 걸어 나가 하나님의 완벽한 승리를 선포할 수 있게 하여주옵소서. 아멘!“
이렇게 매일 기도하던 어느 날, 문득 그동안 치료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또 의사들이 의심하고 있는 마지막 결박을 풀기 위해서 금식기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발병 이후에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를 해주신 박진순전도사님께 말씀드렸더니, 빙그레 웃으시며 “사실 진작 나한테 그런 생각이 찾아왔는데, 본인이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영의 세계가 하나로 통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아마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이 웬 금식기도냐며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무엇보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6)”
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감사한 것은, 지난 9개월 동안 나 때문에 무척 지친 아내와 연로하신 장모님도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에 동참하였습니다. 무더위가 한참 기승을 부릴 때였지만, 저희는 감사함으로 육신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올려드렸고, 이 금식기도를 통해 모든 흉악의 결박이 다 풀리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 드렸습니다.
“네 믿은 대로 될찌어다.”(마8:18)
하나님의 은혜로 열흘간의 금식기도와 같은 기간 동안의 보호식을 무사히 잘 마친 뒤, 병원 검사 날이 다가왔습니다. 아무리 담대 하려고 애써도 조금 불안했습니다. 꿈에 한동안 안보이던 마귀가 다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가족예배 때, 평소에는 잠잠하던 늦둥이가 전에 없이 떼를 쓰며 예배를 방해했습니다. 큰애도 예배시간이 길어서 학교에 늦는다는 듯한 불만의 표정을 지었습니다. 저와 아내는 이 모든 것이 마귀의 역사라고 단정 지었습니다.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기려고 하니까, 마귀가 그것을 미리 알고 훼방하고 설치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에 맞서서 저희도 겟세마네기도회에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또 신기한 것은 검사 전날, 다음날 검사 사실을 전혀 모르는 박진순전도사님이 그날따라 지난 열 달 가운데 가장 뜨거운 기도를 해주셨습니다. 갈수록 영의 세계가 신묘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검사를 받고 난 며칠 뒤 결과를 듣기 위해 병원에 갔습니다. 어쩌면 ‘운명적인’이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날이었습니다. 발병한 이후 줄곧 병원에 갈 때마다 기사노릇을 자청해주신 선배교수님이 이번에도 동행해주었습니다.
호흡기내과 진료실에 들어서는 순간 눈에 들어온 의사선생님의 환한 표정으로부터, 더없이 크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영광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지난 번 사진과 모양이 똑같습니다.
속은 다 죽고 껍데기만 남았다는 얘기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역시 신실하신 분이셨습니다. “네 믿은 대로 될찌어다.”(마8:18) 라는 약속을 끝내 지켜주셨습니다.
방사선과 선생님은 두 번씩이나 항암제를 거부하고도 이와 같은 결과가 나온 것에 대해 매우 의아해 하며, 혹시 그동안 개인적으로 복용한 약이 있냐고 물으셨습니다.
“아니요, 다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기도했을 뿐 입니다. 그랬더니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마음의 평안을 주셨고 치료해주셨습니다.”
오 나의 아버지! 저는 하나님으로부터 이처럼 큰 은총을 입기에 너무도 부족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기적을 베풀어주신 것은, 아마도 지난 10개월 동안 주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던 그 모습을 기특하게 여겨주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 연출의 ‘믿음 드라마’
지난 10개월은 그야말로 생사를 넘나드는 인생 최대의 고난기였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라는 말씀을 몸소 체험하는 엄청난 축복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저를 위해 특별히 준비하신 한 편의 ‘믿음 드라마’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존귀하신 연출자 하나님께서 때로는 말씀으로, 때로는 꿈으로, 때로는 목사님을 비롯한 소중한 등장인물들을 통해 저의 믿음을 키워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순간을, 하루를 이기며 나아가 결국 최종승리를 얻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은총은 저에게만 주어질까요?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믿었고 주님의 말씀보다 세상을 더 탐닉했던 저에게도 이러한 기적이 임한 것을 보면, 이 세상의 어느 누구나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담으로 기도원에 개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이 개는 자기 집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꼭 집 밖에서 눈비를 맞으며 추위에 떨었습니다. 한 발자국만 움직여 집으로 들어가면, 따뜻함과 안락함을 누릴 수 있었지만, 늘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개를 보고 전도사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저 개는 지금 혹시 ‘아! 날씨가 왜 이렇게 궂어서 춥고 힘든 거야?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고달프지’하고 탄식하고 있지 않을까요?” 지금 혹시 저 개처럼 어리석게 살고 있지는 않나요?
불가항력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 가장 먼저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매달리십시오. 주저앉아 있으면, 안타까워 안달이 나신 하나님께서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동시에 무조건 말씀에 순종해야지, ‘내가복음’식으로 대충 순종하지 마십시오. 또 지난 잘못들도 철저히 회개하십시오. 다음으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그 분은 이 세상의 창조주로서 지금 직면하고 있는 어떤 문제도 해결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십자가 앞에 문제를 가지고 나왔으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4:6-7)
라는 말씀처럼, 마치 산 위에서 바위를 굴려버리듯이 모든 문제를 철저히 하나님께 다 맡겨버리고, 그저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며, 늘 기도하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온전한 믿음입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역대하16:9)
라는 말씀처럼, 혹시라도 인간적인 방법에 미련을 두면, 하나님은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해보렴.”하고 가만히 지켜만 보십시오. 반면에 세상에서 의지하던 모든 것들을 완전히 내려놓고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볼 때, 하나님께서 바로 역사하십니다. 인간적인 방법에 연연할수록 문제해결의 시간만 길어집니다. 어렵더라도 “죽으면 죽으리라”, “죽으면 천국밖에 더 가나?”하는 담대한 믿음으로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은 이러한 믿음을 절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마지막으로, 성령 충만한 믿음의 용사들에게 포위되십시오.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의 아내는 제가 진단을 받고 난 뒤에 전혀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평소와 다름없이 파마를 하러 가고, 저를 데리고 김치냉장고를 사러 가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제 자동차가 오래되었으니 새로 구입하자고 조르기도 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차치하고, 크리스천조차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큰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내는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하심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기에 그처럼 담대했습니다. 때로 제가 의사들의 절망적인 말에 낙심하고 있으면, 자기 병도 못 고치는 의사 말에 신경 쓰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만 바라보라고 충고했습니다. 24시간을 함께 하는 아내의 이처럼 견고한 믿음은, 저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었습니다.
아내 말고, 교구담당 박진순전도사님은, “암,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기도하면 없어져!”하며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김정숙집사님은 겟세마네 기도회에서 만날 때마다, 환한 미소와 함께 약간 흥분된 목소리로, “다 나았어요!”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어느 집사님은 한 술 더 떠서, “고난은 축복의 통로인 것 아시죠? 저는 집사님 가정에 앞으로 무슨 축복이 쏟아질 지 매우 궁금해요.”라고 말했습니다. 유일한 치료인 방사선 치료를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되어 낙심할 때, 한 자매님은 “오히려 잘됐네요, 그런 것 몸만 상해요. 그냥 기도로 나으세요.”라고 격려하기도 했습니다. 목사님은 아예 나은 후를 염려하시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하면 박선생 병은 반드시 났습니다. 그건 어렵지 않아요. 오히려 그 후에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생각과 말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자꾸 반복해서 듣는 가운데, 차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분들의 믿음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으로 내 생각이 씻겨지고,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고, 어둠이 빛으로 변하고, 믿음이 쑥쑥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분들의 밝고 자신에 찬 표정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아무리 큰 환난도 작게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용사들은, 환난 극복에 절대적인 도움을 줍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한나님..